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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당신이 남긴 말 - 9장

2021.10.31 02:1210.31

정현숙은 영양사가 천직이었던 그저 그런 여성이었다. 아무도 묻지 않던 그녀의 꿈을 한 남자가 물어 손에 잡아보기도 하였다. 그것은 카메라였고, 영상기사의 일을 찾을 때 옆에서 도와준 이도 그 남자였다. 일은 잘 풀리지 않았지만, 현숙은 그 남자의 곁에 남고 싶었다. 줄곧 자신이 하고팠던 일을 인생의 동반자와 함께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품고서 말이다.

 

 

남자는 그런 그녀에게 정중히 거절을 표하였고, 그럴 때마다 현숙은 그 남자가 있는 곳으로 직접 찾아갔다. 매번 그녀의 방문과 도시락들이 쌓여갈 즘, 계절들이 지났고 어느덧 5월이 되었다. 봄에서 둘은 손을 맞잡고서 자주 거닐던 곳들을 함께 걸었다.

 

 

아무 말 없이, 아무 소란 없이, 아무런 소식도 없이. 아주 귀여운 것들이 둘의 사이에서 틔었고 둘은 그것이 고맙고 감사했다. 작은 예배당과 남해를 돌고 단칸방과 월세 방을 건넌다. 둘은 좋았고, 또 행복했다.

 

 

‘바다로 가자.’

 

 

그의 작은 변덕이었고 바다 마을은 현숙, 그녀의 마음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이곳에서 많은 추억들을 남기자고 그 남자는 기쁜 듯이 말하였다. 현숙도 덩달아 뛸 듯이 기뻤다. 꼭 가슴 속에 품어 간직하고 있던 소원을 하나님이 풀어 자신에게 보여준 것만 같았다. 바닷가 전원생활은 그녀에게 축복이었고, 생에의 선물이었다. 오래된 텔레비전. 그것 역시 그가 자신에게 전해준 선물들 중 하나였다. 현숙은 바다가 들리는 자신의 방에서 늘 같은 생각으로 밤을 보냈다.

 

 

‘제대로 된 유언장 하나 없이 홀로 그 인어에게 간 것이 정말 그의 선택이었을까.’

 

 

정말 그것이 다였을까. 마지막 인사 정도는 어딘가 남겨두지 않았을까. 아니면 정말 인어의 저주에라도 걸린 걸까. 그 인어가 아니면 자신은 무엇이었던 걸까. 그 남자가 남겨두고 간 것들이 밀물에 쓸려 모조리 잠기어간다. 현숙은 그저 듣고 팠다. 그의 입에서 입으로. 그의 단어에서 단어로. 아주 간단한 한마디 말이다.

 

 

저기.

 

 

그러나 그녀가 듣게 된 것은 옛적 추억의 소리도 아니었고, 자신이 평생을 좆았던 행복의 소리도 아니었다.

 

 

저는 상혁이의, 인어예요.

 

 

현숙의 가슴 깊은 곳에서 뜻 모를 증오의 불길이 치솟는다.

 

 

상혁이에 대해 알고 싶어요.

 

 

현숙은 점잖게 앉아 낯선 방문자를 맞았다. 그녀의 대답이 날카롭게 돌아온다.

 

 

나가요.

 

 

단박에 거절을 하는 현숙의 차가운 대답에도 누나는, 그 인어는 물러나지 않았다.

 

 

죄송, 죄송해요. 하지만.

정말, 정말 알고 싶어요.

상혁이는 어떤 사람이었죠?

 

 

제발 나가요!

 

 

누나가 문 너머, 거실을 돌아본다. 동준이의 색색거리는 곤한 숨소리가 맴돈다. 누나는 작게 소곤거렸다.

 

 

상혁이와 헤어지고,

계속 기다렸어.

상혁, 상혁이가 어떤 사람인지만.

 

 

현숙이 몸을 벌떡 일으켜 머리를 흔든다.

 

 

그럼 직접 물어보지 그래!

그를 만나 직접 물어보라고!

 

 

현숙의 역정을 따라 누나도 목소리를 키운다.

 

 

난 그저 궁금했을 뿐이야!

상혁이가, 상혁이.

 

 

온통 상혁, 상혁!

어차피 그 사람은 널 만나러,

나와 모든 걸 내팽개쳤어.

그는 그런 사람일 뿐이라고!

 

 

아니야!

상혁이는 좋은 사람이야!

 

 

네가 뭘 아는데?

네 까짓 게 뭘 안다고 그래!

 

 

현숙의 마음속에 응어리졌던 의심과 울분이 폭발하고 흘러넘친다.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으면서,

대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으러 간 거야.

갑자기 왜 날 두고, 날 두고 간 거냐고.

 

 

목이 떨린다. 그렁그렁 눈물방울들이 주름을 타고 흐른다. 현숙은 찬장에 널브러진 종이 하나를 집어 인어의 앞으로 팽개쳤다. 꼭 자신의 마음처럼.

 

 

자, 그 종이쪼가리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어.

상혁 그 남자가 나에게 남긴 유언이라고!

 

 

청구서 위로 쓰인 삐뚤삐뚤한 글씨들. 그곳엔 간결한 문장이 하나 휘갈겨 있었다.

 

 

‘미안 나 바다로 돌아갈게.’

 

 

결국.

 

 

현숙은 울음을 터뜨리며 토하듯 문장들을 쏟아냈다.

 

 

결국 널 만나러 간 거야.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어.

오직 널 만나러 이 마을에 온 거라고.

난 여기 없었어.

 

 

현숙의 눈이 감긴다. 마지막 방울이 볼을 타고 아래로 떨어진다.

 

 

난 애초에 그에게 없었던 거야.

 

 

누나는, 인어는, 상혁의 어릴 적 기억은 청구서 종이를 주워 현숙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엇을 하려 했던 걸까.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깜깜한 밤처럼, 누나에겐 온통 수수께끼 투성이었다. 하지만 이 말만큼은 할 수 있지 않을까. 누나는, 인어는 그녀에게로 자신 있게 말하였다. 캑캑거리는 듣기 힘든 목소리로, 어눌한 발음으로, 방안 곳곳으로 바닷내를 풍기며.

 

 

그렇지 않아.

상혁이가 그럴 리 없어.

 

 

현숙은 힘이 떨어져 풀썩 안락의자로 쓰러져 앉았다. 등을 돌린 것 마냥 그녀는 누나를 보지 않았다. 두 손을 꼭 쥐고서 누나는, 그 인어는 빌었다. 자신의 솔직한 심정이, 상혁에 대한 마음이,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었을 추억이, 제발 저기 있는 여인의 마음을 돌려 달라고.

 

 

딸칵.

 

 

낡은 전파음이 울리고 환하게 화면이 밝혀진다. 오래된 텔레비전으로 가족 하나가 해변에서 장난을 치고 있다. 그곳엔 상혁이도 있었다. 인어가 살며시 몸을 당겨 앞으로 다가갔다. 현숙은 힘이 빠져 속삭이듯 말들을 건네었다.

 

 

상혁 씨는 이 해변을 좋아했어.

매일 놀러가기도 했는데.

 

 

현숙이 누나를 돌아본다.

 

 

넌 보지 못한 거야?

 

 

누나의 눈망울이, 인어의 눈망울이, 그 옛적 기억을 타고 온 필름이 차분히 돌아가고, 되감아진다. 그 오랜 시간을 기다리면서 바다에 잠겨 귀를 기울이면서. 대체 왜 그의 목소리는 듣지 못한 걸까. 텔레비전의 유리 화면으로 누나가 손을 댄다. 현숙의 곁으로 남아 함께 추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본다. 누나가 현숙의 어깨를 잡는다.

 

 

같이 가자.

 

 

그녀가 누나를 올려다본다. 누나는, 그 인어는 해변으로 현숙을 끌었다. 인어는 자신이 상혁과 본 해변을 현숙에게 알려주고 싶어 했다. 그리고 현숙이 상혁이와 본 해변을 알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이 해변으로 간다. 색색거리는 아이들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파도를 따라서, 뒤로 밟아간다. 돌아간다. 그 시절로, 그 시간으로, 그곳과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그 이는 어설픈 사람이었어.

무어든 자신의 손으로 끝내는 법이 없었지.

항상 내가 도와줘야 했어.

 

 

상혁이는, 친절했어.

항상 날 도와주고, 손을 잡아 주었어.

노래도 알려줬어.

 

 

그 이는 다정한 사람이기도 했어.

누구든 자신의 손으로 돕고는 했지.

항상 내 곁에서 말이야.

 

 

상혁이는, 울보였어.

항상 나에게 이야기했어.

화나는 일, 슬픈 일, 전부 말하면 나아진다고 했어.

 

 

해변을 따라 걸으며 두 사람의, 현숙과 인어의 기억들이 자욱들을 남긴다. 늦은 밤의 바다로 오징어배가 환히 길을 비추인다. 밝은 전구들이 내는 합창 소리를 바라보며 현숙은 떠나간 자신의 옛 애인을 탓하였다.

 

 

그래도 결국 널 선택한 거야.

그 이는 바다로 가려 했잖아.

 

 

인어는 현숙에게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분명 너와 있어서 행복했을 거야.

 

 

현숙은 인어의 말을 듣고 엷게 웃었다. 과연 그럴까. 정말 상혁, 그가 그렇게 생각해주었을까. 그녀는 줄곧 자신을 괴롭혀왔던 질문을 인어에게 내어 보였다.

 

 

그럼 그는 왜 나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걸까.

 

 

현숙은 작게 웃고 있었지만 눈물 하나가 간신히 눈꺼풀을 잡고 버티고 있었다.

 

 

정말 나에게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걸까.

 

 

인어가, 누나가 현숙을 품에 안는다. 그녀는 밀어내지 않았다. 인어에게 안기며 숨을 고른다. 울지는 않는다. 이미 너무 많은 눈물을 흘린 탓에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현숙을 안은 인어가 말을 한다.

 

 

오래도록 그를 기다려왔어.

하지만 그 시간이 너무 길고 외로워,

그만 잠기고, 가라앉아 있었던 거야.

 

 

바다가 밀려온다. 마을로 먹구름이 밀려온다. 오징어배를 탄 밝은 빛들이 휘청 이고 휘청 인다. 인어는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그만 닫아버리고 만 거야.

상혁이도 날 기다렸을 텐데.

약속을 어긴 건 바로 나였어.

 

 

사람이 된 인어는 인어의 저주에 걸린 남자를 데리고 가지 못하면 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누나는 작별 인사를 하듯 현숙을 품에서 놓아주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고마웠어.

상혁이에 대해 알려주어서,

그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서,

정말 고마워.

 

 

인어는 그 말만을 남기고 바다로 들어갔다. 폭풍우가 밀려오고 있었고 파도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처럼. 현숙을 두고서, 인어는 인간의 몸으로 바다에 잠겨 더는 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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