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5장

2021.10.31 02:0110.31

풀이 죽어 있던 동준은 다음 날 금방 기운을 차렸다.

 

 

누나!

 

 

완전히 떠나 돌아 올 것 같지 않았던 누나가 집 앞에 서있었다. 준이가 반가운 마음에 달려든다. 웃으며 동준을 반기던 그녀에게로 준이 엄마가 놀란 토끼눈을 하며 선다.

 

 

준아, 이리와!

 

 

떼를 마구 쓰는 동준이를 떼어 놓고서 엄마는 손가락을 치켜 허공을 찔러대었다.

 

 

당신, 왜 이곳에 오는 거야.

경찰을 부를 줄 알아.

대체 정체가 뭐야.

 

 

쉴 세 없이 쏘아 붙이는 준이의 엄마를 향해 누나가 꾸벅 허리를 숙인다. 땅으로 고개를 박고서 꿈쩍도 않는다. 누나의 돌발 행동에 엄마는 당황하여 그녀를 돌려보내려 갖은 애를 썼다. 달래기도 하고, 겁박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면서. 아침이 지나는 오후의 햇살 속에서도 누나는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할머니가 늘 같은 시간에 맞추어 외출을 나간다. 할머니가 우뚝 누나의 곁에 서나 누나는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누나, 왜 그래?

 

 

동준이가 물어도 대답을 않는다. 그저 그곳에서 망부석이 되어 한없이 여름을 받아내고 있었다. 할머니와 엄마가 모두 떠난 후에도 누나는 허리를 굽힌 그 자세 그대로 고집을 부리었다.

 

 

그래서, 저 여자가 인어라고?

 

 

응.

 

 

맞은편 담장에 숨어 하람이와 은령이가 까치발을 든다. 동준은 두 아이가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을 거라 생각하였다. 멀쩡하게 보이는 사람이 인어라니. 그런 준이는 가슴 한켠으로 바랐다. 얘들아 믿어줘. 그런 준이의 작은 바람이 마음을 기울였는지 은령이는 손으로 만든 쌍안경을 쓴 채 말하였다.

 

 

그래, 믿어줄게!

 

 

기운 찬 그녀의 대답에 동준은 마음이 놓였다.

 

 

그렇지 하람아?

 

 

은령이가 손 쌍안경으로 하람이를 비춘다. 담장에 턱을 괸 하람이는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거나 제 자신의 성에 차지 않은 탓일 것이다. 만족스러운 얼굴은 아니었지만 담장에서 떨어져 말한다.

 

 

좋아, 하지만.

 

 

작은 뿔테 안경을 치켜 올리고 자신의 계획을 말한다.

 

 

저 누나가 인어라는 증거가 필요해.

 

 

증거?

 

 

은령이와 동준이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동준은 손을 번쩍 들어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바다 속에서 자신을 구해준 누나 그리고 온 몸이 젖은 채 자신을 찾아온 첫 만남. 누나의 눈동자와 까만 머릿결 같은 것들. 하람이가 누구의 집과 이름을 말하며 계획을 세운다. 그의 열의에, 동준이는 잠자코 인어 누나의 증거 찾기 작전을 듣기로 하였다.

 

 

인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있어.

 

 

아.

 

 

은령이가 아는 눈치를 보인다.

 

 

기순 할머니에게 가면 뭔가 알 수 있을 거야.

 

 

와아, 우리 할머니야!

 

 

영이의 할머니는 옛 이야기를 많이 아시거든.

 

 

아이들이 곧장 은령이의 할머니 댁으로 달려간다.

 

 

잠깐, 얘들아.

 

 

준이가 앞서 달려가는 둘을 잡았다. 동준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오래도록 자신에게 숨겨왔던 아빠와 엄마의 비밀. 누나와 할아버지의 비밀. 어쩌면 평생에 걸쳐 할아버지가 쌓아 온 비밀들을, 동준은 알고 싶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옛 시절을 자기 전 들려주시던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으니까.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말을 전하지 못했으니까. 제대로 된 작별도 나누지 못했으니까. 동준은 할아버지를 알고 싶었다. 신비한 이야기를 해주시던 그를 준이는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나는 우리 할아버지에 대해 조사해볼게.

 

 

하람이와 은령이가 달려가는 것을 멈추고 준이를 뒤돌아본다. 서로를 보다 은령이가 소리쳐 물었다.

 

 

혼자서 괜찮겠어?

 

 

응!

 

 

은령이의 걱정에 준이는 큰 목소리로 자신 있게 답하였다. 동준이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은령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하람이를 끌어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동준이는 혼자 남겨졌다. 자신의 집 앞에선 여전히 허리를 구부리고 잘못을 비는 누나가 보였다. 어제 그 일을 사죄하는 건지, 다른 어떤 일로 사죄하는 건지. 동준은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더 할아버지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준이는 높이 고개를 들었다.

 

 

날아가자, 우주맨-.

멀리, 멀리 날아서,

악당들을 물리치자-.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용기를 얻으며 동준은 마을을 돌아다녔다. 자신의 할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을 찾기 위해 팔을 뻗어 하늘로 달려갔다.

 

 

 

 

은령이와 하람이는 영이의 할머니 댁으로 걸어갔다. 쓰지 않는 낚싯대로 여름을 두드리며 걸어갔다.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난 둘은 자유롭게 어느 집이든 들어가고 나올 수 있었다. 단 기순 할머니의 서재만큼은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은령이네 할머니 집은 하얗고 옅은 조개껍질 색을 띤 작은 회벽 주택이었다. 둘이 집의 옆 길목으로 목을 빼어 눈을 부라렸다. 둘의 목적은 집 뒤편의 서재에 있었다.

 

 

이 녀석들아, 무슨 장난을 치려는 게야!

 

 

지욱 삼촌이 그물을 어깨에 메고서 커다란 몸을 부풀린다. 하람이는 겁을 먹어 꼿꼿이 굳어버리지만 이미 삼촌의 장난에 익숙해진 은령이는 심드렁한 얼굴로 반길 뿐이었다.

 

 

할머니는 어디 있어?

 

 

기순 할망구는 글쎄다.

어디 절벽쯤에서 다이빙이나 하고 있겠지.

 

 

으.

 

 

엉뚱하고 되도 않는 말에 은령이는 혀를 빼어 질색을 하였다.

 

 

하, 하, 하, 하, 핫!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가슴을 편다. 지욱 삼촌의 정강이로 은령이가 다리를 휘두르나 삼촌의 커다란 손에 막혀 허공에 그친다.

 

 

그래서, 꾸러기들이 여기에 무슨 일일까.

 

 

저기, 인어에 대해 알고 싶어서....

 

 

하람이가 우물쭈물 입을 연다. 지욱 삼촌이 갈빛으로 그을린 얼굴을 쓰다듬으며 저 혼자 킬킬거린다.

 

 

그래, 인어 말이지.

상혁 할아범이 인어와 잤다는 건 아니?

 

 

이런. 하람이는 혼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또 그 바보 같은 소문이다. 12살의 나이가 저런 빤한 거짓말에 쉽게 속을 줄 알고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엄청난 실례이다. 지금도 하람이는 듣는 둥 마는 둥 한 귀를 활짝 열어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인어의 자식들이 마을에 숨어...

 

 

안 믿어 이 바보야!

 

 

은령이의 발길질이 연신 붕붕 휘둘러지고 있다.

 

 

뭐, 이 꼬맹이가.

 

 

잠깐 방심한 틈을 지욱 삼촌의 손에서 벗어난 은령이가 힘껏 정강이를 걷어찬다.

 

 

아얏!

 

 

은령이가 당돌한 말투로 받아쳤다.

 

 

제대로 된 걸 알려줘, 당장!

 

 

지욱 삼촌은 정강이를 문지르며 은령이의 이마로 꿀밤을 가볍게 때려주었다.

 

 

이 녀석.

 

 

앗, 이쒸!

 

 

영이가 지지 않고 달려들자 지욱 삼촌은 은령이를 붙들고서 하람이에게로 말하였다.

 

 

미안하지만 나도 아는 게 없구나.

기순 할망구라면 알 텐데.

절벽에서 많이 바쁜가봐.

 

 

네에.

 

 

시무룩한 얼굴의 하람이가 측은하였는지 지욱 삼촌이 바지를 털고 일어나 서재 창고를 가리켰다.

 

 

아무튼 저기에 볼일이 있다는 거지?

 

 

하람이가 눈을 반짝였다.

 

 

네!

 

 

바보, 바로 알려줬어야지!

 

 

또다시 발길질을 하는 은령이를 번쩍 안아들고서 지욱 삼촌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셋이 함께 조개껍데기 색의 집을 지나 뒤편 서재로 간다. 플라스틱 문을 흔들며 열쇠를 꽂아 돌린다.

 

 

그 할망구가 알면 뭐라 하겠지만.

뭐 어때.

대신 얌전히 뒤져야 해.

 

 

네, 감사합니다!

 

 

지욱 삼촌이 가자 얇은 창고 문이 하람이와 은령이를 반기었다. 둘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어느 집이든 친절히 대해주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단, 기순 할머니의 서재를 빼고. 할머니가 들어가면 안 된다고 엄포를 놓은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니었다. 하람이가 긴장한 얼굴로 은령이를 본다. 그 용감한 은령이도 조금이지만 떨고 있다. 서재가 가지고 있는 공포는 저 문 뒤에 있다. 숨죽이고서 방문자를 기다리고 있다. 하람이는 숨을 고르고서 한 쪽 문을 잡았다. 하람이를 따라 은령이도 다른 쪽 문을 잡아 함께 열어젖힐 준비를 한다.

 

 

하나, 둘!

 

 

하람이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큰 소리로 기합을 내었다. 은령이도 함께 큰 소리로 하람이를 따라 기합을 내었다.

 

 

셋!

 

 

은령이와 하람이. 두 아이가 동시에 문을 열어젖힌다. 문 너머 까만 뱃속으로 늘어진 거미줄이 날리고 기다란 노래기들이 기어 다닌다.

 

 

윽.

 

 

둘은 사색이 되어 침을 꿀꺽 삼키었다.

 

 

 

 

동준은 할 일없이 마을을 뱅뱅 돌며 매미울음과 만에서 오는 파도에 귀 기울였다. 바다마을의 할아버지들이 한데 모여 마당에 상판을 깔아 웅성거리었다. 동준은 할아버지들의 등 뒤로 슬그머니 다가가 귀를 바짝 붙여 보았다.

 

 

그래, 내가 그랬다니까.

 

 

자네가 뭘 해!

 

 

할아버지들 근처로 다가간 준이는 코를 막았다. 삭힌 생선내와 차가운 막걸리 냄새가 사방으로 뻗쳐 지독하였다. 저들끼리 술잔을 들고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고 서로의 얼굴로 삿대질을 하였다. 동준은 뒤로 주춤 물러난다. 겁을 먹은 그는 살며시 꽁지를 빼려 하였지만.

 

 

저기 봐, 숙이 할망구의 손자 아녀.

 

 

이야, 다 컸네.

 

 

뭐하러, 온 게야, 심심해?

 

 

네?

 

 

갑작스러운 질문의 홍수 속에서, 할아버지들의 환대와 어지러운 술 냄새에서, 동준은 바지춤을 주먹으로 꼭 쥐고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녕하세요.

 

 

이야, 인자 어른이다, 어른!

 

 

나중에 장가가라.

 

 

할망구는 잘 지내더냐?

 

 

할아버지들이 끊임없이 물어오는 통에 동준은 제대로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저, 저기. 할아버지에 대해 물어야 한다. 긴장을 해 입술이 아려온다. 준이는 눈을 꼭 감았다.

 

 

커흠!

 

 

노인들 틈 사이, 척 보기에 인상이 궂은 할아버지 하나가 헛기침을 하였다. 그는 엄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애 하나 두고 뭔 말들을 하는가.

숙이 할망구한테나 가라!

 

 

그 할아버지는 유독 동준이를 노려보고서 볼멘소리를 하였다.

 

 

함부로 나돌아다니다간 다리가 분질러질 테니까.

 

 

덜컥. 동준은 다리를 오므려 힘을 주었다. 남들 앞에서 실례를 하는 건 아기 때로 충분하다. 고개를 푹 숙이고서 눈꺼풀에 안간힘을 준다. 남들 앞에서 우는 건 아기 때로 충분하다. 할아버지들이 미안한지 그 노인을 향해 면박을 주었지만 준이는 그 목소리들마저 들리지 않았다. 울음을 참는 동준이의 곁으로 돋보기안경을 쓴 할아버지 하나가 걸어와 무릎을 구부려 주었다.

 

 

으이구, 경억이 녀석이 질투가 나서 그런 거다, 괜찮니?

 

 

훌쩍인다. 동준은 울먹이는 목소리를 들려드리기 싫어 고개만 끄덕였다.

 

 

옳지, 사내애가 용감도 하구나.

이리 온.

 

 

안경을 쓴 할아버지가 동준이를 손에 잡고서 끈다. 둘은 바다를 옆에 두고서 나란히 골목을 걸었다. 골목들은 하얗고 햇살들이 부서져 반짝거렸다.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가던 준이는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주위를 둘러보며 마을 풍경을 감상하였다.

 

 

할아버지.

 

 

응?

 

 

동준이는 가슴으로 손을 올렸다. 조금 전 노인들로 북적이던 가슴이 조용한 골목들에 기대어져 차분히 들썩인다. 철썩. 들썩인다.

 

 

우리 할아버지를 알아요?

 

 

그럼.

 

 

진짜요?

 

 

동준은 눈이 동그래져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그제서야 준이는 자신의 손을 잡은 초록색 체크무늬와 점잖이 걸치어진 갈색 조끼를 볼 수 있었다.

 

 

네 할아버지인 상혁이는 말이야.

우리의 좋은 친구였지.

 

 

친구요?

 

 

동준은 할아버지의 곁으로 콩콩 뛰며 눈을 반짝였다.

 

 

그럼, 좋은 사이였지.

경억이 그 녀석하고 셋이서 자주 놀러 간단다.

 

 

엄한 목소리로 겁을 주던 그. 동준은 더 물어볼 것이 있어 방방 뛰어다녔다.

 

 

그럼, 그러면.....

 

 

자, 다 왔다.

 

 

둘은 마을에 하나 남은 작은 파출소로 도착하였다. 파출소의 하얀 유리문에 경찰로 보이는 여자가 껄렁이며 서있다.

 

 

지아야.

 

 

뭐요, 영감.

 

 

여경은 발로 피던 담배를 비벼 껐다. 그녀가 둘에게로 온다. 담배냄새가 지독하게 풍겨 동준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이 애 좀 맡아줘.

 

 

경억 할배는?

 

 

그러니까 좀 맡아줘.

 

 

아, 귀찮게.

 

 

지아는 머리를 세차게 벅벅 긁으며 귀찮은 투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부탁한다.

 

 

아앙?

어디 가요!

 

 

지아가 버럭버럭 대들어보지만 할아버지는 얌전히 가던 길을 되짚으며 돌아갈 뿐이었다. 동준은 할아버지를 뒤따라 몸을 돌렸다. 누군가 목덜미를 홱 잡아챈다. 지아가 준이의 목덜미를 잡고서 얼굴을 구기었다. 동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잡아먹지 말아요. 도망가고 싶었다.

 

 

후.

 

 

연신 숨을 푹푹 쉬던 그녀가 준이의 얼굴을 마주보고서 짤막하게 물었다.

 

 

누구?

 

 

네?

 

 

누구냐고?

 

 

동준, 박동준.

 

 

반말?

 

 

아니요.....

 

 

동준, 박동준이라.

 

 

곰곰이 턱을 쓸던 지아가 발을 까딱거리며 물어본다.

 

 

그 노인네 손자냐?

그 인어의 집?

 

 

네?

 

 

됐어, 그래서?

 

 

네?

 

 

지아가 머리를 짚는다.

 

 

너는 네라고만 할 줄 아는 인형이냐?

이제, 뭐 할 거냐고?

 

 

우리 할아버지에 대해 알아야 해요. 인어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죽어야 했는지, 그 인어 누나가 집으로 찾아와 사과를 해야 했는지. 하지만 동준은 그 중 어떤 질문도 할 수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준이의 몸을 지아가 잡아, 들어올린다.

 

 

아.

 

 

비명을 내기도 채 파출소에 있던 자전거의 짐칸에 실린다. 지아가 페달로 발을 올리고 담배를 물어 불을 피운다.

 

 

가자, 박똥준.

 

 

박동준이에요.

 

 

누가 뭐래나.

 

 

심드렁한 말투로 건성건성 움직이는 그녀는 준이를 자전거에 태워 페달을 밟았다. 중심을 잡던 동준이는 덜컥이는 자전거로 몸이 휘청거렸다. 지아가 뒤를 슬쩍 보고 경고한다.

 

 

뭐라도 붙잡는 게 좋을걸.

 

 

동준은 묵묵히 풍경만 고집스럽게 보았다. 할아버지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그 안경 쓴 할아버지가 무언가를 아는데. 그런 준이를 두고 지아는 일부러 자갈을 밟고 지나갔다. 자전거가 크게 덜컹거리고 만다. 그만 중심을 잡지 못하던 동준은 지아 누나의 허리를 덥석 잡고 만다.

 

 

지아 누나가 말없이 페달을 밟는다. 자전거는 연신 녹이 슨 삐걱 소리를 내며 언덕과 골목을 오른다.

 

 

어디 가는데요?

 

 

준이가 묻는다.

 

 

어디 가고 싶은데?

 

 

지아 누나가 되묻는다.

 

 

몰라요.

 

 

동준은 심술이 났다. 정말 그 할아버지가 무언가를 아는지 모르지만, 준이에겐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지아 누나는 그런 동준이를 싣고서 마을의 끝자락, 바다가 철썩이고 마을이 높게 자란 언덕들을 높게, 높게 올랐다. 산을 따라 경사가 오르는 길목으로 지아는 안장에서 일어나 자전거를 몰았다.

 

 

후우, 후우.

 

 

그런 세찬 숨소리도 내며.

 

 

끼룩, 끼룩.

 

 

그런 갈매 소리도 내며.

 

 

끼익, 끼익.

 

 

그런 녹슨 기어 소리도 내며.

 

 

어디로 가는 거예요?

 

 

동준이의 심드렁한 물음에 지아는 잠자코 앞을 보았다.

 

 

너, 시골 별로 좋아하지 않지?

너 같은 꼬마 애들한테는 지루한 곳이니까.

 

 

무슨 그런 실례되는 말을. 동준은 속으로 곱씹었다. 누나에게 인어 이야기도 해야 할까. 고민에 빠졌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아직도 그 인어 누나는 집 앞에 있을까.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박고서 아무도 찾지 않는 용서를 구하고 있을까. 동준이는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다 왔다, 도착!

 

 

두 사람이 땅에 선다. 깎아 지르는 절벽이 마을과 산 아래로 가득 펼쳐지고 수평선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아득한 높이로 바다가 반짝이고 넘실댄다. 동준은 작게 감탄하였다.

 

 

와.

 

 

지아 누나는 엷게 웃으며 자전거를 세웠다.

 

 

예쁘지?

 

 

네.

 

 

준이는 여태껏 여름휴가를 오며 이곳을 들르지 못했다. 늘 할아버지, 할머니 집이나 그 근처에서만 놀았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도시 애들은 이런 거 몰라.

 

 

뾰로통해진다. 입술을 죽 빼었지만 동준이는 반박하지 못했다. 사실이었으니까. 늘 때를 쓰고 도시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으니까. 조금은, 아주 조금 정도는 준이의 그런 마음도 바뀔 것 같다.

 

 

그래서, 이거 보여주려고 온 거예요?

 

 

지아 누나는 얼굴을 온통 구기며 준이의 이마에 꿀밤을 때렸다.

 

 

아얏!

 

 

이거라니, 고작 이거라니!

 

 

꿀밤은 눈앞이 깜빡 정전이 될 정도로 따끔했다. 동준은 이마를 문지르며 눈물을 그렁거렸다. 지아 누나는 동준이의 등 뒤를 억지로 밀며 기지개를 피었다.

 

 

넌 벌로 주위에 있는 풍경을 전부.

전부 다 담도록 해!

 

 

지아 누나는 ‘전부’라는 단어에 있는 힘을 쥐어 짜 말하였다. 등을 떠밀린 동준을 두고서 지아 누나는 잘 깔린 잔디 들판으로 누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동준이가 소리쳐 물었다.

 

 

누나는 그럼 뭐하는 데요?

 

 

농땡이!

 

 

같이 소리쳐 답해주며 손을 살래살래 저었다. 저리 가라는 누나의 손짓을 따라 동준은 마을의 바다 절벽 위를 노닐었다. 비릿하고 짭조름한 냄새 위를 걸으며 냉이며, 쑥, 들꽃들을 해친다. 바다를 품어 우뚝 솟은 절벽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바닷바람이 그대로 불어와 추웠다. 동준이는 바람이 들지 않는 곳으로 몸을 구부려 숨어 다녔다.

 

 

앗, 따가!

 

 

높게 오른 돼지풀의 가시에 찔려 팔과 다리를 턴다.

 

 

힝.

 

 

다친 모습을 보란 듯 보여주고 싶었던 동준이가 우는 소리를 하며 일어났지만. 지아 누나는 세상모르게 들판으로 누워 잠에 들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절경이 무색하게 동준이의 볼은 힘과 기운이 빠져 푹 꺼지고 말았다.

 

 

이게, 뭐야.

 

 

다 엉터리야. 풀이 죽고, 짜증이 난 동준은 풀과 자갈들을 발로 차며 멋대로 휘젓고 다니었다. 자갈과 풀무더기에 맞은 흙더미가 절벽 아래로 쏟아진다. 파도의 거친 발길질과 갈매의 날갯짓으로 동준은 빼꼼 고개를 빼어 보았다. 절벽의 끝으로 파도가 치는 절벽을 구경하였다. 어린 동준은 금방 짜증을 잊고서 입을 벌리었다. 더 자세히 보고 싶다. 더 가까이 보고 싶다. 파도가 절벽으로 발을 차 산산이 부서지고 쏟아진다.

 

 

우와.

 

 

더 보고 싶던 준이는 몸을 기울였다.

 

 

아.

 

 

몸이 기운다. 지아 누나의 자전거를 탈 때처럼, 중심을 잃는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동준이는 눈을 떡 벌린 채 그대로 굳어버린다.

 

 

탁.

 

 

목덜미가 잡아 차인다. 절벽으로 떨어질 뻔 했던 자신을 구해준 사람. 그 사람이 동준이의 셔츠 덜미를 쥔 채 잡아 끌어 땅으로 놓는다. 멍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올리니. 동준이의 할머니가 우뚝 서있었다. 동준은 무서워서, 절벽에서 위험하게 논 것이 들켜 무서워서, 아무 말 없는 할머니의 그런 얼굴이 무서워서, 차디 찬 바닷바람이 앙칼지게 절벽을 깎는 것이 두려워서. 그만.

 

 

할아버지는 왜 죽은 거예요?

 

 

물어버리고 말았다. 그만 물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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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5 단편 위층 공주님 낮별 2021.11.03 0
2664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완 키미기미 2021.10.31 0
2663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10장 키미기미 2021.10.31 0
2662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9장 키미기미 2021.10.31 0
2661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8장 키미기미 2021.10.31 0
2660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7장 키미기미 2021.10.31 0
2659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6장 키미기미 2021.10.31 0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5장 키미기미 2021.10.3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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