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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묘한 인연

2003.12.27 20:3212.27

12월도 끝나가는 연말이 되자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에 들떠 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혹은 경쾌한 느낌의 캐럴 송들과 가로수들마다 달려있는 꼬마전구와 각종 장식품들. 그리고 나무마다 달린 꼬마전구들 보다 더 많은 사람들.

그 많은 사람들이 서로 치이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웃음이다. 연인에게, 혹은 아이들에게 사줄 선물을 사러 나왔으니 아마 선물했을 때 연인 혹은 아이들의 반응을 생각하고 좋아하는 것 같았다. 특히 저기 장난감 가게에서 어린 아들과 함께 있는 부부의 얼굴은.......

그런데 이 사람은 어딜 간 걸까? 아내와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나왔는데 사람들 속에서 아내와 떨어져 버렸다. 아마 서로 다른 물건을 보려다가 사람들에게 휩쓸려 떨어져버린 것 같은데 서로 길이 엇갈리고 있나? 아직은 아내를 찾지 못했다.

다 큰 사람이고 이렇게 사람들도 많으니 설마 나쁜 일을 당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느긋하게 거리를 구경하면서 아내와 걸어온 거리를 다시 찾아 올라가고 있었다. 뭘 사주려고 억지로 끌고 나와서 이 고생을 시키는 건지.

이제 보여야 하는데....... 조금씩 불안해 지는 느낌에 걸음을 조금 빨리 했다. 그리고 어느 가게 앞에서 쪼그려 앉아있는 아내를 볼 수 있었다. 아무 표정 없이 멍하니 생각에 잠긴 그 사람을 보면서 순간 그녀를 불러야겠다는 생각도 못하고 보고만 있었다. 그 처연한 모습.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아내를 빤히 바라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윽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모습에 이젠 그녀를 부를 용기가 없어져 버렸다.

아내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다. 가끔씩 저러는 아내를 볼 때마다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추운 날씨에 얼어버린 손을 녹여주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왜 난 안돼?”

어린 아이의 투정 같은 물음이었다. 안되는 걸 왜 안 되냐고 묻는 것. 다만 나도 왜 안 되냐고 묻고 싶은 것일 뿐. 차가워서 감각도 사라졌을 것 같은 아내의 손을 꼭 쥐고선 일으켜 세웠다.

“왜 우린 안 되는 거야?”

아내의 바보 같은 눈물을 뒤로하고 근처의 카페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칠 줄 모르는 눈물. 하지만 나도 모르는 걸 뭐라 대답해 줘야 하는 걸까. 아무 이상도 없는데도 안 되는 걸, 의사도 모르겠다고 하는 걸 난들 어찌 알 수 있을까. 도대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 걸까.

가끔 외출을 할 때 정신없이 있다보면 어느 샌가 곁에 없는 아내. 그리고 늘 그렇듯이 가게의 한 귀퉁이에 멍하니 앉아있는 그녀. 그래서 아내와의 외출을 꺼렸지만 억지로, 혹은 분위기에 취해 끌려나온 오늘도 아내는 울었다. 그리고 왜 자신은 안 되냐는 물음은 날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더 이상 아내를 안아준다거나 혹은 눈물을 닦아 주는 행동을 어느 때부턴가 할 수 없었다. 아직은 얼어붙은 손은 녹여줄 수 있지만 이것도 이젠 무리가 오는 것 같다. 울고 있는 아내 곁에 다가서기가 점점 무서웠으니까. 다른 사람의 도움은 받을 수 없고 나와 이 사람만이 해결 할 수 있는 문제.

우린 아직 아이가 없다.


“어디가요?”

“어? 응, 어디 갈 때가 있어서.”

잠에서 깬 부스스한 모습으로 아내는 나를 배웅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그렇게 울었더니 아직도 얼굴이 약간 부어있다. 아직 잠긴 목소리가 가슴 아팠지만 조금 뒤면 괜찮아 질 것이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올 것을 생각하면 지금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1월.

아직 겨울이다. 음울한 회색바다가 일렁일 때마다 칼날 같은 바람이 스쳐간다. 오랫동안 차안에서 있어서일까? 답답한 마음에 잠시 바닷가에 섰다. 백사장의 모래가 바다를 빨아들인다. 그리고 바다가 사람을 잡아당긴 듯 바다로 향한 발자국. 많이 추울 텐데. 젊다는 건 역시.......

저들과 같은 이유는 아니었지만 전에 겨울 바다에 뛰어들었던 적이 있다. 마치 내 삶이 끝장이라도 난 듯한 생각이 들 때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지만 그게 내 삶을 바꾼 거라는 것엔 틀림이 없다.

몸이 얼어 아무 감각도 들지 않을 때까지 그곳에서 모래사장과 바다가 만나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바다고 조금만 덜 가면 육지인 그 묘한 곳. 바로 그곳에서 조금 더 가버린 사람. 지금 그 사람을 찾아 가고 있었다.

매년 이맘때면 그 사람을 찾는다. 미련 없이 자신의 삶을 던져주고는 그렇게 바다로 가버린 사람. 왜였는지 모르겠다. 그 사람의 친구들도 가족들도 그가 왜 그렇게 가버렸는지에 궁금해 했다. 지금의 나도 궁금해 하지만 글쎄, 바다를 아무리 바라보아도 모르겠다.

잔뜩 흐린 하늘이 이윽고 눈을 흘리기 시작할 때까지 히터에 몸을 녹이고서 출발했다.

매년 찾아온 길이라 눈이 쌓여 길을 찾을 수 없어도 쉽게 그 사람에게 갈 수 있었다. 왜 그렇게 괴로워했는지, 어찌 그리도 쉽게 자신의 삶을 내게 던져줘 버렸는지 단 한마디 말도 해주지 않고 가 버린 사람은 싸늘한 겨울바다에 안겼듯이 차가운 눈에 쌓여있었다.

잡풀들을 뽑아내고 매정한 봉분만을 바라봤다.

왜 라고는 묻지 않으련다. 아마 아내가 내게 왜 자신은 안 되냐고 물었을 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나처럼 이 사람도 대답하지 못 할 테니까. 다만 왜 라고 묻고 싶었다. 하필 바다였는지. 그게 묻고 싶었다. 땅에 묻어 달라고, 그렇게 해달라고 했으면서 왜 결국엔 바다로 가 버렸는지.

매년 바다에 꽃을 던질까 봉분 앞에 둘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늘 이곳, 땅의 당신에게 놓아두었다.

“또, 오셨네요.”

그 사람의 동생이다.

매년 이곳에 올 때마다 그녀 역시 이 곳에 온다. 오늘이 실제로 그 사람이 죽었던 날이니까 오는 거겠지. 그 사람과는 워낙 경황이 없었을 때 만나 얼굴이 기억나지 않지만 동생과 많이 닮았다고 했으니 아마 무척이나 단아한 사람일 것이다.

“늘 고마워요. 이렇게 잊지 않고 언니를 보러 오시니.”

글쎄....... 아마 이런 나의 행동을 잔인하다고 하지 않을까? 자신의 삶을 던져줘 버린 것에 대한 복수 치곤 너무 잔인하지 않느냐고 절규할 것 같다. 마지막 그녀의 편지. 내게 남겨진 그녀의 편지에는 벗어나고 싶다는 말이 가득했다. 하지만 난 매년 이곳에 옴으로써 그녀를 이곳에 묶어두고 있다. 치졸한 복수지만.



“왜 죽어! 살고 싶어서 발부둥을 쳐도 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왜 죽어!”

화가 났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라는 말을 되뇌며 삶을 지탱해 가는 사람도 있는데 멀쩡한 사람이 왜 죽으려고 하는 걸까. 왜 내게 주어지지 않는 기회를 이렇게 무참히 버리려고 하는 걸까. 내겐 주어지지 않은 삶을 왜 이렇게 버리려고 해. 왜!

끌어냈다. 잔인하게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냈다. 자꾸만 바다로 들어가려는 그녀가 힘에 부쳤지만 그래도 끌어냈다. 고작해야 스물두 살이 한계라는 말을 들은 스무 살의 난 너무 화가 났다. 죽다니, 죽다니!

“살아! 왜 죽어. 왜 죽냔말야. 죽을 각오로 살라는 말도 있잖아. 살란말야. 사는데 이유가 왜 필요해. 살아. 살란말야.”

이유도 필요 없었다. 다만 삶에 대한 맹목적 의지만이 남은 난 울었다. 울고 있는 그녀의 뺨을 몇 번이고 때려가며 나의 삶에 대한 의지를 그녀에게 강요했다. 그런 날 그녀는 벌레를 보듯 했다. 역겹다는 표정.

“그럼 니가 대신 살아.”

그리고 비릿한 웃음으로 그 사람은 모래사장과 바다의 사이에서 나를 남겨두곤 어디론가 가버렸다.




이게 그 사람과 나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리고 어찌어찌 하다보니 그 사람의 연락처를 알 수 있었고 그 후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게 편지를 보낼 때까지 일년간 편지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내게 의사가 말했다. 아무래도 차트가 바뀐 것 같다고. 우연치고는 묘한 우연이었고 인연이라면 지독한 인연이었다.

거의 십년이 지난 지금에 난 아직도 그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게 보낸 편지. 매장한 그날 밤 자신을 파내서 바다에 던져 달라는 그녀의 마지막 부탁. 결국 그 경계를 넘어가버린 그녀를 난 용서하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곳에 꽃을 놓고 이곳의 그녀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며칠 전에 언니가 꿈에 보였어요. 너무 괴로워하는 것 같았어요. 아직도 눈물을 흘리면서.”

“.......”

“언니 무덤에 뭔가 있을까봐 찾아와 봤는데 이상한 건 없네요. 왜 그런 건지. 어디 불편하기라도 한걸까요.”

“.......”

“여전히 말이 없으시네요. 늘 이곳에 오시면 말이 없으세요.”

일어서서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아래쪽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곳에서 위로는 나무가 무성해서 제대로 볼 수 없다. 오직 이곳에서만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모래사장도 잘 보였다. 그리고 모래사장과 바다가 만나는 그곳.

최근에 많은 생각을 했다. 어쩌면 차트가 바뀌었기 때문에 내가 죽지 않은 게 아니라는 생각. 그녀가 한 건 삶을 던진 게 아니라 내게 삶을 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덤으로 사는 삶. 내게 삶을 주는 은혜에 아직도 그곳에 잡아두고 있는 나를 향한 복수는 아내와 내게 아이를 주지 않는 것으로 행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이 아이를 원하는 아내. 맹목적인 삶의 의지를 강요한 나. 닮은꼴이었다. 자유롭고 싶었던 그 사람과 태어나지 않았기에 자유로운,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졌을 아이.

“.......원하는 걸 얻길.”

이윽고 떨어진 말이었다. 무려 십여 년을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말이었다. 이제 와서 왜 이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떨어진 말이었다. 왜 라는 질문은 어울리지 않았다.

바다로 향한 발자국은 결국 끝을 맺지 못하고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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