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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무기를 부수는 자(하)

2006.12.12 14:4512.12

[단편] 무기를 부수는 자(하)

Copyright ã 2005 by박 찬일(Chaneel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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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이 없어도 나와 D는 충분히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적어도 그 상황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달렸다. 밤의 숲길을 걷는 것은 위험했지만, 우리는 그 어떤 산짐승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믿음은 들어맞았고, 우리가 밤새도록 달려 S시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는 개미 한 마리 보지 못했다.

보통 사람보다는 단련된 체력을 가진 나와 D였지만 솔직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그것도 낮에 이미 고단한 여정중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좀 무리였다. 그래도 나와 D는 불평 한마디 없이 그 긴 거리를 쉼없이 달렸고, 해가 뜰 때 쯤에는 S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날 우리가 북쪽 도로로 나갈 때 의심스런 눈길을 보내던 파수병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들여보내주었다. 마음에 드는 표정은 아니었다. 우리가 간밤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면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가 갑자기 궁금해졌지만, 한시가 급했다.

보통 성문을 통과하면 시내로 들어가는 다른 이들과 달리, 성루 위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을 뛰어올라가자 파수병들이 놀라 뛰어왔다.

“뭐, 뭐요!”
“아, 헉, 그러니까, 다른 용무가 아니고, 안내가 필요해서 그렇소.”

파수병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하도 숨이 가빠 다시 말하는 게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지경이었는데 못 알아들은 얼굴을 하자 그냥 나 죽었소 하고 누워버리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나 대신 D가 똑같은 말을 반복해 주었다. 그는 그래도 나보다는 덜 지쳐 있었다. 파수병들 중 한 명이 되물었다.

“안내라니? 무슨 안내를 말하는 거요?”
“당신들의 최고 통수권자. 시장님에게 안내해 달라는 거요.”
“시장님에게 안내 해 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이유가 뭐요?”

지금 숨 넘어가게 생겼는데 이유고 뭐고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심각한 회의가 들었다. 파수병들은 미친 사람을 쳐다보는 듯한 표정으로 우릴 보고 있었다.

“당신네들을 위협하는 괴물의 정체와 피해를 안 입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주려고. 이 정도면 됬소?”

확실히, 우리가 그들에게는 실성한 사람처럼 보일 것이라는 것 쯤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조롱기 어린 미소와 동정심이 가득 묻어나는 시선은 감내하기 어려웠다.

“자 자, 이만 돌아가 보시오. 시장님은 그렇지 않아도 바쁘시고, 당신이 아니더라도 조언해 줄 사람은 많소.”

그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떠밀어 내었다. 귀찮은 날파리를 쫓아내는 듯한 동작이어서 화가 폭발할 지경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밀려 두어 계단 내려가야 했지만, D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주 급하오. 당신들과 실갱이할 정도로 한가한 것도 아니고. 한 명만 나와 내 동료를 시장님에게 데려다 주면 되지 않소? 당신들은 연락병도 없소?”
“하, 이거 정말 미치게 하네. 이보쇼, 당신 대체 직업이 뭐요? 당신이 무슨 현자라도 되오? 응? 괴물을 잡아 본 적은 있소? 뭘 좀 알면서 지껄여야지.”

D는 그다지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분명 답답해하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해코지를 당하지도 않을 것이고, 해코지를 할 것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지만 나는 상황에 전혀 진전이 없음을 깨달았다. 뭔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고 생각하고 막 고민하던 찰나에, 그 다른 방법은 저절로 찾아들었다.

“무슨 소란이냐?”
“아, 사령관님! 잘 오셨습니다. 아 글쎄 이 사람들이 막무가내로 시장님을 뵙게 해 달라면서…”

사령관? 나와 D는 동시에 새로 등장한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인물을 외모로만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실, 어떤 사람의 성격을 파악할 때 외모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잘 생기고 못 생기고를 떠나서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이 대충 짐작이 가니까. 사령관이라는 남자는 생긴 것 부터가 차갑고 잔인했다. D를 보면 그에게서 노련한 방랑자의 느낌을 얻을 수 있듯이, 사령관이라 불린 남자는 정말 사령관처럼 생겼었다. 사령관은 사령관이되, 때에 따라서는 아군도 거림낌없이 희생할 수 있는 그런 사령관. 적들이 죽어가는 것이 단지 승리의 영광으로만 보이며,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승리를 만끽하고, 또 그럴 만한 실력이 있는 사령관.

“뭔가? 계엄령 하에서는 때에 따라서 즉결처형도 가능하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그건 시민에 한해서지요. 외부인에게는 적용이 안 됩니다.”
“군사행동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외부인은 적으로 규정, 사살하지.”
“결코 당신들에게 해 되는 일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큰 도움이 되겠지요. 저와 제 동료는 밤새도록 달려와 이것을 알려주려고 하는 데, 당신 병사들이 이렇게 저희를 막으면 오히려 병사들이야말로 처형당해 마땅한 겁니다.”

사령관의 날카로운 눈이 한번 D를 훑고, 다시 병사들을 훑었다. 파수병들은 그럴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만약에 하는 생각에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파수병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사령관은 별 말 없이 우리들에게로 돌아섰다.

“그래서, 무얼 알려주겠다는 건가?”
“여기서는 말씀드리기가 좀 곤란하지만, 괴물에게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는 방법입니다.”
“괴물에게서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는 방법? 하하, 그런 거라면 걱정 없네. 내가 이미 다 준비해 놨으니까.”
“괴물이 어떤 놈인지 아시기나 합니까?”
“알지. 그러니 가 보시게.”
“괴물을 그냥 죽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괴물을 직접 보았고, 괴물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공격하던 피해만 늘 뿐입니다. 우리는…”
“계속 떠들면 군사행동에 반하는 행동으로 간주하겠네.”

명백한 추방령이었다. 척 보기에도 그는 우리에게 관심이 없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사람을 몇번 만나본 적이 있었다. 잔인하고 냉정하고, 오만한데다가 독선적이기까지 한 인물. 이런 인물은 남의 말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는 전형적인 형태의 인물이었다. 특히, 자신이 일단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사령관이라는 말을 미루어 보아 그는 괴물을 상대할 계획을 다 세워 놓았을 텐데, 이미 준비되어있는 계획에 새로운 변수가 끼어드는 것을 용납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D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쯤에서 이미 상대가 난공불락의 고집불통임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소란인가?”

차갑고 냉정한 사령관의 목소리와는 조금 다른 목소리였다. D와 나의 시선이 새로운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했다. 사령관이라는 사내보다 적어도 이십살은 더 많아 보이는 장년의 거한이었다. 나는 재빠르게 새로 등장한 자의 모습을 훑었다. 거만하고 완고하기는 사령관과 엇비슷해 보였으나, 차갑다기 보다는 다혈질적인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치안대장이시오? 여긴 별일 없소이다. 단지, 웬 외부인들이 생떼를 쓰길래. 치안대장께서 직접 신경쓰실 일이 아니외다. 가서 주민통제나 해 주시지요.”

사령관의 말에 조롱기가 묻어 있는 것도 놀라웠고, 치안대장이라면 한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는 존재이니만치 군대가 주둔하지 않는 이상 시장을 제외하고 한 시의 최고 군통수권자인데 사령관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도 놀라웠다. 무엇보다도 치안대장이 한참 어려보이는 사령관에게 쩔쩔매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허, 험. 아니, 무슨 생떼이길레 사령관이 곤란해하시오 그래? 이봐, 자네들!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소란을 피우나?”

난 이때라고 생각했다. 바늘끝 들어갈 틈도 없는 사령관에 비해 이 사람은 좀 말이 통할 것 같았다. 확실히, 치안대장은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다.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사람을 구워삶을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다. 사령관이 뭐라고 나서기도 전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예, 저희는 이 부근을 여행하는 여행자였습니다. 전날밤에 S시를 거쳐 북쪽 도로로 갔었는데 그만 간밤에 괴물과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그 괴물을 상대하는데 도시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갖고 있어서 시장님과 만나려구요.”

그때 치안대장의 얼굴에 떠오르는 희색이란! 조금 후에 알게 되었지만, 치안대장은 원래부터 S시의 치안대장이었다. 그러나 시장은 괴물의 위협이 닥쳐오자 용병대를 하나 고용하고, 그 용병대장을 시의 모든 군사력을 거머쥔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치안대장으로써는 어쨌든 임시로나마 자신 이상의 직위를 가진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야 했지만, 결코 즐거울 리가 없었다. 그에게는 뭐가 되었든 사령관의 뜻과 반할 건수가 필요하였고, 우리는 아주 좋은 핑계거리였던 것이다.

“아, 그런 일이라면 진작 말하지 그랬나? 내가 시장님을 뵙게 해줌세.”
“치안대장!”
“왜 그러시오?”

사령관의 얼굴에서 조소가 사라지고 무섭게 냉막한 표정이 드러났다. 치안대장은 약간 뜨끔한 듯 했지만 최대한 뻔뻔스럽게 행동했다. 나와 D는 당연히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행객이 되어 슬그머니 치안대장의 옆으로 가서 섰다.

“쓸데없는 정보로 시장님의 귀를 흐트럽히지 않았으면 좋겠군. 괜히 내 작전을 망치지 말고.”
“아아, 쓸데없는지 아닌지는 들어봐야 하지 않겠소이까?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정보라면 들어봐야 하지 않겠소?”

사령관의 날카로운 시선이 나와 D를 찔렀다. 그 정도로 겁먹을 우리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한 시선도 몇번이나 받아본 적이 있었으니까. 우리는 아주 당당하게 치안대장의 뒤를 따랐고, 치안대장은 등 뒤로 쏟아지는 사령관의 따가운 시선을 은근히 즐기는 듯 했다.

치안대장의 목적이 애초부터 괴물을 막을 만한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사령관이 싫어할 만한 짓을 하고 싶었던 것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령관은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도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용병 나부랭이’라느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의 작전이란건 실패할 게 뻔하다’ 라는 식으로 사령관에 대한 유치한 적개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나와 D가 시장에게 어떤 정보를 제공하려고 하는 지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으니, 사실 시장이 이런 자에게 괴물을 상대할 군통제권을 주지 않은게 당연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런데 저희는 지금 어디로 갑니까?”

한참 사령관을 깎아내리는 데 열중하던 치안대장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했다. 그는 잠깐 주위를 둘러보더니, 지금까지 묵묵히 그를 에스코트하던 병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행히 길을 물어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 정도로 무능했다면 나와 D는 고개를 젓고 그 자리를 벗어났을 것이다. 병사는 미리 달려가 우리가 도착하는 것을 알리도록 명령받았다. 병사에게는 좀 미안했지만, 치안대장의 설명을 들으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함부로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가 안내된 곳은 S시의 심장, S시의 모든 부가 흘러드는 곳, S시의 모든 것을 상징하는 탑이었다.

S시의 심장, 그 탑의 고유명사는 따로 있지만 그러면 굳이 S시의 이니셜을 사용하는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니까, 알 만한 사람들은 또 다 알테니까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앞으로는 S시의 심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겠다.

S시의 심장은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아 있었다. 아마도 현재 있는 모든 건축기술의 최고의 정수만을 모아 만들었을 이 탑은 사실 애초에 나와 D가 S시로 관광을 오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급하게 S시를 떠나는 바람에 멀리서 다른 건물들 위로 치솟은 꼭대기밖에 보지 못했지만, 결국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감회가 남달라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아주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마치, S시의 모든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야말로 이 S시의 심장이 아닐까 하는. 황금의 부, 화려한 명예 뿐 아니라 차갑고 어두운 것들 마저도 말이다.

치안대장이 가까이 다가가자 경비병들이 길을 비켜 주었다. 양 쪽으로 창을 들고 도열한 경비병들의 모습에 나는 괜스레 주눅이 들었다.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형태였다. 아주 심하게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위가 아래보다 더 넓다는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위로 올라갈 수록 좁아지는 것이 탑의 당연한 모습인 줄 알았던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저런 형태의 건물이 유지가 될 정도라면, S시의 심장을 건축하는데 들어간 돈은 정말 천문학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탑 안으로 들어서자 수없이 많은 문들이 나를 반겼다. 탑의 구조는 단순했다. 정 중앙에 기둥이 있고, 그 기둥을 따라 나선형 계단이 끝도 없이 감고 위로 올라간다. 각 층에는 둥근 벽을 따라 방들이 늘어서 있고, 각 방은 말하자면 일종의 개인 금고인 셈이다. S시에 사는 사람들의 것이 아닌 것들도 많았고, 심지어는 S시에 드나드는 상인도 아니면서 멀리서 굳이 이 탑에 개인의 금고를 두는 사람들도 많다고 치안대장은 설명했다.

나는 각각의 방 안에 얼마나 많은 재화가 쌓여 있을 지 감히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다시 한 번 놀란 것은 탑에서 각 층을 이동하는 방식이었다. 시장은 지금 탑 정상에 있다고 들었기에 저 까마득하게 높은 높이를 걸어 올라갈 생각을 하며 계단쪽으로 가던 나는 자연스레 기둥쪽으로 가는 치안대장때문에 무안당하고 말았다. 치안대장은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기둥에 붙어있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얼른 그 뒤를 따라 들어간 나와 D는 갑자기 바닥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기겁을 하고 말았다. 치안대장은 나와 D가 당황해 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피식피식 웃었다. 화도 났지만 그 순간 내 감정을 지배한 것은 경이였다.

막대한 부가 잠자는 이 탑에 아마도 나와 D같은 이가 발을 들인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마치 탑이 나를 거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만약 건물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S시의 심장은 틀림없이 말했을 것이다. 어디서 이런 촌놈들이 들어오느냐고.

덜컹, 하고 다시 한번 나를 기절하게 만든 진동은 우리가 어느새 탑의 꼭대기에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움직이던 바닥은 멈추었고, 나와 D는 잔뜩 주눅이 들은 체로 움직이는 바닥에서 걸어나왔다. 치안대장은 갑자기 얼굴을 딱딱히 굳히고, 아주 정중한 동작으로 앞을 향해 절했다. 무의식중에 나와 D도 그를 따라하고 말았다. 그래야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인사는 그정도면 됬고. 그래… J, 손님들을 모셔왔다고?”
“예, 숙부님.”

치안대장이 내 앞에서 비켜서자, 숨 막힐 것 같은 강렬한 황금빛이 나에게 쏟아졌다. 눈이 빛에 익숙해지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어렴풋이 의자가 보였고, 거기에 앉은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고, 주변에 도열한 호위들이 보였다. 눈을 찌푸리자 겨우 빨간 융단이 바닥에 깔려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너무 갑자기 밝아진 실내 때문에 나는 몇 번이나 눈을 깜박거리고서야 사물들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허리에 칼을 차고 있는 건장한 호위병들이 좌우로 도열한 뒤로 푸른 하늘이, 그리고 S시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눈부신 빛은 한낮의 태양이 내뿜는 빛이 열려진 발코니로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었고. 화려할 거라고 짐작했던 커다란 의자는 이제 보자 딱딱한 회색빛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돌로 만든 의자에는 초라한 노인이 한 명 앉아 있었다. 그렇다, 이미 장년의 나이인 치안대장에게 삼촌 소리를 듣는 것을 보면 결코 젊은 나이는 아닐 터였다. 노인의 얼굴에는 이미 저승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돌의자에 얹히다 시피 한 쭈그러든 육체는 다 녹은 양초처럼 보였다. 허나 그 눈빛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아니, 살아 있을 뿐 만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어떤 눈보다도 맹렬한 전사의 눈이었다. 검을 들고 방패를 들지는 않았으나, 항상 자신보다 강한 것과 맞섰고 그리고 결국 승리를 거둬온, 쟁취의 의미를 아는 전사의 눈.

“나는 본래 여행자들과의 환담을 마다하지 않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 만치 잡설은 필요없고 본론으로 들어가 주길 바라네.”

시간이 없기는 이쪽도 비슷했던 지라, D는 지체하지 않고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가 어떤 식으로 괴물을 만났는지를 이야기했다. 우리가 어떻게 마을 안으로 들어갔고, 괴물과 조우했으며, 여자를 만났다는 부분까지 이야기 했을 때, 묵묵히 듣고 있던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본론으로 들어가라고 한 것은, 당신들의 요구사항을 말하라고 한 거였지 상황설명을 하라고 한 게 아니었네. 먼저 요구사항을 말해보게. 그걸 받아들이지 안 받아들일지에 대해 날 설득하는 것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누군가와 대화하면서 주도권을 뺏겨본 일이 별로 없었을 텐데도, D는 그다지 당황해 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의 요구사항을 말했다. 한 문장으로, 추호도 주저하지 않고, 평상시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말투로.

“모든 병사들의 무장을 해제하십시오.”

노인은 웃었다. 얼굴에 비틀린 주름들이 가득해졌다. 순간 나는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꼈다. 마치 괴물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가슴이 꽉 메이고 차가운 무언가가 등골을 훑어내렸다. 다 죽어 가는 육신 속에는 괴물 만큼이나 강한 전사가 도사리고 있었다.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전사가.

“설득해 봐.”

나는 주변에 늘어선 병사들을 곁눈질했다. 그들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고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아까보다도 더 크고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혹여 D의 발언을 고깝게 받아들이고 우리를 해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와 활로를 찾기도 어려웠다. 호랑이 굴 한 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셈이었다. 나처럼 속으로는 걱정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태연한 건지 D는 여전히 평온한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제가 보았을 때, 지금 괴물은 그냥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 마녀의 비술로 변한 괴물입니다.”
“마녀의 비술로 변한 괴물이건 그냥 괴물이건 괴물이긴 마찬가지야.”
“네, 하지만 그냥 괴물과는 달리 마녀의 비술로 변한 괴물은 공격대상을 정하는 데 있어서 제한을 갖습니다. 저와 제 동료가 간밤에 만난 여인이 해준 말로 미루어 보아 그 여인의 형부, 지금의 괴물은 ‘원망하는 자의 심장’ 을 먹었고, 원망하는 자의 심장이 갖는 효과에 대해서는 몇가지 아는 것이 있습니다. 괴물의 모습이나 지금까지의 행동을 볼 때 원망하는 자의 심장을 먹은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리고, 원망하는 자의 심장은 정말 괴물스러운 힘을 부여합니다. 그 육체를 잠식한 원망하는 자의 심장은 원한과 증오를 모두 힘으로 바꾸지요. 그러나 한 가지 맹점은, 괴물로 변한 이상 더 이상 이성을 갖추지 못하기 때문에 원수와 원수 아닌 자의 구분을 거의 하지 못한 다는 것입니다.”

노인의 눈은 여전히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다. 단지 흥미를 보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벌써부터 반감을 품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설득되고 있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눈이었다.

“원수와 원수 아닌 자를 구분할 수 없고, 단지 흐릿하게 기억 속에 남은 형상으로 원수를 찾아 내는 겁니다. 그 원수의 형상은, 무기를 든 자. 그는 무기를 든 자, 공격해 오는 모든 자들을 부숴버릴 겁니다. 그리고 무기를 삼켜버려, 그만큼 더 커지겠지요. 그러나 무장을 해제한다면? 아무도 무기를 들지 않고, 아무도 그를 공격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그는 그저 지나가 버릴 겁니다. 무기를 든 자를 찾아서, 원수를 찾아서.”

노인은 웃었다. 웃음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정말 즐거워서 웃는 웃음도 있고, 비웃음도 있다. 정말 많은 종류가 있지만 어이가 없어서 웃는 웃음도 있다. 지금 그의 웃음은 마지막 종류의 것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무장 해제를 했는데 괴물이 그냥 지나가 버리지 않으면?”
“괴물이 그냥 지나간다에 제 목숨을 걸겠습니다.”

만약 노인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면 나의 목숨도 덤으로 얹어졌을 것이다.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노인은 D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인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우리를 불렀다.

“가까이 와 보게. 이 쪽으로.”

나는 좀 우물쭈물하면서 앞으로 나섰다. 나름대로 많은 여행을 했다고 자부하지만 사실 나는 호위 병사를 둘 정도로 높은 사람의 앞에 나선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나와 D가 그의 앞에 서자 놀랍게도 노인이 후들거리면서 일어났다. 놀라 달려온 치안대장의 부축을 받아서야 겨우 걸음을 옮길 수 있을 정도 였지만 아직 몸을 일으킬 만한 힘이 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웠다.

걸음을 옮기는 것이 무척 힘겨운지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는 손짓으로 뜻을 전했고,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 발코니로 자리를 옮겼다. 노인은 저 멀리 펼쳐진 지평선에 시선을 던졌다. 아, 그것은 정말로 멋진 광경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 올라와 있음을 실감했으며, 내 발 아래 끝도 없이 펼쳐진 대지를 볼 수 있었다. 시의 남쪽으로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황무지. 그 가운데를 흐르는 한 줄기 강물과, 그 강에 기대어 허허벌판에 세워진 거대한 도시. 벅찬 경이가 날 감쌌다. 경배하라, 인간의 위대함을.

나는 순간적으로 S시에 대해 깊은 애정을 품게 되었다. 이 거대한 도시를 일궈낸 명예의 일부가 나에게도 있는 것처럼, 이런 거대한 도시를 지은 인간의 하나임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만약 그 상태가 좀 더 지속되었다면, 나는 정말로 S시에 대한 애정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 광경을 내가 처음 S시에 들어오자마자 볼 수 있기만 했었어도, 순수하게 이 광경을 볼 수 있는 여행자의 입장이기만 했었어도 나는 S시를 경배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미 그 뒤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먼저 보고 말았다.

“어떤가.”
“멋지군요.”

노인의 물음에 D는 평이한 어조로 답했다. 화술이 좋다는 것은 단지 말재간이 뛰어난 게 아니라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고 상대를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들이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D는 특히 그런 쪽에 능해서, 심드렁한 그의 어조는 노인에게 조바심을 일으켰다. 허나 D에게는 불행하게도 나 라는 사람은 그런 쪽에 그리 능하지 않아, 노인은 내 얼굴에 서린 경탄의 표정을 읽고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이야기의 주도권은 여전히 노인이 쥐고 있었다.

“이 도시를 세우기 위해 내가 어떤 노력을 들였는지 아는가. 이 도시는 내가 피땀 흘려 세운 거 야. 내 평생을 바친 도시, 아니, 이 도시 자체가 내 평생일세.”

보통 노인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 할 때, 그들의 얼굴을 회한에 젖는다. 그러나 그는 S시의 시장이었고, 지금도 S시의 시장이다. 한 단체의 장은 강건해야 하며 노인은 그 점을 잊지 않았다. 힘없는 육체와는 다르게 여전히 불타는 눈동자가 나를 스쳐 D를 향했다. 단지 스친 것만으로도 나는 흠칫 놀랐다. 육체가 얼마나 젊은가, 육체가 얼마나 강한가와는 관계 없다. 그것은 기백의 문제다.

“내가 이 도시를 세우면서 겪은 일들을 일일이 설명해 줄 수는 없네. 그러나 알아두게. 세상에 무엇보다도 강한 힘은 돈과 칼이라는 것을.”
“그러나 시장님에게도 아무 것도 없는 시절이 있었을 테지요. 돈도, 칼도 없는.”
“도박이 있었지. 젊음을 건 도박. 그러나 도박은 다만 도박일 뿐이야. 도박은 계속된 힘을 부여하지 못하네. 그리고 자네는 나에게 도박을 요구하고 있어.”
“저는-.”
“저기를 보게.”

노인은 D의 말을 끊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저 멀리, 그의 도시 언저리, 작은 집들의 사이로 유난히 번쩍이는 것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나는 그것이 한 무리의 병사들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후의 강렬한 햇빛이 그들의 갑옷을 찬란하게 했다.

“저것이 바로 나의 힘이네. 칼, 내가 돈을 주고 산 칼들이지. 저들이 언제부터 여기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나? 저들은 괴물을 막기 위해 급히 불러모은 어중이 떠중이들이 아닐세. 사령관을 만났다니 알겠지. 그들은 괴물을 막기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 산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네. 아주 오래 전부터, 내 힘이 되기 위해. 그 대상이 괴물로 바뀌었다고 해서 그들의 힘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야.”
“시장님은 평화로운 방법을 버리고 일부러 피를 부르려 하시고 있습니다.”
“이보게. 나도 젊었을 때는 도박을 좋아했네. 하지만 이제 도박 같은 것을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어. 내 나이에 맞는 것을 해야 겠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에 목숨을 맡기기 보다는, 미리 준비할 줄 아는 지혜가 더 낫네.”

노인은 어느새 우리의 앞으로 나아가 발코니에 기대어 서 있었다. 세찬 바람이 연거푸 몰려와 그의 백발을 흐트러트렸다. 노환으로 깡마른 그의 몸과 헐렁한 옷가지는 바람에 날려가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뒷모습에서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전사였고, 전사의 방식으로 괴물을 상대할 것이다. 방랑자의 방식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괴물, ‘그’와 그의 처제가 S시에 방문한 것은 오후 느지막해서였다. 결국 아무 성과 없이 시장의 앞을 물러나온 우리는 그제서야 겨우 늦은 아침 겸 점심 겸 저녁을 해결하고 있었다. 전날 밤 이후로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체 장거리를 달린데다가 S시에 들어와서도 심하게 체력을 소모한 우리는 겨우 지친 몸을 쉬며 체력을 회복하려고 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내가 막 따뜻한 오트밀을 한 입 먹는 순간, 병사들의 찢어지는 듯한 고함 소리가 울려퍼졌다. 빈 속에 잘도 고기를 쑤셔넣던 D는 사레가 걸려 켁켁거렸고, 나는 끔찍하게 배가 고팠음에도 불구하고 입맛이 싹 달아나 식사를 중단해야만 했다.

올 것이 왔다, 그런 심정이었다. D는 말없이 일어나 식당 주인에게 음식값을 지불하고 거리로 나왔다. 계엄령 하인데다가 드디어 괴물이 나타났으니 식당 주인은 빨리 식당 문을 잠가버리고 싶어했으므로 우리가 나가려 하자 아주 반기는 얼굴이었다. 그래서인지 D가 동전 2개를 부족하게 지불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신없이 북쪽 문으로 달려갔다. 병사들이 막아서 성벽까지는 갈 수 없었지만, 대신 우리는 근처의 3층집 하나를 찾아 들어갔다. 그 집은 물론 문을 잡아 걸고 있었다. 나와 D는 서로를 도와가며 근처의 큰 상자를 발판삼아 2층의 테라스로 올라갔고, 다시 거기서 3층의 옥상으로 기어올라갔다. 어차피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발사!”

오후였고, 북쪽 문이었기에 햇살은 옆에서부터 쏟아져 들어와 사수들의 시야를 방해했다. 하지만 훈련된 사수들에게 그런 것 쯤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애초부터 표적의 크기가 큰 탓도 있었고. 수십장의 종이를 차례대로 넘기는 소리가 들릴 때에야 나는 옥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수 많은 화살들이 하늘을 날았다. 괴물은 피하지 않았다. 멀었기에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옆으로 날아간 화살 몇발을 제외하고는 전부 명중이었다. 물론 괴물은 전혀 피해가 없는 듯 여전히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만둬!”

내 외침은 사령관에게도, 사수에게도 닿지 않았다.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호기심에 다가오는 민간인들을 통제하는 병사들의 고함소리와, 발사를 명령하는 사령관의 외침과, 화살의 날카로운 파공성만이 모두의 청각을 지배하고 있었다. 세번, 네번, 일제사격은 계속되었다. 괴물은 계속 걸어왔고, 북쪽 숲에서 완전히 벗어나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벌판으로 나왔다. 괴물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똑바로 걸었다.

“빌어먹을, 그만두란 말야! 보고 쏴!”

그렇게 고함을 친다고 될 일이 아니란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홉번째 일제사격 때, 괴물의 발뒤꿈치 언저리에서 작은 무엇인가가 멈추었고, 땅으로 쓰러졌다. 그것은 더 이상 괴물을 따라오지 않았다. 아무도, 정작 그 화살을 발사한 사수도, 다른 어떤 사수도, 사령관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북쪽 숲으로 가는 길 언저리에 버려진 가련한 여인의 시신을 수습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다음날의 일이었다.

죽은 여인의 형부가 마침내 달리기 시작했다. 사령관은 더 이상 일제사격을 명령할 수 없었고, 대신 사수들의 의지와 판단에 맞긴 자유사격을 명령했다. 화살은 그야말로 빗발치듯 쏟아져 내렸다. 괴물은 그 모든 화살들을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전혀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눈 좋은 사수들이 더 이상 어렴풋한 형체가 아니라 또렷한 괴물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쯤, 괴물은 힘차게 팔을 휘둘렀다. D가 황급히 내 머리를 잡고 땅바닥에 찍어누르지 않았다면 나는 이마 한복판에 칼을 꽂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죽을 뻔 했다는 공포가 나를 사로잡기도 전에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괴물은 여전히 아까와 같은 속도로 돌진해 오고 있었고, 어느새 해자 앞까지 육박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괴물을 막기 위한 사수들은 태반이 성벽 위에 쓰러져 있었다. 괴물의 팔에 박혀있던 많은 무기들, 태반은 바로 사수들이 직접 쏘아낸 화살들이 거꾸로 그들에게 쏟아져 내린 것이다. 개 중에는 전부터 괴물에게 박혀 있었던 칼이며 창도 있었다. S시를 관통하여 흐르는 H강의 물길 일부를 돌려 만든 해자는 대단히 깊었으나 괴물에게는 고작 허리까지밖에 차지 않는 것이었다.

안쪽에서 보기에, 성문은 난공불락의 어떤 것으로 보였다. 원래도 튼튼할 성문에 세 개나 되는 강철 빗장을 달은 데다가 그 위에 통나무를 덧대었고, 다시 목재로 만들어진 버팀목으로 문을 받쳐 놓았다. 차라리 성벽보다도 더 튼튼하게 만들어졌다고 할 만한 그 성문을, 괴물은 두 번 주먹으로 찍어 균열을 내었다. 그 사이 성벽 위에서는 부상자들을 끌어 내렸고 살아남은 사수들이 화살을 쏘았다. 몇몇 병사들이 성벽 위로 커다란 기름통을 날랐고 펄펄 끓는 기름이 괴물에게로 쏟아졌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괴물을 단지 화나게 할 뿐이었다. 쾅, 쾅 하고 성문이 울릴 때마다 나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꼈다.

한 순간 성문의 중심부가 박살나며 괴물의 두 손이 그 구멍을 쑤시고 들어왔다. 문은 힘없이 부서져 나갔고 마침내 괴물은 그 거대한 몸을 성문 안으로 들이밀었다. 괴물은 정말로 컸다. 성문이 조금만 낮았더라도 괴물은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야만 했을 것이다. 전날밤에 보았던 누워있는 형체로 그 크기를 짐작하긴 했지만, 이제 보니 웬만한 이층집은 그의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성문의 뒤로는 여러 개의 목책이 엇갈려 배치되어 있었고, 각 목책의 뒤에는 창병이 3 명씩 서 있었다. 그러나 이미 성문을 부술 수 있는 괴물의 힘 앞에서 내 키보다도 낮은 목책이 얼마나 도움이 될 수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목책은 괴물이 발로 차자 부서져 나갔고, 창병의 경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 어떤 운 나쁜 창병은 괴물의 복사뼈 밖으로 삐져나와 있던 칼날에 꿰여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의 시체는 한동안 괴물의 발 옆에 매달린 체 끌려다녔다.

태양 아래 드러난 괴물의 모습은 간밤보다도 더 흉측했다. 괴물의 파괴력은 간밤에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고, 병사들의 용기도 상상 이상이었다. 용감한 병사들이 달려들어 괴물의 몸에 각자의 무기들을 꽂았다. 괴물은 피하지 않았고, 전설 속의 용처럼 단단한 껍질로 튕겨내지도 않았다. 원망하는 자의 심장을 먹은 괴물, 무기를 부수는 자는 자신의 몸에 꽂힌 무기들을 흡수했다. 무기들이 박힌 상처에서 꿈틀거리는 것들이 기어나와 무기들을 휘감았다. 쩔그렁 쩔그렁 쇠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괴물의 살갗 바로 밑에 꽉 차 있는 무기들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괴물이 팔을 휘두르자,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피했다. 그러나 괴물은 가차없이 병사들을 쓸어내었다. 병사들 중 일부는 그 팔에 깔려 한 줌 핏물로 화했고, 어떤 병사들은 칼날에 난자당했다. 괴물의 팔과 단단한 보도블럭이 부딪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대체로 보도블럭이 깨진 돌조각이었지만 개중에는 부서진 쇳조각들도 섞여 있었다.

참혹한 죽음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죽음은 값어치를 했다. 수적들이 상선을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H강을 따라 배치된 공성병기들은 S시의 시장이 대여료를 지불하고 일주일 전부터 준비해 놓았었단다. 성문을 부수고 성벽을 허무는 무시무시한 발리스타가 거기 놓여 있었다. 한 대도 아니고 두대 씩이나. 네 사람이 한 조가 되어야 겨우 감을 수 있는 타륜을 돌려 감은 시위는 터질 것 처럼 팽팽해 져 있었다. 나는 공성병기가 작동하는 것을 처음 보았지만, 저 어마어마한 크기의 통나무가 과연 발사될까 하는 의문은 머리속에서 싹 지워지고 말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발사 직전의 발리스타는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과도 같은 힘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걸쇠의 한쪽 끝을 눌러주는 것으로 발사의 과정은 끝났다. 한계까지 늘어났던 철사와 아교와 쇠 심줄의 시위는 지금까지 병사들이 힘겹게 감아 놓은 타륜을 맹렬하게 거꾸로 회전시키며 풀려나갔다. 동시에 발리스타 위에 얹혀져 있던 것이 사라졌다.

괴물은 간밤에도 들었던 그 섬뜩한 괴성을 질렀다. 피가 싸늘하게 식고,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도 그보다는 아름다운 소리를 지를 것이다. 고통과 분노로 괴물은 뒷걸음질 쳤지만, 끝내 쓰러지지 않았다. 거의 괴물의 팔뚝만한 통나무 두 개가 괴물의 가슴팍에 박혀있었다. 그 크기에 걸맞게 제 위력을 발휘한 발리스타는 괴물의 가슴팍을 꿰뚫어 그 안에 가득 찬 무기들을 박살내고 거대한 화살촉을 괴물의 등 뒤로 내밀고 있었다.

괴물의 뒤로, 북문으로 가는 길가에 늘어선 집들은 쇠의 파편과 나뭇조각과 흉물스런 괴물의 살점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런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발리스타였기에, 두 번째 발사를 허용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괴물은 힘겹게 앞으로 움직여 발리스타를 짓밟았다.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동안 괴물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무런 행동도 안하고 멈추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만, 괴물은 그 자리에 서서 소화불량을 해결하고 있었다. 괴물의 키가 갑자기 낮아지면서 가슴팍 끝에서부터 늘어난 살들이 쇠뇌를 덮어버렸다. 꿈틀거리는 것들이 그 쇠촉을 휘감아 안쪽으로 잡아당겼고, 괴물의 살갗은 찢어지기도, 늘어나기도 하면서 그 거대한 쇠뇌를 끝끝내 집어삼켰다. 이 과정 내내, 나는 헛구역질을 했기에 그 광경을 자세히 지켜보지 못했다. 아니, 지켜보지 않았다는 게 옳으리라. 그건 정말 꿈에라도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소화를 끝낸 괴물은 이번에는 길가로 시선을 돌렸다. 병사들은 더 이상 덤벼들지 않았고, 단지 멀찍이서 포위하듯 진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공성병기로도 어쩌지 못한 괴물을 그들의 미력한 칼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괴물이 길가로 시선을 돌렸다는 것은, 괴물이 길가의 집들을 장애물로 인식했다는 뜻이었다. 파괴는 한순간이었다. 벽돌로 만든 집들이 잠깐 사이에 허물어졌다. 나는 그 안에 사람들이 없었기를 간절히 기원했지만, 그건 헛된 기원이었을 뿐이다. 괴물이 팔을 들어올리자 그 밑에서 핏덩어리가 뚝뚝 묻어나왔다.

내가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다.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칼을 뽑아들었고, 그것을 괴물을 향해 던졌다. 살갗을 뚫고 박히나 싶었던 내 칼은 괴물의 몸 안쪽 어딘가에 있는 다른 무기와 부딪친 모양인지 텅 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나왔다.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괴물의 주의를 끄는 데는 성공했다. 다만 문제는 저만치 있는 병사들이 나를 구하기 위해 달려와 줄 확률이 없다는 데 있었다.

병사들에게 가 있던 내 시선이 정면을 향했을 때, 괴물의 아무것도 없는 눈, 구역질나는 그물 같은 것이 들어찬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절망적으로 웃었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뭐가 뭔지 알 수도 없는 찰나의 순간 격렬한 고통이 옆구리를 쑤셨다. 나는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3층 옥상에서 떨어졌지만 그래도 돌로 된 도로보다는 덜 단단한 것이 바닥에 있어서 죽지는 않았떤 모양이었다. 내 밑에 깔린 것은 봉투에 담긴 지저분한 음식물 쓰레기였다.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으나 독한 냄새도 정신을 빨리 차리는데 도움이 별로 안 되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일어서자 괴물은 어느새 내가 올라서 있던 건물의 지붕을 날려버린 손을 다시 들어올리고 있었다.

미처 몸이 반응하기도 전에, 괴물의 주먹이 내리꽂혔다.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사신은 아직 이 미욱한 여행자를 데려갈 생각이 없었던 모양인지, 내 앞에 D를 데려다 놓았다. D는 자신의 검을 빼어들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건 기적같은 일이었다. 건물을 한방에 때려부수는 괴물의 주먹을 D가 칼 한자루로 비껴낸 것이었다. 물론 정면으로 막았다면 D도 나도 한꺼번에 한줌 핏물로 화했을 터였지만, 그는 노도와도 같은 힘을 옆으로 흘려냈다. 비록 그의 검은 산산히 부서졌지만 어쨌든 그 한번의 공격을 흘린 것으로 족했다. 우리는 미친듯이 달렸고, 괴물은 우리가 죽어라 달린 거리를 두 걸음 만에 따라왔다. 다행인 것은 방금 전 괴물이 삼킨 쇠뇌가 육중한 무게로 그 걸음을 느리게 하고 있다는 점 정도였다.

미친듯이 달리던 나는 내 등 뒤로 내리꽂히는 어두운 그림자를 감지하고 옆으로 굴렀다.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어마어마한 주먹이 내리꽂혔지만 다행히 나는 무사했다. 다시 한번 몸을 일으키는데 눈앞이 핑 돌았다. 체력이 한계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지러움에 간신히 벽에 손을 짚고 일어나기는 했는데, 도저히 괴물의 다음 공격을 피할 힘이 나지 않았다. 나를 괴물의 손아귀에서 구한 것은 한 명의 외침이었다. 저 만치, 동문으로 연결되는 길에서부터 무엇인가 시커먼 것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길죽한 검은 몸체와 그것을 실어 나르는 수레. 맹세코 나는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언뜻 무슨 무기로 보였지만, 거대한 발리스타조차도 쓰러트리지 못한 괴물을 검은 원통으로 쓰러트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랬다. 그 검은 것을 싣고 있는 수레 바로 뒤에 말을 타고 따라오던 사령관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괴물의 시선을 그 쪽으로 유도했다. 덕분에 나와 D는 재빨리 골목 한켠으로 숨을 수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우리가 S시의 한복판에 와 있음을, 조금 전 내가 짚고 일어선 벽이 탑 ‘S시의 심장’ 임을 깨달았다. 어느새 하늘은 붉은 노을이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해가 지지는 않은, 그래서 파란 하늘이 여전히 보이지만 불분명한 회색빛의 경계선 너머로 구름은 아름다운 주홍과 붉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괴물은 탑을 등지고 서서 포효했다. 그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저 시커먼 원통을 깨부수고 싶어했다. 그가 가진 원한만큼이나 강력한 주먹이 다시 하늘 위로 치켜올려졌다. 천지를 울리는 굉음이 터져나왔다.

그건 대포라고 불리는 신무기였으며, 시장의 요청으로 군에서 보내준 물건이었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파괴력 시험을 거친 적이 없는 무기였기에 군의 신무기를 이런 용도로 사용하게 허락해 주었던 것이다. 대포의 위력은 단 한 번의 발사로 극명하게 드러났다. 괴물의 가슴에 거대한 철환이 박혀들었고, 발리스타 때와는 비교도 안되는 양의 쇳조각과 살점들이 폭발하듯 흩날렸다. 괴물은 쓰러지듯 탑에 기대었다. 뒤이어 달려온 두 문의 대포가 추가되었다. 세 문의 대포는 한꺼번에 불을 뿜었고, 괴물의 몸이 탑에 박혀들었다. 한 발은 빗나갔고 한 발은 가슴팍에, 다른 한 발은 허벅지께에 맞았다. 대포의 재장전은 발리스타 만큼이나 오래걸리는 일이었지만 그 긴 시간 동안 괴물은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만 괴물의 증오에 찬 눈만이 허공에 분노를 던질 뿐이었다. 세 번째 발사에서 대포 일문이 반동을 견디지 못해 수레바퀴를 부러트려 먹었다. 바퀴가 부서진 대포에서 발사된 포환은 괴물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그 뒤의 탑에 틀어박혔다. 다른 두 문의 대포는 착실하게 괴물의 가슴팍이 있던 자리를 때렸고, 괴물과 함께 탑을 붕괴시켰다. S시의 심장 동쪽 외벽은 그렇게 허물어졌다. 심한 먼지구름과 포연으로 시야가 터무니없이 제한되어 있었기에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나는 무너지는 탑 사이로 쏟아지는 금화의 폭포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무기의 파편들과, 괴물의 선혈 대신 흘러내리는 붉은 노을을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이것으로, 이 지루한 이야기의 끝에 무언가 대단한 반전이라도 있었을 거라고 기대한 당신들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이야기는 끝이다. 나와 D는 그 다음날 S시를 떠났으며 가는 길에 한 가련한 여인의 시체를 길가에 묻어주는 일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그 지역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 후로 나와 D는 몇가지의 흥미로운 모험을 같이 했지만, 이 이야기는 여정 내내 우리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결국 여정의 어느 날 나는 D에게 새로운 목표를 제시했다. 그 목표에 D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며, 좀 아쉽긴 했지만 우리는 서로 작별을 고했다. 물론 1년 뒤에 그와 나는 S시에서 다시 만날 예정이다. 내가 새로 제시한 목표는 영웅찾기였다. 이 목표는 괴물이 쓰러지던 날 S시에서 D가 했던 말 때문에 생각해낸 것이었다. 그날, 시장은– 아, 물론 그는 살아 있다. 고령으로 좀 쇠약한 것만 빼고는 – 우리를 영웅이라고 부르며 약간의 상금을 보내왔다. 시장이 정확히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괴물을 쓰러트린 건 우리가 아니라 그 대포인데도.

아무튼 그 때, 상금을 전달해 주는 병사에게 D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이 세상에 영웅은 없습니다’ 라고. 비록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시도 자체를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점에서 그는 나와 뜻이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고향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혹 이 이야기를 읽은 당신들이 아는 사람 중에 영웅이 있다면 제발 나에게 좀 알려주길 바란다. 우리는 괴물이 아니면서도 무기를 부수는 자, 폭력이 아닌 것으로 폭력을 꺾는 자, 승리를 거둘 때 남에게 패배를 안기지 않는 그런 영웅을 찾는다. 혹시, 당신은 영웅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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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제가 지금까지 써왔던 단편들 중 가장 아끼는 녀석입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 글을 쓰면서 뭔가가 변해버렸거든요.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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