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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선택(하)

2006.12.08 05:3212.08


“대장.”

시즈는 잠깐 그를 돌아보더니 다시 고개를 떨궜다. 데인은 한숨을 쉬고 그의 곁에 앉았다. 숲 속의 생활을 적어도 평원 출신의 사람들보단 훨씬 잘 해내고 있지만 데인도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데인보다도 데인과 같은 사람들 수십을 이끄는 지휘관들은 더더욱이나 지쳐 있을 것이다.

“내 책임이야.”
“그렇지 않습니다, 대장. 대장은 활을 잘 쏘지도 못하고, 그런 상황에서라면 설사 아무리 대단한 명궁이라도 맞출 수 없었을 겁니다.”
“말은 고맙네. 하지만 결국 책임은 책임이지.”
“적의 척후 두 부대를 전멸시킨 것만으로도 우린 대단한 일을 한 겁니다.”
“후, 그럴까.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일까? 적군은 수천을 헤아리고, 우리는 백오십이 조금 넘어. 그런데 적의 척후 스물 셋을 죽이기 위해 우리는 여덟 명을 잃었어. 어느 쪽의 피해가 더 클까? 게다가 결국 척후 몇을 놓치고 말았어. 내가 활을 잘 쏠 수 있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테지. 이제 그들은 군대를 이끌고 올거야.”

데인은 거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들고 있던 자루에서 말린 쇠고기를 꺼내었다. 십여일을 숲속에서 농성하며 아직까지 식량이 남아있다는 것만도 놀라운 일이었다. 덫사냥에 능숙한 병사들이 식량조달을 해결해 주었다. 그러나 사냥에 능숙한 병사들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일부는 적의 척후와 마주하고 죽거나 포로가 되었으며, 일부는 짐승에 당한 듯 했으며, 일부는 없어졌다. 도망갔으면 그나마 다행이었고, 적에게 투항했을 경우가 문제였다. 그래서 그들은 실종자가 생길 때마다 진지 – 라고 불리기도 뭣한 공터 – 를 옮겨야 했다. 자연 사냥은 제한되었으며, 아끼고 아꼈음에도 그나마 얼마 되지도 않는 식량은 줄어만 갔다.

거의 대부분의 병사들이 알아서 먹을 것을 구했다. 열매를 따먹거나,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재주가 있다면 토끼라도 잡거나… 데인과 같은 경우에는 이반이 남겨준 식량자루로 연명했다. 그 안에는 물에 타먹을 수 있는 한 줌의 곡식가루와 몇 장의 육포가 남아 있었다. 그는 그것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늘 허리에 두르고 다녔다. 보잘것 없는 식량이지만 그것을 훔치려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설사 그들이 전우들이라고 하더라도.

훔치면 훔쳤지 구차하게 식량을 구걸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리고 데인은 달라는 사람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일부러 나서서 식량을 나눠주지도 않았다. 믿을 것이라고는 서로들 뿐인데도 그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개인적으로 행동했다. 어쨌든 진지를 떠나지만 않으면 되었다. 그들이 하나가 될 때는 적들을 만났을 때 뿐이었다.

시즈 대장이라고 예외는 될 수 없었다. 지휘관들은 물론 비축식량을 갖고 있는 모양이었고, 병사들은 가끔 사냥이라도 해 오면 고기 몇점을 갖다 바치기도 했다. 데인은, 냉정하게도, 지금까지 단 한번도 자신의 상관인 시즈에게 뭔가를 주었던 적이 없었다. 사흘 전 적의 척후대를 섬멸시키는 전투를 벌였을 때, 이반은 세 명의 전사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오늘의 전투에서 데인은 하마터면 이반을 뒤따라 갈 뻔 했지만, 다행히도 화살은 그의 목을 스치고 옆의 나무에 꽂혔을 뿐이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거리의 차이로 전사자 명단에서 빠져나온 데인은 식량 자루의 무거움을 실감했다.

그것은 단지 육포 몇조각과 한 줌의 곡식가루가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남으려는 발버둥의 상징이었고 그의 목숨이었다. 그는 오늘에야 깨달은 그 ‘살아감’의 상징을 나누었다.

“… 뭔가?”
“육포입니다. 좀 드십시오. 대장님이 기운을 내야 우리도 기운이 납니다.”
“식량이 모자라다는 것 아네. 이럴 필요 없네.”
“대장. 다음번에 적을 또 놓치고 싶지 않으시다면 먹어둬야 할 겁니다. 먹지 않으면 기운도 나지 않습니다.”

데인은 시즈의 손바닥 위에 육포를 올려놓았다. 시즈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입에 물고 거칠게 찢어내었다. 딱딱하고 질겨 오히려 이가 빠져 버릴 듯 아파왔지만 시즈는 문자 그대로 이를 악물고 그것을 씹었다. 생존은 늘 그렇듯 고통과 수고가 수반되었다.

“이봐 자네. 이름이 뭐였지?”
“데인입니다.”
“아, 그래, 데인. 자네는 용감하군. 그날 말야, 왜 남기로 결정했나?”
“… 떠나는 것을 허락했던 그날 밤 말이십니까?’
“그래. 그날 밤. 자네가 일어났을 때 나는 자네가 도망가려는 줄 알았네… 그런데 자네 입에서 나온 말은, 하, 전장에서 이만큼 굴러먹은 나도 놀랄 만한 것이었지.”

데인은 입에 육포를 넣고 우물거렸다. 대답을 생각하려는 것이었다. 물론 별다른 것을 생각해 낼 수 없어서, 그는 입에서 나오는 데로 지껄였다.

“글쎄요, 용감한게 아니라 반쯤 미쳤던 거죠. 어차피 도망가면 뭐합니까. 어떻게든 싸워서 살아남을 궁리를 해야죠.”

시즈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데인은 자신의 말이 멍청한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건 결코 본심이 아니었다. 싸워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 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때 그를 붙잡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우애? 애국심? 애국심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그는 가끔 마을에 나타나는 맹수 퇴치를 위해 병사를 요청해도 들은 척도 안하면서 세금만 꼬박꼬박 받으러 오는 관리들을 너무 싫어했다. 그의 마을은 제국 없이도 잘 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전우애 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반을 제외하고, 그와 친했던 이들은 숙영지가 기습당하던 당시 다 죽었고 이반마저 사흘 전 죽었다. 다른 이들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복수심? 아니면 알량한 자존심?

“자네에게만 이야기 해 주는 거네. 자네들을 징병할 때… 우리가 선발대라는 말은 사실 거짓이야.”
“… 네?”
“우리가 병력의 전부네.”

지금 이 패잔병들과 낙오자들의 모임이 아직까지 여기서 버티고 싸우고 있는 것은, 한 가지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본대가 곧 도착할 것이라는 희망. 자신들처럼 급하게 끌어모은 징집병들이 아니라, 지금의 제국을 있게 한 진짜 정규군이 달려오고 있을 거라는 희망이 그들을 여지껏 버티게 한 단 하나의 버팀목이었다. 물론, 데인은 아니었다.

“… 놀라지 않는가?”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짐작하고 있다고 해야겠지요. 어느 누구도 징집병을 선발대로 내보내지 않습니다… 일부러 사지로 들여보내는 것이 아니고서는. 정규군이 훨씬 소집도 빠르고, 또 중요한 선봉의 역할을 맡아야 하는데 징집병이 선발대라고 하니 대충 짐작할 수 있었지요.”
“머리가 좋군, 자네.”
“아버지도 징집되신 적이 한번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전쟁 이야기를 꽤 자주 하셨지요.”

데인은 다시 육포를 뜯어 입에 넣었다. 오랫동안 씹지 않으면 삼키기가 힘들었고, 오래 씹으면 맛없는 쓴물이 배어나왔다. 원래는 약간 달착지근한 맛이 나야 했는데, 불가에 놔서 그런지 아니면 산속에서 갖고 다녀서인지 변질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아무런 불평 없이 그것을 먹었다. 이런 상황에서 맛을 가리는 건 사치중의 사치였다. 그러나 시즈는 먹지 못하겠는지, 아니면 정말 입맛이 없는지 데인이 준 육포를 한입 먹었을 뿐 그대로 손에 쥐고 있을 뿐이었다.

“하긴, 말하자면 본대는 있긴 있네. 제국의 최정예, 아라반트 경이 이끄는 ‘제국의 창’ 기사단과 천오백명의 기마대. 지금의 제국을 있게 한 주력부대인 다라암 경의 오천명의 보병대. 다만 문제는 그들이 북방 정벌에 나가 있다는 것이지. 소식이 전해지기야 했겠지만 정벌을 끝내기는 했을까? 아니 그보다, 바로 회군한다 해도 여기까지 그렇게 빨리 올 수 있을까? 첩보에 의하면 에이진 군의 출병은 그들 제국의 주력이 자리를 비웠다는 소식이 에이진에 도착하자 마자 였네. 그들은 정확한 타이밍을 노린 거지. 그들이 이대로 밀어붙이면 제국의 서부는 궤멸이야. 지달트와 에센의 두 성이, 그것도 병력의 절반이 다라암 경을 따라간 그들이 에이진 군 최정예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까? 그 두 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면 아라반트 경과 다라암 경이 돌아와도 서부는 끝장이네. 에이진의 후발대가 도착해 그 두 성에서 수성을 시작할 테니까. 그러면 협상 끝에 에이진에게 훨씬 유리한 쪽으로 서부의 영토를 분할해야 하겠지.”
“어렵군요.”
“그래, 어렵지. 에이진이 이렇게까지 무리수를 둘 거라곤 아무도 생각을 못했으니까. 저들의 공주가 둘째 황자님과 결혼을 한지 몇년이나 되었나? 삼년인가? 그래서 안심하고 서부를 비웠던 것이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거지.”

데인은 육포 하나로 손을 더 가져가다가 멈췄다. 시즈와 이야기하다 보니 벌써 세장이나 먹어버렸다. 남은 것은 셋, 넷? 이틀치 분량이다. 그는 자루를 꽉 동여매었다. 시즈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와 있는 거다. 급한대로 끌어모아 에이진의 발을 늦추자는 거지. 그거 아나, 자네? 우리는 정말로 소모품이네. 싸워서 이기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발을 늦추라는 거지.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우리의 병력으로 저들을 얼마나 오래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될 수 있는 한 오래 입니다, 대장. 우리는 벌써 저들을 십일이 넘게 묶어두고 있지 않습니까?”
“대장, 대장!”

숨이 턱까지 차오른 병사 하나가 그들의 대화를 끊으며 뛰어들었다. 사냥꾼 출신으로 숲에서 발이 빨라, 높은 봉우리 위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게 한 이였다.

“적들이, 적들이 움직입니다. 그, 그런데 이쪽으로 오는게 아닙니다.”
“그럼?”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계속 달려서인지 아니면 놀라서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쪽으로 오는게 아니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데인의 머릿속을 순간적으로 ‘퇴각’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런 생각은 달콤한 꿀과 같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달콤한 그것은 일단 맛보기 시작한 순간부터 끊임없는 갈증을 유발한다. 다행히 그가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전에 정찰병은 말을 이었다.

“서진하고 있습니다. 이 숲을 완전히 무시하고…”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선 시즈가 숲 위쪽으로 내달았다. 위쪽 숲에는 란돌프 백인대장과 아서 경이 각자의 병사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을 터였다. 곧 고함과 웅성거림이 숲을 메우기 시작했다. 병사들을 집합시키는 외침, 서로를 부르는 병사들의 고함과 동작이 빠른 이들이 집합장소에 모여 웅성거리는 소리가 귀에 따가웠다. 데인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집합장소에 섰다. 피곤한 육체가 갑자기 긴장해서 잠시 피로가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

달리지도 않았고 단지 집합장소에 서 있는데도 데인은 자신의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져감을 느꼈다. 살짝 칼집에 손을 얹자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등골을 훑었다. 식은땀이 배어났다. 병사들이 집합하는데는, 무질서하게 퍼져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은 시즈 대장과 아서 경, 란돌프 대장 세 명의 회의였다. 회의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것이다… 데인은 아마도 셋이 무거운 침묵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목소리를 높여가며 삿대질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된 거야? 싸우러 가는 거야?”
“적들이 우리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쳐 가기로 했다는데.”
“그럼 우린 살은건가?”
“모르지.”
“그냥 이대로 여기 있거나 안전한 쪽으로 후퇴했으면 좋겠는데. 어차피 정규군이 도착해야 진짜 싸움이 되는 거잖아? 우리가 뭐 얼마나 오래 버티겠어?”

십여일 전, 함께 싸우다 죽기를 맹세했던 이들의 사기는 사흘을 가지 못했다. 점차 지치는 병사들은 밤마다 차가운 땅바닥에 등을 대고 언제 덤벼들지 모르는 짐승이나 적들을 경계해야 했으며, 바닥이 보이는 그들의 식량자루는 절망을 더했다. 숲까지의 행군 동안 낙오되거나, 일부러 낙오해버린 병사들의 숫자는 일일이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 이렇게 나타나고 있었다.

“웃기지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우린 저놈들의 앞을 막을 거야!”

웅성거리는 병사들의 사이로 유난히 커다란 목소리가 있었다. 데인은 그들의 웅성거림에 신경쓰지 않기로 했었지만 그 목소리에는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사냥꾼 출신의, 아까 정찰병으로 적의 진군소식을 알려온 바로 그였다.

“알먼. 너 미쳤어? 지금 싸우면 어차피 죽어. 정규군이 싸우지 않고야…”
“우리가 막아야 되! 몰라? 정규군이 언제 올지 알어! 우리가 저놈들을 내버려두면 다르프 지방은 끝장이란 말야! 다암 지방은 바로 다음이고!”
“…”
“우리 마을이 바로 다음이란 말야! 이 자식들아! 내말 들려? 우리 마을이 박살날 거란 말야!”

그가 멱살을 쥐고 악을 쓰는 상대는 굉장히 덩치가 큰 병사였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알먼이라 불린 사냥꾼 출신의 청년을 밀쳐냈다. 알먼은 비틀거리며 물러났지만, 전혀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너는 게오르그에서 왔지? 거기는 다암 다음이니까, 그 때까지는 정규군이 올 거라고 생각하냐? 그래서 우리 마을은 짓밟혀도 된다는 거야? 너같은 새끼 때문에…”

기세가 오른 건 그 뿐이 아니었다. 덩치가 큰 병사의, 그의 사람 머리통 만한 주먹이 알먼을 후려쳤다.

“내가 뭐? 내 고향이 게오르그라서 괜찮을 거라고? 이 미친 새끼야, 똑바로 들어. 너만 네 고향을 생각하는게 아냐! 그리고 한 가지만 말해두는데, 난 이곳 다르프 출신이야. 벌써 에이진 군에게 함락당했을지도 모르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까불지 말란 말이야, 아가리를 확 찢어버리기 전에!”

알먼이란 청년은 주위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일어섰다. 덩치 큰 병사도 주위의 다른 이들이 적당히 달래 알먼과 멀리 떨어진 쪽으로 데려갔다. 시즈가 다시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그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눈치 챌 겨를이 없었으리라. 그의 얼굴은 지금까지의 그 어느때보다도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칼자루를 얼마나 꽉 쥐었는지 그의 손이 새하얗게 보였다.

“병사들이여.”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우렁차지도 않았고 근엄하지도 않았다. 대장으로써 존경하던 시즈가 아니라 마치 자신들 중 한명을 대표로 내세운 것 처럼, 시즈는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싸워라. 그리고 목숨을 바쳐라.”

함성은 없었다. 대신에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그들 사이를 맴돌았다. 기다리고 있었지만 정작 죽음이 코앞에 닥치고 보니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발걸음이 무거웠다. 죽으러 가는 패잔병의 무리는 빠른 걸음을 가장한 느릿한 속도로 숲을 벗어났다. 그래도 모두들 시즈에게 마음속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그는 목숨을 바칠 대상을 지정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각자 원하는 이에게 바칠 수 있었다.

*                *                *                *                *                *
몸이 고단했지만 이제 씨만 뿌리면 작물이 쑥쑥 자랄 것 같은 새 밭을 보는 데인의 가슴은 뿌듯함으로 가득 차올랐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간다고 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기에 어느새 석양은 산등성이의 사이로 어슴푸레하게 그 끝자락만을 남기고 있었다. 새로 개간한 밭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지진 않았지만 야트막한 언덕 하나를 돌아가야만 했다. 과연 아직 석양빛이 남아 있을 때까지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언덕을 가로지르기로 마음먹었다. 그 언덕에는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큰 짐승들도 아주 가끔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별로 위험한 곳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마을과 워낙 가까웠으니까.

괭이와 호미를 챙겨든 그는 호미를 허리춤에 찔러넣고 괭이를 둘러멘 체로 언덕을 뛰어올랐다. 나무가 많았고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그 숲은 데인의 어린 시절 놀이터와도 같은 곳이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의 필요로 한 그루 두 그루 벌목하고, 밭을 좀 넓힐까 해서 개간하다 보니 언덕의 마을 쪽 경사면은 더 이상 숲이 아니라 밭으로 탈바꿈 해 있었다. 그래서 언덕의 꼭대기에 오르면 바로 밑으로 마을이 아주 잘 보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막 언덕 꼭대기에 오른 데인의 눈에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장면이 들어왔다.

‘불타고 있다?’

데인은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어스름한 저녁 노을이 반사된 것이 결단코 아니라 큰 불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이었다.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고, 데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괭이를 창 처럼 움켜쥐고는 언덕을 내달렸다. 달리면서 떠오른 생각은 여러가지였다. 라일라는 괜찮을까? 부모님은? 마을 사람들은? 그리고 그의 생각의 한구석을 비집고 들어오는 또다른 생각이 있었다.

화광이 충천한 막사들, 죽은 척하고 납작 업드려 있던 그 순간의 기억. 자신의 위로 피를 뿌리며 쓰러지던 아군, 바로 옆을 지나가는 에이진 군대의 발소리. 그들의 고함, 말이 우는 소리, 병장기가 부딪치고 사람이 비명을 지르던 그 순간의 악몽이 그를 집어삼켰다. 발밑을 주의하지 못한 그는 언덕의 중간쯤에서 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는 두 바퀴인가 세 바퀴인가 세지 못할 수를 구르고 나서야 멈췄다.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호미가 구를 때 밑에 깔렸던 모양인지 옆구리가 몹시 아팠다. 다행이 찔리거나 하진 않았다. 그가 구른 자리의, 아마도 토마스 씨 댁의 것으로 추정되는 배추들이 엉망으로 뭉게져 있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그는 다시 마을을 바라보았다. 불은 분명 거기 있었고, 멀리서 사람들의 웃음 소리 비슷한 것이 들렸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는 환하게 타오르고 있는 불이 마을의 집들을 덮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의 한가운데, 가끔 노인들이 앉아 한담을 하곤 하는 공터에 피워져 있는 것이며 그것이 굉장히 커다란 모닥불이고, 마을 사람들의 모습들이 언뜻 그 근처에 비춰져 보였다.

완전히 바보가 된 기분으로 터덜터덜 언덕을 내려오자 마을 사람들이 얼굴에 환한 웃음을 머금고 그를 마을의 한가운데로 끌고 갔다.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통에 전부 대답하진 못했지만 주로 왜 이렇게 늦었냐는 등의 이야기였다. 얼떨떨해진 기분으로 좀 더 모닥불에 가까이 가자 둘러서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와 하고 박수를 쳤다.

“오늘의 주인공 입장이오!”
“와하핫! 어서 오게!”
“휘이익-!”

데인은 환호성을 받으며 사람들이 권해주는 가운데의 의자에 앉게 되었다. 한쪽에서는 통으로 돼지가 구워지고 있었고 그 옆에선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솥에서 무언가가 끓고 있었다. 야채와 빵, 미리 쪄둔 감자 따위가 여기저기 바구니에 담긴 체 널려 있었다.

“데인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며! 자자 다들 한잔씩 받으라고! 아끼던 놈이야!”

데인의 마을에서 맥주는 흔했지만 포도가 전혀 자라지 않았기에 와인은 좀 귀한 편이었다. 토마스 씨가 몇년간 꽁꽁 감춰두고 절대 꺼내지 않았던, 행상인에게서 구입했던 15년 된 와인병이 지금 개봉되고 있었다.

“자, 데인! 한잔 받게!”

어느새 어둠이 내린 마을에 모닥불의 빛만이 사람들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데인에게 술을 따라주는 토마스 씨의 얼굴에 약간 아깝다는 표정 비슷한 것이 어려 있어서, 그는 여러모로 미안해졌다. 아까 구른 그 밭은 분명 토마스 씨의 것이었을 텐데, 다음날 아침 토마스 씨가 그 엉망인 꼴을 발견하고 무슨 말을 할 지 내심 걱정되었다.

“자자, 어서 마셔. 원래는 아껴 마시는 거지만 좋은 날이니까 한번에 쭈욱!”

데인은 눈을 감고 거의 대접만한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와인의 향취 따위를 느낄 사이도 없이, 약간 시큼한 듯 하면서도 확 하고 타오르는 느낌이 식도를 타고내려갔다. 라일라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오늘 저녁은 기대 하라고 했잖아요.”

데인은 환하게 미소지어 주었다. 그러나 마을의 다른 사람들이 저쪽에서부터 엄청나게 커다란 맥주통 세 개를 낑낑거리며 들고 오는 것을 본 순간 그 미소는 싹 사라졌다. 잦지는 않았지만 무슨 일인가로 잔치가 벌어질 때마다 꼭 한 명씩이 권주의 집중사격을 받는 마을의 전통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                *                *        *        *        *        *                *

뿌연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내닫는 에이진의 기마대를 바라보는 병사들의 얼굴은 모두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죽음의 공포는 이제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적이 되어 그들을 덮치고 있었다. 데인은 그 상황에서도 주변을 둘러보며 뭔가 조금이라도 잘 싸울 수 없을 까에 대해 고민했다. 정탐꾼의 말에 의하면 상대방의 보병대는, 비록 경장보병대였지만, 그다지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기마대를 쫓을 수는 없기 때문에 천천히 뒷정리를 하고 떠나려는 모양이었다.

한 가지 데인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그들이 완전한 평지에서 적을 맞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숲을 돌아가야 하는 에이진 군과는 달리 숲을 바로 가로질러 미리 대기하고 있던 그들은 에이진 군의 진행방향을 비스듬하게 내려다보는 가파른 언덕 위에 있었다. 말에게는 불편하지만 사람은 충분히 운신할 수 있는 그 언덕에서부터 밀어붙이면, 적어도 평지에서 기마대의 돌격을 감당해 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터였다.

저쪽에서 장엄한 뿔피리 소리가 터졌다. 평소같으면 멋지다고 생각했을 부드러우면서도 깊고 웅장한 울림은 그들에게 있어 적이 그들을 발견했다는 신호이며, 동시에 자신들의 죽음이 목전이라는 신호로 들릴 뿐이었다. 몇몇의 병사는 신의 가호를 빌고 있었고, 몇몇은 숨죽여 적들을 주시했으며 또다른 몇몇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적들은 잠시 속도를 늦췄다. 그들이 일으킨 뿌연 먼지구름 사이로 얼핏 보기로 그들은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아까처럼 계속 산개해서 달려왔다면 훨씬 싸우기 편할 텐데, 하고 데인은 생각했다. 이러나 저러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데인은 계속 허리에 차고 있던 칼집은 버려버리고 칼만 손에 쥐었다. 그래도 창이 아니라 칼인게 다행이었다. 어차피 어설픈 솜씨라면, 더 이상 밀집대형도 할 수 없고 일렬 후퇴 이열 전진 따위의 명령도 받을 수 없는 지금 창보다 칼이 훨씬 위안이 되었다. 그는 더위를 각오하면서도 버리지 않은 투구의 끈 매듭을 풀렀다가 다시 매었다. 더위를 이유로 투구를 버려버렸던 많은 병사들이 그의 투구를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이 투구 때문에 저들보다 3 초라도 더 살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남들보다 3초 더 살 수 있는 그 시간으로 무엇을 할 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3초로 그들의 죽음을 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정렬을 완전히 재정비한 적들은 다시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수십명씩이 한 조를 이뤄 삼각형의 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심장을 겨눈 창끝처럼 보였다. 시즈 대장이 앞으로 나섰다. 그도 칼을 뽑아들고 있었다. 넷 정도 남아있던 활들은 모두 사냥꾼 출신 등의 조금이라도 활을 잘 쏘는 사람들에게 지급되었고, 나머지는 칼과 창을 들었다. 무기가 부족해 부러져 단창처럼 보이는 창을 든 이도 있었고, 칼 외에도 굵은 몽둥이를 허리춤에 꽂아넣은 이도 있었다. 마치 오합지졸의 도적떼와 같은 모습으로 그들은 에이진의 정예 기마대를 맞았다.

싸움의 시작은 란돌프 백인대장의 부대가 바위와 통나무 등을 굴리면서 시작되었다. 너무나 급하게 준비했기에 통나무 두어개와 바윗돌 몇개가 전부인 그 낙석 공격은 심지어 굴러가다 멈추는 바윗돌이 있었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생겨난 장애물들은 기마병들의 속도를 늦췄고, 아서 경이 함성을 지르며 뛰쳐나갔다. 아서 경 휘하의 병사들도 일제히 뛰어나갔다. 그 뒤를 바로 시즈 대장이 뒤따랐고 란돌프 대장도 달려내려갔다. 아주 짧은 순간 데인은 멈칫했다. 달려나가기 시작하는 병사들에게서 한 발짝만 물러선 다음에 뒤돌아 도망칠 수도 있었다. 어차피 숲 속에 있으면 에이진의 기마대는 추격할 생각은 하지 않고 지나가 버릴 것이다…

그러나 도망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어느새 앞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윤곽이 뚜렷하게 보이는 거리까지 다가든 적의 창날이 햇빛을 받아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휘리릭, 바람소리를 내며 서너 발의 화살이 에이진 군에게 날아들었다. 화살들은 적의 갑옷과 방패 등에 부딪쳐 무력하게 튕겨나갔다.

해를 등지고 고지를 선점했는데다가 통나무와 바위 따위의 장애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이진 군은 전혀 동요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세모꼴의 진형을 유지한 체로 그들은 푸른 파도처럼 덮쳐왔다. 마침내 두 군대가 격돌했다. 한순간 그는 자신의 거친 호흡도, 미친 듯이 폭주하는 심장도 잊고 함성을 쥐어짰다. 갈라지고 피맺힌 그의 함성은 금세 비명과 또다른 함성 소리에 뒤섞여 마치 남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데인의 바로 앞에서 달리던 이가 적의 창에 가슴을 찔려 쓰러졌다. 무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데인은 적에게 뛰어들며 칼을 휘둘렀다. 데인의 칼에 찔린 말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쳤고 그 서슬에 데인은 칼을 놓쳤다. 창을 버리며 칼을 뽑던 적은 미처 칼을 뽑지 못하고 땅 위로 나뒹굴었고 데인은 그런 그의 위에 올라타 손으로 찍어눌렀다. 나동그라진 적은 거칠게 반항했지만 데인은 오히려 적의 칼을 뺏어서 그 목을 찌를 수 있었다.

‘적을 죽일 생각은 하지 말고 무조건 말을 노려.’

적의 목에서 왈칵 치솟는 피를 맞으며 데인은 그 말을 가슴에 되새겼다. 시즈 대장의 마지막 조언은 상대방을 직접 노리기 보단 그 말을 노리라는 것이었다. 적과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 발을 묶는 것이 그들이 전장에 나온 모든 이유였으니까. 데인은 비칠거리며 칼을 뽑았다. 절명한 상대의 칼은 한손검인지 가볍고 휘두르기 편했다. 그는 비칠거리며 전장을 돌아보았다. 그 짧은 사이에도 수없이 많은 아군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에이진 군의 숫자는 끝이 없어 보였다. 분명 천 명이 안될 텐데도 사방은 에이진의 푸른 군복밖에 보이지 않았다. 근처에서 아서 경이 에이진 군 중 두 명과 싸우고 있는 것을 발견한 데인은 그쪽으로 뛰어갔다. 아서 경은 결코 대단한 명성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기사여서 말을 탄 적 둘을 상대로도 버티고 있었지만 힘에 부치는 모양이 역력했다. 적들은 마치 그를 가지고 놀 듯 빙빙 돌며 창을 찔러댔다. 그들도 아서 경이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적 중의 한명이 아서 경을 상대하느라 데인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었다. 데인은 그 바로 뒤에 놓인 바위를 밟고 뛰어오르며 적에게 매달리듯 칼을 찔렀다. 목뒤를 찌르려고 한 것인데 어깨를 찌르고 말았는지 갑옷의 둔탁한 저항이 팔에 전해졌지만 데인의 체중이 실린 칼은 적의 갑옷을 뚫고 박혔다. 적은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넘어졌고 데인도 그를 따라 넘어졌다. 말 위에서 떨어진 충격은 만만치 않았는데, 일어난 것은 적이 먼저였다. 그자는 부상을 당하지 않은 왼팔로 칼을 뽑으려 애썼지만 그건 쉽지 않았고 데인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옆에 떨어진 큼지막한 돌 하나를 집어 들고 일어났다.

그가 체 돌을 휘두르기 전에 뜨끔한 통증이 어깨를 파고들었다. 앞으로 넘어진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렸고 그 자리를 창 한 자루가 쓸고지나갔다. 고개를 들자 그의 주위로 세 명이나 되는 적이 다가와 있었다. 아서 경은 이마에 창 한 자루가 꽂힌 시체로 쓰러져 있었다. 왈칵 두려움이 몰려와야 정상일 텐데 오히려 그는 피가 끓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일어났다. 손에는 아직 돌을 쥐고 있었다. 방금 그의 어깨를 베었던 자가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너무나 궁금했다. 적을 죽이기에 앞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리고 또 자신의 표정은 어떨까? 데인은 재빨리 한발짝 뒤로 뛰어 옆에서 찔러오는 창을 피했다. 아까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등을 돌린 적을 향해 아군의 누군가가 뛰어오고 있었다. 피에 젖은 시즈 대장이었다. 시즈 대장이 고함을 지르며 한 마리 표범처럼 바위를 박찼고 적이 내지른 창은 헛되이 허공을 갈랐다. 정말로 먹이를 덮치는 표범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아주 잠깐, 시즈에게로 적들의 시선이 모아졌고 그 순간 데인은 옆에 떨어진 창을 집어들어 눈앞의 말을 찔러버렸다. 가슴팍에 창이 꽂힌 말이 앞발로 데인을 걷어찼고 데인은 가슴을 쇠망치로 두드리는 충격을 느끼며 멀리 나가떨어졌다.

가슴이 너무 아파 숨도 쉴 수 없는 고통이 밀어닥쳤지만 아직도 오른손에는 돌이 들려 있었다. 그 순간에도 그의 머리는 맹렬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말에서 떨어진 적은 푸른 망토와 조금 다른 모양의 투구를 걸치고 있었다. 적의 지휘관일까? 데인은 맹렬하게 덤벼들었고 적은 날렵하게 피하며 데인의 발을 걸었다. 동시에 뽑혀나온 칼이 데인의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가죽 갑옷은 마치 종잇장처럼 갈라졌고 데인은 체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엎어졌다. 옆의 또다른 한 명을 처치한 시즈 대장이 칼을 휘두르며 적의 지휘관에게 덤벼들었다. 시즈의 묵직한 칼에 비해 적 지휘관의 칼은 지나치게 가늘어 곧이라도 부러져 버릴 것 같았다. 적어도 처음엔. 그러나 두어 번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적의 지휘관은 맞댄 칼을 옆으로 미끄러트리며 시즈의 가슴을 찔렀다. 시즈의 바로 뒤에 있던 데인은 시즈의 등 뒤로 삐져나온 날카로운 칼끝을 볼 수 있었다.

“으아아아아!”

발로 시즈의 몸을 차내며 칼을 뽑아내던 적의 지휘관은 몸을 빙글 돌리며 옆에서 달려들던 아군을 찔렀다. 이름이 뭐였더라? 알먼이었던가? 다암 지방 출신의, 정찰병이었던 사내. 그는 발이 대단히 빨랐지만 적군 지휘관의 동작은 마치 번개가 내리치는 것과도 같았다. 목을 꿰뚫린 체 쓰러진 알먼의 눈가에 시퍼런 멍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때 그 덩치 큰 병사에게 맞은 것이었다. 왠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데인은 울었다. 울면서 달려들었다. 시즈 대장이 떨어트린 칼은 두 손으로 간신히 들 수 있을 만큼 무거웠고 가슴이 아파 숨도 잘 쉴 수 없었지만 데인은 지금까지의 그 어느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그 번개같은 동작으로, 적의 지휘관은 데인에게도 칼을 찔렀다. 목이 뜨끔하다고 느끼는 순간 데인의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맥풀린 다리가 데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넘어졌다. 다행히도, 시즈의 칼은 데인의 힘이 끝까지 실리지 않아도 될 만큼 무거웠다. 칼은 내던져 진 듯 앞으로 날았고 칼끝을 상대의 턱을 스치며 턱 바로 밑, 가슴 갑판 바로 위에 박혀들게 만들었다. 데인은 옆으로 쓰러졌다. 세상은 점차로 붉게 물들어갔다.

붉게, 붉게, 나중에는 다른 아무 모습도 보이지 않고 온통 붉은 세상으로. 그 붉음 속으로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얼굴들이 스쳐지나갔다. 부모님, 어릴 적의 친구들, 라일라, 마을 사람들, 제프, 알먼, 시즈 대장, 덩치 큰 병사, 이름 모르는 적병, 이반, 마을 촌장님, 아서 경, 란돌프 대장, 사슴, 적의 첩자, 그리고 수많은 얼굴들. 맨 마지막으로 적의 지휘관의 얼굴까지 보였다. 붉어진 세상은 다시금 검게 변해갔다. 어둠, 그리고 고요. 영원히.

*                *                *                *                *                *

깨질 것만 같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데인은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이었다. 딱딱하게 굳어 잘 움직이지도 않는 것 같은 팔다리를 겨우겨우 움직여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정말 깨져버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끔찍한 두통이 그를 덮쳤다. 동시에 목이 말랐다.

“여기가… 어디야.”

데인은 무릎을 꿇고 기다시피 해서 근처의 바위까지 갔다. 도처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고 광기어린 전날의 흔적들이 널려져 있었다. 데인은 마지막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그러니까…”

두 번째 맥주통의 뚜껑을 여는 사람들에게 제발 그만이라고 소리치던 것 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다음은 전혀 기억이 없었다. 아마 술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놓아버린 모양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먹고 마신 건지 웬만한 마을 장정들은 다 거기 잠들어 있었다. 그들을 깨울까 하던 데인은 일단 자신부터 깨우자는 생각에 마을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의 냇물로 세수를 좀 하면 정신이 들까 해서였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자 좀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머리도 덜 아팠고. 냇물을 손으로 떠 마시자 갈증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는 일어나 마을 안쪽을 둘러보았다. 웬만큼 크게 잔치를 벌여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제는 어지간히도 많이들 마신 모양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거의 일년이 넘게 잔치를 벌여 기뻐할 만한 길을 가지지 못했었다. 데인의 무사귀환은 그들에게 좋은 잔치 ‘거리’ 였던 것이다. 물론 데인의 귀환을 진심으로 축하하기도 했지만.

“토마스 씨. 일어나세요. 토마스 씨.”

그러나 이렇게나마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일찍 정신을 잃은 데인 뿐인지 다른 이들은 흔들어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난감해진 데인은 어쩔 줄을 몰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인네들도 길바닥에서 잠들지 않았다 뿐이지 아직까지 잠들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고민하던 그는 물을 뿌려버리기로 결심했다. 숙취로 피곤한 것은 알지만 오늘 하루 일손을 놓아버릴 만큼 한가한 시기는 아니었다. 주변에서 항아리를 하나 주워 냇가로 걸어가던 데인은 이 마을 주변에선 절대로 듣지 못할 다각거리는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마을에 가축이라곤 나귀와 소, 돼지들일 뿐 말은 키우지 않았다. 그런데 말발굽 소리, 그것도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소리라니?

마을 어귀로 나간 데인은 곧 저 아래에서부터 달려올라오는 말 한마리와 그 기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반년에 한번씩 찾아오는 세무원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지금은 세무원이 올 시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세무원은 저렇게 급하게 말을 몰지 않았다. 약간은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혹 탈영병을 잡으러 온 군인이 아닐까 하고. 그의 걱정대로 먼지를 일으키며 마을 앞까지 달려온 기수는 제국군의 정식 군복을 입고 있었다. 기수는 데인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언덕길을 오랫동안 달려왔을 텐데도 말은 그다지 지치지 않았을 정도로 크고 튼튼했다. 그 위에 올라탄 기수는 멋지게 콧수염을 기른 근엄한 장교였다.

“여기가 타소 마을이 맞는가?”
“그,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데인 쟈크를 아는가?”
“저, 아니, 압니다. 왜 그러십니까?”

자신도 모르게 접니다 라고 말할 뻔했던 데인은 급히 말을 바꾸었다. 조마조마했는데 상대는 별달리 의심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데인은 불안한 마음에 몇 마디를 덧붙였다.

“데인 쟈크는 제 형입니다. 저, 무슨 일이라도…?”
“동생이라. 그렇다면 잘 되었군.”

기수는 말 안장에 매달린 가방 안에서 돌돌 말린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었다. 그것을 펼칠 때 언뜻 들여다 보아 그것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명단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기수는 가방에서 목탄 비슷한 것을 꺼내 데인 쟈크라고 쓰인 이름에 줄을 그었다. 그리곤 아직까지 멍청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데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대의 형은 자랑스럽게도 제국을 위해 전사했다. 다르프 평원에서 제국의 용감한 병사들은 절대적인 숫적 열세 속에서 최후까지 저항했으며 에이진의 검은 마수가 제국에 뻗치는 것을 막았다. 비록 적을 이기진 못했지만 제국 북방정벌군이 귀환할 때까지 적을 막아낸 용기를 높이 사 황제폐하께서 친히 상여금을 내리셨다.”

기수는 아직도 들려야 할 마을이 많은 지 급하게 말들을 쏘아붙이고는 가방에서 금화 두 개를 꺼내었다. 데인이 얼떨결에 금화를 받아들자 기수는 바로 말머리를 돌려 언덕 아래로 내달아 버렸다.

“그러니까… 나는 전사한 건가?”

자신은 전장에서 도망쳐 나왔고 동료들은 사지에서 적을 막다 죽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은 전사자 명단에 올랐으며 자신이 생명의 대가로 금화 두 개가 하사되었으며 자신은 살아서 그것을 받아들였다. 우스운 모순 앞에서 데인은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 물끄러미 금화를 내려다보던 그는 그것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숙취로 끙끙거리는 사람들을 지나쳐 집으로 들어온 데인은 침대에 잠들어 있는 라일라에게 다가갔다. 그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그는 어젯밤 던져놓은 괭이를 챙겨들었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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