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1. 계시

간밤에 꿈을 꾸었다.
나는 폭이 좁고 긴 강 위에서 작은 조각배를 타고 있었다. 그 밑은 황혼 가득한 모래강이었다. 뱃머리에는 보랏빛 촛불이 고요히 흔들리고 있었고, 그 앞에는 검은 휘장을 두른 사공이 천천히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사방은 온통 회색 안개에 싸여 있었다. 희뿌옇게 비치는 내 모습과 어른거리는 보라색 잔상, 늙은 사공 외는 까마득한 안개의 불투명 뿐이었다. 작고 끊임없이 사락사락 모래 흐르는 소리만이 영겁의 고요 위에 쌓여가고 있었다. 배는 유유히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나는 그 상태로 한을 오래, 아니 얼마나 갔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정신이 몽롱했다.
“지금 어디로 가는거죠?”
앞뒤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함 속에서 퍼뜩 정신을 차려 물어보았지만, 사공은 묵묵히 노만 저을 따름이었다. 나는 그가 내 앞에 존재한다는 것 밖에는 어떤 대답도 직접 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말없이 기다려야 했다. 양초는 묘한 보랏빛 불꽃을 흔들며 심연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초의 눈물이 바닥을 적실 즈음에 돼서야 비로소 배가 느려지더니 강이 차츰 사라지며 거대한 모래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막이었다. 주위는 컴컴했다.
배가 멎자, 사공은 한 켠에 배를 대고 바다로 나왔다. 그리고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손가락으로 허공 어디쯤을 가리켰다. 내게 거기를 바라보라는 무언의 지시였다. 나는 머뭇머뭇 몸을 추슬러 배에서 내려왔다. 사방은 삭막한 모래와 검은 하늘 뿐이었다. 공포감보다는 오히려 공허함이 가득한 느낌이었다.

사공이 가리킨 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너댓살 짜리 아이부터 백발의 늙은이까지, 남루한 걸인부터 높은 직위의 공인(公人)까지 세상의 모든 종류의 사람이 다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 앞에는 흰 말을 타고 있는 해골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묘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해골이 사람들 사이로 지나가면 그들은 하나둘 스러지며 모래로 삭아 흩어져갔다. 많은 이들이 그를 막으려고 발버둥을 쳤는데, 어떤 사람은 멀리 도망치고, 아이를 데리고 있던 어떤 부인은 아들을 꼭 감싸안고 울었다. 내가 아는 유명한 장교도 있었는데, 그는 가슴에 달린 훈장을 바치고 눈물을 흘리며 백골에게 애원했다. 하지만 이 냉혹한 자Grim Reaper는 모든 이를 지나치면서 인간들을 모래로 흩어버리고 결국 먼지들만 남았다. 잔혹했지만, 이상스레 공포스럽지는 않았다. 덤덤할 뿐이었다. 이윽고 그는 말재갈을 돌려 내게 다가왔다. 거의 사그라지던 촛불은 꺼지고 하늘의 검은 장막만이 천개Canopy처럼 덮였다.
“나도 이전에는 너와 같았다. 너도 언젠가는 나처럼 될 것이다!”
그가 말을 마치자 갑자기 요란한 진동이 일었다. 바다는 발원지가 되어 모래를 내쫓고, 다시 모래는 강으로 흘러나갔다. 하늘이 하얗게 밝아왔다.



2. 가는 길

차가운 새벽 공기가 대기를 냉량한 프러시안 블루빛으로 채색할 무렵, 나는 그 이상한 꿈에서 빠져나왔다. 전화벨이 울렸기 때문이다. 동생 병원비 때문에 어머니가 전화한 걸까?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받으려 했지만 몸이 굳어있었다. 온몸이 마치 송장같았다.

요란한 경종 소리가 한참동안 잠자는 공간을 흔든 뒤에야 수화기를 들어 받았지만, 곧바로 끊어졌다. 순간의 시간이 굼뜨게 느릿느릿 기어갔다. 비몽사몽으로 고개를 돌려 시계를 찾았다. 시계는 전지가 다 되가는지 초침이 힘겹게 제자리걸음을 하며 떨고 있었다. 지각. 나는 죽은 시계로 몇시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 죽음이 초래한 결과는 명백했다. 창밖의 어스름은 내게 진짜 시간을 알려줬다. 일을 하러 나가야할 시간이라는 거다.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간신히 옷을 주워섬기고 밖으로 나갔다.

얼어붙은 하늘 끝에 새하얗게 걸린 초승달이 대지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와 맞닿으려는 무한한 지평선 밑으로 황량한 밀밭이 넓게 펼쳐 있고, 그 접점 끝에는 잔상처럼 먼 곳의 풍차가 아스라이 보였다. 동면에 들어선 땅에는 아무런 생명의 자비조차 남겨두지 않았다. 길바닥의 흙은 돌처럼 굳어 있었고, 무한히 그러나 한갓 선으로 펼쳐진 밀밭의 자녀들은 모두 잘려 민둥한 알몸을 드러냈다.
수확기가 끝난 태양의 끝자락, 늦가을. 싸늘하게 냉기섞인 칼바람이 뺨을 벴다. 걸음은 동토의 냉기에 점점 속박되어 더디어졌다. 나는 얇은 외투 하나 움켜쥐고 저 멀리 보이는 고향같은 일터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저 멀리서 까마귀 울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아련히 들려왔다.


얼마나 갔을까...... 나는 내가 걷는 길의 반대로 ‘무언가’가 향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처음에는 내 눈 위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내가 도달해야할 풍차와 땅 밑으로 묻히기 직전의 초승달 뿐이었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의 물결은 나를 계속 그쪽으로 밀어냈다. 끊임없이. 그것이 중요하다. 나는 머지않아 내 그림자 속에서 어떤 누군가의 그림자를 ‘깨달았다’. 존재는 고개를 돌리기 전에는 매복해있는 게릴라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추적을 깨달았다면 변한게 없더라도 그만한 삶의 무게를 지어야 하는 법이다. ‘그 무엇’을 알아버린 내게 그림자는 서서히 접근한다. 아주 조금씩, 내 걸음걸이 만큼 폭을 좁혀나가면서. 길 언저리쯤에서 그 형상을 나의 그림자 속에서 바라봤을때 그의 정체는 늙어빠진 농부였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퀭한 두 눈이 삭막하기까지 했다. 한 손에는 커다란 낫을, 다른 한 손에는 작은 단지를 들고 있었다. 매우 깡마른 외모는 스러지는 달빛을 받아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했다. 나의 그림자속의 그림자가 그의 그림자와 마주치는 순간, 느릿한 시선이 나와 대면했다. 둘 사이에는 칼바람이 섰다. 한기가 뼛속까지 스몄다.
“어르신, 새벽부터 일나가세요? 부지런하시지만 시기가 좀 늦었군요. 다들 일을 끝내고 침대에서 자고 있을텐데.”
나는 뻣뻣한 입을 열었다. 확실히 묘했다. 계절은 이미 늦가을을 지나 겨울로 넘어가고 있었다. 추수철은 지났다. 아무리 밀이 취위에 잘 견딘다고 해도 얼어죽는 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무엇을 수확하러 가는 것일까?
“어떤 집을 찾아가고 있다네, 이걸 보게 젊은이. 내 시계는 늘 정확해. 내 시기는 한번도 놓친 적이 없다고. 날씨는, 계절은 중요한게 아니야. 중요한건 징후지. 그게 바로 중요한걸세. 날씨는 굉장히 좋은 징후가 되주거든. 사람들은 그런 징후에 확신이 서게 되면 징조라고 부른다네. 사람들은 징조를 싫어해. 그것은 태어난 자들에게 숙명인데 말이지.”
그는 한쪽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작은 모래시계였다. 시계의 모래는 꽤나 그득히 내려가 아래는 찰랑찰랑 넘칠 지경이었다. 모래는 아주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심지어 모래가 떨어지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조금 있으면 위에 남은 모래들도 모두 쏟아져 내릴 것이었다. 위 쪽의 모래는 없는 것 처럼 적엇다. 나는 순간 그의 모습을 살펴보다가 매우 놀랐다. 그는 분명 움직이고 있었지만, 정지한 듯이 배우 느리게 걸었기 때문이다. 마치 그의 손에 들린 모래시계의 속도에 맞추는 듯이.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나는 나의 걸음 속도로 그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의 움직임은 정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침 저도 일하러 나가는 길인데.. 수확 마지막이라 밀 빻는 것만 남았거든요. 제가 어르신 수확물도 처리해드릴게요.”
그는 쇳소리같은 날카롭고 작은 목소리로,
“자네는 기다리기만 하면 돼. 기다림은 가장 좋은 약속이지. 때가되면.......가보게나.”
라고 말하고 시선을 돌려 걸었다. 앞에는 어느새 풍차가 저만치 와있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계속 움직였다. 늦은 가을 칼바람에 휘둘린 서쪽 구름은 벌써 하늘을 반쯤 뒤덮고 있었다. 어디서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3. 방앗간

추수된 모든 밀이삭들은 모두 이곳으로 오게 된다. 가을이 되면 수많은 잘린 생명의 씨앗들은 거친 푸대에 담겨져 도착한다. 그러면 그것은 이미 밀이 아니다. 곡식으로서의 수백 수천개의 종자 알맹이는 그렇게 방아통 속으로 떨어진다. 늦가을의 겨울바람이 풍차를 돌리기 시작하면, 냉혹한 추수자는 죽음을 하나 둘, 혹은 뭉뚱그려 분쇄하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밀은 생명의 시체로 들어와 분쇄된 가루로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종종 바람과 나 자신을 타나토스의 재림이라 생각한다. 여기 오는 수많은 생명의 넋들을 죽음의 안식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것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에 의해 떨궈진 고귀한 생명들을 가루로 만들어 세계의 흙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주문 받은 그 해 마지막 일거리였다. 나는 늘 그렇듯 밀 이삭들을 쏟아넣고 사신死神의 바람이 불기를 기다렸다. 덜컹,덜컹, 밀들의 장송곡이 좁은 풍차 방앗간에 울려퍼진다.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바람, 적당한 양이면 충분하다. 특히 시기가 제일 중요한데, 적당한 시간과 시기를 가늠하여 사형수처럼 가루가 되 버린 밀가루들을 푸대에 담는다. 이 작업은 일감이 모두 사라질때까지 수레바퀴처럼 반복된다.

그때 나는 마지막 밀들을 빻는 중이었다. 갑자기 좁은 창 위로 참새 한 마리가 들어왔다. 나는 일에 열중해 있었기 때문에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풍차가 느려지고 천천히 멎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지 않는건가. 이상스레 생각하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내 앞에 앉아있는 그 녀석을 발견했다. 한창 작업중인 내 앞에 앉았다. 녀석은 아직 울지도 않는다. 나는 또 밀가루를 쪼아먹으려는 귀찮은 존재라 생각하고 성가신 표정으로 쫓아내려 했다. 하지만 아무런 움직임없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빨리 쫓아내야했지만, 왠지 그럴 수 없었다. 왜냐면 어쩐지 그럴 수 없노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면 저 녀석이? 혹은 둘다가? 그것도 아니면......
나의 눈 빛이 새와 마주쳤다.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눈은 칠흑처럼 검었다. 그보다 더 검었다. 내가 바라본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검고 두려운 눈을 그 새는 가지고 있었다. 풍차는 완전히 멎었다. 고요했다. 밖으로 휭휭 사신의 낫질 소리만이 매섭게 들려왔다.

나는 오랫동안 그 검은 눈 속에 빨려 들어가 있었다. 시간이 정지한 공간의 정적 속 응시. 그것은 존재의 망각이 아닌 하나의 명상이고 명상은 곧 연금술이다. 나는 그의 눈에서 한없는 암흑의 계절을 발견했다. 겨울, 그 하얀 심연 속에 은신해있는 검은 꿈틀거림, 그것은 혀끝에서 맴도는 말할 수 없는 무엇들이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았을 뿐, 무엇이라고는 차마 말할 용기가 없다. 녀석은 까마귀였. 어둠같은 깃털을 몸에 두른 까마귀였다. 온통 까맣게 둘러쓴 늙은 사공이 떠올랐다. 그는 낮게 날아 지금 빻아둔 밀가루 위에 살며시 앉았다. 물 속에 잉크가 번지듯, 하얀 가루는 그의 죽음이 물들어 검은 흙으로 변했다. 나는 주술사처럼, 그가 행하는 의식을 무아경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계시를 기다린다. 까마귀는 흙을 쪼아다가 내 머리에 뿌렸다. 그리고 푸드덕거리면서 날개를 펼쳐 날았다. 그는 풀차 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가악가악 울어댔다.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을 기억하라. 그는 이 말을 수없이 되뇌이며 방앗간 주위를 빙빙 돌다가 문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까마귀의 의식에 서 있던 나는 몽롱하게 문 밖을 바라보았다. 회색 구름에 눌려 일그러진 태양의 노을이 하늘에 뒤엉켜 보랏빛 파도를 일으키고 있엇다. 까마귀는 하늘로 날아간다. 나는 그를 따라 문을 열고 나간다.



0.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모래비였다. 하늘에 가느다란 금빛 모래들이 쏟아내리고 있었다. 사악사악, 가루들은 발치부터 쌓여가기 시작했다. 몸에 맞는 모래들은 내 낡은 피부를 타고 흘러내려 아래에 쌓인다. 비는 대지와 방앗간과 길 위를 소복히 덮는다. 황량한 대지의 몸뚱아리도, 길게 굳어버린 나의 길도, 끝없이 멀 것 같은 지평선도 눈처럼 덮어내리고 있었다. 모래는 한없이 쏟아진다. 황혼녘에 보이는 노을과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아득한 모래비이다. 노을 속을 걷듯이 사라락사라락, 그리고 나는 모래를 헤치며 방황한다.

갈수록 비는 많이 쏟아진다. 장마철 소낙비를 헤집고 가는 것 처럼 나는 수많은 모래의 급류를 무릎으로 쓸어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모래는 쉬지않고 계속 쌓인다. 끊임없이. 얼마나 계속 내리는 걸까? 1시간? 아니 1달? 1년? 10년? 100년동안? 내가 가진 시간동안 쉼없이 쏟아진다. 마치 물처럼 발치에서 무릎으로 허벅지로, 허리로, 가슴으로, 어깨까지 쌓인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나는 곧 모래폭풍에 묻힌 낙타처럼 금빛 사막에 묻혀질 꼴이다. 모래언덕,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영겁같은 사막을 상상한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시간을 헤아릴 수 없을정도로 오랫동안 비가 내리는 모래사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복되는 형상 속 모래, 흙의 강림. 결과는 망각이다. 모래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않는다. 나는 밀밭도, 내가 걸어갔던 길도, 고향같은 방앗간도 모래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찾을 수도 볼 수도 없었다. 우연히 만났던 새벽의 노인이 아득히 먼 옛날의 길들과 마지막으로 이상한 꿈을 꾸었던 나의 집들, 그리워하는것 조차 망각하여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모래와 모래, 흙과 흙 뿐이었다. 허망할정도로.
모래비는 소낙비보다 훨씬 혹독했다. 모래에 묻힌 모든 것은 시간의 저 편으로 사라져 찾을 수도 볼 수도 없다. 모래는 벌써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몇 년이, 몇천년이 걸렸는지 몰랐다. 다만 세상은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은 결국 모래로 덮였다는 사실 하나는 분명했다.

결국 나는 온몸이 고향같은 이곳에 묻혀진다. 내가 서 있는 곳이 그대로 무덤이 되어버린다. 삶의 끝자락에서 모래와 죽음으로 가득한 최후를 맞이한다. 해는 넘어간지 오래, 어둠의 장막이 펼쳐지고 암흑이 밀려온다. 밤. 새벽녘 만났던 노인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는 아주 천천히 내게 다가오고 있었지만, 벌써 내가 마주할때만큼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그가 dhoi 여기로 돌아온 것일까?아니, 그가 돌아온 게 아니다. 이곳은 나의 집이고 고향이다. 내 깊은 끝이 없고 보이지 않게 지평선까지 이어진다. 그곳은 바로 여기 방앗간, 끝은 바로 여기다. 젊음이 지나면 늙음이 오지만, 시간이 지나면 영원이 오는 것은 아니다. 순간은 영원이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내가 까마귀를 바라보았을때의 시간의 정지됨, 명상하는것과 같다. 노인의 팔에는 늙은 사공같은 진짜 타나토스, 까마귀가 앉아있다.

“또 보게 되는군. 여기가 자네 집이 맞니? 인간은 누구든 길 위에 살게 된다네. 그리고 그 길은 모두의 길이며 자신의 길이지. 그리고 그 길에 사는 사람은 모두 자신이면서 인간이네. 길은 끝없이 이어질거라고 생각하지만, 신의 섭리는 바로 그 길이 끝나는데부터 보인다네. 자 이제 때가 됐어. 징후들도 봤을테니, 난 추수를 해야겠네.”

아아, 아버지 시간Father Time이시여! 삶이란, 결국, 인생이란 어머니 품안에서 태어나 대지Gaia의 품안으로 돌아가는 것, 타나토스가 데려간 밀이삭들과 같이, 거두어진 존재는 밀가루가 아닌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여기는 집이며 방앗간이며 세계입니다. 자궁이고, 무덤이며 고향이고 끝입니다. 나는 이 엄숙한 시간을 꿈 속의 장교들처럼, 아이를 잃은 어미처럼 구걸하지 않으며, 다만 아이와 같은 무구함으로, 혹은 밀이삭들처럼 정직하게 죽음을 모래에 묻는 그 순간의 시선 속에 삶을 영원히 가두어 놓을 것입니다. 까마귀를 응시하고 명상할 바로 그때처럼.
드디어 모래가 그쳤다. 이제 모래시계를 뒤집을 시간이다. 세상은 꿈처럼 하얗다.



우리는 모두 가슴 속에 한 마리의 까마귀를 기르고 있다. 그것은 마치 자는 도중 울려서 받지 못하는 전화벨 소리처럼 늘 아득하게 우리 곁에 다가서 있다. 까마귀는 마음 한켠에 웅크리고 앉아 자고 있는 우리에게 계시를 내린다. 죽음을 기억하라고. 녀석은 시간을 먹으며 자란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존재를 망각한다. 순간순간 들리는 소리는 그저 까마귀 울음일 뿐이다. 시간이 쌓여 까마귀가 자라고 그 외침소리가 들려오게 되면, 이미 그것은 두려움이지, 죽음이 될수 없다. 죽음은 끝까지 은둔한다. 그러면서 숨을 거둘때까지 공포를 파먹고 생의 온기속에 한파를 부친다.

우리 곁에 까마귀는 늘 깊숙한 곳에서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는 바로 옆에서 가악가악 울어대며 검은 날갯짓으로 죽음을 잠식해 올것이리라.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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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표현주의 영화의 거장인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1976년작 『까마귀 기르기』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서 나름대로 그 주제를 제 방식으로 변형하였습니다. 이 소설을 쓸 적에 보르헤스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아서 곳곳에서 보르헤스의 입김이 많이 보이네요.
사실 처음으로 쓴 처녀작이자, 완결지어놓은 유일한 단편소설이라서 애착이 상당히 많이 가는 작품인데, 오랜만에 다시 보니까 허술한 부분이 군데군데 띄는군요. 전체적으로 환상적 사실주의적 터치로 색을 입혀보려고 했는데, 신화적 내러티브에서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군데군데 보이네요. 나중에 기회가 허락되면 좀 수리해봐야겠습니다.
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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