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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잃어버린 낙원

2006.01.24 21:5701.24

추억을 먹고 사는 자

이야기 첫 번째, 잃어버린 낙원

황량한 벌판을 휩쓸고 가는 바람은 곡예를 부리는 듯, 그의 옷자락을 그의 앙상하고 헐벗은 다리에 휘감았다.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는 사막의 한 가운데, 모래는 바람이 부르는 데로 이르고 있었다.
헝클어진 회백색 머리칼과 수염 사이로 비치는 푸른 빛 도는 회색 눈동자는 그림자를 드리우는 부드러운 곡선 위로 두드러진 벽의 일부분과 같은 것을 발견하였다. 비척거리며 떨리는 다리를 옮겨 그곳에 다다른 그는 튀어난 부분 옆을 파헤쳤다.
해가 기울고 별들이 검푸른 하늘에 반짝일 무렵, 그는 벽의 아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불룩하고 오목한 부분을 따라 섬세하게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오랜만이지요?”
오랫동안 혼자였던 그는 자신의 혼잣말을 듣는 듯한 익숙함으로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그의 옆에 황색의 누더기를 두른 소년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소년에 대해 자연스럽게 느꼈다. 여기 공기와 바람과 하늘과 땅이 존재하듯이. 고불고불한 검은 머리칼과 눈을 가진 소년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눈을 뜨고 묘망(渺茫)한 사막을 바라보며
“아 -아.”
하고 내뱉었다. 귓가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짤랑거리는 여인들의 귀고리의 금빛광채, 향기로운 주향(酒香). 콧구멍을 자극하는 장미수의 향기, 뛰어다니는 어린애와 바람에 펄럭이는 새하얀 빨래. 시원하게 노래 부르던 숲과 길게 늘어지는 낙타의 그림자, 무릎에서 애교를 부리던 부드럽고 풍성한 검은 털의 고양이.
‘아바마마.’
‘전하.’
자신을 부르던 친애하던 이들과 자신을 존경하던 백성들. 아무 탈 없이 살아가던 소왕국(小王國). 누구도 해치지 아니하고, 누구도 욕심내지 아니하고, 누구도 아파하지 않던 곳. 나의 낙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모래는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의 포말처럼 이글거리며 사방으로 흩어 사라졌다. 저 아래, 바람과 모래가 숨겨두었던 그의 잃어버렸던 낙원이 다시금 그를 향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의 누추한 차림새는 어느새 예전의 그것으로 돌아가 있었고, 아치형의 대문 안쪽에서는 그의 사랑스러운 아내와 귀여운 자식들, 그의 신하들과 백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대문을 향했다. 이루 형용할 수 없는 환희가 그의 얼굴에, 눈빛에 서려 있었다.
“당신이 있던 곳은 어디든지, 어느 시간이든지 낙원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처음의 그 모습으로 돌아와 버린 풍경을 마주 대한 그의 눈에 지독한 고통과 회한이 스쳤다. 그는 그제야 소년을 보았다.
“당신은 당신의 왕국을 잃었지만, 죽어가던 거지에게 당신의 아침을 주었고, 코끼리의 부러진 다리를 끙끙대며 맞춰주었죠. 그 누구도 당신에게 감사를 전하지 않았고, 당신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저 당신은 살아갈 뿐이었죠.”
그는 침묵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잃어버린 것의 소중함을 당신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손등으로 자신의 눈물을 닦아내었다. 소년의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소년은 그를 부축하여 그가 파 드러난 벽에 기대게 했다. 그의 마지막 말을 들을 때였다.
“아아. 그래. 내 낙원은 여기가 아니었어.”
눈물을 흘리며 양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그는 중얼거렸다.
“...내 가슴 속이었다.”
소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조용히 눈을 감은 그의 얼굴에 주황색 빛이 비치고, 세상은 다시 이글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모래가 쌓인다. 그렇게 잊혀져 버리는 것이 또 하나.
소년은 일어서서 태양이 비치지 않는 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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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혹은 잎글)들이 모인 장편이 될지, 아님 이걸로 끝나는 건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ㅡㅡ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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