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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착각

2006.02.03 11:3802.03

커다란 구름 떼는 마치 방랑하는 초식 동물의 무리처럼 광활한 푸른 하늘을 천천히 누빈다.
천공에는 빛과 따스함이 가득하다.

그러나 어두운 지상에는 한줌 빛과 한덩이 온기조차 없는 쓰레기 굴에 지쳐 쓰러진 내 고기덩어리 뿐이다.
학창시절의 열등생이고 인생의 낙오자이며, 마약으로 일일하는 쓰레기 폐인.

남들이 당연하다고 여겨, 별다른 생각조차 하지 않는 빛 아래의 생활은 나에겐 소원이요,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일어나지 않을 기적이란 것을 알기에 더욱 비참해진다.
마음 속은 오래 전부터 텅 비어있었으며 육신은 약과 병에 찌들어 고물이 되었다.

이런 나에게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 없는 죽음 뿐일 것이라고, 항상 생각해왔다. 이 생은 죽기 두려워 연명하는 삶일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시간의 공백이 어느 정도 벌어지고 난 후-정확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나에겐 새로운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 쓰레기 굴에도 빛이 생겼다. 그 빛은 내 안구에 밝은 입자도, 내 피부에 따스함도 주지 않았지만, 그것은 내 영혼에 비추는 빛이었다.

난 처음엔 그것이 이 부패한 공간에 자라나기 시작한 구더기나, 그 비슷한 더러운 벌레의 새끼라고 생각 했다.
실제로 그것은 축축하고 꿈틀거렸으며, 정이 안 가게 생긴 길쭉한 짐승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알 수 없게도 내 호기심을 자극했으며, 난 그것이 생존할 수 있도록 죽은 쥐를 가져다 놓거나 하며 관심을 기울였다.

그것은 점점 커갔고, 그것의 변화하는 육체와 행동을 관찰하는 것이 내 유일한 낙이 되었다. 내가 먹이로 주던 쥐만큼 커졌고, 내가 키우던 개만큼 커졌으며, 아장거리며 날 따라오던 작은 동생-지금은 커져서 날 외면하고 있는-만큼, 학창시절의 사랑하던 친구-역시 나를 차가이 모른척 하던-만큼 커졌다. 그것이 무엇이었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난 그것으로 인해서 내 인생의 밝았던 순간들을 상기할 수 있었고, 그것은 나와 일상적으로 교류하는 유일한 생명체였다. 이 꿈틀거리는 살덩어리는 나의 기억 속에서 애완동물이 되고, 가족이 되고, 친구가 되었다.

난 이 괴생명체와 점점 가까워졌으며, 이것에게 먹이를 주고 잠자리를 봐주었다. 비록 모습은 지옥의 밑바닥에서 기어올라온 악마의 자식 마냥 추악하고 징그러웠지만, 그래도 이것은 어둠의 구렁텅이에서 살아 있는 유일한 것이었고, 내가 모아 놓은 폐품 더미와 마약을 교환하기 위해 가끔 찾아오는 사내를 제외하고는 내가 대하는 유일한 생명체였으니까. 게다가 그 사내는 나를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다.

그것과 함께 하게 되면서 나는 삶의 의미를 되찾았다. 그렇게 어제 밤에도 나는 내일을 기대하며 기쁘게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나는 그것이 나보다 크게 자란 것을 깨달았고, 내 몸이 이미 반쯤 그것의 입속에서 녹아내렸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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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참 중요하지만, 그 대상이 언제나 부여된 의미대로 행동하는 것은 아닌 듯 싶습니다. 누군가가 동물을 사랑하여 보호해 준다고 해도, 그것은 동물에게 속박의 굴레일 뿐이지요.
Dece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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