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월요일 아침부터 사무실 보좌관들이 시끄러웠다. 입구에서 웅성대는 그들을 지나쳐 사무실에 들어와 외투를 벗는데 수석 보좌관 공실장이 따라 들어오며 말했다.

"의원님 혹시 일주일 전 주말에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주말에는 일정 잡지 말라고 하셔서 일정 비우고 수행 안 했는데, 혹시 따로 다녀오신 데 있으십니까?"

저거저거 인사도 안 하고 자기 할 말부터 하는구먼. 이제 아주 배짱이야. 10년 전부터 나를 따라다녔으니 같이 일한 지 오래되기는 했지만, 아니 그래도 이건 아니지. 저 태도는 언짢다. 아무리 급해도 위아래는 있어야지. 말투는 또 뭐야. 추궁하는 거야?

"그날 서울 밖으로 나가진 않았네만. 왜 무슨 일인가."

그래도 윗사람으로서 체면이라는 게 있으니 표정은 구길지언정 큰 소리는 내지 않았다. 이게 네가 가지지 못한 품위라는 거다 짜샤. 일단 발뺌을 하고 지난 주말에 무슨 일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지난 주말이라면 동료 의원의 소개로 특별한 곳에 갔었다. 떳떳하게 다닐 곳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위법을 저지르는 곳도 아니어서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그곳에 갔다는 걸 먼저 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실 그곳은 처음 이지만 같은 부류의 가게를 안 가본 것도 아니었다. 하나같이 후에 문제가 된 일은 없었다. 아니 어디 나 혼자만이랴. 거의 모든 국회의원, 회사의 임원들이 다 그런 곳에 출입했다. 워낙 엮인 사람이 많았다.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아니더라도 나서서 덮으려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암묵적 동질감을 나눈 동료들이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걸 막아줄 것이다. 그것 말고는 특별한 일이 없었는데 왜 어디 갔었냐고 묻는 걸까.

유심히 보니 공실장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공실장은 항상 음전하고 진득한 친구였다. 내가 에너지가 넘치는 대신 감정 기복이 심하다면 공실장은 나와는 정반대로 누군가를 이끌만한 에너지는 없었지만 항상 변함 없는 고요한 감정을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항상 믿음직스러웠는데 그런 그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다니.

 그는 내가 초선 의원으로 의회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 사무실에 인턴으로 들어왔다. 그때는 지방 인구가 계속해서 줄어들어 울산광역시가 울산시가 되고, 얼마 뒤 대전도 대전시가 된다는 이야기가 돌았을 때였다. 수도권에서 살면서 지방에 땅을 사놓고 값이 오르기만을 기대하고 있던 인사들 발등에 불이 떨어졌었지. 정치권에서는 이례적으로 여당, 야당 할 거 없이 정부 기관을 지방으로 옮기는 데 찬성했다. 어느 기관은 대구로 가고 어느 은행은 광주로 내려갔다. 국회는 제일 마지막까지 버티고 버티다가 그나마 수도권이랑 가까운 대전 인근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의회가 지방으로 내려갔다고는 하지만 매일 출석하는 것도 아니고 집도 서울에 있으니 의회를 따라 이사를 가는 직원은 많지 않았다. 의원들과 직원 대부분은 고속철도를 타고 대전으로 출퇴근했다.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장거리를 이동해 출퇴근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턴 하나가 한 달 정도 그렇게 출퇴근해보더니 힘들다고 징징거렸다.

"의원님, 지금 있는 인턴이 출퇴근이 길어져서 아무래도 계속 일하기는 힘든 거 같습니다. 주변에 방을 얻기도 싫다고 하니 다른 사람을 알아볼까요?"

그때 나는 어떻게 대답했던가. 평소처럼 무관심 했겠지.

"그런 것까지 보고하나? 여기서 인턴하고 싶은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해! 뭐 그런 거까지 나한테 보고하나. 그런 자질구레한 일들은 알아서 하시게. 난 일에만 지장이 없으면 돼."

인턴 그게 뭐라도 된다고 나한테 보고를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자기네들끼리 사람 뽑고 일 시키면 되는 거지. 그때 난 초선 의원으로, 뭐라도 해보겠다고 일을 참 많이도 벌였었다. 인턴 사정까지 신경 쓸 여유 같은 건 없었지. 아마 보좌관들은 나에게 자신들이 이렇게 세심하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내 주변에는 선거캠프에서부터 나를 따라 준 사람들로만 채워져 있었는데 의회에 적합한 사람들은 아니라서 뒤에서 다른 사람들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나에게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났을까. 회의할 안건을 정리하기 위해 사무실에 들렸을 때 그가 거기에 있었다. 사무실 입구에 낯선 얼굴이 앉아 있었다. 그는 내가 다가가자 하던 일을 멈추고 일어나 인사했다. 어린 티가 나는 학생이었지만 표정 변화 없이 의젓했다.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학생 공진석과의 첫 대면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일을 배워 수석 보좌관까지 올라와 이제는 내 곁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필요한 일을 찾아서 했고, 어떨 때엔 앞날을 내다 본 것처럼 일을 척척 처리해 놓을 때도 있었다. 물론 그도 사람이니 처음 들어와서 일이 서툴던 때도 있었지만 그런 때에도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던 그였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게 하겠다 주억거릴 때에도 당황하지 않던 그였는데,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을 막고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 문가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그를 당황하게 했을까.

"무슨 일인데 그래?"

공실장은 그제야 내 눈을 바라봤다. 그는 사진을 전송해 의원실 중간에 있는 가상 모니터에 띄웠다. 어두운 분위기의 방이 보였다. 은은한 조명이 고급스러운 소파를 비추고 있었고 거기에 앉아있는 눈을 흐리멍덩한 남자가 있었는데 멀리서 봐도 약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나였다. 설마 했던 그곳이었다. 저번 주 주말에 갔던 클럽 내부가 찍힌 사진이었다. 어떻게 유출된 거야! 동료 의원 말로는 내부에 CCTV도 없고 회원제로 운영되어 비밀이 새 나갈 일도 없다고 했다. 어디에 간다고 가족들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는데 내가 여기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여기 있던 모든 사람이 타겟이 되었을까. 

놀라 벌떡 일어서 공진석을 봤다. 그는 내 표정을 보고 난감해 했다. 내 표정을 보고 알아챈 것이다. 내가 저곳에 있었고, 사진은 조작된 게 아니라는 걸.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자신이 할 일을 했다.

"오늘 아침에 의원실로 온 전자팩스입니다. 사진과 함께 음성 메시지가 왔습니다. 확인해보시겠습니까.”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공실장이 제스쳐를 취했다. 스피커에서 전자음으로 된 가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이고 배영호 의원님 안녕하십니까. 공사다망하신 줄 알지만 제보가 있어서 이렇게 연락드립니다. 저번 주말에 아주 좋은 시간 가지셨더군요! 요즘 정치권이 조용했죠? 이거 알려지면 확실히 주목받으실 수 있겠어요. 최근에 이 일로 야당에서 한 명 나가신 거 아시죠? 모르실 리가 없죠. 배의원님 손으로 내보내셨으니까. 다시 정치권에 발도 못 붙이게 하겠다고 공언 하셨다죠? 그런 분이 같은 일을 저지르시면 어떡합니까. 뭐 다들 하신다고는 하는데 시기가 좋지 않았네요.”

협박이라도 하는 거야!! 분노가 울컥 차올라 테이블을 주먹으로 쳤다! 충격으로 손목까지 찡하고 아팠지만 공실장이 보고 있으니 꾹 참았다. 체면이 있는데 촐싹 거리며 아파할 순 없지. 아픈 손을 테이블 아래로 슬그머니 내려 그러 쥐었다. 그에 상관없이 음성 메시지는 계속 되었다.

"협박 아닙니다~ 같이 협력 좀 하자는 거지요."

명백한 협박이었다.

"저희는 아마추어처럼 돈 같은 거 바라지 않습니다. 신고도 안 할 거예요. 신고 해봤자 구속도 안 될 거 뻔하죠. 검찰 뒷배가 있으신데 저희가 어떻게 의원님을 건드리겠습니까. 저희 그렇게 많은 거 안 바랍니다. 이번에 국회 통과하는 안건에 무조건 다 기권표 누르세요. 내일 본회의 있으시죠? 그때 다 기권 눌러주시면 됩니다. 반대 누르라는 것도 아니잖아요. 쉽게 해결 할 수 있는 일, 어렵게 만들지 맙시다 의원님. 좋은 게 좋은 거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눈썹을 치켜 세우고 공실장을 봤다. 확실히 내일 의회 본회의가 있긴 했다. 무슨 안건들이 있길래 기권을 하라는 건가. 기권 누르는 거야 매일 하던 일이고 쉬운 일이었지만 저들이 원하는 게 푼돈이 아니니 불안해졌다. 저들은 풋내기 양아치가 아니고 어떤 뒷배가 있는 세력,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적인 흐름을 바꾸려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야당이나 다른 정치 세력일지도 모른다. 내일 본회의에서 표결에 들어갈 안건을 확인해야 했다. 오늘 사무실에 온 목적이기도 했다.

음성 메시지가 끝나자 공실장은 종이처럼 보이는 스크린을 가져왔다. 예전에는 가상 스크린으로 일을 봤지만 이제 노안이 와서 그런지 흐릿하고 작은 화면으로 텍스트를 보는 건 힘들었다. 종이처럼 인쇄되는 화면이 있다길래 몇 년 전부터는 종이 스크린으로 문서를 보고 있다. 다른 의원들 중에는 보안 때문에 종이를 쓴다는 의원들도 있었지만 어차피 컴퓨터로 작업해 인쇄해야 하니 보안에 취약한 건 마찬가지였다. 종이라도 아끼려면 종이 스크린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여기, 내일 상정되는 안건들입니다. 총 세 건이 상정되는데, 하나는 수소 건전지 차량 탑재에 관한 안건이고 다른 하나는 반려동물 입양에 관한 건, 마지막 하나는 온라인 개인정보 이용에 관한 건입니다."

하나 같이 다 자잘하고 하찮은 안건이었다. 아니 수소 건전지는 좀 큰 건이려나. 수소 건전지 회사에서 로비가 들어오긴 했었다. 저번주에 클럽에서 회사 임원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에잇, 말도 섞어보지 않았는데 무슨 상관이람.

"당에서는 뭐래!"

어차피 당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걸. 내가 이 자리까지 온 것도 당이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당이건 자기들이 이끄는 대로 움직일 의원들이 필요하다. 의원들은 자리가 필요하니 서로 필요에 의해 움직이는 관계일 뿐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자리를 원했다. 그때그때 힘센 당으로 옮겨 다니며 내 자리만 지키면 됐다.

"수소 건전지 건과 온라인 개인정보 이용 건에만 찬성해 주십사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그 반려동물 건은"

“그 건은 의원님들 자율에 맡긴다고 전했습니다. 당이 합심해서 표결 해야 할 정도로 큰 사안은 아니랍니다. 야당이 낸 법안이라 단체로 반대할 법도 한데, 반려동물을 키우는 의원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안건들을 살펴봐도 누구를 특정할 만한 안건은 없었다. 내일 상정될 안건은 예전부터 오랜 기간 논의되어 왔던 안건들이었다. 

"하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벌이는 거야."

답답함에 조바심이 났다. 손을 들어 얼굴을 비볐다. 편하게 다 기권하고 끝내고 싶었지만 찜찜했다. 이번에 시키는 대로 하면 끝나는 걸까, 이걸로 또 협박을 하진 않을까. 저 사진이 그놈들 손에 있는 한 나는 계속해서 그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공실장을 바라봤다. 그는 이미 답을 내놓은 듯 확신에 찬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느 그가 원하는 물음을 던졌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어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바로 대답했다.

"이번에는 다 기권표 누르시지요. 그 사이에 움직이는 세력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이 문제는 차 검사에게도 미리 말해놓겠습니다. 어차피 온라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조사하면 협박범은 금방 잡힐 겁니다."

그래. 요즘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일은 세상 그 무엇보다 투명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기록이 다 남고 개인정보 기록은 모두 검찰 손아귀에 있다. 무엇을 클릭 하고, 어디까지 스크롤 했는지부터 어디에서 접속했는지, 어떤 경로로 들어왔는지까지 원한다면 검찰은 개인의 모든 인터넷 사용 기록을 알 수 있었다. 뒤가 구린 사람들은 그걸 못 견뎌 다시 오프라인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다 태워버리면 그만이니까. 과거 A당 집권 당시 전산화를 추진했던 국회가 다시 페이퍼화를 추진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온라인은 비리와 청탁에 취약했다. 

“하긴 그 말이 맞는군. 미친놈들이야 그래. 조사해보면 다 나올 텐데 이런 방식으로 협박을 하나. 전자 팩스와 음성 메시지라니. 요즘 그 뭐냐 그 해외로 아이피 돌려서 하는 그것도 다 조사할 수 있다며. 근데 뭘 믿고 이렇게 까불어? 차라리 편지를 보내던가 말이야. 정성이 없구먼 그래”

큰소리로 허세를 떨었지만 긴장이 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힘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넥타이가 목을 조여오는 거 같아 손가락을 넥타이 매듭에 걸어 거칠게 당겼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바로 조처를 하겠습니다. 쉬고 계시죠 의원님. 커피 가져오겠습니다."

"그래. 너무 수선 떨지 말고. 조용히 처리해. 뭐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공실장이 단정하게 문을 닫고 나갔다. 어수선하게 들어올 때와는 반대의 모습이었다. 

 

배영호 의원실이 조용해졌다는 연락을 받고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얘기가 됐을지 눈에 보인다. 검찰에 연락해서 협박한 놈들을 찾아 달라고 하겠지. 얼마 안 가 어디서 메시지를 보냈는지 찾아낼 거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보냈다는 사실을 들킬 일은 없다. 그 메시지는 배영호 의원실에서 보낸 거였다. 배영호 의원은 그 메시지를 인터넷으로 보낸 줄 알지만 그건 그가 좋아하는 오프라인으로 보낸 거였다. 온라인으로 아무리 사부작거려도 기록은 다 남는다. 요즘 국가 정보원에서 딥웹까지 섭렵을 했다니 우리가 숨을 곳은 오프라인 밖에 없다. 배영호 의원 같은 할아버지 의원도 그걸 안다. 그러니까 사무실 문도 그렇게 열쇠로 잠그는 구닥다리 자물쇠로 다 바꿔 달아놓지.

A당 정책 위원장으로 있는 지은이 내 옆을 지나가며 걱정의 말을 늘어 놓았다.

"영철 선배. 배의원 쪽은 어때요? 괜찮겠어요? 이번엔 좀 위험하지 않을까. 배영호는 몰라도 공실장은 좀 똑똑하잖아."

"똑똑하니까 더 의심 받겠지. 배영호 같은 사람이 자기 사무실에 첩자 있다고 하면 누굴 제일 먼저 의심할 거 같아?"

"하하 공실장이겠죠. 알지 그런 사람들. 뒤가 구린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도 다 자기 같을 거라고 생각 하잖아. 선배도 참 대단해. 거기까지 생각한 거에요? CCTV 같은 거나 출입 기록은요? 남은 거 있어요?”

"배영호 사무실 인턴을 매수해서 괜찮아. 배영호는 이상하게 절박한 애들 뽑더라. 그런 애들이 약점이 많아서 잘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봐."

"그 약점 때문에 우리 같은 악당들에게도 이용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못하나 봐요.”

지은은 우리를 자주 악당이라고 말했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의 뒤를 캐고 협박을 해서 그런 걸까. 하지만 그 사람들은 사람을 죽여 지은아. 너는 사람이 너무 착해. 작은 정당이기는 해도 당을 이끌어야 하는 임원이어서 그런지 지은은 강박적으로 도덕적이기 위해 노력했다. B당 누가 뇌물을 받았다면 '또 받았네.'하고 넘어가지만 우리가 속한 A당에서 뇌물을 받았다면 검찰에, 의회에, 온라인에, 모두 일어나 그를 욕하기 바빴다. 수사는 또 얼마나 속전속결로 이뤄지는지. 바로 그다음 날 실무자 몇 명은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 옛날 A당이 극적으로 한 번 정권을 잡은 후로 생겨난 관례라고 한다. 

그들도 뭔가를 아는 걸까. 적어도 내가 보기에 A당은 견제 당할 이유가 충분하다. 집권하는 동안 아무 일도 못 했을 거라는 야당의 생각과는 다르게 A당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들로서는 다시 없을 기회였을 테니까. 내가 알게 된 A당의 비밀은 몇 개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여느 악당 못지않은 충분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 그들은 준비되어 있었고, 빠르고, 똑똑했다. 이제는 세대가 교체되어 세력도 약해지고 과거의 A당을 아는 사람도 줄어들었다지만 지금까지 심심치 않게 A당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은 과거의 그들 때문이었다. A당은 과거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었다. 

A당이 집권했던 시절 그들은 이전 정권이 해결하지 못했던 동물복지, 원자력 발전소 폐쇄, 간접 고용 문제를 전면적으로 뜯어 고쳤다. 간접고용을 직접 고용으로 전환하고 비정규직에게 전에 없는 파격적인 보장, 차별 금지법 제정, 중소 언론의 활성화, 검찰 철폐, 결혼 제도 폐지, 중대 범죄에 형량 강화 등을 이뤄내고 장렬히 퇴장했다. 얼마나 많은 정책이 이루어졌는지 지금 그때의 주역들이 돌아온다 하더라도 다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급진적인 A당의 정책들과 밀어붙이기식 행정은 집권 내내 주변의 반발을 샀다. 결국 그다음 정권을 자연스럽게 B당이 정권을 가져가게 된 이유가 됐다. B당은 집권 첫날부터 A당 지우기에 나섰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그들의 업적을 자신들이 이룬 것으로 포장하거나 맘에 들지 않는 정책은 충분한 논의도 없이 파기시켜 버렸다. 열심히 일하면 더 많이 털어 먹을 수 있다는 걸 A당 집권 시기에 배운 건지 B당은 그들 특유의 헐렁한 도덕심에 근면·성실함을 더해 각종 기업의 규제를 풀고, 장기집권에 토대가 될 수 있는 정책들을 마련했다. 어느 당이던 자신들의 권력을 뺏어갈 수 없도록 견고하게 성을 쌓았다.

회사들은 B당이 다시 간접 고용을 살려내자 고용했던 정규직이 지긋지긋한 짐이었다는 식으로 몸을 털어 떨쳐내고 다시 하청을 끼고 사원들을 고용했다. 자본을 가진 대형 언론들이 부활해 정규직이 경제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 대대적으로 홍보하니 국민 대부분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실제로 경제 위기가 없었지만 경제가 어려우니 다 같이 고생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어마 안 가 최저 임금이 파기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상식 이하의 돈을 받으며 오랜 시간 일을 하는 구조가 정착되었다. 나는 그런 정치적 흐름 속에서 다니던 정규직 회사에서 잘리고 공기업 하청 비정규 계약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회사 내부 사정은 정말 가관이었다. 정부에서 모으는 공공 데이터를 취급하는 회사였는데 B정권 끄나풀이 낙하산으로 내려와 임원으로 앉아 있어서 그런지 회사를 경영하는 마인드가 사기업보다 더 박했다. 어느 부서이든 간에 돈이 될 만한 부서라면 회사 구조조정을 핑계로 없애 버리기 일쑤였는데 성과로 압박하고 근무 태도를 들먹이면 멀쩡하던 부서도 풍비박산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위에서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외주나 하청업체를 끌어들여 부서를 맡겼다. 정시 퇴근 하는 서버실이 보기 싫었던 낙하산은 서버실이 문제없이 잘 돌아간다는 이유로 부서에 있던 관리직 한 명과 실무직 한 명을 자르고 하청에 서버실 관리를 맡겼다. 사실 비용은 직접 직원을 고용하는 것보다 많이 들어가지만 책임을 미룰 수 있고, 돈의 상당 부분이 다시 뒷주머니로 돌아오니 낙하산 입장에선 이보다 쉬운 장사가 없었다. 하청이 얼마나 전문성을 가지고 일하는지, 노동자들이 어떤 복지를 누릴 수 있는지는 그들에게 논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문제없이 돌아가던 서버실에 들어가는 하청 노동자였다. 그들 말로는 그냥 보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이상이 있으면 상부에 보고하면 된다고. 처음 몇주는 그들 말대로 정말 그냥 보기만 했다. 하지만 후에 문제가 터지니 회사에서는 오히려 나에게 해결 방법을 물었다. 

하청으로 들어가기 전, 사장은 나에게 헛된 꿈을 심어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은 이 회사에서 오래 근무했었고 여기 임원들과 자신은 호형호제를 하는 사이이며 내가 말만 잘하면 너를 여기 정규직으로 앉혀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인터넷을 뒤져가며 배우고 익혔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정규직이 될 수 있는 길은 오히려 과거의 나 같은 사람들이 망쳐 놓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꾸역꾸역 정규직 두 명 분의 일을 했고 그로 인해 회사는 정규직을 뽑을 이유를 찾지 못했으니까. 이후 관리조차 귀찮았던 회사는 나에게 서버 접근 권한을 주며 전적으로 맡아서 관리를하라고 했다. 속 뜻도 모르고 나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마냥 기뻤다.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잦은 야근 -당연히 야근 수당은 없었다- 을 하며 서버에 어떤 데이터가 있는지, 어떻게 컨트롤이 가능한지 알아갔다. 그렇게 한 달 정도 되니 어디에 어떤 데이터가 모이는지 모두 파악 할 수 있었다. 

단 하나, 목적을 알 수 없고, 무엇을 수집하는 지 알 수 없는 데이터를 제외하고.

어떤 표식도 없이 구석에 처박혀 있던 데이터였다. 13년 전부터 시작된 데이터는 단순한 숫자였지만 꾸준한 업데이트로 꽤 방대한 양이 되어 있었다. 이 숫자들은 뭘까. 누구에게 물어보고 싶어도 서버와 데이터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다. 혹시 몰라 상부에 안 쓰는 데이터도 있는 거냐 물으니 회사에서는 지금 당장 쓰는 데이터가 아니면 무시하라고 했다. 그런 게 한두 개냐며. 아는 사람이 없겠지. 기존에 일하던 사람들을 다 해고해 버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하청 업체 직원을 거기 앉혀 놓으니 아무리 인수인계 문서를 원자 단위로 짜놨다고 하더라도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기존 직원이 있으면 뉘앙스라도 알 수 있을 텐데 내부에 뭔가 알만한 직원들은 대규모 인사이동 후 어디론가 다들 사라져 버렸다.

이대로 무시하기는 찝찝하니 데이터 형태를 메모지에 적어 벽에 붙여놓고 계속 들여다보았다. 

'37.56638241882419, 126.99686475140857"

그리고 며칠 뒤. 그 숫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과장은 나를 불러 필요한 일을 부탁했다. 데이터 팀은 또 어디 간 건지, 왜 서버관리자인 나에게 데이터를 뽑아달라고 하는 걸까? 조금 있으면 데이터 분석까지 시킬 기세였다. 행정, 기획업무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컴퓨터와 가까이 있으면 다 그게 그거 같아 보이겠지만 하는 일은 엄연히 다른데. 하지만 나는 또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묵묵히 일했다. 

서버에 있는 데이터는 거의 숫자나 알파벳이었는데 그걸 보기 좋게 꾸미고 그래프로 그리는 것은 데이터 담당자나 디자이너의 일이었다. 그래서 어떤 데이터를 뽑든 결과를 확인하고 주진 않았는데 오늘 뽑은 데이터는 눈에 익은 형태라 계속 들여다보게 되었다. 전국에 있는 파출소 위치 정보라는데 벽에 붙어있는 메모지와 같은 형태의 숫자였다. 숫자는 십진수로 표현된 위도와 경도, 즉 위치 좌표였다.

지도를 열고 검색 창에 숫자를 입력하자 기가 막히게 한 점이 찍혔다. 무슨 데이터인지 알 수 없었던 그 데이터가 위치 정보 모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어떤 위치가 날마다, 시간마다 이렇게 업데이트 되고 있는 걸까. 뭐가 움직이기라도 하는 걸까? 이런 방대한 양의 데이터라면 계속 움직이는 것이니, 차나 사람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숫자와 알파벳으로 분류된 파일에 날짜별로 쌓이는 위치 정보들이 보였다. 어떤 위치 정보인지 알 수 없으니 나는 우선 그 데이터들이 시작된 날짜에 주목했다. 13년 전 6월 17일. 그 날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13년 전, 나는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A당이 정권을 잡았던 바로 그 해, A당은 국립대학을 하나로 통폐합 시켰다. 지역을 나타내던 이름을 없애고 1, 2, 3, 4 같은 아라비아 숫자로 대학 이름을 바꿨다. 학과 별로 대학을 나눠 특성화 시키면서 지역사회와 연계하여 이미지 메이킹을 시도했다고 한다. 내가 다닌 2대학은 강원도에 있었고 컴퓨터와 관련 전공들만 모여있었다. 6월이면 1학기 기말고사 즈음이었을까.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전 세계적으로 또 전염병이 번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행히 한 학기 만에 백신이 발.견. 되어 소동이 잠잠해졌지만 그때 태어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방 주사를 맞아야 했다. 

전염병과 이 데이터가 어떤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더 정확한 정보를 얻고 싶어 A당에 있는 후배에게 연락을 했다. 나지은. 그녀는 내가 2학년 때 같은 학과에 입학한 후배였다. 그녀가 입학했을 때부터 알았던 건 아니었다. 학과 생활도 잘 안 하던 나에게 친구가 같이 팀플레이나 하라며 소개해 준 후배였다. 그 후로 우리는 다른 친구들과 자주 모여 다니며 같이 노는 무리가 되었다.

같이 노는 친구들 중에 지은은 유독 눈에 띄는 친구였다. 한 번은 저녁을 먹고 학교 주변을 산책하다가 지은을 만난 적이 있었다. 지은은 빛을 받으면 반사되는 특수 조끼를 입은 채 손전등을 들고 학교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옆에는 같은 복장을 한 사람이 같이 있었다. 

"지은아 여기서 뭐 해?"

"어, 선배! 저녁 드시고 오는 길이에요?"

지은과 같이 있던 사람은 지은과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을 보고 살짝 자리를 피해줬다.

"옷은 그게 뭐야? 여기서 뭐 해?"

지은은 허허 웃으며 얘기했다. 

"방범 활동 하고 있어요. 저녁에 산책도 좀 할 겸 이상한 거 없나 좀 둘러보는 거에요. 학생 자율 방범대 모집 하길래 지원해봤죠. 이거는 빛 반사되는 조끼. 위험하지 말라고.”

어이가 없었다. 보호 받아야 할 거 같은 애가 누굴 지킨다고 방범 활동을 하는 걸까.

"네가 이러고 돌아다닌다고 뭐가 나아지겠어? 너만 위험해지는 거 아니야? 네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할 텐데 너무 고생하지 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을 했을 때 지은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표정을 숨기겠다는 의지도 없이 인상을 구기며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봤었다. 

"선배. 그 누구가 저라고는 생각 안 해봤어요? 누구나 다 내가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하면 결국 아무도 행동하지 않아요. 선배 말도 맞아요. 내가 싸우기를 하겠어요 뭘 하겠어요. 저는 바라보고 신고하는 것 밖에 못해요. 근데 그거라도 하려고요. 사람들은 누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 긴장하고 바르게 행동하기 마련이니까. 선배 뒤는 제가 봐 드릴게요. 가던 길 가세요."

지은은 그 말을 뱉고 일행과 어둠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나는 그녀 손전등에서 비추는 한 줄기 빛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좇았다. 속에서 종이 뎅-하고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다음부터 나는 지은의 모습이라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단번에 찾을 수 있었다. 

서명 활동을 벌일 때라던가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할 때에도, 하물며 몇 백명이 들었던 특강에서도 나는 지은을 한번에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나는 취업을 위해 벌여놓은 일들을 수습하기에 바빴고 지은도 할 일이 많아 우리는 더이상 전처럼 자주 몰려다니지 못했다. 후에 지은을 소개해 준 친구를 통해 듣기로는 A당에 들어가 일하게 되었다지. 다른 사람을 위해 나서서 일하던 그녀에게 퍽 어울리는 일이었다. 

지은이 아직 A당에 있을까. 나는 데이터에 관한 순수한 호기심도 있었지만 지은이 궁금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로 오랫동안 지은과 연락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몇번을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었다. 

"네. 나지은 입니다."

“오랜만이다. 나 영철이야. 김영철. 2대학 같이 다니던."

"와 선배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귀찮아 할 줄 알았지만 다행히 지은은 내 연락을 반가워 해줬다. 주책없이 눈물이 맺힐 거 같았다.

"나야 잘 지내지. 너는 어떻게 지내? 지금 어디서 일하고 있어? 아직 A당에 있니?"

지은은 약간 놀란 눈치였다.

"저 A당에서 일하고 있는 게 거기까지 알려졌어요? 세상 참 좁아. 아직 거기서 일하고 있어요. 몇 년째인지 몰라. 나만 남은 거 같아 여기. 선배는 어디 있어요? 아니 그러지 말고 만나서 말해요.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래요? 마침 내일 또 금요일이네. 서울에 있어요?"

나는 당시 서울에서 일하고 있었고 국회도 아직 여의도에 있던 때였다. 우리는 바로 다음 날 저녁에 여의도에서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닭칼국수가 맛있다는 지하의 낡은 식당에서 지은을 만났다. 

"선배 여기!"

지은은 짧은 머리를 하나로 묶고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예전과 비교해 아주 그대로인 모습에, 반갑기도 하고 어이도 없었다. 세월이 지은만 비껴간 것 같았다.

"너는 십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네. 잘 지냈어? 그러고 출근 한 거야?"

"하하 선배 꼰대 같은 건 여전하네요." 

지은의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그 뒤로 많이 생각하고 공부한다고 했는데 아직 행동은 부족했다. 다행히 더 부끄러워지기 전에 주방에서 반찬을 가져다주셔서 입을 닫을 수 있었다. 지은은 버릇처럼 반찬을 가져다주는 종업원을 도우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구태여 안 해도 되는데 내가 물은 질문에 대답을 했다.

“오늘은 사람 만날 일이 없어서 이렇게 입고 출근했어요. 그리고 어차피 사람들이 저는 신경도 안 써요. 거의 없는 사람이죠, 없는 사람."

지은의 얼굴이 시무룩했다. 어깨도 아까보다 쪼그라든 것 같았다. A당이 지금 어떤지 나도 잘 알고 있다. 딱히 해줄 말이 생각나지 않아 마침 나온 국수를 조용히 지은 앞에 놓았다. 지은은 그저 조용히 미소를 지어줬다.

우리는 따뜻한 닭칼국수로 배를 채우며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지은은 A당이 득세할 때 당에 들어갔다가 작은 의원도 배출하지 못하는 군소정당이 된 지금까지 그 당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청년 위원장에서 정책 위원장까지 빠르게 올라갔는데 그게 자신의 능력이 출중해서가 아니라 앞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당을 나가거나 옮겼기 때문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A당이 권력을 잡았던 게 극적이긴 했죠. 그때 야당이었던 당에서는 비리 사건에 성착취 사건이 줄줄이 터지고, 나이 많은 여당 의원들은 전염병으로 줄줄이 죽어 갔잖아. 사람들이 그때 얼마나 패닉이었으면 A당을 밀어줘. 그때 정말 신기할 정도로 A당은 피해가 없었대요. 준비도 잘 되어 있었고. 그때 정책 위원장이 되게 할아버지였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이... 이휼봉! 맞아 그 할아버지가 약간 그런 끼가 있었다고 했어요. 맨날 사람들한테 준비하고 있어라. 이제 대권이 바뀔 거다. 기회는 온다. 그러면서 직원들을 살뜰하게 잡아댔다고 해요. 정책들 그때 다 그 할아버지한테 닦달 당해가면서 마련해 놓은 거래요.

근데 진짜 A당이 집권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A당은 이때다 싶어서 뒤 한 번 안 돌아보고 달렸다고 해요. 한참 바쁠 때 내가 들어갔는데 그때까지 있었어 그 할아버지. 나도 몇 번 봤는데 한번은 나보고 그러더라고요 '네가 제일 오래 고생하겠구나.' 웃긴 게 뭔 줄 알아요? 나도 그만두고 싶을 때 많았지. 근데 그 할아버지가 얘기했던 게 생각나서 못 그만두겠는 거에요. 그래, 내가 제일 오래 있는다고 했지. 지금은 그만둘 때가 아닌가 보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어요. 어떻게 된 게 내가 제일 고참이야. 나 겨우 10년 조금 넘게 일했을 뿐인데. 그 많던 사람들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안부를 묻고 적당한 타이밍에 궁금했던 이야기를 지은에게 물어봤다.

"지은아 혹시 A당에 있으면서 위치에 관한 거 못 들었어? 어떤 위치를 추적한다거나, 데이터를 모아두고 있다거나."

"위치? 어떤? 데이터? 무슨 말이야?"

나는 지금 데이터를 관리하는 공기업에서 일하고 있으며 데이터들을 정리하다가 수상한 데이터 더미 하나를 발견했다고 이야기했다. 

"데이터 시작된 날이 13년 전이었어. 그때 집권당은 A당이었잖아. 이런 거대한 데이터를 통제할 수 있는 건, 공기업이나 대기업 삼지, 정부 뿐일 텐데 같은 공기업이라면 히스토리가 좀 남아 있을 테고, 삼지는 정보를 외부에 맡길 일이 없겠지. 내부에서 충분히 다룰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그 데이터 출처가 A당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맞아. 그래서 A당에서 일하고 있다는 네 생각이 났어."

"그랬구나. 근데 당장은 생각 나는 게 없어요. 기록을 좀 찾아볼게요."

지은의 눈치를 보니 정말 모르는 모양이었다. A당이 아닌걸까? 나도 살짝 흔들렸지만 A당이 아닐리 없다. 하지만 이렇게 써먹지도 못하는데 꾸준히 업데이트 되어 자리만 차지하는 데이터를 A당은 왜 수집하고 있었을까. 

지은은 며칠 뒤 기록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쪽도 선임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좌절하기엔 일렀다. 지은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전에 말했던 할아버지 정책 위원장 이휼봉 옹을 만나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도 뭔가 감이 온 것 같았다. A당은 분명히 그 데이터로 무슨 일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지은에 따르면 이휼봉 옹은 소멸한 시골에 아들과 둘이 산다고 했다. 아직 그곳에 사시는지 확인하기 위해 미리 연락을 드리니 아들에게서 흔쾌히 오라는 대답을 받았다고. 마침 내일이 주말이기도 하니 우리는 고속철을 타고 같이 이동하기로 했다. 

역에서 부터는 무인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기차에서는 몰랐지만 택시를 타는 지은의 손에는 종이 쇼핑백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거? 그래도 은사님 같은 분을 뵈러 가는데 빈손으로 갈 수 있나. 빵 좀 샀어요."

내 빈손의 민망함은 어쩔 것인가. 나는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지은은 항상 나를 민망하게 했고, 나는 지은의 그런 면이 좋았다.

선생님이 사는 곳은 사람 없는 시골이었다. 가게들이 없었고 지나가는 사람도 적었다. 산이라면 경치라도 좋겠지만 드넓은 평야에 드문드문 있는 집들은 꽤 쓸쓸해 보였다. 그 집들 가운데 눈에 띄는 집이 한 채가 있었는데 붉은 기와가 멀리서도 눈에 띄는 아름다운 집이었다.

"어서오세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 하셨어요."

이휼봉 선생님의 아들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를 맞았다. 아직 춥지 않은 날씨인데도 니트를 입은 깡마른 몸은 옷차림을 이해할 수 있게 했고 군데군데 하얀 머리카락과 얼굴에 주름살은 나이를 짐작하게 했다. 아들이 이 정도 나이니 이휼봉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나이가 많으실 거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연로하시다면 초면에 당황할 것 같았다. 

"지은아 이휼봉 선생님 연세가 어떻게 되셔?”

지은도 같은 심정이었나보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도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십 년 전에도 할아버지셨어. 사실 나 아직 살아 계실 거라고는 생각 못했거든요."

선생님께서는 집 안쪽에 있는 툇마루에 계신다고 했다. 아드님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니 집 안쪽으로 창이 나 있고 그 창 너머로 안마당이 보였다. 마당의 끝, 집과 닿아 있는 경계에 마루가 이어져 있었다. ㅁ자로 툇마루가 되어 있었는데 햇빛이 제일 잘 비치는 곳에 이휼봉 옹으로 보이는 분이 앉아 계셨다. 

"그럼 이야기들 나누고 계세요. 저는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우리를 안내해 주고 아드님은 자리를 피해 주셨다. 우리는 안마당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툇마루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랜만에 봬요."

지은이가 먼저 인사를 했다. 선생님은 그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봤다. 나이 많은 몸은 지방 하나 없이 깡마르고 굽어 있었다. 두툼한 니트에 몸이 묻혀 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우리를 바라보는 표정은 온화 했고 눈빛은 현역인 듯 형형했다. 

"왔구나. 내가 죽기 전에 한 번은 볼 줄 알았지. 먼 길 왔을 텐데. 앉아. 여기 햇빛이 참 좋아."

"제가 올 줄 알고 계셨어요?"

지은은 옛날 생각이 나는지 눈이 아득해졌다. 선생님은 그런 지은을 향해 아이를 보는 듯 다정한 눈빛으로 웃어 주셨다.

"그럼 그럼. 한 번은 더 보겠다 생각이 들었지. 내가 잘 움직이지 못하니 네가 온 것이야. 그래 궁금한 게 있나 보구나."

"선배가 예전에 A당 집권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다고 해서 데려왔어요. 그때 일은 선생님이 제일 잘 아시니까. 선생님 잘 계신지도 궁금하기도 했고요. 여기는 대학교 1년 선배 김영철 이라고 해요."

지은이 나를 선생님께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지은의 말에 나를 빤히 쳐다보셨다. 지은을 보던 눈빛과는 180도 달랐다. 싸늘했다. 비수가 날아와 꽂혔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어요. 그런데 무슨 얘기가 듣고 싶어서 나를 찾아오셨나. 나는 해줄 말이 별로 없는데."

나는 선생님 눈빛에 주눅이 들어 지은의 눈치를 살폈다. 지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 대신 선생님께 대신 운을 띄웠다. 

"선배가 어떤 데이터를 찾았대요. 13년 전 시작된 위치 데이터인데 어떤 위치인지 모른대요. 사람인지 동물인지 아니면 어떤 특정 물류일지 혹은 차인지 특정할 수 없다고 저를 찾아왔어요. 그 당시 A당이 집권하고 있었으니까요. 양이 워낙 방대해서 배후에 A당이 있다고 생각하나 봐요."

지은이 얘기하고 있는 동안 나는 기민하게 이휼봉 옹을 살폈다. 이휼봉 옹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위치 데이터. 13년 전..."

선생님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때마침 아드님이 다과가 든 소반을 들고 툇마루에 놓고 갔다. 소반 위에는 따뜻한 차와 지은이 가져온 빵이 예쁘게 플레이팅 되어 있었다. 소반에 정신이 팔렸는데 선생님이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13년 전에 전염병이 한차례 돌았지. 다행히 백신을 만들 것도 없이 예방 효과가 있는 약을 찾았어. 물량도 충분해서 동시다발적으로 온 국민이 다 백신을 맞게 되었지. 아마 내가 기억하기로는 3개월 내에 모든 접종이 끝났을 걸세."

"네 맞습니다."

학교에서 백신 접종을 시행했던 게 생각이 났다. 방학이 되면 학생들은 있던 곳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학교 측이 서둘러 백신을 접종시켰다. 정문으로 지나가가는 사람은 모두 팔을 붙잡아 주사를 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작용이 거의 없고 안정성이 보장되어 있던 백신이었기 때문에 주삿바늘에 망설임이 없었다. 나도 학교에 가는데 팔을 붙잡혀 주사를 맞고 시험을 봤던 기억이 났다.

"그 백신에 사실 섞이면 안 될게 섞여 있었네."

한숨 섞인 말이었다. 안에 있는 숨을 깊게 내뱉은 노인은 내쉰 공기만큼 몸이 더 쪼그라든 것 같았다. 지은은 그런 노인을 가엽게 쳐다보다가 뭔가 깨달은 듯 펄쩍 뛰며 말했다. 

"아, 그럼 혹시 거기에 위치 추적 장치가!!!!!"

그게 맞는다면 경악할 노릇이었다. 선생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선생님은 부정하지 않았고 우리는 당황했다. 툇마루에 적막감이 돌았다. 그 뒤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생각보다 일찍 자리를 떴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던 지은의 등을 보며 배웅하러 따라 나온 선생님이 말했다. 

"여태 고생이 많았는데, 더 고생해야 되겠구나. 너무 많이 울진 말고 네 길을 가려무나."

지은은 무슨 말인가 싶어 뒤돌아보았지만 선생님은 느린 발걸음을 돌려 다시 툇마루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지은은 더 묻지 못하고 뒤돌아섰다.

지은과는 그렇게 어영부영 서울로 돌아왔다. 뭘 해야 할지 몰랐지만 우선 월요일에 출근하자마자 데이터를 검증하기로 했다. 분명히 식별 값도 있을 것이다. 그 식별값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가지고 있는 고유번호, 주민등록 번호일 가능성이 컸다. 암호화해서 쉽게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을 테니 그 로직만 알아내면 된다. 주민번호라고 생각하니 로직을 알아내는 것은 쉬웠다. 이제 주민등록번호만 알면 그 사람이 13년 전부터 어디를 다녔는지 알 수 있었다.

지은에게서는 선생님께 갔다 온 그날부터 계속 연락이 왔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나는 그 연락을 받지 않았다. 온 국민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는 있다는 걸 알았으니 지은이 안달 날 만도 하겠지. 그 데이터는 누군가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치부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에게 팔면 돈이 될 수 있을까? 누구를 찾아가야 할까.

 

"선배 기억나요? 우리 이휼봉 선생님께 갔다 온 뒤에 바로 선배 연락 두절 됐었잖아. 하하. 나 진짜 신고하려고 했다니까. 근데 신고하면 B당이나 검사 나으리들이 그거 다 가져가서 입 쓱싹 하겠지. 가뜩이나 작아진 A당은 아주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고. 지금도 맨날 조사 받는데 그 데이터 있다는 거 밝혀지면 어휴 나 생각하기도 싫다 아주. 나노 단위까지 조사 받았을 거야. 난 그때 A당에 있지도 않았는데.

그러니 어떻게 해. 선배가 그거 가지고 다른 데로 나르지 않게 그때부터 옆에 딱 붙어 있었지. 나 그때 진짜 좀 스토커 같지 않았어요? 시간이 조금만 비어도 전화하고 문자 보내고, 심지어는 퇴근 전에 회사로 찾아가서 기다리고 있었어."

그때 얼마나 암담했는지 선배는 생각도 못 할 거다. A당이 그런 일을 벌였을 줄은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래. 그때 나도 정신이 없는데 네가 연락하고 찾아와서 어영부영 나 여기로 끌고왔잖아. 내가 그때 정신 똑바로 차렸어야 했는데. 어이구. 그 데이터 다 들고 A당에 들어올 줄 어떻게 알았겠어. 그리고 네 말대로 이런 악당 짓을 벌이고 있을지는 또 누가 알았겠어."

정보 데이터를 이용해 사람들을 협박하고 우리 편으로 만드는 방법은, 내가 처음 시작했지만 이젠 거의 선배가 전담하고 있었다.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테지만 우리는 그들을 설득 할 시간도 없었고 설득한다고 설득 될 사람들도 아니었다. 뭐랄까 우리 나름의 로비활동이라고 할까? 우리는 강력한 수단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A당 선조들이 물려준 빚이자 유물이지. 우리는 그걸 보존 할 필요가 있는 거야."

다음날 우리의 우려가 무색하게 배영호 의원은 의회에서 모든 투표에 기권을 눌렀다. 배영호 의원 같은 사람은 자존심과 권위의식 빼면 시체라서 끝까지 기권을 누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려 했었지만 약에 취한 사진이 배의원에게 많이 치명적이었나보다. 

사실 배영호 의원이 아니어도 됐다. 그도 장기판 위에 세워둘 하나의 말에 불과했으니까. 이미 수많은 국회 직원들과 국회의원들이 그 장기판 위에 있었다. 우리는 똑똑하고 눈치빠른 자수성가형 의원들은 건드리지 않았는데 그들은 살면서 이런 난관을 수없이 헤쳐왔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역공을 당할 위험이 있었다. 우리는 강남에 집 한 채쯤 있고 대대로 부를 이어온 의원들, 우물 안 개구리형 의원들과 그 끄나풀을 목표로 삼았다. 누구는 비리 접대로, 누구는 남다른 성취향으로, 누구는 집안 문제로 한 번씩은 협박을 받고 우리가 원하는 데로 움직여줬다. 

배영호 의원 같은 사람이 딱 우리의 목표였지만 더 빨리 작업하지 않은 건, 공실장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공실장 같은 유형의 참모는 조심해야 한다.  

공실장은 의회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토론회에서 총리 후보인 B당 의원 하나를 공공연히 깎아내렸다는 이유로 당 하나가 없어진 일이 있었다. 대기업 임원이 그 당 핵심 임원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소문이 돌았다지. 검찰은 바로 조사에 착수했고 증거 인멸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인사가 구속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애초에 없었던 뇌물이 갑자기 생길 리 없었고 돈을 주었다던 대기업 임원은 그날 골프를 치러 교외로 나갔다는 증언도 이어졌다. 해프닝 혹은 가쉽으로 끝날 수 있던 일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기소권 없음으로 수사는 종결 되었지만 후속 보도는 미비했고 사람들은 그 당이 아직도 뇌물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당연히 그다음 선거에서 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헛소문 하나로 당을 끝내 버린 것이다. 그 배후에 공실장이 있었다.

공실장은 B당 안에서도 유능한 인재였다. 위기마다 당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였는데 머리가 비상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인 데다가 수단도 악랄해 사람들이 고개를 저었다. 배영호 같은 헐렁헐렁한 인간이 아직도 의회에 엉덩이 붙이고 있을 수 있는 건 순전히 공실장 덕이다. 그런 사람은 건드리기 싫었는데 움직일 수 있는 말이 없는 게 문제였다. 장기판 위에 말들이 많으면 뭐하나. 다들 한번씩 써먹은 말이라 더 움직일 수 없었다. 지속해서 한 상대를 압박하는 건 좋지 않다. 쥐도 궁지에 물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까. 피로가 쌓인 말들이 고개를 돌려 우리를 공격하기 전에 대신 싸워 줄 다른 말을 찾아야 했다. 

배의원까지 건드렸겠다. 국회에 있는 사람들을 한번씩 다 써먹은 거 같으니 앞으로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할 거 같았다. 선배와 국회 도서관 지하에서 밥을 먹고 나와 산책을 하며 물었다. 

"선배 우리 주말에 이휼봉 선생님께 다녀올래요? 바람도 쐬고 차도 좀 얻어 마시고. 이제 오늘내일하시는 거 같은데 한 번이라도 더 봐 둬야지. 어떻게 해야 하나 자문도 구하고."

선배는 마지못해 팔자 눈썹을 하고 알았노라 대답했다. 

“그래 가자. 이번에는 내가 과자를 준비할게."

하지만 나는 주말에 선배와 같이 선생님을 만나러 가지 못했다. 우리 끄나풀 역할을 하던 배영호 의원실 인턴에게 급하게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 만나기 위해 선배에게 혼자 다녀오시라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선생님을 봬야 했다. 선생님은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분이니 선배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실 거다.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배영호 의원 인턴은 국회와 한참 떨어진 인천에 살고 있어서 매일 긴 출퇴근을 한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인천으로 오라고 했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카페는 예전에는 큰 사립 대학이었지만 이제는 학생 미달로 폐쇄돼 시민대학으로 쓰이는 건물에 있었다. 휴일이라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요!"

카페에 들어서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한 남자가 손을 들고 나를 불렀다. 얼마나 급한지 내가 앉기도 전에 본론부터 말하기 시작했다. 

"공실장이 움직였어요. 오늘 무슨 일을 벌인다고 했어요. 알고 있어요 공실장은, 우리가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일을 벌이고 다녔는지. 김영철씨를 비롯한 나지은씨, A당 식구들이 어떤 일을 벌이는지 다 알고 있다고요. 뭘 숨기고 있는지 모르지만 일단 피해요. 꼭꼭 숨어서 세상에 다시는 나오지 마요. 알잖아요 공실장이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은 기필코 A당 사람들을 죽일 거에요. 목숨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요. 나는 이 말 하려고 당신을 여기로 불렀어요. 일정이 있었던 거 알아요. 그거 취소하게 하려고 일부러 이쪽에서 보자고 했어요. 공실장이 나지은씨 기차 예매 한 것을 알고 있더라고요.”

인턴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 당신은 실패했어. 일정을 취소한 건 나 하나니까. 선배는 그 기차를 타고 일정대로 선생님을 만나러 갔을 거야. 마음이 불안해졌다. 선배에게 바로 연락을 해야 한다. 인턴은 말이 없는 나를 보며 자신을 못 믿는 거라고 생각한 건지 절박하게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믿어주세요. 저는 공실장 끄나풀이 아니에요. 저는 그래도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동생 시체라도 찾을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공실장은 뒤에서 몰래 배영호 의원 같은 사례가 있나 조사했어요. 협박당한 사람이 더 있나 하고요. 처음에는 아무도 아니라고 했는데 공실장은 유능한 사람이라 그 사람들 입을 다 열게 만들더라고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협박한 거에요! 모두 A당의 적이 될 거라고는 생각 안 했어요? 공실장은 앙갚음을 하겠다고 했어요. 싹을 잘라 버리겠다고. 누구를 어디에서 해칠지 몰라요. 편이 많은 사람이니까 공실장에게 나지은씨 하나 죽이는 거야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겁니다. 저도 몇 명 알고 있어요. 그렇게 죽임당한 사람을. 그러니까 어서 도망가세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이 말을 해 드리는 거 밖에 없습니다. 부디 살아 남으세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전에 대책을 세우려 한 것인데.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다. 선배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데이터를 지키는 일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가 사람들의 위치 정보를 갖고 있다는 것까지는 들키지 않아야 한다. 죽을 때 죽더라도 그 비밀과 같이 죽어야 해. 그래야 가까운 미래에 A당이 되살아 날 수 있는 희망이 생긴다. 빨리 의회로 가서 데이터들을 빼 와야 했다.

인턴 말에 따르면 B당 전체가 우리의 존재를 아는 것 같았다. 자신들을 협박한 사람을 알았으니 나를 가만 둘리 없지. 하지만 데이터가 사무실에 있으니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눈에 띄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여 사무실로 향했다. 다행히 의회에는 사람이 많지 않아 사무실까지 누구도 마주치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십 몇 년을 한 자리에서 일하다 보니 개인 짐만 하더라도 상당한 양이었지만 다 챙겨 나올 수 없어 제일 중요한 데이터만 들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지방의 소멸한 도시에 언니 친구가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우선 그곳에 몸을 숨기기로 했다.  

고속 기차를 타고 가면서 선배에게 다시 연락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도망가'

메시지를 남기고 휴대폰을 껐다. 그리고 빌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았지만 그 순간 나는 기도를 하는 일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듣고 있지 않을 누군가를 향해 선배를 지켜 달라고 빌었다. 하지만 누군가 내 기도를 듣고 선배를 구하러 갔다고 하더라도 선배는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선배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며칠 뒤 교외의 저수지에서 시체가 하나 떠올랐다. 빵집 봉지 하나가 같이 발견 되었다는데 선배는 선생님께 답도 듣지 못하고 먼 길을 떠났나보다. 차도 없는 선배가 거기까지 어떻게 갔을까. 트렁크에 구겨져 저수지에 왔을 선배를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날이 점점 추워지는데 물은 또 얼마나 차가웠을까. 그날 먼 길 가지 말라고 할 걸. 아니 평소에 밥이라도 한 끼 더 먹어 둘걸. 

선배가 비명에 간 게 그렇게 슬프다가도 내가 죽은 게 아니라는 사실에 문득문득 안도감이 들었다. 그게 혐오스러워 나는 며칠이고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밥을 넘길 수 없었다. 선배는 그렇게 갔는데 너는 이렇게라도 살고 싶니? 누가 속에서 계속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살고 싶어서 언니 친구가 방에 밀어 준 음식을 개 같이 먹었다. 손으로 밥을 퍼먹으며 울었다. 살고 싶어서, 살아남은 게 선배에게 미안해서, 살아갈 앞날이 너무 두려워서. 

이렇게 청승 떨고 있는 후배가 안쓰러웠는지 울며 잠든 그날 선배가 꿈에 나타났다. 평소 꼰대 같이 말하기는 했어도 다정하긴 했었지. 나를 이렇게 버리고 갈 사람은 아니지. 계속 생각하던 선배가 꿈에 나타났지만 나는 미안함에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저 눈을 아래로 깔고 선배의 바짓단만 봤다. 바짓단 끝으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후배 앞으로 선배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왜 또 맨발이야. 머리 위로 손길이 느껴졌다. 선배는 내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더니

"악당은 씩씩하며 용감하지. 악당은 울지 않아."

하고 말하고는 인사도 없이 그대로 뒤돌아서 걸어갔다. 선배 아직 물도 다 마르지 않았는데 추워서 그 먼 길을 어떻게 가려고요. 맨 발로 그 험한 길을 어떻게 가려고요. 나 때문에 그렇게 돼서 미안하다고 말이라도 할 걸. 나는 왜 이렇게 기회가 와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울고만 있을까.

눈을 뜨고 바로 언니 친구에게 남자 신발 하나를 사 달라고 했다. 며칠이 지나 언니 친구는 멋들어지는 슬립온 하나를 사다 줬다. 그게 또 선배한테 기가 막히게 어울리지 않아 눈물이 났다. 살아 있어서 이 신발을 신었다면 꼴이 우스워 백 년 놀림감이 되었을 텐데.

뒤뜰로 나가 모닥불을 피웠다. 어렸을 때 본 적이 있다. 할아버지는 당신의 동생이 죽었을 때 마당에 불을 피우고 동생이 아끼던 물건들을 태웠다. 한밤중에 피운 불빛에 할아버지 얼굴이 어른거렸는데 그 얼굴이 너무 처연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바라보고 있던 기억이 난다. 왜 불을 피우고 물건을 태우는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거 같았다. 피어오르는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아 물건들을 제 주인에게 가져다주고 있었다. 나는 지금 피우는 불의 연기가, 불꽃이 선배에게 닿기를 바랐다.

"선배. 선배한테는 끝내주게 안 어울리는 신발이라 미안해. 여태 같이 일한 세월이 얼마인데 선배 발 사이즈도 모르네. 신발이 크면 끌고 가고 작으면 구겨 신고 가요. 맨발 보다는 낫잖아 하하.

미안해 선배. 내가 선배를 A당에 끌어들여서 죽게 만들었어. 그때 그냥 데이터만 달라고 할 걸. 아니면 중간에라도 이만하면 되었다고 당을 나가라고 할 걸. 지금까지 내 욕심으로 선배를 잡고 있었어 미안해. 내가 너무 외로웠나봐. 아무리 작은 정당이라도 누군가는 운영을 해야 하잖아. 그게 난데, 나 혼자 하기는 너무 버겁더라고. 이게 맞나 확신도 안 서고. 그래서 선배를 붙잡았어. 선배가 있으니까 잘하고 있는 거 같더라. 그런데 이제 나는 어떡해야 하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거 같아. 

그래도 살아남아 볼게. 기운이 나면 선배 복수도 해볼게.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잘 가요 선배."

 

김영철을 죽이고 A당 주요 인사 중 남은 건 나지은 하나였다. 그간에 일들은 김영철이 꾸몄다고 하니 그를 죽이면 다 조용해질 거 같았다. 다행이었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내 손으로 나지은을 죽일 수는 없었다. 나지은은 나와 비슷한 시기에 국회에 들어와 마주치기만 하면 으르렁 거리던 사이였지만 나중에는 적수가 되지 않았다. 힘없이 쪼그라든 A당에 남겨진 나지은이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김영철은 죽고 나지은은 사라졌다. A당은 유지할 사람이 없으니 그대로 해산. 사무실을 아무리 뒤져도 배영호 의원을 협박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김영철 핸드폰이 단서였는데 시체와 같이 저수지에 빠졌다고 하니 구태여 건질 필요는 없다. 그렇게 A당은 한때 잠깐 권력을 잡았고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정당이 되었다. B당은 그렇게 망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한낱 정당에 불과하다. 그래서 장렬한 그들의 퇴장이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그 뒤로 바뀐 건 없었다. 그들이 없어도 의회는 시끄러웠고 정국은 혼란했다. 나는 당을 위해 어떤 사람들은 죽이고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매장했다. 방법은 저열했고 이유는 옹졸했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내 사적인 이유로 사람을 해친 적은 없다는 것이다. 모두 당과 나라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 왜, 누가 나를 이렇게 시험에 들게 만드는가.

"공실장님 지금 인터넷이 난리입니다. 좀 보세요."

사무실에 들어가자 문가에 앉아있는 막내 보좌관이 일어서며 호들갑을 떨었다. 나지은이 도망가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자였다. 김영철이 부탁을 했는지 협박을 했는지 알 바 아니나 그는 의원님 사무실에 메시지를 뿌린 범인이었다. 내가 그에게 일부러 이야기를 흘렸다. 잘하면 김영철과 나지은 모두 살릴 수 있었을 테지만 결과적으로 나지은만 살아남게 되었다. 나지은이 정말 살아남았다면 그에게 연락을 할지도 모르는 일. 가까이 두고 볼 요량으로 사무실에 그를 남겨두었다. 하지만 이렇게 소란을 부리니 배의원이 협박 당했을 때가 생각났다. 또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닐까하고 기시감이 들었다.

"또, 무슨 일이야."

'나는 과거의 원한을 잊지 않는다. 기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대답했다. 그가 흠칫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 그렇게 기억하고 있어. 내가 너를 가만 두는 건 네가 아직 쓸모가 있기 때문이야. 

그는 긴장한 손으로 모니터를 잡고 내가 볼 수 있게 돌렸다. 모니터 속에 SNS와 뉴스화면이 보였다. '살인자 공진석 보좌관, 배영호 의원실에서 근무. 배의원의 사주를 받은 것인가?', '국회의사당의 도살꾼 공진석', '공진석 근황’ 같은 제목의 뉴스들이 난무했다. 아무리 생각 없는 언론이라지만 집권당 유력의원 보좌관을 이런 식으로 보도하다니. 이것들이 미쳤나? 

B당 최고의원 중 한 분이 신문사 쪽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여당에 불리한 기사가 나올 리 없었다. 사태가 정말 심각해 한 두 번 여론 눈치를 보며 기사가 뜬다고 해도 이런 제목은 아니었다. 이건 통제범위를 벗어난 언론이 분명했지만 대한민국에 돈과 권력으로 통제 못할 건 없었다. 이건 노력이 부족한 거다. 

"한심한 놈. 뭐 하고 있어. 이거 나온 신문사 전화해서 기사 내리라고 해. 뭐 되먹지도 않은 소리를 진지하게 듣고 있어. SNS에도 허위사실 유포는 고발한다 경고하고. 콩밥 먹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하라고 해. 요즘 어떤 세상인데 인터넷에서 사람을 비방하고 있어. 그리고 너는 이게 뭐가 큰일이라고 그렇게 호들갑이야. 이것도 알아서 처리 못하면 어떡해. 머리가 장식인 건 알았지만 노력도 부족하면 어떡하나?"

막내 보좌관은 내 말에 얼굴이 빨개져서 자리에 앉았다. 통화를 하기 위해 수화기를 잡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 소란은 거기에서 그렇게 끝난 줄 알았지만 막내가 부족해서 그런지 누가 작정을 하고 물어 뜯는 건지 여론이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막내를 호출했다. 

"넌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해! 신문사는 알아봤어?"

"죄송합니다. 연락을 했지만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기사를 내릴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게 자신들이 있는 이유라고..."

"말이 안 통하는 작자들이구먼. 네가 처리 못하겠으면 연락처라도 넘겨."

"네 알겠습니다."

막내가 보낸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어떤 업무로 전화를 하셨냐, 어떤 부서로 연결해드리느냐 같은 몇 번의 물음을 거쳐 상담사가 전화를 받았다. 

"여기 배영호 의원실입니다."

"네 선생님 어떤 일로 전화를 주셨을까요?"

"여기 배영호 의원실이라니까요? 감이 안 옵니까?"

"그러신데요? 어떤 일로 전화를 주셨을까요?"

눈치가 없는 직원을 잘도 뽑아 놨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용무가 급하니 우선 본론으로 들어갔다. 

"공진석 기사 쓴 사람 바꿔. 아냐 그 사람 상사 바꿔. 공진석이 직접 전화 했다고 전해."

이 정도면 알아 들었겠지. 기자가 전화를 받으면 협박을 해서라도 기사를 내리게 할 참이었다. 기자 하나 앞날 막는 것 쯤은 일도 아니었다. 기자가 말을 안 들으면 회사, 회사가 안되면 가족을 걸고넘어지면 된다. 협박보다 쉬운 게 돈을 쥐여주는 일이었지만 그렇게 하면 뒤끄티 좋지 않기도 했고, 우선 자금을 세탁할 시간이 없었다. 한시가 급했다. 조금만 늦으면 토사구팽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 B당은 집권당이니만큼 지금 인력이 차고 넘쳤다. 구질구질한 A당도 처리 했으니 이제는 잡음을 만들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아랫사람의 치부를 견뎌줄 정당이 아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초조해지기 시작하는데 이 상담원은 도대체 기자를 바꿔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멋, 선생님 그렇게 강압적으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저희 신문사는 기자님의 정신 건강을 위해 강압적으로 말씀하시거나 욕을 하시는 분과는 전화 연결을 해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점 양해 부탁드리며 추가적인 문의 사항은 AI봇과 상담 하시기 바랍니다. 상담한 내용은 저희 쪽에서 순화하여 기자님께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황당하게도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이렇게 가다가는 백 년이 가도 기사가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는 생각보다 강적이다. 결국 직접 신문사를 찾아가기로 했다. 신문사는 또 왜 이렇게 멀리 있는지, 바다 건너 제주도에 있다고 했다. 비행기 표를 잡고 공항으로 갔다. 아니 가려고 했다 그 전화만 아니었다면.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고 있는데 당에서 연락이 왔다.

'공진석 수석 비서관님께. 지금 비서관님 기사와 관련한 당 최고의원 회의가 열립니다. 참석하셔서 입장 소명 부탁드립니다.'

당도 이 사태를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회의가 이렇게 빨리 소집될 줄은 몰랐다. 시간이 없었다. 비행기 표를 취소할 새도 없이 차를 돌려 다시 의회로 향했다. 내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면 나는 변명 한마디 못하고 당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들은 기다리지 않고 그들은 무자비하다. 나는 그들을 잘 알고 있다.

회의실에 도착하니 평소에 그렇게 바쁘시던 의원들이 모두 시간을 내어 참석해 있었다. 몇몇 의원은 원거리에서 가상 스크린을 통해 회의에 참석하는 수고를 감수했다. 

"공실장. 공실장이 B당 초창기부터 얼마나 헌신하고 도움을 줬는지 우리가 잘 알지. 근데 이번에 공실장이 제대로 곤란한 상황에 빠진 거 같네. 공실장을 음해하려는 나쁜 놈들이 판을치니 이참에 좀 쉬는 게 어떤가. 매번 휴가도 제대로 못 보내지 않았어. 이참에 푹 쉰다고 생각하고 해외라도 다녀와."

검찰이나 경찰이 움직이기 전에 발을 빼는 것이다. 하, 멍청한 사람들. 버티고 있으면 어차피 검찰이 사건을 맡을 테고, 그러면 어떤 증거가 나와도 벌금형이나 맞고 끝날 텐데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건가.

"자네, 이 일을 가볍게 보는 것 같은데 자네를 따라다니는 눈이 있어. 자네가 움직이면 그 눈도 같이 움직이네. 지금 여기 온 것도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는 걸 자네는 알고 있는 건가?"

최고의원 중 한 명이 회의실 중간에 가상 스크린을 띄웠다. 내 이름이 들어간 SNS 계정에 내 사진이 업로드 되고 있었다. 내가 움직이는 데로 나를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는 듯했는데 이 각도라면, 저기쯤 있는 건가. 나는 뒤로 돌아 이 사진을 찍었을 법한 구석을 쳐다봤다. CCTV가 있었다. 

"CCTV가 없는 곳은 위치 좌표를 올리는 모양이야. 자네 입장에서는 서운 할 수 있겠지만 계속해서 감시 당하는 사람과 같이 일할 수는 없네. 리스크가 너무 커. 우리까지 감시 당하는 기분이야. 봐봐 벌써 우리 얼굴까지 나온 사진이 업로드 되고 있지 않나.”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끈 떨어진 내가 원망할 수 있는 건 이 부지런한 악당 밖에 없었다. 누가 이런 귀찮은 일을 벌이는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우선 누구도 나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누구도 나를 보고 있지 않은 곳으로 가야 했다.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제각기 사정이 있고 다들 바쁘다.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살인자라는 명패를 달고 있는 사람은 대중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집으로 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모든 커튼을 치고 블라인드를 내리는 일이었다. 노트북과 핸드폰은 전원을 끄고 가방 안에 넣어뒀다. 가전기기 돌아가는 소리 밖에 나지 않으니 집안에 적막이 돌았다. 밖에서 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내 인생에 이렇게 적막한 때가 있었나? 그때였다. 띵동하고 누가 우리 집 현관벨을 눌렀다. 당연히 올 사람은 없었다.

"누구세요?"

"..."

밖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현관으로 다가가며 다시 한번 물었다.

"누구세요?"

역시 아무 대답이 없었다. 문을 열어봐야 할까? 문고리에 손을 댄 순간 문밖에 있는 사람도 뭔가 눈치챈 건지 미친 듯이 문고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거덕덜거덕 문고리 돌리는 소리가 조용한 집안을 울렸다. 조금 놀랐지만 문을 향해서 한바탕 욕지거리를 내뱉자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내 집까지 쫓아와 장난을 친 것이다. 

당장 핸드폰 전원을 키고 SNS에 접속했다. 역시나 거기에 집 위치까지 업로드가 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집에 은거해 움직임이 없자 이제는 과거에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업로드 되고 있었다. 저수지가 보였다. 김영철! 김영철이 떠올랐던 그 저수지에 내가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저수지에 간 걸 봤던 사람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위치 추적이 될까 봐 일부러 핸드폰도 꺼 놓고 차도 다른 사람 명의로 빌렸다. 가만히 보니 배영호 의원을 협박했던 방법과 같았다. 우리가 어디에 갔었는지 그들은 알고 있다. 어떻게? 몸에 위치 추적 장치라도 심었단 말인가? 나지은이 떠올랐다. 그녀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의문은 얼마 안 가 풀렸다. 그 여자가 집에 찾아온 것이다. 네가 숨을 곳은 아무 데도 없다는 듯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살아있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직접 올 줄은 몰랐다. 악마는 생각보다 소박하게 등장했다. 체크무늬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흰색 컨버스 운동화를 신은 그녀는 자취를 감출 때 모습 그대로였다. 

"오랜만이네요. 공실장. 날 알아보겠어요?"

야구 모자를 벗으며 나지은이 나를 쳐다봤다. 

"설마 했는데 너였구나. 정말 너였어. 어떻게 한 거지? 어떻게 사람들의 위치를 알았어? 스마트폰이라도 해킹한 거야? 너도 사람들 위치를 추적할 수 있어? 우린 김영철이라고 생각했어. 그 일을 꾸민 게 다 김영철이라고. 그래서!"

"그래서 죽였죠."

나지은이 내 말을 자르고 맞받아 쳤다.

"불쌍한 선배. 선배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다 내가 꾸민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사람들은 다 선배가 했다고 생각하더라. 왜 그럴까. 남자라? 프로그래머라? 근데 나도 프로그래머인데. A당엔 내가 더 오래 있었는데 왜 나라고는 생각 안 했을까. 공실장님이 실수한 게 그거에요. 나부터 죽였으면 여기까지 안 왔을 텐데. 

선배는 생각보다 담이 작았어요. 내가 사라지면 선배도 A당 같은 거 거들떠보지 않고 살길 찾아서 해외든 어디든 떠났을 거야. 근데 나는 아니에요. 몇 날 며칠을 울었어. 그리고 다시 태어난 거에요. 헤라와 함께."

"헤라?"

"네, 헤라. 내가 개발한 시스템이에요. 모든 사람의 위치를 알 수 있어요. 공실장님 위치 찾는 거야 누워서 떡 먹기죠.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드는 것보다 쉬울 거에요. 구경 한 번 해볼래요?"

지은은 손목을 걷더니 손목시계에서 거실 중간으로 가상 스크린을 쐈다. 스크린에는 지도가 비쳤고 그 가운데 한 점이 있었다. 우리 집이었다. 친절하게 몇 동 몇 호인지까지 쓰여 있었다. 

"도망갈 곳은 없어요. 죽어도 소용 없어.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온 줄 알아요? 공실장이랑 B당이 죽인 사람들 시체 찾아주면서 기어 올라왔어요. 지옥에서 시체들 밟고 올라왔다고. 당신들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였는지 당신들 자신도 모를 거야. 잘못된 예산 삭감 때문에 아이들이 굶어 죽고, 직업을 잃은 사람들은 낙담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기업들 돈 조금 아껴 주려다가 노동자들 현장에서 죽게 만들었어. 시체도 찾지 못한 유족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나를 찾아왔어. 시체라도 찾게 해달라고. 

그중에 내가 제일 먼저 찾아본 게 영철 선배였어. 그리고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지. 난 당신이 좀 똑똑하다고 생각했는데 왜 거기에 같이 있었어? 왜 저수지에 직접 간 거야? 사람 죽는 걸 꼭 직접 보고 싶었나? 다른 사람 시킬 수도 있었잖아. 믿을만한 사람"

가상 스크린이 사라지고 적막이 찾아왔다. 지은의 말에 저수지의 서늘했던 새벽 공기가 생각났다. 차가웠던 물이 지금 발 끝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나? 그런 건 없어. 김영철을 처리해야 한다면 확실하게 해야 했지. 김영철은 언제고 걸림돌이 될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빌미를 남겨서도 안 됐지. 그래서 내가 나선 거야."

"그래. 고마워. 당신이 죽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 증거까지 남겨 줄 지는 몰랐거든. 당신의 그 완벽주의 덕분에 나는 당신을 끝낼 수 있게 됐네."

그 말이 웃겼다.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내 뒤에 B당과 검찰이 있는데? 내가 모아놓은 그들의 비리가 가득한데?

"장난해? 그게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나는 몸을 일으켜 앞에 앉아있는 나지은을 쳐다봤다. 나지은의 허무맹랑한 말을 들으니 숨이 쉬어졌다. 바람이 불리 없는 꽉막힌 실내에 가벼운 바람이 이는 것 같았다.

"네가 증거를 넘긴다고 수사를 할까. 여태까지 B당이 저질러서 검찰로 넘어간 사건 중 제대로 판결 난 사건이 있는 거 같아? 언론? 아무리 떠들어봐도 하루 이틀이야. 사람들은 금세 피곤해질 거고 다른 이슈로 관심을 옮길 거다. 세상에 얼마나 다양하고 자극적인 일들이 많은데 나 하나에만 그렇게 목매고 있겠어."

이번에는 나지은이 내 쪽으로 몸을 숙이며 턱을 손에 괴고 물었다.

“B당에 버림받아서 당신 이러고 있잖아. B당이나 검찰이나 이제 더는 당신을 돌봐주지 않을 거야.”

"무슨!! 내가 B당에서 그 오랜 세월 동안 일만 했을 거라고 생각해? 나는 B당 그 자체였어. 그 사람들 내가 다 키웠다고. 그들이 사고를 치면 다 내가 수습했는데 그 증거들 다 어디 있을까. 내가 호락호락 다 없앴을 거라고 생각해?"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나지은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 잘 들었습니다. 이 얘기를 당에서 들으면 또 꽤 심란해 하시겠네요."

"아니! 내 얘기는 그게 아니라!!!!"

막아야 한다. 나는 몸을 휘적이며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슬슬 뒷걸음질 치며 현관으로 향했다. 막아야 했다.

"진정하시고 들으세요. 저는 제 손으로 당신에게 복수하지 않을 거예요. 대신 당신의 업보가 지구 끝까지 따라올 겁니다. 어디를 가도 숨을 수 없을 거예요. 헤라는 당신이 어디에 있건 찾을 수 있어요. 죽으려면 죽고 살고 싶으면 도망가세요. 혹시 알아요. 헤라의 눈길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있을지 하하."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게 차올랐다. 감정을 추스를 새도 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졸랐다. 심장이 손 끝에서 뛰고 있었다. 죽으라고 목을 졸랐지만 오히려 정신을 잃은 것은 나였다. 바닥에 고꾸라지며 본 마지막 모습엔 그녀가 손에 전기 충격기를 들고 있는게 보였다.

그날부터 세상은 나에게 정말 지옥이었다. 업보가 따라올 거라더니 그 여자가 지옥을 몰고 온 게 분명했다. 온라인에 내 위치며, 인상착의가 실시간으로 올라가고 나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마트에서도, 지하철 역사 안에서도 서늘한 눈빛이 느껴져 쳐다보면 거기엔 백이면 백, 살벌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B당이나 검찰에서 보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뿐만이 아닐 것이다. 나지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내가 죽인 사람의 시체를 밟고 올라왔다니 나를 죽이고 싶은 사람은 그보다 많을 것이다. 나는 모두의 표적이었다. 

숨어있던 장소가 다시 발각되어 사람들이 찾아왔다. 급하게 짐을 싸고 있는데 인턴에게서 연락이 왔다.

"얼마나 힘드세요. 공실장님. 집을 떠난 지 오래되셨더라고요. 이번에는 또 어디에 계신 거예요. 이렇게 숨어 살 수는 없잖아요. 숨을 수도 없고. 이대로 끝내려는 건 아니시죠? 제가 안전한 곳을 알고 있어요. 그곳은 헤라도 찾을 수 없대요. 온라인에도 정보가 있으니까 찾아보세요. 델로스라고 하는 시설이래요. 이 정보가 실장님께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힘내세요. 실장님"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피난처가 있다고 했다. 미심쩍었지만 지금은 헤라의 눈을 피할 수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인턴이 알려준 데로 델로스에 접속하니 소개하는 음성 메시지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안녕하십니까. 헤라를 피해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여기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도시 델로스입니다.'

뒤이어 가상 스크린이 펼쳐지고 델로스의 시설 소개가 담긴 영상이 재생되었다. 하얀색과 우드톤으로 꾸며진 안락한 침실이 보였다. 푹신한 침구도 제공 된다니 고급 리조트와 다를 바 없었다. 각 숙소마다 주방도 있고 거실도 있어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헤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 저런 숙소까지 있다니 금상첨화였다. 싸던 짐을 마저 싸 무인 택시에 올랐다.

예상과 달리 델로스는 섬이었다. 지도에도 없는 섬이라니 누가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 분명했다. 선착장에는 짐을 든 사람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초췌하고 기운 없는 얼굴을 하고 손에 가방 하나씩 들은 것이, 처지가 나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다들 헤라를 피해 온 것이다. 그 말은 다들 처벌 받지 않은 범죄자라는 거겠지. 그 와중에 바로 뒤까지 따라온 따가운 업보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를 따라온 내 죄의 징벌자. 나는 죽지 않으려면 배에 몸을 실어야했다. 

배를 운전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무인으로 운행하는 선박에 묘한 안도감을 느껴졌다. 자동 운행 장치는 회유되지 않고, 협박 당하지도 않고 우리를 정해진 목적지로 데려다줄 것이다. 객실 의자에 앉아 뒤로 몸을 기울였다. 긴장이 풀리며 죽음 같은 잠이 몰려와 눈이 감겼다. 엔진 소리와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시끄러웠지만 졸음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졸음과 같이 허무함도 몰려왔다. A당의 싹을 뽑아 버리고 B당이 집권했을 때처럼 시대의 흐름이 바뀌었음을 느꼈다. 헤라를 등에 업은 나지은은 그의 세상을 완성할 것이다. 파도를 몰고 오는 나지은이 보였다. 그 흐름은 언제쯤 바뀔까. 다음 파도는 누구에게서 올까. 그때가 오면 나도 저 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섬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몰라 두렵기도 했지만 물을 건너며 과거와 멀어진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숨을 내쉬고 나는 곧장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방해가 되는 요소들은 모두 델로스에 몰아넣었지만 지은은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졌다. 과거 A당이 사람들 몸 속에 칩을 심어 놓은 지 이제 20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 후에 태어난 아이들과 외국에서 온 사람들은 몸 속에 칩이 없었기 때문에 헤라에 위치가 검색되지 않았다. 초반에는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였지만 점점 무시할 수 없는 정도의 규모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헤라가 구식이 되었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업데이트가 필요했다. 

공실장을 몰아내고 B당과 검찰의 주요 인사들도 서서히 모습을 감췄다. 지은의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이뤄낸 쾌거였다. 헤라가 그들의 위치를 노출하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처리가 가능했던 건 그들의 죄악이 컸기 때문이다. 사람이 정치의 옷을 입고 다수를 해치는데 헤라는 그들의 옷을 벗겨 길바닥으로 내몬 것이다. 법의 판단을 받지 않은 그들은 대중의 심판을 받았다. 헤라에 그들이 보였다. 그들은 델로스에 있거나 도심과 동떨어진 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자들은 이제 영원히 그들 자신의 힘으로는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의회와 검찰에서 나가자 빽빽한 숲속을 벌목한 듯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지은은 이 바람을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새로운 당을 창당하고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기존 인사들과 새로운 인플루언서를 영입해나갔다. 자신의 정책을 지지해 줄 세력이기에 믿을 만한 혹은 배신하지 않을 법한 인사들로 뽑고 싶었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공실장이 예전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았다. 나지은은 김영철과 그녀 사이의 관계는 이제 어디에서도 다시 만들 수 없음을 알았다. 나중에 화근이 될 것을 알았지만 적당한 인사들로 적당히 의석을 채워 넣었다. 어느 정도 정당의 꼴이 갖춰지자 나지은은 밖으로 눈을 돌렸다. 

새로운 A당의 첫 사업은 의과대학 질병연구센터에 국책사업 하나 맡기는 일이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없는, 전염성이 강하면서 치사율이 높지 않지만 심각한 부작용을 남기는 질병을 만들어야했다. 동시에 나지은은 작은 제약회사도 하나 인수했다. 그 제약회사에는 연구소에서 만든 질병의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는 일을 맡겼다. 헤라를 최신 정보로 업데이트 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펜데믹이 필요했다.

지은을 도망치게 도와줬던 배의원실 인턴은 이제 A당의 직원이 되어 지은의 옆에 있었다. 그는 지은이 독단적으로 밀어붙이는 일들을 옆에서 보며 우려를 표했다. 이제까지 지은이 원하는 데로 움직였지만 이 방법은 위험했다.

"백신을 맞게 하기 위해 질병을 만드는 건 너무 위험한 생각 같습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아이들이 태어나면 꼭 맞아야 하는 주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 칩을 심는 건 어떠세요? 꼭 펜데믹이 아니어도 다른 방법도 있지 않겠습니까."

지은은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그녀에게는 더 큰 플랜이 있었다.

"그럼 이미 그 주사를 맞은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칩을 심지 못하잖아요. 새로운 칩은 위치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주변 기기에도 감응해서 모든 전자 정보를 알 수 있어요. 예를들어 이렇게 스마트폰을 들고 전원을 켠다면 이 정보까지 중앙에서 알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온, 오프라인 모두를 감시할 수 있는 거예요. 모든 범죄 상황에 이 데이터가 증거로 쓰일 겁니다. AI판결도 멀지 않았죠. 모든 증거들이 객관화 될 수 있을 겁니다. 

걱정하는 거 알아요. 다만 우리가 이제부터 할 일은 다가올 미래를 대비해 법과 처벌을 좀 더 촘촘하게 만드는 겁니다. 인간이 개입할 여지가 없게요. 같은 죄를 지으면 같은 처벌을 받게 해야 될 겁니다. 우리가 만들 세상은 그런 세상이에요. 그러기 위해서 추가 접종은 피할 수 없어요. 알잖아요. 만인은 평등하다 하는데 평등한가요? 최소한 범법에 대한 처벌에 있어서 평등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가능한 시대인가요? 온라인에서는 모르지만 오프라인에서 그들이 어떤 죄를 짓는지 헤라가 아니라면 모를 겁니다. 헤라의 업데이트는 그걸 가능하게 해줄 겁니다. 나를 믿어요. 새 세상을 열겠습니다. 당신은 걱정보다 노력을 해주세요. 변화될 미래에 휘청거리지 않도록”

지은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며 멈칫멈칫하더니 이내 한숨을 쉬고 뒤돌아 다른 사무실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자 지은은 다시 고개를 돌려 유리 벽 너머를 응시했다. 질병을 만들기 위해 지어진 새하얀 연구소가 창 너머로 보였다. 지은은 헤라를 이용해 자신의 통제 아래 들어올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한편 연구실에서 새로 만들어진 바이러스들은 델로스로 보내졌다. 고립된 섬은 바이러스를 실험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델로스에 있는 사람들은 마루타가 되어 죽어갔다. 델로스 자체가 커다란 생화학 실험장이 된 것이다. 그 안에 사람들은 무차별적으로 병에 걸렸다. 

그중에는 출산을 앞둔 여자도 있었는데 출산 직전에 숨이 끊겨 배를 열고 아이를 꺼내야 했다. 생명은 생각보다 강해서 그렇게 이어져갔다. 누구도 그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아이는 어려서부터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자라났다. 엄마의 배를 가르고 나온 아이는 모체의 희생으로 이미 뱃속에서부터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가지고 있던 것이다. 

후에 이 아이는 섬을 떠나 정권을 무너뜨리는 주요한 열쇠가 되지만 나지은이 그의 존재를 알게 되는 건 한참이 지난 후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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