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낙원

2006.12.15 01:1012.15

  나는 긴 트림을 했다. 깊은 곳에서부터 비명을 내지르듯 나온 트림이다. 오랜만에 음식을 마음껏 받아들인 내 배가 만족했다는 상징적인 행위일 것이다. 나는 가볍게 배를 두어 번 두드렸다.
  배가 어느 정도 차자, 그제야 주위를 살필 여유가 생겼다. 좁고 어두운 사무실 안을 천천히 둘러보던 눈길이 마지막에 멈춘 곳은 그의 얼굴이었다.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회전의자에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이제 배는 좀 찼어?”
  “덕분에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는 내리 깔은 시선 너머로 그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는 전체적으로 마른 편으로 날카로운 인상이었으며 특히 턱이 다른 이들보다 훨씬 뾰족해 강한 인상을 풍겼다. 게다가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대머리였는데, 머리가 빠졌다기보다는 자신이 다 밀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외모 중에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오른쪽 이마 위에 조그맣게 새겨져 있는 장미 문신이었다. 장미 꽃 보다는 가시가 더 도드라져 보이는 그런 문신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어째서 저런 곳에 문신을 새겼을까 의문을 품게 만드는 그런 존재였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얼굴 곳곳에 흔적을 남긴 잔주름들이 아마도 30살은 넘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어쩌다 그런 곳을 헤매고 있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좋지 않은 행동이었지만-더욱이 그 질문을 건넨 사람의 인상만을 놓고 보자면 더더욱-대답하기 곤란했다. 내가 말이 없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온갖 잡동사니로 어질러진 책상을 더듬어 라이터를 찾아냈다. 그리고는 카키색 조끼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한 대 필래?”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담배는 부의 상징과도 존재였다. 호기심이 일었지만 나 같은 녀석이 감히 만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괜찮아. 자, 펴봐.”
  그가 내게 담배 한 개비와 라이터를 던졌다. 둘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아왔으므로 나는 우선 담배를 받는데 주력했다. 땅에 떨어진 담배를 손으로 털고 입에 문 다음, 서툰 솜씨로 불을 붙이는 데 성공했을 때 나를 제일 먼저 반긴 것은 쏟아져 나온 기침이었다.
  그는 연신 기침을 해대는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갈 곳은 따로 있어? 목적지 말야. 아까는 어딘가를 가다가 길을 잘 못 들었다던가 하는.”
  “아니요, 없습니다.”
  나는 멍한 기분을 떨쳐내며 대답했다. 도망쳐야할 곳은 있을지언정 내게 갈 곳은 없다. 나는 도시에서 4급시민으로 분류되어 지옥 같은 노동을 해야만 했다.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는 몸이 튼튼한 편이라고 자부했지만 그게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음을 곧 알게 되었다.     어느 정도 힘이 되는 녀석들은 남들보다 훨씬 힘들고 위험한 일들에 투입되었다. 내가 17살까지 살아남은 것은 어떻게 보자면 기적이었다. 내 주위에 있던 녀석들은 모두 뒈져버렸다. 아직 죽는 게 무서웠던-도대체 살아서 무슨 꼴을 더 보겠다고-나는 몇몇 놈들과 작당을 해 도시에서 탈출했다. 그 삼엄한 경비를 통과한 건 관연 나 말고 몇 명이나 더 있었을까? 나는 어쩐지 탈출하던 때의 기억이 떠올라 부르르 몸을 떨었다.
  도시를 탈출해 필사적으로 달아난 지 일주일 정도 되었을까. 그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나는,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황량한 곳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걸로 괜찮았다. 그 빌어먹을 도시에서 죽지 않게 되는 것만으로도 탈출한 보상은 충분히 받았다. 나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죽으면 나는 지옥으로 가게 될까? 혹시 그 지옥이 저 도시는 아닐까? 도시가 지옥이라서 죽고 난 후에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일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미치자 나는 전에 없던 힘을 다시 이끌어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틀 밤을 더 걸었던 것 같다. 그 후엔 정신도 육체도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저 이렇게 한 발, 한 발 내딛다가 녹아 없어질 것 같았다. 그래, 도시로 돌아가느니 녹아 없어지는 게 차라리 나아.
  모든 희망과 절망에서 벗어났을 때 그가 나타났다. 황무지 한 가운데서 요란한 굉음이 들렸다. 나는 온 힘을 짜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뻗어버릴 생각이었다.
  지프 한 대가 굉음을 내며 황무지를 질주하고 있었다. 언덕을 넘어오던 그가 나를 발견했는지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뒷자리에서 장총을 꺼내 나에게 겨누었다. 나는 동상처럼 멈춰선 채, 그가 행하고 있는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가 내게 장총을 겨눴다. 우리는 눈을 마주 쳤지만, 그것은 대등한 관계가 아닌 사냥꾼과 사냥감의 사이에서 오가는 그런 눈빛이었다. 나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이윽고 잠이 찾아왔다. 죽음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그런 잠이.
  얼마나 잤는지도 모를 만큼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을 때, 조그만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버려진 쓰레기처럼 차디찬 방구석에 쳐박힌 채 잠든 것 같았지만 내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는 안락함을 선사했다. 어둠이 드리워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방 안에서 나는 눈만 껌뻑거리며 내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림자는 기가 막힐 만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어코 어둠이 내 그림자를 집어 삼켰을 때 그가 낡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한 눈에 장총으로 나를 겨누었던 남자임을 알 수 있었다.
  “여, 일어났군.”
  그는 그게 별로 중요한 사실은 아니라는 듯 혼잣말로 흘리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한쪽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켰다. 파밧. 거친 소리가 천장 밑으로 늘어진 작은 전구에서 들렸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듯 전구에 시선을 집중했다. 전구는 빛이 들어올 듯 말듯 하다가 결국엔 주황색 잔상만을 남기고 침묵했다.
  “제길. 이 방에 오랫동안 들어온 적이 없어서 말야. 그래, 몸은 좀 어때?”
  입안이 말라붙어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3일 밤낮을 잘도 자던데. 사실은 이제쯤이면 죽었나 해서 시체를 내다버리러 온 거야.”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크게 웃었다.
  “농담이야. 내 개그가 재미없었다면 미안하군. 자, 나는 지금 네가 제일 필요로 하는 게 뭔지 알아. 한 번 맞춰볼까?”
  그러고는 잠시 후 그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많은 음식을 바구니에 담아 가져왔다. 그 양은 도시에서 일주일 동안 배급받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양이었다.

  “담배 맛이 어때?”
  “…잘 모르겠어요. 그냥 어지럽고….”
  “몇 개만 더 펴보면 진정한 맛을 알게 될 거야. 사람은 아는 만큼 많은 것을 느낄 수 있거든.”
  그는 담배를 땅에 버린 후 발로 비벼 껐다. 나는 끝자락만 남은 담배를 멍하니 든 채 어찌해야 될지 생각했다.
  “그냥 나처럼 바닥에 버려.”
  시키는 대로 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건 내 인생의 전부였다.
  “이름은?”
  “…시튼입니다.”
  “시튼. 좋은 이름이군. 나는 브래드라고 부르면 돼.”
  “알겠습니다.”
  그는 나라는 존재가 재미있는지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별로 재미있어 하는 기색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 시튼. 이름만 알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겠어, 안 그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턱에 있는 잔 수염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어때? 달리 갈 곳이 없다면 여기서 일 해보지 않겠어? 마침 사람을 구하고 있었거든.”
  그의 질문 하나하나가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곤혹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나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대답 없이 머뭇거렸고, 지금까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브래드는 내 대답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이다.
  내가 흔쾌히 일 하겠다고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나는 이곳이 어딘지 모른다. 나는 다시 도시로 돌아왔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도시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곳이 도시였다면 나는 눈을 뜨자마자 다시 일을 하러 끌려갔을 것이다. 그 어떤 종류의 일이라도 내가 눈뜨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덥썩 삼켜버렸을 테니.
  “…시켜만 주신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브래드는 빙그레 웃었다. 그의 뺨엔 어울리지 않게 작은 보조개가 생겼다. 너무 작아 이 어두운 방안에서 이제야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좋았어. 달리 일거리가 많은 건아냐. 전부 기본적인 일들이니 힘들 거라는 걱정은 안 해…”
  “상관없습니다. 힘든 일이라도.”
  나는 그의 말을 끊고 대답하면서도 아차 싶었다. 혹시 무례하게 보인 건 아닐까. 하지만 그는 불쾌하다는 기색 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강한 녀석이군. 보수는 얼마 안 되지만 절대 배는 굶지 않을 거야.”
  “그 정도면 저한테는 과분합니다.”
  브래드는 작은 소리로 웃으며 내게 윙크했다. 그의 이마 위에 있는 장미가 바람이 불어오기라도 한듯 살짝 흔들렸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그래, 그럼 어떤 일인지나 알아야겠지? 어때, 일어설 수 있겠어?”
  그의 말에 몸을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핑 돌며 어지러웠지만 곧 가셨다. 브래드는 내가 몸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리다가 문을 열었다.
  “따라와.”
  나는 그의 목소리를 잘 듣기 위해 뒤에 바싹 붙어 걸었다. 내 귀는 상당히 안 좋은 상태다. 도시에서 내가 일했던 곳은 언제나 굉음으로 가득해 내 귀를 괴롭혔다. 하루 일이 끝나고 짧은 잠자리에 들 때면 귀가 울려, 몸이 피곤함에도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울림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마치 뇌 속까지 소리가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고, 나는 울부짖고 싶었지만 단 한 번도, 한 번도 그러지 못했다. 모두의 소중한 잠을 방해한 대가는 죽음으로도 모자랄 테니까.
  복도는 길게 이어져 있었다. 복도에는 간간이 전등이 달려있었는데 빛은 약하게 꼬리를 물고 점점이 이어졌다. 죽어가는 전등은 마치 이 세상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창문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걸로 봐서 이곳은 지하인 듯도 싶었다. 사실 이런 세상에서는 지하에 있는 편이 훨씬 안전했다. 적어도 지상보다는. 어디까지나 지상의 도시보다는.
  벽에는 작은 금이 간 곳이 많았다. 여기저기서 보이는 것들이 이곳의 세월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귀는 브래드에게 집중하고 눈은 벽을 응시했다. 낯선 곳에 와있다는 건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브래드가 갑자기 멈춰서며 말했다.
  “저 앞에 오른편으로 문이 보이지? 페인트 색이 바랜 철문 말야. 그곳에 내 전부가 있어.”
  그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자, 그럼 열어보실까?”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브래드는 내게 다시 윙크를 하며 핸들을 돌려 문을 열었다. 이쪽에서 밖에 열 수 없는 문인듯 싶었다.
  문을 열리자 제일 먼저 들려온 건, 물이 흐르는 소리였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는 소리 같지는 않았다. 우선 소중한 물을 그렇게 낭비하는 인간 따위는 없겠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자연스럽고, 평화롭고, 그 속에서도 활기를 띠고 있었다. 녹슨 수도꼭지에서 녹물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소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소리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환한 빛이 나를 사로잡았다. 어두침침한 복도에 익숙해져있던 두 눈이 순간적으로 빛을 거부했다. 손바닥으로 눈을 비비고 나서 바라본 그곳엔… 세상에.
  나는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 문 안으로 들어섰다. 내 앞엔 난간이 있고, 그 밑으로 펼쳐진 넓은 공간엔… 낙원, 낙원이라고 밖엔 생각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지 못했던 천국과도 같은 곳이 존재했다.
  신기하게도 건물 안에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이름 모를 예쁜 꽃들과, 녹색의 싱그러운 풀들-도시의 시멘트 바닥 곳곳에 피어있는 회색빛의 잡초와는 차원이 다른-, 인공적으로 만든 듯한 몇 개의 맑은 샘과 가장자리엔 높은 나무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는 작은 폭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처음 문을 열고, 들은 물소리는 아마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였으리라.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본 순간 모든 생각과 느낌, 또 내 자신 자체가 산산이 흩어져 버린 듯 무(無)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모두 잿빛 가루가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지려던 그 순간, 브래드가 팔로 내 어깨를 감쌌다. 순간 나는 빛의 속도로 현실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어쩐지 서글픈 생각이 들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도 도시의 법칙이 내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어때? 감상이? 아무 말도 안 나오지 않아?”
  과연 그랬다. 운명이 이곳에서 죽을 수 있게끔 나를 인도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라면 마음속에 공포로 가득 찬 도시의 잔영에 휘둘리지 않고 편히 눈 감을 수 있….
  “잘 봐. 이 풍경이 끝이 아냐. 이걸로 끝이라면 이곳의 존재가치는 제로에 가깝지. 자, 저기들 보이는군.”
  그가 나의 상념을 방해했음에 화가 나야했겠지만, 그가 가리킨 방향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강렬했다. 나는 재빨리 그가 턱 끝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유유히 낙원을 거닐고 있는 존재들, 애초에 이 평온한 세상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가보지 않았다는 듯이, 바깥세상이 얼마나 거칠고 더러운지 이곳이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다운지 알지 못하는 모습으로 지루한 표정을 한 채 대화를 나누거나 하릴없이 걷고 있는….
  하지만 아름답기 그지없는 자태의 여인들이 낙원에 모여 있었다. 대략 스무 명 정도로 보였는데 그들의 피부는 태양의 빛을 완전히 거부한 듯이 희고 매끄러웠고, 내가 한 번만 힘을 줘도 똑 하고 부러질 것만 같은 팔다리를 지니고 있었다. 어딜 보더라도 1급시민을 연상케 하는 고운 자태의 여자들이 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 느꼈던 그들의 낯빛에 스며있는 권태로움 역시 그들의 아름다움의 농도를 희석시키지 못했다.
  “어때? 한 폭의 그림 같지 않아? 아니, 조금 과장하자면 마치 죽어서 천국에 왔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거든. 이렇게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맞는 말이다. 처음 이곳을 봤을 때 나는 죽음을 꿈꾸지 않았던가. 브래드가 뒤에서 내 두 어깨를 잡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세상이 전쟁으로 잿더미가 되었을 때 말야… 나같이 별 볼일 없는 인간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세상이 펼쳐진 거야.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덜 무서워하고, 조금 더 무모하고, 좀 만 더 부지런하게 움직이기만 하면 됐거든. 그리고 한 가지 더… 머리를 아주 조금만 굴리면 되는 거야. 이렇게 이성보다 본능이 우선시되는 세상에선, 그 인간의 본능을 충족시켜 주는 장사를 하면 되는 거지. 그런 점에서 여자 장사는 정답이었어. 하지만 도시의 더러운 뒷골목에서 아무 쓰레기 같은 인간들에게나 여자를 던져주는 그런 병신 같은 짓을 해서 돈만 모으면 된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인간 말종이나 생각할 법한 거지. 들어 봐. 어떤 세상이 찾아오더라도 남보다 위에 있는 서는 자는 존재하는 법이고, 남들 위에 서지 못한 자는 그들에게 빌붙어서 먹고 살면 부자가 될 수 있어. 그걸 잘 캐치해내면 되는 거야.”
  그의 목소리엔 점점 더 강력한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나는 피땀 흘려 이곳을 주지육림의 세계로 만들었어. 밤마다 이곳에선 1급시민이라고 자처하는 인간들이 찾아와 향락의 파티를 벌이지. 술과 여자가 가득하고, 발가벗은 몸으로 자연과 하나 된 채.”
  그는 내 어깨에서 손을 떼고, 내 옆에 섰다. 약간 흥분한 듯한 말투는 어느새 사라지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너는 내 밑에서 이곳을 가꿔나가면 되는 거야. 아직 기계를 만지거나, 무기를 만지기에는 기술도, 나이도 버거우니까 허드렛일부터 차근차근 해나가면 돼. 아, 한 가지만 명심해.”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린 브래드와 눈이 마주쳤다.
  “저 년들을 건드릴 생각은 하지도 마. 내 고귀한 상품에 손댔다가는 도시에서도 겪지 못했던 고통을 맛보게 될 거야.”
  그 말을 하는 브래드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사라졌다.
  


  다음 날부터 바로 일을 시작했다. 이곳에는 나를 포함해서 남자가 여덟 명이 있다. 브래드, 기계담당, 요리담당, 경비원 2명(경비원보다는 킬러에 가까운 모습들이지만), 손님을 맞이하는 접대부가 2명, 그리고 나. 아침에 브래드는 아침식사를 하러 모인 그들에게 간단히 나를 소개시켰다. 하나같이 험악한 인상이었지만 그 내면에 브래드만큼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이는 없는 것 같았다. 모두가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기묘한 아침식사가 끝나고 나자 모두 각자의 일을 향해 흩어졌다. 둘 만 남게 되자 브래드가 커피잔을 손에 들고 내가 할 일에 대해 말해주었다.
  “너는 우선 낙원 안으로 들어가서 청소를 해. 짓밟혀있는 풀이나 꽃도 제거하고, 폭포나 샘들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도 확인 해. 만약 맛이 간 게 있다면 셔번에게-그는 기계담당의 늙은이다-고치라고 전해 줘. 의외로 자주 고장이 나니까 주의 깊게 봐야 할 거야. 그 일이 끝나면 여자들의 방도 깨끗이 정리해. 참고로 오전에는 모두 자고 있으니까 오후에 해. 쓰레기도 전부 비우고 물걸레질도 해줘. 생각보다 깔끔한 년들이 아니라서 시간이 오래 걸릴 거야.”
  그가 낄낄 거렸다.
  “의외로 고된 일인데 네가 오기 전까지 며칠 동안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 애먹었어. 전에 있던 녀석이 갑자기 그만 둬서 말야.”
  그만 둔 이유가 궁금했지만 나는 묻지 않기로 했다. 그게 현명한 행동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도 시간이 남으면… 그때부턴 자유야. 네 마음대로 해. 별 달리 할 것도 없겠지만. 그리고 명심해야 할 점은 잘 알고 있겠지?”
  그의 얼굴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사라져 한편으론 오싹하기 그지없었다.
  “네.” 나는 짧게 대답했다. 사실 말을 길게 해 본적이 거의 없다. 말이란 건 의외로 체력을 소모하는 법이니까.
  “좋았어, 그럼 수고해. 나는 도시에 들렸다 와야겠어. 손님이 오는 날은 아니지만 식료품을 사러 가야 하거든.”
  나는 그에게 인사한 후 그가 일러준 창고를 찾아가 청소도구를 챙겼다. 복도를 걸어가며 생각했다. 브래드가 의외로 고된 일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큰 소리로 비웃어주고 싶었다. 그의 얼굴에, 고생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내 거친 주먹을 날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이곳은 낙원이니까.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갔다. 별달리 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도 주어진 일과를 마치고 나면 이미 날이 저문 뒤였다. 물론 시간이 그렇다는 얘기다. 여기는 짐작대로 지하였으므로 이곳에 들어온 후 나는 한 번도 태양을 보지 못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이른 시간임에도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잤다. 실컷 잤다. 누군가 깨울 때까지 자고 또 잤다. 질릴 때까지 자고 눈을 떠서 시간을 확인하면 늘 새벽 무렵이었다. 너무 많이 자서 이대로 아침까지 다시 잠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눈을 감으면 다시 잠 속으로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실컷 잘 수 있다는 건 실컷 먹을 수 있는 것만큼이나 기분 좋은 일이다.
  일찍 잠자리에 드는 이유가 비단 모자란 잠을 보충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밤에는 이른바 ‘고객’들이 낙원을 찾기 때문에 우리 같은 일꾼들은 눈에 띄지 않게끔 방에 쳐박혀 있어야 한다. 밤을 맞이하도록 돼있는 남자들은 접대부들과 브래드 뿐이었다.
  브래드는 이곳의 컨셉이 주지육림이라 말했었던 게 떠올랐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나는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세상에는 알고 싶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 널려있다. 하지만 나는 어디에서도 내 의문을 충족시키기 위해 질문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모포를 덮고 잠을 청할 때는 언제나 벽을 바라보면서 낙원 안의 모습을 그렸다. 나로선 도시에서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 구경 해보지 못한 1급시민들이 낙원 안에 몇 명씩 존재하면서 쾌락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가서 그 새끼들의 두개골을 박살내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셔번이 보일러실에 쌓아둔 쇠파이프 하나면 충분하다. 그것 하나면 낙원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쾌락의 기쁨보다도 더한 즐거움을 나는 느낄 수 있다.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피가 분수같이 쏟아진다. 나는 몸서리치며 기뻐한다. 상상만으로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결코 현실이 될 순 없다. 딱딱한 침대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거란 걸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경비원들-아니면 브래드-의 총에 의해 피범벅이 되고 말 테지. 우스운 얘기지만 나는 아직도 죽음이 두렵다. 도시에서 탈출하게끔 나들었던 가장 큰 이유. 그것이 아직도 내 등 뒤에 꽉 달라붙어 놓아주질 않았다. 죽음 말고도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건… 돼지만도 못한 1급시민들의 뇌수와 핏물과 똥덩어리로 낙원이 더럽혀지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다. 더럽혀진 낙원을 보면서 서글픈 마음으로 죽고 싶진 않았다. 낙원의 꽃밭에 누워 잠이 들듯 그렇게 조용히 죽는 게 나의 꿈이다.
  그런 연유로 개새끼들을 죽이지 못한다는 사실이 치를 떨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매일 밤 차가운 바람이 스며드는 벽을 바라보며, 도시에 있을 때 자신의 몸보다 몇 배는 무거운 짐을 이고 가다가 계단을 잘못 디뎌 떨어져 죽은 테오를 생각했다. 그를 생각했다기보다는 그가 떨어졌을 때 들렸던 그 둔탁한 소리와 참혹한 광경을 머릿속에 그렸다. 대신 테오가 아닌 살이 뒤룩뒤룩 진 1급 시민의 시체가 낭자한 그런 모습을.  

  가끔, 아주 가끔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깨 다시 잠들지 못하는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인 것 같았다. 평소처럼 다시 잠들려 모포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몸을 둥그렇게 만 채로 잠을 청해보지만 정신은 내 노력과는 반대로 맑아져만 갔다. 잠에서 깨기 전까지 꿨던 꿈의 얇은 끝자락을 움켜쥐고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 보려 해도 길은 막혀 있었다.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단지 내가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던 것만이 기억이 난다. 누군가에게서 도망치려 했을까? 기분이 가라앉아 의식적으로 힘차게 모포를 걷어차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음습한 추위가 순간적으로 나를 감싸 안았다. 양 팔로 어깨를 문지르며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었다. 어제 빤 옷은 아직 덜 말라 약간 축축했다. 요새는 두벌의 옷을 돌려 입으며 매일 빨래를 하고 있다. 깨끗한 옷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뿌듯해진다.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마치 새 장난감을 손에 쥔 것처럼 기뻤다. 그건 아마도 도시에선 깨끗한 옷이란 걸 입어본 기억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1년에 단 한번, 그것도 치수조차 맞지 않는 얇은 작업복을 지급 받았었다.
  옷을 갈아입고 일찌감치 복도로 나와 낙원으로 향했다. 아침을 먹을 때까지 풀밭에 드러누워 있고 싶었다. 어제는 주말이었기 때문에 많이 어지럽혀져 있을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다소 기분이 언짢아졌지만.
  복도는 다소 환한 빛으로 감싸여 있었다. 얼마 전 내가 전구를 몽땅 갈아버렸다. 투덜쟁이인 늙은 셔번은 고장 난 기계를 고치는 일은 군말 없이 곧잘 해내지만-오히려 재미있어 하는 것같이 보이기도 한다-그외에 자질구레한 일들에 손대는 건 끔찍이도 싫어했다. 전구를 가는 일도 자신의 몫이지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어쩔 수없이 내가 창고에서 전구를 가져다가 남는 시간에 틈틈이 전구를 갈아 끼웠다. 한결 환해진 복도가 내 마음을 들뜨게 했다. 언젠가 전구를 갈고 있을 때 우연히 지나가던 브래드는 이렇게 말했다. “여, 밝으니까 좋은데. 하지만 이 복도는 우리만 이용하지 고객들이 다니는 길은 아니니까 그다지 신경 쓸 필욘 없어.” 과연. 장사꾼들이란.
  하지만 밝은 복도를 걷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뻤다. 그리고 그 복도를 지나 낙원에 들어가는 일은 더더욱 기뻤다. 나는 핸들을 돌려 낙원으로 들어섰다. 예상대로 한 눈에 봐도 낙원은 엉망이었다. 정원사가 오려면 아직 4일이나 남았는데 이 지경이라니. 정원사는 도시에서 열흘에 한 번씩 이곳에 와서 나무와 꽃들을 손본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천천히 낙원의 주위를 돌아보며 오늘 할 일을 머릿속에 그렸다. 바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주변을 절반쯤 돌았을 때 뭔가가 눈에 띄었다. 처음엔 커다란 쓰레기더미인줄 알았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커다란 물체는 낙원에 존재할리 없으니까.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고 나서 나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쓰레기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은색 가운을 걸친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분명 브래드가 거느리고 있는 여자 중 한 명이었다. 낯이 익은 얼굴이다. 처음엔 그녀가 죽어있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느꼈는지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영락없이 시체처럼 보였다.
  나는 브래드나 다른 사람들을 불러와야할지 머뭇거리다가 우선 여자의 몸을 살피기로 했다. 정말로 죽었는지 확인부터 해야 했다. 어느 정도 침착함을 되찾자 여자가 살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숨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녀의 상체를 일으켜서 살며시 뺨을 두어 번 두드렸지만 여자는 쉽사리 눈뜨지 않았다. 나는 다소 거칠게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자 얕은 신음과 함께 그녀가 눈을 떴다.
  “정신이 들어요?” 내가 물었다.
  하지만 곧바로 그녀의 대답을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잠시 그녀가 온전하게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기다렸다.
  “…여기는?”
  그녀가 두 손을 관자놀이에 가져가며 말했다. 짙은 파란색 매니큐어를 바른 그녀의 손이 반짝였다.
  “낙원 안입니다. 어쩌다 여기에서…”
  아. 짧은 탄식이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별 일 아니야. 나 좀 일으켜 줄래?”
  그녀는 손으로 땅을 짚으며 일어나려 했지만 휘청거리며 앞으로 고꾸라지려 하기에 나는 얼른 손으로 부축해야만 했다. 힘에 부치는지 그녀는 다시 주저앉았다. 나는 양해를 구하고 그녀의 몸을 살짝 끌어 나무에 기댈 수 있게 해줬다.
  “여기서 쉬고 계세요. 브래드를 불러올게요.”
  내가 돌아서려하자 그녀는 다급한 목소리로 안 돼!, 라고 외쳤다. 내가 깜짝 놀라 바라보자 그녀는 멋쩍은 얼굴로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지마. 부탁이야.”
  달리 거절해야할 이유도 없기에 어쩔 도리가 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발을 멈추자 그녀는 다소 안심한 듯한 표정이었다.
  “고마워. 그런데…이름이?”
  “시튼입니다.”
  “그래, 시튼. 여기서 일하고 있는 거 맞지? 네가 낙원이랑 우리 방들을 청소하고….”
  “예.”
  “나는 루시. 편하게 불러줘. 어쨌든 시튼, 미안하지만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줬으면 해.”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브래드에게 말해야 의사를 불러오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세차게 고개 저었다.
  “아주 가끔 이래. 머리가 지끈거리고 갑자기 정신을 잃을 때가 있거든. 이제는 익숙해져서 괜찮아.”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면 더더욱 의사에게 보여야 하지 않을까요?”
  “과연 그럴까?”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어깨까지 늘어트린 약간 곱슬거리는 갈색머리, 조각같이 꾸며진 얼굴, 파리한 얼굴빛에서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그녀의 빨간 입술 덕택에 내 마음 역시 흔들렸다.
  “병이 있다는 게 밝혀지면 난 끝이야. 브래드는 완벽주의자거든. 자기 상품들에 대해서는 자부심이 특히 더 대단하지. 그런 그가 하자가 있는 상품을 계속 데리고 있을 거라 생각해? 응?”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맞다.
  “나는 바로 버려지게 될 거야. 이곳에서 떠나야 된다는 말인데 그렇게 되면 나는 하루도 살지 못 할 거야. 내 말 이해하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자기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러니 제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줘. 부탁이야.”
  “그럴게요.” 나는 순간적으로 대답하고는 스스로 당황했다. 너무 빨리 대답한 게 부자연스럽지는 않았을까?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런 건데 오히려 의심하지는 않을까?
  “정말 고마워.” 하지만 그녀는 내 생각과는 달리 밝게 웃으며 조심스레 일어났다. 다가가서 부축할까 했지만 그만뒀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도 몸을 휘청거리던 사람답지 않게 조신하게 움직였다.
  “그럼.”
  나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슬슬 모두가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매일 아침 이곳에서 산책하니?”
  그녀가 물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망설이는 동안 그녀는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여 버렸다.
  “그럼 내일도 만나겠네? 이 안에 있으면 왠지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아서 앞으로 자기 전에 들릴 생각이거든. …괜찮지?”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괜찮냐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대답해주는 편이 낫지 싶었다.
  “그래, 그럼 안녕.”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숙소로 통하는 문을 열고 사라졌다. 밤일을 하는 그녀들은 아침을 먹고 오전에 잠이 들어서 오후 늦게 눈을 뜬다. 우리와는 다른 시간대를 사는 존재였다.
  나는 멍하니 그녀가 나간 문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봤다. 시간을 자각하고 이내 돌아섰을 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한 번도 이곳을 낙원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다음 날 루시는 정말로 낙원에 있었다.
  “안녕.”
  나를 발견한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실은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렇게 일찍 일어나면 피곤하지 않아? 잠은 몇 시에 자?”
  아뇨, 별로. 들릴 듯 말 듯 하게 중얼거리듯이 대답했다. 하지만 피곤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오늘은 ‘1급’돼지 때들이 몰려오는 날이 아니라서 낙원의 상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에 대충 청소하고 구석에 짱 박혀 잠이나 잘 생각이다.  
  “자, 여기 바위에 기대고 앉아, 편해.”
  루시가 바위 위에 걸쳐놓은 가운을 자신의 무릎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녀의 바로 옆에 앉게 되는 것이라 망설였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닿을락 말락 하는 그녀의 어깨에 온통 신경이 집중됐다. 너무나도 새하얀 어깨에 내 까무잡잡한 어깨가 닿으면 얼룩이라도 묻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시에서 온 거지?”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예.”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에서 도망쳤다는 건 이제 굳이 숨길만한 일도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거의 모든 이들이 나와 같은 처지니까. 다만 내가 내 입으로 직접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브래드는 처음 물었을 때를 제외하곤 다신 묻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의례 그러려니 여기는 것 같았고.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지만 나는 쉽사리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도시에서 필요한 건 오로지 대답뿐이었어요. ‘예’ 아니면 ‘아니요’. 물론 그나마도 ‘예’라고 대답하는 횟수가 훨씬 많지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슬프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는데.
  “용케 도망쳤네.”
  “예.”
  또다시 대답이 짧아 아차 싶었지만 어쩔 수 없다. 할 수 없는 일은, 어떡해도 할 수 없다. 이건, 시키는 일은 무조건 해야 되는 도시에선 통용되지 않는 룰이지만, 낙원에 온 이후로 나도 많이 나약해졌는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시 둘 다 말이 없었다. 그래도 내가 먼저 말을 거는 일은 없으리라.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동안, 나와 같이 도시에서 도망쳤던 해리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 작업반 중에서 유일하게 나보다 힘이 센 놈이었다. 그는 힘이 남아도는지, 작업이 끝나고 나면 지칠 대로 지쳤을 텐데도 곧잘 다른 녀석들을 쥐어 패곤 했다. 물론 나는 예외였다. 아무리 이긴다는 보장이 있더라도 나를 건드리는 것은 스트레스 해소가 아니라, 서로 목숨을 걸 정도의 각오가 필요했으므로.
  그 해리는 뒈졌다. 머리에 총을 맞아 골통이 산산조각 났다. 다른 녀석들을 제치고 제일 먼저 담벼락을 기어오르다가 딱 좋은 표적감이 된 셈이다. 그전까지 제일 먼저 앞서 달리던 나를 자빠트리고 담벼락을 달려간 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병신.
  “아침에 여기 오면 혼자서 뭐해?”
  그녀는 턱을 괸 팔을 자신의 무릎 위에 놓으며 물었다. 당황하고 말았다. 아침마다 이곳에 온다는 건 거짓말이었으니까. 나는 되는 대로 지껄였다.
  “자요. …여기 누워서.”
  그러자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자주 웃었고, 그 웃음이 어울렸다.
  “뭐야, 그게. 그럴 거면 차라리 따뜻하게 방에서 모포 덮고 자지.”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한 번 내뱉은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 동지들을 유혹한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곳을 좋아 하거든요.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서요.”
  아, 하고 대꾸하는 그녀의 얼굴이 다소 굳어진다. 그녀는 이 공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게 틀림없다.
  “모든 게 좋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저 이렇게 많은 꽃과 풀, 나무들을 보는 게 처음이라서….”
  나는 재빨리 변명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 후로 우리의 대화는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내 불안과는 달리, 그녀는 매일 아침 낙원을 찾았고, 대화를 나누다가 남자들이 일어날 때쯤이면 작별인사를 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럼, 내일 봐.
  조금만 힘줘도 부러져버릴 것만 같은 작고 하얀 손을 들어 내게 인사할 때면 나는 복부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나도 손을 흔들어 답할 뿐.
  그녀와 함께 하는 아침은 이제 내 생활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일부분이었고-하루에 세 번이나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보다도, 세상에!-나는 오후 내내 그녀를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낙원은 아직도 내게 있어서 소중한 존재였지만, 그녀가 없는 낙원은 오래된 정원처럼 빛이 바랬다. 작고 예쁜 꽃을 꺾어 눈앞에 바싹 대봤지만 아무런 색도 띠지 않았다. 분명 내 머릿속에선 그 꽃이 선명한 보라색과 엷은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다고 말해주고 있음에도.
  “여, 일은 잘 돼가?”
  브래드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정오가 조금 안 됐을 무렵인데, 그가 이 시간대에 낙원에 나타난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조금 전까지도 색에 심취해있던 내게, 그의 이마위에 새겨진 장미가 눈에 들어왔다. 그 장미 역시 색이 없다. 아, 저 장미는 원래 아무 색도 없었던가.
  “웬일이세요?”
  그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철제 사다리와 연장통을 내려놓으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셔번의 일을 좀 도와주고 있지. 일이 너무 많다고 요새 무지하게 투덜대거든. 자기 조수 한 명을 고용해달라고 말야. 그런데 장사치는 이윤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윙크했다.
  “자, 청소 대충 끝냈으면 나 좀 도와주지 않을래? 듣자하니 폭포가 또 말썽이라면서?”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하고는, 청소도구들을 제자리에 갖다 놓고 돌아왔다. 브래드는 그사이 인공폭포의 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다. 거기엔 폭포가 돌아가게끔 해주는 기계 장치가 산더미같이 존재했다.
  “아, 왔어? 그럼 밑에 서 있다가 내가 달라는 연장 좀 던져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휘파람을 부르며 작업을 시작했다. 한쪽 다리를 폭포에 걸치고, 다른 다리는 사다리에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지만 그는 여유만만이었다. 나는 간간이 그가 원하는 연장을 던져주면서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원리만 익히면 나도 충분히 고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낙원에서 가지는 나만의 시간에 달갑지 않은 불청객이 찾아오는 일을 방지할 수 있으리라.
  “뭐 즐거운 일이라도 있어?”
  뜬금없이 그가 물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폭포를 향해 있었다.
  “예?”
  “아니, 요새 얼굴이 한결 여유로워 보여서.”
  “글쎄요.”
  나는 대답하고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짧게 덧붙였다. 어쩐지 그의 질문에는 내게 대답을 강요하는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밥을 잘 먹어서 그럴까요.”
  그러자 그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핫. 정답이네. 그렇지. 밥보다 좋은 게 어딨겠어. 아, 십자형 드라이버 큰 걸로 좀.”
  나는 연장통을 뒤적여 십자드라이버를 꺼내 그에게 던져주었다. 스트라이크. 그가 경쾌한 말투로 말했다. 제기랄, 잘 안 돌아가잖아.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끙끙댔다. 잠시 후, 말라버렸던 물줄기가 다시 작지만 맑은 소리와 함께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물줄기는 점점 커져 웅장한 소리가 낙원에 울려 퍼졌다. 나는 멋들어진 그의 솜씨에 감탄하며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을 바라봤다.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싫증나지 않는 광경이다.
  브래드가 사다리에서 내려오며 내게 드라이버를 건넸다.
  “어때? 멋지지?”
  “예.”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감탄하며 드라이버를 다시 연장통에 집어넣었다.
  “중요한건 말야-.”
  나는 무심코 그를 쳐다봤고, 눈이 마주쳤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그의 입은 웃고 있을지언정, 눈은 절대 웃음 짓지 않는다. 저건 뱀의 미소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손에 쥔 행복을 스스로 걷어차면 안 된다는 거지. 그보다 더 병신 같은 놈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 안 그래?”
  “예.” 이번엔 기계적인 대답.
  그는 다시 씨익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대충 정리하고 점심 먹자. 아, 사다리랑 연장통 좀 치워줄래?”
  “그럴게요.”
  고마워, 라고 말하며 그가 멀어졌다. 나는 탈주자는 없는지 시퍼런 눈을 번뜩이며 돌아다니는 도시의 파수꾼들과도 같은 모습으로, 브래드가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쳐다봤다.


  
  그녀가 웃는 모습을 바라본다. 손을 턱에 대고 즐겁게 웃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꼈다. 요사이 내 유일한 낙이라면 그녀를 미소 짓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녀와 만나는 시간이, 하루가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의 시간만큼이나 짧고, 눈치 채지도 못하는 사이 흘러만 갔다.
  오늘은 요리담당인 버트가 무심코 뒤로 고개를 돌려 침을 뱉었는데, 마침 저녁메뉴가 뭔지 궁금해 들여다보던 브래드의 바지에 맞았다는 얘기를 해줬다. 그녀는 웃는 것도 이쁘장한 모습으로 웃다가 가는 손으로 눈을 훔치며 말했다.
  “브래드, 표정은 어땠어?”
  “최고였죠. 갑자기 이마에 있는 장미에 핏줄이 돋던걸요.”
  그러자 그녀는 다시 웃었다. 브래드의 장미는 재미있는 소재가 될 잠재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 어쨌든 나는 오늘도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는 데 만족감을 느꼈다.
  이렇게 한바탕 웃음 짓고 나면 잠시 후 고요한 침묵이 잦아드는데, 그 또한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녀와 이슬이 맺힌 상큼한 풀냄새를 맡고 물이 흐르는 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그러면 서로가 같은 공간 안에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와의 만남이 곧 있으면 막을 내리고 지루한 하루가 시작됨을 뜻하기도 한다.
  “저기 말야….”
  슬슬 일어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할 찰나 그녀가 말을 꺼냈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해본 적 있어?”
  조심스런 말투였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아니요. 지금까진 없었던 것 같아요. …사실 도시에서의 날들을 떠올려본다면 그럴 이유가 없죠.”
  언젠가부터 그녀 앞에서는 나도 낙원이란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겠구나, 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헤어질 시간이네?”
  이때만큼은 그녀가 싱긋 웃어주지 않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오늘 하루도 수고해.”
  “예.”
  치마를 털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후에 내게 손을 흔든다. 나도 손을 흔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내손은 언제나 그렇듯 옆구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숙소로 통하는 문으로 걸어가는 그녀를 바라본다. 나는 그때 그녀의 뒷모습에서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확신에 가까웠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그간의 슬픔은 낙원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생긴 것이다. 그녀는 아직까지 미치도록 아름다운 꽃이지만, 이곳은 그녀에게 사막과도 같아 언젠가 그녀를 시들게 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실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그녀와 함께라면 미련 없이 낙원을 등질 수 있다는 것을.
  그녀가 문 안쪽으로 사라지자 문득 언젠가 그녀가 얘기해줬던 그녀의 과거가 떠올랐다.    
  “사실 나는… 2급 시민이었어. 믿겨지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겠지. 이제는 나도 마치 꿈처럼 여겨지는걸.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실감나지가 않아. 하지만 이건 백퍼센트 진실이야. 거짓말을 해봤자 내게 남는 게 뭐 있겠어, 그렇잖아?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진심으로 믿는지, 안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표정이 뭘 뜻하는지는 알 것 같은데? 그런데 지금은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묻고 싶은 거지? 사실은 나도 그게 궁금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던 걸까? 그들이 말한 것처럼 나는 정말 쓰레기 같은 년인 걸까?
  나는…(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3급 시민이던 남자랑 사랑에 빠졌었어. 그이는 배달부였는데, 어느 날인가 아버지가 잔뜩 주문한 와인을 가지고 우리 집을 찾아왔어. 그땐 집에 아버지가 안 계셔서 내가 그를 맞으면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눴어. 뭐, 그다지 중요한 얘기도 아니었어. 지금도 기억조차 나지 않는 하찮은 얘기들.
  그런데 참 신기하기도 하지.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건 정말 한 순간이니까 말야. 그리고 그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어쩌다보니 그에게 내 연락처를 적어 주는데 성공했지만 그 후로도 그는 쉽사리 내게 다가오지 않았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지. 저 끔찍한 도시의 제도를 떠올린다면. 안 된다는 것은 더 가지고 싶어 하는 건 세상물정 모르고 자란 여자의 치기였을까? 그가 내게서 멀어지려 할수록 나는 더욱 그에게 매달렸어. 결국 그 사람도 마음을 열었고 우리는 밤을 함께 보냈어.
  그런데… 꼬리가 길면 모든 게 그렇듯, 어느 날 아버지에게 들키고 만 거야.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고, 가차 없었어. 분명 그를 신고하면 나까지 처벌받게 되는 걸 뻔히 알면서도 눈 한 번 깜박 하지 않고 우리를 신고했어.
  ‘이 쓰레기 같은 년 놈들을 당장 잡아가시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눈은 나를 벌레보다도 못한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었어. 그와 제대로 된 작별인사 조차 나누지 못하고 한 밤중에 집에서 끌려나왔어. 그 다음 날 말도 안 되는 즉석판결을 받고, 도시의 변두리로 끌려가 도살당한 돼지와 소의 시체를 치우는 일을 했는데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야. 하루도 그 지옥 같은 광경을 바라보면서 토하지 않는 날이 없었어. 내가 했던 경솔한 행동의 대가치고는 너무나도 큰 고통이 내 앞에서 넘실 넘실대며 사악한 미소를 짓는 게 느껴지거든. 아직도 내가 그때 자살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해. 나는 그토록 겁쟁이였었나 봐.
  그렇게 지옥 같은 곳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다가 여기저기 줄이 있는 브래드의 눈에 띠어서 비로소 그곳을 벗어났지. 얼굴이 반반한 여자들을 구하고 있다면서 그는 내게 일 할 생각이 있냐고 물었지. 그는 하나도 속이지 않고 무슨 일인지도 빠짐없이 전부 말해줬어. 나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당장 하겠다고 대답했어. 그러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디론가 갔고, 그걸로 그 지옥과는 안녕이었지. 얼마를 주고 나를 빼내왔는지는 잘 몰라. 하지만 헐값이었던 건 분명해. 어쨌든 그의 지프를 타고 이곳에 오는 동안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그곳을 벗어난 게 너무 기뻐서 말야. 이곳에서의 생활을 잘 해나갈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너무너무 좋았어.
  그때는 절대로 이곳에서 벗어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때는 말야…. 아, 얘기가 좀 재미없었니? 미안.”
  그녀는 웃으며 혀를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아버지를 향한, 아니면 도시의 제도를 향한, 그것도 아니면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녀의 남자에 대한 증오로 인해 주먹을 꽉 쥐고 말았다. 그 날은 하루 종일 우울한 하루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한기가 제일 먼저 나를 반긴다. 날씨는 요사이 더욱 추워져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서린다. 나는 정신이 들 때까지 꿈지럭 대다가 힘들게, 힘들게 모포 밖으로 빠져 나온다. 일어나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낙원 안에 혼자 서성일 그녀를 생각하며 마음이 조급해진 탓이다. 반쯤 눈을 감은 채로 연신 하품을 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루시가 머리가 아프다거나, 정신을 잃는 일이 그 후론 없었다는 점이다. 지나가던 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 자신도 심각하게 생각했던 처음과는 달리 요새는 그다지 신경 쓰고 있지 않는 듯했다.
  어젯밤 방안에서 수선한 빗자루를 손에 들고 복도로 나섰다. 빗자루 때문에 가뜩이나 부족한 잠자는 시간을 빼앗기고 말았다. 브래드에게 새로 하나 사달라고 말해볼까도 생각했지만 고쳐 쓰기로 했다. 또 장사치니, 이윤이니 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브래드를 만나는 게 탐탁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루시의 모습을 찾았다. 낙원 안에서 홀로 거니는 그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아니, 그림 따위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아름다웠다.
  “시튼!”
  내가 미처 그녀를 발견하기도 전, 그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깜짝 놀라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한 눈에 봐도 그녀의 얼굴이 창백함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빗자루를 벽에 세워놓고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내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손이 너무나도 차가워, 깊숙한 곳에 가라 앉아있던 잠이 확 달아나는 게 느껴졌다.
  “어떡해, 시튼? 나 어떡하면 좋아? 응? 어떡하지?”
  그녀의 표정은 울상이었다. 언뜻 보기엔 패닉상태에 빠진 것만 같았다.
  “왜 이러는지 차근차근 말해줘요. 아니, 우선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좋겠네요.”
  나는 그녀를 바위에 앉히려 했지만 그녀는 다리를 벌벌 떨면서도 앉으려 하지 않았다. 넋이 나간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나 역시 당황되기 시작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대답하지 못하고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내가 루시, 하고 힘주어 부르자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파르르 떨렸고, 보라색으로 물든 입술은 죽은 시체의 그것을 연상시켰다. 그녀는 드디어, 그리고 힘들게 입을 열었다.
  “…엘리샤가 죽었어. …내가, 내가 죽였어. 내가 그녀를 죽였어….”
  엘리샤는 그녀와 방을 같이 쓰는 여자다. 그녀는 종종 엘리샤에 관한 얘기를 했었는데,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더욱이 그녀를 죽일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우선 진짜로 죽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브래드가 금남의 구역으로 선포한 여자들의 숙소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다른 이들은 모두 잠들었는지 복도는 고요했다.
  “방이 어디에요?”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맞잡은 손을 흔들며 다시 묻자 그녀는 힘겹게 손을 들어 한쪽 방을 가리켰다.
  “여기 있을래요? 나 혼자 빨리 갔다 올게요.”
  “싫어, 절대 싫어. 나도 같이 갈래.”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꼭 쥔 다음 방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쓰러져있는 엘리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 밑에는 피가 고여 있었다. 나는 루시의 손을 놓고 엘리샤의 몸을 뒤집어 상태를 확인했다.
  그녀는 확실히 죽었고, 거기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머리는 온통 피범벅이었다. 내가 그녀의 몸을 조심히 내려놓을 때 뒤에서 루시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를 시체에게서 떨어뜨려 놓을 필요가 있었다.
  다시 루시의 손을 잡고 방에서 나와, 소리가 안 나도록 조심히 문을 닫은 다음 복도를 걸었다. 루시는 다른 손으로 입을 막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낙원으로 돌아와서 나는 그녀를 큰 바위 위에 앉혔다. 그녀는 쓰러지듯 앉으며 비틀거렸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그녀는 말없이 흐느낄 뿐. 이대로 놔뒀다가는 하루 종일 울고 있기만 할지도 모르겠다.
  “루시, 말해줘요. 그래야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어요.”
  나는 그녀의 두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고, 나는 미소 지었다. 그녀의 눈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새빨갰다.
  “나를… 도와준다고?”
  “물론이죠.”
  나는 내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냈다. 그녀는 마음의 준비가 된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사실 엘리샤랑 나는 브래드 몰래 약을 하고 있었어. 손님 중에 한 명이 구해다 줬거든. 처음엔 호기심에 시작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걷잡을 수가 없었어. 우리는 월급에서 일정량을 모아 약을 샀어.”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이 나를 감싸지만 잠자코 있기로 했다. 내가 받은 충격보다 더 중요한 건 그녀들이 브래드 몰래 약을 했다는 사실이다.
  “어제도 그 손님이 준 약으로, 일이 끝난 뒤에 방으로 돌아와서 둘이 나눠 피고 있었는데- 나는 어렵게 그녀에게 말했어. 약을 끊고 싶다고. 네가 하는 건 말리지 않겠지만 나는 끊었으면 좋겠다고. 그러자 엘리샤는 화를 내며 반대했어. 사실 우리 월급으로 브래드가 눈치 채지 않게끔 안 들키고 약을 사려면 둘이 조금씩 보태는 수밖에 없거든. 그러니까 내가 약을 끊는다고 하면, 그 애 역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못하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 애는 나한테 욕을 퍼붓기 시작했어. 처음엔 조용히 듣기만 했는데, 점점 강도가 심해져서 나도 울컥하고 말았어. 그래서 약에 환장한 년이랑 같은 방 쓰고 싶진 않으니까, 오늘 당장 브래드한테 얘기하서 방을 바꾸겠다고 말했어. 그 정도는 안 들키게끔 브래드를 속일 자신이 있으니까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해줬지.
  그러자 엘리샤는 갑자기 흥분을 가라 앉혔어. 나는 좀 만 잘 구슬리면 그녀를 설득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 애가 네 얘기를 꺼냈어. 우리 둘이 있는 걸 봤다면서. 그런데 엘리샤의 표정이 너무 비열해 보였어. ‘니들 무슨 사이야? 거기서 맨날 뒹굴어? 피둥피둥 살찐 기름덩어리 돼지들로도 모자라서, 끝나고 나서도 또 그 짓이니? 어쩐지 아침마다 나가는 게 이상하다 싶어 몰래 따라 나가봤지. 내가 가만히 있을 거 같아? 브래드한테 다 얘기해 버릴 거야!’라고 나한테 소리를 꽥 질렀어.
  나는 약해 취해 있어서 어떻게 됐었나봐. 난 화가 나서 그 애를 확 밀쳤어. 그런데 엘리샤는 중심을 못 잡고 크게 넘어지면서 탁자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치더니, 소리도 내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어. 나는 겁이 덜컥 나서 그 애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는데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있어서 무서워졌어. 이미 죽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  
  그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너지는 것만 같았고, 나는 그녀를 지탱해줘야만 할 필요가 있었다.
  “루시, 루시! 잘 들어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요. 그렇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브래드가 알면 일이 좋게 끝나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는 내 입에서 브래드의 이름이 나오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걱정 마요. 내가 지켜줄게요. 우리… 우리, 여기서 도망쳐요.”
  그녀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희망의 빛이 언뜻 엿보였던 그녀의 눈이 다시 눈물로 흐릿해졌다.
  “그럴 수 없어. 브래드에게서 도망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그리고 설령 도망칠 수 있다 하더라도 무엇보다 나 같은 쓰레기 때문에 네 인생까지 망쳐 놓을 순 없어.”
  “아니!” 나는 비명 지르듯 외쳤다.  
  “아니, 당신은 쓰레기가 아니에요, 절대로.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내가 지켜줄게요. 브래드 따위는 내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해요. 맹세할게요, 진심으로.”
  “시튼.”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하지만 이 신성한 기분을 느낄 만한 여유는 없었다.
  “자, 시간이 없어서 서둘러야 돼요.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에 여기서 도망쳐야 돼요. 빨리 움직일 수 있죠?”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지만 한가로이 그녀의 확답을 듣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할 수 있어요.” 나는, 내 자신에게 말해주듯, 그녀에게 말했다.
  “방으로 돌아가서 꼭 필요한 물건만 챙겨가지고 나와요. 절대, 절대 엘리샤를 보지 말아요. 알겠죠? 전부 챙기면 다시 여기 와있어요. 나도 최대한 빨리 짐을 챙겨서 돌아올게요. 오, 루시. 겁낼 것 없어요. 다 잘 될 거예요.”
  여전히 대답이 없다. 나는 두 손을 그녀의 손위에 포개놓고 애원하듯 말했다.
  “제발, 제발 내 말대로 하기로 해요.”
  그러자 그녀는 힘들지만 내게 미소 지어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진정이 되고, 빛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자, 그럼.”
  나는 천천히 그녀의 두 손을 놓으며 돌아섰다. 그녀도 나를 힐끗 돌아보고는 숙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는 달려가면서도 그녀가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내 눈에 각인시키고 싶었기에.

  모두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다. 나는 뛰어오느라 턱밑까지 가득 찬 숨을 가라앉히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간헐적인 코고는 소리만 들릴 뿐, 누구도 일어나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숨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는 내 침대 밑에 있는 조그만 가방을 꺼냈다. 가방은 브래드가 서랍장 대신 쓰라고 준 것이다.
  내가 챙겨야할 짐이래봤자 별 거 있을 리 없다. 가방 안에는, 평생 개인 소유물이라고는 가져본 적이 없는 내가, 이곳에 와서 하나, 둘 모은 잡동사니들이 전부였다. 그중에 쓸 만한 것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이 가방을 꼭 가져가고 싶었다. 나는 가방에서 작은 쇠망치를 꺼내 바지 주머니에 넣고 가방을 닫았다. 그리고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옷장에서 두툼한 외투를 꺼내 입었다. 빈약하긴 하지만 어렴풋한 온기가 나를 감쌌다.
  준비는 이걸로 끝났다. 방문을 열면서 마지막으로 곤히 잠들어있는 모두의 얼굴과 그새 친숙해진 방안을 둘러보았다. 나는 이곳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모두들 안녕히.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문을 닫고 복도를 뛰었다. 짐을 챙겨 나오는데 10분정도 걸린 것 같다. 남자들이 기상하기 까지 30분도 채 남지 않았다. 푸르스름한 불빛 아래를 뛰어 가고 있는데 갑자기 구토가 밀려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벽에 손을 짚으며 멈춰 섰다. 미묘한 기분이 나를 감쌌다. 나는 토하지 않도록 목에 손을 갖다 대며 허리를 구부려 기침했다. 긴장한 탓일까.
  가쁜 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걱정할 것 없어. 모든 게 잘 될 거야. 나는 그녀에게 했던 말을 스스로에게도 위로랍시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 앞엔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놓여있는 것만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침을 삼키며 발을 한 걸음 내딛었다. 뛰는 건 무리일지라도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마당에 지체할 여유는 없었다. 연약한 그녀의 마음이 꺾이기 전에 돌아가 버팀목이 돼줘야만 한다. 벽에 손을 짚고 천천히 걸었다. 구토감은 한결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두통이 밀려오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나아갔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음은, 아니 본능은 어서 빨리 그녀에게 달려가라고 재촉하고 있었지만 나는 벽에 등을 기대며 주저앉았다. 가방을 품에 안고 눈을 감자 다소 마음이 편해졌다. 머리의 고통도 파도가 밀려왔다 다시 빠져나가듯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가야 해. 일어서야 돼. 그녀가 기다리고 있어.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리며 마음속으로 숫자 열을 세었다. -여덟, 아홉, 열. …다시 열. 마지막 숫자를 되뇌며 몸을 일으켰다. 이런 날씨 속에서도 땀이 흘렀다.
  복도 건너편을 응시했다. 분명 저곳에는 나와 그녀 사이를 가로 막으려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리고 내 몸이 나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윽고 낙원으로 통하는 문에 도착했다. 나는 문을 열며 아래를 굽어보았다. 다행히 그녀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역시 여자라 그런지 준비에 시간이 다소 걸리는 듯하다.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쉬고 있으면 몸이 제 컨디션을 찾을 것이다. 나는 그녀와 매일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바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는 그녀가 나오는 모습이 잘 보일 것이다.
  그때였다. 나무 뒤에서 발자국 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나타났다. 나는 그녀라고 생각한 나머지 소리가 나는 방향을 돌아보며 웃음 지었다. …그런데 내 앞에 서있는 건 브래드였다.
  “여, 일찍 일어났군.”
  그가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가방을 살며시 발밑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손을 바지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작은 쇠망치의 차가운 느낌이 손을 타고 전해져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브래드의 눈길이 내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브래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코끝을 긁적였다.
  “늦었잖아. 루시는 한참이나 기다렸다구. 그리고 나도.”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떻게?” 내 것이라곤 생각하기 힘든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브래드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달려가서 그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어 저 웃음을 사라지게 만들고 싶었다.
  염병할 새끼, 한 번만 더 이빨을 드러내면 전부 뽑아버리겠어! 내가 그에게 진정으로 해주고 싶은 말이다.
  “그 년이 질질 짜면서 내 방으로 찾아와서 모두 실토했어. 자기가 엘리샤를 죽였다고 말이야. 너와 헤어지고 나서 짐 같은 건 쌀 생각도 안하고 나한테 달려왔단 말이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배어 나와 비린 맛이 느껴졌다.
  “잠결이라 제대로 묻지도 못했는데 그년이 알아서 잘도 줄줄 나불대더만. 자기는 여기를 떠나서 살 수 없다면서 제발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말이지. 그녀는 네 얘기까지 빠짐없이 털어놓았어. 너는 아무 잘못도 없으니 조용히 넘어가 달라더군,”
  그는 턱을 들어 오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결국 루시는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나라고 생각한 거야. 둘 사이에서 나를 택한 거지. 그런 거거든, 그렇지? 어때, 슬퍼?”
  “아가리 닥쳐. 그 입을 찢어놓기 전에.”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누군가 봤다면 정말 즐거워하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는 재밌을 런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분노에 사로잡혔다. 내 앞에 있는 저 대머리 새끼의 골통을 깨부수고 어서 빨리 루시를 찾고 싶었다. 그때,
  브래드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내가 여자는 건드리지 말라고 충분히 주의 줬을 텐데. …어때? 닳아빠진 년이 상대해주니까 좋아 죽겠던가?”
  “결정했어. 입부터 찢어버릴 거야. 그 다음엔 이빨을 다 박살내주지.”
  그가 한 발짝 다가왔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해봐.” 그가 말했다.
  웃음이 사라진 그의 얼굴은 오싹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내 분노는 그것을 능가한다.
  “어서.”  
  나는 소리를 내지르며 주머니에서 망치를 꺼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내리 꽂으려는 순간-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내 목을 파고들었다. 갑자기 목 안쪽에서 따뜻한 기운이 울컥하고 넘쳐흘렀다.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지 못한 채 뒤로 휘청였다. 망치를 떨어트리고 손을 목에 가져가자 내 목에 송곳이 박혀있음을 알 수 있었다. 피가 터져 나왔다. 숨을 내뱉자 핏줄기 주르륵 내 손 위로 떨어졌다. 다시 한 번 게워내듯 피를 토했다. 발밑의 파릇한 풀들이 새빨간 색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었다…그의 얼굴을 쳐다봤다…이마에 있는 장미가 완전한 모습을 되찾은 듯 빨갛게 물들어 있다…서있기 위해 노력해보지만 나는 무릎 꿇고 앞으로 고꾸라졌다…피를 토하며 다시 고개를 든다…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점점 눈앞이 흐릿해진다…손을 뻗어 보지만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풀밭은 이슬에 젖어있지만 포근하다…서서히 눈이 감긴다…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하지만…하지만…이건 누…구…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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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개인적으로 계획하고 있는, 한 도시에 관한 연작소설의 설정을 가져다 쓴 일종의 외전격 단편입니다. 길고도 재미없는 길이지만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ro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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