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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크로노스의 미로.

2006.11.29 23:2711.29

길을 걷는다. 길 위에서 길을 묻는다. 걷고 또 걸어도 오직 길 뿐. 아직은 좀 더 갈 수 있다.

언제부터 걷기 시작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궁금해야 할 텐데, 알 수 없다. 단지 시작도 없었고 끝도 없는 듯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처럼,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

난 잠시 걸음을 멈추고서 신발끈을 고쳐 매었다. 슬슬 뻐근해지는 무릎을 주무르며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 특징도 없는, 너비 6미터의 길과 높이 3미터의 벽. 그리고 전등이 침침한 빛을 뿜어내는 천정. 난 그 소름돋는 잿빛을 잠시 주시한다. 내 발걸음 소리와 어데선가 들려오는 낙숫물 소리. 똑, 똑. 또각, 타탁, 탁. 타박. 이 복도 저 끄트머리에서, 잿빛의 무한이 흐느끼는 소리다. 그것은 상실된 무언가를 애곡하지만 난 그에 일말의 동정심도 가질 수 없다. 그 소리가 째각대면서 내 심장 고동소리와 겹쳐져 간다. 한숨을 푹 내쉰다.

혼자 걷는 길이란 건, 꽤나 지친다. 그러나 아직 지칠 정도로 걸어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도 내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이 낯선 감정은 무엇일까. 발걸음이 무거움은 지쳐서일 수도 있으나, 단지 계속 앞만 바라보며 묵묵히 걸어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저 텅 빈 무채색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만 함이 두렵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예의 그 낯선 무언가와도 같이 허공에서 불쑥 울려왔다.

“이봐, 호라! 그렇게 가면 안 돼!”

그리고, 그 순간… 눈 앞의 허공에서 하나의 팔이 불쑥 튀어나와 날 붙잡았다. 크고 단단한, 그러나 따뜻한 손이다. 그 와중에도 난 순간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다음 순간 난 그 팔에 이끌려 바닥에 거칠게 내동댕이쳐지고, 놀라서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그 팔이 다시 날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제야 난 주변을 다시 둘러보고, 그 팔의 주인을 확인해 볼 여유를 되찾았다.

“미안! 많이 놀랐냐? 하지만 이 외엔 방법이 없었어.”

난 고개를 들어 그를 살펴보았다. 금발 머리에 회색 눈을 지닌, 서글서글한 인상의 사내다. 나이는 나보다 너댓 쯤 많아 보였다.

“당신은… 누구세요?”

난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다 움찔했다. 복도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을씨년스럽고 스산할 뿐이었으나, 방금까지만 해도 혼자 걷던 그 길 위엔 흐릿한 사람의 그림자같은 형태 너댓이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그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 일단 내 소개부터 할께. 난 미누티우스라고 하고, 얼마 전까지 너와 마찬가지로 호라였었지. 그리고 저들은 이 크로노스의 미로 안에서 헤매는 사람들이고.”

“저들은 어디서 나타난 거죠? 뭣보다, 여긴 어디고 당신은 뭘하는 거죠 정확히?”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앞쪽 질문부터 대답하는 게 좋겠네. 뭐랄까, 저들은 아까부터 계속 ‘있었어’, 적어도 내가 보기론. 그리고 내게는 너도 역시 그림자로 보였고. 그런데 넌 순간,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감정이 자기 내부에서 솟아나는 걸 알았지?”

그가 어떻게 나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그 감정을 잘 알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난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공간 내에서 그 감정이 아예 금지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너희들 입장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기는 매우 힘들어. 그리고 느낀다 하더라도 지쳐서 그렇겠거니 하고는 더욱 더 빨리 종종걸음을 쳐 가기 시작하고.”

“…….”

“그러나 넌 그걸 단편적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러한 상태임을 ‘알았고’, 그래서 내가 네게 올 수 있었던 거야. 일단 가면서 이야기할까? 내가 동행해도 되겠지? 난 너희와 달리 목적지를 확실히 알지만 나 혼자는 갈 수 없고, 너도 안내자가 있으면 편하지 않겠어?”

그는 끝없이 입에서 단어들을 쏟아내며 살짝 손을 내저었다. 순간, 복도 한 켠에 비켜 서 있던 우리와 계속 정면만을 응시한 채 걷고 있는 그림자들 사이로 하나의 칸막이가 솟아나며 앞으로 새로운 길이 펼쳐졌다.

그는 내 옆에 나란히 서서는, 뒷걸음질을 쳐 그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난 얼떨결에 역시 뒷걸음질로 그 옆에 따라 붙으며 방금 말한 크로노스의 미로란 어떤 건지, 당신은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건지를 제차 물었다.

“크로노스가 누군지… 이 장소를 왜 그렇게 부르는 건지는 나도 잘 몰라. 아무튼 이 길은 쭉 이어져 있으니까. 단 한 번의 갈림길도 없는 복도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다면 미로는 미로지, 안 그래? 나도 많이는 몰라. 단지 확실한 건 너를 비롯한 사람들은 이 장소 어디선가 목적없이 나타나, 자신이 누구고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른 채 무작정 걷는다는 거야. 그들은 함께 있지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따라서 자기가 혼자라고 느껴. 그들이 그림자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도, 스스로가 누구며 어디로 가는 건지 몰라서 그런 거야. 나도 마찬가지였어, 내 안내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안내인?”

난 반문하며 칸막이 너머로 그림자들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까는 그들의 수가 너댓 정도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확실치 않았다. 그들은 매 걸음걸음마다 크기가 늘었다 줄었다 했으며, 그와 함께 모습 또한 희미해지고 짙어지기를 반복해 숫자를 헤아리기가 힘들었다. 그들은 종종 서로 겹쳐지기까지 했으나, 스스로는 그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신을 미누티우스라고 소개한 그는 날 내려다 보며 설명을 계속했다.

“그래. 그 땐 나도 너희와 마찬가지였고, 한 없이 걷고 또 걷다가… 그 기묘한 감정을 ‘알고’서 그를 만났어. 그는 그걸….”

“……?”

“‘고독’이라고 불렀어.”

고독, 고독. 고독. 난 그 생소한 어감을 곱씹으며 다시 그림자들을 살펴보았다. 단조롭게 너울거리듯 복도를 걷는 그들의 얼굴이 있어야 할 부분에, 희미하게 표정이라고 할 만한 윤곽이 문득문득 떠오르긴 했으나 이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곤 했다. 그를 볼 때마다, 난 과연 저들이 얼굴을 가진 것인가- 내가 순간 착각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가르쳐줬어, 이 미로의 끝에는 밖이 있고, 거기에 이른 자는 완전을 이루어 세쿤두스가 될 수 있다고. 그는 날 출구라는 목표로 데려갔고, 세쿤두스가 되어 밖으로 나갔어. 그리고 난 그 때의 그처럼 미누티우스가 되어, 호라-그러니까, 자신이 고독하다는 걸 자각하게 된 그림자-에게 출구를 보여줘선 목적의식을 주고, 그를 미누티우스로 만들고는 나갈 권리를 얻어 세쿤두스가 될 거야. 그리고 너도 다른 그림자들 틈에서 호라를 찾아내, 다른 미누티우스로서 그에게 출구를 보여주는 거지. 혼자선 출구 밖으로 나갈 수가 없거든.”

“음… 조금 이해될 거 같아요.”

“게다가, 세쿤두스가 탄생할 때마다 출구로 가는 방법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그의 자리를 넘겨받은 새로운 미누티우스는 자신이 세쿤두스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직접 찾아야만 돼. 나 같은 경우는 이 길 위를, 결코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거였지만.”

난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그래서, 당신이 찾아낸 그 조건이란 게 뒷걸음질인가요?”

“어. 그림자들은 자신이 과거에서 미래로 가고 있다고 믿거든. 하지만 그들이 ‘미래’를 알고 있어? 알지 못하는 곳으론 갈 수 없어. 단지 과거를 바라보며 뒷걸음질치는 것. 그게 바로 미래를, 그리고 출구를 찾는 방법이지.”

난 한숨을 푹 쉬었다.

“만일 제가 동행을 거절한다면요? 어떻게 당신을 믿고요?”

“글쎄다, 나는 그 때 두 말없이 좋다고 받아들였으니까. 남들은 내키지 않을 수도 있겠지, 나의 안내자도 그럴 땐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 지 말해주지 않았고. 뭐랄까, 솔직히 난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

그는 여전히 그 특이한 뒷걸음질을 계속하면서 머리를 거칠게 긁었다.

“음, 네가 진짜로 날 믿을 수 없고, 그래서 그냥 지금까지 하던 대로 혼자 계속 걷기만 하겠다고 우기면 난 그걸 막진 않겠다. 그럼 간단해, 난 내 미누티우스로서의 힘으로-그는 손가락을 까닥여 보였다- 네가 날 만났다는 기억을 지우고, 다시 저 복도 가운데 던져놓으면 되거든. 내가 다른 호라를 찾아내 함께 출구에 이를 수 있는 날은 그만큼 더 ‘멀어’지겠지만 스스로가 내켜하지 않는 호라를 억지로 끌고가다가 조건이 나도 모르게 바뀌기라도 하면 낭패니까.”

아직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 난 마지막으로 다시 그에게 물었다.

“이봐요. 미누티우스, 라고 부르면 되죠? 미누티우스. 이 조건이 진짜 맞긴 한 거에요? 혹시 잘못된 방법이고, 결코 출구에 이를 수 없다면? 당신도 그 세쿤두스가 되지 못하고, 저도 미누티우스가 될 수 없다면?”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그는 나보다 훨씬 크다.

“그런 것 같으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 봐야지. 최소한 이렇게 하면,”

피식, 웃는다.

“심심하진 않잖아, 너나 나나.”

난 또 한번 한숨을 푹 내쉰다. 다시 주변을 살핀다. 워낙 이 복도가 특색이 없긴 하다. 그러나 기분 탓인지, 아까부터 제 자리 걸음만 하는 듯 하다.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이 현재 속에 붙들려 버린 건 아닐까.

난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순간적으로… 아주, 아주 잠깐,

길이 우리 뒤에서 앞으로 움직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길, 길들. 이 끝없는 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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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에 힘 빼고 가볍게 두들긴 잡문입니다.

....미카엘 엔데의 모 작품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으신 분들께는 레드썬!(......)
세뇰
댓글 2
  • No Profile
    가예 06.11.30 22:27 댓글 수정 삭제
    호라, 우린 미누티우스가 될 수 있을까요? 잘 읽었습니다.^^
  • No Profile
    읽어 주셔 감사합니다.

    과연 될 수 있을까요... 흐음. 저로썬 아직 판단 보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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