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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당신이 빚진 것

2022.06.10 17:3506.10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인연이 있다. 내게는 당신과의 만남이 그랬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다시 만나야 했다. 당신은 내게 큰 빚을 졌고, 나는 그걸 반드시 받아야 했으니까.

 우리의 인연은 3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당신을 만난 첫날, 어색하게 차려입은 첫 정장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어떤 말을 해야 당신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할지 고민하며.

 당신과 헤어지고 나서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고 일주일 내내 쓸데없는 연락만 오는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먼저 연락해볼까, 아니야 저쪽에서 연락을 줄 때까지 기다리자, 갈팡질팡 고민하다가 딱 하루만 더 기다리고 포기하자고 마음먹었던 저녁 당신에게 문자가 왔다. 내가 마음에 들었다고, 다음 주에 볼 수 있느냐고.

 그 단순하고 짧은 연락 하나에 내 마음이 얼마나 뛰었는지. 받고서도 한동안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원룸 그 좁은 방 안을 뱅글뱅글 돌았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연락 기다리고 있었다고, 고맙다고, 그날 보자고 겨우 메시지 하나를 보내고는 새벽을 지새웠다.

 당신은 첫 만남 때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조금 더 대범하고, 무딘 면도 있고, 내가 큰 잘못을 해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기도 하고, 때로 조금 무례하기도 했고.

 당신의 그 무례함 때문에 기분이 조금 상해도, 내가 을이니 참아야지, 내가 손해 보는 것이지 하고 넘기고는 했다.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할 것만큼은 철저하게 지켰기에 나 역시 조금쯤 꽁해있다가도 기분이 풀려, 역시 당신은 좋은 사람이지, 하고 마주 웃곤 했다.

 우리가 자주 가던 술집들을 떠올리곤 한다. 당신은 술에 취해 평소 말 못했던 불만들을 내게 털어놓았고, 나는 속없이 웃으며 넘겼다. 내게도 불만이 있으면 이참에 속 시원히 털어놓으라고, 나만 말하는 건 불공평하다고 당신은 말했지만 나는 웃으며 당신 때문에 입은 상처들을 꽁꽁 싸매 숨겼다. 이런 것을 내보였다 당신에게 내쳐질까 두려웠다.

 2년 정도 그럭저럭 지내왔다. 자주 미웠으나 좋았던 순간들도 있었다. 때로 사람이란 미움을 정으로 덮는 것이 쉬워서 미운 정이라는 말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미웠다가도 좋고, 좋았다가도 밉고, 그래도 얼굴 보면 웃게 되는 것이 우리 사이였다. 힘든 일도 함께 넘겼고, 그간 당신은 내게 주어야 할 것들을 잊지 않고 주었다.

 그러나 1년 전부터 당신은 내 얼굴을 보면 도망가기 시작했다. 내가 얼굴 좀 보자면 당신은 나중에, 라는 말만 반복하며 바쁜 일이 있다고 자리를 떴다. 어느새 힘든 일은 같이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 혼자 이겨내는 것이 되었다. 함께 가던 술집에 홀로 가니 술집 사장은 당신은 어디 두고 혼자 왔느냐 능청을 떨었다. 요즘 건강관리 하신다고요, 하고 웃고는 씁쓸하게 소주를 들이켰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곧 당신이 내게 주어야 할 것들을 주지 못하리라는 예감. 곧 우리가 영영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나쁜 예감.

 예감은 들어맞았다. 6개월 전쯤부터 당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되었고, 당신과 연락할 방법도 사라졌다. 당신의 흔적을 잡을 수 없었다. 나는 수시로 핸드폰을 열어 당신의 연락이 왔는지 들여다보았으나, 내 기다림은 무용하게도 당신은 내게 연락 하나 주지 않았다. 곧 당신의 번호는 없는 것이 되었다. 그 지경이 되도록 당신은 내게 연락 한번 없었다.

 나는 출근이 의미가 없는 회사를 무단으로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혀 3개월을 기다렸다. 3개월 정도면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고 생각했다. 나는 경찰서로 찾아가 당신을 찾는다고 신고했다. 경찰은 골치 아픈 얼굴로 펜을 손안에서 굴리다가, 여기저기 전화를 해보더니 경찰서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범죄 신고는 여기서 하는 거 아닌가요?"
 "아 맞는데, 관할이 달라요, 관할이. 어차피 여기서 신고해도 다른 데로 이관되니까 그쪽에 신고하는 게 처리가 빨라요."

 경찰이 안내한 곳으로 가서 신고했다. 내 신청서를 받은 상담원은 2주 정도 후에 연락이 갈 테니 그때 조사날짜를 잡으라 했다.

 2주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동안 회사에 다니며 저축한 돈이 착실하게 없어지고 있었다.

 2주 후에 전화가 왔다. 당신과 연락이 닿지 않아, 당신을 찾기 위해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라 했다. 잡힐 때까지 기다리겠다 했다. 처음에는 미안한 마음도 있었으나 이제는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저번 주에 드디어 당신을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경찰서에서 음주운전 검사를 하다가 당신을 잡았고, 현재 유치장에 구속된 상태라 했다.

 오늘은 바로 당신을 만나는 날이다. 나는 당신을 처음 만난 날 입었던 그 정장을 깨끗하게 차려 입은 채로 노동청의 입구에 서서 크게 한숨을 쉬었다.

 민원실을 찾아가니 내 신청서를 받아 준 젊은 직원이 아는 체를 한다. 위층으로 올라가 조사를 받으라고 한다.

 나는 계단을 한 층 올라갔다.

 '근로개선지도 1과'

 그렇게 쓰여 있는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당신이 기다린다. 내가 그리도 찾던 당신이.

 나는 내 임금체불 사건을 담당하는 근로감독관에게 인사한 후 당신의 옆에 놓인 빈 의자에 앉아 말했다.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요, 사장님. 그래서, 제 월급은 왜 안 주고 도망가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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