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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선물

2006.01.26 10:5401.26

광화문 네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2002년 월드컵의 거리응원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어마어마한 인파였다.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만 같았다. 남자, 여자, 어린아이, 노인, 서울 사람, 시골 사람, 부자, 거지, 아픈 사람, 건강한 사람이 어떠한 장벽이나 구분도 없이 어우러져 있었다.
누군가의 발이 다른 누군가의 발에 밟히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났지만 누구도 짜증을 내는 법 없이 오히려 관대한 포용을 얼굴에 떠올렸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갓난아기가 고막을 울리는 시끄러운 울음을 터뜨렸지만 누구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오히려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휠체어에 앉은 한 정신지체 장애우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렀지만 누구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오히려 격려의 웃음을 보냈다. 사람들 사이에는 일찍이 보기 어려웠던 따뜻한 형제애가 흐르고 있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과거의 분란과 다툼을 청산하고 다 함께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기념비적 순간을 직접 맞이하기 위해 나온 동포요 혈육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억누른 채 기대에 찬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광장 한쪽 구석에 선 누군가의 입에서 처음으로 낮은 노랫소리가 흘러 나왔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노래는 마치 들불이 옮아붙듯 사람에서 사람 사이로 번져 나갔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만세…… 어느새 광장 전체는 가슴 벅찬 노랫소리로 물결치고 있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사람들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아,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우리 조국.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을 국민 모두는 마음속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발달된 외계 문명이 존재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로서 그들의 우주선이 지구의 상공에 처음으로 나타났을 때의 전 세계적인 공황과 혼란은 어떠했던가. 그 아수라장 속에서 한국은 처음으로 그들과 적극적인 평화적 대화를 시도함으로서 광개토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후손인 우리 민족의 진취성과 기상을 세계에 널리 떨쳤다. 곧 우리의 헌신적인 노력에 상당 부분을 힘입어 그들이 철저하게 우호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후 각국에서 진행된 가지각색의 소통 시도 중 한국의 연구팀만이 유일하게 그들과 의사를 교환하는 데 성공함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인 한글을 바탕으로 한 우리 사고의 우수성을 증명해 보였다.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동방의 소국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고 체계를 가진 그들과의 대화는 불분명하고 불완전하며 끊임없이 삐거덕거리기는 했으나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으로서의 옛 명성을 되살려 정중하고 예절바른 태도로 그들이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데 성심을 다했다. 그들은 우리 지구인, 특히나 그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한국인에 대해 무척이나 호기심이 많았다. 한국의 연구팀은 그들을 위해 수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설명을 덧붙였다. 거리, 직장, 학교에서 사람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가감 없이 담은 영상들과 온갖 소식과 정보를 담은 뉴스, 광고, 신문, 책들을 숨김없이 공개해 그들이 우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왔다.
그리고 드디어 그에 대한 보상이 돌아올 날이 왔다. 그들이 자신들의 별로 돌아가기 전 무한한 아량과 선의로 그들을 대해 준 한국인들을 위해 호의와 감사를 담아 작별 선물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한 것이다. 그들과의 대화는 언제나 혼란스러웠으나 이 선물이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국민이 겪고 있는 고통과 불행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기 위한 것이며 특히 새로 태어날 어린 세대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라는 사실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이 주려는 선물은 대체 무엇일까? 어떤 불치병이라도 치료할 수 있는 기적의 약이라는 주장과 지능을 고도로 발달시켜 주는 기구라는 의견이 있었다. 무한정의 식량이나 생필품을 제공하는 기계라는 가설과 영생불멸을 선사하는 장치라는 추정도 있었다. 반면 선물은 그렇게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형태가 아니라 지혜, 행복, 사랑, 기쁨과 같은 실체는 없지만 무엇보다도 귀중한 추상적인 개념의 형태로 주어질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그 선물이 무엇이 되더라도 그것이 과거의 모든 불행을 종식시키고 우리 민족이 한 단계 높은 차원의 문명으로 나아가도록 촉발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그리고 이제 잠시 후면 지금까지의 모든 논박은 끝이 나고 그들이 진정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 기적의 선물이 무엇이었는지 모두가 알 수 있게 될 것이었다. 갈망으로 크게 떠진 사람들의 눈동자 속에 드디어 선물이 허공에 뜬 까마득한 점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광장에 들어찬 인파는 마침내 실현되려 하는 거대한 꿈에 술렁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선물은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리며 점차 커져 그 형체를 알아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가장 긴 변을 아래쪽으로 향한 직각이등변삼각형의 오른쪽에 높은 기둥이 붙어 있고 기둥 꼭대기에는 두 개의 가지가 돋은 형상의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구조물이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그 구조물을 어디서 보았는지 생각해 내려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선물은 군중의 머리 위에 그림자를 드리울 정도로 바짝 다가왔다. 사람들은 급히 물러나려 했지만 입추의 여지도 없이 꽉 찬 그곳에 물러날 공간이 그리 많을 리 없었다. 구조물은 서너 명의 불운한 사람들의 발을 깔아뭉개며 둔탁한 쿵 소리와 함께 지면에 충돌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침내 한 여고생이 그 구조물이 무엇인지 생각해 내었다. 저것은 분명 틀림없이 꿈에서도 그리던 오매불망 나의 소원……
“서울대!”
그 비명 같은 외침에 주변의 다른 사람들 역시 그 구조물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사람들은 꿈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반쯤 멍한 상태에서 그 구조물을 이리저리 뜯어보고 위아래로 둘러도 보고 이쪽저쪽 찔러도 보고 여기저기 두들겨도 봤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것은 아무런 장치도 비밀도 숨어 있지 않고 그저 평범한 철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을 뿐인,
국립 서울대학교 정문이었다.
서울대래. 서울대라는데. 서울대라잖아. 서울대라는군. 서울대. 서울대. 서울대…… 갈대밭에 부는 바람 같은 속삭임과 함께 불안감이 퍼져 나갔다. 그리고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예감에 사로잡혀 하나 둘 씩 고개를 들어 모든 희망을 산산조각 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망연자실한 군중의 머리 위를 수십 수백 개의 서울대 정문이 까맣게 뒤덮고 있었다.



fin.  
별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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