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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무기를 부수는 자(상)

2006.12.12 14:4312.12

[단편] 무기를 부수는 자(상)

Copyright ã 2005 by박 찬일(Chaneel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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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다 보면은 별 이상한 일을 다 보기 마련이지만, H강을 끼고 있는 융성한 상업도시 S에서 겪었던 일 만큼 이상한 일은 없었다. 비록 시 관계자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머릿글자를 사용해 표기하지만, 나의 좁은 머리로 생각해 낸 이니셜인 만큼 누구나 금새 그 진짜 이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부탁컨데 현명한 독자들이여, 이 글의 존재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길 바란다. 내가 누군지 알아내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또 왜일까.

세월의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 없고 세월이 가져오는 변화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던가. 그러나 몇년 전 보았던 S 시의 번화한 모습을 기억하는 나에게 전쟁터와도 같이 변한 S시의 모습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내가 곳곳을 떠도는 유랑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늘상 새로운 것을 접하기 때문에 변화에 익숙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주길 바란다. 나는 유랑자이기 때문에 변화에 민감하다. 내가 한번 본 것은 무엇이든 내가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내 머리속에 남겨진다. 내가 지나쳐간 모든 장소에 대한 기억은 몇년이고 그대로 기억된다. 따라서 변화는 나에게 무척 낯선 것이다. 나는 영원히 현재만을 배회하기 때문에, 새롭게 던져진 현재는 나에게 혼돈을 가져온다. 항상 미래를 기다리며 변화와 접해 사는 당신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S시의 변화가 누구도 기대하기 어렵던 방식의 변화라는 것이었다. 나 뿐만이 아니라 당신들도 S 시의 변화에 대해 들으면 좀 놀랄 것이다. H 강을 끼고 중개무역도시로 출발한 S시의 놀랄만한 발전은 곧 S 시를 부유한 상업도시로 만들었고, S시는 곧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근처 지역의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에까지도 간섭을 하는 중심도시로 발전했다.

이곳저곳을 떠돌던 나에게도 S시의 소식은 곧잘 들려오곤 했다. 워낙에 강성한 도시가 된 S시는 어딜 가도 한번쯤 언급되곤 했으니까.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꿈과 야망의 도시, 낭만과 황금이 넘쳐흐르는 동경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런 S시였다.

상업도시의 변화란 눈부시게 빠르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어느정도 대비를 하긴 했다. 웬만한 것을 보아도 놀라지 않기로, 하늘 아래 가장 크다는 N시 만큼이나 S시가 커졌어도 놀라지 않기로 다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친 여행자를 맞은 것은 굳게 닫힌 성문이었다. 아니, 굳게 닫힌 성문이라니? 난 잠시 내가 S시가 아닌 다른 도시를 찾아온 줄 알았다. 대낮에 상업도시가 문을 걸어잠그고 있으면 그것은 상업도시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제는 제 아무리 대도시가 된 S시라지만 그 근본은 상업도시이다. 아니, 상업을 포기하더라도 대낮에 성문을 걸어잠그고 있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나는 성문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한참 있다가 머리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 전혀 신경쓰고 있지 않았지만, 망루 위에는 사람이 있었다. 창과 칼과 방패를 들고 온몸을 갑옷으로 감싼 병사였다. 병사는 나에게 소리질렀다.

“물러가시오! 성문을 열지 않소.”
“여보시오, 병사양반. 지치고 힘든 여행자를 이렇게 내쫒는 법이 어디있단 말이오. 반나절 길을 걸어왔는데. 게다가 이 백주대낮에 성문을 걸어잠그고 있는 법은 또 어디있소. 좀 열어주시오.”

한참 나를 물끄러미 내려보고 있던 병사는,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더니 다시 소리를 질렀다.

“아 글쎄 안된다니까 그러네! 거 딱하게 됬소만 다른 데로 가보시오. 성문을 열 수 없소.”

곳곳을 떠돌며 몇가지 편법을 몸에 익힌 나였다. 물론 그것이 나쁜 것이고 법에 어긋남을 알지만, 방랑의 생활은 때론 어둠의 기술들을 필요로 하게 했다. 천지에 맹세코 남에게 피해를 준 일은 없다. 때로 나 자신을 곤궁에 빠트리게 한 적은 있지만. 그러나 내가 잔꾀를 부리려다 나 자신에게 불운을 가져온 그 일은, 나의 모든 모험이라고 불릴 수 있는 여행의 속이야기들을 기술한 다른 책에서 읽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S시에서의 이 특별하고 기괴한 이야기만은 다른 이야기들과 따로 다뤄져야 하기 때문에 나의 잡다한 여행 이야기는 과감하게 넘어가기로 하자.

아무튼 편법을 익혔다지만 대부분의 편법이 나의 얄팍한 전낭에서 꺼내진 돈 몇푼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에, 나는 아예 편법을 시도해 볼 수도 없었다. 병사는 망루에서 꼼짝않고 내가 물러나기만을 종용했기에, 나는 결국 제풀에 지쳐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나의 충직한 친구인 D(이 역시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 싫어하는 그 때문에 사용하는 머릿글자이다)는 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의 작은 언덕에서 야영을 하자고 이야기했다. 당시 그와 나는 서로 알고 지낸지 두 달이 조금 넘은 사이였는데, 나보다도 더 오래 세상을 떠돈 그는 오래된 방랑자 답게 차갑지 않은 현명함과 뜨겁지 않은 열정을 겸비한 진짜 방랑자였다. 그의 조언은 대체로 옳았으며 그때그때 최선의 판단이곤 했다. S 시에서 가깝기 때문에 치안이 그런대로 정비되어 있고, 주변이 들판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다가올 위협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으며, 무엇보다 S시가 다시 개방했을 때 빨리 들어갈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가며 그는 나를 설득했다. 언제나 그의 판단을 믿곤 하던 나는 그 순간만큼은 왠지 내키지 않았으나 그에 대한 신뢰는 깊었다. 아, 그렇다고 내가 이제와 그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오래된 방랑자마저도 알아차릴 수 없는 어떤 기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그의 오판을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의 판단은 옳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그런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나는 재빨리 S시를 떠나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았고, 덕분에 내가 어떤 여행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으니까.

아무튼 그와 나는 부산하게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아니, 사실 부산을 떤 것은 나뿐이었다. 가끔 사람들은 나와 같이 떠돌아 다니는 이는 아무데서나 쉽사리 잘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인데, 사실 그렇지도 않다. 예를 들어 나 같은 경우는 추운 데서는 자지 못한다. 그게 추운 데서 잠들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여행지식 때문에 추운 데서 잠들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나의 성격이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추운 데서는 절대로 자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땅을 약간, 깊어야 손가락 마디 하나 들어갈 정도로 땅을 파고 그 안에 두꺼운 담요를 깔고 그 위에 다시 더더욱 두꺼운 담요를 덮어야만 잠 들 수 있었다. 덧붙여 그 곁에 불을 피웠다.

더운 것을 싫어하는 D는 불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망토만으로 몸을 감싸고 잠들곤 했다. 한가지 그가 나보다 유리한 것이 있다면 짐승들의 습격이 있을 때 훨씬 빠르게 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추운 것을 견딜 수 없고, 그래서 그의 배낭에는 없는 두꺼운 담요를 두장이나 짊어지고 다녀야 했다. 게다가 이렇게 부산을 떨며 잠자리 준비를 마치고 나서야 그와 나는 한가롭게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베이컨을 굽는 냄새는 짐승을 끌어모으기 좋아 여행자들은 베이컨을 굽기보다는 삶았지만 나와 D는 걱정없이 베이컨을 구웠다. 적어도 S시가 지척인 이곳에 짐승이 꼬일 리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꼬치에 베이컨과 치즈를 꿰어 굽고 동시에 차를 끓였다. 여느 날의 야영보다 호사스런 저녁식사였지만 나도, 그리고 D도 모두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멋진 식당이 가득한 S시를 코앞에 두고도 못 들어가고 있자니 화가 쌓일 수 밖에 없었다.

“이거 맛있는 냄새가 나는걸. 좀 끼어도 되겠소?”

베이컨이 거의 다 익을 무렵 내 등 뒤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나와 마주앉아 내 등뒤로 다가오는 그를 알아차렸을 D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면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시오.”

나와 D가 별달리 적대하는 뜻을 보이지 않자 그는 웃으며 자신의 나귀를 한켠에 세우고 땅에 잽싸게 말뚝을 박았다. 나귀를 말뚝에 매어놓고 짐을 내려놓는 폼이 한두해 굴러먹은 폼이 아닌 듯한 행상인이었다. 나이는 마흔 쯤 되었을까 하는 그 행상인은 자신의 짐에서 사과 몇 알을 꺼내었다. 며칠째 벌판만을 여행한 나와 D에게 과일은 얼마든지 베이컨과 맞바꿀만한 것이었다.

“사과라. 이것 참 반가운데.”

D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과를 꼬치에 꿰어 불 위에 살짝 얹었다. 날로 먹는 사과도 맛있지만 구워먹는 사과도 별미중의 별미였다. 사과가 타는 향긋한 냄새는 절로 기분이 풀어지게 만들었다.

“무엇이 당신을 여정의 길에 오르게 했는지, 그거나 좀 들어봅시다.”

짐을 다 정돈하고 나와 D의 사이에 끼어 앉은 상인은 엉거주춤하게 D를 돌아보았다. 상인도 상당히 여행을 오래 한 듯 보였지만 진짜 정통 방랑자인 D의 어투는 나도 재밌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그는 은유적인 듯 하면서도 직설적이었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다가도 곧장 화제의 중심을 찌르기도 했다. 이전의 화제와 전혀 이어지지 않는 화제를 갑자기 꺼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달변이기도 했기에, 그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상인이 뭐 특별한 이유가 있겠소. 돈 벌러 왔지. 그보다 당신들이 더 궁금하군. 이 위험한 동네에는 무슨 일이오?”
“바로 그 점이 나로 하여금 당신에게 괜한 질문을 하게 만든 이유요.”

상인은 이런 대화에는 별로 흥미가 없는 것 같아 보였지만, 정보가 부족한 나와 D에게 호의를 베풀 만한 아량은 갖추고 있었다.

“지금 S시는 큰 위기에 처해서 계엄령을 선포했소. 때문에 수로는 물론 육로도 끊겼지. 그러나 S시가 아무리 큰 도시라 하더라도 그 안의 인구가 얼마요. 게다가 농경도시도 아니니 보급물자 없이는 버틸 수 없을 터, 매일 새벽 동틀 즈음에만 잠시간 상인들의 출입을 허용하오. 사실 그 시간을 이용한 피난 행렬이 더 많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와 같은 행상인이 언제 그런 큰 도시에서 돈을 벌어 보겠소. 지금처럼 큰 상인들의 왕래가 끊겼을 때 한몫 잡아 보자는 거지.”

확실히, 나귀에는 행상인 치고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의 짐이 실려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소금과 같은 비싼 물건까지 갖춘 것이 준비를 단단히 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D가 질문했다.

“전쟁이라도 난게요? 만약 그렇다면 나와 같은 떠돌이는 당장 도망쳐야 겠지만, 전쟁이 났다는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은 적이 없소. 전쟁이 났는데도 내가 듣지 못한 거라면, 귀가 어두워진 떠돌이의 앞날은 험난할 뿐이라오. 그러니 말해주시오. 정확히 뭐가 문제요?”
“차라리 전쟁이라면 나을지도 모르지. S시의 병력과 자금력이라면 웬만한 적은 무서울 수가 없소. 게다가 S시가 함락되도록 놓아 둘 만큼 호락호락한 이 나라도 아니고.”

나는 잠시, 전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S시를 계엄령에 들게 할 만한 요소를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똑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나와 D는 동시에 상인에게 반문했다.

“역병이오?”

상인은 아니라고 대답해서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해 주었지만, 동시에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그러나 상인은 쉽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D도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장사하기 전에 이런 얘기를 하면 재수가 없는데 하고 상인은 투덜거렸지만 D는 지치지도 않고 그를 괴롭혔다. 결국 상인은, 베이컨을 다 먹고 난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괴물이오.”
“괴물? 지금 괴물이라고 하셨소?”

약간 못 미더워하는 D의 말투에 상인은 약간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는 퉁명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곧 그의 표정은 당황으로 바뀌었다. D는 진짜 노련한 방랑자였으며, 독특하면서도 적응할만한 화법의 소유자였고, 나중에 나올 이야기지만 뛰어난 전사이며, 동시에 열정적인 이야기 수집가이기도 했다.

“괴물이라니? 어떤 괴물이오? 설마 괴물 떼는 아니겠지? 어떻게 생겼소? 직접 봤소? 아니면 이야기를 들었소? S시가 계엄령을 선포할 정도면 굉장한 놈이 틀림없겠군. 그렇지 않소?”

소나기처럼 퍼붓는 질문의 공세에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나조차도 질릴 정도였으니, 그 당황한 상인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짐작이 간다.

“하나씩 질문하시오, 하나씩. 그러니까 일단 괴물이란 건 나도 본 적은 없소. 풍문으로만 들은 거지. 풍문이기 때문에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도 확실하지 않소.”

그리고 상인은 괴물에 대해 아는 바를 하나씩 풀어나갔다. 괴물은 강력하며, S시로부터 이틀 정도 거리에 있는 산적떼를 박살내며 등장했다고 한다. 기습적으로 상인들을 약탈하고 산속으로 숨어들어 S시도 골치를 썩고 있던 그 산적들의 기지가 초토화 된 소식은, 가까스로 살아남은 세 명의 탈주자 – 산적들에게 포로로 잡혀있던 여행객들 – 에 의해 S시로 알려졌다.

처음에는 S시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괴물 이야기를 믿었더라도 별로 심각하게 여기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있고 며칠 뒤부터 북쪽도로에서부터 들어오는 수송물량이 급감하더니 곧 북쪽도로에서 나타난 괴물 때문에 수송이 끊길 거라는 연락이 S시에 와 닿았다.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S시는 다급히 정찰조를 보냈고 12명의 정찰조가 손도 못쓰고 전멸한 현장을 확인한 후에야 긴급히 계엄령을 발동시켰다는 것이다.

“이상하군. 괴물이라면 토벌대를 조직할 일이지 어째서 계엄령을 내린 거요?”
“그런 것까지는 잘 모르오. 아무튼 난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할 테니 먼저 좀 자겠소.”

D는 상인을 붙잡고 늘어지는 대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D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D는 자신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올 줄을 몰랐다. 심심해진 나는 괜히 이리저리 뒤척거리다 오래지 않아 잠들고 말았다. 별로 불침번이 필요한 지역도 아니었거니와, D가 깨어있다면 안심할 수 있었다.

그날 나는 아주 푹 잤고, 다음날 아침에 D가 흔들어 깨웠을 때는 온몸에 기운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D는 푹 잔 모양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전혀 고단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거기에 상인까지 합친 우리 일행은 해가 막 뜨고 있는 새벽 무렵에 S시에 들어갔고, 전날에 나를 막았던 바로 그 문지기의 손으로 검문을 받은 뒤 성문 안으로 들여보내졌다.

상인과는 성문에서 헤어졌다. 나와 D같은 한가한 방랑자와 그는 근본적으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S시를 방문했기 때문에 행로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삐 걸음을 옮겨 멀어져간 그와는 달리 나와 D는 조금은 느긋한 발걸음으로 S시를 둘러보기로 했다. 아무리 계엄령이 내려졌더라도 S시는 S시였다. 건물들은 크고 화려했으며 곳곳에 설치된 분수대들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완전히 무장한 병사들이 곳곳에 보였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S시는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쨌든 S시는 좀더 거대해졌고, 좀더 화려해 져 있었다. 나도 S시를 오랫만에 방문하는 것이었지만, D는 S시를 언제 방문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랫만에 S시를 방문한 것이었다. 나와 D는 어느새 새로 생겨져 있는 건물이며, 좀더 복잡해진 길과 단장된 광장의 모습들에 감탄하고 있었다. 나는 지난번에 들렸을 때 한번 가본 적이 있는 여관으로 가려고 했으나 놀라울 정도로 바뀌어져 있는 도시 한복판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나만 믿고 있던 D가 함께 길을 잃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이치였다. 그는 한밤중에 산속에 던져놓아도 아무렇지도 않아 할 만큼 훌륭한 길잡이였지만 이런 도시에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길찾기를 포기한 나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묻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저쪽에서 한 병사가 걸어오고 있었다.

“저기, 길 좀 묻겠습니다.”

커다란 투구 때문에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었을까, 병사는 그냥 나를 지나쳐 가 버렸다. 나는 약간 무안해졌지만 어쨌든 다시 다른 사람을 찾았다. 골목 어귀에서 장바구니를 들고 오고 있는 한 아주머니를 발견한 나는 그 앞으로 달려갔다.

“저기…”
“미안하지만 바빠요.”

거기서 알아차렸어야 했지만, 나는 순진하게도 앞서의 두 사람이 몇 안되는 불친절한 S시민의 일부인 줄로만 알았다. 불친절한 S시민이 친절한 S시민보다도 더 많다는 것을 진즉에 알아차렸다면 1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서 무안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11번째 질문하고 또 다시 면박에 가까운 무시를 받고 나서야 나는 길을 묻는 것조차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나와 D는 그 근방을 헤메이다 아무 여관이나 들어가야 했다.

그 여관에 일단 여장을 풀고 여행물자를 보급하기로 한 나와 D는 아침겸 점심 식사를 하면서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이전 S시에 들렸을 때 묵었던 여관 겸 주점의 맛있는 식사를 기억하고 있는 나로써는 나와 D가 야영하면서 먹는 것보다도 맛이 없는 식사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 가격을 들었을 때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S시가 번창하는 도시고 물가가 오르고 있을 테지만, 성의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식사에 그만큼의 돈을 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도시가 계엄령 하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애써 분을 누른 나는 물자보급을 위해 거리로 나왔다. 길을 알려주는 사람 없이 몇시간이나 헤메어 건량을 파는 상점을 찾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비싼 가격에 건포, 건과를 구입할 수 있었고 이가 빠져버린 단검을 대체하는 데에는 완전히 바가지를 뒤집어 썼다. 여관에 돌아와 보니 D도 우리 둘의 옷을 세탁하고 여벌의 조미료를 구하는 데 무척이나 애를 먹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S시의 명물이라던가 둘러볼 만한 유적 등은 다 포기하고 최소한의 여행물자만을 구입해 최대한 빨리 다른 곳으로 떠나기로 합의를 보았다.

“…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

풀러놓은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짐을 다시 꾸리고 있던 나는 잠시 그를 돌아보았다. D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떤 소문이?”
“여러가지로 복잡한 소문들. 이 정도의 괴물이면 지원을 요청 할 만한데도 S시는 중앙정부에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더군. 그리고 몇몇 지주가 도피하려다가 계엄령이 내려지는 바람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던가…”
“흉흉한 소문들 뿐이군.”

도시는 차가워지고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건 계엄령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것은 좀 더 근원적인 문제였다. 나는 나름대로 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자부하는 방랑자이며, 이런 류의 차가움을 이미 다른 도시에서도 겪어본 적이 있었다. 다만 다른 곳에서는 그 위에 덧씌워져 그 날카로움을 완화해 줄 여유라는 게 있었다. S시는 계엄령 때문에 여유가 사라져 냉정한 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고, 외지인에게 그것은 가혹한 배척이었다.

나와 D가 최대한 빨리 S시를 떠나기로 합의를 보는 데는 성공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 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마찰을 빚었다. 나는 괴물이 나타나는 북로를 피해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싶어했고, D는 오히려 북로로 가고 싶어했다. 나는 처음으로 그의 길 선택에 의문을 표했다. 신기한 이야기를 수집하는 D의 취미는 익히 알고 있었고 나도 그런 이야기에 흥미를 가졌지만 그렇다고 도시에 계엄령이 내려지게 할 만큼 무서운 괴물이 있는 쪽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D의 화술은 결국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고 말았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나는 지금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살아남았고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때 D가 나를 꾀어 북로로 가게 한 점에 있어서는 약간의 앙금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찌되었건 나와 D는 북로로 방향을 잡았다. 괴물이 나타난다는 북쪽 도로를 따라 쭉 가다보면 S시만큼 크지는 않지만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마을이 꽤 여러개 있었다. 더 가다보면 T산이 나오고, 바로 그 T산에 있는 산간마을들이 우리의 목적지였다. 나는 걱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S시가 계엄령을 내리긴 했지만, 괴물이 S시쪽으로 간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만약에 나와 D가 북쪽에 있는 마을들로 갔을 때 오히려 그 괴물이 북쪽 마을들에 있으면? D는 괴물이 북쪽도로에만 있지도 않을 것이며 서쪽으로 갔을지 동쪽으로 갔을지 알 수 도 없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는 옳은 말이었지만, 만약이라는게 있었다.

불안한 내 마음과는 달리 D는 마치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별로 편하지 않은 침대에서 한잠 자고 난 우리는 새벽에 S시를 떠났다. 다행스럽게도 그날 하루 종일 우리는 아무런 것과도 마주치지 않았다. 숲을 관통하고 있는 길이니 위험한 야생동물들과 마주칠 만도 한데 토끼 한 마리도 만날  수가 없었다. 어떤 점에선 오싹하기도 했다. 그 괴물의 출현에 짐승들도 겁을 먹었다는 징표이기도 했으니까. 다르게 생각하자면 그 괴물만 아니라면 우리의 여정을 방해할 만한 어떤 짐승도 없다는 뜻도 되었다. 하긴 원래는 통행이 빈번한 도로였으니 아주 위험한 맹수는 없을 터였다.

하루 종일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막  해가 저물 무렵에 우리는 어떤 자그마한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은 아담했다. 그리고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오싹한 기분이 들 정도로. 마을을 둘러싼 울타리는 잠겨 있지 않았고 나와 D는 방해 없이 마을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잠시 사람을 찾아 돌아다녀 보았지만 마을 안에는 사람은 커녕 쥐 한마리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았다.

“다들 피난을 떠난 모양이야. 가재도구도 중요한 것은 다 가지고 갔군.”
“괴물이 무섭긴 무서운가 본데. 아무래도 겁나는 걸.”

사람들이 없다고 다른 마을을 찾아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통행량이 빈번한 도로라지만 밤의 숲길은, 문제의 그 괴물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위험했다. 나는 적당한 빈 집에 들어가 화덕에 불을 피웠다. 솥은 피난갈때 가져 갔는지 없었지만 어쨌든 완전한 노숙보다는 훨씬 낳았다. 짚으로 남은 침대는 가져갈 수 없었는지 방에 그대로 놓여 있었기에, 나와 D는 식사를 마치자 마자 침대에 누워 편안히 잘 수 있었다. 적어도, 자정 즈음의 울음소리만 아니었으면.

깊이 잔다고 하더라도 방랑자는 잠귀가 밝은 편이다. 게다가 고요한 밤을 뒤흔든 울음소리는 잠귀가 밝지 않은 이라도 누구나 놀라 깰 만큼 컸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굴려 일어났고 바로 옆방에서 자고 있던 D도 번개처럼 뛰쳐나왔다. 울음소리는 한번으로 끝난게 아니었다. 다시 찾아온 쥐 죽은 듯한 고요 속에서 내가 뭔가를 잘못 들었나 하고 의문을 가질 때 쯤 무시무시한 울음소리는 다시 한번 나와  D의 고막을 때렸다.

나는 아직까지 그와 비슷한 어떤 다른 소리도 들어본 경험이 없었기에 표현에 곤란을 겪고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호랑이와 같은 낮고 굵은 목소리의 소유자가 늑대와 같이 긴 울음을 토해내는 것과 같다고 할까? 그러나 그 어떤 무서운 짐승을 데려온다 하더라도 내가 들은 그 울음소리와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무시무시했고, 또 처절했다. 지옥의 시뻘건 구덩이에서 기어올라온 악마만이 그런 소리를 내지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D를 돌아보았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큰 놈. 아주 큰 놈이다. 아마도 사나운 놈일 테고.”

숨막힐 것 같은 공포가 나를 짓눌렀지만, 나는 노련한 여행자들의 대응책을 알고 있었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재빠르게 짐을 둘러맨 나는 벽에 등을 기댔다. 그 사이 D는 문 밖으로 나가 땅에 귀를 대고 있었다. 내가 나가자, 그가 손짓했다. 도로 집 안으로 들어가라는 손짓이었다. 곧 D가 뒤따라 들어오더니 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다.

“이 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군.”
“… 뭐? 그럼 큰일 아냐? 나가서 도망쳐야지!”
“어디로? 다시 S시로? 어려울걸. 왜냐면 놈은 지금 굉장히 가까운 데에 와 있고, 우리가 지금 마을 밖으로 나가면 놈과 마주칠거야. 어떤 괴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숲의 어둠이 우리를 숨겨 줄 수 있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어. 얌전히 이 안에 있는 게 상책이지. 가능하다면 놈이 그냥 S시 쪽으로 가줬으면 좋겠는데.”

그 생각은 나도 했다. S시는 강력한 방비를 갖췄고, 적어도 내가 본 바로는 전쟁이 벌어져도 충분히 적을 막을 만큼 견고한 성벽을 갖고 있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병사들의 숫자도 많았다. 어떤 괴물일지는 몰랐지만 S시가 괴물에게 당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내가 그때 상상하고 있던 괴물은 사나운 야수 정도였으니까.

어느새 나도 괴물의 발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괴물이 가깝게 다가왔다. 거대한 것이 대지를 울리는 소리였다. 쿵, 쿵, 하고. 그리고 거기에 섞여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기긱, 찌링, 끼익… 악마의 조소와도 같은, 혹은 악마의 신음과도 같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진동이 점차로 커져 가자, D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놈은 S시로 가는 게 아니라 나와 D가 숨어있는 마을로 오고 있었다. D도 이 정도로 큰 놈일 줄은 예상을 못했는지, 얼굴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D는 나를 돌아보고 있지 않았지만 내가 그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내고 있음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짐승이나 괴물들은 후각이 아주 좋다고 알려져 있었다. 나는 괴물이 나와 D의 냄새를 맡고 우리를 죽이기 위해 이 마을로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살려고 발악은 해 봐야지 하는 생각에 나는 등에 둘러멘 짐을 벗어서 내려놓고 칼을 들었다. 그걸로 괴물과 싸워 이길 생각은 없었다. 나는 늑대 같은 것은 커녕 들개 한 마리도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운이 따라 준다면 괴물이 덮쳤을 때 어떻게든 내 한 목숨 빼낼 수는 있을 지도 몰랐다.

내가 돈주머니도 버리며 몸을 가볍게 하고 있는 동안, D는 나무로 된 창문을 살짝 밀어올려 열었다. 창문 틈새로 밖을 정탐하려는 것이었다. 한참동안 D는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쿵쿵거리는 발걸음 소리도 멈추었기 때문에 나는 혹시 시간이 멈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D는 미동도 없이 밖을 내다보고 있었으며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화덕은 진작에 불을 꺼 두었기에 방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나는 저 집에 들어가서 잘게요.”

여자 목소리? 나는 한순간 내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 동의하는 듯 괴물의 것으로 추정되는 그그렁 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음 순간 창문 틈새로 밖을 내다보던 D가 팩 하고 돌아섰다.

“뭐… 뭐야?”
“눈이 마주쳤어… 일단 숨자.”

D는 빠르게 나와 내 배낭을 잡아 끌었다. 우리는 조금 전까지 내가 자고 있던 방으로 들어와 숨었다. 털썩, 하고 뭔가 무거운 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곧 저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D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소리가 날 까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숨을 죽이고 터질 듯 요동치는 심장을 애써 달랠 뿐이었다. 아니길 바랬지만 달칵 하고 문 열리는 소리는 분명 우리가 있는 집의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잠시 뒤 문을 닫는 소리가 났고, 두리번 거리며 돌아다니는 발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얼마나 칼을 꽉 움켜쥐었는지 손에 피가 통하지 않는 기분이었다.

“여기 있는것 알아요. 나와 주세요.”

간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온갖 상념이 내 머리를 스쳤다. 마녀니 요괴니 하는 생각도 물론 그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해는 끼치지 않아요. 그를 깨우지만 않으면… 아!”

마지막의 작은 탄성과 같은 비명은 너무도 작은 소리여서 나도 잘 들을 수가 없었다. 바로 내 옆에 붙어 있던 D가 번개처럼 뛰어나간 것이었다. 나도 바로 방 밖으로 나왔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D는 뛰어난 실력의 전사이기도 했다. 오랜 여행으로 다져진 것인지 아니면 그 전부터 이미 익히고 있던 실력인지는 모르지만, 그와 함께한 여정 내내 그의 실력에 감탄하고 감탄할 뿐이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내가 나갔을 때는 그는 이미 등뒤에 붙어 한 팔로는 여자의 양 팔을 봉쇄하고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여자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것도 보통 인질을 잡고 협박하는 식으로 여자의 바로 뒤에 나란히 서서 목을 겨누는 것이 아닌, 여자의 등에 자신의 옆을 대고 있는 식이었다. 후에 D가 가르쳐준 것이지만 그렇게 하면 만약에 있을 여자의 반항에 좀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말고 묻는 말에만 대답하시오. 아가씨를 해치고 싶지 않으니까. 첫째, 밖의 괴물은 뭐지?”
“… 무기부터 내려놔요.”
“방금 전에 내가 한 말은,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면 벤다는 뜻이었소. 다시 질문하지. 밖의 괴물은 뭐요?”
“설명해 주겠어요. 무기를 내려놔요. 내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들의 안전을 위해서.”
“나를 납득시켜보시오.”

D가 여자를 봉쇄한 동안, 나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의 빗장을 걸었다. 밖의 괴물로부터 빗장이 얼마나 소용이 있는 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심할 수가 없었다. 물론 빗장을 걸고도 별로 안심되지는 않았지만.

“난 당신들을 해치고 싶지 않고, 그도 당신들을 해치고 싶어하지 않아요. 그가 당신들이 여기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녀가 말한 ‘그’가 밖의 괴물을 뜻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D는 금새 알아챈 듯 바로 말을 이어갔다.

“해치고 싶어하는지 안 하는지는 어떻게 알지?”
“해치고 싶어했다면 이 집과 함께 당신들을 뭉게버렸겠지요. 지금 그는 잠들었고, 때문에 내가 소리만 지르지 않으면 아침까지 계속 잘 거에요. 하지만 그가 당신들이 나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본다면, 절대로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거에요.”
“… 자랑은 아니지만 난 꽤 많은 괴물들을 죽여본 바가 있는 몸이오.”

여자는 피식 웃었고, D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D에게 잡혀있는 여자를 살폈다. 목소리에서 알아차리긴 했지만, 상당히 젊었다. 이십대 초반? 아니면 그보다 어리던가.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그녀가 꽤 미인축에 드는 인물임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모양새는 추레했다. 옷은 평범한 옷이었지만 지저분했고, 마치 평복을 입고 오래 여행한 듯한 모습이었다. 얼굴은 미인인 편이었지만 역시 지저분했고, 머리칼도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하지만 담담한 기품은 그녀가 뭔가 대단한 사람인 것 처럼 느껴지게 하고 있었다. D가 그녀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데도 오히려 D가 위축되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절 풀어주시겠어요?”
“음… 당신이 밖의 괴물을 죽이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그렇게 해서 내 동료가 괴물을 죽이고 그 죽음을 내가 확실히 확인한 뒤에.”

설마, D가 진담을 한 것이라고는 생각치 않았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해야 할 까봐 겁먹은 표정으로 D를 쳐다보았다. D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져 찔끔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내가 괴물의 눈에 칼을 꽂는다느니 하는 식의 동화속 왕자님이나 하는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여자는 D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나도 그를 깨울 수 밖에 없어요. 그렇게 되면 곤란한 건 당신들이지요.”
“당신이 소리지를 틈도 없이 죽이고 도망갈 수도 있지.”
“그건 좀 무섭군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죠?”

D의 탐색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그녀를 풀어주었다. 그녀는 D의 손에 잡혀있었던 양 팔이 아픈 듯 쓸어내렸지만, D는 별로 미안해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비록 그녀를 풀어주었다 하더라도, 그 거리에서 D는 언제라도 그녀의 목을 베어 버릴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본 적이 있었고, 덤벼들려던 자세 그대로 목이 떨어진 늑대를 기억했다.

“최대한 빨리, 당신이 여기 있는 이유와 저 괴물과의 관계, 저 괴물의 정체를 설명해 주시오. 그러면 그 다음을 생각해 보지.”
“그 전에, 그를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만둬 주세요.”
“왜, 당신 남편이라도 되나?”
“제 형부에요.”

내가 켁켁거리자 D가 나를 째려보았다.

“왜, 놀랐나보군요?”
“조금. 당신 아들이라는 소리보다는 덜 놀랍지만, 뭐. 그렇다면 당신 형부는 당신 언니와 결혼할 당시부터 저런 모습이었소? 아니면 나중에 저렇게 변한 거요?”
“후자에요.”
“흠.”

나는 그녀의 말을 믿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했지만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믿어도 될 것만 같았지만, 밖의 괴물 때문에 그럴 엄두가 안 났다. 적어도, D는 함부로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아직까지 빼어든 검을 집어넣지 않고 있었다.
“일단 앉으시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D의 태도는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검은 여전히 빼어들고 있었으나 더 이상 그녀를 향해 겨누어져 있지는 않았다. 물론 똑바로 겨누고 있지 않더라도 언제든 그녀를 공격할 채비가 되어 있음은 분명했지만.

“당신이 이야기하게 두고 싶지만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도 곤란하고, 당신이 어떤 수를 써서 밖의 당신 형부를 깨울지도 모르니까. 내가 질문해서 요점만 파악하는 식으로 하겠소. 아까와 마찬가지로.”
“마음대로 하세요.”

여인은 의외로 순순히 D의 요구에 응했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처음부터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은 우리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조심해도 모자랄 일이라는 것 쯤은 여행자들의 철칙이었다. 우리는 사회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만큼 사회의 울타리에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들이었다.

“우선, 얼마전에 산적 기지를 초토화 시키고 S시에서 보낸 12명의 정찰조를 죽인 것은 당신 형부요?”
“… 맞아요. 하지만…”
“아, 제반 설명은 나중에 듣겠소. 다음 질문. 저런 모습이 된 지 얼마나 되었지?”
“이제 한 달 정도…”
“저렇게 변한 이유는?”

여인은 침묵했다. D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 나는 아까 D가 매달려 있던 창문 틈으로 밖을 살폈다. 그리고 희미한 달빛 아래로 들어난 광경이란!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가끔 꿈에 나올 것만 같은 끔찍한 그 모습을.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그 순간 신을 찾으며 헛소리를 했다고 한다. 신이 자신이 만든 창조물들에게 자비심을 갖고 있었다면, 결코 그런 추악한 모양새를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한때 인간이었고, 세상 전체를 배반하는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지 않는 한 그런 모습으로 변하게 된 것은 신의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물론 내가 놀라 나자빠진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의 추악함은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마을의 공터에 누워 있는 괴물의 모습은, 달빛에 드러난 극히 일부의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흉악했다. 때는 여름이었지만 서늘한 한기가 날 뒤덮었다. 그건 거대한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집 한채는 우습게 짓밟을 만큼 거대한 그것은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나무등걸처럼 갈라지고 일그러진 피부의 틈새에서는 시뻘겋고 뭉클거리는 벌레와 같은 것들이 꿈틀거렸다. 살거죽 전체에는 옅은 회색빛의 진물이 흘렀고, 희무끄레하게 보이는 얼굴은 지옥을 배회하는 망자의 그것이었다. 안구는 사라지고 없었고, 대신 퀭하게 빈 자리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물과 같은 것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나를 전율시킨 것은 그 몸에 수없이 돋아난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그것들은 어떤 질서를 갖고 배열된 것이 아니었다. 막무가내로, 어떤 곳에는 많이, 어떤 곳에는 적게 돋아난 그것들은 내부에서부터 살을 찢고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어떤 괴물의 뿔이, 어떤 괴물의 가시가 무섭다 할 것인가? 잠든 듯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괴물의 가슴에서 튀어나온 칼과 창날들은 가슴이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주변의 살들을 찢어내고 있었다.

“어때요? 무섭죠?”

나는 알 수 없었지만, D는 그 때 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마치 분을 바른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그녀의 질문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전율에 온몸이 뻣뻣해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창가에서 뒷걸음질 쳤다.

“그가 처음 변했을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크기도 보통의 사람 크기였고… 아니, 처음 변했을 때 모양은 변하기 전과 똑같았죠. 그는 마을에서 제일 잘생기고 성실한 남자였어요. 적어도 우리 가족에게는 그랬죠.”

D는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독백하도록 내버려 두었을 뿐이었다.

“사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형부를 좋아했어요. 하지만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언니라면 그것도 괜찮다고 여겼죠. 사실 난 나이도 한참 어렸기 때문에 그의 아내가 되기에는 무리가 있었죠.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줬어요. 당연히 두 사람은 결혼했고, 그는 행복한 남편이, 내 언니는 행복한 아내가 되었죠…”

그녀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때의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아마 그녀의 눈에 들어왔던 것은 어슴푸레한 빛에 회색빛으로만 비춰보이는 벽 뿐이 없었을 텐데.

“행복을 깨트린 무엇이 있었군…”
“네, 그건 정말 생각치도 못한 일이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S시에서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S시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잠시 뜨끔해졌다. 그리고 곧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저 괴물을 탄생시킨 이유가 S시에 있다면, S시는 응분의 보상을 치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S시가 돈으로 해결 할 수 있을 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던 간에,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들은 우리 마을의 일부를 원했어요. 상인들이 많이 지나다니니까, 도로를 넓혀야 한다고. 이 마을처럼 도로 옆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 마을은 도로 위에 있었죠. 도로는 우리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갔고. 도로를 넓히는 것 까진 좋았는데, 넓어진 도로 옆에 큰 여관을 짓고 싶어했어요. 값을 제대로 치루어 준 다고 했지만, 형부는 힘들게 가꿔온 밭을 버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들은 웃돈까지 얹어준다고 했지만 형부는 완강히 거절했죠. 그들은 엄청나게 화를 내며 우리를 저주했지요.”

나는 대충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상인들은 이해타산에 능하고, 무엇에든 값을 치룰 줄 안다. 그러나 때로 값을 메길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값을 제대로 매겨주는 데도 땅을 팔지 않겠다는 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들은 성급하지 않았어요. 혹시 용병들을 고용해 마을을 습격하나 걱정했지만 꽤 오랫동안 아무 조짐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우리는 안심했죠. 하지만… 어느날 세무원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들의 복수가 시작되었음을 알아차렸어요. 도로가 넓어졌기 때문에 우리 마을은 어느 순간부터 상업으로 돈을 버는 마을로 기록되어 있었고, 세금은 평소 내던 것의 열 배가 넘었어요. 마을의 모든 돈을 다 모아도 세금을 낼 수가 없었지요. 그러자 병사들이 들이닥쳤어요.”

나와 D는 묵묵히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점점 숨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병사들은 마을에서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압류해 갔어요. 식량 한 톨, 동전 한 푼 남기지 않고. 물론 마을 사람들은 저항했지만, 병사들을 이길 수는 없었어요. 절망적이었죠. 추수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것을 거둬 갔으니.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더라구요. 며칠 있다가 산적들이 들이닥쳤어요. 그들은 이전부터 우리 마을에서 얼마만큼의 상납금을 받아가고 있었지요. 그런데 상납금을 낼 돈이 어디 있어요. 그들은 그나마 우리가 S시의 병사들로부터 숨겨 놓았던 식량들을 다 가져 가려 했어요.”

나는 이보다 더 한 일도 본 적이 있었다. 더욱 지독한 학정을 펼치는 영주도 많았고, 풍성한 추수를 거두고도 산적에게 모든 것을 빼앗겨 굶어 죽는 사람들도.

“언니는 죽어도 못 준다고 버텼어요.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었죠. 그 해 겨울을… 언니는 어떨 지 몰라도, 언니 아기는 풀뿌리 같은 걸로는 버틸 수 없을 테니까. 평소에는 그렇게까지 악독하게 굴지 않았던 산적들이었어요. 어쨌든 우리는 그 전까진 꼬박꼬박 상납금을 냈으니까. 하지만… 힘으로 빼앗아가는 그들의 등 뒤에서 언니가 칼로…”
“찔렀군요.”

그녀는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기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나의 마음에 그 한 단어가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나는 그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악에 바친, 그러나 무력한, 그래서 더더욱 한 맺힌…

“칼에 찔린 산적은 죽어버렸고, 산적들은 눈이 뒤집혔어요. 언니는,”

나는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모습만 변하지 않았을 뿐이지, 여인은 밖의 괴물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스스로의 몸 속에서 튀어나온 칼날들로 천천히 저며지는 고통과 스스로의 입으로 그때의 참상을 이야기하는 고통은 내가 감히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했다.

“… 네 조각이 났지요. 언니 뱃속의 아기는 작아서 네 조각 내기가 어려웠던지 그들은 세 조각으로밖에 나누질 못하더군요.”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었지만,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나는 여기서 설명을 그만두겠다. 그것은 나 자신이 더 이상 떠올리기가 싫을 정도로 끔찍한 이야기이며, 행여나 꿈에라도 나타날까 두려운 이야기인 것이다. 인류가 행한 수많은 범죄 가운데 이토록 끔찍한 일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고, D는 얼굴이 조금 찌푸려져 있었지만 묵묵히 그 이야기를 다 들었다. 나는 그만 귀를 막아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여인의 고통의 크기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어떻게 제 정신으로 저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 것일까?

곧 알아차렸지만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것 자체가 그녀가 이미 실성했다는 증거였다.

“형부는 산적들이 다 없어진 다음에 도착했죠. 그가 발견한 것은 엉망이 된 마을과, 언니와 아기의 시체와, 언니의 시체 옆에 쓰러져 있던 저였죠. 살아남은 사람은 몇 없었어요. 저도…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요? 나는 말렸지만, 형부는 숲 속 깊숙한 곳에 산다는 마녀를 찾아갔어요.”
“… 마녀?”
“네, 마녀. 그녀는 형부의 부탁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지만, 형부는 거의 반 강제로 비술을 얻었어요. 그는 그걸 마셨고, 처음에는 아무것도 변한 것 같지 않았지요.”
“마녀가 비술을… 혹시 그 이름을 아시오?”
“… 잘 모르겠어요. 무슨 심장인가 하는 것으로 만든 약이었어요.”

나는 D의 얼굴에 나타난 당황함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맥없이 주저앉아 칼을 놓아 버렸다. 나도 여인도 그의 설명을 필요로 했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던 그는 웅얼거리는 소리로 물었다. 풀벌레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지 않았다면 무슨 말을 하는 지 거의 듣지 못했을 것이다.

“원망하는 자의 심장. 나도 어디선가 전해들을 이야기일 뿐이지만… 원망하는 자의 심장은 그것을 먹은 자에게 기이한 힘을 주지. 원한이 크면 클 수록 그 힘은 거대해지오. 원망하는 자의 심장을 먹으면 그 사람의 육체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불사에 가까운 힘을 얻게 되지. 더 이상 인간의 육체가 아니라, 한 마리의 마수로써… 묻겠소. 당신의 형부는 아마 날 달린 무기로부터 어떤 상처도 입게 되지 않을 테지. 맞소?”
“아니… 저…”
“아, 정정하겠소. 상처를 입지 않는 게 아니라… 입어도 소용이 없는 것이겠지. 그는 무기를 삼키고 그 만큼 몸이 늘어나오. 맞소?”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D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다행히 D는 부연설명을 할 필요를 느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무기를 삼킨다는 것은, 소화가 되는 것이 아니오. 말 그대로… 그냥 그 몸안에 들어차는 거지. 지금 당신 형부의 몸은 거의 늘어날 만큼 늘어났다고 봐도 좋겠지. 그 안에 창이며 칼이며 도끼며 화살이며… 이름을 열거할 수 있는 모든 무기들이 들어찼을 테니. 그것들은 상처를 내고 움직임을 방해하고 고통을 주겠지만 결코 그를 죽게 할 수는 없을 거요.”
“… 맞아요.”

여인은 약간 놀랍다는 듯이 D를 바라보고 있었다. D는 지금 굉장히 심란한 듯 했다. 지금까지 그와 함께 해 오면서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그의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당신… 당신은 언제까지 그를 쫓아다닐 생각이오?”

아마도 괴물에 대한 것을 물어오리라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D는 여인을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한 질문을 찔러넣었다. 애초부터 대답을 원한 것이 아닌 질문이었기에, D는 여인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기실, 여인으로써는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 본 적 없겠지.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어쨌든 당신은 살아있고,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거요. 알고 있겠지만, 그는 당신 말을 알아듣지 않소. 알아듣는 것처럼 보여도, 단지 낯익은 목소리에 조금 누그러지는 것 뿐… 언제까지 그가 벌이는 복수극을 볼 생각이오?”
“그러면… 안되나요?”
“죽을 수도 있소. 그는 강해졌지. 저주를 뒤집어 쓴 것이나 다름 없지만, 어쨌든 강해졌어. 하지만 결국 그는 죽은 거요. 원망하는 자의 심장이 주는 힘에도 결국 한계가 있으니까. 그러면 당신은?”
“죽으면 안되나요?”

이번에는 D가 당황할 차례였다. 수차례 언급했지만 그는 노련한 방랑자다. 그에게는 살아남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아무리 끔찍한 상황에서도 그는 충분히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 적당한 감성과 적당한 이성을 갖추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성이 마비되어 버린 사람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설명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자신이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니까. 그가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여인은 일어섰다.

“형부를 깨우지 않을 거에요. 그리고 당신들도 어서 갈 길을 가세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지만 그를 두고 갈 수는 없어요.”

상황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녀는 더 말을 붙여볼 여지를 남겨주지 않았고, 우리도 굳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붙잡을 방법이 없었다는 쪽이 좀 더 정확했다. 나는 주섬주섬 짐을 챙겼고, 아까 내팽겨친 돈주머니가 혹시 풀어지지는 않았는지 점검했다. 여인은 조금 전까지 내가 자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와 D는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왔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D는 나에게 칼을 짐 안에 숨기라고 이야기했다. 적어도 괴물이 깨어난다 하더라도 아무 무기가 없는 우리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찌 되었건 괴물은 깨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도둑처럼 살금살금 마을 밖으로 빠져나왔다. 달빛 아래 드러난 괴물의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실 집채보다도 큰 거체를 보지 않고 빠져나간다는 것은 눈을 감고 나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괴물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것 뿐이었다. 괴물의 얼굴을 보면 나까지 슬퍼질 것 같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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