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약속대로 요번 달엔 이 게시판의 평균 글 수준을 떨어뜨리러 왔습니다~

음. 여태까지 썼던 것 중 제일 길군요.(그동안 너무 짧게 썼던 거라고 하시면 할 말 없지만)

덕분에 뭔가 갈팡질팡하는 느낌입니다. 지난번 글까지만해도 한번 쓱 훑으면 '이건 좋은 소리 듣기 힘들겠군', 혹은 '이건 그래도 악평은 면할지도...(이런 기분이 든 작품은 그동안 딱 1개였고, 기가막히게 들어맞았습니다-_-)'란 느낌이 들었었는데, 이번 건 짐작도 안 가는 군요(저도 헷갈려서). 잡설도 많은 것 같고. 하지만 이번에 시작된 주인공 아가씨의 여행은 이번화가 마지막이 아니라서, 도입부에 잡담이 있는 건 이해해주세요~(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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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獸形)





그것이 마침내 움직였다. 그가 희열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저것들을 전부 박살내버리라고.
그것은 그렇게 했다.

-골렘에 대한 전설 중 일부


골렘? 골렘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네. 너, 네 손가락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 설명해봐. 거봐, 너도 모르는 걸 흙덩이한테 가르치겠다고? 한두 번도 아니고 그 따위 허무맹랑한 소리 한번 더 할거면 당장 때려치우고 신전에나 처박혀서 기도나부랭이나 읊어대라고. 누가 아나, 마나나께서 어쩌다 들어주실 지.

-26대 홍옥의 조합 조합장 마르프 에유가 견습 마법사에게 해준 전문적인 강의



  가을 바람이 상쾌했다. 고블린들은 그 바람을 즐기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니페는 경쾌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드운파는 휘파람을 부르고 있었다. 링실은 언제나 그렇듯이 조용히, 그러나 방긋방긋 웃으며 박자를 맞춰 고개를 까닥이고 있었다. 그리고 가엾은 하플링은 멀미에 시달리고 있었다.
  "저런, 인시아씨, 괜찮으세요? 얼굴색이 안 좋아요."
  심하게 손상된 길 때문에 마차는 높낮이가 수시로 바뀌었고, 덕분에 안 그래도 몸 상태가 안 좋았던 인시아의 말은 뚝뚝 끊어졌다.
  "괘, 괜찮습니다, 하하하, 이, 이런 장거리 마차 여, 여행은 처음이라서…"
  괜찮다고 해놓고 곧바로 자신이 안 괜찮은 이유를 늘어놓는 그녀를 보며 니페는 씨익 웃었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덜컥이진 않는데, 요즘 이 지방 도로공사가 게으름을 피우고 있나봐요. 익숙해지시면 괜찮을 거예요."
  인시아는 엘프들이 도로공사가 어쩌네 하는 멋없는 이름을 쓸 리가 없다는 것도 까맣게 잊은 체 그 '도로공사'의 직원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나중에 알고보니 그 도로공사의 원래 이름은 '여정의 선지자들Seers of Journey'이었다. 이건 더 촌스럽군.). 그녀는 여지껏 엘프들이 깐깐하고 신경질적인 만큼 꼼꼼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 믿음은 국경지방을 지날 무렵 무참히 깨져버리고 말았다. 왜 왕국의 국경수비를 맡고있는 엘프 정찰대들(이들의 정식 명칭은 선의 주시자들Watchers on Line이었다)이 그들의 뛰어난 정찰 및 경비 능력과 더불어 '험지 주파'능력을 자랑하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드운파씨가 멀미약을 건네어주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조금 있으면 우리 조국의 땅으로 들어섭니다. 제국 도로공사직원들은 웬만하면 성실하고, 특히 지금 우리가 통과할 예정인 빈도 체하 공의 영지는 도로 관리가 최상인 것으로 유명하지요. 곧 괜찮아질 겁니다."



  대학의 방학이었다. 한 학년이 끝나버렸기에 가을방학은 무지하게 긴 편이었고, 도서관에서 책 읽는 것도 엘렌을 골탕먹이는 것도 지겹다고 인시아가 불평을 늘어놓자 니페는 제국 여행을 제안했다. 그 동안 그녀의 집에서 묶게 해준 것 등에 대한 보답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김에 끼워 데려다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알고 보니 니페의 아버지가 속한 대상이 따로 있었다. 니페와 링실은 용돈 겸 상술 훈련 겸해서 그 작은 견차(犬車)를 갖고 인시아네 소도시로 오는 것이었다. 제법 큰 대상이었다. 딱히 누가 지휘하는 건 아니고 그냥 비슷한 동네에 살면서 비슷한 경로를 도는 상인들끼리 모여 가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유익한 여행이 될 터였다. 이미 인시아에게 왕국국경도로에 대한 교훈과 그녀는 멀미를 좀 하는 체질이라는 정보를 줬으니까.



  변방이란 으레 그런 법이었지만 잠시 들렀던 국경을 코앞에 둔 마을엔 제국이 과거에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러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원래부터 왕국과 경쟁적인 관계에 있었던 제국은 엘프 확장 전쟁의 결과로 많은 영토를 한때 빼앗겼었다. 대반격 사건 후 상당 부분 수복됐지만 아직도 사소한 지방은 왕국령으로 남아있다. 왕국에선 이 땅을 완전히 왕국소유로 만든답시고 꽤 많은 엘프들을 이주시켰고, 현재까지 그 이주민의 후손들은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제국의 국경을 넘어도 보이는 것은 목가적인 광경뿐, 어디에서도 '황제폐하께서 제군을 부른다!'라고 침을 튀기며 부르짖는 신경질적으로 보이고 염소수염을 기른 군복 입은 사내나 전대미문의 거대한 공성병기 따윈 보이지 않았다. 가끔 제국 근위대가 사무적인 검문을 했을 뿐이었다.



  넓다. 제국에 대해 받은 느낌은 이것이었다. 왕국도 넓긴 했지만 숲이 많아서 시야가 제한되는 곳이 많았다. 반면에 너른 평원이 대부분인 제국은 지평선까지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니페의 고향인 고블린 지구는 제도에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제국도 오랜 세월동안 국경을 서서히 넓혀간 나라였고, 덕분에 나라 한가운데 수도가 있진 않아 여정은 예상보다 짧았다. 천도하자는 얘기가 있긴 있었지만 아무래도 엄두가 안 나는 모양이었다. 거리는 온통 공용어로 된 간판이나 표지판들로 뒤덮여있었고, 오가는 말들은 공용어들이었다. 엘프문자처럼 세련되진 않았지만 친근한 공용문자를 바라보며 인시아는 반가움을 느꼈다.



  고블린 지구는 생각보다 큰 곳이었다. 인시아는 평생동안 그렇게 많은 고블린이 몰려있는 곳은 처음 봤다. 여기도 고블린, 저기도 고블린, 온통 초록색 피부에 작달막한 키와 눈부신 미녀와 못생긴 대머리뿐이었다. 고블린식 문화라는 것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깔끔하고 실용적이면서도 촌스럽지 않은 문화였다. 모든 게 작았지만, 원래 고블린들과 키가 비슷한 인시아에겐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다. 다만….
  "끼에엑! 이봐요, 아저씨! 농담이죠!"
  "무슨 말씀이십니까, 손님, 황제 폐하에 대한 저의 충성을 걸고 맹세하는데, 이 빵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제가 30년 경력의 장인 정신으로…."
  "잠깐요, 인시아씨. 식사는 우리 집에서 하시면 되요. 자자, 그러니까 블루씨, 그 팔 놓으시죠. 이 분은 우리 손님이라고요."
  …설마 빵 한 개에 은전 5닢을 받을 줄은 몰랐다. 역시 세상에 완벽한 곳은 없었다. 고블린들은 사기 따위나 치는 대신 어리버리한 고객의 혼을 쏙 빼놓아 합법적이지만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 속 쓰린 소비를 더 하게 만드는 데에 명수라고 드운파씨가 껄껄거리며 말해주었다(동족들이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고블린 지구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니페는 재밌을 것을 보여주고 싶다며 인시아 더러 따라오라고 했다.
  "세상에 둘도 없는 구경거리라고요."
  "흐음. 제국 특산품인가요?"
  "뭐, 굳이 제국이랑 연관시킬 필요가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니페는 그녀를 복잡하고 구불구불한 골목 안 깊숙한 곳으로 데려갔다. 그러더니 풍경의 일부처럼 보이던 문 하나를 두드렸다. 그러자 문에 있던 작은 창구가 열렸다. 인간 처럼 보이는 사내는 그들을 한 번 훑어 본 후 별 말없이 열어주었다. 아무 생각 없이 니페를 따라 들어갔던 인시아는 문 뒤에 굳은 표정을 한 사내들이 버티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다양한 종족 구성에 사복을 입고있었지만 일부는 무장 중이었다. 인시아는 놀라서 물어보려 했지만 니페는 이미 안쪽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는 중이었다. 무지막지해 보이는 몽둥이를 든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오크와 석궁을 허리에 찬 채 서있는 인간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던 인시아는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갔다.



  늙수그레한 고블린 하나가 설계도처럼 보이는 종이 하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니페가 바로 옆까지 갔을 때도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고, 그녀는 그의 어깨를 툭툭 쳐야 했다. 그는 1초 정도 지체한 후에 고개를 들더니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오, 니페 왔냐? 한바퀴 다 돌았나보구나?"
  "에이, 삼촌도. 우리가 이맘때쯤 온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이런 데 처박혀있으면 세상일은 다 잊어먹거든. 해리랑 제내박이 아니었으면 밥도 제대로 못 챙겨먹었을 거야."
  그 때 그는 인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니페가 인시아를 돌아보면 말했다.
  "아, 인시아씨, 이쪽은 제 백부 되세요. 여기서 일하고 계시지요."
  "아, 만나서 반갑소. 나는 러달이라고 하오. 내 동생놈 드운파와는 달리 기술자지. 구경하러 오셨소?(인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마침 잘됐구려. 성능 실험을 할 생각이었으니. 여∼해리! 그걸 꺼내와! 새 기능을 시험해 보자고!"
  인시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뜻 보면 복잡한 공구들이 널려있는 게 공방 같았지만 나무를 깎아 만든 뼈대, 혹은 진짜 뼈가 잔뜩 있어서 아무래도 수상해 보였다. 게다가 아까 그 경비병들은 대체 뭐지? 그 때였다. 낮게 쿵쿵쿵 하는 소리가 나더니 우란이 둘씩이나 쓱 들어왔다. 어쩐지 고블린 지구 건물치고는 너무 크다고 했어.
  "우와, 우란도 쌍둥이가 있었군요?"
  똑같은 얼굴을 한 우란들이(그 유명한 우란 전매 특허)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희귀할 뿐이지요. 없는 건 아닙니다. 아, 실례했습니다, 전 해리 무로아입니다. 이 쪽은 저의 형제인 제내박 무로아이고요. 잘 부탁드립니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실례 어쩌고 하는 건 태바다랑 똑같네. 잠시 딴 생각을 하던 인시아는 그제야 해리가 허리에 끼고 온 물건을 발견했다.
  "저건…."
  "저게 바로 이 공방 최고의 걸작이자 자랑거리라오! 나는 내 삶 전체를 저 녀석에게 투자했소."



  "…염소 인형?"
  아닌게 아니라 그건 염소였다. 외모는 살아있는 염소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축 늘어지지도 않고 뻣뻣하게 다리를 쭉 펴고 있는 것을 보니 진짜 염소 같진 않았다.
  "이 염소로 당신에게 멋진 구경거리를 선사하겠소. 두고 보시오. 여∼해리! 준비되었나?"
  "배치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좋아. 시작하자고."
  러달은 해리가 내려놓은 염소에게 다가가 뭔가 조이고 누르고 하더니 똑바로 세워놓았다. 그런 다음 그가 잽싸게 뒤로 물러서자, 해리가 갑자기 눈을 감더니 팔을 크게, 그리고 느리게 움직였다. 그러더니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미약한 전류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쌍둥이 우란도 모자라서 우란 마법사라. 게다가 시동어도 읊지 않는 것을 보니 중급 이상의 마법사란 뜻이었다. 처음엔 미미했던 전류는 점차 굵어지고 많아지더니 이제 하나의 빛 덩어리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막에 갇힌 듯 마구 날뛰던 섬광의 야수들은 해리가 느닷없이 동작을 멈추자 일시에 방류되어 염소의 머리에 적중했다. 염소가 고개를 바로 들더니 눈에서 희미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해리는 이번엔 염소의 무릎관절에 전류를 꽂았다. 그러자 염소는 다소 엉성하게 비틀비틀 거리며 느리게, 그러나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파지직. 해리가 주문을 꼬리에 명중시키자 염소가 멈췄다. 인시아는 눈을 끔벅거리며 염소를 바라보았다. 움직였어? 저게?



  "어떻소?"
  러달이었다. 그는 정말 순수한 자부심을 얼굴에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대, 대단해요. 어떻게 만드신 거죠?"
  "현대 기술과 마나의 활용이 만난 것이지. 다른 사람들은 저놈을 만들려고 나랑 이 친구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상상도 하기 힘들 거요. 그냥 움직이는 염소에 불과하다고 무시하는 놈들도 있지만, 하! 자기 집 강아지도 못 움직이게 하는 놈들이 잔말이 많소. 저걸 움직이게 만들려고 진짜 염소를 해부해 다가 근육과 골격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만 시간이 많이 소모되었고, 그걸 각종 기계장치로 재현하는 데는 더 오래 걸렸소. 그 작업은 내 아버지 대에서야 마무리가 되었지. 그리고 내가 이 공방을 물려받은 최근에야, 저렇게 전류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거요. 전설 속의 골렘만큼은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설이고, 대단하지 않소?"
  "일단 들어가서 앉기라도 하시죠.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제내박이 나섰다. 안 쪽에는 휴식 공간처럼 보이는 아늑한 방이 하나 있었다. 인시아가 방 한가운데에 있는 탁자 앞에 앉자, 해리가 물 한잔을 건네주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물을 몇 잔 더 따랐다. 제내박이 설명했다.
  "저 염소의 내부는 정교하게 조립된 인공 골격과 근육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그리고 전류를 원활히 받아들이기 위한 철침도 있으며, 단순한 기계적 힘 외에 마나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안에는 응축된 마나가 가득 들어있습니다."
  해리가 설명을 이었다.
  "염소를 택한 이유는, 주변에서 흔하고, 크기도 적당하면서 움직임이 복잡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들은 두발로 서기 때문에 균형을 잡기 힘듭니다. 곤충류는 너무 작아서 본뜨기 힘들고 다리가 많아 움직임이 복잡합니다. 좀 더 작은 토끼로 해볼까, 하고 생각해봤지만, 아무래도 저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게 깡충깡충 뛰어다닐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더군요. 염소는 발이 두 쌍이라 안정적이고, 다리관절도 간단합니다."
  "어, 꼭 생명체를 본떠야 하는 건가요?"
  "간단한 인형을 시도해본 적이 있습니다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니 힘들더군요. 아, 이걸 설명해드리지 않았군요. 저 염소가 움직이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머리부분에 있는 뇌와 척수입니다."
  "뇌와 척수?!"
  "뭐 당연히 살아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사실 순전히 기술만으로 염소가 자연스럽게 움직이길 기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지금 저 염소는 반쯤은 자신이 받은 자극을 뇌로 해석해서 움직이는 겁니다. '반쯤'이란 말을 쓴 것은 사실 우리도 그다지 확신하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실제 염소의 뇌와 척수라고 해도 죽은 것을 사용했으니까요. 어쨌든 우리의 예상이 맞다 는 가정 하에 설명을 계속하겠습니다."



  해리는 물을 들이켰다. 인시아는 다시 제내박이 설명을 받겠거니 했지만 해리가 설명을 계속 했다.
  "아까 보여드린 장면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실제 살아있는 생명체의 근육도 강한 자극을 받으면 움직이죠. 마찬가지입니다. 저 염소의 내부에 있는 인공 근육도 그런 식으로 움직입니다. 어느 지점에서 자극을 주면, 그 자극이 척수로 전달되고, 척수는 움직일 것을 명령하죠. 다만 제대로 된 위치에 자극을 주지 않으면 엉뚱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죠. 이것저것 시험해봤지만 전기가 제일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도 쉽기 때문에 요즘 최대한 필요한 자극을 줄이는 쪽으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빗나가도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죠."
  이번엔 정말 제내박이 설명을 이었다.
  "미셰오네의 사제들이 만드는 언데드 괴물들은 마나핵으로 움직입니다만, 그것은 기적의 일종이고, 또한 뇌를 일부분이나마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작업을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려면 모든 관절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전부 다 넣어야 하는데, 그럴 시간에 차라리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는 것이 빠를 겁니다. 자기 자신의 관절이 어떻게 움직이는 것도 설명하긴 힘든 게 사실이잖습니까. 사실 저게 우리가 늙어죽기 전에 진짜 염소처럼 움직일 거라고 기대하진 않습니다. 지금 움직이는 게 가능한 것도 사실 우연에 우연이 겹친 거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우린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인시아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쓸려가지 않기 위해 버티고 있다가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저기 문 앞에 버티고있는 험악하게 생긴 아저씨들은 누구죠?"
  "아, 그건…."
  "내가 들어오는 걸 싫어하거든."
  인시아는 등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중년의 인간여인이 가벼운 복장으로 건들거리며 서 있었다. 어찌나 험악하게 생겼는지 드워프 여인의 키를 늘이면 바로 저렇게 생겼을 것 같았다. 인시아는 당황하여 뭔가 말하려 했지만 그것은 러달의 노성으로 인해 묻혀버렸다.
  "뭐 하러 여기 또 온 거요?! 경비병! 경비병!"
  그는 성급히 커다란 종을 들고있던 망치로 두드렸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당황한 그는 종을 바라보다가 종 주변에 있는 공기의 흐름이 미묘하게 바뀌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성난 표정으로 여인을 돌아보았다.
  "내 종에다가 무슨 짓을 했고 황제폐하께서 친히 보내주신 경비병들을 어떻게 통과한 거지?!"
  "공기의 흐름을 차단했을 뿐이야. 그럼 자연히 소리도 안 나지. 아, 그리고 난 내 몸을 투명하게 만든 다음 저기 저 꼬맹이가 들어올 때 따라 들어왔거든. 경비들이 눈치 못 채는 것도 당연하지."
  인시아는 어이가 없어서 여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전자는 순수한 마법적 힘의 활용을 응용할 줄만 알면 되니 숙련된 마법사라면 가능하겠지만, 뭐? 몸을 투명하게? 말이 되는 소릴…. 그런데 러달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폐하의 경비병들을 농락하다니, 제 정신이오?!"
  놀랍게도 그는 그걸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무지막지한 분노라는 형태로). 그렇다면….
  "지금 입구로 통하는 저 통로의 공기도 차단해놨으니까 소리쳐도 안 올 거야. 그러니까 아저씨, 천천히 얘기하자고. 아, 거기 꼬마 아가씨는 날 모르겠군. 내가 누군지 궁금하겠지? 난 스키디르 레스틸이다. 흔히 마나나의 고위사제라고 부르는, '지천자(知天者)'지."



  "저 아줌마는 얼마 전부터 계속 삼촌을 귀찮게 하고 있어요."
  니페가 소곤거렸다. 스키디르는 기술자들과 대치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러달은 계속 소릴 지르고 있었고(나이도 적지 않은 데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까 걱정될 지경이었다.)스키디르는 익숙하다는 듯이 여유롭게 한 마디 씩 해주고 있었으며, 우란 형제는 한숨을 쉬며 다른 일(잔과 물병을 찬장에 집어넣는 것 따위의)에 몰두하고 있었다. 말려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익히 아는 모양이었다. 인시아는 생각했다.
  '마나나의 사제라.'
  그것도 자칭 '하늘을 아는 자'인 고위 사제…사실 저런 호칭들은 어느 종교나 지니고 있지만 다들 쑥스럽고 거추장스럽다고 여겨 생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런 호칭을 자랑스럽게 알려주는 것 자체가, 그녀가 마나나의 고위사제라는 것을 증명한다. 거의 모든 마나나의 고위사제들은 완벽하게, 틀림없이, 정말 심각한 수준으로 미쳐있다(저렇게 멀쩡하게 논쟁하는 자조차도 드물다). 그건 어쩌면 이 잔인한 세상이 인류에게 베푸는 몇 안 되는 자비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저들이 이성적일 수 있다면 오래 전에 세상은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언뜻 보기에 마법사들은 무한한 힘을 다루는 것 같지만, 마법의 위력이 강할수록 요구되는 마나의 양은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사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마나의 양이 거의 무한하기에 이 부분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긴 하지만(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체력이다. 책만 들여다보는 샌님들은 견습 마법사에 불과하다.), 최소한 뭔가를 벌이는 만큼 다른 무언가가 소모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마법사들이 운용 가능한 것은 오로지 힘 그 자체, 가열, 냉각, 방전, 빛의 굴절, 연소, 이렇게 7가지뿐이다. 하지만 자칭 진정한 사제이자 마법사들인 마나나의 사제들은 다르다. '운'만 좋으면 약간의 마나를 활용하여 담뱃대를 뱀으로, 또 그 뱀이 북 소리를 내게 만들 수 있는 자들이 바로 이들이다. 생명을 잃은 식물과 무기물질의 결합체가 어떻게 살아있는 동물로 바뀌며, 그로 인해 갑자기 생성된 뱀의 종류, 나이, 성별 등의 결정에 대한 문제, 그리고 소리를 낼 수 없는 뱀이 어떻게 북소리를 만드는 가에 대한 의문은 완전히 무시된다(언뜻 보기엔 뱀 같지만 생물학자들에겐 전혀 뱀으로 보이지 않는 이상한 생명체가 나올 수도 있다). 세상의 모든 법칙과 논리, 질량보존의 법칙, 힘의 총량 불변의 법칙 등을 모조리 어길 수 있는 자들이 바로 이들이다. 글자그대로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니…러달과 무로아 형제의 기술을 응용하면 이들은 골렘을 어렵잖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기술자들이 진짜 골렘을 만드려면 수세기에 걸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마나나의 사제들은 손가락질, 혹은 단순히 생각만으로도 그런 일들을 이뤄낼 가능성이 있다. 러달이 참을 수 없어하는 것은 그것 때문인 것 같았다.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인시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마나나의 사제들은 영 꺼림칙한 자들이었다.



  뿅 하는 소리가 났다. 인시아는 어이가 없어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애들 동화책에 나오는 것 마냥 '뿅'이란 말을 제외하면 그다지 설명할 도리가 없는 소리가 났다.  러달이 위협적으로 휘둘러대던 작업용 망치가 공중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희극적이게도 그 망치는 전설 속의 성검 마냥 찬란한 빛을 뿌려대는 중이었다. 하지만 러달은 기죽기는커녕 더욱 의기양양해진 것 같았다.
  "하! 저건 내 물건이라고! 무단 침입에 덤으로 타인의 물건에 손까지 대다니! 당신을 쫓아낼 이유가 하나 늘어났군!"
  "이봐 영감, 난 자기방어를 한 것 뿐이야. 하도 무섭게 휘둘러서 말이지.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뭐 강탈하러 왔어, 협박을 하러 왔어? 좀 거래를 하자니까 그러네."
  "거래? 우리의 업적을 한 순간에 뻘 짓으로 만들고 수세대 에 걸친 노력의 산물인 우리 염소를 뺏어가겠다는 게 거래란 말이오?!"
  "어이어이, '대신 완성 시켜'준다니까. 그걸 꼭 '뺏는다'라고 해야겠어? 어차피 당신네들 죽을 때까지 완성 못 시킬 텐데."
  러달은 복장이 뒤집어져서 말도 제대로 못 꺼내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는 스스로를 밟아 누른 사람처럼 말을 꺼냈다.
  "…감히 그런 말을 내 앞에서…? 당신들이 강탈해서 완성시켰다고 칩시다. 그 다음 어쩌란 말이오? 내 후대 기술자들에게 무엇을 남기란 말이오?! '염소 비슷하게 대충 만든 다음에 망할 놈의 마나나의 똘마니들한테 넘겨서 알아서 수리수리마수리 하라고 한다'라고 하란 말이오?! 알지도 못하면 좀 닥치시오! 다음 번에 와 있을 땐 당신네들이 제일 싫어하는 세야의 사제가 기다리고 있을 줄 아시오!"
  "…내 앞에서 그 놈들 얘기를 꺼내지 마…."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던 스키디르가 갑자기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인시아는 그녀의 눈에 광기어린 분노가 스치는 것을 보았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별로 대단찮은 일에 저런 분노라니? 역시 정신병자인 건가?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인시아는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하! 그래서? 세상이 다 자신 것들이고 다 자기 장난감이라는 것처럼 굴다가도 네놈들은 그 야만인들 얘기만 나오면 꼼짝을 못하지? 황제폐하 앞에서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것들이 세야의 세자만 나와도 덜덜덜 떠는 꼴하고는, 하! 혹시 도마뱀이 무서워서 그러나? 하하하하."



  서로 나이가 꽤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다지 고상하지 못한 모욕이었지만, 스키디르는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러달이 공중으로 휙 날아올랐다. 그가 안간힘을 다해 외쳤다.
  "해리!"
  둘의 말다툼에 정신을 팔고 있었던 인시아는 해리가 스키디르의 뒤로 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약간 세게 그녀의 뒤통수를 한 대 쳤고, 러달한테 온 신경을 쏟아 붓고 있던 그녀는 힘없이 쓰러졌다. 덕분에 러달은 밑으로 떨어졌지만 미리 대기하고있던 제내박이 받아내서 험한 꼴은 면할 수 있었다. 복도를 차단하고 있던 공기 막이 사라졌기에 해리가 목청껏 소리를 지르자(그 큰 우란이 건물 안에서 있는 힘껏 지르는 고함에 인시아는 머리가 멍해질 지경이었다)경비병들이 달려와 그녀를 끌고 갔다. 니페는 러달에게 달려가 괜찮냐고 묻고 있었다. 우란 형제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인시아가 그들을 바라보자 쓴웃음을 지으며 해리가 말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저 분은 주기적으로 찾아왔었는데, 경비병들을 배치시켰던 날을 제외하면 늘 비슷한 소동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올 땐 지난 일은 새까맣게 잊었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옵니다. 정말 잊어버리는 건지, 아니면 광인이라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난 괜찮으니까 이만 됐다. 부축 같은 건 안 해도 돼 나 아직 젊다'같은 얘길 하던 러달은 인시아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이게 경비병들을 배치한 이유요. 사실, 황송하게도 황제폐하께서 우리의 작업에 관심을 가지셨소. 덕분에 돈이 썩어나면서도 구두쇠 노릇 하느라 정신없는 친척들에게서 뜯어내는 대신 공식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지요. 저 경비병들도 폐하의 명령으로 와 있는 것이오. 하지만, 보시다시피 마나나의 사제란 것들은 제국 내에서 유일하게 폐하를 업신여기는 무엄한 것들 이라오. 아무래도 다음 번엔 정말로 살아남은 신의 사제를 따로 구해봐야겠소. 이거야 원…."
  "우스꽝스러운 얘기지만,"
  니페가 말을 꺼냈다.
  "아까 삼촌이 퍼부어 댄 모욕인지 뭔지 있잖아요. 그거 반복적인 실험에 의한 결과물이에요. 아무리 쌍욕을 퍼부어도 단기기억상실증 환자 마냥 멀쩡한 얼굴로 얼마 후에 다시 나타나니 이것저것 실험해보다가 세야의 사제 얘기가 제일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아냈지요."
  인시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볼거리는 많은 나라구만. 우란 마법사에, 움직이는 염소 인형에, 정신나간 마나나의 사제에….
  그 때 가볍게 차려입은 인간 경비 하나가 들어왔다.
  "동료들이 아까 그 사람을 조합으로 송환시켰습니다. 이제 괜찮을 겁니다."
  "아아, 고맙네. 저기, 혹시 살아남은 신의 사제를 고용하려면 어디로 가야하는 지 알고있나?"
  젊은 경비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제국 경비대엔 상당수의 세룩들이 포함되어있고, 대부분이 사제입니다. 제가 위에 보고를 드리면 아마 한 명 보내줄 겁니다."
  해리와 제내박이 그 커다란 허리를 직각으로 꺾으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고마움을 어찌…."
  "제 의무일 뿐입니다."
  잘생긴 경비병은 우란들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인시아는 그를 바라보았다. 흠. 기생오라비 같잖아. 러달이 밖을 내다보더니 말했다.
  "이런, 벌써 밤이 다 되었잖아? 니페야, 집에서 걱정할테니 넌 손님 모시고 돌아가는 게 좋겠다. 이거 흉한 꼴만 보여서 미안하게 됐소이다."
  "아니, 구경 재미있게 잘 했어요. 안녕히 개세요."
  "삼촌, 다음에 또 뵈요."
  작은 여인들은 작별인사를 한 뒤 '아무래도 바래다드려야 할 것 같은데'라고 하는 무로아 형제의 말을 그냥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으로 넘겼다. 그들은 다시 그 약간 긴 복도를 지나 입구에 도달하였다. 경비병들은 들어왔을 때와 똑같은 자세로 서있었다. 인시아는 혀를 찼다. 하여간 경비노릇 같은 건 할 짓이 못된다니까.



  밖으로 나와 20m터쯤 더 갔을까. 인시아가 갑자기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아, 이런. 제 손수건을 두고 온 것 같아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곧 돌아올게요."
  니페는 잠깐 어안이 벙벙해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아, 네…갖다 오세요. 기다릴 게요. 너무 조급해하시진 마세요. 우리 동네는 치안이 좋은 곳이고, 밤늦게 돌아다닌다고 별 일 있진 않으니까요."
  인시아는 잽싸게 다시 그 건물로 뛰어들어가 약간 놀란 듯한 경비병들을 무시한 체 복도 중간 즈음까지 단숨에 도달했다. 잠깐 숨을 고른 그녀는 벽을 기대고 섰다. 인시아는 주머니를 뒤져 언제나 갖고 다니는 브로치를 꺼내어 만지작거리다가 꾹꾹 눌렀다. 그런 다음 기다렸다. 가만히 있으려니 시간이 엄청 많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자그마한 발을 바닥에 굴러보았다. 톡톡. 톡톡. 어? 그녀가 고개를 들자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은 젊은 인간이 그녀의 흉내를 내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다가오는 기척을 전혀 못 느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언제나 있던 일이었다. 그의 특기 중 하나였으니까.
  "진짜 하플링이 다 됐네."
  "큰 소리로 말하지마, 멍청아."
  "걱정마, 그 아저씨들은 안쪽으로 쉬러 들어갔고, 입구의 경비병들은 이쪽으로 절대 안 들어올 거야. 그러니까,"
  그는 갑자기 허리를 숙이더니 인시아에게 입을 맞췄다. 인시아는 살짝 놀란 것 같았지만 피식 웃으며 그의 무릎 바로 밑을 걷어찼다.
  "이런 꼴로 이런 곳에 있었던 거였어?"
  과장되게 아픈 척을 하던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그녀와 눈 높이를 맞췄다.
  "응. 어때, 흥미롭잖아?"
  "뭐, 흥미롭긴 한데, 그건 네 얘기고, 윗분들도 그렇게 여긴 거야?"
  "'새 시대로 가는 열쇠가 될지도 모르지.' 적어도 우리 아버진 이렇게 말씀하셨어."
  "흐음."
  엉뚱한 곳을 바라보며 어색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인시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그래, 보고싶었어. 아마루."
  아마루는 빙긋 웃으며 장난스레 그녀의 이마를 톡 쳤다.
  "더 보고 싶은 것 같은데, 저 고블린 아가씨네 집까진 내가 바래다주지."
  "뭐야, 그럴 필요까진…."
  "어허이, 아무리 이 동네 치안상태가 좋아도, 여인들끼리 밤길 걷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이런 식으로 바락바락 우기기에 거절하다가 늦었다고 하면 돼."
  "약아빠졌긴."
  아마루는 또 인시아의 입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고, 결과적으로 한 대 더 얻어맞았다.
  "너무 늦으면 그 아가씨가 걱정할 테니까, 얼른 가보자고, 어…뭐라고 부르면 돼?"
  "인시아."
  "어, 그대로야? 그래, 너무 늦으면 그 아가씨가 걱정할 테니까 얼른 가보자고, 하플링 인시아씨."
  "응."



  그다지 깊은 밤은 아니었지만 가을이라 그런지 벌써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다. 거리에 즐비한 가게들은 불을 밝게 켜서 분위기는 꽤 활기찼다. 니페와 인시아는 성실한 경비병을 약간 앞질러서 걸어가고 있었다. 선선한 밤공기를 들이마시던 니페는 인시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무슨 생각이 드세요?"
  인시아는 뒤를 슬쩍 돌아보더니
  "남자들은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네?"
  "뭔가 말을 듣는 것을 만들려면 저렇게 처절한 과정을 거쳐야 하니까 말이죠."
  아가씨들은 보지 못했지만 아마루는 피식피식 웃고있었다. 니페도 살짝 웃더니 말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현자가 아닌 바보라고 하지요. 제가 보기에 러달 아저씨는 좀 바보 같은 경향이 있어요. 그러니까, 저런 것, 자신의 손자 대에 완성될 확률이 없는거나 다름없는 물건에 미쳐서 파고들 수 있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뭐, 앞의 격언처럼, 새 시대를 열 지도 모르겠어요."
  인시아는 다소 뜨끔했지만, 니페가 그녀와 아마루 사이의 대화를 들었을 리가 없다는 것을 가까스로 되새길 수 있었다.
  "하나의 생명…그것이 유지되고 활동하는 데에 드는 힘과 노력…그런 것들이 '일일이 가르쳐주고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된다는 것은 정말 보…"인시아는 잠시 부자연스럽게 말을 멈췄다."…살아남은 신께 감사 드릴 만한 일이지요."
  그녀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다소 멋쩍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니페는 하플링인 인시아가 문을 열어주는 신이 아닌 살아남은 신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을 다소 의아하게 여겼지만, 미소로 그녀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저녁식사가 끝난 후, 인시아는 니페의 집 발코니로 나왔다. 잠깐 아직도 환한 도심 쪽을 바라보던 그녀는 돌아서서 난간에 기댄 후 앞쪽을 주시했다. 발코니 쪽으로 올라오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를 찾아서 올라올 수도 있으므로 그녀는 계속 안 쪽을 바라보며 브로치를 꺼냈다. 꾹꾹. '보이지 않는 신'이라고 말할 뻔한 것에 대해 핀잔을 잠깐 들었지만, 진지한 얘기는 그게 끝이었다. 그것보다도 훨씬 길고 열성적인 달콤한 사랑의 밀어가 흘러나오자 인시아는 그것들을 잘 엮어 욕설 한아름을 담아 반송했고, 몇 가지 덕담처럼 들리는 악담과 악담처럼 들리는 덕담을 나눈 후 아마루와의 대화를 마쳤다. 그녀는 주머니에 브로치를 쑤셔 넣으며 생각했다. 마음대로 움직인 다라. 사람을 따르며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물체'. 어쩌면 가장 동화적일지도 모르는 것 중 하나를 꿈꾸는 자들이 그 꿈을 조금이나마 흉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언제쯤 될까나? 인시아는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기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곳에 적절한 힘이 주어지면 될 것이었다.


그것은, 기적 따윈 필요로 하지 않는 일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리라 믿는다.





'…알아서 움직이고, 알아서 행동한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기에 대부분 잘 모르고있지만, 이것은 살아있는 것의 위대함을 증명한다. 얼굴에 이상한 걸 뒤집어쓰고 야비한 눈매를 지닌 수상쩍은 사람이 나타났다고 알아서 잠겨버리는 문 따윈 없지 않은가. 특히 사람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왠지 네놈들한테는 적용되지 않는 말 같아, 그치?'

-유명한 괴인인 언미독이 자신의 사랑스러운 제자들에게 해준 점잖은 경고




-미소짓는 독사, firewine.co.kr, mirror.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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