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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동반자살

2006.02.12 02:0302.12


이야기 두 번째, 동반자살


아마도 본능의 충동적인 발현이었을 것이다. 생존본능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무의식에 가까운 상태에서 그 말이 나왔다는 것은 어쩌면 바라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같이 죽자.”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상하게도 내 제의에 응낙했다. 그래서 아,아,아 하는 사이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는 내 소꿉동무였으며, 내 첫 섹스상대였으며, 나의 첫 번째 결혼 상대이기도 했었다. 과거형이 되어버린 까닭은 내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수면제를 구하기까지 이상할 정도로 쉬웠다. 그는 마치 준비라도 했던 듯이 약병을 삼십분 거리에 있는 그의 집에서 바로 들고 왔다. 게다가 직접 물을 따라주기까지 했다. 고통은 있었지만, 몸이 마비된 상태에서 육중한 무게감과 함께 살갗을 벗겨내는 듯한 기이한 느낌 정도였다. 이런 게 죽음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어리광을 부려버렸네.”
깜깜한 암흑 속에 희미하게 빛나는 길을 따라 걸으며 그에 관해 생각했다. 어리석고 둔했지만 어둡지는 않았다. 조금 더 참더라도 남을 아프게 하지는 못했던 착한 사람이었다. 순간 ‘그도 죽었을까’ 하는 의문이 뇌리에 스쳤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빛나는 조명 속에서 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광기 어린 내 눈빛을 따라 흘러드는 내 목소리를 빌린 타인의 목소리는 나를 산산조각으로 파괴했다. 배우란 그런 직업이었다. 내 갈증은 충족될 줄 몰랐다. 첫 아이를 유산했을 때도 난 울면서도 한편으론 생각했다.
‘이 느낌을 잊지 말자.’
언제가 무대에 섰을 때 이 느낌을 떠올려 쏟아내려 써먹을 순간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내 삶의 모든 것은 내가 아니라, 무대 위의 이진경이라는 이름의 반생명체(半生命體)를 위해 있었다. 배역이 주어지지 않는 이상 난 어떻게도 내 속의 허기를 면할 수 없었기에, 온전한 생명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배우 이진경이 아니면 살아가기 어려웠던 날 버티지 못했던 그는 별거라는 옵션을 선택했다.  
변덕으로 내 생을 일관하고도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생의 본능이라면, 지금 죽는 것은 단지 죽음의 본능에 충실해졌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모른다. 가진 것이 없기에 버릴 것이 없었다. 세상의 정이라는 것은 나라는 자아 안에 결코 침투하지 못했다.
비 오는 날 밤에 창문을 열어놓고 빗소리를 듣다가, 주홍색 가로등 아래를 걸어가는 소년을 보았다. 검은 실루엣만 보일 뿐이었는데, 흔히들 그 또래가 입는 하체에 딱 달라붙는 청바지에 반팔 티셔츠를 걸쳤다.
죽음의 세계로 향해가는 지금도 분명히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듯이 기억할 수 있었다. 그는 나의 시선을 깨닫고 날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난 확신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난 죽어볼까 하고 생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길을 잃으셨군요.”
소스라치게 놀란 내가 내 눈을 의심한 건 나와 일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소년을 발견하고 나서였다. 소년은 날 조용히 응시했다. 그리고 검지로 오른쪽을 가리켰다.
“저쪽이 진짜 명계(冥界)로 가는 길입니다.”
혼란에 빠진 나를 향해 소년은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당신은 지금 행복하군요.”
뚱딴지같은 이야기에도 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방향을 바꿔 명계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죽기 전에 보았던 소년과 같은 모습을 한 소년은 내 곁을 한참 지켜주었다. 보조를 맞추고 기이한 블랙홀과 같은 곳을 피하도록 도와주었다. 잘못 디딜 뻔한 한번은 붉은 몸의 괴물들이 팔들을 내뻗어 내 발을 잡아당겼는데 소년이 검고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자 스르륵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여기까지입니다. 그는 오지 않았군요.”
“알고 있었어.”
나는 단순한 변덕으로 죽음을 택한 천생 배우인 이진경의 탈을 벗어던지고 초연하게 답했다. 무표정한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소년의 눈부처는 다시 나였다. 눈부처가 날 향해 놀리듯 기이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철없고 순수해서 오히려 행복하면서도 행복한 줄 몰랐던 학창시절과 배우의 길로 향한 내 열정과 젊음의 아름다움, 새하얀 면사포 속에서 미소 짓던 내 모습. 거기서 멈춰주면 좋았으련만.
“알고 있었어. 그래도 난 지금 자유야.”
환하게 미소 짓는 나를 향해 소년은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소년은 이진경이 저승의 강을 건너기 위해 벤치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터앉은 모습까지 확인한 후에 뒤돌아섰다.
차가운 빗방울이 펼쳐진 신문을 적셔가고 있었다. 한방울 두방울 셀 수 없이 배우 이진경의 밝은 미소 어린 사진에 떨어졌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실종되었다는 기사였다.
연기가 뽀얗게 솟아올랐다. 이제 계절은 바뀌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년은 두터운 회색 외투를 걸치고 모자를 깊이 눌러 쓴 남자 옆에 앉았다. 불붙은 담배를 든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 손은 소주병을 꽉 부여잡고 있었다.
“그녀를 갖고 싶으셨지요.”
“그래.”
쉬어버린 목소리로 남자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남자는 자신의 초라하고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기억해주지 않았던 평생을 기억해내었다. 그런 자신을 들여다보고 관심을 가져준 것은 누구에게나 주목받는 미모에 활발함을 지녔던 태양 같던 그녀였다. 그러나 이제 세인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녀가 눈물과 땀을 흘렸던 무대는 이미 다른 배우가 차지했고, 배우 이진경은 그렇게 사라졌다. 세상사가 이러한 것을, 그녀는 왜 그리 배우라는 직업에 집착했던가. 쓸모없는 자그마한 승리감에 한숨을 내쉬자, 떨어지는 눈들 사이로 담배 연기가 무던히도 올라가서 마침내 사라져버린다. 인생이란 이러한 것을, 왜 자신은 그토록 그녀에게 집착했던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오고 술이 필요해졌지만,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소년이 후들거리는 그를 붙잡아 조용히 조심스럽게 벤치 위로 뉘였다.
“그 때 당신은 행복하셨지요.”
큭큭거리다가 마침내 남자는 인기척 없는 공원이 떠나가도록 크게 하하 웃었다. 그의 평생에 그토록 크게 웃어본 적은 없었다. 웃음소리가 잦아지기를 오래도록 기다린 소년은 그의 입에 귀를 갖다 대었다. 그의 마지막 말을 들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이 든 그의 몸 위로 하얀 눈이 소복이 덮이고 있었다. 얼어붙은 호수 위로 말라붙은 잔디 이파리가 몇 개 떨어졌다. 소년은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 속까지 얼어붙었으면 했다. 그들의 묘한 사랑은 묘한 결말을 맺었다. 어쩌면 해피엔딩인지도 모른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 지상과 같은 색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눈이 계속해서 내려 지우개처럼 풍경을 지웠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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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냥 06.02.14 14:49 댓글 수정 삭제
    연작 이야기로군요!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듭니다. 건필하세요!
  • No Profile
    청람 06.02.15 23:42 댓글 수정 삭제
    너무 빈곳이 많아서 괜찮을까 고민중이었는데.. 암튼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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