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당신이 남긴 말 - 6장

2021.10.31 02:0410.31

어려운 한자가 가득이었다. 온통 먼지들과 거미줄에 덮인 고서적들은 아이들이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낡고 지루한 것이었다. 은령이는 높다랗게 쌓인 책더미들을 보고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람아, 정말 우리가 찾을 수 있을까?

 

 

물론!

 

 

책 사이에서 여러 서적들을 뒤적이는 하람이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였다. 은령이는 금방 흥미를 잃어 이리저리 발로 바닥을 차고 다녔다.

 

 

분명 어디 있을 거야.

 

 

하람이는 자신이 지난여름에 본 그림을 찾고 있었다. 너저분한 창고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그림 한 장. 빛이 바래고 색이 빠진, 척 보기에도 지저분해 보이는 그 그림은 고서적의 앞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손길이 멋대로 가 꺼낸 그 책은 다른 책들과 달리 그림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하람이는 그 책이 분명 인어에 대한 그림책일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야.

 

 

앗, 하람아!

 

 

그 책의 그림들은 전부.

 

 

나 이상한 거 발견했어!

 

 

응?

 

 

그 책엔 물고기와 사람들이 뒤섞인 기괴한 그림들뿐이었으니까. 하람이는 주위의 책 동산을 넘어가 자신을 부르는 은령이의 곁으로 갔다. 은령이는 바닥으로 웅크리고 앉아 책장의 낮은 찬장에 박힌 물건 하나를 가리켰다. 하람이도 함께 몸을 웅크려 그 물건을 바라본다. 하람이의 목소리가 크게 몸을 부풀리고 터진다.

 

 

찾았다!

 

 

세월이 잔뜩 묻어 누렇게 된 표지와 변색이 되어 알아 볼 수 없는 그림. 그리고 물고기 하반신을 가진 인간의 민화와 표지. 하람이는 반가운 마음에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다 불쾌하고 이질적인 느낌이 손끝에 전해져 그만 손을 잽싸게 거두고 만다.

 

 

으왓!

 

 

왜 그래?

 

 

은령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하람이를 본다. 하람이는 자신의 손끝에 남아있는 그 느낌을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뭉툭하고 알 수 없는 까칠함. 하람이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서 은령이에게 속삭였다.

 

 

뭔가가 있어.

 

 

어둑한 창고의 습한 바닥. 잔뜩 내려앉은 먼지들과 끈적거리는 거미줄. 은령이와 하람이의 눈앞으로 그것이 정체를 드러낸다.

 

 

꺄악!

 

 

둘 모두 갑작스런 그것의 등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것은 커다란 크기의 거미였다. 지욱 아저씨의 울퉁불퉁한 주먹보다 더 커 보였다. 하람이는 그대로 몸이 굳어 단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였다. 은령이는 그런 하람이의 겁먹은 모습을 보고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내가 할 수 밖에 없는 일이야.

 

 

은령이는 책을 막고 서있는 거대 거미를 노려보았다. 거미는 꼿꼿이 서 영이를 상대하였고 은령이는 거미의 눈을 똑바로 본 채로 고개를 반대로 움직였다. 거미가 영이를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지금!

 

 

그리고 잠깐의 틈을 잡아 잽싸게 손을 넣었다 빼어 그림책을 구하는데 성공한다. 우와 성공했어, 하람아. 하람이도 은령이의 손에 들린 책을 보고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제, 기순 할머니만 만나면 돼.

 

 

응!

 

 

하람이와 은령이는 서둘러 창고와 같은 서재를 빠져나갔다. 두 아이가 할머니의 집으로 달려간다. 은령이가 큰 목소리로 불렀다.

 

 

할머니!

 

 

지욱 삼촌과 어망을 둘러보던 기순 할머니가 두 팔을 뻗는다.

 

 

오거라, 우리 똥강아지.

 

 

할머니의 품으로 폭 안기는 은령이. 지욱 삼촌이 자신은 안보이냐며 딴죽을 걸고 은령이는 다시 멋진 발차기를 선보인다. 하람이는 세 사람의 앞에 서서 책을 꼭 부여잡았다.

 

 

저, 저기.

 

 

분명 이 책에 정답이 있을 것이다. 정답이 없다면 실마리라도 있을 것이다. 작년 여름 해변에서 보았던 그 인어에 대해 더 알 수 있을 거야. 하람이가 세 사람을 향해 묻는다.

 

 

인어에 대해 알고 싶어요.

할머니.

 

 

지욱 삼촌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하람이의 머리를 헝클인다. 하람이가 책을 가슴에 품고 은령이가 할머니를 올려다본다. 언제 저 어린 사내아이가 제 허리에 까지 왔을까. 기순 할머니는 은령이를 꼭 안으며 책에 대해 물었다.

 

 

그 책이 무엇인지 알고 가져왔느냐.

 

 

인어 그림을 보고 알았어요.

인어에 대해 쓰여 있죠?

 

 

기순 할머니는 입술을 살짝 찡그렸다. 누가 볼 새 없이 금방 풀어버리며. 하는 수 없다는 인자한 미소도 간직하고서.

 

 

할머니, 내가 꺼냈어!

 

 

은령이가 자신 있게 손을 올려 방방 뛴다. 그래, 그래. 은령이네 할머니는 두 아이를 품어 집으로 들어갔다. 지욱 삼촌이 바다로 어망을 풀러 가고 할머니는 건 다시마와 김 과자를 내어 놓는다. 찻잔을 홀짝이고는 숨을 고른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그 책을 가져간 적이 있지?

 

 

네....

 

 

하람이는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푹 꺾었다. 그 책을 가져간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작년 여름에서 그 인어를 보았을 때처럼. 할머니는 무엇을 먼저 말할까 신중히 생각하였다.

 

 

인어는 말이다.

사라진단다.

 

 

네?

 

 

하람이가 몸을 움찔하였다. 갑작스러운 할머니의 말에 어리둥절하였다. 은령이도 할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인어는 사람이 되면 사라져.

그리고 인어는 사람이 되고파 하지.

 

 

왜 인간이 되고파 하는데요?

 

 

인간을 사랑해서이지.

아님 동경을 해서 일까.

잘 모르겠구나.

 

 

그럼 인어는 바다에서만 사나요?

 

 

그래, 그래야만 해.

 

 

하람이와 은령이는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이번 여름에서 알게 된 동준이. 준이의 집 앞에 있던 여자 한 명. 하람이는 설마 하는 마음에 물었다.

 

 

그렇지 않으면요?

 

 

할머니의 얼굴이 잔잔히 저물어가는 노을을 담는다. 시간이 간다.

 

 

죽은 인어는 구슬이 된단다.

바다 빛을 품은 수많은 구슬을,

해왕이 와서 거두어가지.

 

 

할머니가 눈을 치뜬다. 어린 아이들에게 옛 이야기를 하는 것은 노인이 된 당신의 작은 행복이기도 하다. 무서운 이야기에 겁을 먹어 덜덜 떨면서도, 치맛자락을 붙잡고서 다음 이야기를 재촉이는 작고 보송한 손아귀들. 하람이와 은령이의 몸이 뒤로 뻗어있다. 할머니는 작게 쿡쿡거리고는 둘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걸 해일이라고 한단다.

거대한 폭풍이 온 마을과 집을 집어 삼키지.

 

 

그럼.

 

 

하람이는 책에서 본 오래된 민화들을 천천히 더듬어 기억하여 보았다. 만약, 만약.

 

 

인어를 사랑하면 어떻게 되나요?

 

 

할머니가 차를 홀짝 들이킨다.

 

 

인어의 저주에 걸리지.

그 인어가 아니면 사랑에 빠지지 못한단다.

 

 

은령이는 손을 들어 질문을 드린다.

 

 

그럼, 인어는 인간이 되고,

다시 인어가 될 수 없나요?

 

 

귀여운 손녀의 질문을 받고서 점잖게 허리를 핀다.

 

 

그건 아니란다.

방법이 하나 있지.

 

 

그게 뭔데요!

 

 

하람이가 몸을 앞으로 당겨 물었다. 그러고서 자신이 큰 소리를 냈던 것에 부끄러워 몸을 도로 물리었다. 은령이네 할머니가 밖을 보았다. 노을이 어스름으로 물들어 땅거미가 진다. 온 마을로 물이 밀려 올라오듯, 잠기어 간다. 할머니는 그리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자신이 사랑한 남자와 함께 바다로 돌아가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온 마을이 인어의 저주에 걸릴 것이야!

 

 

왁. 고함을 지르자 은령이가 웃음을 터뜨리고 하람이가 굳은 몸을 떤다. 할머니가 늙은 몸을 일으켜 저녁을 지으러 간다. 두 아이가 왁자지껄 다다미를 밟으며 준이의 집으로 간다. 저녁이 오는 바다마을의 풍경으로 오래된 사진첩 하나가 바다를 향해 있다. 기순 할머니는 늘 그렇듯 그리운 목소리로 인어 노래를 불렀다. 어부들의 노래를 부르자 사진첩으로 바람이 든다. 그리운 목소리다. 참으로 그리운 풍경이다.

 

 

준아!

 

 

하람이와 은령이는 힘껏 땅을 차며 골목들을 질주하여 갔다. 동준이의 집으로 달려간다. 저녁이 온다.

 

 

 

 

 

 

동준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스름이 들었다. 어두워지고 차가워진다. 바람이 더욱 거세진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가 자신을 두고 먼저 숲길을 따라 내려간다. 준이는 지아 누나를 찾으려 고개를 빼어 보았지만 자신조차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저 만치서 할머니가 서있다. 동준은 할머니를 놓칠세라 얼른 뛰어가 따라 걸었다.

 

 

할아버지는 왜 죽었어요?

 

 

동준이의 물음이 할머니께 닿지 않은 걸까. 돌아오지 않았다. 동준은 시무룩해져 툴툴거리며 자갈길을 걸었다. 멋대로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그 불량한 누나를 속으로 원망하며 동준이는 콧김을 거칠게 뿜었다.

 

 

네 할아버지가 왜 죽었느냐니.

그게 왜 알고 싶은 게냐?

 

 

동준이는 낮부터 풀어지지 않은 심술 때문에 입술을 빼었다.

 

 

아무도 안 가르쳐주니까요.

 

 

퉁명스러운 어투였다. 앞장 서 걷는 할머니의 그림자가 준이를 덮어준다. 할머니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동준이는 말을 걸기 편하였다.

 

 

아빠는 울기만 하고,

엄마는 자라고만 하는 걸요.

 

 

그리고 그 인어 누나가 할아버지를 찾아요. 그 누나에게 해줘야 할 말들이 있을 텐데. 동준은 심술이 나있다 이번엔 토라져 버리고 만다. 미안하고 슬픈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는 어떤 얼굴을 지었을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할머니는 우셨을까. 아니면.

 

 

네 할아버지는 그리 좋은 사람은 되지 못했어.

늘 어디론가 사라져 걱정을 끼쳤거든.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누나에게 들려드릴 만한 것이 있을까, 귀를 쫑긋 열었다.

 

 

너는 모를게다.

네 할아버지가 얼마나 양말을 못 갈아입는지.

네 할아버지가 얼마나 편식을 하는지.

네 할아버지가 얼마나 옷을 대충 입는지.

네 할아버지가 얼마나 실수를 많이 하는지.

네 할아버지가 얼마나 칠칠치 못한지.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갖은 실수들과 엉뚱한 행동들을 늘어놓았다.

 

 

그때마다 내가 얼마나 고생이었는지.

양말도 맞춰주고, 옷도 골라주고,

입에 맞는 음식도 일일이 만들어주고,

또 얼마나 혼자서 태평은 한지.

 

 

이야기를 주욱 듣던 동준이는 할머니의 불평에서 뜻 모를 따뜻함을 느끼었다. 준이가 할머니의 등으로 물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좋아했어요?

 

 

할머니가 우뚝 걸음을 멈춘다. 둘은 산길을 빠져 마을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해변이 보인다. 바람이 분다. 바닷바람은 구름을 물리어 노란 달빛이 두 사람에게 들게 하였다. 둥근 달을 올려다본다. 할머니와 동준이가 올려다본다. 멀리로, 바다로 어부들의 노래가 들린다.

 

 

좋아하고말고.

그 양반이 그 난리를 치고,

꼭 돌아는 왔거든.

 

 

어떤 느낌이었는지, 지금의 준이가 알기에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은 쌉쌀하기도 했고 짠 맛이 나기도 했다가 마지막에는 빨간 고추마냥 매운 기마저 돌았다. 그렇지만, 꼭 단맛이 남아 혀끝으로 여운을 남기었다.

 

 

그래 꼭 돌아는 왔지.

 

 

꼭 단맛은 났다.

 

 

집으로 와, 어린 애 일기 쓰는 것 마냥.

오늘 있던 일들을 이야기 해주더구나.

 

 

그 단맛은 너무도 평화롭고 잔잔해 아기의 등을 토닥이는 부드러움이 되어주기도 하였다. 전의 모든 힘든 일들을 잊게 할 만큼.

 

 

나는 그럼 그의 다리에 베어,

그 이야기들을 듣곤 하였단다.

 

 

동준이는 그 따뜻함을 뒤로 담아 앞으로 주욱 걸었다. 할머니의 얼굴은 달빛에 노랗게 물들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와아. 준이는 처음 보는 미소였다. 할머니 집의 티비방에 있던 텔레비전을 떠올렸다. 해변에서 아이들과 함께 미소를 짓고 있던 젊은 여자. 그 여자가 달을 보고서 옛적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자신의 옛 기억을 더듬어 내어주고 있다. 동준이는 마음이 풀어져 물었다.

 

 

할아버지는 그럼 왜 죽은 거예요?

 

 

할머니의 눈이 감기고 입 꼬리가 내려간다. 달빛이 떠나간다. 바닷바람이 구름에 밀려 뱅글뱅글 제자리로 돈다. 구름이 짙게 낀다. 할머니의 얼굴이 다시 무서운 그 얼굴로 돌아온다. 동준은 덜컥 겁을 먹고 말았다.

 

 

네 할아버지는 인어를 만나러 갔단다.

청구서 종이에 유언을 남기셨지.

바다로 돌아간다고 말이야.

 

 

할머니가 동준이를 지나쳐 쓸쓸히 걸었다. 동준은 더 무엇을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하였는데. 괜히 망쳐버린 기분이 들어 준이는 자신의 머리를 콩콩 때렸다. 동준이와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간다. 저녁이 오고 저녁밥을 짓는 냄새가 달에게로 날아가다 구름결에 부딪히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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