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레코드

2024.04.27 16:3604.27

 돌아왔을 때 문은 열려있었다.

 한 뼘 벌어진 어둠을 마주한 안수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꿈’이었다.

 카로라 섬으로 오고 난 뒤로 안수는 매일 같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안수는 해변 산책을 했고 시장에서 바나나며 용과며 리치며 과일을 한아름 샀고 어스름이 내린 침대에서 일어났고 존재하지 않는 파트너와 청색 타일이 박힌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아 밥을 먹었다. 순서는 매번 뒤섞였고 디테일도 조금씩 달라졌다. 다만 마지막은 똑같았다. 안수는 무얼 했든 집으로 돌아왔고 문은 열려 있었다. 자물쇠를 몇 개나 채우고 단단히 잠가도 문이 열려 있었다. 안수는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매번 문 앞에서 잠에서 깼다. 그럴 수 밖에. 안수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손이 잘리거나 배에 구멍이 나거나 머리가 잘렸다. 안수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새벽일 때도 있었고 느지막한 점심일 때도 있었고 이른 저녁일 때도 있었다. 안수는 침대에 웅크리고 앉았다. 처음에는 안수는 반복하는 꿈에 괴로워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만약 이 꿈이 현실이 된다면 안수는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안수는 문고리를 조금 잡아당겼다. 집은 어두웠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푸르스름한 가로등 불과 노란 이웃집 마당 조명이 가구에 부딪쳐 그것들의 윤곽을 볼 수 있었다.

 안수는 거기서 꿈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꿈에서 집은 칠흑처럼 깜깜했고 안수가 문고리를 잡자마자 무언가 튀어나와 그를 자르고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밀려들었고 안수는 안도한 만큼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분명 문을 닫고 나갔다. 래치와 캐치가 망가진 것도 아니었다. 얼마 전에 멀쩡한 부품을 또 교체했었다. 바람이 세게 불었을까. 마당 통창을 닫지 않고 나왔을까. 안수는 집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 모서리에 이마를 콩콩 들이받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경찰에 신고부터 했을 것이다. 경찰은 친절했고 카로라 섬은 크지 않으니 도착하는데 3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안수도 아직 안수로 불리던 시절이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경찰을 불렀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안수는 믿음이 있었다. ‘세계’라는 것이 아무리 힘 있는 자들의 논리에 놀아난다고 해도 그것은 영화 속 이야기, 음모론에 가까운 이야기이며 자기처럼 평범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시스템이 엄밀히 존재한다는 굳은 믿음이. 하지만 안수는 그런 낭만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안수는 그것을 몰랐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때도 문이 열려 있었다.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고 아주 조금만 서둘렀을 뿐이었다.

 그날따라 속이 이상했다. 안수는 하루에 루나 드링크를 열캔씩 들이부어도 속이 아무렇지 않았다. 동료들은 에너지 포션처럼 루나 드링크를 마셔대다간 위장에 구멍이 날 거라며 작작 마시라고 경고했다. 한 동료는 루나 드링크를 한 모금만 마셔도 밤잠을 설치고 하루종일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렸기에 안수에게 어떤 위장을 가졌기에 멀쩡할 수 있냐며 잘 마실 수 있는 비법을 물었다. 안수는 웃고 말았다. 술이라면 모를까—술은 간이 망가질지언정 들입다 들이부으면 는다—에너지 드링크를 잘 마실 수 있는 비법이 있을 리 없었다. 동료는 조상 중에 루나리안이 있는 거 아니냐며 DNA로 핏줄 찾기를 해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안수는 또다시 웃고 말았는데 증조부 생년보다 루나시티 설립 시기가 늦기 때문이었다. 증조부는 수소폭탄을 맞아도 절대 우주선에 타지 않겠다는 분이었다. 루나시티는 지구연합이 정책 실패에서 서민들의 눈을 돌리기 위해 꾸며낸 속임수에 불과하다며 절대 믿어선 안 된다고 절대 우주선을 타지 말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증손자는 그 허상에서 겨우 일자리를 구했다.

 안수는 그날과 그 전날, 나아가 그달 전체를 수천 수만 번 되짚었다. 잘못 먹은 건 없었다. 트러스트 사는 연구원을 포함한 보안 경비팀에게 영양소 균형을 고려한 식단에 개인 신체에 맞춘 정량만 배부했다. 실험과 연구에 들일 돈은 썩어나도 사람에게 들일 돈은 한 푼이 아까웠다. 안수는 쪼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다. 비이켄 연구소는 이래저래 루나시티 정부에 눈치를 보는 입장이라 물건을 자주 들이는 것을 조심스러워 했고 안수도 일년 계약이 끝나면 지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또래가 받는 평균 연봉에 다섯 배 가까운 돈을 받으니 특별식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이깟 식사, 배만 채울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날 안수는 저녁식사에 포함된 파운드 케이크를 챙겼다. 동료들은 가공한 맛이 너무 많이 난다며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안수는 꽤 마음에 들었다. 더욱이 야간 당직을 설 때면 하염없이 배가 고파지곤 했다. 위장은 루나스틸도 녹일 수 있는 블랙홀이 된다. 그때는 루나 드링크를 마시면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는데 수중에 루나 드링크가 없었다. 자판기는 진즉 품절이었고—대부분 안수가 마셨다— 시티까지 사러갈 시간이 없었다.

 며칠 전부터 불법 침입 알람이 시도때도 없이 울려댔다. 코드 제로. 비번은 어떤 상황이 일어나도 쉴 수 있도록 휴식 시간을 보장 받지만 코드 제로는 다르다. 코드 제로는 목숨을 내놓더라도 연구소를 지켜야 하는 트리플 에스급 경보였다. 훈련을 제외하고서 처음 겪는 실전이기에 안수를 포함한 보안 경비팀 전원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안수는 보안 경비팀 누구보다 예민했는데 하필 코드 제로가 발령난 시기에 비번이 잡혀 있었다. 비번은 한 달에 한 번, 시티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자유 시간이다. 안수는 며칠 전부터 루나 드링크를 마시지 못해 금단 증상을 겪고 있었고 연구소 내 유일한 자판기는 며칠 째 비워져 있었다. 쟁여둔 루나 드링크도 다 떨어져 다섯 박스는 사와야겠다고 계획한 참에 일어난 일이라 더욱 예민했다. 온라인 주문은 불가능했다. 비이켄 연구소 위치는 외부에 밝힐 수 없는 최중요 정보다.

 안수는 화가 났지만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았다. 업무는 철저히 지켜야 하며 일에 대한 책임감도 있었다.

 힘들어하는 안수에게 보급계가 조금만 참으라고 말했다. 며칠 뒤면 연구소에서 쓸 물품이 들어오는데 거기에 루나 드링크도 품목에 껴있다고 귀띔했다. 안수는 그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가능성은 낮지만 당장이라도 코드 제로가 끝나면 보안 팀장이 쉬지 못한 비번을 따로 빼줄지 모른다. 그도 아니라면 다음 비번이 시티에 나갈 때 돈을 주고 부탁하면 될 일이었다.

 일주일 동안 울려대던 코드 제로는 오류였다. 새로운 실험 장비를 사용하기 위해 따로 에너지 배선을 할당해야 했는데 그것을 깜빡하고 엄한 곳을 들쑤셔서 발생한 일이었다. 기껏 원래대로 복구하고 에너지 배선을 할당했더니 이번에는 소프트웨어가 말썽이었다. 새 시스템이 기존 시스템과 호환이 되지 않아 메인 시스템이 해킹으로 인식했고 경보를 울린 것이었다. 단순 해프닝에 보안 경비팀은 짜증을 냈지만 진심이 아니었다. 안전에 무조건 자신 있어 하는 것보다 작은 일도 크게 받아들이는 편이 보안 측면에서 훨씬 났다. 더욱이 루나시티 안에 있는 지구연합 소속은 보안이 곧 생명을 지키는 일이다.

 최근 지구연합과 루나시티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었다. 루나시티가 독립 정부를 승격된 후로 지구연합이 가지고 있는 권리—자원 독점권이나 실험 통제권 같은 주요 권리를 넘겨달라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지구연합은 거절했다.

 지구연합은 루나시티가 정부를 세웠다고 하나 루나시티를 계획하고 설립한 건 지구연합이니 해당 권리는 본인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루나시티에 들인 돈을 회수하려면 몇백 년은 더 필요하다는 주장도 덧붙였다. 루나시티도 물러나지 않았다. 이제 루나시티는 엄연한 독립 국가고 달을 소유한 건 루나시티니 그에 해당하는 모든 권리는 루나시티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분위기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했지만 양측 수뇌부는 되도록 협의로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언제나 급진적인 사람들이 있다. 루나시티 측 과격 단체가 테러를 감행해서라도 권리를 가져오겠다고 선언했다. 루나시티 정부는 테러는 당연히 안 될 짓이며 정부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그들을 지탄했지만 일부 시민들은 그렇게해서라도 루나리안이 응당 가져야할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코드 제로 끝나고 당직이라니. 고생하라고.”

 00시 근무자가 퇴근하고 보안실에는 안수 혼자 남았다. 원래는 두 사람이 있어야 하지만 비용 절감 차원에서 00시부터 06시까지는 혼자 경비를 본다. 이 시간에는 순찰을 제외하고는 보안실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선 안 된다. 보안 팀장은 여러 번 두 사람이 서야 한다고 상부에 건의했지만 기업 측에서는 CCTV도 있고 보조 AI도 존재하니 경비 한 명으로도 충분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00:34 LST(Lunar Standard Time). 안수 속 블랙홀이 열렸다. 안수는 두고 보려고 했지만 블랙홀을 감당할 수 있을 때 뭐라도 던져야 더 커지지 않고 사그러든다.

 안수는 파운드 케이크 봉지를 뜯었다. 납작하게 진공 포장한 파운드 케이크는 케이크라기보다 두툼한 쿠키에 가까웠다. 뻑뻑해서 액체 없이는 못 먹는다고 엄살 부리는 동료도 있었지만 안수는 그 뻑뻑한 맛에 파운드 케이크를 먹었다. 손으로 조금 뜯어 침으로 녹여 먹으면 적당히 말랑말랑해진다.

 안수는 물 한모금을 마시고 엄지 손톱만큼 파운드 케이크를 뜯어 입에 넣었다. 합성 버터 특유의 향이 콧속을 가득 채웠고 대량 생산 과정에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가공한 맛이 혀를 감쌌다. 안수가 좋아하는 맛이다. 루나 드링크가 있었다면 블랙홀을 잠재우는 건 물론이고 기나긴 야간 근무도 겁나지 않았겠지만 없는 걸 만들 순 없다.

 파운드 케이크는 입안에 있는 수분을 모두 빨아들였고 녹녹해졌다. 이때 바로 삼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혀로 만져봤을 때 대충 부드러워졌다고 삼키면 식도에 꽉 막혀 더 목이 메인다. 물은 눈앞에 있는 500미리가 전부고 그것을 지금 전부 마시면 화장실에 가고 싶을 뿐 아니라 물을 가지러 갈 수도 없다. 무엇보다 블랙홀은 잠재울 수 없다. 안수는 파운드 케이크가 조금 더 녹녹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삼켰다.

 안수는 CCTV 모니터를 보며 야금야금 파운드 케이크를 뜯어먹었다. 평소와 다를 게 없는 야간 근무였다. 시간은 02시를 조금 넘겼다. 잠의 요정이 눈꺼풀 위에서 그만 자라고 탭댄스를 추었지만—이럴 때 루나 드링크만 있었어도 단번에 내쫓았을 텐데— 눈을 비비는 걸로 소극적인 반항을 했다. 포만감에 졸린 걸까? 이깟 파운드 케이크로? 그마저도 절반이나 남겼다.

 안수는 두세 번 뺨을 세게 때렸다. 세 시간만 참으면 아침 근무자가 온다. 금방이다. 그때까지 안수에게 가장 위협인 건 블랙홀인데 그마저도 잠잠했다. 조기 진압이 적중했다. 또다시 블랙홀이 생겨도 괜찮았다. 아직 파운드 케이드는 절반이나 남았다.

 CCTV 속 세상은 어두웠다. 안수는 바둑판 세상을 보면서 자신이 무엇을 지키고 있는지 생각했다. 무얼 연구하는지 안수는 몰랐다. 아마 보안 팀장도 모를 것이다. 안수는 그저 고용된 몸이고 높은 연봉과 비밀 조항으로 단단히 입을 묶었기 때문에 호기심을 가지지 않으려고 했다. 가져선 안 된다고 되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CCTV를 볼 때면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는지 이따금씩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돈 때문이지, 뭐야. 이내 지워버렸지만 찝찝함이 앙금처럼 남았다.

 동료들과 이에 대한 얘기한 적이 있었다. 다들 깨끗한 짓은 아닐 거라는 게 중론이었다. 기업은 보안과 기업 비밀을 들먹였지만 그것을 순진하게 믿을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결론은 언제나 하나로 모였다. 어차피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돈만 벌면 된다. 그러니 사고 없이—사고가 나더라도 없는 것처럼 덮으면 된다.

 두 번째 블랙홀이 발생하려고 했다. 안수는 지체없이 파운드 케이크를 뜯어 입에 넣었다. 손을 입에 두 번도 가져가기 전에 블랙홀은 사그러드는 듯했다. 아. 안수는 제도 모르게 허리를 굽혔다. 아랫배가 살살 아렸다.

 안수는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에 침착하게 대응했다.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두 시간 정도 지나면 교대 근무자가 올 테고 그 시간까지 충분히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한 순간, 아랫배가 안수를 압박했다. 너 참으면 참을수록 더 곤란해질걸?

 안수는 급한 불을 끌 땐 끄더라도 순찰 시간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15분 뒤면 순찰을 돌아야 한다. 15분. 참을 수 있을까? 안수는 스스로에게 물었고 이건 의지의 소관이 아니었다. 안수는 신발끈을 조이고 허리춤을 더듬어 권총집이 잘 달려있는지 확인했다. 순찰 준비 완료. 안수는 조심조심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서두른다고 해서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안수는 보안실 문을 잠그고 화장실로 향했다. 달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더 큰 참사가 일어날 수 있기에 종종걸음이 안수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띠리릭. 개폐 알림음이 멀어졌다.

 안수는 무사히 일을 처리했고 순찰 시간도 딱 맞췄다. 순찰이라고 해봐야 3층 건물을 도는 게 전부였다. 지하 연구동은 승인받은 제한 인원이 복장을 갖춰야만 들어갈 수 있어서 경비는 그 앞까지만 살피면 된다.

 안수는 101호부터 319호까지 문고리를 한 번씩 잡았다 놓았다. 전부 정해진 메뉴얼이다. 하나 다른 점은 안수는 문고리를 잡았다 놓으면서 CCTV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가진 나름의 습관이었고 장난이었다. 이유는 없었다. 인간은 이유 모를 행동을 한다.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안수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고 보안 팀장에게 어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보안 팀장은 야간 근무 영상을 무조건 확인한다.

 안수는 마지막으로 지하 연구동을 살피고 보안실로 올라왔다. 그리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안수는 이 광경을 평생 잊을 수 없게 되리란 걸 이때는 알지 못했다.

 보안실 문이 열려 있었다.

 안수는 침을 삼키려고 했지만 삼킬 침이 없었다. 파운드 케이크 탓인지 긴장한 탓인지 입은 비이켄 분지만큼 메말라 있었다.

 문을 잠그지 않았나? 개폐 알림음을 들었다. 분명했다. 분명해? 안수는 기억을 믿을 수 없었다.

 비이켄 연구소에 투입하기 전 경비업체에서 강의한 보안 수업에서 절대 기억을 믿지 말라고 했다. 익숙한 업무 반복에서는 특히. 야간 근무는 그것에 딱 부합했다.

 수개월 반복한 경험이 허상인지 실제 경험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루나 드링크를 마시지 않아 졸렸던 걸까? 그건 아니다. 정말 아닐까? 졸리긴 했다. 하지만 졸지 않았다. 절대 자지 않았다. 이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정말이다. 팽팽하게 잡아당긴 긴장은 눈꺼풀 위에서 방방 뛰던 잠의 요정을 진즉 내쫓았지만 언제 내몰았는지 그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배가 아팠지만 당장 지릴 만큼 긴급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만!

 끝없는 자기 변호 속에 안수는 외쳤다. 이럴 시간에 눈앞에 닥친 현실부터 해결하는 게 나았다.

 안수는 권총집에서 펄스 피스톨을 빼들고 왼쪽 발로 비스듬이 열린 문을 밀었다.

 보안실은 어두웠다. 이상했다. 에너지를 아끼라 누누이 말하는 보안 팀장도 야간 근무만큼은 예외로 두었다. 졸지 않을 수 있다면 시력을 잃을 만큼 가장 밝게 해놔도 괜찮다고 말했다. 안수는 그 말을 믿고 야간 근무를 설 때는 중상 단계 이상으로 불을 밝힌다. 그런다고 졸지 않는 건 아니지만 꽤나 도움이 된다. 순찰을 나설 때도 끄지 않았다. 오늘 같은 긴급 상황이 아니더라도 안수는 불을 끄지 않았다. 순찰은 30분 이내로 돌 수 있고 돌아왔을 때 어두운 방에 들어가는 건 무서웠다.

 안수는 총구를 전방에 향하고 벽을 더듬어 불을 켰다. 사전 설정한 중상 단계 이상 빛이 눈으로 쇄도했다. 안수는 다시 복도로 나왔다. 눈이 빛에 익숙해질 때가 가장 위험하다. 안수는 귀를 열고 언제든지 쏠 수 있도록 방아쇠에 검지를 붙였다. 흐린 눈은 복도로 흘러나온 빛을 길잡이 삼아 점점 빛에 익숙해졌다. 안수는 다시 전방에 총구를 향하고 보안실 안으로 들어갔다.

 보안실 출입구는 지금 안수가 막고 서있는 이 문 하나뿐이다. 만약 안수를 기습한다면 문과 벽 사이 공간밖에 없었다. 안수는 재빨리 몸을 돌려 문 뒤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안수는 안전을 확보한 공간에 등을 맡겼다.

 안수는 보안실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도—아무것도 없었다. 보안실은 고작 다섯 평에 불과했고 숨을 곳도 없었다. 천장에 뜯어진 틈이 없나 살폈지만 없었다. 유일한 가능성은 환풍구인데 사람이 들어가기엔 크기가 좁았고 들어갈 수 있다 하더라도 너무 높았다. 책상 위에 의자를 놓아도 제자리에서 2미터는 뛰어야 닿을 수 있는데 의자를 올리는 것부터가 고난이도다. 보안실에 있는 의자는 바퀴 달린 의자뿐이었고 성공했다면 책상 위에 의자가 올라가 있거나 바닥에 쓰러져 있어야 하는데 그런 흔적은 없었다.

 책상에는 먹다 남은 파운드 케이크와 반쯤 남은 물병이 나갔을 때와 똑같은 위치에 있었고 CCTV는 아무것도 없는 어둠을 찍고 있었다.

 안수는 펄스 피스톨을 권총집에 돌리고 의자에 앉았다.

 안수는 보안 서버에서 CCTV 영상을 재생했다. 기억은 못 믿어도 기록은 믿을 수 있다.

 안수가 보안실 불을 켜둔 채 급하게 나갔다. 열렸던 출입문은 자동으로 닫혔고 잠금 표시등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안수는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짚었다. 문이 잠겼다. 안수는 재생 속도를 1.5배속으로 올렸다. 10분 정도 지났을 때 갑자기 화면이 치지직거리더니 보안실 불이 꺼졌다. 그리고 기록 시간이 5분을 건너 뛰었다. 안수는 재생 속도를 정상으로 돌리고 영상을 되감았다.

 불이 꺼지기 몇 분 전부터 영상이 끊어졌다. 누군가 영상을 잘라내었다…? 고 생각할 순 없었다. 루나시티에서 지구로 전파를 쏠 때 드물지만 전파 간섭이 일어나 영상 녹화에 영향을 주곤 했다. 그외에도 우주 방사선이나 태양풍이 원인일 때도 있었다. 우주에는 아직 인간이 밝혀내지 못한 현상들이 차고 넘쳤다. 이번에도 그 영향 때문에 영상이 끊어진 걸까?

 안수는 눈이 건조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모니터를 살핀 탓이었다. 목도 말랐다. 안수는 반절 남은 물을 전부 마셨다. 그래도 갈증을 떨칠 수 없었다.

 전부 착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말고는 안수는 지금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벌써부터 정신이 해이해지다니. 안수는 스스로를 나무랐다. 아직 반 년은 비이켄 연구소에 더 있어야 한다.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개인 사유로 계약을 해지하면 계약금은 물론 배상금까지 뱉어야한다. 그것만은 절대 사양이다.

 안수는 녹화 영상을 마저 보았다. 안수가 펄스 피스톨을 들고 조심스럽게 보안실 문을 열었다. 안수는 벽을 더듬어 불을 켰다가 복도로 잠시 나갔다. 문틈 사이로 총구가 반짝였다. 다시 보안실로 들어온 안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천장과 바닥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한 안수는 펄스 피스톨을 권총집에 되돌렸고 모니터 앞에 앉아 CCTV 영상을 확인했다. 안수는 다시 순찰 나갔을 때로 영상을 되감았다.

 재확인한 결과는 아무도—아무것도 없었다. 몇 번 더 영상을 본다고 해서 바뀌지 않을 사실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는 결과를 얻는 지금, 안수의 초점은 현재가 아닌 미래에 맞춰졌다. 보안 팀장은 출근하자마자 야간 근무자에게 보고를 듣고 CCTV 영상을 직접 확인한다. 이것은 근무자에 대한 신뢰가 없어서가 아니라 확실하게 하기 위함이다. 보안 책임은 경비팀 최고 책임자인 보안 팀장에게 있다. 기억을 믿지 말아라. 기록을 믿어라. 보안 팀장의 좌우명이다. 만약 보안 팀장이 안수가 허둥대는 영상을 보면 야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되물을 것이고 안수는 솔직하게 보고할 수 없다. 지금은 아무 일도 없지만 어떤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이 이 일과 관련이 있다면 그 가능성이 실낱만큼이라도 있으면 안수에게 책임을 지울 것이다. 안수는 자신이 받을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뱉어야 할 것이다. 안수는 선택을 해야 했다. 솔직하게 보고 하느냐. 아니면….

 안수는 머리를 쥐어싸멨다. 시간은 04:58 LST. 곧 다음 근무자가 온다. 안수는 절대 시간보다 훨씬 짧은 시간동안 두 가지 선택의 무게를 가늠했고 하나를 선택했다.

 아무도 모르면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된다.

 안수는 즉시 행동에 옮겼다. 보안 서버에 접속해 CCTV 원본 영상을 다운 받아 서버에 있는 영상을 삭제했다. 그리고 아주 조금만 영상을 잘랐다. 더도 덜도 말고 5분이었다. 순찰에서 돌아와 불 꺼진 보안실을 탐색하던 5분. 일부 영상은 이상 현상 때문에 지워졌다. 태양풍이 불었거나 우주 방사선이 방해했거나 전파를 쏜 것이다. 우주에는 인간이 느끼지 못하는 일이 늘 일어난다. 안수는 수정한 영상을 보안 서버에 올리고 현 시점부터 영상이 기록되도록 조치했다. 이것이 결과로 남은 유일한 진실이다.

 안수는 한 달동안 몸에서 긴장을 풀지 못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벌벌 떨었다. 그 일이 무슨 일인지 가늠조차 못하면서 연구소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도 온몸을 땀으로 적셨다. 동료들은 루나 드링크 탓이라고 그만 마시라고 했고 안수는 그러겠노라 너스레를 떨었다.

 연구소는 평온했다. 업무와 근무의 지루한 반복이 이어졌고 안수의 기억에서도 기묘한 밤이 사라질 즘이었다. 지구연합과 루나시티의 관계를 한 층 더 낭떠러지로 밀어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비이켄 분지 가스 유출 사고’. 일명 ’비이켄 사고’으로 불리는 본 사건은 비이켄 연구소에서 유출된 정체불명 가스가 비이켄 타운에 사는 영아 47명에게 치료 불가능한 후유증을 남긴 끔찍한 사건이다.

 비이켄 타운은 루나시티 센트럴 외각에 위치한 도시로 베드 타운으로 계획한 도시다. 그래서 루나시티에서 새 삶을 꿈꾸며 터전을 꾸린 젊은 부부가 많았다. 루나시티 어디든 젊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비이켄 타운은 더욱 많았다. 루나시티 정부는 비이켄 분지를 안정된 젊은 도시로 키우고 싶었고 세금 감면이나 자녀 혜택 같은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 사람들을 모았다. 그래서 비이켄 분지에 연구소가 들어선다고 했을 때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지구연합도 비이켄 분지를 포기할 수 없었다. 넓고 평평한데다가 화물 정거장과도 멀지 않아 물류권이 뛰어났다. 지구연합은 루나시티 정부가 계획도시 청사진을 그리기 훨씬 전부터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자기들 멋대로 달의 소유권을 십달러에 사고 팔던 그때 권리를 근거로. 지구연합은 무대포로 연구소 착공에 들어갔고 루나시티 정부는 벌어진 일에 속수무책으로 밀려나면서 위험한 실험은 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지구연합은 듣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지구연합은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막아줄 거라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부루마블 같은 소유권을 차치하더라도 실질적인 실험 통제권은 지구연합, 나아가 지구연합에 돈을 대는 초거대기업—비이켄 연구소를 소유한 트러스트 사가 대표적이다—에게 있었다. 트러스트 사는 절대 우려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실제로 군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실험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사실이었으나 보험으로 루나시티 몇몇 정치인들에게 섭섭하지 않을 만큼 챙겨주었다. 실제로 5년 넘게 사고가 나지 않았기에 루나시티 내부—초거대기업에게 은혜를 받은 정치인들이 루나시티와 지구연합 사이에 일부러 갈등을 조장하려는 음모가 아니냐고 적극 주장했다. 물론 ‘비이켄 사고’ 이후로 그 주장은 쏙 들어갔다.

 잘못은 미흡한 관리를 한 비이켄 연구소에 있었다. 비이켄 연구소 연구소장은 책임을 통감하고 사퇴했다. 트러스트 사도 죄를 인정했지만 비이켄 타운에서 요구한 배상금이 과하다며 항소를 했다. 루나리안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이었다.

 루나시티 정부는 단순 사고일 뿐이라며 연구소에서 제출한 증거를 하나도 믿지 않았다. 수정 기록이 남는다지만 일지는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고 수정 기록조차 지울 수 있다. CCTV 영상은 그들의 의심을 지지하듯 부분적으로 결손했다. 루나시티 정부는 걸리지 않았을 뿐 분명 비이켄 사고 같은 일이 비일비재 했을 것이라 주장했다. 지구연합은 지리멸렬한 음모론을 막지는 못할 망정 루나시티 정부가 나서서 음모론을 퍼뜨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본 사건에 대해서는 심심한 사과를 건넸고 기업이 항소하지 않도록 압박할 테니 섭섭하지 않을 만한 배상금을 약속했다. 하지만 피해 아이들을 둔 부모들의 분노는 사그러들지 않았다. 돈으로 그들의 억울함을 무마한다고 울부짖었다. 돈으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가득 찬 아이들의 미래를 되찾을 수 없다. 빼앗긴 시간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

 재판은 길어졌고 초점은 어느새 배상금보다 실험 통제권으로 넘어갔다. 루나시티 정부도 피해 아이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어차피 지구연합에서 배상금도 넉넉하게 주겠다고 했으니 피해 아이들 부모에게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어느새 비이켄 사고는 실험 통제권을 지구연합에게서 가져오기 적절한 칼과 총일 뿐이었고 본 재판도 실험 통제권의 소유권을 다투는 재판으로 변질되었다.

 지구연합 재판관 셋과 루나시티 재판관 셋이 모여 내린 1심 결과는 당연히 비이켄 연구소의 유죄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쏙 빠져 있었다. 오로지 배상금에 대한 판결뿐 실험 통제권은 여전히 지구연합이 가지고 있었다.

 2심에서 루나시티 정부는 재판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증거가 아닌 증인들을 중점적으로 찾았다. 연구원들 그리고 보안 경비들. 그 사람들을 전부 조사하고 사정 청취를 한 결과, 안수가 무언가 알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했을 때 유독 반응을 보인 게 안수였다. 거짓말 탐지기 결과는 정식 증거로 삼을 수 없으나 참고할 수는 있다. 지구연합은 거짓말 탐지기에 의존하는 루나시티 정부를 비웃었다. 루나시티는 실험 통제권을 가져올 수 있다면 비웃음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또한 루나시티는 안수가 주요 인물이라는 증거를 하나 더 내밀었다. 안수가 순찰을 돌 때마다 CCTV를 향해 묘한 웃음을 지었다는 것이었다. 이 행동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밝혀야 한다고 안수에게 출국 금지 처분을 내렸다.

 안수는 그 기묘한 밤이 덧난 흉터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혹시 그날 밤에 일어난 일이 비이켄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만약 솔직하게 팀장에게 보고했다면 자신이 주목받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괴로워했다. 그것이 지구연합과 루나시티, 어디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다줄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진실이 밝혀졌을 때 뱉어내야 할지 모르는 돈이 걱정이었다.

 온갖 증거와 증언이 끊이지 않고 쏟아졌고 비이켄 사고가 관리 미흡이 아니라 테러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 아니냐는 음모론이 피어올랐다. 만약 테러범의 소행이라면 지구연합 출신이 아니라 루나시티 출신일 확률이 높았다. 루나시티 과격 분자는 적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지구연합 시설 테러 예고도 몇 번이나 했었다. 루나시티는 몇 번이고 그들을 잡아들였고 비이켄 연구소를 겨냥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만약 루나시티 출신 테러범의 소행이라면 비이켄 사고의 원인은 루나시티에게 있었다. 그러면 루나시티에 불리한 여론이 생길지 모르지만 이건 은연중에 루나시티 정부가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만약 루나시티가 실험 통제권을 완전히 가지고 있었다면 테러는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위험한 실험을 자행하는 연구소를 베드 타운 근처에 세우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한 주장을 펼칠 수 있었다. 루나시티 정부는 재판 결과가 뒤집어지더라도 실험 통제권이라는 더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한 그림을 그렸다. 이 속셈을 모를 지구연합이 아니었기에 루나시티 테러범의 소행이라는 음모론을 적극적으로 밀지 못했다.

 2심이 열리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다. 지구연합과 루나시티가 음모론을 두고 재판의 방향성을 바꿔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증거와 증언, 증인으로 돌아왔다.

 안수가 주요 참고인으로 떠오르면서 루나시티에서 안수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디를 가도 사람들은 안수의 입을 주목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재판의 향방이, 나아가 루나시티의 미래가 달라진다. 지구연합도 마찬가지였다. 지구연합은 안수가 함구하기를 바랐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똑같은 증언을 반복하는 것이—현상 유지를 하는 것이 지구연합에게 유리했다. 그렇기에 트러스트 사는 고작 보안 경비에게 사설 경호원이라는 감시역을 붙였다. 그때부터였다. 열린 문이 꿈에 나타나기 시작한 건.

 안수는 계약한 일년만 루나시티에 있을 계획이었지만 4년 동안 루나시티에 머물렀다. 그 사이 안수는 주요 참고인으로 네 번이나 재판에 참석했다. 재판에 올라야 할 때면 지구연합과 루나시티는 그가 묵은 숙소로 찾아와 온갖 말로 구슬리고 협박했다. 하지만 안수는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았다. 안수는 그날 편집한 사실만을 녹음기처럼 재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안수 본인도 보안실이 열린 것도 영상을 지운 것도 정말 겪은 일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최종심까지 오른 재판은 5년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판결은 1심 유지. 트러스트 사가 항소할 때마다 배상금은 곱절로 늘었다. 이는 트러스트 사가 의도한 결과처럼 보였는데 천문학적인 배상금으로 지구연합이 가진 실험 통제권을 방어한 느낌이 강했다. 피해 아이들 가족은 이미 그들의 손을 떠난 재판 결과에 화를 내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두손으로 담을 수 없을 만큼 황금을 얻어도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트러스트 사는 배상금 이외에 후유증이 나을 수 있도록 적극적인 의료 지원을 하겠다고 밝혔고 그 덕분에—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최종 판결이 내려지고 나서야 안수는 겨우 자유의 몸이 되었다. 5년 만이었다. 안수는 곧장 우주항으로 향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고 싶었고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사설 경호원이 우주항까지 따라온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 다 끝났으니 보호할 이유도 감시할 이유도 없었다.

 “저 혼자 있고 싶은데요.”

 경호원은 무시했다. 안수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경호원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래, 이 사람도 자기 일을 하는 거야. 내가 보안 경비를 한 것처럼. 재판에서 말을 바꾸지 않은 것처럼.

 안수는 창문 가까이 섰다. 발밑에 파란 점이 보였다. 드디어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히노데 정거장 발 인천 착 FLTE가 입항하고 있습니다. 해당편을 이용하실 고객은 준비해주시길 바랍니다.]

 안수가 게이트로 가려는 참이었다. 경호원이 안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안수는 갑작스런 경호원의 행동에 당황하며 반항했지만 경호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 우주선을 타면 위험합니다.”

 “무슨 개소리야!”

 안수가 더욱 격렬하게 손을 뿌리치려 할수록 경호원도 더욱 더 세게 힘을 주었다.

“당신을 노린 테러 첩보를 얻었습니다. 저희가 준비한 우주선을 타야 합니다.”

 안수는 경호원의 말을 믿지 못했지만 그것이 사실로 밝혀지기까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구행 우주선이 히노데 정거장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폭발에 휩싸였다. 안수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제 다 끝났잖아. 나를 죽여서 어쩌려고.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

 “그건 당신 생각이죠.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호원은 울상이 된 안수를 끌고 히노데 정거장에서 빠져나와 화물선 전용 미리내 정거장으로 향했다.

 미리내 정거장에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안내 데스크에 불 꺼진 낡은 인공지능 모델만 있었다.

 경호원은 검정 재킷 안주머니에서 여권과 카드를 꺼내 안수에게 내밀었다. 안수는 일단 그것들을 받아들었다.

 “잘 들으십시오. 당신은 이제 우안수가 아닙니다. 패어루스 존스Faruth Jones입니다.”

 여권을 펼치니 안수 사진에 엉뚱한 이름이 붙어 있었다. 경호원은 카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희가 감사의 뜻을 담았습니다.”

 경호원은 안수와 어깨동무하고 정거장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시계는 점점 어두워졌고 유도등만 퍼렇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한참을 간 끝에는 소형 우주선이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걸 타고 가세요.”

 “저게 뭔데요!”

 “도착하면 저희 인원이 도와줄 겁니다.”

 경호원은 안수를 소형 우주선으로 밀어넣었다. 우주선 안에는 경호원과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또 있었는데 그는 안수를 우주선 안으로 끌어당겼다. 안수가 상황을 물을 틈도 없이 우주선은 미리내 정거장에서 멀어졌다.

 안수—패어루스는 동남아시아 제도諸島 중 지구연합이 인증한 부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한적한 휴양지에서 살게 되었다. 트러스트 사는 안수의 가족에게 안수가 우주선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며 모든 책임이 폐사弊社에 있다며 아들의 죽음이 축복처럼 느껴지도록 막대한 배상금을 주었다. 안수에게 파트너가 없는 것이 트러스트 사에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안수가 패어루스가 되고 2년이 지났지만 안수는 여전히 패어루스가 입에 붙지 않았다. 자신을 패어루스라고 소개할 일이 없었다. 이웃은 수십 개 소유한 별장 중에서 가끔 놀러 오는 부자들이었고 그들은 이웃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별장 관리인과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그때마다 안수는 안수도 패어루스도 아닌 기억도 못할 이름을 댔다. 물론 별장 관리인도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안수는 눈이 떠지면 일어났고 졸리면 잤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안수가 지운 그날 밤이 비이켄 사고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증거는 없었지만—이후 수년에 걸쳐 면밀한 조사를 했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기계 결함 때문에 사고가 났다는 결론으로 귀결했다— 안수는 비이켄 사고와 재판을 비롯한 지구연합과 루나시티 사이에 발생한 모든 일이 그날 밤, 그 잠깐 동안에 일어난 것만 같았다. 왜 하필 내가 근무 설 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전날이거나 다음날이었다면. 적어도 자신과 관련없는 시간에 일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만약 보안 팀장에게 사실대로 밝혔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물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안수는 홀로 낯선 곳에 떨어진 이후로 매일밤 잠들기 전 바랐다. 이 알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자신을 꺼내달라고. 제발 나에게 자유를 달라고.

 안수는 문을 활짝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어둠 속에 숨어있을 암살자에게 빈틈을 주었다. 목덜미를 편하게 물어뜯을 수 있도록 두 팔 벌려 몸을 십자로 만들고 눈을 감았다. 언젠가 찾아올 끝을 그토록 기다렸지만 갑자기 튀어나오는 사신의 낫은 무서웠다.

 안수는 두 팔을 벌린 채 거실 가운데 섰다. 자세를 바꾸지 않고 몇 시간이고 그 자리에 꼿꼿이 섰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멀리서 먼동이 트였다. 스스로에게 내린 어둠이 점차 밝아졌고 붉은 세상이 그의 눈을 달궜다.

 안수는 체념하고 눈을 떴다. 눈부셨다. 바람이 열린 문을 지나 비릿한 바다 내음을 싣고 그의 코를 간지럽혔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안수는 한 뼘만큼 열린 마당 통창을 열어젖히고 마당으로 나갔다. 파도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졌다. 바다 내음은 더욱 진해졌다. 이름 모를 바다새 소리가 들렸다. 야자수 잎이 흔들렸다. 서쪽은 아직 밤으로 물들어 있었고 동쪽은 태양이 새하얀 아침을 밀어올렸다.

 안수는 고개를 젖혀 밤과 낮—경계를 그을 수 없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속에 기울기 시작한 달이 보였다. 창백한 눈이 무수히 그를 바라보았다.

 안수는 고개를 떨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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