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반짝임에 이르는 병

2022.02.18 11:3002.18

 

 

1.

 

 

곧 양수역에 도착한다는 전철의 안내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읽고 있던 당신의 책을 가방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7월의 햇살이 전철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좌석에 앉아있는 승객과 바닥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어요. 나는 눈이 부셔서 눈을 가늘게 떴어요. 스마트폰을 꺼내 지도 앱을 켠 뒤, 당신의 집으로 향하는 길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양수역을 나온 뒤에는 모자도 없이 온 것을 후회했습니다. 날이 무척 더웠어요. 당신의 집은 양수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지만, 내 몸은 한나절 동안 달리기한 사람처럼 흠뻑 젖어버렸습니다. 4층짜리 빌라의 정문 앞에 이르러 당신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눌러 건물 안으로 들어섰지요.

현관에서 당신을 마주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아나요. 나는 당신이 기껏 해봤자 40살도 못 되었을 거로 생각했어요. 하지만 주름진 얼굴로 웃는 당신은 내 또래 손주를 두고 있을 할아버지로 보이더군요.

당신의 안내를 따라 들어선 집안은 밖과 다름없이 밝았습니다. 거실의 통유리창으로 여과되지 않은 햇볕이 내리쬐어 바닥과 벽을 따뜻하게 달궜습니다. 반면 공기는 서늘했지요. 당신은 바람길이 집을 관통해 그렇다며 나를 소파에 앉혔습니다. 이 집을 구하느라 부동산을 얼마나 오갔는지 모르겠다며 너스레를 떨면서 내게 주스 한 잔을 건넸어요. 유리잔에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힐 정도로 차고 시원한 주스였지요. 나는 단숨에 주스를 마셨지만 그렇다고 당신께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나는 더 늦기 전에 당신을 찾아온 이유를 꺼내놓습니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 테이블에 소리 나게 놓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썼는지 말해봐요."

당신의 책은 안 팔리게 생긴 로맨스 소설입니다. 칠팔십년대를 연상케 하는 표지디자인과 제목에 쓰인 폰트, 심지어 제목도 촌스러웠어요.

 

『반짝임에 이르는 병』

 

일본의 유명 스릴러 소설『살육에 이르는 병』에서 제목을 따왔다는 이야기를 책 후기에서 읽었습니다. 원본이 되는 소설은 마지막에 엄청난 반전을 숨기고 있었지만, 당신의 소설은 아닙니다. 불치병에 걸린 여자와 허우대 멀쩡한 남자가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는 흔해빠진 내용의 신파극이었지요. 반전도 감흥도 작품성도 없는, 그저 그런 소설이었어요.

물론 흔해빠진 이야기로 치부했다면 내가 당신을 직접 찾아올 일도 없었을 겁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쓴 건지 말해보라고요. 이 책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기나 해요? 당신이 무책임하게 이런 쓰레기를 출간하는 바람에, 인터넷에서는 개나 소나 이걸 가지고 놀고 있어요. 그걸 보고 다른 사람이 얼마나 힘들어할지 생각도 안 해봤어요?"

"목소리 낮춰줄래요. 안사람이 방에서 자고 있어요." 당신은 방문을 가리킨 뒤 되묻습니다. "그리고 선아 씨가 이 책을 보고 속상했다는 건 알겠는데 말이에요. 다른 사람들도 그럴 거라고 어떻게 단언하는지 궁금하네요."

"헛소리하지 마요. 적어도 내가 당신보다는 ‘그들’에 대해 잘 알아요, 장담하건대…"

당신은 더 듣지 않고 "잠깐만요." 하며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주방으로 들어가 물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씻더니만, 이내 탐스러운 복숭아 한 바구니를 들고 돌아옵니다. 나는 당신이 태연하게 복숭아에 과도를 꽂아 속살을 가르고 비트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그 뜬금없음에 실소가 터졌지요. 그런데도 당신은 묵묵히 복숭아를 조각내고는 포크로 찍어 내게 건넸습니다.

"보아하니 며칠 굶은 꼴이라서 그래요. 일단 먹고 나서 이야기합시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살 사람이니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그렇게 말하며 다른 복숭아를 집어 들어 속살을 가르기 시작했습니다.

 

 

 

 

 

2.

 

 

당신이 왜 우리더러 계속 살 사람이라고 말했는지 압니다.

나는 살 사람이에요. 당신도 살 사람이에요. 우리는 당신 책에 나오는 불치병에 걸리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언쟁을 이어가기 전에 나는 당신의 늙은 얼굴을 보며 내 가족을 떠올립니다. 나와 엄마, 이모, 세 명이서 함께 살던 시절을 생각합니다.

셋이서 함께 했던 마지막 소풍날이 언뜻 기억나네요. 아마 나는 그때 다섯 살인가 그랬을 거예요. 엄마의 무릎이 휠체어에 딱 맞게 구부러지던 시절이었지요. 우리는 돗자리와 도시락, 오래된 캠코더 카메라를 챙겨 들고 집 앞 공원으로 향했어요. 어렸던 나는 개나리 노란색의 하늘거리는 블라우스와 바지를 입었습니다. 얼마 전, 이모의 친구가 생일선물이라고 지어서 보내준 옷이었지요.

봄이었어요.

지천에 토끼풀과 강아지풀, 민들레, 냉이꽃이 깔리고 나비와 방아깨비가 어린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봄이었습니다. 이모가 캠코더를 들이밀든 말든, 나는 신경도 쓰지 않고 풀숲에 엉덩이를 붙여 토끼풀로 반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든 꽃반지를 엄마의 장갑 낀 손가락에 끼워줬습니다.

엄마의 손은 참 특별했어요. 어린이집 선생님이나 친구네 아줌마의 손은 참 보드랍고 말랑말랑한데 엄마의 손은 그렇지 않았어요. 마네킹의 관절 달린 손처럼 딱딱하고 차가웠지요. 손가락 관절을 꺾으려고 하면 이상한 소리가 났어요. 엄마는 그런 손가락에 끼워진 꽃반지를 보며 화사하게 웃으며 좋아했습니다. 이모에게 이것 좀 보라며 자랑을 해댔지요.

이모는 언제나 그러하듯 정색한 얼굴이었습니다. "잘 어울려, 예쁘네." 하고 말았어요. 엄마는 이모의 손을 빤히 보다가 내게 부탁했습니다. "이모 반지도 하나 만들어주자. 엄마랑 이모랑 나란히 커플링 하게."

나는 꽃반지를 하나 더 만들어 이모의 손가락에도 끼워줬습니다. 이모는 기쁜 티도 없이 고맙다, 말만 하고는 다시 캠코더를 집어 들었어요. 소풍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잠깐 문방구에 들려 코팅지를 몇 장 샀습니다. 이모는 엄마와 자신의 꽃반지를 코팅해 액자에 넣어서 엄마의 침대에서 제일 잘 보이는 벽면에 걸어놨습니다.

이모가 언제나 정색하며 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엄마는 언제나 침대에 누워만 있었으니까요.

엄마는 나를 가지기 전부터 오래 아팠다고 해요. 온몸의 관절이 굳어가는 병이라고 했어요. 손가락, 발가락 같은 말단 부위에서 증상이 시작되어, 그게 팔다리로 번져 몸 중앙까지 이르고 마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휠체어에 앉아있거나 침대에 누워있기만 했어요. 걷거나 뛰거나 나를 업거나, 함께 춤을 추는 엄마는 내 상상에서나 존재했지요.

이모는 서서히 병에 잠식되는 엄마를 지극정성으로 돌봤습니다. 매일 몸을 닦아주고 밥을 먹이고 대소변을 받고 책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나눴지요. 비록 단 한 번도 엄마에게 웃는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지만, 이모가 엄마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어린애인 내 눈에도 훤히 보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이모는 나의 양육도 도맡았지요. 나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입히고 가르쳤어요. 한나절만 지나도 산더미처럼 쌓이는 집안일에 육아와 병간호까지 도맡았던 겁니다. 굉장히 힘들었을 텐데 이모는 단 한 번도 내색하는 일이 없었어요.

유치원에 들어간 뒤에야, 우리 가족이 친구들 가족과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빠가 없었어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없었어요. 다른 친인척도 없었어요.

유치원 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가 문제였지요. 언제는 여름방학 숙제로 가족신문을 만들어 가야 했거든요. 나는 만들기 싫다고 떼를 썼습니다. 선생님이 가족신문을 학급 게시판에 걸어놓을 거라고 말했기 때문이었지요. 신문에는 가족사진을 꼭 넣어야 했는데, 다른 친구들에 비해 내 가족은 너무나 빈약하게 느껴졌어요.

엄마는 싫다는 나를 설득했습니다.

"그러면 있지, 신문을 만들기만 하고 선생님께 내지는 말자. 그냥 엄마랑 이모랑 선아끼리만 돌려보는 거야. 그건 괜찮지? 엄마는 선아 숙제 훔쳐보는 게 낙이란 말이야. 그것도 못 하면 엄마 정말로 심심해 죽을 거야."

엄마는 자기 몸 상태를 뻔히 알고도 그런 말을 자주 썼어요. 죽을 거야, 죽겠네, 죽겠다. 그런 말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내 몫이었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가족신문을 만들었습니다. 가족사진도 찍었어요. 이모가 침대에 걸터앉은 엄마와 나를 찍어줬지요. 나중에야 나는 엄마가 선생님께 숙제 문제로 직접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가족신문을 내지 않고도 혼나지 않은 유일한 아이가 되었답니다.

좋은 날은 오래 가지 않았어요. 내가 10살일 때, 엄마의 어깨와 골반 관절이 완전히 굳어버리고 말았어요.

이모는 엄마를 위해 텔레비전을 천장에 매달았고 주변 전자기기를 말로 끄고 켜는 음성인식 리모컨도 설치했습니다. 정작 엄마는 텔레비전도 라디오로 즐기지 않았어요. 엄마가 제일 즐기는 건 내 목소리였어요.

나는 매일 학교가 끝나면 친구와 노는 대신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신발만 벗고 허둥지둥 안방으로 들어가 엄마의 침대 옆에 밥상을 두고 숙제를 했습니다. 덧셈, 뺄셈, 나눗셈, 곱셈하며 학교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이나 오고 가며 보았던 것들을 이야기하면, 엄마는 풀벌레가 우는 듯한 소리를 내며 웃었어요. 깔깔깔, 이나 하하하, 가 아닌 찌르르르, 찌르르르. 입이 아닌 겨드랑이와 등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

난 엄마가 웃는 게 참 좋았어요. 청명하고 시원한 미소가 내 눈에 비칠 때면 아무리 더운 여름날에도 온몸이 서늘해졌지요. 기분 좋은 청량감이 가슴에 스몄어요.

엄마의 웃음은 시간이 지나며 차츰 줄어들었습니다. 현관문이 열리기 무섭게 "우리 딸 왔어?"하고 나를 찾던 목소리도 속삭이는 수준으로 바뀌었어요.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것마저 힘겨워했습니다. 마치 통나무로 만든 목각인형처럼, 엄마는 침대에 누운 채로 굳어버렸던 겁니다. 나는 그때야 엄마가 정말 많이 아프다는 사실을 실감했어요. 엄마가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말기 암, 골수이식을 놓친 백혈병, 재생 불량성 빈혈처럼 고치기 힘들고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하는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거예요. 속상하고 눈물이 났지만 참았습니다. 오히려 악을 쓰며 엄마 옆에 누워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웃으며 이야기했습니다. 엄마는 가끔 입꼬리를 들어 올렸습니다. 희미한 찌르르르 소리가 옆구리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새벽, 이모가 한참 자는 나를 깨워 엄마에게 작별인사할 시간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울지 않을 재간이 없었어요.

이모는 나를 안방으로 데려갔어요. 엄마는 이제 목각인형보다는 돌이나 바위에 가까워졌지요. 목 끝까지 올린 이불 위는 미동도 없었고, 숨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어요.

이모가 말했어요. "엄마 손을 잡아줘. 좋아할 거야."

나는 조심스레 엄마의 손을 잡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조금 잡아당기니 손이 쑥하고 빠져버렸거든요. 마네킹 같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손이 실은 의수였던 겁니다. 엄마는 내가 자지러지게 놀라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어요. 눈동자를 굴려 나를 보고는 입술을 달싹였습니다. 소곤소곤 말했습니다.

"세상에, 선아 얼굴 너무 웃겨서 엄마 죽을 것 같아. 이거 찍어놔야 하는데. 우리 딸이 개그에 소질이 있는 줄 알았으면 오디션이나 내보낼 걸 그랬지."

"난 개그같은 거 못해." 나는 코를 훌쩍이며 그렇게 대답했어요.

엄마는 찌르르르 소리를 내 웃다가 가벼운 숨을 내쉬었어요.

"못하기는. 엄마는 선아 얼굴 보기만 해도 행복한걸. 넌 누구든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아이니까. 엄마가 선아 사랑하는 거 알지?"

"나도 엄마 사랑해." 나는 눈물 콧물을 쏟으며 엄마를 끌어안았습니다. 의수처럼 딱딱해진 엄마의 가슴은 제대로 된 숨을 내뱉지 못했습니다. "나도 엄마 많이 사랑해." 찌르르르 소리가 한동안 이어지더니 사그라들었고, 이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장례식을 치러 죽은 이의 넋을 기린다고들 합니다. 상주는 장례식장에서 조문객을 맞아 고인의 지난날을 함께 추억한다고 하지요. 하지만 엄마의 장례식은 치러지지 않았습니다. 이모는 엄마의 시신을 장례식장이나 병원으로 보내지 않고 얼굴에 흰 천만 올려놓았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웃과 이모의 친구가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한두 명씩 안방으로 들어가 엄마를 보고 고개를 숙인 뒤 거실로 돌아와 이모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들은 모두 이모와 거푸집으로 찍어낸 것처럼 닮아 있었습니다. 얼굴에는 어떠한 애환과 고통도 묻어나지 않았고, 눈은 흐리멍덩하게 빛이 바래 있었어요. 소중한 이를 잃고 슬퍼하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가면을 쓴 것처럼 보였어요.

나는 방에 틀어박혀 덜덜 떨었습니다. 엄마가 죽었다는 슬픔보다도, 무표정한 조문객을 향한 공포가 더 컸으니까요. 그렇게 자다 깨다 하다가 보니 문밖이 잠잠하더군요. 거실로 나가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방 침대도 비어 있었어요. 나는 엄마의 냄새와 목소리가 그리워져 침대에 누웠습니다. 베개와 이불에 남은 엄마의 미지근한 체온을 느끼며 흐느꼈지요. 그러다 무언가가 발을 찔렀어요.

자세히 보니 주먹만 한 유리 덩어리가 있었습니다.

나는 왜 유리 덩어리를 형광등 불빛에 비춰보았던 걸까요. 이따금 자랑하듯 결혼반지를 햇빛에 비춰보던 담임 선생님을 따라 했던 걸까요. 유리 덩어리는 반지 속 다이아몬드처럼 찬란한 빛깔을 내보였어요. 각도를 달리할 때마다 이채로운 색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게 마치 만화경을 보는 것 같았지요. 침대 하나만 겨우 들어가는 좁은 방에 봄날의 꽃밭처럼 온갖 색채가 흐드러지게 피어났습니다.

나는 그 유리 덩어리를 몰래 챙겼습니다. 엄마가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선물로 여기기로 했습니다.

선물이긴 했어요. 엄마가 그렇게 떠난 뒤에는 즐거운 일이 없었거든요.

정말 없었지요.

이모는 엄마가 죽은 뒤에도 언제나처럼 모든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나를 감당하고, 집안일을 감당하고, 생계를 감당했습니다. 엄마가 죽기 전까지 나는 이모의 무심함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내게 이모는 로봇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엄마가 하지 못 하는 일을 대신 해주는, 편리한 보모 로봇 말입니다. 이모를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녜요. 하지만 엄마에 비하면 어림없는 수준이었어요. 오랜 세월을 함께한 가전제품에 느끼는 애정에 더 가까웠다고 해야겠네요.

이모가 소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어요. 자기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여긴 적이 있었지요. 하지만 엄마 없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고등학교로 올라갈수록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모는 말 그대로 '로봇'이었어요. 나를 괴롭히는 동급생과 싸움이 붙어 학교에 불려갔을 때도, 학원비를 훔쳐 친구들과 밤늦게 놀다가 경찰에게 걸려 연락이 갔을 때도, 심지어 남자친구에게 뺨을 맞아 시퍼렇게 멍든 얼굴로 집에 돌아왔을 때도 이모는 변함이 없었어요. 조금도 흔들리거나 동요하거나 화내거나 겁먹은 기색 없이 선생님과 동급생의 부모에게 고개를 숙였고, 경찰에게 날 제대로 훈계하겠다 약속하고, 남자친구를 학교폭력위원회에 신고했어요.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두 눈으로 상대를 마주한 뒤에는 어김없이 나를 바라봤지요. 나는 그때마다 이모의 눈이 사람의 것이 아닌, 카메라 렌즈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못 본 척 방관하는 부모보다 낫다고 말하고 싶은가요. 사랑의 매라는 변명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부모보다 백배 천배 낫다고 말하고 싶은가요. 그래요. 이모는 날 대놓고 괴롭히거나 모른척하거나 내버려 두지 않았어요. 내가 필요로 하는 건 뭐든 지원했고 갓 지은 밥과 갓 세탁한 옷가지를 내줬어요. 하지만 이모는 무슨 일에도 화내거나 웃지 않았고, 내가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울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았어요. 잠깐의 포옹, 손을 잡는 것조차 거절하며 꺼렸지요.

난 단지 한마디 위로가 필요했는데 말이에요.

날이 갈수록 엄마가 그리워졌습니다. 찌르르르 웃음소리가 귀에 선했어요.

대학에 합격하자 나는 이모와 연락을 끊어버렸습니다. 일부러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에 지원했지요. 방학이 되면 사나흘 머물기도 했지만 그건 생활비와 용돈을 타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에 불과했어요. 이모는 이런 나를 붙잡지 않았습니다. 며칠 더 자고 가라던가, 반찬 챙겨가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어요. 나도 그런 이모를 붙잡지 않았습니다. 작별인사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제가 생겼습니다.

먼저, 내가 정신 나간 또라이 새끼들만 골라 사귀었다는 사실부터 밝혀야겠네요. 이모가 진저리나게 싫었기에, 끔찍했기에, 나는 이모와 반대되는 성향의 사람에게 끌리곤 했습니다. 그들은 매사에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잘 웃고 잘 울고 잘 화냈습니다. 몇몇은 자기 감정에 지나치게 빠져든 나머지 함부로 짜증을 내고 욕을 퍼붓고 주먹을 올리기도 했지요. 마지막으로 사귀었던 사람도 그러했어요. 자기에게 모진 말을 했다는 이유로 술자리에서 동기에게 주먹을 휘둘렀어요. 동기는 넘어지면서 테이블에 부딪혀 목이 부러졌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몸을 가누지 못했어요. 허리 아래에 감각이 없다고 했습니다.

애인의 집안에서 감당할 수준이 못 되었지요.

내가 이모 몰래 집을 뒤지게 된 이유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내게 입을 모아 충고했어요. 저런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네가 이렇게까지 희생할 필요가 없다고요. 그러나 나의 귀에는 어떤 조언도 와닿지 않았습니다. 애인을 향한 불편한 책임감과 뭐든 해주고 싶다는 충동을 해소하는 게 먼저였어요. 나는 귀를 닫고 입을 막고 돈이 나올 구석을 파보았습니다. 평범한 대학생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요. 은행 대출은 꿈도 못 꿨고, 사금융에 손을 대기에는 털끝 같은 이성이 남아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집을 뒤지게 되었던 겁니다. 비록 시내 외곽에 지어진 좁은 빌라였지만 우리 집이 가난하지는 않았거든요. 이모는 내가 필요로 하는 건 노트북이든 태블릿이든 뭐든 사다 줬고, 심지어 대학 등록금까지 어디서 융통했는지 모를 돈으로 처리해줬어요. 이모의 직업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지만, 어쨌든 집에 숨겨놓은 돈이 있으리라는 건 짐작이 갔습니다.

마침 집이 텅 비었더군요. 나는 이때다 싶어 집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안방의 서랍과 침대 밑, 싱크대 아래까지. 통장이 있을법한 곳은 철저히 뒤졌지만, 어디에도 통장이나 인감도장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속옷 사이에 숨겨둔 만 원짜리 한 뭉치가 전부였어요. 지쳐서 잠시 숨을 고르는데, 안방 장롱 위에 아무렇게나 쌓인 상자들에 눈이 가더군요. 식탁 의자를 끌고 와 이번에는 장롱 위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신발 상자와 가전제품 상자 너머로 보석함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엄마의 결혼 예물이 들어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미안한 마음을 품기에는 돈이 급했어요. 나는 보석함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대학 기숙사로 들고 갔습니다. 보석함에 두껍게 쌓인 먼지를 대충 쓸어낸 뒤 뚜껑을 열었어요. 비명을 지를 준비를 했지요.

보석함 안에는 내 주먹보다 큰 곤충 두 마리가 들어있었습니다

메뚜기인 것 같기도 하고 하늘소인 것 같기도 한, 난생처음 보는 모양새의 곤충이었어요. 깜짝 놀라 움츠러든 것도 잠시, 자세히 보니 그건 곤충 모양 세공품에 지나지 않았어요. 형광등 불빛 아래 비춰보니 영롱한 빛깔이 곤충보석의 몸 내부에 스며들어 번쩍거렸지요. 그걸 보자 문득, 엄마의 침대에서 주웠던 유리 덩어리가 떠올랐습니다. 나는 가방에서 유리 덩어리를 꺼내 곤충보석과 비교해보았습니다. 광채가 흩어지는 패턴이 무척 비슷하게 보였지요. 크기로 보아 무엇이든 천연 광물은 아니겠지만 값어치가 아주 없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나는 곧장 대학교 근처의 금은방을 찾아갔습니다. 당장 판매할 생각은 없었어요. 정확히 어떤 광물인지, 값어치가 얼마나 있는지 감정을 받아본 뒤에 결정할 생각이었습니다.

금은방 주인은 내가 가져온 곤충보석에 난색을 보였습니다. 나는 할머니에게 물려받았다고 거짓말했어요. 대학 입학 선물로 받았다면서요. 주인은 그 말에 더욱 난감해하며 내게 신분증을 요구했습니다. 팔 것도 아니고 감정만 받을 생각에 나는 의심 없이 학생증을 내밀었습니다. 주인이 보석을 살펴보러 감정실로 들어간 사이,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30분이 지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감정실이 아니라 금은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입니다. 방금 가게 안으로 들어선 이모가 나를 빤히 쳐다봅니다. 금은방 주인이 어떻게 알았는지 이모에게 연락했던 겁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요. 여기는 집 근처도 아닌데 어떻게 금은방 주인이 내 이름만 보고 이모에게 연락했겠어요. 그러나 주인은 내 눈치를 보더니 곤충보석을 이모에게 돌려줬습니다. 애가 아는 게 없어서 그런 거니 너무 나무라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지요.

이모가 곤충보석을 품에 안는 모습이 기억납니다. 마치 제 새끼인 양 조심스러운 손길로 보석 표면을 쓸어내렸지요. 이모는 나를 보지도 않고 주인에게 말했어요. "저도 압니다. 제가 알아서 타이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모가 화낼 리 없다는 걸 압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이모는 목석처럼 차가운 얼굴로 나를 상대하니까요. 하지만 그날은 날 보는 눈빛에 다른 감정이 깃들었던 것 같아요.

"선아야. 이모가 나중에 연락할 테니 그때 얘기 좀 하자. 알았지?"

다음날 이모는 내 통장에 지금껏 본 적 없는 어마어마한 수준의 돈을 보내왔습니다. 나야 대놓고 좋아할 수 없었어요. 이렇게 돈까지 받아버린 마당에, 나는 이제 이모의 연락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나는 애인에게 돈을 빌려줬고(그는 갚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습니다) 며칠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꼬박 일주일이 지나서야 이모는 내게 연락했습니다. 문자메시지 대신 전화를 걸었지요. 여보세요, 까지 들었을 때는 평소답다고 생각했는데 내 이름을 성까지 붙여 부르는 걸 듣고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모는 길게 한숨을 내쉰 뒤에 말을 이어갔습니다.

"이모가 내일은 시간이 될 것 같으니까 점심이나 같이 먹게 시간 비워둬. 괜히 싫다고 빼지 말고, 도망치지 말고. 그리고 돈이 급하면 그냥 솔직하게 말을 하던가. 찌질하게 도둑질이 뭐니? 내가 그것 때문에 쪽팔려서 정말 살지를 못하겠다."

내가 할말을 잃고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이모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요.

"아무튼, 내가 내일 너네 학교로 직접 갈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란 뜻이야. 뭐 먹을지 생각이나 해둬. 거기 대학가잖아. 맛있는 데 없어? 야, 넌 젊은 애가 뭐 먹고 싶은 것도 없니? 알았어, 이모가 알아서 정할게. 나중에 뭐라 그러지 마라.“

전화가 끝난 뒤에도 내 머릿속에는 이모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계속해서 떠돌았지요.

 

 

 

 

 

3.

 

 

다음 날 나는 다시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어제 약속한 대로 이모가 교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대충 묶어 부스스하던 머리칼은 어디 가고, 부드럽게 곱슬대는 머리칼이 어깨를 가볍게 덮고 있었습니다. 우중충한 진회색 티셔츠 대신 개나리 노랑 원피스와 옅은 회색 가디건을 걸쳤더랬죠. 손에는 어디서 사 왔는지 모를 작은 꽃다발이 들려있는데, 정작 얼굴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습니다. 이모는 나를 보자마자 혀를 차고는 웃는 척했어요. "김선아." 하며 절뚝거리며 다가와 내 머리칼을 손으로 거칠게 빗어 내렸어요.

"너 학교에서 먹고 잔다고 해서 너무 안 꾸미는 거 아니야? 머리는 제대로 빗고 다녀야지."

나는 이모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습니다. 무서웠어요. 꺼림칙하고 불편했어요. 나는 동의한 적 없는 몰래카메라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어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하지만 망할 돈… 통장에서 빠져나간 그 돈이 나의 양심을 자극했습니다.

우리는 그날 오므라이스를 먹으러 갔답니다.

뜬금없이 웬 오므라이스냐고요? 간단해요, 이모 역시 엄마처럼 아팠기 때문이에요.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나는 오므라이스 앞에서 힘겹게 숟가락을 드는 이모를 보며 그 사실을 깨달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모와 눈을 맞췄고, 이모는 뭐 구경났냐며 화를 냈지요.

"빨리 먹기나 해. 이러다 식겠다.“

이모는 오므라이스를 먹는 내내 이런 음식은 처음 먹어본다며 짜증인지 비아냥인지 아니면 그냥 꺼내는 소리인지 모를 말을 해댔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우리가 함께 살 때 이모는 내 밥상을 챙길 뿐 자신은 먹지 않았어요. 매번 입맛이 없다고 말하던 게 기억이 났습니다.

정말 입맛이 없었던 건지 궁금해지더군요.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카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제는 이모의 몸이 불편하다는 게 확연히 눈에 보여, 나는 일부러 푹신한 소파 자리로 이모를 안내했습니다. 이모는 부산스레 카페 곳곳을 돌아봤어요. 조명을 가리키며 집 인테리어를 바꿀 생각이라고 말했지요. 혼자서 이런저런 얘기를 꺼내놓다가 내가 겁먹었다는 걸 깨닫고 미간을 찡그렸지요.

"이해 좀 해라. 내가 번화가에 나온 건 오랜만이라 좀 들떴나 보다."

이모는 몸을 숙여 맞은 편에 앉아있는 나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금은방 다녀오고서 내가 집에서 생각을 좀 해봤는데." 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습니다. "그래…. 너도 어른이고. 내가 죽으면 유산은 모두 네 차지일 테니 우리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나 싶다. 근데 있잖아, 이게 너한테나 나한테나 굉장히 민감한 문제거든? 네가 믿어줄지도 모르겠고 말이야. 그러니까 이모가 선택지를 줄게. 거짓말을 조금 섞어서 얘기해줄까, 아니면 사실대로 모두 얘기해줄까?"

나는 이모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조금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모가 뭘 감췄던 건지, 대체 뭐가 민감한 문제라는 건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내 신경을 건드린 말은 따로 있었습니다.

"이모가 말하는 '우리'에 나는 포함되지 않는 거야?"

이모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 너는 포함이 안 돼."

"엄마는? 엄마는 이모의 '우리'에 들어가?"

"그래. 그래서 이모와 네 엄마는 그 점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어. 너는 '우리' 같지 않으니까.”

이모는 그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코를 들이켰습니다. 가까스로 눈물을 참는 것 같은 모습에 나는 이모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과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내 발이 지레 겁먹고 움직이기 전에 내가 먼저 말했어요. "그게 다 무슨 소리인지 똑바로 말해봐.“

이모는 우선 엄마와 자신의 관계부터 밝혔어요.

고향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고향에 창궐했던 어떤 병에 관해 이야기했어요.

아무도 살 수 없게 되어버린 고향을 떠날 때의 참담함과 한국으로 향하는 이민선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이야기했어요.

이민선에서 낳은 이모와 엄마의 아이, 나의 언니 혹은 오빠가 되었을지 모를 형제자매가 어떻게 죽었는지 이야기했어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고 더듬이와 날개에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거렸대요. 숨이 턱턱 막히고 오열이 새어 나와 서로를 끌어안고 위로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대요. 그러다 살기 위해 약을 먹었다고 했지요. 약을 먹고 나니 영롱하게 굳어버린 아이들을 보고도 아무 감정이 들지 않더라고 말했지요.

한국에 도착해서 엄마와 이모는 인간처럼 보이기 위해 비싼 값을 치르고 모습을 바꿨대요. 외골격을 비롯해 체성분을 말랑말랑하게 변형한 뒤 붕어빵 찍듯 인간과 흡사한 모양새로 성형했대요. 그렇게 서로 비슷비슷한 얼굴과 체형을 가지고 인간사회에 섞여들었대요.

나는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얼음이 다 녹은 음료만 내려다보았습니다.

이모는 할 말이 더 남아 있었습니다.

 

 

*

 

 

세상에는 공해병이라는 게 있습니다. 산업 활동의 여러 부산물이 독이 되어 사람을 공격하는 형태의 병이지요. ‘이타이이타이병’은 광산에서 불법 배출한 카드뮴에 중독되어 생긴 병이고, 뉴욕의 러브 커넬 지역은 지하에 매립한 산업폐기물 때문에 많은 아이와 주민이 피해를 호소했습니다.

당신의 책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억하나요?

당신의 여자 주인공이 사는 시골 동네에 최첨단 화학 공장이 들어섭니다. 마을은 공장을 반겼어요. 젊은이는 모두 도시로 떠나버린 퇴락한 농촌 마을에 공장으로 말미암아 일자리가 늘어나고 지역경제가 되살아났으니까요.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마을 전역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관절염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손발부터 시작된 통증은 시간이 지나며 무릎과 팔꿈치, 어깨와 골반으로 이어졌지요.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자리에 누워 끙끙 앓았어요. 화학 공장이 마을의 식수원인 저수지에 무단으로 방류한 폐기물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증상이 시작될 무렵에 마을 사람들은 공장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지방에는 몇 년에 한 번씩 풍토병이 돌곤 하는데 초기 증상이 지금의 병과 비슷했기에 금방 지나갈 감기 정도로 여겼지요. 하지만 관절염은 쉬이 지나가지 않았고 몇몇 현명한 이들이 식수원이 오염되었다는 걸 알아챘을 때는 너무 늦어버린 뒤였습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까지 앓아눕는 바람에 공장마저 폐쇄된 상태였어요.

며칠이 더 지나 첫 사망자가 나옵니다.

5살. 마을에서 가장 어린아이. 꽃과 잎사귀를 으깨 엄마아빠의 관절에 붙여주던 작은 여자애의 손발이 유리처럼 투명하고 단단하게 굳어버렸던 겁니다.

한 번 광물화가 진행되니 손쓸 겨를도 없이 병세가 심각해졌습니다. 아이가 겁에 질려 울고불고 몸을 비틀며 경기할 때마다 덜 자란 팔다리와 골반과 어깨는 찬란한 광채를 내뿜으며 굳어갔습니다. 마침내 아이의 가슴마저 굳어 숨이 사라졌을 때, 증상은 아이의 부모에게 옮겨갔습니다. 몸 일부가 광물로 변하는 증상이 전염병처럼 이웃에서 이웃으로, 집에서 집으로 번졌습니다.

병이 마을을 완전히 잠식한 뒤에야 공장은 해당 사태에 자사의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했습니다.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체내에 축적된 화학물질을 몸 밖으로 배출할 방법은 찾지 못했지만 병을 가속화하는 요인은 찾아냈다, 바로 '감정'이다, 감정의 바탕이 되는 몇몇 호르몬이 체내에 쌓인 화학물질의 특정 성분을 자극해 사람의 육체를 보석처럼 굳어지게 만든다, 도파민, 옥시타신, 페닐에틸아민, 타이로신, 아드레날린, 등등

사람을 울고 웃고 화내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환자를 죽여요.

공장은 감정 중추를 마비시키고 호르몬 분비를 조절하는 약을 개발해 마을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했습니다. 한 번 굳어버린 몸을 되돌리지는 못해도 병이 더 진행되지 않도록 막는 효과가 있었지요. 공장은 오염된 저수지를 되돌릴 방법이 없다며 마을 주민에게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를 권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정든 고향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광물화된 신체 부위가 비싼 값에 팔려나갔어요. 사람들은 가족의 시신을 팔아 삶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여자 주인공도 막둥이의 신체 일부를 팔아 도시에 정착했지요. 약 때문에 매일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하고 묵묵히, 꾸역꾸역 밥을 억지로 넘기는 것처럼 삶을 이어갔습니다.

몇 년이 흘러, 당신의 여자 주인공은 우연한 계기로 영혼의 반쪽을 만나게 됩니다.

낯선 이를 향한 경계심도 잠시, 당신의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과 안면을 트고 말을 트고 함께 산책하면서 마비된 감정에 균열이 가는 것을 느낍니다. 당신은 여자 주인공의 변화를, 두 주인공이 자주 산책하던 호수공원에 흐드러지게 피었던 연꽃에 비유했지요. 말라비틀어진 진흙에 물을 붓자 안에 숨어있던 씨앗이 발아했다고요. 싹이 트고 무성한 초록이 고개를 내밀었고 마침내 꽃이 피어났다고요.

엄마도 갓난아기인 나를 보고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요.

그해 서울의 겨울은 무척 추웠다고 합니다. 열흘간 평균 기온이 영하 15도를 웃돌았고 동파나지 않은 집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어요. 고속버스 터미널 건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건조하고 뜨거운 공기가 뺨을 덥혔지만, 창문 근처에 서면 입김이 사방으로 흩어졌다고 했지요. 엄마와 이모는 다른 지방에 정착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였습니다. 평소 같으면 불편한 몸을 고려해 기차를 탔겠지만 그날따라 기차표가 모두 팔리는 바람에 버스터미널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버스를 타기 전 화장실에 다녀온 엄마를 기억하며, 이모는 내 앞에서 쓰게 웃었습니다.

엄마는 아기를 안고 있었대요.

작고 쭈글쭈글하고 배에는 탯줄이 그대로 달려 있는 갓난아기였대요, 나는.

이모는 머플러를 넓게 펼쳐 내 몸을 감싼 뒤 행인에게 경찰서가 어디 있는지 물었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나를 놓지 않더래요. 무심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흥분한 어조로 조금만 있다가 가자, 조금만 있다가, 그랬대요. 인간 유충은 참 신기하게 생겼다면서요.

엄마의 '조금만 있다가'는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었습니다. 이모는 더 참지 못했습니다. 우리 상황에 어떻게 애를 키우겠냐며, 아기 문제를 확실히 매듭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모가 나를 빼앗아 든 순간 엄마는 눈물을 흘렸어요. 이모 몰래 약을 끊었던 겁니다. 엄마는 지구인처럼 생긴 몸으로 지구인처럼 울었어요. 지구인처럼 고개를 젓고 지구인처럼 애원하며 팔을 내뻗었어요.

"나 더는 아무것도 못 느끼면서 살고 싶지 않아. 더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제발 내가 이 감정을 잊게 만들지 말아줘. 제발 내가 뭐라도 남기게 해줘."

엄마는 굳어가기 시작한 손가락으로 이모의 옷자락을 붙들었습니다. 기어코 나를 뺏어가 품에 안았습니다. 이모는 차마 안된다고 말하지 못했어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면서도 차마 엄마에게서 나를 빼앗아올 수가 없었대요.

그렇게 나는 김선아가 되었습니다.

 

 

이모는 모든 말을 토해낸 뒤 눈을 감았습니다. 덜덜 떠는 손으로 머그잔을 잡아 몇 모금 마시다가 제대로 내려놓지 못해 테이블에 엎지르고 말았지요. 놀란 직원이 걸레를 들고 다가와 테이블과 이모의 원피스에 묻은 커피를 닦았습니다. 난 제자리에 멍하니 앉아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어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그저 보기만 했습니다.

질 나쁜 농담을 들은 기분이었습니다. 속이 불편했지요. 더 웃긴 건 말이어요, 이모와 엄마가 외계에서 왔다는 사실보다 내가 엄마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는 것이었어요. 왜 아빠에 관해 물을 때마다 말끝을 흐렸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지요. 나는 내가 사생아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보다 더 복잡한 사정이 숨어있었던 겁니다.

나는 당신의 책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처럼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어제오늘 이모가 갑자기 감정적으로 바뀐 이유를 알겠더군요. 엄마처럼 약을 먹지 않았던 겁니다. 이모는 앞서 자신의 원래 생김새가 원숭이 같은 영장류보다 메뚜기나 귀뚜라미 같은 절지류와 닮아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 눈앞의 상대가 이질적이고 역겹다고 느껴야 마땅한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금껏 날 속였던 거냐고 화라도 내야 정상일 텐데, 이상하게 눈에 열이 올랐어요. 나는 이모에게 말했습니다.

"약 가져왔어?"

"가방에 있어. 나중에 먹을 거야."

"그냥 지금 먹어, 얼른 먹으라고. 안 먹으면 죽는다며."

"당장 안 죽어. 넌 이모가 슬픔에 빠져있을 틈도 안 내주니? 정말 야박하다, 야박해."

이모는 툴툴대며 원피스에 묻은 커피 얼룩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이거 귀한 건데 아깝게 되었네, 하며 한참 옷감을 쓸어내리다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나의 얼굴과 몸을 훑어보다가 "정말 이상하지 않니."하며 한숨을 내쉬었지요.

"감정이 돌아오면 널 끝없이 미워하게 될 줄 알았어. 너만 아니었으면 그이가 여전히 내 옆에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렇지도 않네. 계속 걱정만 하게 되네."

나는 이모의 애도가 끝이 나기를 함께 기다리다가 약을 먹였습니다. 이모의 목울대가 넘어가는 걸 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용기가 생겼어요.

 

 

애인은 내가 마련한 돈으로 보석금을 낸 뒤, 또 사고를 쳤습니다. 역시나 내게 손을 빌렸지만 더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아 나는 이별을 통보했습니다. 그가 구치소에 수감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있었어요. 한동안은 악몽을 꿨어요. 거대한 메뚜기인지 여치인지 방아깨비인지 모를 곤충이 갓난아기인 나를 끌어안고 분유를 먹이는 꿈이었어요. 수억의 겹눈으로 나를 바라봐요. 털 달린 앞발이 내 뺨을 어루만지고, 중간발은 내 기저귀를 갈고 있어요. 날개 아래서 소리가 나요. 찌르르르. 찌르르르.

처음 몇 밤은 징그럽고 끔찍한 마음에 발버둥 치다가 잠에서 깨기 일쑤였지만, 꿈이 날마다 이어지니 불쾌감은 희석되고 동정하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잠에서 깨었을 때 문득 엄마가 보고 싶어져서 나는 첫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어요. 이모와 함께 집을 뒤져 마지막 소풍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찾아냈지요. 우리는 어깨를 붙이고 함께 팝콘을 먹으며 테이프를 보았답니다. 좁은 화면 속에서 휠체어에 앉아 귀뚜라미처럼 웃는 엄마를 보았어요. 풀숲에서 마구 뛰어다니다 넘어져서 엉엉 우는 어린 나를 보았어요.

영상이 끝났을 때 나와 이모의 관계는 조금 달라져 있었습니다.

살갑고 정이 넘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나는 지금도 그게 우리의 최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걱정되는 점이 있다면 바로 이모의 몸 상태였어요. 나와 교감하겠답시고 약을 끊는 짓은 그만뒀지만, 모래가 파도에 쓸려가듯 조금씩 조금씩 상태가 나빠지는 게 눈에 보였어요. 미래를 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이모가 엄마만큼 상태가 나빠진다면 내가 병수발을 들어야 할 테니까 말이에요. 그 날이 가깝지는 않을 거라 낙관했지요. 엄마는 약을 끊고 11년을 버텼으니, 이모는 배로 버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내 인생의 궤적을 여러 차례 함께할 것이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죽음의 이유가 병사만 있는 건 아니더군요.

 

 

 

 

 

4,

 

 

한참 기말고사를 보던 중에 조교가 강의실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나를 불러 집에 큰일이 일어났다고 알렸지요. 시험 때문에 무음으로 돌렸던 스마트폰에 이모의 부재중 전화가 가득했어요. 급하게 짐을 챙겨 대학교 건물을 나서면서 이모에게 전화해보니 낯선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는 무감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병원이 아니라 집으로.

집에 도착하니 10년 전과 별다를 것 없는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실에 가득 들어찬 굳은 얼굴, 조금 열려있는 안방 문,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누군가.

이모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어요.

나는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가려다 발을 헛디뎠습니다. 얼굴부터 넘어졌고 코피가 흘렀어요. 이모의 친구 혹은 이웃사촌이 내 몸을 일으켜 식탁 의자에 앉혔습니다. 코피와 눈물로 범벅이 된 내 얼굴을 더운 수건으로 닦아주고 오열 때문에 떨리는 내 등을 조심조심 쓸어내렸지요. 11살의 나였다면 그들의 친절이 두려워 방에 틀어박혔겠지만, 이제는 압니다. 나를 둘러싼 그들을 알아요. 모두 이모와 엄마 같은 사람들이지요. 고향을 버리고 지구라는 낯선 곳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동포의 죽음 앞에서도 감히 슬퍼하지 못하고 약이 제 기능을 해주길 바라야 하는 사람들.

계단참에 널브러진 이모를 발견한 사람은 입국 브로커인 박 아저씨였습니다. 전화를 받지 않아 찾아갔더니만, 이모가 목이 꺾인 채 계단참에 누워있었대요. 그들의 피는 지구인과 달리 투명해 계단 곳곳은 물을 엎지른 듯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내가 살던 빌라는 이모와 엄마의 동향 사람만 거주하는 곳이었습니다. 서로의 비밀을 지키고 동향을 살피기 위해 모여 살았던 것이지요. 대부분 거동이 불편해 집에 머물렀고 교류는 전화로 대신했어요. 사고가 일어났을 무렵, 이웃들은 모두 자기 집에 있었는데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만 났을 뿐 사람 목소리는 조금도 듣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게 이모가 오래 아프지 않았다는 뜻이기를 간절히 바랐어요.

이모의 굳은 손을 하염없이 매만지며 제발 그랬기만을 바랐습니다.

이틀의 애도 기간이 끝나고, 박 씨 아저씨는 이모를 이불에 담아 어디론가 데려갔습니다. 내가 함께 가겠다고, 가족으로서 이모 곁을 지키겠다고 성을 냈지만 대놓고 말리더군요. 멀쩡한 사람에게 보여줄 꼴이 못 된다면서요. 사흘이 지나 조문객도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갔을 무렵, 박 씨 아저씨가 다시 집을 찾았습니다. 이모의 사망 신고서와 작은 유골함, 목걸이나 팔찌 따위를 넣을법한 작은 벨벳 상자를 들고 있었지요. 유골함은 방금 화장을 끝냈는지 뜨끈했고 비린내를 풍겼어요. 벨벳 상자 안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것처럼 보이는 발가락 보석이 담겨 있었어요. 이모가 왜 그리 갑자기 떠나야 했는지 알겠더군요.

나는 엄마와 나의 형제자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이모의 발가락을 형광등 아래 비춰보았습니다.

눈이 흐릿해지고 목이 멜 정도로 아름다웠지요.

박 씨 아저씨 말로는, 그들이 죽으면 브로커가 광물화된 신체 대부분을 받아가는 게 관례라고 해요. 하지만 이모는 비교적 초기에 죽어 광물화된 부위가 적은 데다 자식인 내가 있으니 내줄 만큼 내줬다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빠른 시일 안에 이 집에서 나가줬으면 한다고요.

그들의 삶에서 나는 결국 이방인이었던 것이지요.

갓난아기일 적부터 보아왔고, 그렇기 때문에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던 이방인이었지요.

나는 몸을 추스른 뒤 그들의 뜻대로 집을 정리했습니다. 가구는 모두 버렸고 필요한 것만 챙겨 새집으로 옮겨갔습니다. 휴학을 신청한 뒤 나의 일상은 굉장히 단순해졌어요. 자고 밥을 먹고 술 마시고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지요. 가끔 옛집에서 챙겨온 것들을 훑어보며 추억에 빠져들기도 했는데, 정말 유치하게도 그때마다 나 같은 비극의 주인공은 어디에도 없을 거라며 몸부림을 쳐댔습니다. 친구가 찾아오는 날도 있었어요. 함께 맛있는 걸 먹고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문득 이렇게 얘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었어요.

넌 모르지.

내 엄마와 이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르지. 그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날 위로하려고 들지.

자조 모임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해외 드라마를 보면 가끔 나오지 않나요. 빈 강당이나 체육관에 둘러앉아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그런 모임 말이에요. 그들의 가족이었던 게 나 혼자뿐이 아니었다고, 이런 고통을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술에 취한 그 밤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인터넷에 검색하게 되었던 겁니다.

키보드를 치는 순간에도 나는 헛짓거리라며 스스로를 비웃었어요. 그 병이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병임은 확실하고, 제가 알기에 그들은 시신이 악용되는 걸 막기 위해 자기 존재를 숨겼으니까요.

그런데 검색이 되더군요.

보석이 되는 병. 키라키라 병.

인터넷 세상 어딘가에서 이 병은, 제가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을 달고 이야기 소재로 쓰이고 있었어요.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일본의 순정만화 「하나하키오토메」에는 '짝사랑에 빠지면 꽃을 토하는 병'이 나옵니다. 여러 네티즌은 만화의 설정을 로맨틱한 시선으로 바라봤고 자신의 창작활동에 차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꽃을 토하는 병, 즉 하나하키병은 소재가 되어 여러 SNS와 창작 커뮤니티에서 유행하게 되었어요.

엄마와 이모가 앓던 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의 고향에서는 광물화증이라 불리던, 제대로 된 치료법 없이 현상유지만 가능하던 병이 인터넷 세상에서는 비극적인 사랑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이런 식이에요. 연인 혹은 본인이 키라키라 병에 걸립니다. 병에 걸린 이는 자신의 수명을 줄이는 짓인 걸 알면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손발이 얼마나 굳어가던, 몸을 가누기 힘들어지던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사랑을 속삭이지요. 마지막 날에 이르러 환자는 연인에게 사랑을 속삭인 뒤 완전한 보석의 모습으로 광물화됩니다. 보석 종류에 따라 설정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질투를 강하게 느낄수록 흑진주가 되어가고, 실연을 강하게 경험할수록 아쿠아마린, 나이가 어리면 오팔, 그런 식입니다.

처음에는 우연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는 온갖 병이 있으니 거기서 따온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연성'이라 지칭하는 수많은 아마추어 창작물은 어떠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키라키라병은 수질 오염으로 인해 생기는 공해병이다, 치료법은 없다, 감정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환자는 감정을 억제하는 약을 먹는다. 모두 이모가 내게 말했던 것들이었습니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모두 깨부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서, 이 말도 안 되는 '소재'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찾아봤습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책 한 권이 나오더군요.

그래요. 바로 당신의 책입니다.

당신은 이 책을 3년 전에 썼습니다. 출간 당시에는 그저 그런 로맨스 소설로 치부되었지만, 작년에 어떤 아이돌 가수가 자신의 SNS 계정에 책의 내용이 너무 슬프다며 글을 올린 게 시발점이 되었어요. 아이돌의 팬덤은 당신의 책을 구매하고는 #반짝반짝_독서인증 이라는 해시태그를 유행시켰죠. 책의 핵심 소재인 '병'이 인터넷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광물화증은 키라키라병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모니터에 떠오른 당신의 책 표지를 보며 나는 이상한 기시감에 빠져들었습니다. 어디서 본 듯했지요. 아마 서점, 아니면 학교 도서관, 그도 아니면 옛집의 책장. 이모의 책을 어떻게 처분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종이상자에 넣어놨던 게 기억났습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박스를 열어 뒤져보니 정말 당신의 책이 있었지요.

책은 모서리가 낡아 너덜너덜했어요. 표지에 커피 자국이 나 있었고 내지가 물에 젖어 오그라든 흔적이 남아 있었지요. 어째서 이 책이 이모의 짐에서 나온 건지 의아해하며 나는 표지를 넘기고 목차를 넘겼습니다. 허리를 잔뜩 수그린 자세로 당신의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자 머리가 지끈거렸고 두 시간이 지나자 입안이 바싹 말랐지만 난 먹지도 마시지도 쉬지도 못하고 계속 당신의 책을 읽었습니다.

어떻게 보아도 병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쓴 것이 분명했어요. 행성은 시골 마을로, 상수도 정비시설은 화학 공장으로, 행성 간 이민은 이사로 바뀐 것만 제외하면 모두 이모에게 들었던 대로였으니까요. 심지어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너무나 세세해 눈 앞에 펼쳐질 듯한 고향의 풍경이라던가, 관절 마디마디가 너무 가려워 긁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는 병의 초기 증상 같은 것 말입니다. 나는 당신의 책을 불태우는 대신 노트북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구글 검색에 따르면 당신은 파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데뷔작인 『반짝임에 이르는 병』을 비롯해 한 권의 장편 소설을 더 출간한 뒤 지금은 어느 인터넷 매체에서 칼럼을 연재하고 있지요. 또한, 당신은 블로그를 운영합니다. 한 달에 두세 번 주기로 책이나 소설 홍보를 목적으로 글을 올립니다. 가끔 일상사도 섞여 있어요. 집 근처 호수공원의 풍경이나 흐드러지게 피어난 연꽃, 고양이의 장례식, 결혼 10주년을 맞이해 새로 맞춘 결혼반지.

블로그 속 당신은 평범해 보였어요.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감정이 마비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그들의 사정을 잘 아는 동지를 찾아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마땅한데, 나의 머리와 가슴은 용암을 삼킨 것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기만 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그들의 사정을 로맨스 소설 따위로 포장해 세상 밖에 내놓았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엄마와 이모가 어떻게 죽었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어떻게 감히.

나는 블로그 프로필에 적힌 당신의 메일 주소로 용건을 적어 보냈습니다. 책에 관해 꼭 나눠야 할 얘기가 있다고 말입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메일 마지막에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남겼지요. 연락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어요.

당신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내게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5.

 

 

당신은 성치 않은 이빨로 용케 복숭아를 먹어치웁니다. 포크에 손도 대지 않는 나를 이상하게 보고는, "안 먹을 거면 어쩔 수 없죠."라며 쟁반째 가져갑니다. 복숭아를 마저 먹어치운 당신은 내가 테이블에 올려뒀던 당신의 책을 집어 듭니다.

"아무리 그래도 책을 쓴 사람 앞에서 이러는 건 너무하지 않나요."

나는 다시 묻습니다. "왜 썼죠?"

"이유 같은 건 없어요. 그냥 써야 할 것 같아서 썼어요. 선아 씨가 내 가족도 친구도 아닌데 내가 뭘 쓰든 말든 신경 쓸 자격이 있나요?"

"자격 있어요."

나는 내 비밀을 밝혀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나지만, 모든 패를 보여줘야 하는 상황임을 압니다.

"내 엄마와 이모가 이 병으로 고통받다 죽었어요. 끔찍하게 죽었다고요. 그런데 당신은 그 병을 예쁘고 사랑스러운 로맨스로 포장해버렸죠. 그들 생각을 눈곱만큼이라도 하긴 해요? 애초에 그들은 어떻게 알게 된 거죠?"

당신은 느긋한 얼굴로 소파에 등을 기댑니다.

"그들이라고 하면 너무 막연하지 않나요. 나는 베짱이라고 불렀어요. 왜 웃을 때 그런 소리가 나잖아요. 찌르르르, 찌르르르,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개미 할 테니 당신은 베짱이 하라고 했지."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잖아요." 나는 화가 치밀어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킬킬대며 웃고 떠드는 당신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게 얼마나 민감한 문제인지 몰라요? 밖에서 그 병을 뭐라고 하는지 아느냐고요? 키라키라병이래요, 너무 낭만적이고 슬퍼서 생각만 해도 눈물이 다 난다더군요! 그 병은 당신 뭣대로 소설에나 써먹으라고 있는 소재가 아니에요, 실제로 고통받는 사람이 밖에 널리고 널렸다는 걸 알잖아요!"

"키라키라 병… 거 참, 진짜 오랜만에 듣네요." 당신은 그렇게 말하며 콧방귀를 뀝니다. 별거 아니라는 듯 눈을 굴리며 팔짱을 낍니다. "선아 씨 말대로 사람들이 그렇게 써먹는다는 거 압디다. 근데 들어봐요, 내가 알았을 때는 이미 인터넷에 퍼진 뒤였고 법적으로 해결할 상황도 못 되었다고요. 패러디라고 알아요? 저작권이 애매해요. 지금은 상업적으로 쓰는 걸 막는 게 전부예요. 그러니 선아 씨에게는 무척 유감이라고 말해야겠네요."

"유감이라는 말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잖아요! 당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모욕한 건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당신 뒤의 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여보." 가래 낀 목소리는 분명 당신을 여보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황급히 고개를 돌립니다.

"어, 희야… 깼어요?"

"진작 깼어. 더 받아줄 생각 말고 그냥 문 열어. 내가 얘기해볼게."

당신은 조금 뜸을 들인 뒤 대답합니다.

"자기는 지금 피곤하잖아요. 세수도 못 해서 꼴이 말이 아닌데 그 얼굴로 어떻게 손님을 맞아."

방문 너머 희는 기침을 터뜨리다가 가래를 모아 뱉습니다. 더욱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합니다. "선정이랑 현아 딸이잖아. 당연히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해야지."

나는 당신의 희가 엄마와 이모에 관해 알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랍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당신 얼굴만 빤히 보게 됩니다. 당신은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지요.

"아내가 선아 씨를 만나보고 싶대요. 잠깐 괜찮죠?"

내가 그러겠노라 말하기도 전에 당신은 안방으로 향하는 문을 엽니다. 기억에 박힌 풍경이 다시금 되살아납니다. 방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한 퀸사이즈 침대와 침대 주변을 에워싼 전자기기들. 협탁에 놓인 빨대 달린 물통과 사탕. 그리고 침대에 누워있는 무언가. 당신이 아내라고 말했음에도 내가 눈앞의 무언가를 인간이라 생각하지 못하는 건 얼굴과 머리 두상이 기괴하게 일그러졌기 때문입니다. 마치 메뚜기 머리에 고무로 만든 머리탈을 씌운 것 같은 모양새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당신의 희가 웃고 있다는 건 알아요. 얇은 여름이불이 흔들리며 찌르르르 찌르르르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으니까요.

"세상에." 희는 그렇게 말하며 붕대로 감긴 중간발을 들어 올렸습니다. "내 발 아래서 아장아장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컸대? 나 기억해? 내가 너 입으라고 옷도 지어줬는데. 맞아, 내 정신 좀 봐라. 내 꼴이 이 모양인데 네가 어떻게 기억을 하겠니."

나는 머리끝까지 올랐던 열이 단숨에 식어내리는 걸 느낍니다. 당신의 희 앞에서 애써 웃습니다. 말꼬리를 늘이며 어색한 말투로 대답합니다.

"아뇨… 옷 보내주신 거 기억나요. 노란색 블라우스 맞죠? 저 어릴 때 그거 엄청 입고 다녔어요."

"내가 그때는 손을 제대로 써먹을 줄 알아서 곧잘 옷을 지어 입었거든. 천이 남으면 친구들에게도 보내주고. 현아 일은 정말 안 됐어. 나도 찾아가고 싶었는데 몸이 이래 먹어서 말이야." 희는 힘없이 웃다가 말합니다. "지금 몇 살이지? 고등학교는 졸업했나?"

"대학교 다녀요. 지금은 휴학했고요."

나는 당신이 내온 간이의자에 앉습니다. 희는 나의 무릎에 자신의 중간발을 올려놓습니다. 희의 손은 내 손과 무척 다르게 생겼지만, 엄마나 이모처럼 차고 딱딱해요. 내가 뭐라 말도 못 하는 걸 보며 희는 당신에게 말하지요.

"여보. 주스 두 잔만 부탁해. 나랑 선아 거."

당신이 방을 나가자 희는 나를 향해 몸을 틀려고 합니다. 나는 괜찮다고, 그냥 누워 계시라고 말했어요. "제가 더 가까이 가면 되잖아요. 그렇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희를 향해 몸을 기울입니다. 가까이서 보니 알겠어요. 희는 당신처럼 늙었고 당신처럼 주름졌어요. 엄마와 이모도 할머니가 되었다면 이렇게 변했을까 궁금해지더군요.

나는 말합니다. "…아까 남편분께 더 받아줄 생각 말라고 하셨잖아요."

"맞아. 듣고 있자니 어이가 없어서 원." 희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젓습니다. "그 소설 주인은 나야. 그 영감탱이가 아니라 나라고. 뭘 지 혼자 쓴 척을 하고 앉아있어? 안 먹어도 될 욕이나 혼자 먹고 말이야 오래 살려고."

마침 당신이 방 안으로 들어옵니다. "안 먹어도 될 욕은 무슨. 이미 당신 병수발 들면서 욕을 한 사발은 얻어먹었어요. 난 아마 100살도 넘게 살 거야." 당신은 그렇게 말하며 주스가 든 빨대 컵의 빨대를 희에게 물립니다. 컵이 바닥이 보이자 빨대를 빼내고 희의 입가를 정성껏 닦아줍니다. 희는 입맛을 다시더니 깊은 한숨을 내뱉었지요.

"있지, 내가 아니면 이 인간은 책의 치읓도 모르고 살았을 거야. 은행에서 숫자나 놀리던 사람이거든. 그나마 내가 얘기하는 거 받아 적어 글귀라도 트였던 거지, 아니었어 봐. 치읓도 모자라 지읒도 잊어먹었을걸? 그래도 나 덕분에 작가 소리 듣고 어때, 좋지?"

당신은 열이 오른 얼굴로 토라진 티를 냅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나도 젊을 적에는 책 꽤나 읽었어."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고개를 저어 몰아냅니다. 희의 차게 식은 중간발을 내다보다가 마침내 입을 엽니다.

"…그러면 그 책은 두 분의 연애담이었던 건가요?"

"노온픽션이지." 희는 일부러 발음을 늘어뜨립니다. "논픽션이래서 각색이 아주 안 들어가는 건 아니야. 나랑 이이가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말 그대로 할머니 할아버지였거든. 그래도 마음만은 젊게 지냅시다, 해서 여기저기 쏘다녔는데 나중에 와서 생각해보니 이걸로 글이나 한 편 써보자, 그랬던 거지. 이래 보여도 여기 오기 전에는 문학에 진심이었어 내가. 근데 다 쓰고 보니까 노인 얘기는 영 아니더라고. 그래서 나이를 낮췄어. 젊은 사람 보기에 낡은 티가 났을 텐데, 어때? 괜찮았나?"

"괜찮았어요." 나는 당신과 앞서 나눈 대화를 희가 모두 들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렇게 거짓말합니다. "낡은 티 하나도 안 났어요. 정말 제 또래 사이서 생긴 일인 줄 알았어요."

"재미있다고는 안 하지. 이해해, 얼마나 놀랐겠어. 제정신으로 못 봤겠지. 그래도 늘그막에 재미 본 것 가지고 이렇게 성을 내면 내가 섭섭해. 그냥 자기만족이었어, 선아야." 희는 중간발을 들어 올려 나의 손 위에 올립니다. "나 혼자 웃고 떠들자고 만들었던 건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이렇게 잘 팔리게 되었어. 이 나이 먹어서 나도 어쩔 수 없는 일 때문에 혼나면 내가 속이 상해. 그러니 네가 이해 좀 해줘라."

희는 그렇게 말한 뒤 갑자기 방안의 공기를 모두 빨아들일 것처럼 숨을 크게 들이키고는 연달아 기침했습니다. "아. 더는 안 되겠다." 하며 고개를 저었지요. "오늘은 좀 괜찮나 했는데 또 말썽이야. 오늘 대화는 이걸로 쫑이야. 오래 말하면 가래가 끼더라고." 가래 끓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당신은 희의 몸을 일으켜 가래를 받아냈어요. 등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함께 호흡을 맞췄어요.

기침과 가래가 멎은 뒤 당신은 희를 침대에 눕혔습니다. 얼굴을 맞대고서 좀 쉬라며, 나머지는 내가 얘기해 볼 테니 당신은 눈 좀 붙이라고 속삭였지요. 나는 다음에 또 연락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어요. 하지만 희가 황급히 날 불러세웠습니다.

"그러지 마라, 저녁 먹고 가. 너 얼굴이 완전 반쪽이잖아. 한술 뜨고 가."

희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내 발목을 붙들었습니다. 나는 그러겠노라 대답할 수밖에 없었어요.

당신과 나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갔습니다. 내가 소파에 앉아 머리를 쓸어내리고 책을 노려보는 동안, 당신은 가식이 한 겹 벗겨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잠시 걷지 않을래요. 이 근처에 괜찮은 공원이 있어요."

"신경 쓰지 마요. 아픈 사람부터 챙겨요."

"아내는 괜찮아요. 선아 씨도 알다시피 앞으로 몇 년은 더 남았어요. 나도 가끔은 숨돌릴 여유가 필요해요."

결국 나는 당신을 따라 몸을 일으킵니다. 창밖을 내다보니 뜨겁게 내리쬐던 햇살이 다가온 먹구름에 서서히 가려지는 것이 보입니다. 우리는 우산을 챙겼어요. 얼마 걷지도 않아 굵은 빗방울이 지면에 떨어지며 굵은 점을 남기기 시작했지요.

앞서 걸어가는 당신이 말합니다.

"처음부터 속이려던 건 아녜요. 근데 생각보다 선아 씨 신경이 곤두서 있길래 뭐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겠다 싶었죠. 에라, 욕이나 먹고 말자.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 일은 사과하지 않을 거예요.“

"알아요, 알아. 그래도 들어줘요. 우리도 사정이 있었어요."

당신은 10년도 더 전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한 달에 두어 번 이어지던 느슨한 데이트의 끝에서, 당신은 마침내 사랑하는 희에게 프러포즈했습니다. 당신을 보지 못하는 날을 더 늘리고 싶지 않다면서 말입니다. 희는 그날 당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습니다.

고향에 관하여.

영원한 반짝임으로 남아버린 가족과, 찌르르르 찌르르르 이상한 웃음소리의 이유와, 왜 자신의 얼굴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이렇게 일그러지는지에 관하여.

퇴행성 관절염이라고 속였던 병에 관하여.

희는 자기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고 싶어 당신을 만나는 날마다 약을 끊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대로 계속 약을 먹지 않으면 10년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만약 우리가 결혼한다면 당신이 날 병수발들어야할 텐데 그 꼴은 죽어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요.

당신은 희의 고백을 듣고 깊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프러포즈했지요. 한 가지 부탁을 더해서요. "일주일에 닷새는 약을 먹어줘요. 남은 이틀만 날 사랑해줘요." 당신의 희는 오래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당신이 일을 나가던 시절에 희는 굉장히 정정했습니다. 쌀 포대를 들고 계단을 올랐고 집안 벽지도 자기 손으로 직접 발랐지요. 하지만 당신이 은퇴해 집에 머물게 되면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당신과 살을 맞대고 같은 숨을 쉬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희의 애정과 불안은 기름이라도 뿌린 것처럼 활활 타올랐고 그게 독이 되었어요. 다이아몬드를 닮아 눈부시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독이었지요. 손목과 발목이 완전히 굳어버릴 무렵, 당신의 희는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받아들이기 위해 더는 약을 먹지 않겠다고 통보합니다. 원하면 이혼해주겠다는 말도 더합니다.

당신은 이혼 서류를 가져와 도장을 찍는 대신 볕과 통풍이 좋은 집을 구해 이사합니다. 각도가 조절되는 환자용 침대를 침실에 들여놓습니다. 로봇청소기와 식기세척기와 건조기를 집에 들입니다. 장을 볼 때는 인터넷을 사용하고, 웬만한 일이 아니면 집 밖에 나가지 않습니다. 당신은 희와 함께할 시간을 늘리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모두 희와 당신이 쓴 책에서 나왔던 내용입니다. 당신은 소설에 담지 못한 이야기를 이어 말합니다.

"처음에는 일기였어요. 소설조차 아니었지. 아내가 말하면 내가 타자를 치고 수정해서 파일로 남겨서 프린트하고 그랬어. 근데 우리 사이가 워낙 돈독했어야지, 나중에 같이 보니 무슨 쌍팔년도 로맨스 소설이 따로 없어요. 그때 아내가 그럽디다. 뭔가 추억할 거리를 남기고 싶었는데 이게 딱이겠다고요. 그래서 내가 이 나이에 포토샵과 글 편집하는 것까지 배웠어요. 따지고 보면 나도 공동 저자라 이 말입니다."

당신은 출력소에 연락해 책 한 권을 만들었습니다. 좁은 커뮤니티 안에서 특별한 기념품 이야기는 금세 화두에 올랐지요. 처음 시작은 집에 찾아온 문병객이었습니다. 그는 책을 들춰보고는 며칠 빌려가도 되겠느냐 희에게 물었지요. 한 달도 안 되어 그가 사는 빌라 안에서 책이 돌고 돌았습니다. 당신은 내심 희의 친구들이 책을 잃어버리거나 훼손할까 봐 걱정했지만,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누가 그럽디다. 자기가 출판사에서 일하는데 잘만 하면 이걸 서점에 놓을 수도 있겠다고. 정식 출간을 해보자는 거지요. 그걸 듣고 나랑 아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선아 씨 말대로 보통 민감한 일이 아니잖어요, 이건 논픽션이라고. 그래서 나랑 아내가 사람들에게 일일이 물어보고 다녔어. 이걸 정식으로 팔아보자는 얘기가 나왔는데 괜찮겠느냐고. 우리는 단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안 하려고 했어요. 근데 알고 있는 연락처와 메일을 모두 돌리고 돌렸더니만 모두 대답이 한결같은 겁디다."

나는 당신의 집 테이블에 놓고 온, 몇 번이나 읽고 읽어 귀퉁이가 너덜너덜해진 이모의 책을 떠올립니다. 아무 메모도 감상도 없었기에 이모 역시 책을 읽으며 내심 화가 났을 거라고 짐작하게 했던 그 책.

당신과 희가 받았다던 한결같은 대답에 이모도 있었을 테지요.

"아내와 나도 그랬지만 그들 역시 뭔가 남기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선아 씨나 나는 그네들 사정을 알지요. 아픈 몸을 이끌고 고향을 떠났지, 약도 꾸준히 먹어야지, 냉혈한 소리나 듣고 살지… 그치만 비록 우리와 자라온 배경도 몸도 먹는 것도 다르지만, 어쨌든 그들도 우리처럼 울고 웃고 화낼 수 있는 존재잖아요.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고 애달파하고 괴로워할 줄 알죠. 다만 약 때문에 표현을 못 하는 것뿐이지. 자신이 감정을 지닌 존재라는 걸 어떻게든 기억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책을 허락한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만 하고 있어요."

당신과 희는 책이 잘 팔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얼마간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고 책은 그들만의 전유물이 되는 듯했지만, 결국 그들의 이야기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게 되었지요. 사람들이 낚시하듯 비극적인 소재를 낚아 올려 사용할 줄 몰랐다고 당신은 다시 말했습니다.

그러나 희와 그들은 내 걱정보다 '키라키라병'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에겐 더 그런 사소한 일에 일일이 성을 낼 기력과 기회가 남아 있지 않았어요. 엄마와 이모와 당신의 희는 마지막 세대였습니다. 이민선에서 태어난 모든 유충은 모체에게 물려받은 병의 여파로 알을 찢고 나오자마자 죽어버렸고, 지구인의 모습으로 성형한 뒤에는 생식능력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했지요. 후손을 남길 방법이 없었어요.

그들로 끝이었어요.

당신이 내게 먼저 연락해 고맙다고 말했을 때, 나는 심장에 구멍이 뚫린 기분이었습니다. 이모의 시신과 단둘이 안방에 남았을 때 느꼈던 통증이 나를 감싸 안았어요.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프다고 느끼는 것 자체가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어느덧 우리는 공원에 도착했습니다.

당신은 앞서 말했던 것과 달리, 안 그런 척 계속 시계를 들여다 봤습니다. 나는 먼저 가보시라고 말했어요. 머리를 식힌 다음에 돌아가겠다고 말했지요. 당신이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묻기에 마지못해 메뉴를 말한 뒤 나는 공원으로 혼자 들어갔습니다.

공원은 빗속에서 더 소란스러웠습니다. 이곳의 명물은 연꽃이라고 당신이 말했었지요. 그 말대로 품종과 색에 따라 나뉜 연꽃밭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대했고, 광대함만큼이나 수없이 많은 연꽃잎 위로 빗방울이 춤을 췄어요. 빗발이 거셌지만 공원은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가족과 연인들은 진창이 된 흙길을 걸어 다니며 활짝 만개하거나 고개 꺾인 연꽃을 구경했지요. 나는 느린 걸음으로 공원 깊숙이, 더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희와 당신의 책에서 중요한 장소로 손꼽던 강변이 나타났습니다. 강 건너로 솟아오른 산을 희뿌연 물안개가 감싸 안은 곳이었지요. 이곳에서 당신은 희에게 프러포즈했습니다. 희의 비극을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고가도로 아래 놓인 벤치로 가 앉습니다. 비옷을 뒤집어쓴 아이 둘이 물웅덩이 위에서 찰팍찰팍 뜀박질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마지막 소풍 비디오가 생각났습니다. 보고 또 보는 바람에 일정 구간이 늘어져 버린 우리 가족의 소풍 비디오 말이에요.

어린 마음에 즐겁기만 했던 그 날, 엄마와 이모에겐 다른 감정이 흘러넘쳤을 게 분명했지요. 두 사람에겐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는 시간이었을 거예요. 엄마는 넘어져 우는 나를 보며 자신의 팔다리가 연민과 슬픔으로 굳어가는 걸 느꼈을까요, 휠체어에서 손을 놓고 나를 세워 무릎을 털어주던 이모의 뇌는 어떤 호르몬을 분비하고 싶었을까요.

그들은 자신의 삶이 낭떠러지로 향하는 기차같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몇 번이고 계속해서 절망적인 끝을 상상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한 사람은 생생히 감각하며, 다른 한 사람은 약기운에 취해서.

그럼에도 이모는 그날의 소풍을 영상으로 남겨 간직했어요.

꽃반지를 코팅해 벽에 걸었어요.

귀퉁이가 다 닳을 때까지 로맨스 소설을 읽고 또 읽었어요.

하늘은 우중충한 먹구름으로 가득했지만 그렇다고 빛 한줄기 찾아보기 힘들다는 뜻은 아닙니다. 겹겹이 들어찬 구름 사이로 베일처럼 흐릿한 햇살이 비쳐들었거든요. 나는 가방에서 벨벳 상자를 집어 엄마와 이모를 꺼냅니다. 한 줌의 햇살에 비춰봅니다.

엄마와 이모는 흐릿한 운무를 배경 삼아 영롱하게 반짝였어요. 덩달아 나의 손도 약간의 햇살을 머금었지요. 구름이 몰려들어 햇살은 힘을 잃었지만 그럼에도 빛은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내 손바닥이 엄마와 이모의 기억으로 반짝이고 있었어요.

나는 찰나의 반짝임을 붙들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주먹을 꽉 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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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중편 조심도(鳥深島)에서: 재회 (상) 진정현 2021.11.10 1
220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완 키미기미 2021.10.31 0
219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10장 키미기미 2021.10.31 0
218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9장 키미기미 2021.10.31 0
217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8장 키미기미 2021.10.31 0
216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7장 키미기미 2021.10.31 0
215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6장 키미기미 2021.10.31 0
214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5장 키미기미 2021.10.31 0
213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4장 키미기미 2021.10.31 0
212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3장 키미기미 2021.10.3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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