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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선택(상)

2006.12.08 05:3112.08

거울은 좋은 글들이 너무 많아서 제 글을 내보이기가 부끄럽군요.
2006년도 거의 끝나가는데 뒤를 돌아보니 제가 해둔 것이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울에 글을 올리며 따끔한 말이라도 들으면 정신을 차릴런지요.

옛날 글부터 하나씩 갑니다.


[단편]  선택

Copyright ã 2004 by박 찬일(Chaneel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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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용기있는 결단은 어느 쪽일까?


제국력 323년. 여섯번째 달, 제1주의 3일. 정오.

상황은 좋지 않았다. 사방에선 탁한 회색의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매캐한 냄새는 나무가 타는 냄새였고 풀이 타는 냄새였다. 한편으로는 시체가 타는 냄새이기도 했다. 시체가 타는 냄새를 처음 맡았을 때, 그는 여러번 토할 것 같았다. 그슬린 체모와 옷, 입고 있던 가죽의 장비들이 타들어갈 때 나는 냄새는 고향에서 돼지를 잡아 구울 때의 냄새하고는 전혀 달랐다. 시체 타는 냄새 이외에도 주변에 즐비한 시체의 광경들은 충분히 두려운 것들이었다. 그들은 상처입고 피를 흘렸으며, 때때로 잃어버린 부분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간간히 살아 꿈틀거리는 이도 있었지만 그럴때마다 그는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시체 타는 냄새보다도 시체가 부패하는 냄새가 지독했다. 피 냄새에는 어느정도 익숙해진 그도 시체 부패하는 냄새는 견딜 수가 없었다. 시체가 부패하는 냄새에는 죽은 자의 원한과 공포가 그대로 묻어 나왔다. 그건 두려운 냄새였다. 검은 날개를 가진 손님이 아니라면, 살아있는 모든 생물은 그 냄새를 피해갔다.

하지만 그를 지금처럼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지독한 악취도 아니었으며 시체들의 끔찍한 광경도 아니었다. 그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바로 살아있는 적군이었다. 얼핏 푸른 군복이 보일때마다 그는 들고 있는 칼을 꽉 움켜쥐었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그가 본 푸른 군복들은 전부 죽은 자들이었다. 전날 밤의 전투는 격렬했지만 아무래도 아군의 패배라고 보는 쪽이 옳았다. 적은 밤을 틈타 기습했고 그 정도의 대군을 그렇게 조용히, 그리고 빨리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아군은 거의 무방비나 다름없는 상태로 당했다. 때문에 들판에 즐비한 시체들은 주로 아군들이었다. 그는 불에 타지 않은 시신들의 얼굴을 되도록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불에 탄 시신은 보기에는 끔찍했지만 그래도 불에 안 탄 시신의 얼굴을 보는 것만큼 가슴아프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잘 해 주었건 아니면 못되게 굴었던 건 간에 한달 이상 함께했던 이들의 시신을 보는 것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가슴을 저미는 일이었다.

간혹 가다가 완전히 불에 타지 않은 막사들이 나왔다. 그는 조심 스럽게 그런 천막들의 내부를 들여다 보고는, 안에 아무도 움직이는 이가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 안에 들어가 무언가 챙길 물건이 없는가를 살폈다. 지금까지 일고여덟개의 막사를 살폈지만 그가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건진다면 시체들에게서 귀중품을 좀 뺏을 수도 있었다. 특히 장교급들의 시체에서는 반지라던가 돈이라던가 건질 수 있는 것이 많았지만, 그는 차마 시체에는 손을 댈 수 없었다. 사실 반지나 돈 따위는 그가 찾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물론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돌아가게 되면 쓸만할지 몰라도, 당장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가 찾고 있는 것은 먹을 것이었다.

하지만 적군은 식량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완벽히 불살라 버렸고, 그 밖의 다른 막사에서 식량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개인소지용 건량도 발빠른 이들이 먼저 손을 댔는지, 아니면 불속에서 다 타버렸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좋아.’

막사의 이곳저곳을 뒤지다 불길에 달아올라 아직도 뜨거운 칼에 손을 데일뻔한 그는 결국 포기하고 일어섰다.

‘여기 오래 있으면 안되겠어.’

이쯤되면 짐작했겠지만, 그는 낙오자였다. 혹은 패잔병으로도 불릴 수 있겠지만, 패잔병은 그나마 퇴각하여 다른 동료들과 함께 집결지점으로 모일 수 있었던 이들이고, 그런 패잔병들의 틈에 끼이지도 못한 체 죽은 척 하고 누워 있다가 해가 완전히 뜬 후에야 겨우 움직이기 시작한 그와 같은 경우는 낙오자라고 불리는게 좀 더 정확했다.

집결지점이 어딘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적의 기습이 시작되어 막사들이 불에 타오르기 시작할 때 일단 덮어놓고 근처의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운이 좋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런 그를 죽일 가치도 없다고 여겼던 걸까, 전날밤의 아비규환 속에서도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적군은 아마도 후퇴하는 아군을 추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적군 중에서도 낙오자가 없을 리는 없고, 또한 이곳에 살아남은 자신과 같은 패잔병들을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남겨진 적군 병사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자신 스스로 아군이 적군의 패잔병들을 가차없이 죽이는 것을 목도한 지라 불안감은 더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지는 들고 있는 칼을 쓸 일이 생기지 않았었다. 아마도 아군의 장교가 쓰던 것임에 분명한 그 칼은 그가 들기에는 영 어색했지만 사람을 죽이기에는 전혀 모자람이 없는 훌륭한 칼이었다. 기습으로 전사한 아군의 장군은 그 칼을 뽑아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그는 장군처럼 죽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칼을 쓸 일이 없기를 바랬다. 그는 싸움에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는 아군의 시체들을 넘어 마침내 숙영지를 벗어났다. 그가 특별히 목표로 하고 있는 곳은 없었으며 되도록이면 아군들이 있는 곳이 좋았다. 여기저기서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이곳 다르프 지방에서 홀로 다닌다는 것은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도대체 아군이 어디 있는 줄 안단 말인가?

숙영지의 한쪽은 낮은 구릉들이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는 구릉지대였으며 간간히 덤불들이 보였다. 다른 한편은 드넓기로 유명한 다르프 평원이었지만 아침에 나 있는 발자국과 말의 발굽자국들을 보건데 적군은 바로 다르프 평원쪽에서 밀려왔으므로 아군이 그쪽으로 퇴각했을 리는 없었다. 다른 한쪽은 무성한 나무가 숲을 이룬 야산이었다. 결국 야산이냐 구릉지대냐의 선택이었다. 양쪽 다 많은 사람들이 이동한 흔적들이 보였지만 한쪽은 적군들이 추격했을 것이 뻔하므로 둘 중의 하나는 위험했다. 그는 만약에 자신이 전날밤의 아군들이었으면 어디로 퇴각했을 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기 전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둘 다 추격받았을 경우도 있었고 둘 다 안전할 수 도 있었다.

그는 한동안을 망설이다가 결국 구릉지대로 가기를 택했다. 몸을 숨기기에는 숲쪽이 더 낫겠지만 그만큼 적군을 미리 발견하기도 어려웠다. 또 위험한 동물도 살 것 같았고, 길을 잃기도 쉬웠다. 차라리 구릉지대가 나을 것 같았다. 군데군데 관목 숲이 보여 정 위급하면 그 안에 몸을 숨겨도 될 듯 싶었다.

결국 그는 구릉지대 쪽으로 마음을 결정했다. 일단 마음을 정하자 그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아군이 얼마나 멀리까지 퇴각했는 지는 몰랐지만 그다지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밤에 경황 없는 와중에 멀리 가봐야 얼마나 갔겠는가. 그는 해가 향하는 방향을 따라 서쪽을 목표로 잡았다. 아무 생각없는 결정이었지만 간간히 아군의 시체와, 그리고 아주 드물게 적군의 시체가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가는 방향이 맞는 것처럼 보였다.

구릉지대는 아주 넓었다. 별다르게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도 없었기에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까지 금방 도달할 것 같았는데도 그는 하나의 구릉을 넘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 오늘은 저기까지 가자 하고 결정했었던 작은 바위까지는 앞으로 수십개의 구릉이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반나절을 걸어왔는데도 걸어온 길보다 걸어가야 할 길이 더 많다면 누구라도 기운이 빠지기 마련이었다. 그는 잠시 관목 덤불 아래 앉았다. 관목은 빨간 색의 콩알만한 열매를 맺고 있었지만,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르프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나무의 열매는 독성이 있어서 먹어도 죽지는 않지만 먹으면 심한 두통과 설사가 찾아온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먹을 것 생각도 간절했지만, 무엇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물이었다. 밤새 잠들지도 못하고 꼼짝도 못하고 엎드려 있었는 데다가 해가 내리쬐는 구릉지대를 걷다 보니 목이 몹시 탔지만 근처에 물이라고는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죽을지도 몰라.’

거의 아무도 보이지 않는 구릉지대를 걷다보니 잊어버렸던 두려움이 다시 그를 엄습했다. 적군에게 발견되어 죽는 것도 두려웠지만, 굶어 죽거나 탈수로 죽는 것은 더 두려웠다. 적군은 어떻게 쓰러트리거나 숨거나 도망갈 조그마한 기회라도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기운이 빠지는 것이다.

‘차라리 숲으로 갈 걸.’

숲으로 가면 먹을 수 있는 열매와 마실 수 있는 냇물이 있을 텐데. 하지만 후회는 소용 없었다. 그는 되도록 입을 벌리지 않고 침을 입안에 모았다가 삼켜 갈증을 잊어보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바싹 마른 입안에는 침도 잘 고이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더웠다. 가장 걸리적거리는 것은 투구와 칼이었다. 투구는 벗어서 들고 가면 그래도 좀 나았지만, 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버려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적을 만나면 목숨을 기댈 만한 것을 칼밖에 없었다. 햇볕에 달아오른 금속은 다리에 닿을 때마다 뜨끔할 정도로 뜨거웠다. 점점 무거워지는 발걸음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없었고 짐이 될 만한 것은 많았다. 고달픈 여정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몇 개나 되는 구릉을 넘던 그는 사슴을 발견했다. 간간히 보아오던 조그만 쥐 종류의 생물이 아닌 커다란 동물은 처음이었다. 사슴은 두 마리로, 수사슴과 암사슴의 한 쌍이었다. 사슴들은 사람이 가까이 가도 도망가지 않고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그는 손을 살그머니 칼자루에 얹었지만, 뽑지는 못했다. 칼을 뽑는다고 해도 죽일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도 했지만 사실 그럴만한 기운이 없기도 했다. 갈증만 없었더라면 사슴에게 덤벼들었을지도 몰랐다.

사슴과의 조우 이후로도 그는 몇 시간이고 계속 걸었다. 가장 타는 듯이 뜨겁던 오후가 지나가고 해는 점차로 지평선과 가까워지며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점차로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만큼이나 걸어왔는데도 아군은 물론 적군의 모습도 볼 수 없다는 것은 둘 중의 하나였다. 그가 방향을 잘못 잡았거나, 아니면 추격이 아주 멀리까지 계속되어서 아군도 적군도 멀리까지 가버렸거나. 어느쪽이건 반갑지 않은 결론이었다. 더위는 한결 가셨지만 갈증은 더욱 지독하게 심해졌고 굶주림은 기운을 앗아갔다. 점점 무거워지는 허리춤의 칼을 버려버릴까 수백번도 더 고민했지만 그는 차마 그것을 던져버리지 못했다.

그는 안되겠다 싶어 관목 덤불의 한켠에 주저앉았다. 얼마나 더 걸어야 할 지 몰랐지만 조금이라도 쉬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땀에 젖어 독한 냄새를 풍기는 가죽갑옷도 벗어버리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그 가죽갑옷은 칼보다도 더 소중한 것으로, 그의 목숨을 지켜줄 갑옷이었다. 그때 뒤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거의 누워있다시피하던 그가 상체를 일으켜 뒤를 돌아보는 순간 시커먼 그림자가 그를 덮쳤다. 묵직한 무게가 그를 땅으로 넘어트렸고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뒤틀었지만 상대는 순식간에 그의 위에 올라타고 어깨를 짓눌렀다. 왼팔은 허리 밑에 깔려 부러질 듯 아팠고 오른팔로는 왼팔과 함께 깔려버린 칼을 뽑을 수 없었다.

상대는 손에 단검을 쥐고 있었다.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삽시간에 밑에 깔리게 되자 정신이 없었지만 그 선뜩한 칼날이 의미하는 바를 무엇보다 잘 알고 있던 그는 반항을 멈췄다. 아직도 후덥지근한 날씨인데도 등골이 오싹했다.

“살, 살려주십쇼 나으리. 저, 저는 제, 제국군에 들, 들고 싶어서 들은 게 아닙, 아닙죠 예. 저, 저같은 농사꾼이 뭐, 뭘 알겠습니까만은, 그냥 와서 싸우러 나가라니까, 에, 어, 억지로, 그 있잖습니까 왜, 징집 거부하면 농지를 뺏는다니까 그래서, 저, 저, 결혼한지 얼마 안됬습니다요 나으리. 아, 아직 애도 없는데, 끄, 끌려나와서, 저 여기서 주, 주, 죽으면 그러니까…”

해를 등진데다가 시커먼 그을음이 묻은 상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상대의 입꼬리가 말려올라가는 것은 분명하게 보였다. 목줄기 언저리에서 놀던 칼날이 천천히 치워졌다. 곧 상대는 일어났다. 그는 저린 왼팔을 오른손으로 감싸고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적군임을 뜻하는 푸른 색의 군복을 입고 있는 상대의 얼굴이 점차 드러나자 어딘지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봐, 나야 나. 잘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란돌프 백인대장 밑에 있던 제프라고 하네. 자네 이름이 뭐였지?”

상대의 어딘가 친근한 물음에 그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적군의 투구를 쓰고 적군의 표식인 푸른 색의 군복을 갑옷 위에 걸치고 있는 상대의 얼굴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주 얼굴을 보곤 했던 이웃 백인대의 한명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데인.”
“아, 그래, 데인. 아마 시즈 백인대장 밑에 있었지? 놀래켜서 미안하네. 앉지.”

제프라고 자신을 밝힌 상대는 털썩 하고 땅에 주저앉았다. 데인은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전쟁터에서 꽤나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고 밤마다 자랑이 심했던 제프에 대한 몇가지 단편적인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서로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지만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 옷은 뭐 별거 아냐. 죽은 에이진국 병사의 옷을 뺏어 입은 거지 뭐. 적어도 이걸 입고 돌아 다니면 멀리에서 화살 세례를 받고 죽을 염려는 없으니까.”
“우리편에게 발견되면 공격받을 텐데요?”

뭐 별 걸 다 걱정하냐는 듯 제프가 웃었다.

“그건 걱정없어. 재빨리 내 신분을 밝히면 되고 또 날 알아보는 사람도 몇명 있겠지. 무엇보다도 제국군에게 발견될 염려는 없어. 지금 사방에 에이진국 병사들이 깔려있다고.”

그렇게 말하며 제프는 허리춤에서 가죽으로 된 주머니를 꺼냈다. 그건 수통이었다. 철렁거리는 물이 가득한 가죽 수통. 제프는 그것을 휙 던졌고 데인은 그것을 받았다.

“마셔. 얼굴에 목마르다고 써있구만.”

데인은 고맙다고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물을 들이켰다. 차갑진 않았지만 그가 지금까지 마셔본 그 어떤 물보다도 시원했다. 한달음에 수통의 반 정도를 비우고 나서야 제정신이 든 데인은 뚜껑을 닫고 그것을 제프에게 돌려주었다. 잠깐 사이에 가벼워진 수통에 제프는 허탈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디로 가는 중이었나?”

같은 편을 적군인 줄 알고 겁을 집어먹은 데다가 벌벌 떨며 빌기까지 했단 사실이 분하고 창피한 데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분위기는 어색했다. 어색한 침묵을 깨트린 것은 물론 제프였다.

“일단은 우리편을 찾으려고…”
“우리편? 제국군 말인가? 그렇다면 길을 잘못 들었어. 자네가 가던 방향으로 가면 자넨 에이진 국의 진영 안으로 뛰어드는 꼴이 될걸. 여기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가다보면 제국군 진영이 나올 거야. 하지만 말해두건데, 거기 가봤자 득 될거 없어.”

제프는 자신의 물건들을 챙기더니 일어섰다. 건장한 그의 체격에 푸른색의 군복은 꽤 잘 어울려 보였다.

“당신은 어디로 갑니까?”
“나? 난 집으로 가지. 어차피 지금 제국군에게 가담해봐야 죽은 목숨이야. 에이진 군은 정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고 있단 말이지. 데인, 자네도 살고 싶다면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길이야.”

데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뭐, 선택은 자네 자유지만. 난 분명 경고를 줬고, 어떻게 하든 그건 자네 맘이네만, 괜히 사지로 뛰어들지는 말라고.”

제프는 휘적휘적 걸어 멀어져갔다. 하늘은 석양으로 물든 붉은 빛과 몰려오는 밤의 짙은 남색이 뒤섞여 밝은 보랏빛의 선을 그리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색이 아니었다.

*                *                *                *                *                *

제국력 323년. 여섯번째 달, 제1주의 4일. 새벽.

데인이 마침내 제국군의 야영지를 발견한 것은 밤이 깊어서였다. 전날 야습을 당하고 천막은 그대로 거기에 남아있거나 불에 타버려 제국군의 야영지에는 천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여기저기 장작을 쌓아 불을 붙여 놓았을 뿐이었다. 처음에 그는 안도했다. 어쨌든 같은 표식을 달고 있는 이들이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사방에 피워놓은 장작불은 밝고 환한 느낌을 가져왔다.

그러나 낙오자가 마침내 되돌아왔음에도 아무도 기뻐하며 반기지 않았다. 물론 놀라하는 사람은 있었다. 원래 데인이 속해 있었던 백인대의 대장인 시즈 대장과 몇몇 동료들이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었군 그래.”
“네.”
“살아남은 주제에 다시 죽으러 기어들어왔냐?”

처음에는 그저 반가움에 하는 농 섞인 인사치레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즈 대장도, 동료들도 웃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데인의 어리석음에 혀를 찼지만 그렇다고 그를 도로 내쫓지도 않았다. 어쨌든 데인은 동료들의 틈에 끼어 모닥불 옆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동갑인데다가 처음 징집되어 배치된 순간부터 함께 해왔던 이반은 그나마 이야기가 좀 통했다. 이반은 데인이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돌아온 것을 축하했으며 다시 함께 하게 되어서 기쁘다고 했다.

“모르겠어. 난 전날 밤에 습격당했을 때 도망가는 사람들 틈에 끼였었어. 그때 네가 바닥에 넘어져 있는 걸 봤었지… 죽은 줄 알았었는데. 아무튼 무조건 도망가고 도망갔지. 어쨌든 뜀박질은 잘했으니까, 아는 사람들하고 같이 도망쳐서 여기까지 온거야. 지금 윗대가리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모르겠어. 듣자니까 에이진 놈들이 근처 어딘가에서 공격을 준비한다던데. 윗대가리들은 계속 작전인지 뭔지 궁리는 하고 있는 건가. 우리같은 졸병이야 시키는데로 할  뿐이지 뭐. 가능하다면 -.”

이반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퇴각한다면 좋겠는데.”

데인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 장작이 타닥 하는 쪼개지는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데인의 배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잊고 있던 허기를 떠올렸다. 이반이 씩 웃더니 근처에 놓여있던 자루를 끌렀다.

“우리 조 비상식량은 내가 들고 왔지. 지금 어차피 먹을 게 없으니까 이거라도 먹으라던데.”
“많이 남았네, 다들 나눠먹은거 치고는?”
“별로들 입맛이 없다고 하니까.”

확실히 입맛은 없었다. 이반은 애써 밝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가 좀 유별나게 낙천적인 성격을 갖고 있을 뿐이었고, 숙영지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전날밤의 기습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집결지까지 모인 병력을, 비록 날이 어두워 데인이 잘 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전의 십분의 일 밖에 되지 않아 보였다. 적들의 전력은 그들이 처음 들었던 것처럼 ‘오합지졸’ 도 아니었고 ‘싸울 의욕이 없는 징집병들’도 아니었다. 에이진 군은 정병중의 정병이었고 오히려 제국군이야말로 급하게 농민들을 끌어모은 징집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먹어.”
“넌?”
“아까 먹었어.”

입맛이 없다고 하더라도 굶주림은 더 이상 참기가 힘들었다. 그는 이반이 건네주는 육포를 잘게 찢었다. 딱딱하고 질겼지만 어쨌든 먹을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는 억지로 육포를 입안에 우겨넣고는 삼켰다. 소화가 잘 되지 않아 딱딱한 돌덩이가 뱃속을 굴러다니는 듯 했지만, 그는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어쨌든 덕분에 포만감을 겪을 일은 없고, 잠도 잘 오지 않았으니까.

육포를 씹어먹으며 데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 개의 모닥불을 넘어 좀 큰 모닥불이 비죽히 튀어나온 바위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었고, 부대를 상징하는 기가 펄럭거리고 있는 거기가 바로 현재 지휘관들이 무언가 열심히 궁리를 하고 있는 회의장이었다.

바로 어젯밤까지만 해도 참모진 전용의 막사에서 그들만의 대화를 나눴던 다섯명의 백인대장과 세 명의 기사, 한 명의 장군과 한 명의 사령관은 두 명의 백인대장과 한 명의 기사로 줄어 있었다. 사령관은 전날밤의 야습에서 적의 가장 첫번째 목표가 되어 전사했고 두 명의 기사는 그를 지키려다 죽었으며 장군은 퇴각하다 활을 맞고 죽었고, 세 명이 백인대장은 전사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적어도 이반이 말해준 바에 따르면 그랬다.

사령관의 죽음은 물론이거니와 지휘자의 거의 전부를 잃어버린 것은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물론 지휘 자체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만큼 많은 수의 병사들도 죽거나 실종 – 아마 제프처럼 탈주했을 – 되었으니까. 문제는 기습으로 인한 패배로 병사들의 숫자가 줄었고, 남은 세 명의 지휘관 중 아무도 뾰족한 수를 낼 수 없었으며, 사기는 바닥을 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기라. 데인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혼자 코웃음쳤다. 애초부터 사기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징집되던 날을 기억했다. 아마도 옆의 이반이나, 다른 병사들도 전부 농사 짓다 말고 끌려나온 이들일 터였다. 싸울 줄 모르는 그들에게 억지로 무기를 쥐어주고 행군하는 법, 열을 지어 공격하는 법 등을 하루간 가르친 지휘관들은 그들을 전쟁터로 이끌고 나왔다. 억지로 끌려나온 이들에게 승리하겠다는 열망같은게 있을 리 없었다. 단지 그들은 무사히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랬으며, 투쟁끝의 승리보단 원만한 협상이 더 매력적인 방법으로 보였다. 아, 기습이 있던 날의 오전에 있었던 에이진 군의 항복권유를 일거에 뿌리친 사령관이 얼마나 미워 보였던가?

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사령관을 미워해봐야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살아남은 세 명의 지휘관 – 들의 동태를 살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들의 회의에 별다른 진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아무런 명령 하달이 없을 리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이 시간까지 잠들지도 못하고 있었다. 또한 대부분이 졸지도 못하고 있었다. 졸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나 피곤해서 혹 깜빡 조는 순간 그대로 잠들어 버릴 것 같아서였다.

전날 밤의 야습으로 모두들 잠을 설쳤는 데다가 하루 종일 추격을 뿌리치고 도망으로 육체적인 피로와 계속되는 긴장감으로 인해 정신적인 피로가 겹쳐 모두들 ‘취침해도 좋다’라는 명령 한마디만 있다면 밤이슬을 맞아가면서, 흙바닥이던 풀이 깔려있던, 그것이 바위 위던 아니면 자갈밭이던 상관치 않고 그대로 잠들 수 있었다.

“무슨… 명령이라도?”

백인대장 시즈가 회의를 하다 말고 잠깐 근처에라도 오면 그들은 혹시 새로운 명령이라도 하달 될 줄 알고 기대에 찬 눈으로 물었지만 시즈는 원망스럽게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이었다. 그럴 때 시즈는 한번 주위를 둘러보고, 이들 패잔병들의 몰골을 확인한 후, 밤하늘에다 한번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회의장으로 돌아가곤 했다.

데인은 그들 중에 가장 바쁜 이였다. 그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반의 실없는 농담 – 어떻게든 억눌린 분위기를 일신해보려는 시도에서 나온 – 들에 ‘어, 그래’ 정도의 대답을 해주는 한편으로는 열심히 주위를 관찰하며 상황을 판단해내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몇 번을 생각해봐도 상황은 절망적으로 보였다. 단지 사기와 병사수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수의 병사들이 갑옷도 갖춰 입지 못하고 있었으며 제대로 된 무기들도 들고 있지 않았다. 적군의 무기를 들고 있는 이도 있었고 자신의 병종에 전혀 맞지 않은 무기를 들고 있는 이도 있었다. 아예 무기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이들도 상당수였다. 심지어는 산적만도 못한 이들 무리가 흉험한, 이미 한 차례의 야습으로 그 강함이 입증된, 에이진 군에 맞서 싸울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제프가 옳았던걸까.’

차라리 그때 제프와 함께 도주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에 나와본 경험이 몇번 있는 제프와 같은 이도 도주하는데 자신은 무슨 생각으로 이 군대에 되돌아 왔는가?

“… 데인?”
“응?”
“내 말 안 듣고 있었지?”

데인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반은 알고 있었다. 그가 건성으로 대답했을 뿐 실제론 이반이 한 말 중 반도 듣지 않았다는 것을. 그래도 이반은 화를 내지 않았다.

“데인. 혹시라도 내가 잠들면 깨워줘.”
“알았어.”

이반은 ‘혹시라도’ 라고 말했지만 그 말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반은 고개를 떨구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옅은 숨을 쉬고는 있었다. 그는 말 그대로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앉은 체로. 깨울까 생각했지만 이반의 잠들면 깨우라는 부탁은 실은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깨우지 말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병사들이 두런거리는 아주 작은 소리를 빼고는 사방은 아주 조용했다. 풀 벌레 소리, 마른 장작이 불에 타다 딱 하고 쪼개지는 소리가 아주 잘 들릴 정도로. 주위를 둘러싼 무거운 분위기와는 너무나도 다른 평화로운 풍경에 가슴을 옥죄고 있던 긴장이 조금씩 풀어졌다. 데인은 칼의 손잡이를 잡고 긴장을 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노력했다. 노력했다. 노력….


*                *                *                *                *                *

콧잔등을 간지르는 풀벌레에 놀라 그는 잠에서 깨었다. 비록 옷을 입고 있다고 하더라도 야외에서, 그것도 해가 진 후에 잠들었던지라 몸이 차갑고 머리가 무거웠다.

“이런. 깜빡 졸았나.”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풀벌레 소리만이 요란한 밤이었다. 그가 기대어 잠들어던 나무의 곁에서 자그마한 짐승이 놀라 도망가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단지 그 뿐,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해가 진 후의 산속은 낮의 아름다웠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무섭도록 어둡고 음산할 뿐이었다. 하지만 칠흑같은 어둠도 그에게는 별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거의 매일 이런 식으로 밤중의 산속을 돌아다니며 커온 그에게 있어 어둠은 별 것 아닌 문제였다.

그는 위험한 짐승이 어디에서 자주 나타나는지, 어떤 행동을 하면 위험한 짐승을 부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릴때 한번 죽을 지도 모를 위험을 겪으며 혼이 난 터라 결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안전하다고 확신하는, 마을 바로 뒤의 산에서만 돌아다녔다.

“어서 돌아가지 않으면 혼날텐데.”

그는 방향을 가늠하며 중얼거렸다. 너무 어두워 오히려 익숙한 밤의 산속은 한치앞을 넘겨보기가 어려울 정도였지만, 그런 어둠은 오히려 멀리 마을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너무나도 잘 보여 주었다. 산짐승을 경계하는 마을의 경계초소에서 피워놓은 불빛일 터였다.

그는 몇 개의 바위를 넘고 시냇물을 건너 마을로 돌아가는 길 즈음에 접어들었다. 그 때였다. 밤의 산중은 고요하지만 또한 여러가지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풀벌레 소리, 부엉이 소리, 밤에만 활동하는 짐승들의 작은 울음소리나 그들이 움직이는 소리 등등. 하지만 흐느끼는 여자아이의 소리 같은 건 결코 흔한 것이 아니었다.

의아해진 그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가 보았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 소녀가 숲 한가운데서 흐느끼고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놀란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얘, 놀라지마. 난 데인이라고 해.”

그는 마을의 어른들에게 배운데로 일단 상대를 안심시켰다. 다행히도 소녀는 겁먹고 도망가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소리를 지르면 여러가지로 난감했는데, 작은 동물들은 놀라 도망가지만 성질이 흉폭한 짐승이라면 덤벼들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 누구세요?”
“이름은 데인이라니까.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거야?”

소녀는 훌쩍이며 데인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길을 잃었어요.”

목소리도 그렇고 가까이서 봐도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하긴 같은 마을의 소녀중 마을 근처의 산에서 길을 잃을 정도의 아이는 없었다.

“어디서 왔는데?”
“에가트 마을.”

데인은 잠시 말을 잃었다. 에가트 마을은 제대로 된 길로 가자면 꼬박 한나절은 걸어야 하는 산 너머의 마을이었다.

“언제부터 해맨거야?”
“아까 아까, 아침부터.”
“… 하루 종일 산속을 헤맸구나. 하지만 길을 완전히 잘못 들었어. 에가트 마을은 저어쪽인데. 일단 우리 마을로 가자. 내일 해가 뜨면 아저씨들한테 너네 마을로 데려다 달라고 하고. 아, 그런데 이름은 뭐야?”
“라일라.”

소녀는 간간히 훌쩍였지만 그래도 울음은 그친 모양이었다. 그녀는 데인이 이끄는 데로 따라왔는데, 걸음이 매우 느렸다. 자세히는 볼 수 없었지만 걷는 모양새로 보아서 단지 지친 것 뿐만 아니라 발을 다치기도 한 모양이었다.

“뭐?”

앞서 가던 데인이 갑자기 주저앉아 등을 내밀자 라일라는 영문을 몰라 멈춰섰다. 데인은 앞만 똑바로 보았다. 어두워 얼굴이 빨개진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업히라고. 그래가지곤 마을까지 가다가 날 새겠다.”

라일라는 주저했지만 데인이 재촉하자 곧 그 등에 업혔다. 비슷한 또래의 소녀는 농삿일로 단련된 그에게도 결코 가볍게 여겨지지만은 않았지만 데인은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목을 두르는 소녀의 부드러운 팔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힘든 것도 몰랐다는 쪽이 진실이었지만.
“저기, 데인.”

아무 말 없이 업혀있던 소녀가 갑자기 속삭였다. 귓가에 가만히 와 닿는 입김에 괜히 얼굴이 후끈거렸다.

“일어나.”
“엉?”
“일어나라고.”

*                *                *                *                *                *
제국력 323년. 여섯번째 달, 제1주의 4일. 새벽.


“이봐, 데인. 일어나.”

자꾸 옆구리를 찌르는 이반의 손을 밀어내며 데인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깜빡 졸았던 모양이었다.

“내 참, 내가 잠들면 깨워달랬지 언제 너까지 잠들랬냐. 일어나봐. 시즈 대장이 다들 불러모으고 있어.”
“으음. 잠든 거 아니었어.”

데인은 눈을 부비며 몸을 일으켰다. 선잠은 오히려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어두컴컴했지만 달의 위치로 보아 해가 뜨기까지 많은 시간이 남지 않은 새벽이었다. 족히 몇시간은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데인은 이반을 따라 시즈 대장 쪽으로 갔다. 이미 많은 수의 병사들이 그의 주변에 둘러서 있었다. 그 중 많은 수가 데인처럼 졸다가 깬 듯 기운이 없는 모습이었다… 사실 그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기운이 팔팔한 이는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시즈 대장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다른 쪽에서는 벨레타 백인대장과 기사 드리안 경이 각각 자기 밑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적어도 무언가 행동방침이 결정된 것이 틀림없었다.

병사들이 모두 모일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데인은 그 새로운 행동방침 – 이미 작전이라 불리기에는 너무 초라할 것이 분명한 – 이 무엇이 될지 상상해 보았다. 어차피 가능성은 많지 않았다. 좀 희망적인 것도 있었지만 상상은 자꾸 절망적인 쪽으로 뻗어나갔다. 전군의 돌격, 전원 장렬한 사망 같은 식의. 그는 애써 머리를 흔들어 좋은 쪽으로 상상을 하려고 했다. 용맹히 맞서 싸워 에이진 군을 패퇴시킨다는 것은 꿈에라도 불가능한 일이었고, 여기서 군을 물리고 후퇴, 징집되온 병사들은 모두 약간의 상여금과 함께 해산시킨다 하는 쪽이 그가 가장 희망하는 바였다. 하지만 그쪽도 별로 가능성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희망적인 작전은 후퇴하며 제국군 본대와 합류하는 것이다.

“제군들.”

홀로 팔짱을 끼고 침묵에 잠겨 있던 시즈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시끄럽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들려오던 병사들의 웅성거림이 멎었다. 시즈는 마치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기겠다는 듯 오랫동안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고, 먼저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그들은 시즈의 입이 다시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의 입이 열리며 무슨 말을 하는가에 따라 그들은 절망할 수도, 또는 희망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시즈 대장이 말을 꺼내기를 어려워하고 비장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단지 패배를 인정하고 후퇴라는 불명예스러운 작전을 명령하게 되어서 그럴 뿐이라고 애써 희망적인 생각을 가지면서도, 혹시 전원이 죽음을 향해 싸운다는 작전을 내리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이 밀려왔다. 그러나 어떤 상상을 하더라도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결국 어떻게 될지를 정하는 것은 시즈의 한마디일 뿐이었으니까.

“제군들. 제군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그러나 명령의 하달 대신 시즈의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하나 튀어나왔다. 그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시즈의 질문이 무엇일지 궁금하여 여전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제군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병사들은 대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서로의 얼굴만을 쳐다보았다. 시즈가 한참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 망설이던 병사 중에 하나가 손을 들었다. 수염이 많이 난 자였는데, 사십을 되어 보였다.

“손을 들 필요는 없다. 어디에서 왔지?”
“예, 전 게오르그 지방에서 왔습니다.”
“음, 게오르그 지방. 그렇군.”

시즈가 고개를 끄덕이자, 또 다른 병사가 용기를 내어 손을 들었다. 옆에 있던 다른 병사가 ‘손을 들지 않아도 되’ 라고 하자 부끄러운지 얼른 손을 내렸다. 하지만 목소리는 컸다.

“다암 지방의 쟈일리스 마을입니다.”
“저도 같은 마을에서 왔습니다.”

두 명의 병사는 같은 마을 출신인 모양이었다. 또 다른 병사가 자신의 출신지를 이야기하자 용기를 얻은 병사들은 각자 자신의 출신지를 밝혔다. 나중에는 한꺼번에 여기저기서 자신의 출신지들을 이야기하는 통해 전부 알아듣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 소란이 가라앉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마침내 둘러앉은 모든 병사들이 자신의 출신지를 밝히고 다시금 적막이 찾아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제군들은 모두 이곳 다르프 지방, 다암 지방, 아니면 게오르그 지방에서 온 이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제군들은 이곳의 일선 방어를 위해 급하게 징병된 병사들이라는 것이다. 이 중에 자원한 병사가 있나?”

물론 아무도 없었다. 겨울철이라면 혹시 돈이라도 벌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이가 있을 수도 있었지만 여섯번째의 달은 추수가 가까운 계절이었다. 여름철 이상으로 바빠지는 지금 군대에 자원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군. 그렇다. 제군들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이곳으로 끌려왔을 것이다. 물론 법적으로 국가의 부름에 응하는 것이 제국 국민의 의무이다. 하지만 나 개인으로써, 제군들에게 강제로 명령을 내릴 어떤 도덕적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의 명령은 지금부터 제군들을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몰아갈 테니까. 제국군의 본대는 아직까지도 집결하지 못했다. 북부를 위협하는 발탄 족을 정벌하기 위해 출병한 용맹한 제국군이 제국으로 돌아오기는 했는지나 의심스럽다. 그리고 우리는 제국의 본대가 돌아올때까지 에이진 군을 막아야 한다.”

병사들의 절망적인 한숨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개중에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도 있었다. 시즈는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삼십을 세겠다.”

데인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방랑자들을 인도하는 새벽별 아이니아가 밝게 빛나고 있는 밤하늘은 고향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의 등불을 켜 방랑자를 인도하는 아이니아는 과연 고독한 방랑자가 아닌 무리지은 병사들도 인도해 줄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삼십을 세는 동안 선택하도록 바란다. 내가 삼십을 세는 동안 일어난다면, 일어난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자유를 주겠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급료는 지급할 수 없다.”

어차피 급료 따위는 그들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전쟁에 끌려 나올때부터 급료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았으며 단지 무사히 살아 돌아가기만을 바랬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기회가 주어졌다.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기회가.

“하나. 둘. 셋. 넷…”

넷을 셀 때 까지 아무도 일어서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서로의 눈치만을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엉거주춤 일어났던 사람이 한 명 있었으나 아무도 일어나지 않자 그는 재빨리 주저앉았다. 시즈는 숫자를 빨리 세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천천히 숫자를 세어, 실제로 보통 사람이 셋을 셀 수 있을 시간 동안 하나씩밖에 세지 않았다.

“…열 다섯, 열 여섯. 열 일곱. 열 여덟…”

시즈는 눈을 감고 숫자를 세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일어났는지 앉았는지 알지 못했다. 데인은 귀로는 시즈가 숫자를 세는 것을 들으며 눈으로는 아이니아를 쫓았다. 그러나 방랑자들에게는 좋은 방향의 지표가 되는 새벽별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 한 처량한 패잔병에게는 아무런 조언을 해 주지 않았다.

“…스물 다섯, 스물 여섯, 스물 일곱. 스물 여덟. 스물 아홉.”

그때까지 아무도 일어서지 않고 있었다. 데인은 거의 절망적인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대로 싸우면 죽는다. 그러나 살 기회가 발치에 굴러왔음에도 주을 수가 없었다. 데인은 망설였다. 시즈는 스물 아홉 다음에 간격을 많이 두고 있었다. 심장이 타 버리는 것 같았다. 전혀 움직이지 않고 가만 있는데도 격렬한 심장의 맥동은 주위의 다른 이에게까지 다 들릴 것만 같았다.

“서른.”

시즈는 감고 있었던 눈을 떴다. 모든 병사들이 다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데인은 백여명의 둘러앉은 병사들 중 홀로 우뚝 서 있었다. 시즈는 잠시 그의 눈을 응시했다. 데인의 눈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한켠에서 붉게 타오르는 모닥불에 드러난 얼굴은 핏기가 가셔 새하얗다.

“저는…”

데인이 입을 열었다. 한순간에, 시즈가 아닌 그가 모든 이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그는 머리가 양쪽으로 갈라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가슴에서 울컥 치솟은 말은 하나가 아니었고, 그 둘은 목에서 걸렸다. 말은 하는데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의 새된 목소리는, 진짜로 둘로 갈라졌다. 방랑자를 인도하는 별은 침묵하고 있었다.

*                *                *                *                *                *

제국력 323년. 여섯번째 달, 제1주의 4일. 새벽. 상황 A

“죄송합니다.”

울컥하고 토해져나온 말은 그것이었다. 시즈의 눈에 안타까운 빛이 흘렀다. 데인의 눈가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시즈는 눈을 감았다. 데인은 다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울음섞인 목소리로 죄송합니다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런 그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시즈는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고, 데인은 술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무리를 빠져나갔다.

약속대로, 시즈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데인이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보던 몇 명이 슬그머니 일어섰다. 비록 삼십을 세는동안 일어섰던 것은 아니었으나 시즈는 그들 역시 보내주었다. 몇번이고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을까, 시즈는 마침내 검을 뽑아들었다. 남은 자들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병사들이여!”

병사들이 둘러선 자리를 등지고 도망치는 데인의 등 뒤로 폭발하는 듯한 시즈의 일갈이 쏟아졌다. 그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시즈는 칼을 뽑아들고 하늘을 겨누고 있었다. 데인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저들은 죽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죽을 수 없었다. 점점 빨라지는 데인의 발걸음을 막기라도 하는 듯 거대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이미 꽤 멀어져 버린 터라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시즈의 비장한 외침과 그에 호응하는 병사들의 함성이 띄엄띄엄 들려왔다. 그들의 함성에는 아마 이반의 것도 섞여 있을 것이다.

데인은 마침내 달리기 시작했다. 구릉지대에는 걸리적 거리는 것이 많지 않았다. 이따금 발목까지 덮고 있는 풀밭의 밑에 숨은 들쥐구멍에 발이 빠질 뻔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거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마침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될 때까지, 그래서 동료였던 이들의 함성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곳까지. 차가운 새벽공기가 폐부를 후벼팠지만 가슴이 아픈 것은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비겁함, 동료와 아군을 버리고 도망치는 탈주자의 서러움. 그러나 그는 그것을 감내했다. 감내해야만 했다.

죽음은 결코 싫었다. 그는 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향유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을 떠올렸다. 맑은 공기, 깨끗한 물, 맛있는 음식. 풍족하고 화려한 생활은 아니지만 그 모든 것들은 그에게 행복한 삶을 주지 않았던가? 부모님, 그리고 얼마전에야 겨우 결혼에 성공한 라일라. 동네 사람들. 그의 부모가 고생했고 또한 그가 고생했으며 앞으로 고생해야 할 그의 밭. 죽음은 이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한다. 그것들과 맞바꾸기엔, 비록 그간 함께 해온 동료들에 대한 우정이라도, 시즈 대장에 대한 존경심이라도, 또는 자존심과 명예라 할지라도 그만한 값어치를 하지 않는다.

그뿐이다.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는 싸움과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 쯤은 그도 구분할 줄 안다. 함께 있다는 것이 안전할 때는 함께 후퇴할 뿐이지, 함께 항전할 때는 아니다. 그는 이성적으로 사고하려 애썼고, 어느 정도는 성공하고 있었다. 다만 이성적인 생각은 이성을 만족시켜 줄 뿐, 가슴에 얹혀진 묵직한 무언가를 해소시키진 못했다.

그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물론 전우 였던 이들의 모습이 보일 리는 없었다. 그는 정말로 지쳐 쓰러질 만큼 달리고 또 달렸으니까. 자신의 뒤를 쫓고 있었던 다른 탈영병들은 어느 정도 뒤에 뿔뿔히 흩어졌기에 그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잠깐 주먹을 꽉 쥐었던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칼도 투구도 버리고 왔기에 비록 피곤했지만 몸은 훨씬 가벼웠다. 멀리 붉게 물들은 아침의 빛깔을 향해 그는 걸어갔다. 살아남기 위한 길은 죽으려는 길 만큼이나 고달파 보였다.

*                *                *                *                *                *

제국력 323년. 여섯번째 달, 제1주의 4일. 새벽. 상황 B

“저는 제국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울컥 하고 토해져나온 말은 그것이었다. 시즈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데인의 눈가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시즈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다리뿐만 아니라 전신이 후들거리고 있고 눈가엔 눈물이 고여 있지만 용감한 청년 병사는 여전히 똑바로 서 있었다.

“그런가. 다른 모두의 생각도 이 청년과 같나?”
“그렇습니다!”

하나로 단합된 우렁찬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터져나오는 외침은 모두의 긍정의 말 뿐이었다. 시즈는 뜨거운 것이 가슴을 치받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뜨거운 것은 둘러앉은 모두의 가슴에서도 똑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우리의 지방은 우리가 지킵니다. 우리가 여기서 도망가면 누가 이 땅을 지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땅은 우리가 지킵니다!”
“우와아아아! 다르프는 내가 지킨다!”
“너 혼자가 아냐! 이몸이 함께 한다!”
“너까지것 도움도 안되. 하지만 난 두 지방 다 지켜줄 만큼 세지.”

분위기는 단숨에 왁자지껄 해졌다. 그러나 웃고 떠드는 그들의 눈가엔 다들 눈물이 한두 방울씩은 매달려 있었다. 모닥불의 재가 눈에 들어갔다는 둥, 하품을 너무 크게 했다는 둥의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아무도 서로의 눈물을 비웃지 않았다. 시즈는 그들의 소란이 약간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칼을 뽑아들었다. 그의 긴 장검은 훌륭하게 관리되어 있었지만 전날의 습격을 겪는 동안 몇 개의 이가 빠져 있었다. 허나 아무도 그런 점을 지목하지 않았다.

“병사들이여!”

소란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그 어느 때보다도 일사불란하게 시즈를 향하여 차렷 자세로 섰고, 시즈는 검을 하늘로 치켜올렸다. 모닥불의 불빛을 받아 일렁거리는 붉은 검날이 검푸른 새벽 하늘 아래 곧게 세워졌다.

“싸워라! 적들의 피가 흘러 넘쳐 이 메마른 대지를 적시도록! 그대들이 흘린 땀과 눈물과 피가 제국의 영광을, 그대들의 땅을 영광으로 빛내리라!”
“우워어어어어어!”

거친 함성이 새벽을 뒤흔들었다. 데인의 목소리도 함성에 함께 섞여 있었다. 함성에 취했기에 눈가를 타고 흐르는 그 자신의 눈물의 의미조차도 깨달을 수 없었다.

*                *                *                *                *                *
아주 지쳤지만 데인은 쉬지 않았다. 마침내 다르프 지방에서 벗어날 때까지 그는 거의 한순간도 쉬지 않았으며 물론 먹지도 않았다. 몸 하나는 튼튼하다고 자부해 왔지만 이쯤 되자 그의 다리도 더 이상 이 여정을 지탱할 만한 힘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걸었다. 너무 지쳐 많은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된 머리는 오직 계속해서 걷는다는 명령만을 내리고 있었고, 그건 다행이었다. 인적이 드문 길에서 쓰러져 버리기라도 하면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지게 되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의 다리가 결국 무너지고 그의 몸이 길가에 눕게 된 것은 마침내 다르프 지방에서 볼 수 없는 험준한 산맥의 바위로 된 끝자락이 보이는 작은 언덕배기에서였다. 그는 통행이 많은 길이 아닌 평야와 구릉지대를 넘어왔고 사람의 모습은 거의 봐오지 못했다. 다리의 힘이 풀린 것은 멀리 마을의 모습을 보고 긴장이 풀려서 였을 것이다.

거의 시체처럼 쓰러져 있던 그를 구해준 근처 마을의 사람들은 그가 회복하도록 하룻밤의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마을의 이름은 쟈일리스라고 했다. 그들은 다르프 지방 쪽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데인에게 전쟁의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알고 싶어했으며 혹 이 마을에서 징집되었던 두 명의 청년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했다. 데인은 살아있다고 말해주려다가 그만두었다. 죽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들에 대해 데인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으며 데인은 전투에도 들어가기 전에 무리에서 낙오되었고, 길을 잃고 며칠간 헤메다가 그곳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모두들 그 말을 믿었으며 전쟁터에 떠나보냈던 마을 청년들과 함께 지냈을지도 모르는 이 낙오병에게 과분한 친절을 베풀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떠나는 그에게 커다란 치즈 한 덩이와 빵과 쇠고기, 감자 두 알과 염소젖이 가득 담긴 가죽주머니를 주는 마을의 사람들에게 겨우 고맙다는 한마디만을 할 수 있었을 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마을까지 돌아가는 여정 중에 여러개의 마을을 들러야 했는데, 대부분의 마을이 그에게 친절을 베풀었고, 가능하다면 답례로 전황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아들들에 대해 듣고 싶어했다. 처음 한두번은 과분한 친절에 거의 아무말도 하지 못했던 데인은, 가면 갈수록 거짓말이 늘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쓴웃음지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아들들에 대해 물어올 때 데인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자신은 지금 비록 낙오되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물어보는 그들과는 같은 부대에 있었으며, 때로 힘들어 할 때 짐을 들어주기도 했고, 같이 건량을 나눠먹기도 했고, 같이 고향을 그리워 했다는 등의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전부 거짓말이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믿었다.

그가 자신의 마을에 도착할 때 그는 출발하던 때 만큼이나 건강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둘러맨 자루에는 여러 덩이의 빵과 고기, 치즈가 아직도 남아 있었고 심지어 허리에 찬 주머니에는 동전도 꽤 들어 있었다. 축난 몸에 빈손으로 돌아오던 처음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마을로 들어서는 산길로 접어들었을 때, 그의 여유있던 발걸음은 많이 빨라졌다. 둘러멘 묵직한 자루의 무게를 잊고 나는 듯 산길을 오른 그는 마침내 마을의 입구에 들어섰다.

그의 마을은 물론 벽이나 울타리 같은 것으로 둘러쳐져있지도 않았고, 여기서부터 타소 마을입니다 하는 식의 팻말도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자연스레 형성된 흙길과 여기저기의 자그마한 집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시냇물이 보통 마을의 경계로 여겨지고 있었다. 옆에 징검다리도 있었고 가끔 지나다니는 수레를 위해 마을 청년들이 널판지와 통나무를 이어붙인 다리도 놓여 있었지만 데인은 그것들을 무시하고 시냇물에 발을 들였다. 발목까지 밖에 오지 않는 그 물은 얼음물처럼 차고 시원했다.

“돌아왔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이제 거의 다왔어 라는 생각 대신에 도착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한걸음 한걸음 철벅거리며 건너편에 다다랐다. 한쪽에 숲과 비탈면을 개간한 농토가 펼쳐진 그의 마을의 아무도 그를 마중나오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한창 농번기임을 잘 알고 있으니까.

“어?”
“오, 티미!”

마을에 사는 어린이 중의 한명인, 유난히 말썽을 자주 피워 어린 시절의 데인을 빼닮았다고 흔히들 농을 던지곤 하던 티미가 데인이 최초로 재회한 마을 사람들 중의 한명이었다. 티미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비록 그간 잘 먹었다고는 하나 깎지 못해 털복숭이처럼 자란 수염과 지저분한 옷은 자칫 떠돌이로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데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티미는 와아이 하고 그의 옆으로 달라붙었다.

“데인 형?”
“그래, 나다.”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그는 티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기고 돌아온거야? 와아이, 엄마한테 말해야겠는데. 아니다, 엄마보다 라일라 누나한테 먼저 말해야겠다. 기다려, 와아이이이!”

데인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티미는 데인의 주위를 돌며 혼자 신나게 떠들더니 다시 힘차게 달려가 버렸다. 아마도 티미와 함께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던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그들은 술래인 티미가 어디론가 가버린 것에 화를 내며 티미를 부르기보단 놀이를 그만두고 데인 쪽으로 달려오기를 선택했다.

“데인 형! 돌아왔구나!”
“그래 그래, 알렉스, 말썽 피우지 않고 있었겠지? 아이구, 제이미 너는 정말 많이 컸구나. 아, 섀디, 뭐? 사탕? 그건 가져오지 않았어… 미안. 깜빡했지.”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붙잡고 매달리는 통에 허리가 휘청거렸지만 그는 계속 웃었다. 어쩌면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얼굴들이다. 그리고 그 얼굴들 저 너머 뒤로, 티미에게 손을 잡혀 끌려오듯 뛰어오는 이가 있었다. 데인은 팔을 벌리고 외쳤다.

“라일라!”

결혼한 여자의 표시인 땋은 머리를 하고 있던 그녀가 문득 멈추어 섰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왠지 멋쩍고 쑥스러워 그는 어설픈 미소만을 지었다.

“데인…?”
“응, 나야. 다녀왔어.”

와락 하고, 정말로 소리가 날 정도로 라일라가 안겼다. 데인은 그녀를 꽉 안았다. 품에 안은 그녀가 어디로 가지 못하게. 얼굴을 부비던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을 때, 아이들은 그 둘레를 돌며 놀려대었지만 두 사람은 오랫동안 떨어질 줄을 몰랐다. 마침내 아이들이 구경하다 지쳐 시무룩해져 자신들의 놀이를 하러 돌아갈 때까지도, 두 사람은 계속 붙어있었다.

*                *                *                *                *                *

데인은 신음했다. 사슴가죽을 이어 만든 신발이 결국 찢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더운 여름이었기에 옷이 너덜너덜해져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지만 신발의 손상은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밑창이 완전히 떨어져 나간 것은 아니었지만 앞부분의 반쯤 밑창의 이음새가 뜯어져나가 덜렁거리는 것이었다. 비록 어린 시절에는 맨발로 산길을 오가기도 했지만 부드러운 흙이나 햇볕에 따스하게 달아오른 맨들맨들한 바위를 오갈 때나 맨발로 다닐 수 있지, 짧은 풀이 무성하게 돋아난 다르프 평원에서 맨발로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칫 풀독이 오를 위험도 있었고 무엇보다 연이은 강행군에 발이 견뎌내지를 못했다.

그는 신기료 장수는 아니었지만 바늘과 가죽끈만 있으면 대충 어떻게 신고 다닐 수 있을 만하게 수선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바늘도, 실도, 가죽끈도 구할 수 없었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옷의 소매 부분을 찢어 발을 한차례 싸매고는 다시 반대쪽의 소매를 찢어 신발 자체를 감쌌다. 그 방법으로 그는 반나절을 견뎠지만, 신발겉에 맨 천이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져 끊어진 후에는 새로운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결국 그는 주변에 길게 자란 풀을 칼로 끊어 새끼를 꼬았다. 그렇게 꼰 새끼줄로 대충 신발을 칭칭 동여감아 놓았는데, 일단 당분간은 밑창이 덜렁거릴 일은 없어 보였다. 게다가 재료도 무한정으로 널려 있으니 금방 헤진다 하더라도 문제 없었다. 다만 그를 괴롭히는 것은 신발 밑에 계속 밟히는 줄의 느낌이었다. 멀쩡한 오른쪽 신발과 지금 막 수선을 마친 왼쪽의 신발 사이에서 오는 불균형감도 문제였지만 발에서 줄이 묶인 부분이 곧 아파왔다. 견디지 못할 정도로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잠시도 쉬지 않고 하루 종일 그를 괴롭혔다. 그는 수십차례 신발을 내팽겨치고 어디론가 달려가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것이 자살행위라는 것을 뼈에 저리도록 알고 있지만 않았다면 아마 벌써 그렇게 하고도 남았으리라.

“정지! 여기서 휴식을 취한다.”

시즈의 외침에 여기저기서 병사들이 한숨을 쉬며 주저앉았다. 데인은 자그마한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어차피 그늘 같은 건 있지도 않았기에 병사들은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아무렇게나 널부러졌다. 여기저기 쓰러지듯 눕거나 혹은 앉아있는 피곤한 병사들을 보며 데인의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은 강에서 잡아올린 물고기를 장대에 꿰어 햇볕에 말리는 광경이었다. 슬며시 웃음이 나올 만도 하건만 그는 웃지 못했다. 그런 상상은 오히려 너무나 처량해서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만치 뒤쳐져서 걸어오던 그룹이 이미 휴식을 취하고 있는 본대에 합류한 것은 한참 후였다. 곧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만 같은 얼굴의 이반이 기다시피 하여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전날밤 야영하던 곳에 다행히도 샘이 있어 물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이반은 염소 염통으로 만든 물주머니의 뚜껑을 열고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더 이상 시원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물이었지만 기력을 회복하는 데는 그만한 것도 없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아는 친구 하나가 후발 그룹에 있었어.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녀석이었어.”
“그랬군. 어쩐지 발 빠른 네가 늦는다 했지.”

지난 사흘간 그들은 에이진 군들의 추격을 피해 수 차례 도망다녔다. 주로 깊은 밤과 찌는 듯한 무더위의 한낮의 두 시간대를 이용해 그들은 구릉지대를 돌며 행군해왔다. 그들의 목적지는 다르프 평야의 한켠에 위치한 숲. 다르프 지방과 게오르그 지방이 맞닿는 지점에, 게오르그 산맥의 가장 끝자락에서 뻗어나온 그 숲은 적어도 아무것에도 의지할 곳 없는 이곳 평야나 구릉지대보다는 방어가 수월하다는 것이 지휘자들의 생각이었다. 무엇보다도 에이진 군대는 기마병이었으니까. 그들이 지니고 있었을 화공의 무기들은, 전에 있었던 야습시에 다 써서 동이 났을 거라는 희망적인 가정하에 정해진 작전이었다. 만약에 그들이 화공의 무기를 갖고 있다면 숲과 함께 통째로 타버릴 지도 몰랐다. 그러나 적들은 기마부대와 빠른 발의 경장보병으로 이루어진 돌격병들이었고, 많은 수의 보급부대가 필요한 기름과 섶 등은 결코 대량으로 갖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다르프 지방 출신의 병사들이 곧 우기가 시작될 거라고 장담했기에 어쩌면 사지로 기어들어가는 행위일지도 모르는 이 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에이진 군에게서 별다른 움직임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곳 구릉지대, 그리고 다르프 평원의 장점 중 하나는 워낙에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없어 적의 움직임이 쉽사리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그만큼 자신들의 움직임이 노출된다는 뜻도 되지만, 적어도 그들의 시야에서 적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적들도 그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설사 가까이에서 적을 볼 수 없어도 적의 전광석화와도 같은 움직임은 그들에게 공포로 각인되어 있었다. 전번의 야습에서 형편없이 당한 것도, 적이 그렇게 지척까지 와 있는 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방비조차 안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행군은 결코 부상자를 돌봐주면서 갈 수 있을 만큼의 여유로운 행군이 아니었다. 그건 대단히 우울한 생각이었지만 데인은 낙오된 부상병들이 곧 사망자로 바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이반도 인정하곤 싶지 않겠지만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 쯤은 잘 알 터였다.

“더워 죽겠군. 다르프 출신 애들 말로는 곧 우기라는데, 비가 오긴 올까?”
“오겠지.”

그렇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도 볼 수 없을 만큼 맑았고, 태양은 여전 차양 하나 없는 벌판 위로 자신의 축복을 마음껏 쏟아부었다. 건기 동안 메마른 다르프의 대지에는 풀들이 짙은 녹색을 띄는 것이 하나도 없었고 모두 누르스름한 빛을 띄고 있었다. 메마른 땅은 또한 기마병들에게 유리한 조건이라는 사실은 데인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목마름보다 메마른 땅에서 기마병들이 잘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이 그가 빨리 이 평원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이유일지도 몰랐다.

“모두 기상! 열을 갖춰라!”

시즈 대장의 우렁찬 목소리도 그들에게서 기운이 솟아나게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다시 대열 비슷한 덩어리로 뭉쳐서 걸었다. 어차피 또다시 여러 개의 무리로 갈라질 터였지만. 허리춤에 매인 칼이 자꾸만 무겁게 느껴졌다.

*                *                *                *                *                *

손에 쥐었을 때 느껴지는 묵직한 감촉, 그것을 휘둘러 찍을 때 팔을 타고 전해져오는 반동. 낯익어야 정상인 그 경험이 왜 그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일까. 데인은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치른 것이긴 했지만 그는 군대의 훈련을 받았기에 손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굳은살이 박혀 있었고, 고생을 하는 동안 근육은 오히려 더 강인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곡괭이가 한번 땅을 찍을 때마다 마치 땅이 곡괭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듯 곡괭이를 다시 들어올리기가 너무나 힘겨웠다.

‘기운이 빠진 걸까.’

데인은 곰곰히 생각해 보았지만, 오히려 지난 며칠간의 여정동안 기운을 회복하면 회복했지 몸이 축날 일은 없었다. 약간의 선의의 거짓말과 모호한 침묵의 활용으로 그는 심지어는 여비까지 벌어서 돌아온 몸이었다. 그에게 친절을 베풀어 준 사람들에겐 약간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었지만 나쁜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고, 몸이 그들에 대한 심적인 부담감으로 잘 움직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어린시절 부터 해온 일도 잠깐 좀 안했다고 이렇게 힘들어 지다니, 나 참.’

데인은 여러가지 잡 생각을 떨쳐버리며, 그것이 단지 군인으로 징집되었던 삼 개월간이 몸에 밴 괭이질마저 잊어버리게 만들었다는 쪽으로 단정지었다. 쓸데없이 사색이 많아진 것도 문제였다. 그는 그저 매일을 살아 나가는 농사꾼이었으며, 과거 보다는 현재와, 그리고 밭일에 도움이 될 만한 약간의 미래에만 관심을 가지면 족했다. 삶과 죽음의 선택이라던가 하는 어려운, 그리고 인생에 하등 도움이 안되는 일들은 빨리 머릿속에서 지워 버려야 했다.

‘그런데 얼마나 더 갈아야 하는 거야?’

데인은 입술을 깨물고 자신이 갈아야 할 땅의 넓이를 대충 재 보았다. 아침 무렵에 시작한 일이 아직 반의 반도 다 되지 못했다. 원래 갖고 있던 밭은 그의 부모님과 아내인 라일라가 어떻게 꾸려 왔지만 이전부터 눈여겨 보아두었던 공터를 개간하는 일은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도 거기까지는 도와주지 못한 모양이었다. 벌써 여섯번째 달의 2주째에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늦었다고 할 수 있지만, 여름에 심어 늦가을에 거두는 작물도 있었다. 그는 거기에 심을 채소의 선택은 라일라에게 전적으로 위임했고 라일라는 상추를 선택했다. 아마 지금쯤 상추 씨를 찾고 있을 것이다. 지금 심으면 적어도 일곱번째 달 중순 쯤에는 잎을 뜯을 수 있을 만큼 자랄 테고 그때부터 아홉번째 달 까지만 수확을 계속 할 수 있으면 되었다. 일곱번째 달에 우박만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리 나쁘지 않은 수확이 될 것이다.

수확이 어찌되었건 간에 그것은 나중의 일이고, 데인은 어쨌든 땅을 갈아엎어야 할 처지였다. 농사일을 막 시작할 세 번째 달에 징집되었기 때문에 밀린 일들이 너무 많았고, 농사라는 일의 특성상 한번 시기를 놓치면 다음 해까지 기다려야 할 일들이 태반이었다. 그래도 데인은 그다지 불평하지 않고 일단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징집되어 전쟁에 끌려갔던 경험에서 그가 얻을 수 있는 너무 소중한 교훈은 ‘생명은 소중하다’ 였으며, 그 소중한 생명을 불평이나 하는데 허비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너무나 행복하게 살아있지 않은가.

‘그들은 지금쯤 죽었을까?’

반 쯤을 갈아엎고 땀을 식히기 위해 잠시 앉아 쉬던 그는 공연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저 똑같은 푸른 하늘 아래 이 마을은 이토록 평화로운데, 삶과 죽음의 기로를 넘나드는 전장이 똑같은 하늘 아래 존재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시즈 대장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반은 죽었을까. 그는 자신이 전장에서 도망친 날부터 며칠이 흘렀는지를 세어보았다.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가 없었다. 12일이나 13일 정도가 지난 것 같은데 그렇게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여보!”
“아. 라일라. 왜 그래?”
“아직 많이 남았어요?”

데인은 어깨를 한번 으쓱 해 보이고는 일어섰다. 열심히 하면 그날 밤이 되기 전에는 끝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곁에서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던 그의 사랑스런 아내를 위해서라도 좀 더 일을 열심히 해야 겠지.

“이상해요. 요새 뭔가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아요. 뭐 고민이라도 있어요?”
“아니, 고민 같은거 할 리가. 잠깐 쉬고 있었던 거라고. 아, 씨는 다 받아 두었어?”
“예, 충분한 양이에요. 음… 무리하지 말아요, 아직 여독도 풀리지 않았는데.”
“걱정하지 마. 천천히 해서 저녁 전에 끝내고 들어갈게. 아, 오늘 저녁은 뭐지?”
“와 보시면 알지요.”

데인은 한차례 씩 웃어보이고는 다시 일로 돌아갔다. 전날 메추리알을 좀 구할 수 있었으니 아마도 저녁에는 맛있게 삶은 메추리알이 들어간 요리가 나올 것이다. 왠지 빨리 배가 고파질 것 같은 느낌에 그는 서두르기 시작했다.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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