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얼음뿔

2021.12.22 13:1712.22

(예전에 올렸던 글을 조금 수정해서 다시 올린 것입니다) 

#1 전나무 숲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여덟 사람이 숲 속을 나아간다. 사냥꾼과 용병, 짐꾼 등이다. 사냥개 네 마리가 일행을 따른다. 땅에는 이미 발목까지 눈이 쌓인 데다 지형의 굴곡이 심하여 걷기 불편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가 멈추질 않으니 곤란한 노릇. 해가 지기 전에 야영할 만한 장소를 찾아야 한다. 숲에서 얼어죽을 수는 없으니까. 

“이 시기에 눈이 이렇게 내릴 줄은 몰랐는데요.”

“그런 땅이잖아요. 서둘러요.”

여름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기인데 이렇게 추울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날짜 계산이 맞다면 순록들이 짝짓기를 할 시기다. 일행이 남쪽에서 출발했을 때에만 해도 낮에는 외투를 벗어야 할 지경이었다. 때문에 눈이나 추위에 대비한 옷차림이 전혀 아니었다. 날씨가 계속 나쁘면 이대로 탐사를 중단해야 할 수도. 

제일 앞서가는 이는 옥련이라는 이름으로, 대장을 맡는다. 옥련은 야크 평원을 비롯해 각지에서 활약하는 사냥꾼이다. 사람을 잘 해치는 맹수나,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괴물을 찾아낸 공이 많기에 광산 측에선 그녀를 이번 탐사 임무의 적임자로 판단했으리라. 그 외엔 사람이 몇이나 죽었다는 흉흉한 소문을 듣고도 굳이 자원하는 이가 없었으므로 광산측에서 인원을 안배했다.

“따로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적당한 공터를 찾으면 야영 준비를 하죠. 눈집이라도 만들어야겠네요.”

탐사대가 조직된 이유는 괴이한 소문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몇 개월 전 북방 산맥에 위치한 고드름 광산에서 설인의 습격을 받았다는 보고가 있었다. 광산 소유주들은 처음엔 야생동물을 잘못 보고 벌어진 소동으로 치부하였으나, 별다른 추가 보고가 없자 이쪽에서 몇 차례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설인을 목격했다는 서신 이후로 소식이 끊긴 것이다. 광산측은 괴물 전문가인 옥련을 고용하여 설인 사태의 진상을 밝힐 것을 의뢰했다.

‘단서도 없이 설인 같은 걸 찾으라고 해도 말이지.’ 

탐사대는 북방 땅에서 열흘 가까이 조사하였으나 별다른 특이점을 찾지 못했다. 잡은 사냥감이라고는 담비 한 마리와 꿩 한 마리, 토끼 두 마리가 전부.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빈손으로 돌아가는 사태만은 피해야 했다. 괴물 사냥꾼 옥련의 이름이 걸린 일이기 때문. 탐사대는 보급로로 쓰이는 오솔길에서 출발하여, 벌써 며칠이나 음산한 침엽수림을 헤집었다. 허나 설인을 발견하기는커녕, 흔한 들짐승조차 보기 힘들었다. 사냥개들도 별 흔적을 찾지 못했다. 옥련은 남은 식량을 헤아려 보고는, 너무 늦기 전에 포기하고 돌아가야 하는지 고민한다. 그저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하나 찾아내면 좋으련만.

눈이 하염없이 떨어져 쌓인다. 전나무 가지와 잎에도 눈송이가. 하늘이 검붉게 물들고 눈송이도 굵어진 후에야 수풀이 끝나서, 탐사대는 한없이 펼쳐진 설원으로 나온다. 성의 없게 그려진 지도를 통해 판단해보건데, 필시 호수가 있을 자리다. 얼어붙은 호수 표면에 쌓인 눈이 노을에 물들어 붉게 빛난다. 군데군데 가느다란 나무막대기가 솟아 있다. 사람이 사는 흔적이다. 얼음낚시를 위해 뚫어놓은 자리를 표시하기 위함일 터. 

“대장, 저쪽 좀 보시죠.”

호반의 북동쪽 구석에서 탐사대는 오두막을 발견한다. 완만하게 경사진 지붕엔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이끼를 섞은 흙을 이었고, 마찬가지로 경사진 자작나무 기둥과 벽 틈에 진흙을 발랐다. 집 옆에는 장작 더미가 집채만큼 쌓여 있고 아마씨 기름을 바른 가죽을 덮었다. 그 위에 눈 이불이 한 겹 더 덮이는 중이다. 지붕 한가운데 굴뚝이 뚫렸으나 연기는 보이지 않는다. 전형적인 북방 야크족의 집이다. 옥련은 팔을 들어 수신호로 탐사대를 멈춰세우고 말한다.

"모두 조용. 가까이 가지 말고 대기해요. 내 장비 좀 맡아줘."

옆에 있던 청년이 옥련의 활과 화살통을 받아든다. 옥련은 대원들을 한번 둘러보고는 오두막으로 접근한다. 그녀가 판자로 만든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사람 그림자가 집 모서리를 돌아 슬쩍 나타난다. 옥련보다 체격이 훨씬 크다. 그림자는 대원들이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옥련에게 활을 겨눈다. 노을의 역광 때문에 사람의 윤곽만 보이고 얼굴을 식별할 수 없다. 억양이 강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거, 뒤에 있는 치들도 다 무기는 내려놓으시오."

낮게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리고, 대원들이 사냥개를 진정시킨다. 옥련은 양팔을 들어올리며 야크 말과 사막 말로 지시한다. 

"들은 대로 해요."

그림자는 고개를 갸웃한다.

"이 땅 사람이 아닌 걸로 보이는데, 우리말을 아는군. 억양은 남쪽 놈들 같지만."

"쓸 일이 많다 보니 입에 익었습니다. 해치러 온 것이 아니니 무기를 거둬주시겠습니까?"

"이런 뒤숭숭한 때에 뭘 믿고? 도적떼가 아니라면 그냥 지나가시오."

"제 부하들이 많이 지쳤습니다. 이 시기에 눈이 오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어요. 며칠째 제대로 휴식하지도 못하고 숲을 헤맸습니다. 저희가 잡은 사냥감을 드릴테니, 눈과 혹한을 피하도록 해주시겠습니까?"

옥련의 진의를 가늠해 보는지 잠시 조용하다.

"이 땅에서 뭘 하는 거요? 그저 사냥을 하러 왔다면 때를 한참 잘못 잡았는데. 이 숲에는 털어먹을 것도 별로 없소이다."

옥련은 목을 가다듬고 대답한다.

"설인을 찾고 있습니다."

"설인?"

상대는 자세를 약간 풀더니 헛웃음을 터뜨린다.

"으하하하. 바보들이구만. 남쪽에선 그런 소문이 돈단 말인가?"

"그저 진위를 확인하러 온 겁니다. 중요한 일입니다. 혹시 설인에 대해 아십니까?"

"아는 건 없소. 이 땅엔 설인도 없고. 헛걸음 했소이다."

"그래도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글쎄, 얘기할 거리도 없다니까."

그러는 중에도 눈발은 점점 거세진다. 옥련은 온 사방이 하얗게 뒤덮인 광경을 가리키며 말한다.

"야크족에겐 해 지기 전 찾아온 손님은 돌려보내지 않는 관습이 있지 않습니까?"

너털웃음.

"먹고 살기 편한 남쪽 놈들이나 그러지. 이런 땅에서 손님 맞을 일이 얼마나 있겠소? 댁들은 도리어 미심쩍은데. 무기도 가졌고 말이오."

"폐를 끼치는 줄은 압니다. 사냥감에 더해서 저희가 보유한 물자도 나누어드리겠습니다. 이대로라면 부하들이 얼어죽습니다."

“댁들, 광산 쪽 사람들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미쳤다고 이 계절에 설인인지 뭔지를 찾으려고 숲을 쏘다니진 않겠지.”

옥련은 다음 말을 고르며 대답한다.

“현재로썬 광산 사업주에게 고용된 건 맞아요. 하지만 원래부터 광산 측을 위해 일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와 당신이 서로 적대할 이유도 없고요.”

집주인은 어깨를 으쓱해보인다.

"흠,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날 죽여서라도 집을 빼앗겠지. 요즘은 흉흉한 일이 많아서 말이오. 별 수 있나, 그쪽은 여덟이나 되는데. 단, 손님 대접 받고 싶으면 손님의 예를 지켜야 하오. 무기를 지닌 자와 개는 집 안에 들어올 수 없소. 빈 개집이 있으니 거길 쓰시오."

옥련은 허리를 굽혀 감사의 예를 표한다. 몰이꾼들은 집 옆에 붙은, 땅을 파서 만든 개집에 사냥개들을 들여보낸다. 개들은 연신 냄새를 맡으며 탐색하지만 별 위협을 느끼지는 못했는지 자리를 잡고 앉는다. 집에 들어가기 전, 일행은 두 명씩 번갈아 불침번을 서기로 정한다. 첫 순번을 뺀 여섯 명이 문 앞에 활과 창날 등을 가지런히 모아두고는 오두막에 들어간다. 집주인은 여전히 미심쩍은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2 통나무와 진흙으로 지은 집에 들어서자, 판자를 깔아 만든 바닥이 나온다. 땅이 얼어 평평하게 다지는 것이 어렵기에 땅 위에 판자를 대어 바닥을 짠 것이다. 격벽 없이 한 칸으로 된 집 중앙엔 흙바닥을 노출시켰고 거기에 돌을 둘러 만든 화덕이 있다. 그 위에는 연통과 연통에서 내려온 솥걸이용 쇠고리. 집 구석엔 가죽을 무두질할 때 쓰는 틀, 말총으로 엮은 통발, 장대와 밧줄 뭉치, 아마포 뭉치 등이 쌓여 있다. 한쪽 벽에는 아마도 지하 창고로 통하는 듯한 구멍이 크게 나 있다. 

"남쪽은 아직도 여름이 안 끝났는데, 북방의 겨울을 우습게 봤나 봅니다. 이렇게 멀리까지 나오는 건 저도 처음이거든요."

"올해는 겨울이 이상하게 빠른 편이오. 덕분에 벌레 걱정은 없지만. 난 소래라고 하오. 댁들은 뉘시오?"

옥련은 자신과 대원들의 이름을 차례차례 소개한다. 소래는 다람쥐 털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눌러 쓰고, 간단한 문양을 수놓은 갈색 털가죽 외투에 여우 가죽 목도리를 둘렀다. 양털 토시에 장갑은 끼지 않았으며, 염색하지 않은 펠트 양말 위에 가죽 덧신을 신었다. 소래는 화살통과 단검 등이 달린 혁대를 끌러 벽에 걸고 활을 기대어 놓는다. 모자를 벗자 살짝 희끗하게 샌 장발이 흘러내린다. 그녀가 머리를 뒤로 모아 묶고 불가에 자리를 잡자 옥련과 대원들도 적당한 곳에 주저앉아서 젖은 양말을 벗고 발을 말린다. 

"활이 꽤 관리가 잘 되어있네요."

옥련은 소래의 활을 보고 말한다.

"흠? 그렇소. 활과 화살 만들고 다루는 법을 할아버지에게 배웠지."

소래의 활은 낙엽송 줄기로 활대를 만들고, 자작나무 껍질을 감은 후 염소 힘줄로 보강한 것이다. 

"직접 제작하신 건가요?"

소래는 끄덕이며 부지깽이를 들어 화덕을 쏘삭인다.

"따로 손님용 방이 있는 것도 아니니 아무데나 적당히들 누워 쉬시오. 손님 노릇을 하고싶은 모양이니 최소한의 대접은 해드리지."

그러더니 흙벽에 난 구멍을 통해 지하로 내려간다. 창고인 모양이다. 탐사대는 옥련을 멀뚱하니 쳐다보고, 긴장할 이유 없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야 편한 자세를 취한다. 대원 중에는 남쪽 초원지대의 야크 유목민 출신도 있으나, 북방에 사는 사냥꾼과 직접 만나는 일은 처음인 모양인지 다소 어색한 표정이다. 

소래는 창고에서 술 부대와 노끈에 꿰어놓은 고깃덩이, 머리통 만한 무쇠 솥 하나를 가지고 올라온다. 대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덕 위에 솥을 걸고 고깃덩이를 던져넣는 소래. 그리고는 술 부대의 마개를 따서 한모금 마시고는 옥련에게 건넨다.

“마음껏 드시오. 먹을 건 몰라도 술은 많이 있으니.”

옥련은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술을 들이킨다. 야크족이 자주 마시는, 산양이나 염소 젖을 발효시켜 만든 술이다. 야크 출신이 아닌 대원들은 코를 가져다대고 냄새를 맡아본다.

“쿠미스라는 거에요. 이것만 먹어도 배는 불러.”

이미 야크 인들은 벌컥벌컥 마시고 입가에 흐르는 술을 닦으면서 옆사람에게 돌리는 중이다. 소래는 그 동안 또 창고에서 말린 풀과 물 부대를 가져와 솥에 쏟아넣는다.

“밖에 있는 부하들에게도 줘야 하니 한 자루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소래는 옥련을 한번 보더니 지하 창고를 향해 턱짓을 해보인다. 옥련은 감사의 미소를 짓고 창고로 향한다. 창고는 비좁고 어둡지만 화덕의 불빛이 새어들어와 간신히 사물의 윤곽만 식별할 수 있다. 흙벽에 박힌 나무 선반 위에 술 부대가 몇 개나 쌓여있다. 옥련은 하나를 집어들고 요리 중인 소래를 지나 집 밖으로 나선다. 누군가 나오는 소리를 듣고 사냥개들이 개집에서 머리만 빼꼼 내밀어 바라본다. 집에 들어오기 전에 말린 생선 토막을 줬으니 배는 안 고플 것이다. 맨 처음 불침번을 맡은 대원들은 쌓이는 눈을 피하기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가 있다.

“이거라도 한모금씩 마셔요. 교대하면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까요.”

“예, 대장.”

집으로 돌아오자 여전히 침묵 속에 소래가 주걱으로 솥을 휘젓는 소리만 들린다. 대원들 절반은 꾸벅꾸벅 졸고 있다. 며칠만에 지붕 밑에서 온기를 쬐고 술도 마셨으니 당연하다. 마음을 조금 놓았는지 발바닥에 불을 쬐기도 한다. 유목민 출신 몰이꾼이 뜨문뜨문 야크 말로 소래와 대화를 나눈다. 

“내일 해가 뜨면 약속한 걸 두고 가시오. 일어나서 내가 없더라도 놀라지는 말고.”

“감사합니다.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소래는 끄덕이면서 미소인지 뭔지 모를 표정을 짓는다. 방 안에 가득 퍼지는 고깃국 냄새.

"실례가 아니라면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소래는 주걱으로 국물을 떠서 맛을 보면서 대답한다.

"설마 그 설인 얘기는 아니겠지."

"맞습니다."

아직 잠들지 않은 대원들의 시선이 모인다. 그릇을 꺼내 고기 몇 점과 국물을 담아 옥련에게 건네는 소래.

"큰발순록 고기요. 소금이 모자라서 좀 비리지만 먹을만 할 거요."

"아, 감사합니다."

옥련은 그릇을 받아들어 국물을 마신다. 뜨겁고 밍밍하고 고기와 풀 냄새가 난다. 소래는 계속해서 음식을 떠서 대원들에게 돌린다.

"내 말했듯이 여기 살면서 평생 설인이란 걸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소."

"제 고용주는 광산에서 하얀 털에 뿔이 난 설인들에게 습격당했다는 보고가 내려왔다고 말했습니다. 최근엔 남쪽의 보급로까지 피해가 확산된 상황이고요. 습격받아 망가진 보급마차와 시체 더미를 발견했어요."

"요즘 광산 쪽에서 소란스런 일이 많은 건 알고 있소. 그래서 동쪽 길은 멀리하고 있지만. 그런데 난데없이 설인 얘기가 왜 나왔는지는 모를 일 아니오."

"고용주도 같은 생각일 겁니다. 그래서 진상을 밝혀내라고 절 보낸 거고요."

"내 보기엔 광산에서 벌어지는 소동에 이런저런 소문이 섞여가지고 잘못 전해지지 않았나 싶지만. 광산이 있는 산꼭대기는 옛부터 무서운 얘기가 많이 나왔지."

"어떤 걸 말씀하십니까?"

"눈귀신이라던가, 흰털늘보라던가......"

"흰털늘보? 처음 듣는 동물이군요."

"나도 본 적은 없소. 어차피 옛날 얘기니까."

"흰털늘보 얘기를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뭐하러?"

옥련은 잠깐 말이 없더니 급하게 대답했다.

"설인 소문의 근원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글쎄."

"알려주십시오."

소래는 코웃음을 치며 국물을 한입 떠먹고는 말을 잇는다.

"나도 어릴 때 서너 번 들었을 뿐이라서 자세히 기억도 안 나오. 흰털늘보라는 게 눈산 꼭대기에 사는 짐승인데, 키가 소나무처럼 크고 눈에선 시퍼런 빛이 난다고 하지. 산꼭대기에 사는데도 평소엔 충분히 춥지 않아서 얼음동굴에 늘어져 있다가, 겨울이 와서 눈보라가 휘몰아치면 그때 먹이 사냥에 나선다고 하오. 그래서 흰털늘보요."

"흰털늘보를 목격했다는 사람도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 봤으면 잡아먹혔겠지. 눈보라가 칠 때 밖에 나가지 말라고 겁주는 얘기인 걸로 알고 있소. 어른들도 눈이 많이 올 때마다 들려준 얘기였고."

"재밌네요. 이런저런 신기한 짐승을 많이 찾아다녔지만 흰털늘보에 대해선 처음 듣습니다."

"흠.”

소래는 잠시 조용하더니 말을 잇는다.

“나도 뭐 하나 물어도 되겠소.”

“얼마든지요.”

“광산이 지금 얼마나 심각한 거요?”

“광산에서 온 서신은 단 한 장 뿐이라 자세한 상황은 저도 모릅니다. 거기엔 설인의 습격이 일어나서 광부와 일꾼들이 두려움에 떤다고 적혀 있었어요. 남쪽 길을 따라 올라오면서 마차가 습격당한 광경을 보고 나서야 상황이 실제로 위급함을 알았죠.”

“그런가. 도망간 남편이 거기 있을지도 몰라서 말이오.”

“이런, 유감입니다.”

“안 그래도 되오.”

그녀는 더 말하지 않고 고기를 한 점 집어먹는다. 야크 말을 모르는 대원들도 소래에게 그릇을 내밀어 고깃국을 더 받고는 감사해한다. 옥련은 식사중인 대원들과 함께 다음날 계획을 세우고, 불침번 차례가 오기 전에 잠시 눈을 붙인다.

 

#3 옥련은 개 짖는 소리에 눈을 뜬다. 화덕은 깜부기불로 잦아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대원들도 잠이 깼는지 부스럭댄다. 사냥개들이 개집에서 뛰쳐나왔는지 여러 방향에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일일까.

“으악!”

희미하지만 밖에서 분명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고통에 찬 비명. 옥련은 몸을 벌떡 일으킨다. 대원들도 웅성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 누군가 통나무로 만든 문을 열어젖히자 새로 쌓인 눈에 달빛이 반사되어 들어온다. 다섯 명의 대원들이 문간에 둔 무기를 들고 달려나간다. 옥련도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문을 나서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강하게 끌어당긴다.

"흡!"

벌렁 나자빠진 옥련의 입을 틀어막는 손아귀.

"쉿, 꼼짝 말고 조용."

소래의 목소리다. 옥련은 저항하려 하나 곧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움직임을 멈춘다.

"공격이다!"

"적이 안 보여!"

집 밖에서 대원들이 다급하게 소리친다.

"숲에서 화살이 날아온다. 집 안으로 들어가!"

하지만 옥련이 보는 앞에서 대원 넷이 거의 동시에 목과 가슴팍에 화살을 맞고 쓰러진다. 문앞까지 달려온 마지막 대원도 풀썩 엎어지고 만다. 그의 등에 박힌 화살.

"이쪽으로."

옥련은 소래의 목소리를 따라 허둥지둥 안쪽으로 기어간다. 소래는 몸을 숙인 채 지하 저장고로 내려가고, 옥련은 혹시 누가 집에 들어오지 않나 뒤를 돌아본다. 밖에선 사냥개들이 짖는 걸 빼면 여전히 아무 움직임이 없다. 

"빨리."

완전한 암흑인 지하 저장고 끝까지 가자 소래가 옥련의 팔을 붙잡는다.

"바로 앞에 벽이 있소. 머리 높이 정도에 환기용 구멍이 있지. 한번에 한 사람이 기어서 간신히 지날 거요. 발을 받쳐줄 테니 먼저 가시오."

"알겠습니다."

소래의 말대로 흙벽과 천장이 만나는 위치에 뻥 뚫린 공간이 있다. 옥련이 통로 입구를 부여잡고 뛰어오를 준비를 하자 소래가 몸을 숙여 양손으로 옥련의 발을 받쳐준다.

"머리 조심하시오."

옥련은 천장을 지탱하는 통나무에 정수리를 스치며 환기통으로 들어간다. 몸을 좌우로 굴리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좁다. 팔을 뻗어 흙을 긁으며 통로를 올라간다. 뒤에선 소래가 창고에서 뭔가를 챙기는지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옥련은 좁은 환풍구를 비집고 작은 틈으로 나온다. 장작 더미 한가운데의 좁은 공간이다. 뒤돌아 구멍으로 팔을 넣어 소래의 손을 잡는다. 옥련보다 몸집이 큰 소래는 더 힘겹게 용을 쓰며 빠져나온다. 개 짖는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다. 잠시 숨을 고르는 두 사람. 허나 지체할 시간이 없다. 지붕에 불이 붙었기 때문이다.

"불화살?"

"빨리 피하시오."

마른 장작에 불이 옮겨붙기 전에 재빨리 집 뒤의 나무 사이로 달려가는 두 사람. 북방의 숲은 관목이나 풀이 없어 훤하게 노출되어 있지만, 펑펑 내리는 눈이 시야를 가려주기에 습격자들에게서 숨을 수 있다.

"이쪽으로."

소래가 먼저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전진한다. 그들이 지난 자리엔 또 눈이 쌓여 흔적을 덮을 것이다. 주변을 빙 돌아 먼 발치에서 보자, 완전히 화염에 휩싸인 소래의 집이 보인다. 불길 덕에 습격자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이래 보니 저게 그 설인이란 거지."

그들은 큰 몸집에 전신이 하얀 털로 뒤덮였으며, 푸른 뿔 두 개가 머리 양쪽으로 돋아나 있다. 

"자세히 보시오."

하얀 털은 털가죽 망토였고, 몸집이 거대해 보인 까닭은 그들이 스키를 신어 눈 위에 올라서 있기 때문이다. 푸른 뿔은 두건에 고정된 장식물이다. 두건 밑으로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수염이 허옇게 난 자도 있고, 턱이 매끈한 자도 있다. 그들은 서로 눈빛과 지시를 주고받으며 불화살과 횃불을 더 집어던진다. 몇몇은 탐사대원의 시체를 눈 속에서 끌어올린다.

"저들은 누구죠? 왜 우리를."

소래는 손을 들어 입을 가리며, 옥련에게 손등을 향한다.

"그건 그쪽이 대답해야 할 거야. 일단은 목숨을 건져야 하니 따라오시오."

 

소래는 폭설로 시야가 차단된 상황에서도 방향을 외우고 있는 듯, 헤매지 않고 곧장 나아간다. 옥련은 소래의 발걸음을 따라잡으며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그들도 스키가 있었다면 아주 편리했겠지만, 두 사람 다 사냥 장비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기어나오지 않았는가. 옥련의 장화에 눈이 들어와 다리가 축축하다. 

강행군 끝에 결국 해가 뜨기 전에 피신처에 도달할 수 있다. 해가 뜨고 하늘이 개었으나 밤 사이 쌓인 눈은 어디 가지 않는다. 두 사람이 당도한 곳은 소래의 사냥용 오두막이다. 불타버린 소래의 집보다는 조금 작고 지어진 모양새도 초라한 편이지만, 형식 자체는 같다. 완만한 경사의 지붕과 안쪽으로 기울어진 벽으로 눈이 쌓이는 것을 방지한다. 오두막 옆에는 장작 더미가 쌓여 있다.

소래와 옥련은 맨손으로 문 앞에 허리까지 쌓인 눈을 파내고, 빗장 세 개를 벗긴다. 어두컴컴한 사냥용 오두막에 들어서자마자 주저앉아 숨을 고르는 옥련. 검은 곱슬머리에서 눈 녹은 물이 뚝뚝 떨어진다. 소래는 지치지도 않는지 불도 안 땐 집안 곳곳을 점검한다. 사냥꾼이 겨울을 대비해 여름 내내 개보수를 하고 물자를 채워두는 헛간이지만, 올해는 겨울이 예기치 못하게 빨리 찾아오지 않았는가.

"몸이라도 녹여야 할 것 같은데, 불 지필까요?"

“아니.”

소래는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오두막 구석에 있던 장작 패는 도끼를 찾아 든다. 그리고는 옥련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나무 바닥에 힘껏 내려찍는다. 집이 살짝 흔들려서 먼지가 떨어져내릴 정도의 힘으로. 옥련은 경직하지만 시선을 돌리거나 눈을 감지 않는다.

"나는 할아버지 때부터 살아온 집을 잃고 죽을 뻔했어. 댁은 동료를 잃었지."

소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가늠해보는 옥련. 나지막하게 대답한다.

"예상치 못한 습격이었죠."

"지금부터는 내가 묻는 말에 조상들의 이름을 걸고 대답해."

"가문의 명예 같은 건 내겐 의미가 없어요."

소래의 목소리가 다소 격해진다.

"그럼 뭐든 가장 중요한 것을."

"내 목숨이죠, 뭐."

"놈들이 쫓는 걸 알고서도 내 집에 찾아왔나? 공격받는 줄을 알면서도 내 집에 끌어들였어? 놈들이 나를 노릴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억측이에요."

"댁들은 사냥꾼 아닌가? 설인을 찾던 중 아니었나? 왜 도리어 놈들에게 뒤를 밟힌 거지."

"전혀 몰랐어요. 숲에서는 그 어떤 흔적도 못 찾았죠. 그들이 우리보다 한 수 위였다고 인정해요."

소래는 주먹을 들어 벽을 친다. 진흙을 굳혀 만든 내벽에 손자국이 패인다.

"순 머저리 새끼들이구만."

옥련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래를 응시한다.

"부하들의 죽음은 내 책임이에요. 죽은 이를 모욕할 필요는 없죠."

"내 집이 불탄 것도."

"나를 죽여 분이 풀릴 것 같다면, 시도해보세요."

소래의 양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그녀는 옥련을 잡아먹을 듯 노려본다.

"그런 짓은 안 해. 당신은 내 손님이야. 여기서는."

나무 바닥에 박힌 도끼를 비틀어 빼내는 소래.

"손님을 지키지 못한 잘못은 내게도 있지. 조상들의 이름에 먹칠을 한 것과 같다."

"책임을 따질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밤에, 그것도 폭설을 틈타 민가를 습격한 놈들이야말로 비열하고 예측불가능한 악당이죠."

"놈들이 누군지 아나?"

"설인이란 사실 인간이었다는 건 알겠어요."

"얼음 절벽 위 고원의 산적떼다. 날씨가 추워져서 사냥감이 떨어지면 산 아래로 내려와 도둑질을 일삼고 사람을 죽이지. 댁들이 무서워하는 설인이란 그런 거라고."

"설인보다 더 문제군요. 광산 측에선 이 지역 거주민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을 텐데, 왜 그런 얘기는 안 해줬을까요."

"요 십 년 가까이 별 일이 없었으니까."

"갑자기 설인 소문이 돌기 시작한 이유는 저들이 약탈을 일삼기 시작해서라는 건가요?"

"대충 그렇겠지. 겁을 집어먹고 보면 놈들이 차려입은 모양새를 괴물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 그 뿔은 얼음뿔 순록을 잡아서 만든 거야. 놈들은 사람인데도 산양처럼 절벽을 맘대로 오르내리며 밤에 찾아오지. 내가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이 땅 사람들은 절벽 위에 사는 자들을 두려워했어. 그런데 몇 년 동안 날씨가 계속 따뜻해서 놈들이 한동안 내려오지 않았지. 이상하게 날씨가 쭉 따뜻했어. 하지만 올해는 달라. 눈이 작년보다 몇 달은 빨리 내렸지. 댁도 말하지 않았나. 이토록 겨울이 빨리 오는 건 이상해. 원래대로라면 아직 모기가 나올 계절이거든."

옥련은 한숨을 내쉰다.

"이른 겨울 때문에 먹을 게 없어져서 보급로를 습격하고 민가를 약탈한다는 건가요. 내심 설인의 신비를 밝혀낼 수 있을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정작 도적놈들에게 살해당할 뻔했군요."

"신비? 이 땅에 신비 같은 건 없어. 남쪽 놈들이 추운 땅에 와보지도 않고 말로만 떠들 뿐."

"초원에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많았어요. 그런데 난 이야기로만 전해지던 괴물들을 실제로 찾아내서 사냥한 적이 많이 있죠."

"이 설인도 사냥해보려고?"

"설인의 정체를 알아냈으니 돌아가서 보고하는 게 맞겠지만, 내 장비도 잃었고, 이 추위에 혼자서는 숲에서 얼어죽고 말겠죠."

"그래서 어쩔 셈인가?"

"당신은 어떻게 할 건가요?"

"똑같이 갚아줄 거야."

짧게 대답한 소래는 등을 돌려 집 곳곳에서 눈신발과 외투, 활과 화살통, 손도끼 등을 꺼내 손질을 시작한다.

"나도 돕겠어요."

"머저리 사냥꾼의 도움은 필요 없어."

옥련의 입가가 움찔한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낮게 말한다.

"활 한 자루랑 화살 한 개만 잠시 빌려줘요."

"뭐하게?"

"감사의 선물."

옥련은 소래에게 활과 화살을 받아들고는 말도 없이 문을 열고는 눈이 다져진 경사를 낑낑대며 올라서 나가버린다. 그런 그녀를 노려보며 눈썹을 찌푸리는 소래. 영문도 모를 일에 장단 맞춰줄 시간이 없다. 

소래가 채비를 마치고 마찬가지로 미끄러운 경사를 올라 집을 나서려고 할 때, 숲 속에서 허리까지 쌓인 눈더미를 해치고 옥련이 나타난다. 소나무 줄기를 붙들고 허우적댄다. 옥련은 소래를 보자 이를 드러내며 웃음인지 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그리고는 허리춤에서 뭔가를 끌러내 던진다. 눈알에 화살이 박힌 다람쥐 시체다.

"그걸로 새 모자나 만들어 써요. 쓰던 모자는 불탄 집에 두고 왔죠?"

"댁이 잡은 건가."

"화살 하나면 충분하죠."

"흥. 내가 욕했다고 발끈했나?"

 

#4 고원에서 내려온 습격자들이 신었던 것과 같은 스키는 아니지만, 눈신발은 효과가 확실하다. 사냥용 오두막엔 소래가 겨우내 사용할 물자를 쟁여두었기에 옥련 역시 새 장화와 외투, 모자, 눈신발을 나눠받을 수 있었다. 늘 사용하던 강력한 단궁은 아니지만 여분의 활도 한 자루. 식량만큼은 변변치 않았기에 소래는 옥련에게 계획을 설명한다.

"지금 내빼도 좋아."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당신을 따라다니는 게 가장 현명하다고 결정한 거에요."

"나는 좋다고 한 적 없는데. 어쨌든, 저길 봐."

소래는 눈신발을 끌며 둔덕 위에 올라 서쪽을 가리킨다. 사냥용 오두막은 지대가 높기에 나무의 장벽 너머 원래는 호수였던 흰 벌판과, 저 멀리 희끄무레한 산맥 꼭대기가 보인다.

"이 숲엔 내가 이런 집을 몇 개고 지어놓았지만 지금 거길 찾아가진 않아. 서쪽 멀리에 산이 보이지? 호숫가를 따라 서쪽으로 걷다 보면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얼음 절벽 기슭에 닿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야."

그녀는 허리춤에서 가죽으로 만든 술 부대를 들어보인다. 거의 비었는지 축 늘어진다.

"먹을 게 필요해. 사냥용 헛간엔 먹을 걸 두지 않아. 산으로 가는 길에 사냥감을 모아야 한다. 서쪽을 향해 걷되, 숲 속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고, 내가 만들어둔 함정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가. 댁도 사냥꾼이라면 함정은 쉽게 알아보겠지. 여기서 산까지 똑바로 가면 이백 개쯤 찾을 거야. 뭐, 담비나 토끼 같은 거겠지만 어쩌다 큰 놈이 걸려서 혼자 잡기 버거우면 이걸로 알리도록."

소래는 화살통에서 깃 색이 다른 화살을 하나 고르더니 옥련에게 건넨다. 기묘한 모양의 화살촉에 작은 구멍이 여럿 뚫려 있다.

"효시군요. 이걸 쏘면 놈들이 바로 내 위치를 알겠죠."

"그래. 바보는 아니군. 급한 처지가 되면 쏘라고. 내가 찾아가서 도와주건 말건 할 테니까. 난 호수 위로 갈 거야. 통발을 올려야 하니까."

"노출된 장소는 위험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놈들이 탁 트인 데를 꺼리겠지. 눈 내리는 밤을 골라 덮치는 걸 보면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거야. 적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는 한 방법이지."

"호수 반대편의 산기슭까지만 가면 되는 건가요?"

"산 아래 도착하면 커다란 돌탑이 보일 거야. 산에는 나무가 거의 없으니 한눈에 들어올 거다."

"돌탑?"

"직접 보면 무슨 말인지 알 거야.”

소래는 등을 돌린다.

“말해두지만 난 댁을 믿지 않아. 산기슭에서 오늘 밤만 묵고 바로 떠날 거야. 해가 지기 전까지 돌탑에 오지 않으면 도망친 걸로 알겠어."

"그럼 믿게 해드리죠."

소래는 코웃음을 치더니 목에 두른 털목도리를 끌어올려 입을 가린다. 그리고는 호반을 향해 가버린다. 옥련 역시 두건을 뒤집어쓰고 숲으로 들어선다. 이 숲이 사냥터라면, 주인인 소래가 자주 다니던 사냥길이 있을 터. 사냥길은 반드시 함정이 설치된 장소를 연결하기에, 길만 잘 따라가면 함정을 찾고 사냥감을 처리하는 작업은 아주 쉬워진다.

본래는 사냥개가 있는 법이지만, 옥련의 탐사대가 데려온 개들은 죽었고 소래는 개를 키우지 않는 듯하다. 개는 사람이 찾지 못하게 숨은 작은 동물의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도망가는 것을 잡기도 한다. 허나 개가 없더라도 함정에 걸려 죽거나 죽어가는 동물을 회수하는 일 뿐이라면 간단하다. 옥련은 술 부대를 꺼내 쿠미스를 한 모금 마신다. 

 '맛없어.'

옥련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다리를 움직인다. 북방의 숲엔 수풀 따위가 거의 없기에 보이는 건 눈과 나무줄기 뿐이다. 옥련은 소래가 다니던 사냥길을 찾지는 못하지만 가까이서 함정 하나를 발견한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듯, 그냥 눈 위에 토막난 나무줄기가 비죽 솟아나 있을 뿐이다. 혀를 비죽 내밀고는 서쪽을 향하는 옥련.

소래가 만든 덫은 이웃한 나무 두 그루에서 가지를 쳐내고 몸통을 베어, 일종의 낮은 관문처럼 보이는 식이다. 허리 높이에서 잘라낸 나무 둥치에 홈을 길게 새긴 후, 나무 줄기 두 개를 위아래로 끼워넣는다. 위에 놓는 줄기는 쉽게 떨어지도록 아주 살짝만 걸쳐야 한다. 

두 줄기 사이에 가느다란 가지를 받쳐서 작동장치로 삼고 미끼를 놓는다. 담비 따위가 미끼를 먹으려다 가지를 건드리면, 위쪽에 둔 줄기가 갑자기 떨어지면서 놀란 짐승의 허리께를 찍어누르는 구조다. 함정 위엔 꺽어낸 가지나 잎 따위를 덮어서 눈이 쌓이지 않게 한다. 문제는 올해 눈이 너무 빨리 그리고 많이 왔다는 것이다. 옥련은 서쪽을 향해 차근차근 나아갔지만 소래의 함정들을 많이 찾지 못했을 뿐더러 거지반은 허탕이고 상당수가 미완성이다. 미처 손보지 못해 무너진 것도 있다.

 

#5 설상가상이라 하던가, 눈이 또 내린다. 숲을 다니는 이들은 으레 나무 껍질을 파내거나 하여 표지를 남겨놓기 마련이지만, 옥련은 발견하지 못한다. 그녀가 길을 잃도록 속인 거라면, 반쯤 성공이다. 소래는 분명 자신만의 길 찾는 방법이 있을 테지만, 옥련에게 알려주지 않고 가버린 것이다. 

해서 옥련은 당초 계획과 달리 숲을 훑으며 덫에 걸린 사냥감을 회수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녀석들을 활로 쏘아 잡는다. 머리 위에서 아주 작은 소리라도 들리면 활을 겨눈다. 북쪽 숲의 짐승들은 나무를 잘 탄다. 땅 위엔 숨을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날 떼어놓으려는 심산이었군.'

하늘을 메운 구름이 지는 해에 물들었다. 하늘과 땅의 구분이 없다. 하루 종일 걷기만 한 옥련은 마침내 얼어붙은 개울가로 나온다. 호수와 마찬가지로 수면은 덮여서 보이지 않지만, 숲 한가운데 나무가 없는 땅이 구불구불 길게 이어진다면 원래 개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옥련이 걷는 방향을 직각으로 가로질러 남쪽으로는 호수에 닿을 것이다. 그런데, 상류 쪽에서 움직임이 있다.

눈가루를 휘날리며 하얀 짐승이 나타난다. 아주 덩치가 커서 뿔 끝이 나무 위쪽 가지에 걸릴 정도다. 그만큼 다리도 길어서, 한껏 쌓인 눈에도 큰 무리 없이 다리를 들어 전진한다. 굵은 두 뿔은 마치 고드름을 조각해놓은 것처럼 푸르고 투명하다. 

'소래가 말한 그 얼음뿔 순록인가.'

설원을 겅중겅중 걷는 얼음뿔 순록. 옥련은 조심스레 다가간다. 놈도 그녀를 봤겠지만 이 거리에선 딱히 신경쓰거나 경계하는 기색은 없다. 포식자가 아니라고 판단한 걸까. 몸집 차이가 워낙 엄청나기에 옥련도 너무 가까이 갈 생각은 없다. 저 다리에 스치기만 해도 뼈가 으스러질 터.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을 뿐.

그러나 저 상류 쪽에서 화살이 날아와 얼음뿔 순록의 모가지에 꽂힌다. 놀란 순록은 몸을 돌려 달아나려 한다. 연달아 날아오는 화살. 짐승은 혼란에 빠진 채 숲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멀리 설원과 하늘이 만난 지점에서 꿈틀대는 작은 점들이 나타난다. 굵은 눈송이 때문에 분간하기 힘들지만 분명 한 무리의 사람이 방금 그 얼음뿔 순록에게 접근 중이다. 이대로라면 들킬 것이기에, 달려서 서쪽 숲의 나무 사이로 들어간다.

'간밤의 그놈들일까.'

개울 서쪽의 숲도 동쪽 지역과 다르지 않다. 흰색 바탕에 짙은 갈색 줄무늬를 수없이 덧그린 것 같다. 만약을 대비해 활시위에 화살을 걸며, 옥련은 발걸음을 재촉한다. 저들이 순록 사냥을 본격적으로 개시하기 전에 이 지역을 벗어나야 한다.

 

#6 호수 서쪽에 위치한 산기슭은 통째로 거대한 암반 지대로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그런 비탈 위에 집채만한 바위를 쌓아서 만든 돌탑이 하나 있다. 돌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얼어붙은 절벽이 시작된다. 절벽 발치에 사람 한 명이 드나들 만한 틈새가 있다. 소래가 서쪽 산맥까지 나와서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찾은 은신처다.

불을 피우지 않고 생선 손질을 마친 소래는 소맷자락에 단검을 문질러 닦는다. 내장을 바르고 껍질을 벗겨 토막낸 생선 한 조각을 씹는다. 나머지는 실에 꿴 후 나뭇가지를 꿰어 맞춰 만든 간이 건조대에 걸쳐놓는다. 얼어붙은 호수에서 건져낸 통발은 동굴 안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검붉게 빛나던 하늘에는 이제 허여멀건한 눈구름 뿐이다. 

'얼어죽었거나, 도망갔거나.'

그렇게 생각하며 잠을 청하려 했으나 산 아래가 소란스러워 내려다봤더니 숲 속에 횃불이 많이 보인다. 횃불들은 빠르게 남쪽으로 향한다. 개 짖는 소리도 어렴풋이 들려온다. 사냥 중임이 명백하다. 고지대인이 산 아래까지 내려와서 소란을 피우는 것도 근래의 일이다. 날씨가 따뜻하던 시절엔 산 아래 사람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혹은 살해당하거나.'

옥련이 진작에 도망가지 않았다면 저 밑에 있을 것이므로, 습격자들이 그녀를 쫓는 중일 수도 있다. 숲에 들어와 소래의 집에 당도할 때까지 추적당하지 않았던가. 광산 측에 고용된 외지인임을 알고 완전히 끝장내려는 것이다. 소래가 의도적으로 옥련을 사지에 몰아넣은 것은 아니다. 귀찮은 마음에 길을 잃거나 포기하게 만들어 따돌리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고지대인에게 쫓기게 만드려는 생각은 없었다. 집요한 놈들이기에 함께 있었다면 자신의 목숨마저 다시 위험해졌을 것이다.

'진짜 사냥하러 나왔을 수도 있고. 얼음뿔 순록이 산 아래까지 내려왔던가.'

허나 짐승이 아니라 사람을 사냥하고 있다면 어쩔 것인가. 외지인과는 상관 없는 소래의 집을 노려서 불태울 정도로 포악한 놈들이다. 생존자의 흔적을 찾았다면 마지막 한 명을 죽일 때까지 쫓아다녀도 이상하지 않다.

‘할아버지 때 지었던 집이지.'

집은 또 지으면 된다. 기실 불타버린 그 집조차 절반 이상 고쳐 지은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살아온 집을 잃은 상실감은 어떻게 달래겠는가? 당연하게도 대단히 화가 난다. 게다가 소래의 집에서, 소래가 지켜보는 가운데 손님들이 무참히 살해당했다. 그들이 소래에게 해를 끼치지 않은 이상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탓하지 않아.'

죄지은 자는 살인자들이다. 불을 지른 것도 놈들이다. 소래의 잘못도 아니고, 뒤를 밟힌 옥련과 그 부하들의 잘못도 아니다. 자기 자신이나 죽은 이를 책망해서는 생각이 혼란스러워질 뿐이다.

'똑같이 갚아준다.'

이 숲은 소래의 숲이다. 이십 년 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다. 호숫가에서 삶을 영위하던 주민들이 두려움에 떨며 떠난 까닭은 다름아닌 그 당시 잦아진 고지대인의 습격 때문이었다. 하나 둘 떠나고 이제 남은 이는 소래뿐. 때로는 숨으며, 때로는 속이며 일상을 지켰다. 기르던 개들을 어미곰에게 모두 잃은 후에는 고요을 즐기며 살았다. 무엇이 더 필요했겠는가? 고지대인은 고지대에서, 소래는 숲과 호수를 면한 집에서.

소래는 창날을 겸하는 단검을 꺼내 날을 만져보더니, 동굴 한켠의 잡동사니 더미를 뒤져 손도끼 하나를 찾아낸다. 활과 화살을 챙기고 털모자를 눌러쓴다. 횃불 행렬은 이미 호수에 다다랐다. 소래는 바위 언덕을 달려 내려간다. 무너진 돌탑의 흔적을 하나 둘 지나친다. 옥련이 저 아래 있다면, 얼어붙은 호수처럼 숨을 곳 없이 탁 트인 장소에서는 꼼짝없이 잡혀 죽는다. 

 

#7 옥련은 온 힘을 다해 얼음뿔 순록의 등짝에 매달린다. 제아무리 순록이라도 발이 푹푹 빠지는 눈 위를 달리느라 몸체가 크게 요동친다. 스키를 타고 쫓아오는 도적 떼에게서 도망쳐야 했다. 아무렴 순록에 타는 편이 발로 뛰는 것보다는 빠를 터이기에.

그녀가 봤던 큰 수컷은 정찰 목적으로 개울가에 나왔던 듯했다. 놈이 화살을 몇 대나 맞고 겁에 질려 울부짖자, 서쪽 숲에서 얼음뿔 순록 무리가 일제히 달려나왔다. 새하얀 털이 눈밭에 섞여 무리의 규모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옥련은 거대한 순록에게 짓밟힐 뻔했으나 나뭇가지를 붙들고 매달렸다. 상류 쪽에서 사람의 고함과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흔들어 기세를 얻은 후, 마침 눈앞을 지나가는 녀석의 등으로 뛰어내렸다.

옥련이 매달리자 순록은 놀라서 펄쩍 뛰었지만 옥련은 기를 쓰고 순록 털을 붙잡았다. 순록은 곧 더 중요한 문제를 떠올린 듯 무리를 따라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옥련은 허벅지와 팔목에 힘을 집중하며 목만 돌려 뒤를 봤다. 횃불과 창, 활을 든 무리. 설인 복장을 입은 산적 떼가 맞다.

‘순록들이 지치기 전에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호수를 완전히 건널 수는 없을 것이다. 눈이 이렇게 쌓였고 심지어 더 내리고 있는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 순록 무리가 탁 트인 공간으로 나와 흩어질 때, 옥련이 올라탄 놈이 사냥꾼들에게 집중적으로 쫓기지 않도록 행운을 비는 수밖에.

고함소리가 가까워진다. 화살이 연달아 날아온다. 개 짖는 소리도 더 자주, 더 크게 들린다. 사냥개들이 접근할수록 순록들도 더 겁에 질려 필사적으로 돌진한다. 숨을 곳이 필요하지만 숲의 나무들은 아무 도움도 못 된다. 줄기가 길고 곧으며 가지와 잎은 가늘기 때문이다. 밤이고 날씨가 나빠서 순록 무리 사이의 소래를 사람은 못 볼 수도 있지만, 사냥개가 문제다.

'죽든 살든 매달려 있자.'

한데 숲이 끝나고 호반이 가까워지자 전방에 커다란 검은 형체가 눈에 들어온다. 나무나 바위 등의 자연물이 아니다. 검은 윤곽선이 각진 데다 군데군데 무너진 것처럼 끊어져 있다. 눈 위에 솟아오른 저 그림자는 인간이 만든 것이다. 순록이 달려갈수록 좀 더 또렷하게 식별할 수 있다.

호숫가에 소래 말고도 또 주민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지근거리에서 확인하자 한때 집이었던 폐허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기둥은 썩어서 부러지고 지붕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내려앉았다. 하지만 당장 몸을 숨길 만한 공간은 있지 않을까.

'개들이 냄새를 맡겠지.'

순록 무리가 넓게 퍼져 추격자들의 주의를 분산시킬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다행히 갓 쌓인 눈 때문에 발이 빠져서 개들은 그렇게 빨리 달리지 못할 것이다. 사냥감이 흩어지자 화살 세례도 멈춘다. 부상을 당해 뒤쳐지거나 급소를 맞은 것들은 개가 달려들어 물고 늘어지거나 사냥꾼이 찾아와 숨통을 끊는다.

순록이 오십 걸음이나 뛰었을까, 눈 위로 솟아있는 가느다란 나무 막대가 보인다. 옥련은 전날에도 이런 막대가 호수에 몇 개나 세워져 있던 것을 기억한다. 낚시를 위해 얼음에 구멍을 뚫은 지점을 표시한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순록이 고꾸라진다. 발을 헛디뎠는지, 화살에 맞았는지는 알 수 없다. 옥련은 붙잡고 있던 털을 놓치며 날아가서는 눈 위에 떨어진다. 몸을 일으키기 위해 허우적대지만 더 빠져들 뿐이다. 옆에선 얼음뿔 순록이 마찬가지로 버둥대고 있다.

옥련은 추격자의 무리에서 멀어져야 했으나 눈신발도 벗겨저버린 상태로 스키를 따돌릴 리 만무하다. 넘어진 순록이 굵은 화살을 몇 대나 맞고는 움직임을 멈춘다. 얼음뿔 순록과 같은 모양의 뿔 장식을 단 인간들이 미끄러져 다가온다. 세 명 모두 등에 바구니를 짊어지고 그 안에 사냥개가 들었다. 개들은 목청이 떨어져라 짖어댄다. 한 명이 외친다.

"사람인데!"

"뭐?"

창과 활로 무장한 고지대의 습격자들. 이들은 순록뿐만 아니라 인간도 사냥한다. 옥련은 놈들의 사냥감 신세가 되는 게 벌써 두 번째다.

"너, 뭐하는 놈이냐."

"산 아래 놈인가? 어디서 왔지?"

습격자들은 옥련에게 화살을 겨누고 외친다. 야크 말의 한 갈래 같지만 사투리가 너무 심해 제대로 알아듣기가 어렵다. 옥련은 양손을 들어보이며 천천히 균형을 잡고 몸을 일으킨다.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기 위해 입을 떼려는 순간.

"여기 뭐가 있는..... 어?!"

나무 막대가 세워진 지점에서 눈이 폭발한다. 정확히는 밑에서 누군가 튀어나오며 눈가루가 사방으로 휘날린 것이다. 상반신을 탈의한 소래가 급작스런 등장과 동시에 화살을 날려 옥련을 겨누고 있던 고지대인 한명의 목을 꿰뚫는다. 놀라서 시위를 매기는 자에게 또 한 발. 달려드는 자에게는 손도끼를 던져 안면을 명중시킨다. 쓰러진 사냥꾼의 바구니에서 개들이 빠져나와 달려든다. 

"이쪽으로 와!"

옥련은 허겁지겁 소래에게 기어가고, 소래는 몸을 숙여 돌진하는 개를 피한다. 몸을 낮춘 채 옥련의 양 어깨를 붙들고 엄청난 힘으로 끌어당기는 그녀. 옥련은 앗 하는 사이 눈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그리고는 낚시 구멍을 통과해 얼음장 같은 호숫물에 얼굴부터 입수한다.

소래와 옥련이 빠져나온 구멍은 한참 멀리 떨어진, 또 다른 폐가 뒤에 숨겨져 있다. 옥련은 숨이 모자란 상태에서도 죽어라 헤엄쳐 따라왔고, 정신이 아득해져 기절하기 직전 소래가 내민 손을 잡았다. 옥련은 눈 위에 자빠져 하악대지만 소래는 지체없이 옥련의 젖은 옷을 벗긴다. 무언가에 할퀴어진 듯한 커다란 흉터가 옥련의 등을 가로지르고 있다.

한마디 할 틈도 없이 옥련의 어깨를 붙들어 일으킨 소래. 그리고 그들은 폐가의 내부, 눈이 들이치지 않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주저앉는다. 소래는 외투를 포함한 장비를 여기에 벗어놓았던 듯하다. 한쪽 구석에는 낚시대와 물통, 그물 뭉치도 있다. 호숫가에서 헛간 대신 쓰는 방인 모양이다. 서서히 정신이 돌아온 옥련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떤다. 소래는 옥련을 끌어안고는 외투를 펼쳐 함께 뒤집어쓴다.

"진정해. 아무 말이나 해 봐."

옥련은 이를 딱딱 부딪히며 한 글자씩 힘겹게 내뱉는다.

"아. 무. 말.”

“장난치나.”

“호숫가에, 으, 왜, 폐허가 된 집들이, 있죠.”

"예전에는 이 땅에 사람이 많이 살았었지."

"예전?"

"내가 어렸을 때. 모두 도적을 무서워해서 떠났다. 날씨가 따뜻해진 후에도 돌아오지 않았어."

"그래서, 후우. 호숫가에, 버려진 건물이 많군요."

소래는 옥련을 끌어안고 있는데도 거의 떨지 않는다.

"저놈들이 댁을 쫓는 게 아니라서 살았군."

"당신이, 날, 함정에 빠뜨렸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려던 건 아니지만."

"구해줘서, 고마워요."

"해가 뜨면 바로 떠날 거야. 들키기 전에."

저 멀리서 사냥꾼의 고함 소리와 사냥당하는 얼음뿔 순록의 비명이 아득하게 들려온다.

 

#8 고지대 야크족이 사는 땅은 세상의 북단이다. 그 고원에서도 제일 북쪽 끄트머리에 만년설 덮인 봉우리가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살던 집과 땅을 잃은 고지대인은 만년설 덮인 봉우리로 모여들었다. 그 뿌리 부근에 아주 오래된 얼음동굴이자 조상들의 무덤이 있었고, 또한 동족이 살았기 때문이다. 봉우리의 북쪽 사면, 계곡과 언덕을 몇 개나 넘어야 닿을 수 있는 깊은 은거지. 

터전 잃은 고지대인이 모여든 마을에서는 사냥 부대가 썰매에 싣고 돌아온 얼음뿔 순록을 해체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사냥감은 운반이 편하도록 토막내서 쌓아 왔는데, 먼저 뿔이 상하지 않도록 고이 모셔온 머리통을 가져다가 가는 톱으로 뿔을 썰어낸다. 커다란 뿔은 순록이 죽은 후에도 푸르고 투명한 빛을 발한다. 어린 샤먼들은 옆에서 작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자그마한 고드름 장신구를 잔뜩 단 외투를 입고는 추워서 발을 동동 구른다. 어른들이 얼음뿔을 잘라서 건네면, 털가죽 담요로 고이 싸서 들고 간다.

고기에서 가죽을 떼어낸다. 어른 몸통 만한 순록 뒷다리를 잡고 칼집을 길게 낸 후, 양쪽에서 가죽을 당겨 벗긴다. 핏물을 뺀 상태에서 추위 속을 달려왔기에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다. 붉은 속살이 드러나자 개들이 신나서 날뛴다. 사냥꾼들은 날카로운 단검으로 다릿살을 베어내 던져준다. 도끼로 갈비뼈를 쪼개고, 몸통을 열어 얼어붙은 내장을 꺼낸다. 어린 샤먼들이 달려와 뼈와 가죽으로 만든 자루에 순록 내장을 받는다. 장정 여남은 명이 들러붙어 몸통 가죽을 통째로 벗겨내려고 낑낑댄다. 얼음뿔 순록의 하얀 가죽은 전사들의 외투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바쁘게 일하는 마을 젊은이들 곁을 두 노인이 잰걸음으로 지난다. 한 명은 허리를 굽히고 눈치를 살피며, 다른 한 명은 지팡이를 짚고는 배를 내밀고 걷는다.

"나리, 사냥 부대가 지쳤습니다. 주술사들도 얼마나 반대가 심한지 아시잖습니까."

하얀 털가죽 외투를 걸친 노인이 화려한 남방식 예복을 입은 노인을 올려다보며 말한다. 남방식 예복을 입고 허연 수염을 허리께까지 기른 노인은, 검고 곧은 지팡이로 발밑의 눈을 휘저으며 성질을 부린다.

“주술사란 작자들은 늘 말이 많지. 얼어붙은 송장이 들어찬 무덤에 틀어박혀서 점이나 치는 겁쟁이들이 아닌가. 하지만 그 치들이 부리는 술법은 어울리지 않게 강력하지. 우리가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데 도움될 수 있는 기회 아닌가? 무기를 들고 나서서 용맹을 보일 수 없다면, 가진 재주를 동원해 전사들을 도와야 마땅하지 않겠나?”

“무력을 보여서 겁을 주면 광산 놈들이 겁먹고 달아날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전쟁 때문에 장로들이 제사를 올려서 겨울을 앞당기기까지 했는데, 광산 놈들은 틀어박혀 있기만 하고 사냥 부대의 출정은 끝이 없군요. 겨울 날 준비도 제대로 못한 상황인데 이대로 사람들을 전부 굶겨 죽이실 셈입니까?”

남방식 예복을 입은 노인은 곧은 지팡이를 들어 그 끝을 하얀 털가죽 외투를 걸친 노인의 턱 밑에 댄다.

“저기 잡아온 저 순록들이 안 보이나? 저 정도면 겨우내 먹겠지. 그리고 이 땅에서 광산 놈들을 아주 몰아내지 않으면 어차피 언젠가는 굶주리게 될 걸세. 이 한지에는 잡아먹을 동물도 부족하고, 남쪽과 교역하지 못하고, 고원에 고립되었으니까. 하지만 고립되기는 놈들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보급로를 끊었지 않나. 우리는 이 땅과 날씨를 잘 아네. 겨울을 앞당긴 건 되려 유리한 상황이지. 눈보라에 숨어 다가가면 놈들은 오는 줄도 모르고 당할 거야. 우리에겐 정령의 가호가 함께하고.”

하얀 털가죽 외투를 지닌 노인은 덜덜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정령의 가호를 받아서 젊은이들이 손과 발을 잃고 얼어죽습니까? 무모한 출정입니다. 이제는 늦었더라도 겨울을 대비해야 해요. 지주님께선 광산을 잃은 것과 게서 나는 고드름이 걱정이겠지만 우린 여느 때보다도 긴 겨울을 버텨야 합니다. 젊은이들을 부추겨서 전쟁을 일으켰는데, 희생은 바로 그 젊은이들이 치르고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나직한 음성과는 반대로 그의 눈빛이 형형하다. 남방식 예복을 입은 노인은 지팡이를 들어 땅을 힘껏 내려친다. 눈가루가 피어오른다. 그는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못마땅하게 헛기침을 하고는 뒤돌아 가버린다. 마침 맞은편 얼음굴에서 으리으리한 남방식 예복을 입은 노인 몇이 더 걸어나오는 중이다. 남방식 예복을 입은 노인들은 검은 지팡이를 든 노인을 따라 큰 굴 안쪽으로 몰려간다.

 

#9 고지대 야크족은 본래 고원에 흩어져 살며 짐승을 사냥하거나 숲에서 딴 열매와 버섯 등으로 연명하는 사람들이다. 고작 몇 계절 정도라고는 해도, 한 장소에 모여있으니 반드시 탈이 난다. 사이가 안 좋은 친척들이 서로 무리를 이끌어 패싸움을 벌이고, 아이들은 더 쉽게 병이 들고, 물건이 도둑맞는 일도 잦다. 샤먼들은 신성한 장소임을 강조하며 규율을 세우려 하지만, 굶주리고 분노한 사냥꾼들이 얌전히 말을 들을 리 없다. 더욱이 향후의 일을 논하는 데 있어서는 사람들 생각이 저마다 다르기에 의견이 모이지를 않는다.

지금 동굴가에 모여 사는 사람 중 태반이 광산에서 일을 했었다. 광부 노릇이 아니더라도, 광산 근처에 머무르며 땔감이나 식량을 팔기도 했다. 이들은 광산 측에서 고지대인을 쫓아낼 때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었고, 그래서 가장 크게 분노하며 전쟁에서 앞장섰다. 옛 지주들이 빼앗긴 땅을 되찾자며 고지대인을 선동할 때에도 크게 동조했다. 허나 기후와 지형을 잘 알고 기세가 등등했어도 역시 광산에 틀어박힌 무장 세력을 몰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정령을 속이면 반드시 화를 사네. 이미 주제넘은 술법을 너무 많이 부렸지 않나. 그 이상은 과욕일세.”

주술사들의 장로는 수염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온다. 머리 위엔 머리를 하나 더 얹은 만큼 높은 관을 썼다. 관에는 견과류의 속을 파내어 만든 방울이 주렁주렁 달렸다.

“이제 와서 발뺌할 생각은 마시오. 우리도 손해를 감수하고 때 이른 겨울을 불러온 것 아니오. 이기기 위해서라도 계속 날씨를 우리 편으로 붙들어놔야지 않겠소.”

화려한 남방식 예복을 입은 옛 지주 한 명이 도열해 앉은 샤먼들 앞에서 뒷짐을 지고 서성인다.

“얼마나 많은 희생이 뒤따르는 일인지 몰라서 그러나? 땔감도 입을 옷도 부족하네. 미처 겨울 날 준비를 마치기 전에 눈이 내렸으니. 제사를 올릴 땐 제물이 필요하지. 순록을 얼마나 잡았는가? 푸른 뿔을 얻으려고 지난 십 년 동안 잡은 것보다 더 많은 순록을 죽였네. 가죽과 고기를 미처 처리하지 못해서 얼어붙은 채 방치하고 있지. 그것 또한 싸움터에 나간답시고 일손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닌가.”

“미리 합의가 된 사안 아니오? 봄이 오기 전에 승리할 수 있도록 돕겠다 하지 않았소.”

“자네들이 이토록 막무가내일 줄은 몰랐네. 전사들이 가호를 받을 수 있도록 비는 것 쯤은 우리가 응당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런데 자네들은 주제넘게도 정령을 부려먹으려 들었지.”

“전쟁이란 그런 거요. 우리 희생을 감수하며 적에겐 더 큰 희생을 치르도록 몰아붙이는 거란 말이오. 그래야 저들이 끝내는 물러갈 것 아니오.”

“그러는 자네들은 무엇을 걸었나? 우리는 정령을 속이는 죄를 지었네. 젊은이들은 목숨을 내놓고 습격을 감행하지. 어린이와 노인들은 생업을 제쳐두고 전쟁 준비를 돕네. 그런데 욕심 사나운 지주 양반들, 자네들은 대체 무얼 희생했느냔 말이야.”

“우린 이미 잃은 게 많소. 저 사막에서 온 장사치 놈들이 사기 계약으로 광산 소유권을 통째로 빼앗아갔지. 우리가 당신네 야만인 족속에게 먹고 살 길을 터줬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당신들이 감히 건드릴 생각조차 못했던 고드름 광산을 처음 개발하고, 고드름을 남쪽 땅에 팔아서 수익을 올린 건 이 땅의 온당한 소유주인 우리란 말이오.”

입구에 발을 드리운 얼음 동굴방 안에서 샤먼과 옛 지주들의 논쟁은 끝없이 계속된다. 고지대 출신의 키 큰 여인 한 명이 동굴방 입구에 책상다리로 앉아 있다가, 마침내 넌더리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선다. 이번에도 저 늙은이들은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할 것이다. 옛 지주들은 언제나 먹여살려준 은혜를 갚으라는 식이었고, 샤먼들은 정령이니 신을 주워섬기지만 정작 아무 힘이 없다.

키 큰 여인은 탁 트인 동굴 입구로 나선다. 얼음뿔 순록을 해체하는 작업으로 마을이 분주한 가운데 한켠에선 전투 훈련이 한창이다. 나무토막에 순록 가죽을 감아둔 표적을 창으로 찌르고, 비틀어 빼는 동작이다. 사냥 부대장의 호령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더 어린 아이들은 활 쏘는 연습을 한다. 

성인식도 미처 치르지 못한 애들이다. 이들은 몸에 맞는 순록 가죽 망토조차 짓지를 못해서 복식이 제각각이다. 대체로 누비옷을 껴입었고 제대로 된 외투조차 갖추지 못한 아이들도 있다. 싸우기엔 너무 어린 전사들이 화살을 쏴 봐야 절반은 빗나가서 눈밭에 박힌다. 화살통을 한번 비우고 나면 멀리 날아간 화살을 찾으려고 달려간다. 훈련을 지켜보던 나이 든 전사가 키 큰 여인을 보고 말을 건다.

"체이, 왜 놀고 있냐?"

늙은 전사는 하얀 망토를 입고 얼음뿔 장식이 달린 두건은 머리 뒤로 젖혔다. 마을 안인데도 큰 칼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어 불필요하게 위협적이다.

"내가 노는 걸로 보여?"

"이번에도 빠진다면서."

"누군가는 마을을 지켜야지."

"겁쟁이가 하는 말이군. 너와 네 그 도련님이 까짓 긁힌 상처 따위로 징징대면서 틀어박혀 있을 때, 여길 봐라. 아이들조차 창을 들고 나선다."

"어린애가 무기를 드는 게 누구 머리에서 나온 미친 생각이지?"

"어린애조차 우리 상황이 중대함을 아는 거다. 너 같은 비겁자와는 달라. 진짜 당당한 야크의 전사들이지."

"당신들이야말로 진짜 비열하고 추한 어른들이지. 당신네 분노와 욕심으로 일으킨 싸움에 애들을 동원하다니."

"마치 넌 다른 땅에서 온 것처럼 말하는구나. 너도 광산에서 일하다 쫓겨난 신세가 아니냐? 왜 상관없는 일처럼 구느냔 말이다. 전쟁은 원래 목숨을 바쳐서 이기는 거다. 하기사 젊은 것들이 제대로 된 싸움을 해본 적이나 있겠냐마는."

"당신 같이 사람 죽이고 물건 빼앗길 좋아하는 전쟁광들이 오래 전 산 아래 사람들을 괴롭혀대서 결국 모두 떠나고 우리만 남게 되었다는 건 알아. 고립을 자초한 거지."

"그건 우리 땅을 지킨 전쟁이었다. 이 고원은 신성한 대지, 산 아래 숲은 우리의 사냥터. 여긴 신에게 허락받은 터전이니까."

"진짜 답답하네. 대체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는 땅에서 뭘 하고 살 건데?”

“네가 광산에서 일하며 따뜻한 땅에서만 살아온 게으른 족속을 너무 많이 만났다는 건 잘 알겠다. 이 땅은 우리에게만 허락된 땅이고 우리는 설원을 자유롭게 누빈다.”

“그래. 이번에야말로 모조리 얼어죽겠네. 이 날씨에 설원에 나가는 것만큼 미친 짓도 없으니까."

“모르는 소리. 주술사들이 우리에게 가호를 빌어 준다. 신성한 눈보라는 적의 눈에서 우릴 가려주지.”

“눈보라 속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그래야 모두에게 도움이 돼.” 

“고얀 것, 내가 언젠가 단단히 손을 봐주마."

체이는 저주의 주문을 내뱉고는, 거대한 동굴 벽에 면해 세워진 천막촌으로 향한다. 천막촌은 조용하다. 한구석에 체이와 체이의 남편이 쓰는 천막이 있다. 지금은 아무도 없다. 체이는 천막 안에서 스키와 가죽 가방을 꺼낸다.

“하누! 어딨어?”

체이가 소리쳐 부르자 동굴 벽에 메아리가 친다. 천막 사이로 산양 털가죽 외투를 입은 소년이 터덜터덜 걸어온다. 소년은 또래들 중에서도 키가 큰 편은 아니다.

“왜 죽상이야?”

하누는 체이를 보고는 한숨을 크게 내쉰다.

“체이, 왜 우리는 싸우러 안 가지?”

“우린 미치지 않았으니까.”

하누는 입술을 비죽 내민다.

“우리더러 겁쟁이라고 하잖아.”

“누가?”

“누구겠어. 모든 사람이.”

“겁쟁이 하지 뭐. 미친 것보단 겁쟁이가 나아. 날마다 추워지고 있어. 저 주술사란 작자들이 부린 술법이 우리 목을 조르고 있다고. ”

하누는 체이가 스키와 행낭을 챙긴 것을 알아차린다.

“어디 가?”

“여기선 한 시도 더 못 있겠어. 잠깐 조용한 곳에 가 있을 거야. 같이 갈래?”

“나도 같이 훈련 받으라던데.”

체이는 새끼와 약손가락이 없는 하누의 오른손을 부여잡고 얼굴 앞에 들어올린다.

“또 다치고 싶어?”

하누는 대답이 없다. 표정으로는 짐짓 의연한 척 하지만, 상처가 아직도 아릴 것이다. 체이는 곧바로 후회한다.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는데.

 

#10 옥련은 고원을 헤맨다. 아직 날은 어둡지 않았지만 휘몰아치는 눈보라 덕에 코앞을 분간할 수 없다. 하늘에 해가 보인다면 방향이라도 잡을 텐데, 천지가 그저 먹먹하게 하얗다. 소래에게서 받은 털가죽 외투를 여미고 여우 목도리로 얼굴을 감쌌어도 추위를 전부 막을 수 없다. 밤이 오기 전에 바람을 가려주고 불을 피울 만한 피신처를 찾지 못하면 꼼짝없이 얼어죽게 될 터. 고원을 벗어나려 해도 남쪽이 어디인지 찾을 수 없거니와, 혼자서 그 절벽을 내려갈 수는 없는 노릇.

소래는 아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집채만한 수리부엉이에게 채여갔으니까. 옥련 역시 무사하지 못할 뻔했다. 소래가 옥련을 밀쳐 넘어뜨리지 않았다면. 소래는 세찬 바람 속에서 날개 치는 소리를 먼저 들었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옥련을 거칠게 밀었다. 소래 자신도 엎어지려 했으나 거대한 부엉이가 더 빨랐다. 옥련이 고개를 들자 이미 사냥꾼과 사냥감은 사라진 뒤. 소래가 고함치는 소리와 큰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오다가 결국 잦아들었다.

고원에 그런 괴물이 살고 있음을 소래는 알았던 걸까. 눈의 장막 뒤에 또 어떤 맹수가 숨어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옥련이 북쪽으로 와서 본 것들은 다 크다. 남부 야크 평야는 광활하지만, 거기선 발굽 달린 것을 뺀 들짐승은 몸집이 작고 털색은 진하다. 헌데 북쪽 땅에서는 부엉이조차 사람보다 크다.

'북쪽에선 사람도 남쪽보다 크지.'

덩치 좋은 소래도 맹금의 발톱 앞에선 사냥감 신세에 불과하니. 덕분에 함께 고지대인의 본거지를 찾아 복수를 하겠다는 계획엔 큰 차질이 생겼다. 물론 복수보다 훨씬 급박한 문제가 있다. 눈보라는 그칠 기미가 안 보이고, 옥련은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고원의 북동쪽 끝으로 가면 광산이 있을 테지만.'

그들은 호수와 맞닿은 얼음절벽의 남쪽 사면을 올라왔다. 처음엔 불가능해 보였으나 이 땅에 수십 년을 살아온 소래는 절벽을 오를 수 있는 길을 알았다. 힘겨웠지만, 하루를 꼬박 등반한 끝에 고원에 오를 수 있었다. 그 고생도 이제는 헛되다.

옥련은 자신이 똑바로 걷는지, 제자리에서 맴도는지도 알지 못한다. 털옷에 눈이 붙으면 미처 털어내기도 전에 그 위에 또 눈이 쌓여 언다. 눈썹에서도 눈가루가 떨어져내린다. 이렇게 계속 나아가다가 결국 걸음이 멎으면 선 채로 얼어죽겠지. 설인을 찾으러 왔다가 설인이 되는 꼴이다.

 

#11 그 전날, 소래와 옥련은 동이 틈과 동시에 빙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허나 얼어붙은 절벽을 어떻게 기어오르겠는가. 그러한 의문에 소래는 옥련을 절벽 사위에 숨겨진 바위 틈새로 데려갔다. 소래가 어린 시절, 고지대 산양이 절벽을 제멋대로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쫓아가 찾아냈던 통로였다. 

"이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아마도. 십 년 정도 오른 적 없지만. 어딘가 길이 무너지거나 했을 수도 있겠지."

"그럴 수도 있다니!"

암반처럼 다져진 눈, 깨지지 않고 녹지도 않는 얼음 사이사이 바위와 흙이 드러나 있었다. 소래는 앞장서서 뛰어오르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하며 바위 틈새를 나아갔다. 가죽끈으로 손가락과 손바닥을 동여맸지만 택도 없었다. 손끝은 얼어 터지고 손톱이 빠질 지경. 

등반은 생각보다 전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침 햇살과 함께 시작한 등반이 해가 질 때까지도 끝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조금이라도 넓직한 공간이 나올 때마다 틈틈이 쉬었으나 이미 몸도 마음도 탈진한 상태였다. 절벽에 바짝 붙은 상태로는 시야가 제한되어 얼마를 더 올라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원래 얼마나 걸리는 길인가요?"

옥련의 목소리는 바람소리에 가려 잘 들리지 않았다. 소래의 답변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선지 분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몸이 예전 같지 않군. 십 년 전엔 거뜬했는데."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요."

소래는 몸을 일으키며 눈을 털어냈다.

"계속 앉아있다간 눈귀신이 와. 움직여야 해."

"지금 눈귀신이라고 했어요? 처음 만난 밤에도 눈귀신이란 걸 얘기했었죠?"

흥미가 동한 듯한 옥련의 표정과 목소리. 하지만 소래는 코웃음 친다.

"추운 데서 잠들면 얼어죽는다는 뜻이지."

"에이, 재미없네요."

투덜대며 소래의 뒤를 따르는 옥련. 기온이 떨어지자 바람이 아래로 불기 시작해 더 힘들어졌다. 그나마 소래가 길을 찾는 데 막힘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과거 이 길로 올라본 경험이 있다는 얘기는 거짓이 아닌 듯, 꽤나 익숙해 보였다. 옥련에겐 보이지 않는 돌기와 발판 삼을 돌을 놓치지 않고 척척 찾아내는 것이 아닌가. 손끝과 더불어 시간 감각도 마비되는 느낌. 옥련은 졸음을 쫓기 위해 뭐라도 대화를 시도해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러고 보니 남편이 있었다고 했죠."

소래는 옥련의 질문을 못 들었는지, 들어도 무시하는 건지 한참이나 대답이 없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음? 아, 그런 얘기를 했었지."

옥련은 반쯤 감긴 눈으로 물었다.

"남편을 찾는 것도 목적에 포함되나요?"

소래는 기가 찬다는 듯이 웃는다.

"뭐? 그딴 한심한 놈팽이를 뭐하러 산꼭대기까지 찾으러 가나."

"한심한 남편이라."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었지. 왜 이런 북녘까지 와서 고생을 했나 몰라."

"이 지역 출신이 아니었나 보군요."

소래는 커다란 바위에 매달려 오른 후, 옥련을 끌어올려주고 나서 말을 잇는다.

"자기 말로는 역사를 연구한다더군. 다른 똑똑한 친구들과 대판 싸우고 밀려났다던데. 그래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북쪽 땅의 역사를 조사하겠다고."

"학자들의 상아탑에서 쫓겨났다는 뜻인가 보네요. 잘못된 이론을 강변했거나, 따돌림을 당했거나"

"거기까진 내 알 바 아니지. 얼굴은 샌님처럼 곱게 생겼길래 맘에 들었어. 그런데 장작 하나를 제대로 못 쪼개더라고. 낚시를 해오라 시키면 종일 앉아서 산만 쳐다보고 있고. 덫을 살피라 하면 숲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밤에는 잠도 안 자고 뭘 쓰는 건지 읽는 건지. 내가 글을 가르쳐달라고 해도 나한텐 어려울 거라며 무시를 하지 뭐야, 망할 놈. 하루는 짜증이 나서 욕을 한바탕 해줬더니, 집을 나가 버렸어."

"저런."

"영 가 버린 줄 알았는데 또 보름인가 지나서 돌아오더군. 동쪽 산길에 마차가 많이 지나길래 물어봤는데, 북쪽 광산에서 일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자기가 가서 돈을 벌어올 테니 광산까지만 데려다달라대. 이놈이 드디어 정신을 차려서 먹고 살 궁리를 하는가 싶었지."

소래는 산을 기어오르며 얘기를 하는데도 숨이 흩뜨러지지 않았다.

"그 후로 몇 년이 지나도록 집에 찾아오기는커녕 기별이 없길래 광산에 닿아서는 그 길로 내뺐으려니 하고 있는 거야."

한동안 대화가 멈췄다. 잠은 확실히 깼지만. 얼음 기둥과 만년설이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다. 그들이 생사를 걸고 절벽을 기어오르는 중만 아니었어도 대단히 아름다웠을 광경이었다. 그리고 등 뒤에서 떠오른 달이 머리 위로 왔을 때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바위 틈새가 열리며 밤하늘이 보였기 때문이다. 먼저 절벽 가장자리를 넘어선 소래는 상체를 내밀고 팔을 내밀었다. 옥련은 눈밭에 쓰러져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참을 말도 못하고 헉헉대기만 했다. 

"이제는 계획이 뭔가요?"

주저앉아 주위를 둘러보던 소래가 답했다.

"놈들의 마을이 어딨는지 찾아내야지."

"무슨 수로요? 광산 측에서 말해주기를, 고지대인의 마을은 서너 집이 모여서 최소한의 공동체만 이루는 형태로 고원 전체에 퍼져있다던데요. 하나하나 다 찾아내서 불태울 건가요."

"광산 놈들도 거기까지밖에 모르는 모양이지. 진짜로 그렇게 제멋대로 흩어져 살면 어떻게 떼로 모여서 마을을 습격하고 그러겠어?"

"어딘가에 본거지가 있다는 뜻인가요?"

"모르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한숨을 쉬는 옥련.

"대체 어쩌자는 거죠."

소래는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들어 봐. 이것도 결국은 옛날 얘기야. 어쩌면 귀신 얘기이기도 하지. 설인과는 관계없지만. 맨 처음 설인이란 소문을 낸 건 분명 외지인일 거다."

"최초로 설인을 목격했다는 보고는 광부들에게서 들어왔으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소래는 고원 너머 동쪽에 우뚝 솟은 산맥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쨌든. 저 산에서도 가장 높고 험한 봉우리가 광산이지. 그리고 이 땅 사람들은 옛날부터 고드름 다루는 법을 알았어. 고드름으로 목걸이나 그릇을 만들어 팔고는 했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산사람들도 원래부터 산적 떼거리는 아니라는 얘기지. 놈들이야말로 제대로 된 광산이 생기기도 전부터 산을 오르내리며 고드름을 땄다는 거야."

"그건 알아요. 오히려 남쪽 땅의 대상이 고드름 광산에 눈독을 들인 건 얼마 안 된 일이라고 하더군요."

"맞아. 그런데 산사람들은 고드름을 지금처럼 막 다루지 않았다고 하더군. 아주 귀하게 여겨서 고드름을 따기 전에 제사를 지냈다던가, 정히 받들어 모신 모양이야. 지금처럼 고드름을 캐다가 그대로 팔지도 않고, 아주 조금씩만 떼서 제사 지낼 때 쓰는 구슬이니 그릇 같은 걸 만들었지. 나도 직접 본 적 있어. 확실히 남쪽 놈들이 탐낼 만한 물건이야."

"고드름을 신성시한 거군요."

"그런가. 내 보기엔 무서워한 쪽에 가까울 테지만. 아무리 배짱 좋은 산사람도 고드름 광산 깊은 곳까지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해. 귀신이 사는 곳이라 해서. 더 크고 아름다운 고드름을 찾아 동굴 깊숙히 들어간 사람은 살아나오지 못했다고."

"시시하네요. 그것도 고드름 동굴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겁주는 얘기인가요? 게다가 그게 놈들의 마을을 찾는 일과 무슨 상관인데요?"

소래는 피식 웃었다.

"움직이자고. 계속 누워있다간 몸이 언다."

그리고 소래는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12 옥련은 반쯤 잠에 빠져서는 다리만 움직인다. 어차피 장애물도 없고, 살 길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눈신발이 뭔가 딱딱한 것에 걸려 발목이 꺾이고는 고꾸라진다. 눈밭에 얼굴을 파묻고는 정신이 번쩍 들어 허우적대는 옥련. 기도에 눈송이가 들어와 기침을 한다. 팔다리가 푹푹 빠져들어 몸을 가눌 수 없다. 눈을 한 웅큼을 삼키고는 겨우 고개를 든다. 졸면서 걷는 사이 어디로 흘러들어온 걸까, 눈안개 너머로 검고 거대한 형상이 흐릿하게 보인다. 

바위다. 그러나 자연 상태의 바위가 아니고, 돌을 깎아 만든 건물의 폐허다. 폐허는 겉으로 드러난 부분보다 눈에 파묻힌 쪽이 훨씬 거대해 보인다. 옥련은 자그마한 틈새를 발견하고는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눈을 파낸다. 틈은 아래로 갈수록 점점 넓어지는데 끝이 없다. 이제 보니 검은 돌벽이 무너지고 기울어 공동을 형성한 것이다. 갈라진 틈이나 구석에는 얼어붙은 이끼가 진녹색 가루가 되어 들러붙어 있다.

들어가기 전 위를 한번 더 올려다본다. 가까이서 보자 검은 석재 건축물은 보통 오래된 것이 아닌 듯하다. 닳고 닳은 무늬와 조각, 허물어진 기둥과 지붕, 그 위에 덮인 눈. 호숫가의 썩어가는 나무 건물과는 또 다르다. 호숫가 마을은 소래의 말대로라면 수십 년 전 버려진 것이지만, 이 폐허는 언제적에 생겼는지도 알 수 없다.

옥련은 어둠 속으로, 눈비탈을 미끄러져내린다. 공동은 보기보다 깊어서 가속도가 붙는다. 착지가 걱정되기 시작할 즈음 단단한 땅에 발이 닿는다. 옥련의 뒤로 함께 쓸려내려온 눈이 풀풀 날린다. 위에서 흐릿한 빛이 새어들어오지만, 두어 걸음을 떼자 바로 컴컴해진다. 눈신발을 벗는다.

팔을 뻗어 벽을 더듬으며 나아간다. 손끝이 차서 감각이 둔하지만 돌 표면은 충분히 거칠고 딱딱하다. 입가를 가린 목도리를 풀어낸다. 코앞에 입김을 불어도 보이지 않는다. 얼음장 같은 냉기는 여전하기에, 일단 더 안쪽으로 향한다. 한걸음을 뗄 때마다 세 방향을 밟아본다. 미끄러 넘어지거나 구덩이 따위에 빠지지 않기만 바라면서. 손으로 벽을 더듬어 굽이굽이 들어간다. 깊은 곳에선 잠들어도 얼어죽지 않을 만큼 냉기가 덜하기를 바라면서.

 

#13 문득 정신이 들었는데 눈곱이 얼어붙어 눈을 뜰 수 없다. 옥련은 자신이 저승 언저리에서 가까스로 돌아왔음을 느낀다. 어떻게 깨어났을까. 눈은 못 떠도 들을 수는 있다. 정적 뿐이던 폐허에서 사람 목소리를 들은 것 같다. 몸을 꿈틀해보는데 어깨가 빙하처럼 굳었다. 아무 감각도 없는 손가락을 눈가에 가져다댄 후, 팔을 움직여 문지른다. 딱딱한 눈곱이 떨어지며 눈꺼풀 살갗이 함께 뜯어지는 느낌. 

'노래?'

바람 소리인 줄 알았으나 자세히 들으니 어떤 곡조가 분명하다. 옥련은 돌더미가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하여 뻣뻣한 몸을 일으킨다.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한다. 귀를 기울이니 소리가 나는 방향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옥련은 눈앞으로 팔을 뻗어 머리를 부딪히지 않도록 주의하여 나아간다.

하지만 흥얼거리는 가락은 희미하게 들려올 뿐 도무지 가까워지는 것 같지 않다. 옥련은 한참 동안이나 발소리를 내지 않도록 한 걸음씩 내딛은 다음에야, 어둠 속의 주황색 점을 발견한다. 몸을 낮추고 다가가니 흥얼거리는 가락도 조금씩 크게 들려온다. 돌벽이 무너져 생긴, 동굴과 다름 없는 폐허, 그 중에서도 넓게 트인 공간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솥을 걸어놓은 채 주저앉아 노래를 부르는 소년을 본다.

거무죽죽한 털옷을 껴입고 까슬까슬해 보이는 목도리를 둘렀다. 머리엔 볼덮게가 달린 둥근 모자를 썼다. 얼굴에 상처를 입었는지 턱 주위로 두른 붕대가 보인다. 소년은 나무를 깎아 만든 사발에 묽은 죽 같은 음식을 담아 마시며 다리를 흔든다. 주위를 경계하는 기색은 없다. 

‘이런 데서 뭘 하는 거지?'

하지만 다음에 취할 행동을 생각해볼 여유도 없이 옥련의 뒷편에서 인기척이 난다. 급하게 활시위를 당기며 몸을 돌리지만 이미 상대는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와 있다.

"워, 워."

흰 털가죽 외투를 입고 얼음뿔 장식 두건을 뒤집어쓴 키 큰 여인이 양팔을 들어올려 장갑 낀 손바닥을 보인다. 옥련보다 머리 하나 정도 크다.

"진정해, 언니. 날 쏘기라도 했다간 곱게는 못 죽을 거야."

억양이 아주 심하다. 야크 말임은 분명한데, 소래도 이렇게 발음이 뻑뻑하지는 않다. 옥련은 불가에 있던 소년이 이미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와 등 뒤에 창끝을 들이대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누구냐? 체이, 친구야?”

소년의 목소리는 변성기가 온 듯도 하지만 아직은 앳되다. 키 큰 여인이 다시 묻는다.

"이렇게 생긴 친구를 둔 적은 없는데. 말젖 먹는 놈들 같지도 않고. 더 남쪽에서 왔어?"

옥련은 대답하지 않는다.

"우리 말을 모르나?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한데, 아쉽네."

키 큰 여인은 낙담한 시늉을 해 보인다. 고지대 야크 말은 억양이 너무 심해서 어떤 단어는 이해하는 데 눈을 한번 깜빡이는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옥련은 눈 앞의 여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러나 등 뒤의 소년에게도 들리도록 말한다.

"누굴 해치려는 의도는 없어요. 화살 맞고 싶지 않으면, 소년에게 무기를 내려놓도록 시켜요."

키 큰 여인은 다소 놀랐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말 엄청 잘 하잖아? 

옥련은 반응하지 않고 상대의 눈을 바라본다. 키 큰 여인은 검은 눈동자로 옥련을 훑어본다. 

“말을 초원 놈들처럼 능글맞게 해서 기분나쁘긴 하지만, 놀랐어. 외지인 같지 않아.”

“남쪽엔 생긴 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 많죠.”

“아하하, 이 땅에서 사막 사람을 볼 줄은 몰랐지. 그런 곱슬머리는 흔치 않거든.”

“세상 공부를 게을리 하지는 않았나 보군요. 하지만 잡담 하고 있을 여유는 없으니, 이제 당신 부하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하세요.”

피식 하는 웃음소리.

“부하는 아니지만. 나야말로 부부가 오붓하게 보내는 시간을 방해받아서 화를 내야 마땅하지 않나 싶은데. 이 땅에서 살아나가고 싶다면 차라리 우리에게 붙잡히는 게 더 좋은 생각일 걸?”

“적에게 목숨을 구걸하느니 얼어죽겠어요. 그보다 부부라고 했어요?”

“왜 적이라고 생각하지? 우리 땅에 본 적 없는 외지인이 나타나서 내 남편을 염탐하고 있기에 놀란 것 뿐이야. 여긴 왜 왔어?”

 옥련은 눈을 가늘게 뜬다.

“난 이 땅에서 몇 번이나 죽을 뻔했죠. 만나자마자 앞뒤 없이 화살을 날려대는 원주민 덕에. 그런데 처음 보는 사람이 적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여기 사는 사람 중엔 성질머리 더러운 놈들도 있지. 왜 왔는지, 뭘 하고 있었는지 대답해.”

“사냥꾼이에요. 희귀하다는 얼음뿔 순록을 찾으러 왔어요.”

“진짜로?”

“난 남쪽에선 이름난 사냥꾼이에요. 다람쥐 눈알 옥련이라고 들어봤는지 모르겠네요.”

키 큰 여인은 비릿하게 웃는다. 옥련은 그 웃음을 보고 눈쌀을 찌푸린다.

“시도는 좋았어. 우리가 광산 놈들의 동향을 미리 파악해두지 않았다면 진짜 멍청한 사냥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옥련은 입술을 깨문다.

“근데 우리도 바보는 아니거든. 언니가 왜 이 땅에 발을 들이자마자 화살 세례를 받았을까? 여기 사람들이 아무리 외지인을 싫어해도 누군지 모르는 상대를 일단 죽이려 든 이유가 뭘까?”

옥련은 말 없이 활시위를 더 강하게 당긴다.

“여긴 우리 땅이야. 외지인이 우르르 나타나면 짐승이 알고 사람이 알아. 광산 감독관이란 놈이 남쪽으로 몇 번이나 증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었지. 우리가 대부분 가로챘지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딱히 사냥철도 아닌 계절에 무장한 외지인들이 개를 끌고 왔으니 그 목적은 뻔하지 않았겠어? 그래서 마을 노인들이 성을 내면서 사냥 부대를 보내서 다 죽이라고 시켰어.”

소년이 끼어든다.

“체이, 너무 많이 말하는 것 같은데.”

“괜찮아. 광산 놈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노인들은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지. 적이니까 무조건 죽이라는 거야. 난 규모가 너무 작다고, 정찰대가 분명하니까 조용히 보내준 후에 방심하고 있을 진짜 병력을 기습하는 게 더 현명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내 싸움은 아니었으니까 잠자코 있었지.” 

옥련은 소년이 창을 든 손에 힘이 주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사냥 부대가 복귀하면서 시체가 된 마을 사람 셋을 데려왔어. 짐승 짓이 아니라, 사람 손에 죽었지. 습격 다음날 얼음뿔 순록을 사냥하던 중 당했다더군. 그래서 산 아래 민가를 습격했을 때 미처 못 죽인 생존자가 있다는 걸 알았어. 산 아래 숲에는 그 집 말고는 달리 사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죽인 그 사람이 내 눈 앞에 있는 것 같네”

옥련은 활시위를 당긴 오른주먹을 더욱 비틀어 쥔다.

“사지에서 원수를 만났으니 이 기회에 내 부하들 목숨값이나 받아야겠네요. 혼의 땅에 가면 당신들이 불태운 집 주인에게도 안부 전해줘요.”

“진정해, 진정. 우린 사냥 부대 소속이 아니야.”

머리를 살짝 틀어 의심하는 고갯짓을 해보이는 옥련.

“언니는 남쪽 땅에서 왔지?”

“내가 대답할 이유가 있나요?”

“질문 아니야. 여기서 볼일이 끝나면 남쪽 땅으로 돌아갈 거지?”

옥련은 말하지 않는다.

“대화를 좀 해보자고.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14 터전 잃은 고지대인이 모여 사는 동굴 입구에는 거대한 빙하를 통째로 깎아 만든 얼음 제단이 세워져 있다. 고지대의 샤먼들이 옛부터 정령에게 제물을 바치고 조상을 기렸던 신성한 장소다. 제단 둘레는 장정 이삼십 명이 양팔을 최대한 벌려도 손을 다 맞잡을 수 없고, 높이는 보통 소나무보다도 높다. 투명한 얼음 한 덩어리로 된 제단은, 먼동이 터오자 햇빛을 받아 푸르게 빛난다. 날이 밝자 마을이 분주해진다

얼음뿔 장식이 여섯 개나 달린 두건을 뒤집어쓴 제사장이 조각된 얼음 계단을 오른다. 계단은 얼음 제단의 주위를 빙 둘러 조각되어 있다. 새하얀 수염이 너무 길어서 자칫 계단에서 수염을 밟아 넘어질 것만 같다. 물론 그러지 않도록 오른팔을 들어 수염 중간을 받친다. 제사장의 뒤를 어린 샤먼 셋이 따른다. 제일 앞의 아이는 얼음뿔 순록의 뿔이 가득 담긴 나무통을, 그 다음 아이는 얼음뿔 순록의 내장이 담긴 가죽 자루를, 맨 뒤의 아이는 횃불을 겸하는 의례용 지팡이를 양 손으로 들고 계단을 오른다.

얼음 제단 꼭대기에는 같은 덩어리를 깎아 만든 의례용 그릇이 놓여 있다. 제사장은 어린 샤먼에게서 얼음뿔 하나를 받아들고는 그릇 위에 들고 짧은 주문을 왼다. 뿔을 그릇에 내려놓은 제사장은 엄숙하면서도 과장된 동작으로 불 붙은 지팡이를 들어 얼음뿔에 가져다댄다. 

잠시 후, 얼음뿔에 불이 붙으며 푸른 불꽃이 치솟는다. 얼음뿔이 타오르며 날린 투명한 가루가, 바람을 타고 퍼져나간다. 의식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푸른 불꽃이 잦아들 무렵 또 다른 얼음뿔을 그릇에 집어넣는 제사장. 제단 주위에선 주술사들이 저마다 주문을 읊조린다. 배우지 않은 자는 들어도 알지 못하는, 정령의 말이다.

제단 밑에 서 있던 하얀 털가죽 외투를 걸친 노인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한다.

“이번 습격이 마지막이어야 합니다, 나리. 날씨가 이보다 더 추워지면 바깥 활동은 불가합니다.”

남방식 예복을 입은 노인이 혀를 끌끌 찬다.

“그러니까 총공격을 감행하는 것 아닌가. 이번에야말로 광산을 점거한 사기꾼들을 완전히 쫓아내는 걸세. 이 땅 주인이 누구인지 가르쳐줘야지.”

“이 땅의 주인은 여기 사는 사람은 읽지도 못하는 글자로 쓰인 땅문서를 가진 사람입니까, 여기서 살아남아야 하는 젊은이들입니까?”

허리 굽은 노인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남방식 예복을 입은 노인 무리가 일제히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야크족 노인을 쏘아본다.

“제대로 농사지을 땅도 없이 도적질로 먹고살던 자네들을 광산에서 일하게 해준 은혜는 잊었나?”

“그러고보면 여기 젊은 친구들은 우리가 저 거짓말쟁이 놈들에게 속아서 광산을 빼앗긴 후에도 어떻게든 발 붙이고 뭉개려다가, 부정을 저지른 게 들통나서 쫓겨났다지? 화를 자초한 셈 아닌가. 도적질 해먹던 버릇은 어디 안 가는 게지.”

“투쟁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거야. 도적이 아니라 전사로써. 고결한 일이네. 젊은이들이 더 자랑스럽게 여겨야지.”

허리 굽은 노인은 더 말하지 않는다. 제단에서 푸르게 타오르는 불꽃은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자 더욱 아름답다. 다음날은 의식을 구경하는 사람도 절반으로 줄었다. 남방 야크 양식의 예복을 입은 노인들이 번갈아 나타나서 상황을 지켜보고, 보고를 받고, 꼭 한마디씩 던진다. 하루가 또 지난다. 제사장은 여전히 얼음뿔을 푸른 불길에 집어넣으며, 주술사들은 제단 발치에서 주문을 왼다.

 

#15 고지대인의 동굴 마을이 한창 어수선한 가운데, 체이와 천막촌 이웃들이 구석자리에 모여앉아 있다. 얼린 순록 고기를 불기운에 녹여서 채 익기도 전에 씹어먹기도 하고, 서로 안마를 해주기도 한다. 체이는 친밀한 행위엔 관심이 없는 듯 구부정하게 앉아 팔짱을 끼고 불꽃을 응시한다. 곧 샤먼들이 눈을 불러오면 사냥 부대가 출정한다. 체이 역시 마을을 떠날 기회를 잡아야 한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

눈 녹인 물에 말린 향초 가루를 타서 홀짝이던 노파가 체이에게 묻는다.

"어떤 길이 현명한 길인지에 대해서."

노파는 끌끌 웃는다. 노파는 자식들을 잃었고 체이는 부모를 잃었다. 이 천막촌에 모여 사는 이들은 친지를 잃고 별다른 연고가 없어 뭉친 것이다.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더냐. 앞일을 모르는데 현명한 길을 생각해봐야 무엇하느냐?"

"이 계절에 이기지도 못할 상대를 두고 목숨 걸고 싸우러 간다는 멍청이들 천지인데, 살 구멍을 찾아봐야지."

"뭐가 멍청한 짓이었는지는 지나고 나야 깨닫게 되는 게다."

"그럼 할멈은 우리가 왜 이런 꼴이 되었다고 생각해?"

"그러게 말이다."

"아무 생각 없잖아, 할멈도."

노파는 또 웃는다.

"그렇구나. 나이 먹으면 괜시리 젊은이들 일에 참견하고 싶어지는 법이지."

"알면 조용히 좀 해."

노파는 대답하지 않고 차를 한 모금 마신다. 하누가 천막 안에서 뒤척인다. 어른들은 체이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소년에게 창을 들려주고 싸움터로 내몰아서 손가락 두 개와 귀 하나를 잃게 만들었다. 체이는 첫 전투를 무탈하게 살아남았지만 그렇지 못한 친구도 있었다. 어린 남편이 다친 이후 체이는 간호를 핑계로 싸움에 참여하지 않았다.

허리를 숙이고 천막으로 들어가서는 붕대를 살핀 후 이불로 쓰는 산양 털가죽 외투를 고쳐 덮어준다. 푸석하고 생기 없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다 보니 하누가 눈을 뜬다. 하누는 체이 쪽으로 몸을 돌려 눕는다. 체이도 팔로 머리를 받치고 마주보며 눕는다. 

체이의 가족과 이웃해 살던 하누의 부모는 네 해 전 여름, 열세 살짜리 하누를 체이에게 장가들게 했다. 혼례가 끝나자 그들은 고드름을 잔뜩 실은 수레를 몰아 남쪽 땅으로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폐허에서 한 얘기 기억하지?”

“어쩌면.”

“망설임이 없어야 해. 나도 아저씨 아줌마 보고 싶네.”

하누는 고개를 끄덕이고, 체이는 바로 누워 눈을 감는다. 물론 체이가 하누의 부모를 만나고 싶은 이유란 분이 풀릴 때까지 그들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싶다는 것이다.

 

#16 눈은 밤에 내리기 시작하기에 사람들도 반응이 늦는다. 마을은 밤새 출정 준비로 잠들지 못한다. 먼 거리를 최대한 빨리 이동해야 하기에 개를 데려가지는 않을 예정이다. 전사들은 스키와 여분의 눈신발, 화살을 넉넉하게 챙기고는 활대를 몸에 건다. 창과 도끼 따위를 들고 살육 준비를 마친다. 어린 샤먼들이 얼음뿔 가루를 뿌린 순록 넓적다리 조각을 나눠주면, 전사들이 우적대며 씹어먹는다.

산 그림자가 물러가며 늦은 아침이 밝아오자 전사들의 기세도 달아오른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괜시리 시끄럽게 웃는다. 사냥 부대장은 화려한 장식술이 달린 창을 들어보이며 전의를 북돋는다. 떠날 시간이 되자 사냥 부대는 스키를 타고 산등성이를 미끄러져 내려갈 채비를 한다. 

그 때 사냥 부대의 앞을 키 큰 여인이 가로지른다. 모두 움직임을 멈춘다. 체이의 뒤를 하누가 따른다. 둘 모두 배낭과 무기를 들고 싸움에 나설 준비가 완료된 상태다. 사냥 부대장은 얼음뿔로 장식한 두건을 조금 젖히고는 호탕하게 웃는다.

“드디어 결심이 선 거냐! 겁쟁이 한 쌍.”

체이는 대단히 거북한 얼굴이다.

 

#17 소래는 배를 부여잡고 눈비탈을 미끄러졌다. 옆구리가 심하게 욱신거렸다. 수리부엉이에게 채였을 때, 발가락 힘이 어찌나 센지 등에 맨 활이 부러지며 활대가 몸통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살갗이 찢어진 것 같기도 하다. 녀석의 발톱은 순록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찢을 정도로 날카로웠고, 몸통을 죄는 힘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 집채만한 수리부엉이는 소래를 낚아채서는 눈보라를 뚫고 날아 둥지로 향했다.

세찬 바람과 옥죄어오는 발톱 덕에 몇 번이나 숨을 못 쉬어 졸도할 뻔했지만, 소래는 버텼다. 어쩌면 두텁게 껴입은 외투 덕에 소래의 덩치를 잘못 판단한 부엉이가 힘을 덜 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원래는 여름철 밤에 감히 개활지에 나온 짐승을 사냥하거나, 가끔은 얼음뿔 순록도 잡아가는 포식자다. 겨울이라 굶주렸기에 이런 날씨인데도 사냥에 나선 것이리라.

둥지는 계단처럼 켜켜이 쌓인 절벽 중간의, 커다란 구멍이었다. 바닥에는 나무껍질과 길다란 가지 등을 깔아 놓았다. 안쪽에서는 수리부엉이 새끼들이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잘 보니 다섯 마리 중 두 마리만 움직였다.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고 살아남은 새끼들은 하얀 솜털도 다 풀이 죽어 있었다. 그나마 새끼 수리부엉이는 허리께밖에 안 오는 크기라 다행이라고, 소래는 생각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둥지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소래를, 큰 부엉이가 계속 가로막았다. 나무토막 같은 다리로 소래를 짓밟고는, 외투를 붙잡아 다시 둥지 한가운데, 새끼들 사이에 내려놓았다. 소래는 먹잇감을 시험하듯 자신을 쪼아대는 새끼 부엉이들을 걷어차 밀어내며 다시 둥지 가장자리로 기어갔다. 이대로는 금방 기운이 다 빠져 맥없이 잡아먹히게 될 터. 

소래는 생각을 바꿔 죽은 새끼 부엉이 밑으로 파고들었다. 차갑고 축축한 시체에서 빠진 솜털이 얼굴에 들러붙었다. 날이 차서 썩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소래는 새끼 부엉이들의 부리가 닿지 않도록 시체 밑 깊숙히 기어들어갔다. 새끼들은 시체를 치울 힘이 모자라 울어대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자 큰 녀석이 나섰다. 자기 새끼들의 시체를 헤집으며 소래를 찾았다.

커다란 수리부엉이가 새끼의 시체를 치우기 위해 다리를 들고 날개를 펼친 순간 소래는 몸을 튕겼다. 녀석의 두 발이 자유롭지 못한 찰나를 노려 동굴 입구로 달렸다. 예리한 발톱이 등을 노렸고, 그에 붙잡힌 순록 가죽 외투가 찢어지며 소래는 튕기듯 밖으로 뛰쳐나왔다. 지체 않고 절벽 밑을 향해 몸을 날렸다.

소래는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절벽의 바로 아래 단으로 두어 길을 떨어졌다. 항상 쌓여 있는 눈더미 덕에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부엉이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허우적대며 가장자리로 기어나온 소래는 즉시 다음 단으로 뛰어내렸다. 눈 속에 파묻혀서 가만히 있으면 못 찾지 않을까. 그러나 허튼 생각이다. 곧바로 몸이 얼어서 움직이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소래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음 단으로, 또 그 다음 단으로.

더는 뛰어내릴 절벽이 없자 마침내 평평한 땅에 닿았음을 알았다. 아직 눈보라는 거세게 불었고 언제 하늘에서 거대한 맹금이 덮쳐올지 알 수 없다. 순록 가죽 외투는 찢기고 떨어져나가 절벽 어딘가로 흩어져버렸다. 절벽 발치에 눈이 흘러내려 생긴 비탈을 타고 내려갔다. 산양의 털로 짠 조끼와 누비옷 사이로 눈가루가 스며들었다. 

눈이 턱 밑까지 쌓여서 도저히 걷는 게 불가능했다. 신발 속으로 눈이 들어와 발가락까지 젖었다. 소래는 팔을 마구 휘저어 길을 내지만 이대로는 어디라도 도달할 가망이 없다. 머리 위에는 분명 수리부엉이가 도망친 먹이를 찾아 맴돌고 있었다. 소래는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고 일단 팔다리의 힘을 뺐다.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고르자 배의 통증이 심해졌다. 바람에 날린 눈송이가 얼굴을 긁었다. 위압적인 폭풍 속에서 부엉이의 날갯짓이 들리는 듯도 했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들켜도 죽는다. 움직이는 수밖에. 이미 몸의 떨림을 주체하기 힘든 지경이었다. 소래는 숨을 크게 들이키고는 팔을 뻗었다. 그리고 한 걸음을 내딛자마자 발 아래 얼어 있던 땅이 꺼지며 암흑 속으로 떨어졌다.

 

#18 옥련은 외투 안주머니에서 털실로 감은 유리병을 꺼내 마개를 뽑는다. 독한 화주를 한모금 들이키자 목구멍과 가슴팍에 열이 오른다. 유적 지하에서 체이가 작별 선물로 준 것이다. 술에 취해 길 잃고 얼어죽으란 뜻인가 했으나,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떨릴 때 마시면 나아갈 힘이 생겼다. 또한 고지대인 부부가 자신들이 먹던 데운 수오라트와 야생딸기 죽, 끓인 산양 젖을 나누어 주었기에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

체이가 일러준 대로 폭설에도 미처 파묻히지 않은, 높이 솟은 돌탑의 행렬을 따라 전진한다. 얼음 절벽 아래, 바위로 된 경사면에서 봤던 돌탑과 흡사했으나 훨씬 커다랗고 잘 다듬어진 바위를 사용했다. 모두 옛 사람들이 남긴 폐허였지만, 산 아래 호숫가의 썩어가는 오두막집과는 다르다. 여기서 흐른 세월은 돌탑이 무너지고 돌벽에 금이 갈 정도의 시간이었다. 돌탑 사이사이에는 관목 가지가 눈 위로 삐져나와 거치적거린다.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지고, 꼭대기에 다다르자 돌탑의 행렬도 끝난다. 고갯마루에 난 길 양옆으로 돌탑 두 개가 세워져 어떤 경계를 표시하는 듯하다. 옥련의 앞에는 서쪽으로 방금 고개를 넘은 산줄기가 우뚝 버티고 섰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눈보라 사이사이로 널찍이 펼쳐진 설원이 보인다. 설원의 끝에 가면 다시금 대지가 솟아오르며 북방 야크 고원에서도 최고봉이 된다. 거기에 고드름 광산이 있다. 옥련은 등에 짊어지고 온 스키를 꺼내 눈신발 밑에 동여맨다.

내리막길을 미끄러져 내려가자 눈송이가 드러난 이마에 와서 부딪힌다. 지금껏 산을 기어올라온 고생에 비하면 이토록 편할 수가 없지만, 속도를 조절하지 않으면 사고를 당하게 되어 있다. 스키 타는 데 익숙하지는 않다. 경사로를 비스듬히 미끄러지다 옆으로 쓰러져 멈추고, 다시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는 일을 반복한다. 

며칠째 계속되는 폭풍은 오늘도 잦아들 기색이 없다. 새하얗기만 하던 하늘이 붉게 물들고, 부지불식간에 밤이 온다. 옥련은 병을 거꾸로 들어 마지막 남은 화주를 입 안에 털어넣고, 지친 팔에서 유리병을 떨어뜨린다. 병은 눈 속에 파묻히고 곧 보이지 않게 된다.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바람 소리에 가려 뭐라고 하는지는 알아듣기 어렵다. 점점 목소리가 또렷해는데, 반쯤 졸던 옥련은 화들짝 놀라서 몸을 움찔한다. 주변을 살피니 눈안개 너머로 노랗게 빛나는 점들이 보인다. 적에게 포위당한 줄 알고 서둘러 무기를 꺼내려 하나, 자세히 보니 불빛이 다가오지 않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횃불들.

옥련은 스키를 벗겨낼 정신도 없어서 단검을 꺼내 눈신발에 동여맨 밧줄을 자른다. 눈을 파내어 쌓아올린 턱을 넘어 구덩이로 뛰어든다. 구덩이 속에도 무릎까지 눈이 쌓였지만 바깥보다는 훨씬 사정이 낫다. 가장 가까운 횃불을 향해 달려간다. 여기가 고지대 야크인의 주둔지이며, 외지인을 거리낌 없이 죽이려 드는 전사들이라도 상관없다. 추위를 상대로는 싸울 수 없지만 사람을 상대로는 어떻게든 결과는 나올 테니까. 

냉기와 눈보라를 뚫고 적갈색 털가죽 외투를 걸친 옥련이 달려들자 모닥불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기겁하여 나자빠진다. 

"뭐야?!"

"누구냐?"

허옇게 눈가루가 들러붙은 망토로 꽁꽁 동여맨 사람들은 품에서 단검을 꺼내기도 하고, 구덩이 벽에 기대두었던 창이나 연장 등을 찾아든다. 옥련 역시 화살을 시위에 메긴 상태로 대치한다. 숨을 두어 차례 들이킬 만큼 시간이 흐르고 나서, 한 남자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반색하며 외친다. 옥련이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언어로.

"당신 사막 사람 아니오?!"

그가 외날 단검을 허리춤에 꽂아넣고는 털모자를 벗자 까무잡잡한 피부에 옥련과 같은 검은 곱슬머리가 흘러내린다. 옥련은 스스로도 조금 놀라며 머리를 여우 목도리가 흘러내리도록 한다.

"여기서 동족을 만날 줄은 몰랐네요."

검은 곱슬머리를 한 남자는 서툰 야크 말로 동료들에게 경계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옥련은 자신과 동족이니 고지대인과 한통속일 리 없다는 얘기다. 그들이 주저하며 무기를 거두자 옥련도 겨눈 활을 내리고는 유창한 남방 야크 억양으로 말을 보탠다.

"광산 측에 고용된 사냥꾼이에요. 괜찮다면, 광산 책임자를 만나게 해줘요."

곡괭이를 어깨에 걸친 야크 여인이 옥련을 흘겨보며 내뱉는다.

"우리 말을 잘 하는군. 하지만 사막 사람은 믿기 힘들다. 특히나 이런 눈보라 속에서 귀신처럼 뛰쳐나오다니. 고지대인들의 첩자가 아닌 줄은 어떻게 아나? 너희 사막 놈들은 돈이라면 환장을 하니까 고지대 놈들이 매수했을 수도 있지."

"이걸 보여주죠."

옥련은 아주 천천히 품 속에 손을 넣어서 밀봉된 목재 원통을 꺼낸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느린 동작으로 뚜껑을 열고 양피지 두루마리를 손가락으로 끄집어낸다. 펼쳐봤더니, 잉크로 쓴 글자는 물에 젖어 온통 번져 있다.

"우린 글 못 읽는다. 제대로 된 글씨 같지도 않다만."

곡괭이를 든 야크 여인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옥련은 손가락으로 두루마리 밑단의 황금색 인장을 가리킨다.

"이건 알아보겠죠. 광산 측에서 찍은 거에요. 정확히는 광산 전체를 사들인 대상의 문장이죠."

사막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 인장을 자세히 살핀다.

"맞소. 우리 숙소에 붙은 공문에 찍혀 있는 것과 같군."

불을 쬐던 광산 피고용인들은 그제서야 자세와 표정을 누그러뜨린다. 곡괭이를 어깨에 걸친 야크 여인만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옥련의 손에서 양피지를 낚아채 들여다본다. 그리고는 입술을 이죽거리며 돌려준다.

"대체 이 엄동설한에 눈보라까지 왔는데 어디서 뭘 하다 갑자기 나타났나?"

"고지대인에게 몇 번이나 죽을 뻔하고는 도망쳐왔어요. 그보다 댁들이야말로 이 날씨에 밖에 모여서 뭘 하고 있었죠?"

"네 알 바 아니다."

사막 남자가 난처하게 웃으며 끼어든다.

"야간 경비조요. 보다시피 뭘 경비하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다 보니까 모여서 몸을 녹이고 있던 거요."

"광산 책임자에게 할 말이 있으니 좀 안내해 주겠어요?"

야크 여인은 곡괭이 대가리를 눈 덮인 땅에 푹 박아넣는다.

"놈들의 공격에서 도망쳤다는 것도, 이 날씨에 혼자서 설원을 건너 광산을 찾아온 것도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군. 정체가 뭔가?"

"긴 얘기지만 시간이 없어요. 곧 습격이 시작될 거야."

 

#19 헤아리기 어려운 세월 동안 다져진 얼음층은 투명했고, 은은히 푸른 빛을 발했다. 산맥의 무게를 짊어진 채 버텨온 빙하의 세계. 여기엔 바람도 불지 않고 눈발이 날리지도 않았다. 어디서 빛이 들어오는지 알 수 없었으나, 해가 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벽도, 머리 위도, 발 밑도 순전히 얼음 뿐. 소래는 오른다리를 절며 미끄러지지 않도록 천천히 걸었다. 온몸이 전부 아파서 어디를 다쳤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얼음동굴은 계속 아래로 향했다.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산 밑에 동굴이야 얼마든 있을 수 있는 일이나, 하필 소래가 떨어져내린 굴은 밑으로 향하다니. 나가는 길을 찾지 못하면 소래의 목숨은 없었다.

내려갈수록 벽에서 발하는 광채도 옅어졌다. 그리고 투명한 얼음벽 속에 뭔가 보이기 시작했다. 검고 뒤틀린 형상. 산 아래의 호수 바닥에서 자라는 수초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자세히 보자, 곧 얼음 속에 갇힌 시체임을 알았다. 거대한 짐승의 뼈, 혹은 아직 떨어져나가지 않은 거죽 등이 그대로 얼어 있었다. 심지어는 살았을 때의 형상이 온전히 남은 녀석도 있었다. 얼음벽 더 깊은 곳에는 얼어붙은 시체가 더 많이 보였으나, 빛이 닿지 않아 뚜렷하게는 보이지 않았다.

소래는 그런 짐승을 본 적 없었다. 크기부터가 지금 이 땅에 사는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였다. 줄지어 난 갈비뼈 하나하나가 천막의 기둥으로 쓰고도 남을 정도. 소래는 오한이 들어 몸을 떨며 이대로 나아가는 것이 좋을지 고민했다. 허나 다른 방법은 애초에 없었다. 떨어져내린 틈은 깎아지른 벽이었고, 기어오르기엔 너무 높았다.

'잘못된 선택을 했나.'

잘못되었다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애초에 손님을 들이지 말았어야 했을 터. 고원으로 기어오르지 말았어야 했고, 옥련을 구해주지도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후회는 그저 뒤돌아볼 때 찾아올 뿐이다. 손님을 들였다면 해를 입지 않게 지키는 것이 주인의 도리이고, 집을 불태우고 자신을 죽일 뻔한 도적 떼에겐 그대로 갚아줘야 맞다.

'필요한 결정을 했을 뿐이지.'

이제 빛은 없었다. 등 뒤를 돌아보면, 저 위에 희미하게나마 아직 밝은 통로가 보이는 듯했다. 소래는 어둠 속에서 울리는 발소리에 의존해 걸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로 모든 발짝을 재며 걷다보니 급격하게 피로했다. 그러다가 내려가는 경사가 끝나는 지점에 도달했다. 발끝이 예상보다 일찍 지면에 닿으며 경직된 근육이 놀라 휘청했다.

그 앞은 평지였다. 허나 소래는 얼마 가지 못하고 장애물에 가로막혔다. 바위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얼음도 아니었다. 뻣뻣한 갈대와도 같은 뭉치가 얼굴과 손 피부에 닿았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갈대 뭉치는 벽처럼 버티고 있었다. 위, 아래, 양 옆을 만져봐도 똑같은 갈대 뭉치. 한 웅큼을 쥐어 몇 번 잡아당겨 보았는데 빠지지 않자, 소래는 더 위쪽 갈대를 부여잡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키에 머리 두 개 정도를 더한 높이를 오르자 갈대 벽의 경사가 아주 낮아졌다. 두 발로 설 수 있을 정도였다. 서너 걸음을 떼자, 발밑이 크게 움직여서 소래는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갈대 뭉치를 꽉 붙들었다.

소래는 곧 깨달았다. 손에 쥐고 있는 건 갈대가 아니라 짐승의 털이었다. 아주 거대하고, 잠들어 있던 짐승. 소래는 짐승의 잠을 깨웠고, 짐승은 뼈마디가 울리도록 웅웅대는 신음을 내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래는 꼼짝없이 죽겠구나 생각하여 온 힘을 다해 매달렸다. 적어도 밟혀 죽는 일만은 피하기 위해. 짐승은 누군가 자기 몸을 밟고 올라 잠을 깨웠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지개를 켜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소래가 매달려 있어도 신경쓰지 않은 채 걷기 시작했다.

한참 후 소래는 시야에 빛이 보임을 깨달았다. 짐승은 투명해 보이기까지 하는 흰 털로 뒤덮인 팔을 뻗어 깎아지른 절벽을 가볍게 타올랐다. 소래는 짐승의 등에 매달린 채 산맥의 틈새를 탈출했지만, 다음 행동을 결정할 수 없었다.    

 

#20 광산 입구엔 잡다한 시설과 장비가 방치되어 있다. 기름 먹인 천을 씌워서 비와 눈을 막은 것도 있지만 그대로 얼어붙게 내버려둔 설비도 많다. 한구석에는 목재가 썩어서 쓸 수 없는 수레나 기중기, 연장 자루 따위가 쌓여 있다. 옥련은 광산에 사람이 모자라서 멀쩡한 자재와 쓰레기를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음을 눈치챈다.

옥련이 만난 야간 경비조를 빼면 광산 외부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유리 등불이 곳곳에 설치되었지만 불은 없다. 정문에는 폭풍에 꺼질까 위태한 횃불 두 개. 통나무 기둥과 판자를 대서 절반 정도 막아놓았고, 작은 구멍을 내서 간이 입구로 삼았다. 막아 놓지만 않았다면 말 위에 사람이 서서 지날 수 있을 정도로 큰 입구다.

주 갱도 역시 벽에 간간히 걸린 횃불을 제외하면 인기척조차 없다. 옥련을 안내하는 사막 남자는 갱도가 갈라지는 지점까지 동행하고는, 오른쪽 통로로 가서 처음으로 나오는 계단을 오르면 광산 감독관의 거처가 나온다고 말한다. 감독관의 얼굴을 본 지 하도 오래되어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옥련은 고맙다고 말하고는 사막 남자와 헤어져 걸어간다.

오른쪽 통로는 갱도가 아닌 부대시설을 몰아넣은 듯하다. 처음엔 음식 냄새가 풍기더니, 곧 온기가 느껴진다. 점점 밝아지는 불빛. 통로를 가로질러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남루한 외투 차림이거나 혹은 아예 속옷만 입고 있다. 그들은 여기저기 모닥불을 피워놓고 모여앉아 죽을 데우거나, 술로 보이는 음료를 홀짝인다. 옥련이 지나가자 빤히 바라보지만 누구 하나 말을 걸지는 않는다.

계단을 오르니 나무로 된 문짝 하나가 바로 나타난다. 옥련은 문고리를 두드려 손님이 왔음을 알린다. 하지만 기다려도 대답이 없고, 문고리를 한번 더 두드린 후 옥련은 문을 밀어 본다. 광산 감독관의 방은 후덥지근하다. 환기가 되지 않아 불쾌한 냄새가 가득하다. 그리고 정작 감독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없어요?"

방 안쪽의 석재 벽난로에 다가가자, 그제서야 침대 위에 웅크린 감독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곤히 잠들어 있어 그냥 이불 더미로 보여도 이상하지 않다. 바닥에는 음식을 절반쯤 남긴 은쟁반과 빈 병이 잔뜩 굴러다닌다. 이제 보니 책상에도, 서랍장에도, 온통 음식을 남긴 접시 투성이다. 상해서 악취가 나는 것들도 있다. 옥련은 눈쌀을 찌푸리며 침대다리를 붙잡고 흔든다.

“이봐요, 일어나.”

아무 반응이 없다. 하지만 이불이 조금 내려가서 검은 곱슬머리가 드러난다. 생각해보면 광산 감독관은 대상이 파견했으니 사막 사람인 게 당연하다.

"일어나, 일어나!"

잠에 빠져 있던 광산 감독관은 옥련이 사막 말로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눈을 뜬다. 눈곱 낀 눈으로 옥련을 올려다보더니, 잠깐 멍한 표정을 짓다가 펄쩍 뛴다.

"다, 다, 당신 누구야!"

옥련은 한발짝 물러나 광산 감독이 이불에서 나와 몸을 추스릴 여유를 준다. 그리고 말한다.

"당신이 이 광산 책임자죠?"

감독은 당황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며 대답한다.

"그렇긴 한데, 너야말로 누구지?"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가만, 사막 사람이군. 광산에 있는 사막 사람 중에 너 같은 자는 본 적 없는데."

"오늘 온 신입이에요. 질문할 게 좀 있어요."

"동족을 만난 건 반갑지만 네 정체도 모르면서 질문을 받아줄 순 없지. 그보다 경비조는 뭘 하고 있는......"

"경비조라면 이미 만났어요. 이걸 보여줬더니 들여보내 주더라고."

옥련은 품에서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내 펼쳐보인다. 감독은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에서 눈곱을 긁어내고는 고개만 삐죽 내밀어 두루마리를 읽는다.

"이게 뭐야, 글씨가 전부 번져있는데. 아니, 잠깐만. 황금 인장?"

감독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황금색 인장, 다, 다, 당신이 직접 받은 건가?"

"다섯 번째 가문의 막내가 직접 찍은 거에요. 내 고용주. 그 집안은 고드름 광산 사업에 관심이 많으니까요."

감독은 신속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맡에 걸어둔 외투를 걸치고는 옥련의 팔목을 붙잡는다.

"내가 보낸, 제가 보낸 서신들을 가주님께서 받아보셨습니까? 그래서 오신 겁니까?"

"일단은 맞아요. 손 좀 놔줄래요?"

"미, 미안합니다. 헌데 식량과 증원이 필요하다는 요청은."

"편지를 언제 몇 번이나 보냈죠?"

"여름에만 적어도 다섯 번은 보냈을 겁니다. 전부 발 빠른 말을 골라서 보냈습니다."

"한 통밖에 도착하지 않았어요. 나머지는 고지대인들에게 살해당했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보급마차와 인원도 마찬가지에요. 대로를 따라오다가 불에 타서 재만 남은 마차와 시체 더미를 봤어요."

"그럴 수가."

"내가 고용주에게 뭐라고 들었는지 알려줄게요. 광산 감독관이 쓰기를, 광부와 경비대 사이에 설인을 목격했다는 소문이 돌아서 두려움에 떨고 생산량이 떨어지고 있다. 그 후로 소식이 끊겨서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없으니 위험하더라도 누군가 찾아가서 진상을 파악해줬으면 한다."

"설인이 나타났다고 썼다면 제가 제일 처음 보낸 서신이겠군요. 그럼 원군을 데려오신 겁니까?"

"말했죠. 전부 죽었어. 살아남은 건 나 혼자야."

"데려오신 병력이 전부 죽었다고요? 고지대인의 짓입니까?"

“고지대인? 나는 설인을 찾아왔다고 했을 텐데요. 내 부하들도 사람과 싸우기 위한 병력은 아니었어요. 짐승을 사냥할 준비를 하고 온 거지. 그런데 짐승을 찾기도 전에 전부 살해당했어요. 누가 한 짓이라고 생각해.”

감독의 시선은 허공을 헤맨다.

"이, 이 땅에는 불온한 무리가 있습니다."

"맞아. 그 말대로에요. 설인이 나타났다고 썼죠? 그럼 설인을 본 적은 있어요?"

감독의 표정이 굳는다.

 

#21 감독관은 책상 앞 자기 자리를 내주려 했지만 옥련이 거부했다. 감독이 어색한 자세로 의자에 앉고, 옥련은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은 채로 질답이 계속된다. 옥련은 팔짱을 끼고. 인상을 쓰며 노려보자 감독관은 고개를 푹 숙이고 움츠러든다.

"겨울을 날 식량도 부족하고, 싸울 사람도 없습니다. 이대로는 광산을 지켜낼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

"충분한 식량과 인원만 있다면 설인 사태를 마무리지을 수 있습니다."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모르겠네. 당신에게 자원이 충분할 때도 상황을 통제하는 데 실패해서 도움을 요청한 게 아니에요?

"맞습니다. 하지만 증원 병력조차도 잃지 않았습니까."

"이젠 내 탓을 하는 거에요? 그쪽이 설인 얘기는 했어도 산적떼가 돌아다닌다는 얘기는 싹 빼놨으니까 그렇지 않겠어요? 애초에 난 사냥꾼이야. 산적을 토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체불명의 괴물을 박멸하라고 고용된 거죠. 광산에 위협이 되는 세력은 당신이 책임지고 막았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고, 고지대인은 광산이 처음 지어질 때부터 골칫거리였습니다. 이미 가주님께 고지대인의 불온한 준동을 보고한 적 있기에 당연히 그 위험성은 헤아리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쪽이 위협을 다스리고 있을 거라고 믿었던 거겠죠. 나에겐 고지대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설인 이야기만 했으니까. 딱 그 건만 해결하면 될 줄 알았어요."

"서신이 한 통밖에 도착하지 않아서입니다. 그 다음에 보낸 서신들에는 고지대인 놈들이 점점 더 대담하게 광산을 넘보고 있다고 썼습니다."

"아쉽지만 다음 서신들은 본 적 없어서 확신하지 못하겠네요. 그러게 첫 편지를 잘 썼어야죠. 내 부하들은 누가 공격해오는지도 모르고 죽어갔다고. 현지의 위협에 대해 경고를 받지 못했으니까요. 그리고 중요한 얘기를 피해가는 것 같네? 아직 설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했어요. 난 임무를 완수해야 하니까, 내게 필요한 답을 내놔요."

"이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식량을 아끼면서 겨울이 지나기만 기다릴 수밖에요. 날씨가 풀리기 전까지 광산에서 지내실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옥련은 황금 인장이 찍힌 두루마리를 말아서 품에 넣는다.

"사람 말을 똑바로 들어줄래요? 이 황금 인장 때문에 제대로 생각을 못하는 모양이네. 내가 당신 무능을 고용주에게 일러바칠까봐 그러는 건가. 진짜로 무서워해야 하는 게 뭔지 알아요?"

"넘겨짚지 마세요."

"고용주는 세상 반대편에 있어.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으리으리한 의자에 앉아 하루에도 보고서를 수천 개는 읽겠지. 당신이 써올린 편지 한 장 때문에 이 먼 땅에 와서 죽은 사람은 내 부하들이야. 그리고 지금도 고지대인의 사냥 부대가 총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광산으로 달려오는 중이죠."

“뭐라고요?”

“곧 습격이 있을 거에요.”

“그런 정보는 없었습니다.”

"난 조금 전에 설원을 직접 건너왔고, 보고 들은 걸로 판단해요. 그쪽보다는 여기 상황을 더 잘 파악하고 있을 거라고. 그쪽이야말로 도움이 안 될 것 같으니까 여기서 좀 쉬고 있어요."

감독의 말이 빨라진다.

"가, 가주님께서 당신에게 고지대인의 위험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게 제 잘못은 아닙니다."

"고지대인이 얼마나 위험한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건 아닐까? 그쪽이 이 땅의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하지 않은 탓에. 설인 사태라는 이상현상만 해결하면 다 잘 돌아가고 있다고 믿었던 거겠죠."

"저더러 거짓말을 했다고 하는 건가요."

옥련은 품에서 단도를 꺼내 책상에 내려찍는다. 감독은 크게 놀라 의자째 넘어갈 뻔하지만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잡는다. 그 눈에 적의가 깃든다.

"이 광산 책임자는 접니다. 이 광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돌아가서 결과를 보고하지 않으면 조사대가 또 오겠죠. 점점 더 큰 규모로. 언제까지 거짓으로 둘러댈 수 있을까."

"다음 사람은 설인의 습격에 몰살당하지 않는 유능한 지휘관을 보내달라고 하면 되겠군요."

옥련은 자신의 가슴께를 가리키며 묻는다.

"이 두루마리에 원래 뭐라고 써있었는지 알아요? 필요하다면 광산의 지휘권을 내가 취해도 된다는 거야. 감독관이 부재하거나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면요."

감독은 벌떡 일어선다.

"경비병!"

하지만 문 밖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안 와. 밖에는 아무도 없어요. 그쪽이 여기서 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는데 누가 경비를 서겠어요?"

"제길."

감독관은 뒤쪽 벽에 걸린 검을 뽑는다. 똑바로 서자 사막 사람 치고는 덩치가 크다. 옥련은 책상에 걸터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는다.

"넌 가주님이 보낸 조사대가 아닌 거야. 지휘관을 죽이고 일부러 두루마리의 내용을 지워서 혼란을 도모한 거지. 반란이야, 반란. 여기서 진압해주마."

잠시 후, 옥련은 팔다리가 꽁꽁 묶인 채 엎어져 있는 감독관 위에 올라타 앉는다. 감독이 고통스럽게 신음한다. 얼굴 옆 나무 바닥에는 단도가 꽂혀 있다.

"두 번째 말하는데, 나는 살인자가 아니라 사냥꾼이에요.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협조를 좀 해줘요."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나?"

"여기 광부들만큼이나 당신 안위에 관심 없는 사람을 찾기 힘들 것 같은데요."

옥련이 자세를 바꾸자 감독은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흘린다.

"우선 설인 편지에 대해서 사실대로 말을 좀 해봐요. 설인이 있기는 있어? 내 생각에는 지어낸 얘기 같은데."

그러면서 감독관의 팔을 꺾자 감독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버둥거린다. 

"제발, 제발 그만. 다 말하겠습니다."

"그래야죠."

"설인은, 설인은 내가 만들어낸 말이 맞습니다. 고지대인의 습격 때문에 발생한 피해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놈들을 만나보셨겠죠. 헉, 헉."

"만나본 정도가 아니죠."

"편지에 지어낸 말을 쓴 일은, 실수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 사정을 좀 헤아려 주세요. 정말 두려웠습니다."

"무슨 사정?"

"저도 상인 가문 출신이지만, 보잘것없는 부모의 보잘것없는 자식이었습니다. 가주님 밑에서 일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옥련은 팔을 다시 꺾는다. 감독이 두 다리로 번갈아 바닥을 찬다.

"겨, 결국은 제 판단에 착오가 있었다는 말씀을 올리기가 너무 무서워서, 둘러대려던 겁니다. 절 믿어주시고 이런 자리를 맡겨주신 가주님께 너무 죄송해서."

"그보다는 광산 운영에 실패를 사실대로 보고할 용기가 없었다고 해야 정확하겠죠. 이러고 있을 시간도 없고, 내 일 하는 데 방해되니까 걸리적거리지 말고 얌전히 있어요.”

감독은 몸부림친다.

 

#22 눈보라는 여전하다. 옥련은 광산 밖의 초소에서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감독관을 포박해 놓긴 했지만 유사시에 광부와 용병 무리를 통제할 사람이 없어서 문제가 되진 않을 듯하다. 이제까지도 광산 습격이 발생했을 때 감독이 제대로 된 지휘를 한 적은 아예 없다고, 사막 남자가 말했다. 대신 용병 무리에서 제일 고참이 전투에서 앞장서 왔다고.

고지대인의 습격을 감지하면 경비조가 나팔을 불어 알릴 것이다. 광산 내부의 병력이 본격적으로 대응을 시작하기 전에 옥련이 해야 할 일이 있다. 체이와 그 일행을 찾아야 한다. 경비조에게는 투항자가 있을 거라고 설명을 해두었지만,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상황을 통제할 수 때문에. 놈들은 소래의 집을 불태웠을 때처럼 소리 없이 공격해올 것이다. 허나 체이에겐 미리 접근을 알릴 수 있도록 수를 써 두었다. 언제 어디서 들려올지 모르는 신호를 기다리는데, 사막 남자가 목에 걸고 있는 장신구가 눈에 띈다.

"그게 고드름인가요?"

사막 남자는 졸며 꾸벅대다가 옥련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홱 치켜든다.

"뭐요? 아, 이거. 맞소. 여기서 일하던 야크 친구에게 받은 거요"

엄지손가락만한 고드름 조각에 실을 꿰어 만든 목걸이다. 제대로 세공된 물건이 아닌데도 그 자체로 보기가 좋다. 은은하게 광택이 나는 듯도 하다.

"친한 친구였나 보네요."

"딱히 그렇지도 않았소. 다들 하나씩은 받았으니까. 여기 사는 사람들이 광산서 쫓겨나면서 이런 걸 가지고 있다가 죄 몰수당했는데, 그러느니 차라리 선물로 주겠다더군."

"여기 사는 사람들? 고지대인? 광산에서 쫓겨났다면 원래 여기서 고지대인들도 일을 했단 뜻인가요."

옥련이 묻자 사막 남자는 입술을 비죽 내밀며 끄덕인다.

"예전에는. 광부 중에 절반 정도는 이 땅 사람들이었소. 어느 날 단체로 고드름을 빼돌렸다면서 감독이 전부 쫓아냈지. 그런데 그 빼돌린 고드름이란 게 뭔지 아시오? 바로 이거란 말요. 이 장신구, 이 쬐끄만 것들. 내다 팔 물건 캐고 나서 떨어진 부스러기로 만든 거지."

사막 남자는 피식 웃는다.

"그거 주워다가 목걸이로 만들어서 걸고 다녔다고, 도둑놈들로 몰아서 죄다 쫓아냈지 뭐요. 당연히 산 사람들은 여기서 일 못하면 굶어죽는다면서 난리가 났지. 하기사 이 산꼭대기서 농사를 짓겠소, 뭘 하겠소. 근데 군인들 데려다가 광산 밖에 모여살던 오두막까지 부숴버리더라고."

옥련은 눈쌀을 찌푸린다.

"저 감독관이 시켜서?"

"맞소."

"왜요?"

"말했잖소. 도둑질 했다고 그랬다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러나 옥련이 질문을 마치기 전에 바람을 가르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온다. 피리를 부는 것도 같고, 큰 새가 우는 소리 같기도 하다. 폭풍 속에서도 뚜렷하게 들리는 음색. 옥련이 체이에게 건넸던 효시다. 소리를 내도록 속을 파낸 화살을 쏴서 신호를 보내기로 약속했고, 지금 체이가 광산으로 접근 중이다.

옥련은 눈보라 너머로 광산 측 인원들이 횃불을 들고 움직이는 걸 본다. 이미 투항자를 공격하지 말라고 말은 해두었지만, 모르는 일이다. 옥련 역시 횃불을 빼들고는 초소 밖으로 달려나간다. 스키를 신고 초소가 위치한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간다. 어느 방향에서 나타날지 모른다.

 

#23 체이와 하누는 몸을 숙인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리를 찬다. 선봉을 맡아 정찰을 다녀오겠다는 핑계로 사냥 부대에서 이탈하여 쉬지 않고 달렸다. 사냥 부대장은 도움이 될 거라며 전사 한 명을 붙여주었고, 체이는 하누가 보는 앞에서 그를 살해해야 했다.

멀리서 노란 불빛이 모여있는 것을 발견했을 땐 헉 하고 한숨이 터져나왔다. 곧바로 화살통에서 옥련이 건네준 효시를 찾아내 하늘로 쏘았다. 생각보다 훨씬 크고 맑은 소리가 났다. 효시의 소리에 반응하여 눈보라 너머로 작은 불빛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체이는 하누를 앞세우고 걷는다. 그리고 몇 걸음을 더 가자, 횃불 하나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깨닫는다. 체이는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활시위에 살을 메기고는 기다린다. 하누도 창을 양손으로 붙들어 쥔다.

옥련은 체이가 눈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 알지 못한다. 밤인 데다 눈송이가 굵으니 시계가 좋을 리 없다. 두터운 외투를 껴입어서 한 눈에 알아보기 쉽지 않기에 둘 모두 흠칫 놀라지만, 두건 밑 얼굴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씨익 웃는다. 옥련이 몸을 돌리며 말한다.

"빨리. 당신네 식구들이 곧 들이닥치겠군요."

"당장 뒷꽁무니에 쫓아오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옥련과 체이가 함께 경비초소들이 위치한 경계를 넘어 들어오자, 무기를 든 광산 측 사람들이 달려온다. 그들은 얼음뿔 장식이 달린 망토를 뒤집어쓴 체이와 그 일행인 하누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살펴보더니, 이내 반색을 한다. 야크족 광부 한 명이 하누와 서로 이름을 부르며 부둥켜안고, 체이 역시 다른 사람들과 이미 면식이 있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당신들도 여기서 일했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보군요."

"옛날 얘기를 들은 모양이지? 그 때는 우리도 지금처럼 미치지는 않았어."

누군가 야크 말로 외친다.

"습격대가 온다고 들었는데, 그게 진짜요?"

체이는 잊고 있었던 일을 떠올린 것처럼 눈빛이 변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당장. 사냥 부대가 언제라도 들이닥칠 거야."

경비조가 나팔 소리가 불자, 비좁은 광산 입구에서 무장한 용병들이 뛰쳐나온다. 용병들은 창칼만이 아니라 화약창을 들고 있다. 옥련도 그런 무기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체이는 화약창을 든 용병을 보자마자 크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잡아, 잡아!"

용병들이 얼음뿔 장식 망토를 보고는 몰려든다. 화약창을 들이대자 체이와 하누는 방어 자세를 취한다. 이에 경비조가 용병들을 가로막는다.

"투항자에요, 투항자."

"예전부터 알던 사람들이야. 우리한테 습격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러 왔어."

용병 중 제일 늙고 얼굴에 상처도 많은 남자가 걸어나오더니, 무기를 거두도록 명령한다. 체이가 목을 가다듬고는 말한다.

"이 인원이 전부야? 지금 오는 사냥 부대는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큰 규모야. 머릿수에서 상대가 안 돼."

늙은 용병은 목과 어깨에 털장식을 얹은 가죽 갑옷을 입었다. 그가 체이를 평가하듯 위아래로 뜯어본다.

"그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가?"

"백 명은 될 거야. 바깥에서는 승산이 없어. 전부 광산 안으로 들어가서 농성해야 해."

늙은 용병은 허리에 양손을 짚고 말한다.

"자네도 산 사람인데 어떻게 믿나? 우리가 산 사람을 죽였듯 자네 역시 내 부하들을 죽인 적 있겠지. 투항하는 척을 하면서 거짓 정보로 우리를 속이려는 수작은 아닌가?"

"뭐?"

그러나 체이의 말에서 진위를 가려내기도 전, 어둠 속에서 날아온 화살이 늙은 용병의 왼팔을 스친다. 화살은 눈 쌓인 바닥에 박힌다. 늙은 용병은 상처난 자리를 부여잡으며 외친다.

"전투 준비!"

"숨어야 한다고!"

화살이 쏟아지고, 옥련, 체이, 하누는 함께 초소 건물로 달린다. 지붕 밑에 숨고 나서야, 광산 입구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한다. 옥련이 포박한 채 방치해 두었던 광산 감독관이다. 감독은 바깥 상황을 내다보고는, 화들짝 놀라서 안쪽을 향해 뭐라고 소리를 지른다. 곧 안에서 두 사람이 더 나와서는 철판을 끌어다가 광산 입구를 완전히 봉쇄해버린다. 체이와 옥련은 각자의 언어로 가장 심한 욕설을 내뱉는다.

용병들도 광산 입구가 봉쇄된 사실을 알아챈다. 늙은 용병은 부하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게 상황을 통제하려 하나 꼼짝없이 포위당해 죽게 생긴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 사방에서 화약창이 폭발하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린다. 옥련과 체이가 숨은 초소를 향해 달려오던 광부 한 명이 관자놀이에 화살을 맞고 고꾸라진다.

옥련이 소래의 집에 묵었던 밤 그랬듯, 고지대인의 사냥 부대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화살 세례를 퍼붓는다. 갑옷 입은 용병들도 한 명 한 명 쓰러진다.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들은 초소 지붕 밑이나 판자를 대어 만든 방벽 뒤에 숨어 떤다. 광산 입구가 막혀 도망갈 길도 없고, 적은 어둠에 숨어 보이지도 않는다.

 

#24 그리고 뿔나팔 소리와 함께 불화살이 날아든다. 눈에 파묻혀 꺼지기도 하지만 나무로 된 기둥과 판자 따위에 불화살이 연달아 꽂히자 금방 불길에 횝싸인다. 광산 측의 생존자들은 피신할 자리를 잃는다. 불 붙은 지붕이 무너지기 전에 피신처에서 나온 이들은 이내 쏟아지는 목숨을 잃는다. 옥련 일행이 숨은 초소 역시 기둥부터 타오른 불이 지붕을 태우고, 세 사람도 별 수 없이 무너지기 전에 달려나온다. 

헌데 이상할 정도로 화살이 날아오지 않는다.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보니, 고지대인들은 옥련 일행을 노리지 않는다. 되려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둠 속을 향해 사격하고 있다. 놀랍게도 어둠 속에서 활을 겨눈 채 사방을 둘러보던 고지대인을 무엇인가 낚아채 간다. 그게 사라져간 방향으로 다른 고지대인들이 일제히 화살을 발사한다. 그러나 사람 비명 소리가 어렴풋이 들릴 뿐, 대체 무엇이 사람을 통째로 낚아채었는지 당최 알 수 없다.

옥련은 자신들이 너무 밝고 노출된 곳에 서 있음을 깨닫는다. 주변에 횃불이 많아서 누가 노려도 이상하지 않다. 서둘러 숨을 곳을 찾는데, 얼음뿔 장식 망토를 입은 고지대인의 무리가 혼비백산하여 허둥지둥 그들이 있는 곳으로 스키를 타고 달려온다. 단검과 손도끼를 꺼내들고 싸울 준비를 하지만, 고지대인들은 세 사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광산 입구가 있는 방향으로 달린다. 

“뭐야, 왜들 저래?”

옥련은 그 이유를 깨닫는다.

“뛰어요!”

눈보라 속에서 기둥 같은 두 다리가 이 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다리는 굵은 털로 뒤덮였는데, 흰 빛을 내면서도 어둠에 물든 듯 아련하다. 옥련의 말에 뒤를 돌아본 체이와 하누는 펄쩍 뛰고는 고지대인들과 같은 방향으로 스키를 박차 달려나간다. 옥련도 그 뒤를 따른다. 살아남은 용병과 광부들도 그것을 봤는지 줄행랑을 친다. 

이런 날씨에 눈밭에서 사람이 아무리 뛰어봤자 거대한 괴물을 따돌릴 리 만무하다. 옥련과 체이의 뒤에서는 계속해서 고지대인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옥련은 달리면서 주변을 살핀다. 얼음뿔 장식이 달린 두건을 뒤집어쓴 고지대인들은 계속 괴물에게 잡혀가고, 끔찍하게 먹혀버리고 있지만, 그보다 뒤쳐진 광부와 용병들은 멀쩡히 살아서 도망치고 있다. 

한 용병이 화약창에 불을 붙이고 괴물을 향해 집어던진다. 화약창의 불꽃이 흰 털을 약간 그슬리게는 했을지언정, 용병이 괴물에게 짓밟히는 걸 막지는 못한다. 그 때 하누의 스키가 엉키며 눈 위로 넘어진다. 체이가 하누를 일으키느라 멈춘 순간, 괴물의 두 발이 옥련과 체이의 뒤로 따라붙는다. 옥련은 다급하게 외친다.

“체이, 외투 벗어요. 당장!”

“뭐? 왜?”

“살고 싶으면!”

더 말하지 않고 체이의 외투 밑단을 잡아 들어올린다. 체이는 영문도 모른 채 몸을 비틀어 외투에서 빠져나온다. 옥련은 벗겨낸 얼음뿔 순록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허공에 집어던진다. 어둠 속에서 기둥 같은 하얀 팔이 튀어나와 하얀 순록 가죽 외투를 붙잡아서는 사라진다. 그 팔에는 사람 키만한 발톱이 네 개나 달려 있다. 옥련은 머리 위에 몰아치는 눈보라 사이로, 푸르게 타오르는 두 눈을 봤다고 확신한다. 괴물은 발소리도 없이 옥련과 체이, 눈 위에 넘어진 하누를 지나쳐가며 계속해서 얼음뿔 순록의 푸른 두 뿔을 사냥한다.

“목숨 구해준 빚은 받은 것으로 칠게.”

체이의 말에 옥련이 돌아본다.

“고마운 줄이나 알아요. 그보다 그 술 또 없어요?”

체이는 웃음을 터뜨리며 손사레를 친다. 체이가 하누의 겨드랑이를 붙잡아 일으키고는 부둥켜안는다. 옥련이 여유가 없다며 한마디 하려는데,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명이 질기군.”

고지대인에게서 빼앗은 듯한 창을 양 손에 붙들고, 소래가 저벅저벅 걸어 나타난다. 창날에는 핏자국이 얼어붙어 있다. 다람쥐 털모자는 잃어버렸는지 희끗한 머리가 세찬 바람에 휘날린다. 

“소래!”

낯선 이의 등장에 체이와 하누는 경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는다.

“누구야?”

“댁이야말로 뉘요? 산에 사는 양반이로군. 마침 잘 만났소.”

옥련은 우선 체이와 하누가 사냥 부대의 산 아래 출정에 함께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물론 소래는 곧이 듣지 않는다.

“댁의 친구들도 사람 가리면서 죽인 건 아니지.”

옥련이 끼어든다.

“내 목숨 구해준 사람이에요.”

소래는 몸의 균형을 바꾸어 선다.

“나도 그랬지 않나.”

“그건 내가 다른 기회에 보답하겠어요.”

“그러시던가. 다행히 지금 내가 즐거워. 고맙게도 짐승이 내 할 일을 대신 해주고 있어서 말이지.”

“복수 말인가요.”

소래가 체이와 하누를 노려보며 말한다.

“댁들도, 내가 댁의 친구들을 아주 싫어하는 데에 불만은 없지.”

“집을 불태우고 손님을 죽였다면서. 우리는 끼지 않은 일이니까 넘어가주면 고맙겠어.”

소래는 코웃음을 치고, 옥련과 체이 부부를 내버려둔 채 다시 괴물이 남긴 거대한 발자국을 따라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간다. 체이는 옥련의 외투를 함께 뒤집어쓰고는 눈과 바람을 피할 곳을 찾는다. 타다 남은 초소의 잔해 속으로 들어가, 셋이 부둥켜안고는 밤을 보낸다.

 

#25 광산이 위치한 산꼭대기에서 설원을 내려다보니 대단한 장관이다. 밤새 내린 눈이 세상 만물을 뒤덮어 하얗기만 하다. 눈보라는 그쳤고 괴물은 수많은 시체만 남긴 채 다른 흔적은 없이 사라졌다. 발자국은 모두 눈에 묻혀 찾을 수 없다. 사냥 부대의 태반이 괴물 뱃속으로 들어갔고, 용병 쪽도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고드름 광산은 이제 통제할 사람이 없었다. 없을 예정이었다. 옥련은 두 다리와 두 팔을 포박하고 재갈을 물려 썰매에 실어둔 광산의 전 감독관 쪽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체이와 하누를 돌아보며 묻는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그걸 왜 물어? 약속이 된 거 아니었어?”

옥련은 씩 웃는다.

“내가 약속을 들어주기 위해서 한 가지만 더 부탁해도 될까요?”

“얘기가 다른데.”

“그런 게 아니에요. 나와 함께 고용주에게 가서 여기서 일어난 일을 증언해 줘요. 난 부하들을 모두 잃었고, 감독관은 자기에게 유리한 말만 하려고 들겠죠. 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요. 체이는 원래부터 이 땅을 떠나려고 했고, 소래도 집을 잃었잖아요? 남쪽에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도와줄게요.”

체이는 인상을 쓴다.

“우린 이 땅에서 벗어나는 것만 도와달라고 했지, 자리잡는 걸 도와달라고는 안 했어.”

“여길 떠나면 어디서 어떻게 살 건가요? 내가 받을 보수에는 부하들의 몫도 포함되어 있어요. 동행해서 증언을 해주면 그걸 공평하게 나누도록 하죠. 금전이 있어야 새 터전을 찾을 때도 수월하겠죠.”

“속는 기분인데.”

“증인이 있으니 보수는 확실하게 챙길 거에요. 그리고 여기 감독관 나으리는 광산 운영에 실패한 책임을 져야 되겠죠. 대상의 저택에는 큰 빚을 지거나 신임을 저버린 배신자를 가두는 비밀 감옥이 있다더군요.”

전 감독은 사색이 되어 버둥댄다.

“그 자를 데려가버리면 여긴 옛 지주들이 다시 장악할 텐데?”

“이 멍청이를 내버려두면 그보다도 더 한심한 사태가 벌어지겠죠. 난 광산 운영에 관련해 지시받은 바는 없지만, 이 자는 거짓말을 했고 또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안 되니까 차라리 없어지는 게 이 땅엔 좋을 거라고 봐요. 고용주가 필시 화는 잔뜩 내겠지만 나한테 불똥이 튀겠어요? 잘못은 이 쪽이 다 했는데. 설인은 못 찾았지만 거짓말쟁이는 찾았으니까요.”

“그래도 되는 건가 몰라.”

“이 땅에 남을 이유가 있나요? 고지대인과 옛 지주들이 다시 광산을 차지한다 해도, 대상은 반드시 다른 사람을 보내서 광산을 손에 넣으려 할 거에요. 똑같은 싸움이 반복될 거고요. 멍청한 감독이 옛 지주들과 척을 지는 바람에 이런 사달이 났는데,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어요.”

“맞아. 그건 그렇네.”

체이와 하누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짐을 챙기러 간다. 옥련은 한마디 돌아서서 소래에게도 같은 청을 한다.

“내가 빚을 갚겠다고 했죠. 고용주에게 증언만 해주면 소래에게도 보상을 동등하게 나눠줄게요.”

하지만 소래는 눈썹을 찌푸리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한다.

“말꼬리가 긴 걸 보니 속아넘어가기 딱 좋군. 됐어. 필요없다. 게다가 댁은 사막으로 가려는 게 아닌가?”

“사막에 닿기 전에 방향을 틀 거에요. 대상은 동쪽 바다에 면해서 항구를 세우고 거점으로 삼았죠. 내 고용주가 거기 있어요.”

“어쨌건, 그렇게 멀리는 안 간다. 딱히 금이 필요하지도 않고.”

“그럼?”

“초원으로 간다. 어쩌면 옛 친구들을 찾을 수도 있겠지.”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31 중편 가라 자유여 은빛 날개를 달고 이건해 2023.08.30 0
230 중편 공짜 커피를 조심해 -6 (完) scholasty 2023.04.12 0
229 중편 공짜 커피를 조심해 -5 scholasty 2023.04.12 0
228 중편 공짜 커피를 조심해 -4 scholasty 2023.04.08 0
227 중편 공짜 커피를 조심해 -3 scholasty 2023.04.06 0
226 중편 공짜 커피를 조심해 -2 scholasty 2023.04.05 0
225 중편 공짜 커피를 조심해 - 1 scholasty 2023.04.05 0
224 중편 반짝임에 이르는 병 이멍 2022.02.18 7
중편 얼음뿔 의심주의자 2021.12.22 0
222 중편 조심도(鳥深島)에서: 재회 (하) 진정현 2021.11.10 1
221 중편 조심도(鳥深島)에서: 재회 (상) 진정현 2021.11.10 1
220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완 키미기미 2021.10.31 0
219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10장 키미기미 2021.10.31 0
218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9장 키미기미 2021.10.31 0
217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8장 키미기미 2021.10.31 0
216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7장 키미기미 2021.10.31 0
215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6장 키미기미 2021.10.31 0
214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5장 키미기미 2021.10.31 0
213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4장 키미기미 2021.10.31 0
212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3장 키미기미 2021.10.31 0
Prev 1 2 3 4 5 6 7 8 9 10 ... 12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