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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데스건 혁명

2024.03.08 04:5403.08

데스건 혁명

 

빌린

 

 

방학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낡은 VR 기어를 쓰고 비컴유에 접속했다. 내 홈월드는 잔디와 조경수 사이로 산책로가 쭉 뻗어 있는 광장 월드였다. 건물만 빽빽한 화성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디자인이지만, 그게 이 월드의 매력이었다. 게다가 들어오자마자 광장 월드에 접속한 사람들과 만날 수도 있고.

방학식 날이어서 그런지 월드가 평소보다 더욱 붐볐다. 거의 2~3미터에 한 무리씩 모여 있을 정도로. 미소년 미소녀부터 로봇, 수인 등의 아바타에서 나오는 말소리가 한데 모여 광장이 울리는 것만 같았다.

용 투구를 쓴 꼬마, 제민이 저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엄마 아빠가 화성 인력권으로 출장을 나가고 얼마 안 되었을 때 만나게 된 친구였다. 이제는 알고 지낸 지 거의 한 달이 되어 가는데, 서로 이름까지 알고 지낼 정도의 사이가 됐다. 그런데 나를 맞이하는 제민의 표정이 평소보다 들떠 보였다.

“신혁이 형, 이거 뭔지 알아?”

제민이 테이저건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무료 3D 모델이다. 비컴유를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인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한 내 눈은 속일 수가 없다. 분위기를 봐서는 테이저건 모델 자체보다는 기능을 소개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흥미로워 보이지 않았다. 기능을 넣은 아바타 자체는 비컴유에 발에 채일 정도로 많으니까.

예를 들자면 움직일 때마다 빛 무리가 검날을 따라오도록 만들어서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검기를 구현한다든가, 자신의 아바타 어깨나 손에 의자를 달아 놓아서 다른 유저가 올라탈 수 있게 만든다든가. 결국 그런 건 잠깐의 신기함으로 끝나곤 했다. 의자 같은 경우에는 VR 기어를 쓴 채로 타고 있으면 멀미도 나고.

“관심 없어. 그냥 총알 같은 거나 나가겠지.”

내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는데도 제민의 얼굴엔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했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아바타가 뭐가 재밌는지. 제민은 테이저건을 멀리 떨어진 갈색 늑대 수인에게 겨누어 보였다. 그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다른 수인들에게 신난 듯 떠들어대고 있었다.

“잘 봐.”

그리고 제민은 검지를 방아쇠울에 넣더니, 그대로 손가락을 당겼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났다. 총구에는 불빛도, 총알도, 총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는 수준이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제민은 우쭐한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턱짓으로 수인들이 있던 방향을 가리켰다.

“이게 이 총의 진정한 힘이거든.”

그쪽을 바라보니 수인들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유심히 살펴보니 가운데에 있던 갈색 늑대 수인만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직감적으로 제민이 무슨 기능을 만든 건지 알아챌 수 있었다. 바로 데스건이다.

비컴유 유저 대부분은 웬만해서 만들지도 쓰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당사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접속이 끊기게 하는 기능이니까. 내가 처음 비컴유를 시작했던 시기에는 테러를 하고 다니는 악질 유저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잠깐 유행하기도 했었다.

“맞은 사람한테만 계산되는 파티클을 이용한 거야. 의외로 만들기 쉽던데?”

제민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제민의 말대로다. 파티클 방식은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 게다가 맞은 사람의 CPU에서만 계산되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렉도 발생하지 않고. 하지만 비컴유 유저들이 진짜로 데스건이라고 부르는 건 셰이더를 이용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제민은 둘의 진짜 차이를 모를 거다. 비컴유를 한 달 한 뉴비에게 둘은 제작 난이도 빼곤 다 똑같아 보일 테니까. 설령 알고 있어도 유나이트 엔진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 이상은 못 만들 거고.

“말하던 중에 접속을 끊을 녀석이 아닌데.”

“뭔가 이상해.”

그들의 말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아무래도 없어진 수인이 데스건에 맞았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요즘 세상에 갑자기 한 명만 접속이 끊기는 일은 없다고 봐야 할 정도니까. 오죽하면 지구 연합 대사관에는 아무것도 설치한 게 없는데도 와이파이가 된다는 얘기가 들릴 정도였다.

수인 무리는 범인을 찾으려는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녔다. 제민은 눈치가 없는지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넣은 채 데스건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어때? 이거 한 방이면 누구든 접속 종료라고.”

“어이. 다커 드래곤, 왜 그런 비매너 짓을 했지?”

낯선 목소리가 제민의 닉네임을 불렀다. 뒤돌아보니 어느새 수인 무리 전부가 다가와 있었다. 너무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떠든다 싶더라니. 이렇게 될 것 같았다. 그중 대장 격으로 보이는 연분홍색 염소 수인이 제민에게 막대기를 겨누며 말했다.

“할 말 없으면 지금 이 풍경이나 잘 봐 둬. 네 VR 기어로 즐기는 마지막 순간이 될 테니까.”

“에이, 다시 들어오면 되는……!”

제민의 아바타는 마이크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월드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곧이어 알림창에 다커 드래곤이 로그아웃했다는 알림이 올라왔다. 연분홍색 털을 가진 수인은 제민이 사라진 곳에서 총구를 돌려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엄청나게 화난 표정이었다.

“넌 할 말 없어?”

마지막 순간을 즐기라고 한 것을 보면 데스건 중 두 번째 종류를 쓴다는 게 분명했다. 셰이더를 이용한 방법인데, 맞은 사람에게만 작동하는 건 똑같다. 하지만 VR 기어의 GPU 메모리 초과 오류를 일으킨다는 점이 달랐다. 셰이더 계산은 비컴유가 꺼져도 계속 돌아가기 때문에 VR 기어의 전원을 빨리 끄지 않으면 GPU에 영구적인 손상이 일어난다. 게다가 VR 기어를 안 끄고 그대로 두면 완전히 망가질 수도 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허겁지겁 변명을 덧붙였다.

“아까 걔가 생각 없이 님 친구에게 데스건 쏜 거 대신 사과할게요. 다커 드래곤이 비컴유 시작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뉴비인 데다가 이제 초등학교 졸업하는 애라서…….”

하지만 상대의 표정은 여전히 험악했다. 나는 재빨리 닉네임을 확인하고는 빠르게 변명을 생각해냈다. VR 기어가 망가지면 부모님의 남은 출장 기간 동안 할 게 아무 것도 없게 되니까.

“수현1025 님, 다커 드래곤이 저럴 줄 알았으면 당연히 처음부터 말렸죠! 전 진짜 아무 것도 몰랐어요. 학교 끝나고 방금 들어왔는데 쟤가 갑자기 빵 하고 쏴버렸다니까요? 앞으론 그런 일 없도록 친구 관리 잘할게요. 진짜로요.”

연분홍색 염소 수인은 설정 패널을 여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이리저리 쓸어내는 동작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 활동 로그를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말없이 한숨을 푹 내쉰 연분홍색 염소 수인은 다른 수인들을 데리고 돌아가서는 다시 그들만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괜히 어색한 분위기 속에 혼자 남아있기 싫어서 랜덤한 월드로 가기 버튼을 눌렀다.

 

* * *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의 풍경이 눈 내리는 간이역으로 변했다. 간이역 앞에 세워진 표지판에는 2019년 2월 8일 공개라고 적혀 있었다. 2019년이면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 화성은커녕 달에도 콜로니가 없던 시절이다. 이렇게 낡은 월드에 나 말고 누가 있기나 할까 싶어 설정 패널을 열어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재 월드 내 인원 항목에 2라고 적혀 있었다. 나 말고도 한 명이 더 있다는 뜻이다. 혹시나 제민이 다시 접속했나 싶어서 친구 목록을 확인해 봤지만, 다커 드래곤의 상태는 여전히 오프라인이었다.

나같이 랜덤 월드를 누른 사람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여기에 오는 거지? 혹시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비컴유를 했던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추억이 남겨진 월드라도 되나? 하지만 아무리 월드를 둘러보아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소리라도 내줬으면 좋겠지만, 노래 연습이라도 하는 게 아니라면 혼자서 입을 열 리가 없었다.

“누구 없어요?”

나는 거대한 굴뚝 앞에 멈춰 서서 다시 설정 패널을 꺼내 보았다. 여전히 월드 내 인원 항목에는 2라고 적혀 있었다. 어쩌면 잠수 유저일 지도 모른다. 나도 종종 VR 기어를 쓴 채 잠들곤 하니까. 만약 진짜로 자고 있다면 누군지 찾는 걸 포기하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에휴. 친구도 없고… 뭐 하지.”

그때였다. 친구 추가 요청이 날아왔다. 그렇다면 상대의 시야에는 내가 보인다는 건데. 나는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텅 빈 월드가 확실하다. 그런데도 친구 추가 요청에는 ‘선샤인머스캣’이라는 닉네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이상하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푸핫!”

위쪽에서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목각 인형 아바타가 거대한 굴뚝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해?”

“바깥 풍경 구경. 일단 친구 요청부터 받아 줄래?”

이상한 녀석이다 싶었다. 이 월드는 바깥 풍경과는 전혀 다른데. 나무로 지은 것처럼 보이는 간이 역사도 굴뚝도 눈도. 전부 화성의 풍경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나는 친구 요청을 수락하며 물었다.

“바깥 풍경이 보고 싶으면 콜로니 밖으로 나가면 되잖아.”

“난 못 나가. 지구 연합 대사관에 살거든.”

단번에 이해가 됐다. 그 건물에 사는 사람은 쉽게 밖으로 못 나오는 게 당연하니까. 하지만 거기 산다는 건 상대가 지구 연합 사람이라는 얘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콜로니의 와이파이가 지구연합 대사관에도 터진다는 얘기기도 하고. 물론 상대가 진짜 지구 연합 사람이라면 따뜻하게 대할 필요가 없었다.

“지구 연합 사람이면 그래도 싸. 항상 우리 화성인들을 괴롭히잖아.”

역사 시간에 배웠다. 지구 연합은 콜로니 말고는 아무것도 없던 화성에 사람들을 버렸다고. 첫 세대가 화성 땅을 밟았던 해에 기근이 들었고, 구원 요청을 했는데도 지구 연합은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고. 그 때문에 첫 세대의 절반 이상이 아사했다. 게다가 화성인들이 희토류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하니 그제야 나타나 소유권을 주장했다. 나중에는 한 해 생산량 전부를 지구로 보내라는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전쟁까지 일으켰다. 만약 그 전쟁에서 화성이 졌다면, 우리도 달처럼 영원히 지구 연합의 착취에 시달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상대는 아무것도 모르는지 답답한 소리만 늘어놓았다.

“뭘 말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우리 아빠는 화성인을 괴롭히려고 온 게 아냐. 외교관이니까.”

“어쨌든 지구 연합 사람들은 다 나빠. 지구 연합 사람과 연락하려 하는 사람 있으면 신고하라고 뉴스에서도 말했거든?”

“그러면 너도 신고당해야 하는 거 아냐?”

그 말과 동시에 월드에 누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나는 놀라서 월드의 입구를 바라보려고 했지만, 월드 한가운데에 있는 낡은 역사에 가려 입구가 보이질 않았다. 동시에 알림 메시지가 떴다. 다커 드래곤이 비컴유에 접속했다는 알림이었다. 나는 이 월드에 들어온 사람이 제발 제민이기를 바라며 선샤인머스캣을 향해 숨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선샤인머스캣은 멀뚱히 서있을 뿐이었다.

“형? 왜 이런 월드에 와 있어?”

제민의 목소리였다. 긴장했던 몸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제민은 평소와는 달리 무표정인 데다가 유독 뻣뻣한 자세로 서 있었다. 제민은 나를 보더니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속도로 고개를 마구 흔들어 보였다. 아무래도 PC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 제스처가 답답함의 표현인지 감격의 표현인지 알 순 없지만 격한 감정을 느끼는 중이란 건 확실해 보였다.

“나 아무래도 VR 기어가 맛 갔나 봐. 안 켜져. 근데 뒤에는 누구야?”

뒤를 돌아보니, 목각 인형 아바타가 서 있었다. 아무래도 나를 따라온 모양이었다. 일단은 도망가는 게 좋겠다 싶어 제민을 쿡쿡 찔러 다른 월드에 가자는 눈치를 슬쩍 줬다. 하지만 제민은 반응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컴퓨터에서는 촉각 전달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게 떠올랐다. 어떻게 해야 이 내용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에, 제민이 목각 인형에게 말을 걸었다.

“기본 아바타인 걸 보니 뉴비인가 본데, 같이 재밌는 월드 보러 갈래?”

정신이 번쩍 뜨였다. 제민은 지금 아무 생각 없이 지구 연합 사람에게 말을 건 것이다. 셋이 경찰에게 잡히기라도 하면 그날로 반역죄에 처해질 게 뻔했다. 그러니 경찰한테 걸리기 전에 어떻게든 도망쳐야 한다. 그런데 목각 인형의 정체를 말하지 않고서 어떻게 내 말을 듣게 하지? 지금 이 상태로는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 같은데.

“완전 좋아!”

목각 인형은 사태의 심각성도 모르고 신나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저 녀석이 비컴유에 접속하는 걸 포기하도록 만드는 게 제일 현실적이다. 가급적이면 자연스럽게. 그러니 비컴유의 나쁜 면만 보여준다면 저 녀석은 우리를 잊고 다른 걸 하러 가겠지. 그렇게 되고 나면 나 혼자만 입을 다물면 된다. 제민이까지 고통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주 자연스러운 방법이 떠올랐다. 나는 다른 월드로 가는 포탈을 열려던 둘 사이로 뛰어들며 말했다.

“사실 뉴비라면 비컴유 그만둘 수 있을 때 그만두는 게 좋아.”

“그건 맞지.”

내 말에 제민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컴유 유저는 누구나 공감하는 일종의 밈이자 사실이었다. 비컴유(V-comes-U)의 풀이말인 버추얼 컴스 유Virtual comes to You처럼 들어와서 즐기다 보면 점점 가상공간이 현실을 대신하게 되니까. 당장 나만 해도 비컴유에만 친구들이 있다. 그래서 비컴유가 좋으면서도 나쁘기도 했다. 하지만 목각 인형은 고개를 갸웃해 보일 뿐이었다.

아직 비컴유에 데어 본 적도 빠져 본 적도 없는 순수한 사람의 반응이었다. 그래서 나는 추가적으로 설명했다. 이왕이면 비컴유를 할 이유가 없다고 느껴지도록.

“왜냐하면 비컴유를 하는 사람은 크게 다섯 종류 중 하나에 속하거든. VR 세계에서 인연을 맺고 싶어 하는 ‘랜선 연애꾼’, 그저 자신의 아바타를 보기 위해 거울 앞에만 앉아 있는 ‘나르시시스트’, 아무 사람이나 잡고 그 순간에만 놀고 떠나는 ‘사이버 인싸’, 반대로 사람들 괴롭히려고 오는 ‘테러리스트’, 그리고 수상할 정도로 돈이 많은 수인들인 ‘퍼리’. 이런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

하지만 목각 인형은 이 말에 별로 설득력이 없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그는 양손을 어깨 높이만큼 들어 보이며 반문했다.

“그래서 뭐가 나빠? 원하는 건 다 할 수 있다는 거잖아.”

목각 인형의 얼굴에는 기본 아바타 특유의 낙천적인 스마일이 그려져 있다. 그러다 보니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걸 어떻게 말려야 할까.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는데, 제민이 말을 꺼냈다.

“음, 그럼 이건 어때? 형이 이 친구를 비컴유 구석구석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설명해 주는 거야. 그러면 선택은 얘가 하겠지. 난 유토피아 영상 업로드 각 뽑고.”

“좋아!”

내가 반대를 하기도 전에 목각 인형이 대답했다. 그러고서는 나와 제민을 기본 아바타 특유의 스마일 표정으로 번갈아 보았다. 다른 뉴비와 똑같은 미소일텐데 어째서인지 평소와는 달리 섬뜩해 보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둘을 이끌고 다른 월드로 넘어갔다.

둘을 데리고 가장 먼저 간 곳은 술래잡기 월드였다. 한동안 서로를 쫓아다니면서 놀 수는 있었지만, 세 명만으로는 점점 지루해졌다. 여기까지는 내 계획대로였다.

“누굴 더 데리고 와야 하나?”

제민의 말에 목각 인형이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대로였다.

 

* * *

 

광장으로 돌아온 나는 계획의 2단계를 시작했다. 놀아줄 사람을 오래도록 찾다 보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날 거다. 그만두는 뉴비 대부분은 여기서 떨어져 나간다. 여기 사람들 대부분은 대화를 하러 오지, 매일 게임 월드를 즐기러 오는 게 아니니까.

예상대로 사람들은 각자 무리를 형성해 있었고, 우리와 같이 놀겠다고 하는 이는 없었다. 이제 같이 놀자고 물어보지 않은 건 수인 무리뿐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드러누워 있었고, 나머지도 반쯤 누운 자세로 앉아 있었다. 아까 제민에게 데스건을 쐈던 수현1025도 그대로 있었다. 나는 목각 인형에게 같이 놀 사람을 붙여주고 싶지 않냐며, 제민을 슬쩍 수인 무리로 떠밀었다.

“어, 저기 아까 일 사과하려고 왔어.”

제민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의외로 수인들은 우리의 등장이 그렇게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단 한 명, 갈색 수인을 빼고는 말이다. 갈색 늑대 수인은 제민의 사과도 무시하고 자기 말만 할 뿐이었다.

“…경제가 망가지고 있다는 얘기니까. 그래서 더욱 우리끼리 똘똘 뭉쳐서 분리주의 노선을…”

어쩐지 다들 지쳐 보인다 했더니 아무래도 갈색 늑대 수인 때문인 것 같았다. 앉아 있던 수인들의 등이 점점 바닥과 가까워져 갔다. 하지만 갈색 늑대 수인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정적 속에서 혼자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우리는 완전히 교류를 끊고…”

결국 제민이 갈색 수인의 말을 끊었다.

“어…… 우리가 사과도 하러 왔지만, 같이 놀 사람도 찾고 있거든?”

바닥에 눌어붙을 것만 같던 수인들이 제민의 말에 벌떡 일어났다. 아직 뭘 할 건지 얘기하지 않았는데도 모두가 앞다투어 빨리 가자고 외쳤다. 하지만 갈색 늑대 수인만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하찮은 놀이는 너희끼리 해. 아무래도 난 우주 정세를 논할 다른 녀석을 찾아봐야겠어.”

이윽고 혼자 남은 갈색 늑대 수인과 어느 정도 떨어지자, 다들 한마디씩 했다.

“와, 쟤한테서 구해 줘서 고마워.”

“저 녀석이 다시 들어오고서부터는 정치 얘기만 해서 피곤했거든. 아까 총을 쏜 녀석이 지구 연합의 사주를 받은 끄나풀일 거라면서 막 음모론을 얘기하는 거 있지?”

제민은 무슨 그런 영화 같은 얘기를 하냐며 웃어넘겼다. 하지만 마냥 웃을 수 있는 얘기는 아니었다. 내가 지구 연합의 사주를 받은 건 아니지만, 지구 연합 사람일지도 모르는 녀석이 지금 함께 이 얘기를 듣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왠지 간첩이 되어 버린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아졌다.

“야, 꼬마. 이거 받아. 진짜 데스건 넣어 놓은 아바타야.”

수현1025가 제민을 향해 아바타 파일을 건네며 말했다. 제민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자, 연분홍색 염소 수인은 곧바로 엄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덧붙였다.

“네 VR 기어를 부순 게 미안해서 주는 거니까 남의 거 함부로 부수고 다니지는 말고. 그리고 개인 채팅으로 선물 코드도 보냈으니까 그것도 확인해 봐.”

PC 유저답게 제민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게다가 아무런 움직임도 없어서 얘가 채팅을 확인 중인 건지 그냥 컴퓨터 앞에서 사라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동안 조용하던 제민이 외쳤다.

“와 수현1025, 최신형 VR 기어를 그냥 준다고? 부자야?”

“초등학생 물건 부순 게 마음에 걸려서. 그리고 그냥 수현이라고 불러.”

“3월부터는 중학교 다니거든?”

제민은 초등학생이라는 말에 발끈한 듯했다. 하지만 수현은 가볍게 웃어넘길 뿐이었다.

“완전 애기네 애기. 난 직장 다녀. 친추부터 받아.”

제민은 거의 침팬지 울음소리라고 해도 믿을 만한 소리를 연달아 냈다. 그러더니 이내 자신이 아까 무례하게 행동해서 미안하다며 수인들에게 한 명 한 명 다가가 탈인간적인 속도의 고개 움직임과 함께 사과했다. 그 이후에 우리는 수인 무리와 즐겁게 놀았다. 술래잡기도 하고, 서바이벌 게임도 하고, 예쁜 수목원 월드에 가서 산책도 했다. 우리가 헤어지기로 한 건 늦은 밤이 되고 나서였다. 수현1025가 목각 인형을 가리키며 물었다.

“근데 저 목각 인형 친구는 아직 자기 아바타도 없는 거야?”

목각 인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하나 선물해 줄게.”

그 말을 들은 목각 인형이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내 이름은 해윤이야. 우해윤.”

“해윤이라. 귀여운 이름이네.”

수현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접속을 종료했다. 그러자 목각 인형이 나를 향해 돌아서더니 물었다.

“너희는 이름이 뭐야?”

“어…… 난…… 차신혁이라고 해. 쟤는 신제민이고.”

나는 얼떨결에 이름을 전부 말해버리고 말했다. 오늘 처음 본 애한테 말할 생각 없었는데.

“내일도 올 거지?”

그 말이 참 오묘하게 들렸다. 협박 같기도 하면서 순수하게 친구에게 묻는 것 같기도 한 느낌.  한 달 전부터 알았던 제민의 표정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많이 답답했는데. 아예 모르는 사람의 스마일 표정만 보고 있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짐작가지 않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제민의 표정만큼은 곧 돌아올 거라는 사실이었다.

 

* * *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는 방문을 열고 혹시나 부모님이 출장에서 일찍 돌아왔는지 확인했다. 그러자 아무도 없는 집안의 쌀쌀한 공기가 온몸의 털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지난 달 초만 해도 사람의 온기가 남아 있던 집안은 이제 지구인들이 화성 인력권에 버리고 떠난 우주쓰레기처럼 차갑게 변해있었다.

“역시 안 왔네.”

겨울 방학이 시작된 지 이틀. 부모님은 봄이나 되어야 온다고 했으니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은 아직 한참이나 남은 셈이다. 나는 간단하게 밥을 차려 먹고 방의 이불을 갠 후에 비컴유로 들어갔다. 그래야 덜 심심하고 덜 외로우니까.

“제민이나 보러 가야지.”

여전히 평일 낮보다는 많지만, 어제보다는 적은 사람들. 그 사이에 목각 인형 아바타가 하나둘 보였다. 그제야 어제 만났던 뉴비가 떠올랐다. 자기가 지구 연합 출신이라고 말했던. 그 녀석이 또 와서 날 곤란하게 할까 봐 두려웠다. 친구 목록을 열어서 주욱 스크롤 했다. 접속 목록에 뜨는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제민 말고는 크게 눈에 띄는 이름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접속자 목록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반사적으로 죽죽 내리다가 딱 멈춰 섰다. 다른 휘황찬란한 아바타들과 너무 대비되는 목각 인형 아바타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닉네임 항목에 선샤인머스캣이라고 적혀 있었다. 분명 어제 본 그 애였다.

어제 나름 재미있게 논 것 같은데, 오늘 접속하지 않았다니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그래도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상대는 지구 연합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이상한 사람이니까.

나는 상념을 떨쳐 내고 제민이 있는 월드로 들어갔다. 곧이어 광장 월드가 입자 단위로 분해되더니, 자그마하고 어둑하니 아늑한 방 월드로 바뀌었다. 월드 중앙에는 화살표가 땅에 박혀 있었다. 딱 보니 진실 게임을 하던 중이었던 것 같았다. 나는 제민이 누구와 같이 진실 게임을 하는지 스윽 둘러보았다. 오른쪽에는 제민이, 반대편에는 목각 인형이 앉아 있었다. 고개를 돌리다 눈을 마주친 제민이 PC 유저 특유의 뻣뻣한 움직임으로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어? 형 왔어? 여기 해윤이도 와 있는데 잘됐다!”

제민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아직 아침인데 새 기기가 벌써 배송될 리가 없지. 이제야 어른들이 일하러 나갈 시간이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제민이 해윤이라고 말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급히 목각 인형의 프로필을 확인해 보니, 닉네임이 선샤인머스캣이었다. 정말 그 녀석이었다. 나는 급히 친구 목록을 열어 접속 상태로 뜨는 사람들을 확인해 보았는데, 거기에는 여전히 선샤인머스캣이라는 이름이 없었다. 나는 제민을 향해 따지듯 물었다.

“쟤한테 상태 표시 변경 기능 알려 줬어?”

“내가 알려 줬는데? 왜?”

제민은 잘못되기라도 했냐는 듯이 내게 물었다. 당연히 잘못되었다. 나는 저 지구 연합 사람이 없는 줄 알고 왔으니까. 하지만 이 자리에 지구 연합 사람이 있는 이상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을지 우물거리다가 결국 포기했다. 내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는 걸 확인한 제민이 다시 게임을 시작했다.

“자, 이번 질문은 왜 비컴유를 시작했는지.”

제민이 화살표를 누르자, 화살표는 빙글빙글 돌다가 목각 인형 앞에서 멈췄다. 목각 인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른세수했다. 나는 힘껏 인상을 쓰고서는 목각 인형을 노려봤다. 분명히 직접적으로 ‘화성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는 말은 못 할 테니 ‘국가를 위해서’나 ‘위대한 지도자를 위해서’ 같은 얘기를 하겠지.

“심심해서. 엄마 아빠는 맨날 집 밖으로 나가는데 난 못 나가거든.”

의외의 대답이었다. 지구 연합 사람들은 다 살인 기계 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사 선생님도 지구 연합이 역사적으로 화성을 향해 계속 미사일을 쏴 대는 제국주의적인 확장주의자 집단이라고 했고. 그래서 지구 연합 사람이라면 평소에도 그런 쪽으로만 궁리할 줄 알았다. 하지만 저 목각 인형이 비컴유를 시작한 건 너무 사적이고 소박한 이유 때문이었다.

“나랑 같네.”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나랑은 조금 다르긴 했다. 나는 집 밖에 나갈 수는 있지만, 쟤는 못 나가니까. 그런데 사실상 나도 못 나가는 거나 마찬가지긴 했다. 엄마 아빠가 출장 갈 때 준 돈은 항상 요리 재료를 사는 데만도 빠듯했으니까. 어쩌면 쟤가 거짓말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교과서도 뉴스도 지구인은 전부 나쁘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만약 쟤도 진짜 심심한 거라면…….

문득 해윤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왜 여기까지 왔는지, 친구가 생기면 뭘 하고 싶었는지도. 내가 현실에서 대단한 걸 해 줄 수는 없어도 비컴유 안에서만큼은 이것저것 해 줄 수 있으니까.

 

* * *

 

아침마다 만나서 잠들기 직전까지 함께 놀기를 며칠. 우리는 서로의 존재에 점점 익숙해졌다. 그래서 그런지 해윤도 점점 말이 많아졌다. 이대로라면 영원히 함께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이었다. 피크닉 월드에 서로 마주 앉아 평소처럼 얘기를 나누던 중에 해윤이 툭 질문을 던졌다.

“제민. 만약에 내가 화성 사람이 아니면 어떨 거 같아?”

제민은 별로 고민되지 않는 듯,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럼 그냥 그런 거지. 너가 수성에서 온 마녀든 금성에서 온 여자든 난 신경 안 써. 신혁이 형이랑 내가 사는 곳이 콜로니의 끝과 끝이어도 그냥 친구인 것처럼.”

“푸핫! 너 되게 단순하구나?”

“근데 그건 왜?”

“그게…… 나 지구 연합 사람이라서 원랜 이거 하면 안 되거든. 어제 엄마랑 아빠한테 들켜서 오늘이 마지막일 거 같아.”

그 말을 들은 제민은 말없이 팔을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표정을 보니 난감한 것 같았다. 분위기가 싸해지기 전에 내가 얼른 말을 받아 주었다.

“에이. 그런 건 상관없어. 네가 여기 들어오기만 한다면 우린 항상 기다릴 거야.”

제민은 내가 말하는 도중에도 계속 팔만 움직였다. 한동안 우리 셋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마침내 팔을 멈춘 제민이 입을 열었다.

“미안, 방송 끄고 영상 삭제하느라 대답을 못 했어.”

“뭐?”

나는 당황해서 소리쳤다. 아예 제민의 멱살을 잡고 왜 이걸 방송하고 있었냐고 따졌다. 그러자 제민이 변명하듯이 말했다.

“처음에 형한테 허락받았잖아. 영상 찍어도 된다길래 난 전부 공개해도 문제없을 줄 알고…….”

영상 찍는 것 자체는 나도 사실상 허락을 한 거나 마찬가지여서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한마디 말도 전하지 않고 방송까지 하다니, 순식간에 열이 뻗쳤다.

“실시간 방송 얘기는 없었잖아! 우리한테도 미리 얘기했어야지!”

그러자 제민도 꼬리를 내렸다. 적어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안……. 첫날 영상을 바로 편집해서 올렸는데 조회수가 너무 잘 나와서 둘째 날부터 계속 방송했어. 근데 솔직히 봐 봐. 재밌는 장면이 계속 나오고 채팅도 많이 올라오는데 그걸 포기하긴…….”

제민이 뭐라고 말을 이었지만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질 않았다. 방금 대화를 경찰이 본다면, 나와 제민은 꼼짝없이 잡혀갈 것이다. 아니, 적어도 나만큼은 확실히 잡혀가겠지. 지구 연합 사람을 기다리겠다고 얘기했으니까. 그리고 어두침침한 철창 안에서 철저하게 조사받게 될 거다. 풀려나온다고 해도 엄마랑 아빠가 이 사실을 알면 화낼 텐데.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나 때문이야. 내가 지구 연합 사람이라고 말만 안 했어도…….”

“아냐. 내 잘못이야. 모두에게 말 안 하고 몰래 방송했으니까.”

둘 다 점점 자책의 늪으로 빠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화라도 내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도 없었다.

“괜찮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며. 설마 별일이라도 있겠어.”

나는 방송 송출을 종료하고 영상도 삭제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말했다. 이걸 본 시청자들이 신고만 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 괜찮을 거다. 하지만 괜찮다는 말과는 달리 목이 탔다.

“나 물 좀 떠 올게.”

나는 VR 기어를 벗어서 바닥에 내려두었다. VR 기어에서는 여전히 해윤과 제민이 서로 끝없이 사과하는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애써 무시하며 방 밖으로 나온 나를 맞이한 것은 다름 아닌 경찰의 노크 소리였다.

 

* * *

 

경찰의 조사는 상상과 달랐다. 철창 안에서 조사하는 대신 한쪽 면에 거대한 거울이 달린 작은 방에 데려갔다. 조명은 생각보다도 밝았고, 앞에 앉은 형사의 얼굴은 옆집 아저씨처럼 순해 보였다. 하지만 경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인상과도 목소리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지구 연합 여자애가 너한테 간첩 지령을 내렸다고 말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만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풀어 줄 수 있어. 어떻게 할래?”

“저는 그냥 해윤이랑 같이 놀기만 했어요! 진짜로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경찰의 제안에 살짝 혹했다. 하지만 그렇게 얘기하면 감옥에 안 갈 수 있나? 그 점이 의문스러웠다. 경찰을 믿어도 되는 걸까? 어쩌면 나만 감옥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윤은 어쨌건 지구 연합에선 중요한 사람의 딸이니까. 반면에 나는 그냥 화성의 평범한 중학생. 누가 봐도 내가 불리하다. 나한텐 힘이 없다.

“좋게 끝낼 마지막 기회야. 너는 지구 연합 꼬마에게 간첩 지령을 받았어. 맞지?”

경찰이 약속을 지킨다고 해도 별로 좋을 것 같지 않았다. 내가 풀려난다고 해도 해윤은 경찰에게 잡혀가겠지. 그냥 심심해서 나랑 제민이랑 논 것뿐인데. 어쩌면 비컴유 자체를 없애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면 경찰에게 안 잡혀간다고 해도 다시는 셋이 놀지 못할 거고. 결국 나는 조사 내내 고민만 하다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늦게 말한 만큼 감옥에 오래 있게 될 거야. 그러니까 생각 바뀌면 말하라고.”

경찰은 그렇게 말한 후에 나를 유치장에 집어넣었다. 아직 간첩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나는 유치장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탈출 방법도, 셋 모두가 결백하다고 납득시킬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 경찰서가 소란스러워졌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아저씨가 짜증을 냈다.

“에이씨, 조금만 있으면 잘 시간인데 왜 이리 시끄러운 거야.”

“다들 제대로 앉아 계세요. 지금 요 앞에 대통령 후보들 와 있으니까.”

경찰이 철창 앞을 지나가며 외쳤다. 누군가가 대통령 후보와 인맥이라도 있난 싶었는데 철창문이 열리더니 경찰이 나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거기 꼬맹이 나와. 너 같이 반항적인 녀석은 원래 종신형이 딱인데. 운 좋은 줄 알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경찰서 밖으로 나오니 더 신기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작은 주차장이었던 곳에 임시 천막이 세워진 데다가, 그 안에 서 있는 세 사람이 각자 마이크를 들고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는 카메라맨과 기자가 얽혀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양팔을 잡은 경찰들은 나를 그쪽으로 이끌더니 세 사람 앞에다 세워놓았다. 이어서 그들이 옆으로 빠지자, 후보들이 각자 팔을 뻗어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마치 움직이지 말라는 듯이 셋 모두가 강한 힘으로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그러자 카메라의 플래시가 더욱 열렬하게 터져 나왔다. 눈이 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한 차례의 플래시 세례가 끝나자 이번엔 기자들이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번 훈방 조치에는 지구 연합에 강경한 태도를 보이셨던 기해만 후보까지도 협력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옆에서 경찰이 튀어나와 나를 임시 천막 구석으로 구겨 넣었다. 그러더니 내가 서 있던 자리로 늑대처럼 사나운 얼굴을 한 남자가 한발짝 나와 말을 이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목소리였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 언제나 중요한 건 계기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서로 반목하기는 했지만, 아이들의 우정에는 국경이 없지요. 원래라면 엄중 처벌을 해야 하는 사안이지만, 이 건에 대해 우리가 먼저 베푸는 자세를 취함으로써 신흥 강대국의 면모를 보여 주고…….”

남자는 말을 막힘없이 해 나갔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은 거의 없었다. 나한테는 빨리 비컴유로 돌아가서 제민과 해윤이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경찰들이 한눈파는 사이에 카메라맨들을 비집고 나가 집으로 도망치는 걸 택했다. 한참을 달렸지만, 다들 정치인의 연설에 정신이 팔렸는지 아무도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 * *

 

집은 내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기 직전의 상태 그대로였다. 어떻게든 돌아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들키지만 않으면 엄마랑 아빠에게 덜 혼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벗어 두었던 VR 기어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혹시나 해서 바로 착용해 봤더니 아직도 나의 아바타는 피크닉 월드의 돗자리 위에 남겨져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려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제민과 해윤 대신에 수많은 사람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어서 광장으로 가!”

“다들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나는 사람들이 말한 대로 광장으로 가는 포탈을 열었다. 그런데 광장에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달랐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 정도로 광장이 가득 찬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물어보려고 바로 앞에 있던 사람에게 말을 걸었더니, 나를 향해 감격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외쳤다.

“뉴스에 나온 애야! 무대 위로 보내!”

“우리가 한 시위가 효과가 있었어!”

“셋이 예쁜 사랑 해!”

수많은 사람이 나를 연단 쪽으로 이끌며 한마디씩 얹었다. 사람들이 한 말들을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맞춰보고서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은 우리 셋을 위해 모인 게 분명했다. 그리고 여기서 시위를 한 덕분에 내가 풀려난 모양이다. 하지만 이 말만큼은 반박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 사랑은 아닌데요!”

크고 작은 로봇, 수인, 사람, 그리고 동물들까지. 정말 각양각색의 아바타를 지나 무대 위로 올라가 보니, 제민이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파도에 휩쓸리듯 도착한 나에게 제민이 다가오자, 나는 작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러자 제민은 눈을 찡긋해 보이며 장난스럽게 얘기했다.

“내가 말했잖아. 인기 많다고. 다 우리 팬이야. 형이 경찰한테 잡혀가는 소리를 듣자마자 내가 유토피아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여기서 형을 풀어 달라고 외치기 시작했고. 그러니까 정치인들이 관심 가지기 시작하더니 짜잔! 형이 풀려난 거지!”

그런데 어디에도 해윤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해윤이는?”

그러자 제민은 웃으며 말했다.

“형이라면 안 보이는 사람부터 걱정할 줄 알았어. 걱정하지 마. 지금 우리 팬한테 새 아바타 받으러 잠깐 사라진 거니까.”

곧이어 수현이 다가오더니 해윤을 불러 보라며 나를 무대 가운데로 데려왔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쉰 후에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우해윤!”

그러자, 때맞춰 월드에 가득한 인파를 헤집고 누군가가 무대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갈색 털을 가진 늑대 수인 아바타였다. 심지어는 방송국 로고가 달린 아바타까지 주변에 여럿 날아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 정도로 우리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나 싶어 놀라던 그때, 제민이 말했다.

“응? 저 사람은 누군데 여기로 오는 거지?”

뭔가 이상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수인에게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났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지구 연합과 상호 호혜적인 관계를 구축해 나가기 위해 선제적으로…… 크흠.”

어려운 말을 쏟아내던 갈색 늑대 수인이 갑자기 설정 패널을 여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아바타를 바꿨다. 그러자 놀랍게도 방금 경찰서 앞에서 봤던 차기 대통령 후보 중 하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제민도 놀랐는지 나를 향해 물었다.

“설마…… 아까 뉴스에 나오던 사람 아니야? 도대체 왜?”

그러나 내가 답하기도 전에 제민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더니 도망가 버렸다. 수현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방송국 로고가 새겨진 아바타들을 잔뜩 끌고 나타난 사람은 자연스럽게 무대 위로 올라오더니 자신이 이번 대통령 후보 중 하나인 기해만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말을 이었다. 아까도 나를 들러리처럼 쓰더니 이번에도 그러려는 모양이었다. 그는 마치 내가 하나의 상징물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내 주변을 빙빙 돌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므로 기존의 분리주의 노선에서 벗어나고, 소통의 장을 마련해서….”

길어져만 가는 연설에 사람들의 열광과 환호도 어느새 다 사라져 가고 있었다. 옆을 바라보니 기해만의 연설은 아직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저 멀리서 무언가를 꺼내 드는 제민이 얼핏 보였다.

“그러니까….”

그리고 1초도 되지 않는 사이에, 기해만의 아바타가 사라져 버렸다. 한창 연설 중이던 대통령 후보가 갑작스레 사라지자, 광장에 있던 모두가 술렁거렸다. 하지만 나는 놀란 것보다 드디어 해방되었다는 기쁨이 더욱 컸다. 나는 조그맣게 외쳤다.

“나이스!”

그리고 발걸음을 성큼 옮겨 무대에서 뛰어내렸다. 월드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 전부가 나에게 쏠렸다. 열심히 달려가 도착한 광장의 한구석에는 제민이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넣은 채 데스건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그 사람, VR 기어도 파괴되어서 당분간 못 들어올 거야. 수현에게 받은 걸로 쐈거든.”

“야, 손해 배상이라도 하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내가 선물 받은 거라도 주지 뭐.”

제민은 자신의 머리 부분을 툭툭 치더니 달리 방법이 있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데 제민의 옆에는 낯선 주황색 고양이 수인이 착 달라붙어 있었다. 수현의 지인인가 싶어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그동안 만났던 수현의 지인 중에는 이런 아바타를 쓰는 사람이 없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제민이 주황색 고양이 수인에게 말했다.

“미리 듣긴 했는데 너 좀 아바타가 낯설다? 그래도 진짜 샤인머스캣 아바타는 아니라서 다행이네.”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본 주황 고양이 수인이 입꼬리를 씰룩거리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푸핫! 나야 나. 나 비컴유 계속해도 된대! 엄마가 화성 대통령도 허락했다고 말했어!”

익숙한 웃음소리였다. 이제야 알아차린 게 민망할 정도로. 나는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아, 뭐야. 해윤이었어? 아바타는?”

“수현 언니가 선물해줬어.”

나는 반갑고 또 고마운 마음에 둘을 꼭 안아 주었다. 눈을 감자 우리의 재회를 축하하는 환호성이 귀를 가득 메웠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슨 무슨 법이 바뀌었다고 뉴스에서 연일 속보를 내보냈다. 들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이제는 화성인도 돈만 있으면 지구로 여행을 갈 수도 있다고 한다. 역사 교과서 내용도 좀 달라진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게 데스건 혁명 때문에 바뀐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건 어찌 돼도 상관이 없었다.

나는 우리 셋이 비컴유에서 재밌게 놀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빌린

책에서, 영화에서, 게임에서, 일상생활에서 빌려 글을 쓰는 '빌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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