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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아네트

2006.07.20 00:48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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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네트
   Queen of The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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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연회, 연회, 연회!
언제나 즐거움 만이 가득한 유쾌한 연회!
연회장은 언제나 화려하고 분주하다. 정치와 시사에 대해 품위
있는 언어를 사용해가며 대화하는 귀족들과 그들의 문예 스승이자
그들의 식객인 문인들, 연회장을 언제나 즐겁게 해주기 위해
자신의 예술혼을 쏟아붇는 연주자와 무희들, 그리고 귀족들에게
언제나 최고의 예우를 해주기 위해 애쓰는 하인들..
누군가가 연회장에 와서 세인트루이스의 밤이 너무 어둡지 않느
냐고 묻는다면 그는 실소와 조롱 속에 머쓱해진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연회장의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 밤은 사라지고 모두에게
는 즐거움만 가득할 뿐이었다.
에스파냐에서 온지 얼마 안되는 나에게도 그들은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나 자신이 그들의 분위기에 잘 맞춰주는 성격이었다면
나는 연회장 분위기에 금방 적응하고 함께 어울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연회장의 구석에서 와인 한잔을 들고 구경하는 것을
즐길 뿐이었다. 나를 연회장에 오도록 이끌어 준 내 친구는 그런
내 모습을 철학자적인 풍모라고 남들에게 설명했다.
그것은 나에게 처음부터 예정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그렇게 연회장을 방관하고 있던 와중에 그녀를 보게 되었다.

二.

언제나 연회장은 활기가 넘치고 즐거운 사교의 자리이다. 하지만
그곳에 한가지 요소가 들어오는 순간 활기는 변형되어 증폭한다.
아네트가 들어서는 순간 연회장은 침묵이 흐른다. 챙이 유난히
넓은 붉은 모자, 고전적인 스타일로 품위가 있지만 가슴 부분이
꽤 파여서 관능미까지 더해주는 붉은 드레스, 단정한 모양으로
왼쪽 어깨 위로 흘러내린 검디 검은 긴 머리..밤의 여신이 카펫
위를 디딜 때마다 걸음 걸음에 모두의 시선은 집중된다. 연주자들
조차 자신들의 연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흥에 젖어 손에 들고
있는 악기를 잊은 채 아네트를 바라보느라 조용해진 연회장을
그녀는 가운데에 난 길을 따라서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의자에
다가가서는 처음부터 자신의 자리였다는 듯 사뿐히 앉는다.
그리고는 아네트가 미소짓는 다음 순간  마법에 빠진 듯한 눈빛
으로 바라보고 있던 모두는 정신차린 듯 산만하게 움직인다.
그들의 움직임은 아네트가 들어오기 전과 들어온 이후가 확연하게
다르다. 아네트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모든 움직임은 그녀를 의식
하며 이루어지는 것이다.
청년 귀족들은 문인들에게 귀동냥한 싯구들을 자신이 가진 모든
문예적 재능을 끌어올려 조합하여 아네트에게 다가가 헌사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매독에 걸린 하복부를 양복 속에 감춘
노신사들은 욕정으로 빛나는 광채를 연륜으로 숨기며 다가가서는
품위있는 태도로 인사하고, 노부인들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
하며 예술품을 감상하듯이 바라보고, 젊은 여인들은 시기어린
눈빛을 애써 숨기기 위해 부채질을 하며 다른 곳으로 고개돌린다.
모두들 활기차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지는 연회 속에서
나는 와인 한잔을 손에 든 채 방관자의 역할에 충실하려 노력한다.
아네트는 그런 여인이었다.

三.

계속되는 연회, 연회, 연회!
나는 매일 밤 벌어지는 연회에 지쳐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귀족
만이 누릴 수 있는 향락을 재확인해야만 하루가 마무리되는 듯
여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방관자 노릇을 하는 것은 이제 지겨워
지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매일 나를 찾아왔고 나는 이름도
모르는 숙녀의 팔짱을 낀 채 연회장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모두
에게 한걸음 물러나서 다시금 관찰만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유일하게 지루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아네트였다. 아니 아네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상황을 관찰하는 것이 유일한 흥미거리였다.
혹자는 젊음과 예능을 무기로, 혹자는 학식과 재력을 무기로 들고
자신의 주위에 모여들어 보이지 않는 검투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
을 아네트는 고고한 꽃처럼 앉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녀를 계속해서 지켜보는 사이에 나는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이것을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분명 나를 실없다고 하겠지만 나는
분명 그렇게 느꼈다. 아네트는 항상 미소와 새침한 표정 외에는
지을 수 없다는 듯이 굳어있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마치, -숙녀
에게 실례되는 표현이지만- 가면처럼 보였다.
아, 아네트의 얼굴이 약간 다르게 보였던 적은 있다. 나는 친구의
귀에 대고 아네트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 보이는 것 같다고 속삭
였다. 그리고 한시간 쯤 지나자 그 말은 모두에게 퍼져 있었다.
그날밤은 모두들 술렁였다. 아네트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지게
한 범인이 누구인지가 모두의 화제가 되었다. 그 중에서 누군가가
'제라르'가 아네트에게 말을 건 직후부터 아네트의 표정이 어두워
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모두들 분노했다. 청년들은 아네트의 표정을 어둡게 한
창백한 얼굴의 프랑스 청년에게 결투를 신청하기 위해 돌아다녔고
노신사들은 고상한 혀를 움직여 제라르의 가문에 대해 비하하고
비난했다. 모두들 제라르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지만 결국 찾아
낼 수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제라르는 이미 3일 전 집에
가다가 강물에 빠져서 그날밤에는 시체안치소에 누워있었다.

四.

아네트의 얼굴. 너무도 무표정한 얼굴.
몇일 동안 나는 그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네트도 그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아네트와 나는 눈을 마주쳤다. 상당히 떨어진 거리였지만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나는 바로 앞에 그녀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벽의 딱딱한 촉감이 등 뒤에 느껴져서 잠시 신경
쓰는 사이 그녀의 시선은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계속해서 느끼고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결국 참지 못했다. 그날 독한 술을 많이 마신 탓에 내 안의
호기심이 한번에 쏟아져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네트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
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네트는 미소지으며 내가 손등에 키스하는
것을 허용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약간 두서없이 하는 말을 언제나
의 무표정으로 들어주었다.
저에게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 너머에 있는 진실을 볼 수 있는
영광을 주시기 바랍니다..온갖 미사여구를 다붙히고 어휘를 돌려
가며 의미전달이 제대로 됐는지도 확신하지 못한 채 겨우 이렇게
끝맺은 나의 말을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였다.
나는 아네트의 입술을 보며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고 그런 나의
모습을 모두의 눈동자가 지켜보고 있었다.

-좋아요. 무슈.

아네트는 아주 작고 갸날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다.

-세상 모든 것의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정열을 간직하신 당신이
  그렇게 궁금해 하는 것을 확인
  시켜드리죠.

너무나도 작은 그 목소리는 귓가를 스치는 바람같아서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 그 한기는 다른 것에서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눈동자. 단순히 검은 눈동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다른 여인들의 검은 눈동자와는 다른...붉은 색채가 눈에 띄는
검은 눈동자였다.
아네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모두들 침묵했다.
나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네트의 드레스 자락을 밟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 뒤를 따라 걸어갔다. 마치 여왕과 뒤따르는
시종의 모습 같았을 것이다. 아네트의 연회의 여왕이니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자신들의 여왕이 어디로 떠날까 걱정되는 눈빛
으로 보면서도 움직이지는 않는 사람들을 지나쳐서 카펫이 깔린
계단 위를 향해 약간 빠른 걸음으로 올라간 아네트는 붉은 천으로
장식된 2층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나는 1층의 사람들이 꿈에서
깨어난 듯이 다시금 움직이는 것을 곁눈질로 보며 아네트의 걸음
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붉은 천의 장막이 마치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느낌 속에, 이 복도
가 이렇게 길었나 하는 의구심이 생길 무렵, 붉은 천은 검붉은 천
으로 바뀌었고 검붉은 천의 장막을 지나고 나니 검은 천의 장막
속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아네트의 복장이 바뀌어
있었다. 붉고 긴 화려한 드레스 차림은 차분한 안정감이 있는
검은 드레스로 바뀌었고 챙이 긴 붉은 모자는 사라지고 갖가지
치장이 된 검은 머리 위에서 얼굴을 덥는 베일이 내려와 있었다.
나는 점점 불안감을 느끼면서 신비로운 여인의 뒤를 따라갔다.
검은 천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모든 빛이 선명하게 보이는
공간에 서서 나는 아네트를 응시했다. 아네트는 베일 너머로 나를
보고 있었다.

-기이하군요.

나는 말했다.

-저에게 경이로움을 넘어서
  공포감을 주시는 군요.
-그것은 무슈 뿐만이 아니에요.

아네트는 말했다. 베일 이면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검은
천으로 이루어진 공간 안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모두들 저에게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가졌다고 찬사를 보내죠. 하지만
  막상 저의 본모습을 보고 나면..
  모두들 공포감에 빠지게 되죠.
-그런...

나는 말했다.

-제가 아까 드렸던 말씀이 불쾌했다면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진리의 추구자여.

아네트는 말했다.

-당신의 질문은 나를 즐겁게 했습니다.
  보통 그런 질문을 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당신에게 기회를 주려합니다.
-어떤 기회를 말씀하시는 거죠?
-제 본 모습...허용되지 않은 진실을
  볼 기회입니다.

아네트는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베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나는 지금 바로 뒤로 물러서서 연회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또한 베일 너머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기도 했다.
내가 고민하는 사이, 베일은 걷혔다.

五.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2층의 복도에 주저앉아 있었다.
어떻게 그곳까지 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붉은 천의 장막을
보며 안도감 속에 나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는 며칠동안 건강을 핑계로 그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는 다른 지방으로 이사했다. 그래서 그 연회에 다시는
갈 수 없었다. 그렇지만 연회에 나가지 않고 다른 지방으로 이사
하고 난 뒤에도 계속해서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악몽 속에서 나는 검은 천의 공간 안에 있었고 내 앞에는
아네트가 서 있었다.
아니, 더이상 아네트라고 부를 수 없다. 싯구절에 나오는 미美에
대한 찬사도, 연회장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도 더 이상 그녀에게
사용할 수 없다.
그날 본 그녀의 본 모습은 아름다웠다.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참혹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스틱스 강의 물결이 여인의 형상을 한다면 그런 모습일 것이다.
어둠의 여왕...페르세포네를 마주하였다.
살아있는 인간의 앞에 저승의 여신은 얼굴을 드러내었다.
그 순간 나는 진리를 만나게 되었다는 성취감보다 죽음을 두려워
하는 생물적 본능이 앞서게 되어 여왕의 손등에 입맞추는 예의
조차 갖추지 못한 채 비명을 지르며 그 장소를 달려나왔다.
나에게 예정되지 않은 죽음의 얼굴을 잠시 마주했을 뿐이었지만
공포는 지속되었다.
나는 점점 쇠약해져 간다. 이 곳의 밝은 햇살과 맑은 공기도 나의
건강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운명보다 빨리 그 얼굴을 보게 된
것에 대한 댓가를 치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는 곧 그녀를 다시 마주 대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일전에 내가 범한 무례를 용서해 줄 것이다. 나는
무릎꿇고 그 손등에 키스하며 아름다움에 대해 찬양할 것이다.
물론 다시 만날 때까지는, 아주 약간의 시간이 남아있다.
나는 눈을 감고 생각한다.
아직도 그 연회에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여신에 대해...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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