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피감시자

2004.10.18 20:5710.18

나는 가끔 기억을 잠시 잊는 경우가 있다.

강의가 모두 끝나고, 나는 곧장 집으로 가기 위해 교문을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늘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는 나였지만, 오늘은 왠지 일찍 집에 가고 싶었다.
오후 6시. 땅으로 내려오는 황금빛 노을과 함께 서서히 저물어 가는 가을날의 도시. 나는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그 풍경을 뒤로한 채 버스를 탔다. 평소 같았으면 두세 대 정도는 그냥 지나가게 두고 한참 동안 그때의 분위기를 느끼고 나서야 겨우 탈 버스였다. 하지만 그날 나는 첫 번째로 온 버스를 탔다.
버스 카드를 판독기에 들이대자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오백 오십 원이 깎였다는 표시가 뜨고, 그 밑에 있는 잔액 표시란에는 사천 오십이라는 숫자가 나타났다. 나는 그것이 늘 맘에 들지 않는다. 카드를 판독기에 들이댈 때마다 괜히 감시를 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 내 카드가 읽히는 순간 저 지하의 검은 세력들의 모니터에 내가 있는 위치가 표시된다. 그러면 그들은 아침 등교 길에 버스에서 내린 뒤로 잠시 내버려두었던 나를 다시 추적하기 시작한다. 성능이 좋은 추적장치라서 그들은 내가 버스의 어떤 좌석에 앉아있는지, 혹은 그냥 서 있는지의 여부까지 알아낼 수 있다. 버스에서 내린 뒤에도 추적은 계속된다. 늘 내가 가는 길에는 어딘가에 감시 카메라가 숨어있다. 카메라도 역시 성능이 좋아서, 그들은 미세한 표정변화를 인식한 뒤에 그것을 통해 나의 기분이 좋은지 나쁜 지도 알아낼 수가 있다. 카메라가 갈 수 없는 곳은 거의 없지만, 가끔씩은 직접 요원이 지상으로 나와서 행인인 것처럼 위장을 하고 감시하는 경우도 있다. 나로서는 주위에서 걷는 사람들 중에 누가 그들인지 식별하기가 어렵다. 눈을 크게 뜨고 날 빤히 쳐다보며 걷는 사람들과 우연히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우선 의심을 해야 한다. 내가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들도 눈치를 채고 요원을 다른 사람으로 바꾼다. 대개 여자에서 남자로, 남자에서 여자로 바꾼다. 당연히 의상도 바뀐다. 그래서 도저히 알아차릴 수가 없다. 결국 나는 좋든 싫든 계속해서 감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게 사실일 리는 없지만, 가끔은 그런 나의 상상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정말로.
나는 뒤에서 세 번째 자리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았다. 버스를 지나보내면서 가을의 풍경을 감상하지 않는 대신 창을 통해 그것을 느껴보려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마음이 바뀌고 말았다. 버스의 창이 매연과 먼지 때문에 더러웠기 때문이다. 한동안 보다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버스 안의 사람들로 향했다. 내가 타는 곳이 종점 바로 다음 정류장이라서 그런지 승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뿐이었다. 여자는 더럽지 않은 쪽으로 창 밖을 보고 있어서 내 위치에서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두 명의 남자는 모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한 명은 여자와 같은 쪽 창을 응시했고, 다른 한 명은 피곤한지 고개를 숙이고 조는 것 같았다.
다음 정류장에 버스가 서자 서너 명의 승객이 추가로 올라탔다. 전부 고등학생들이었다. 다시 버스가 출발하려는 순간, 나는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의 진동을 느꼈다. 발신번호를 보니 집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규호냐?"
전화를 건 사람은 아버지였다.
"네, 아빠. 왜요?"
"지금 어디냐?"
"집에 가는 길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
"너... 오늘, 저기, 나 좀 보자."
"네?"
"나 좀 보자는 말이야."
"...네, 알았어요."
전화는 끊어졌다. 무슨 일일까? 궁금증은 물밀듯이 커지기 시작했다. 내 방 서랍에 있는, 내가 취미로 쓰던 삼류 소설들을 발견한 것일까? 아니면 싸구려 잡지들을? 아니, 아버지는 내가 없을 때 내 서랍을 뒤지거나 할 성격이 절대 아니다. 아무리 양부모라도 그런 일 때문에 이제 집에 올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알 수 없는 말을 남긴다는 것은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일까?
오늘따라 차가 많이 밀렸다. 평소 같았으면 지금쯤 절반 이상 와 있어야 하는데, 버스는 이제 막 삼분의 일 정도를 지나고 있었다. 이런 속도로는 삼십 분 정도는 족히 더 가야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라디오에서 교통 안내를 해주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어디에서 차량이 전복되어 운전사가 숨졌고, 어디에서는 삼중 추돌 사고가 났으며 그로 인해 상당한 교통 정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아나운서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추돌 사고가 난 곳은 바로 이 근처였다.
"...이 추돌 사고로 인해 차안에 탑승하고 있던 한 부부와 아이가 모두 숨졌다는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다행히 나머지 사고차량의 운전자는 부상을 입긴 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교통정보였습니다."
이어서 어처구니없는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마치 조금 전에 보도한 교통사고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우리 부모님도 그렇게 돌아가셨다.

어느 순간부터 버스는 속력을 올리기 시작했다. 총알버스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교통정체로 인한 서행을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운전기사는 가속페달을 있는 대로 밟아댔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 순간의 체감속도는 시속 이백 킬로미터는 충분히 넘어서는 것 같았다. 창 밖의 가로수가 빠르게 뒤로 달려갔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운전사에게 속력을 줄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는 내가 목이 터져라 외쳐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듣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했다. 이제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도저히 운전기사에게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소리만 질러댈 뿐이었다.
겨우 용기를 내어 일어섰다.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쥐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착각일까. 버스 안이 붉은 색깔의 톤으로 물들어 있는 것 같았다. 중간 정도까지 걸어갔을 때, 버스가 오른쪽으로 급커브를 틀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나는 아무런 준비 없이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커브가 끝나자 버스는 계속해서 속력을 높였다. 다시 일어서려고 손을 바닥에 짚다가 뭔가 이상한 느낌에 잠시 동작을 멈췄다. 등뒤를 누군가가 뚫어져라 쳐다보는 느낌. 나는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승객들이 하나같이 전부 나를 신기한 듯이 보고 있었다. 모두들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텅 빈 그들의 얼굴에 달려 있는 것은 오직 나를 쳐다보는 커다란 눈 하나 뿐이었다.

"아앗!"
버스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놀라 잠에서 깬 나는 심호흡을 하며 어느 정도 왔나 보기 위해 창 밖을 살폈다. 밖은 어두워져 있었고, 창에 비쳐 보이는 내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집까지는 아직 세 정류장 정도 남아 있었다. 얼마 안 되는 거리지만, 방금 악몽에서 깨어난 나에게는 그것이 상당히 멀게 느껴졌다. 갑자기 아버지와 있었던 이상한 통화가 기억났다. 나 좀 보자. 집에 가능한 한 빨리 도착하고 싶었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정류장에서 집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자꾸만 걸음을 재촉했다. 모퉁이마다 슈퍼마켓이 자리잡고 있는 사거리를 지나 오른쪽 길로 들어가면 바로 대문이 보인다. 넉넉하게 잡아도 삼 분 정도면 도착할 거리였다.
"어, 여기."
대문까지 십 미터 정도 남아있을 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아저씨였다. 그는 나이가 이제 오십대 중반 정도 되었을 뿐인데도 머리는 거의 완벽한 백발이다. 얼마 전까지 폐암 초기로 병원에 있다가 지금은 완치되었다. 그 뒤로는 담배를 끊은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나를 부를 때의 그는 아무렇지 않게 오른손에 담배를 쥐고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폐암환자였던 이 사람을 다시 흡연자로 만들어 버린 걸까. 그가 쥐고 있는 담배 끝에서는 연기가 계속해서 하늘로 승천하고 있었다.
"네?"
"저기 말이지, 내가 지금 급하게 전화를 해야 하는 데 말이야. 그... 네 꺼 전화... 그거... 가지고 다니는..."
"휴대폰이요?"
"아, 맞아. 그거. 그거 한 통화만 쓰자. 줘 봐."
나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휴대폰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약간의 사용법을 알려 주자 그는 더듬거리며 숫자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통화 연결음 소리가 나고, 그의 눈가에는 긴장이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기계를 대할 때면 늘 그렇다는 듯이. 그리고 그 긴장된 자리 위에는 이내 가느다란 주름살이 만들어졌다.
"어라, 이거 소리가 안 나는데? 전화가 안 되나? 아! 된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상대가 마침내 전화를 받았다.
"어, 난데, 지금 어디야? 뭐? 아니, 거기가 아니라니까! 그냥 계속 올라오면 된다고 했잖아. 왜 거기로 갔어? 아니. 그래. 거기 가만히 있어. 내가 갈 테니까. 응."
오래 안 걸린다는 그의 말처럼, 통화는 금세 끝났다. 휴대폰을 돌려주는 그의 손길이 왠지 떨리는 것 같았다.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앞으로도 계속 담배를 핀다면... 그는 그런 나를 보고 멋쩍게 웃은 뒤에 담배를 한 개피 더 피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얘기하자."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걸어가 버렸다. 나중에 이야기를 하자고? 아직 무슨 용건이 더 남아있다는 말인가? 아, 이런. 그러고 보니 나는 정말 기본적인 사실을 잊-

"오던 중이라던데, 늦게 왔구나."
"네."
"어디 또 갔다 왔니?"
어머니가 물었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집에 있는 사람은 어머니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낚싯대를 고치러 가고 없었다. 지난주 일요일에 아버지가 낚시를 가서 너무 큰 물고기 때문에 낚싯대가 망가졌다고는 했었지만, 이해가 가질 않았다. 급하게 보자고 한 사람이 갑자기 낚싯대나 고치러 가고 집에 없다니.
"아니에요, 근데 엄마. 아빠가 아까 전화로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 아세요?"
"아니, 그랬었어?"
내 말에 어머니는 약간 눈을 크게 뜨고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네, 뭔가 일이 있는 것 같았어요.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 같기도 했거든요."
"별일 아닐 거야. 원래 네 아빤 괜한 일에 생색을 잘 내잖니. 저녁은?"
"안 먹었어요. 일단 씻고 올게요."
"그래. 그러렴."
나는 욕실로 가서 수도꼭지를 비틀어 세면대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오른쪽 머리 모양이 약간 헝클어져 있었다. 버스에서 졸았기 때문일까.

욕실을 나오자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주방에서 저녁을 만들고 있겠지. 나는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뉴스가 막 시작하고 있었다. 벌써 시계는 여덟 시를 지나고 있었다.
"어젯밤 도시 한복판에서 흉기를 사용하여 순식간에 다수의 살인행각이 벌어진 끔찍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오늘 오후 네 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또 살인이라니. 요즘 들어 살인사건이 많아지는 것 같았다.
"...범인은 흉기를 사용하여 지나가는 사람마다 복부와 가슴 부위를 찌르고 도망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며 거리를 활보했습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게다가 이번에는 정말 끔찍한 사건이었다. 무작위로 만나는 사람을 전부 살인한 사람. 아무리 정신이상이라고는 해도 그게 가능한 일일까. 인간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그리고 잔인한 동물이라고 하던 어느 소설의 대목이 생각났다.
"버려진 흉기는 독일제 고급 나이프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외국의 사냥 전문가들이 애용하는 것으로, 국내 정식수입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그때 어머니가 현관을 통해 들어왔다. 지금껏 주방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것이라고 믿던 나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에 의아해했다.
"엄마, 저녁 준비하던 거 아니었어요?"
"응? 아, 지금부터 하려고. 장을 보고 오느라..."
어머니는 많이 피곤한 것 같았다.
"제가 뭐 도와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그냥 TV나 보고 있어. 금방 할 수 있으니까."
뉴스는 이제 다른 것을 보도하고 있었다. 보기도 싫은 정치판에 대한 이야기였다.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렸다. 드라마가 나왔다. 나는 소리를 최소로 줄였다. 딱히 보는 드라마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가끔 그렇게 하는 것을 즐겼다. 남자와 여자가 카페에 앉아 있다. 남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고,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앞에 있는 남자를 보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 남자 뒤편의 어떤 것을 응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초점이 없는 눈이다. 텅 빈 눈. 그것은 슬픔과 공포로 가득 찬 눈이다. 상황을 보니 남자가 여자를 차 버리는 장면이다. 널 죽여 버릴 거야 - 여자의 텅 빈 눈이 말한다.
깜빡 잠이 든 나는 그 뒤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했다. 어젯밤에 잠을 조금밖에 못 자서 그런지, 자꾸만 잠이 드는 것 같았다. 그 뒤로 여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그 눈빛처럼 남자를 죽이러 갔을까?
"저녁 다 되었어. 이리 오렴."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나는 소파에 묻혀 있던 몸을 일으켰다. 피곤했기 때문에 저녁을 먹고 나서 일찍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주방으로 갔다.
그럴 수가 있다면 말이다.

"더 줄까?"
"아뇨, 배불러요."
유난히 맛있는 저녁이었다. 그렇게 배고픈 상태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밥을 허겁지겁 먹어댔던 것이다. 금세 그릇을 비운 나는 양치질을 하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시계는 아홉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수건으로 입을 닦는 도중에 뭔가 생각이 났다. 그것은 한 장의 그림과도 같은 이미지였는데, 아버지가 손을 머리 위로 젖히고 눈을 크게 뜬 모습이었다. 손에는 무언가 쥐어져 있었는데, 그것으로 누군가를 내려치려고 하는 듯한 그 이미지 때문에 나는 왠지 기분이 나빴다. 아버지는 평소에도 낚싯대가 너무 낡았다며 새로 살 궁리를 하는 것 같았었다. 나 같아도 이 기회에 새 것을 샀을 텐데, 그렇다면 도대체 이렇게 늦는 이유는 무엇일까. 갑자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것은 마치 밀폐된 방의 바닥에서부터 물이 조금씩 차 오르는 것과도 같았다.

아홉 시가 훨씬 지나도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그 동안 어머니와 나는 말없이 줄곧 TV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가 늦으시네요."
"그러게..."
"......"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었다. 어머니의 시선은 여전히 화면을 향해 있었다. 그 순간 조금 전의 드라마에서 보았던 여자의 눈이 생각났다. TV 화면을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뒤편에 있는 어떤 것을 바라보는 눈. 그리고 어쩌면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있을 눈. TV에서는 추리극을 하고 있었다.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다. 부러진 다리 때문에 절뚝거리는 그의 표정은 오로지 살아서 집에 도착하기만을 바라는 마음뿐이다. 그의 뒤를 따라오는 그림자가 있다. 왼손에 뭔가를 들고 있다. 금세 아버지를 따라잡은 그 그림자는 왼손을 하늘로 향해 크게 치켜든다. 금속성 물질 특유의 광택이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 빛난다.
기분 나쁜 화면 때문에 불쾌해진 나는 조용히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등에서 어머니의 시선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어떤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사람의 시선이 몸으로 느껴질 때는, 그 사람이 널 노려보고 있다는 뜻이야.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하늘에는 별이 평화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공기가 생각보다 차가웠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아버지를 기다리기로 했다. 혹시 초인종이 고장나서 수십 번도 더 벨을 누르다가 지쳐 대문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유치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만큼 나는 아버지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 전화 때문이기도 했다. 너 오늘 나 좀 보자. 나 좀 보자고, 라고 말하던 아버지는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별이 움직이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 이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 아무도 인식하며 살고 있지 않는다. 그저 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보이는 대로 말할 뿐이다. 그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 나는 푸른 달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달은 움직이지 않는가. 아니, 아니지. 따지고 보면 달뿐만이 아니라 많은 별들도 움직인다. 지구는 그 수많은 별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지구도 결국 별이니까.
내가 보는 다른 이는 역시 마찬가지로 나를 본다. 모두가 모두를 보고, 모두가 모두에게 보인다. 그래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움직이지 않는 별은 없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있다. 그들은 몸을 숨기고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 하다못해 태양도 움직이고 있는데, 그들은 무슨 권리로 그렇게 몸을 숨기는 것일까.

묘한 느낌에 나는 하늘을 보던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마당에서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돌아보자 호기심이 잔뜩 담긴, 그 낮은 두 눈은 나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몸을 움츠리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십 분 정도가 지나자 차 한 대가 대문 앞에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가 도착했구나. 왜 이리 늦었을까. 그런데 대문을 열고 나간 나의 눈에는 뜻밖의 사람이 나타났다.
"어, 나야. 뭣 좀 사 오느라고."
집에 오는 길에 만났던 그 아저씨였다. 입가에서 술 냄새가 확 풍겼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뒤쪽에 있는 중형차를 봤다. 나는 그에게 저런 차가 있는지 몰랐었다.
"오다가 하나 샀어. 잘생긴 놈으로. 허허."
"뭘 이런 걸 사셨어요..."
나는 그가 보여준 낚싯대를 보는 순간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이게 무슨 일일까. 나는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것은 전신이 금색으로 된 고급 낚싯대였다.
나의 굳은 표정을 보고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맘에 안 들어? 멋있지 않아? 이거 비싼 건데..."
"아니에요. 잠깐 들어오세요."
"잠깐 들어오라고? 내가 무슨..."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능숙한 몸놀림으로 대문 안쪽으로 발을 디밀었다. 그것을 보니 그다지 술에 취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아니, 애초부터 술 냄새라는 건 나의 상상일지도 몰랐다.
마당 어디에선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일단 들어가서 말하자."
그는 나보다 앞서서 현관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고, 나는 그런 그에게 말했다.
"잠깐만요. 그런데 무슨 말을 하자는 거죠?"
그가 대답하려고 입을 벌리는 순간-

손을 씻고 나서 현관 밖으로 나온 나는 다시 아버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느껴진 인기척에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는 지하실로 가는 계단이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참 이상했다. 마치 그 계단 밑 어디에서 누군가 나를 계속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현관문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지하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것은 내가 지하실로 간다기보다는 오히려 지하실이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내려가는 계단을 밟기 시작했다. 이상한 냄새는 여전히 나고 있었다. 나는 내 손을 내밀고 그것을 쳐다보며 계속 내려갔다. 씻은 손은 깨끗해져 있었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나는 양손으로 있는 힘껏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을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순식간에 땀이 흘러내렸다. 너무 놀란 나머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도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아저씨는 지하실 바닥 한 구석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누워 있었다. 부릅뜬 두 눈 사이에 정확하게 나이프가 박혀 있었다. 말라붙은 피가 그 밑에 잔뜩 흘러나와 있었다. 나는 처음 지하실 문을 열었을 때에 아저씨의 시선이 내 눈과 마주쳐 있어서 소스라치게 놀랐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아저씨는 누구든지 문을 여는 사람의 눈 높이에 시선을 맞춘 채로 죽어 있었던 것이다.
한참 동안 심호흡을 하고 나서 나는 나이프를 조심스레 쥐었다. 내 손에 딱 맞는 손잡이라서 그런지 그것은 힘을 조금만 주어도 빠졌다. 지하실 안에 있는 낡은 담요를 아저씨의 얼굴에 덮어주었다. 놀랍고 혼란스러운 마음이 끝도 없이 생겨났다. 이제 어떻게 한단 말인가. 담요로 덮인 시체를 잠시 바라보다가 나는 지하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 한쪽 구석에 보이는-

현관을 열고 들어가 곧장 소파로 갔다. 어머니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네, 빨리 와 주세요, 그 애는 아직..."
빨리 오라니?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통화를 한다고 생각했다. 혹시 술을 드시고 집에 전화를 하신 걸까? 그런데 왜 어머니는 저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전화를 하고 있을까?  

"엄마..."
"으응?"
"혹시... 지하실에 들어가 봤어요?"
"지, 지하실?"
어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하실에 시체가 있어요, 시체가...!"
어머니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어머니의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극심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 달려간 곳은 지하실이 아니라 주방이었다. 왜 주방으로 가는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머니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걸 보는 나의 머리는 자꾸만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하나부터 열까지 알 수 없는 끔찍한 일들만 가득했다. 나는 갑자기 떠오르는 무서운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그것은 아직도 모든 일이 끝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어머니는 주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주방 안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그리고 그 안의 광경에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어머니가 부엌칼을 들고 그 자리에 선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보는 나의 머리에 어떤 영상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말다툼을 하고 있다. 그것은 설거지나 빨래 따위의 사소한 일 때문에 시작되었다. 갑자기 감정이 격해진 아버지가 손을 머리 위로 젖히고 어머니를 내려친다. 서너 차례 얻어맞은 뒤에 어머니는 울며 주방으로 달려간다. 금세 식칼을 들고 나오자 아버지는 놀라서 현관 밖으로 도망간다. 어머니는 그 뒤를 따라간다. 식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지하실 쪽으로 몰린 아버지는 취기가 가시지 않아 있고, 덕분에 굵은 팔로 살짝만 밀어도 지하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낚싯대를 떨어뜨리며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어머니도 계단을 내려간다. 아버지는 도망을 치려 하지만 지하실 안에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다시 한 번 식칼에 힘이 들어가고, 어머니는 손을 하늘로 치켜든다. 그리고 빠르게 내려찍는다.
그래서 어머니가 이상한 반응을 보였었구나. 나는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현관 밖으로 나갔다. 도망가야 했다. 아버지를 죽였다면 나라고 죽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어머니는 미쳐 있는 것이었다. 뉴스에 나왔던 살인마처럼.
가만, 그런데 지하실에 있었던 시체가 아버지였던가? 뭔가 이상했다. 그리고 방금 머리에 흐른 영상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어머니의 팔이 그렇게 굵었단 말인가? 그리고 아버지는 왜 갑자기 술에 취해 있었지? 또, 낚싯대는? ...아, 참! 그랬었-

나는 도망을 가야 하는데도 이상하게 막다른 곳인 지하실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지하실은 나를 삼켜버리는 존재였던 것이다. 담요로 덮어둔 누군가의 시신을 보며 나는 덮어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눈과 다시 마주친다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칼을 쥔 어머니가 지하실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숨을 곳을 찾았다. 하지만 좁은 지하실에서 숨을 만한 곳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머니가 문 앞에 이르렀고, 손잡이가 천천히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대로 멈춰 있었다. 잘하면 들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머니는 지하실 안을 둘러보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훌쩍이고 있었다. 갑자기 칼을 땅에 떨어뜨리더니 그 자리에서 울기 시작했다. 여보, 여보, 라는 말만 계속해서 되풀이하며 흐느꼈다. 후회하는 것이구나. 나는 이제 어머니가 제정신을 찾았다는 생각에 담요를 걷고 아버지의 시신 곁에서 일어섰다.
"엄마, 왜 그러셨어요."
어머니는 나의 갑작스런 등장에 예상치 못한 반응을 내었다. 칼을 다시 쥐고는 날 위협하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 긴장한 상태로 어머니의 눈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 눈이었다. 널 죽여버릴 거야. 그것은 분노가 서린, 텅 빈 눈이었다. 나는 겁에 질린 채 아무 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어머니를 설득하기 위해 무슨 말이든지 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같은 말만 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 왜 그러셨어요."
"나야말로 묻고 싶구나. 왜, 왜 그이를 죽인 거니! 경찰이 올 거야!"
어머니는 계속 울음을 터뜨리다가 마침내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너무 느렸다. 어머니는 사람에게 칼을 휘두르기엔 마음이 약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 냉소를 지어 보였다.
"하! 엄마, 그렇게 해서 어디 저한테 상처라도 입히겠어요?"
혼란스럽던 머리가 정리되는 것 같았다.
이런 바보가 있나. 아저씨가 바로 나의 양아버지라는 것마저 잊고 있었다니. 아니, 잊으려 했다니. 이렇게 기본적인 기억을 잊으면 일이 복잡해지기만 할뿐인데.
어머니는 울부짖으며 다시 칼을 휘둘렀고, 나는 그것을 피하면서 능숙하게 칼을 쳐서 구석에 떨어뜨리게 했다. 땅에 부딪히는 칼의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어머니의 분노는 순식간에 절망으로 변해 버렸다. 그 절망의 어둠이 가득한 어머니의 시선을 견뎌내면서 나는 미소와 함께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디뎠다. 부르르 떨리는 내 손은 주머니를 더듬었다. 곧 손에 잡힌 것은 또 다른 칼이었다. 아까 뽑았던 독일제 나이프.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다. 문제는 그 눈이었다. 사람들의 그 호기심어린 눈을 보면 몸이 떨리고, 불안하고, 한 마디로 미칠 것만 같았다. 감시자의 눈. 제발 그 눈을 감아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아무도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감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감게 하는 수밖에. 예외는 없다.
치켜든 나이프에서 금속성 물질 특유의 광택이 전등 빛에 반사되어 반짝 빛났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세 번째로 피부를 뚫고-

나는 가끔 기억을 잠시 잊는 경우가 있다.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고?
...이제는 나도 말할 수가 없다. 시간은 흘러갔고, 다시 기억이 사라져 버렸으니.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지? 왜 나는 경찰에게 잡혀가고 있는 중일까? 그리고 아까 보니까 호기심 많던 우리 집 개가 마당 한쪽 구석에서 죽어 있던데.

빌어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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