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어떤 이별

2024.01.31 21:0601.31

“나는 열아홉까지 살 수 있대.”

 

이 대화는 평소와 다름없던 하교길에서,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나뭇잎을 고개를 한껏 젖혀 쳐다보면서 걷던 도중에 이루어졌다. 유미의 말에 규칙적으로 흩날리다가 조금씩 규칙이 흐트리는 나뭇잎 하나를 눈으로 쫓는 일을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난데없는 말에 이유를 묻기까지도 다소 시간이 걸렸다. 저 아이가 조금 전 뱉은 말을 곱씹어야 했고, 열아홉까지 살 수 있다는 말을 내뱉는 열아홉의 유미가 이해되지 않으므로.

 

“애초에 그렇게 태어난 존재니까.”

“응?”

“라고 말했어. 나는 어떤 존재였던 걸까.”

 

가뜩이나 복잡한 머리에 자신의 의문까지 덧대는 유미의 얼굴은 뭐랄까… 이상하리만큼 편안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모든 일과를 마무리한 뒤, 샤워를 끝내고 침대에 누워 어제 읽던 소설책을 꺼내 들었을 때, 미뤄뒀던 방 청소를 끝냈을 때, 걱정하던 시험이 끝났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반대로 내 표정은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구겨져 있을 것이 뻔했다. 사실은 조금 전부터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소리 내어 말하는 방법을 까먹은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가 닫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 결국 포기했다. 마땅히 대답을 바라고 같았기에 대답하는 것을 보류하고 대신 정돈되지 않은 말들이 당장이고 튀어나올 것 같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저 분석하기 애매하게 덧붙여진 ‘라고 말했어’ 는 또 뭐란 말인가. 저 아이는 편안함에 머무는데 왜 나는 답답함에 물들어가야만 하는 걸까. 걸음은 느려졌고 생각은 머릿속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유미는 열아홉까지 살 수 있다.

애초에 그렇게 태어난 존재.

어떤 존재인 걸까.

 

조금이라도 부딪히는 순간 와르르 쓰러지는 도미노 사이를 걷는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뻗었고 아마 그 쯤에서 유미에게 말했을 것이다.

 

“아니야, 너는 그것보다 더 오래 살지. 애초에 그게 정해진 사람이 어디 있어.”

 

유미는 대답을 침묵으로 대신했다. 그런 말들이 있다. 머릿속에서 아무리 굴려봐도 정리되지 않았으나 입 밖으로, 목소리로 내뱉는 순간 정리되는 말들이. 이를테면 지금처럼. 조금 전부터 느낀 이 답답함의 그림자는 부정이었다. 유미가 죽지 않았으면 하는. 설령 그게 장난일지라도. 같은 반 반장 윤희는 죽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지만, 도피가 설정 값이었으니 그런 말을 해도 죽지 않을 것을 알았다. 하지만 유미는 달랐다. 저런 형태의 말을 뱉은 건 처음이었으니 더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지금 이 모습을 윤희가 봤다면, 유미의 말을 내가 아닌 윤희가 들었다면 ‘그럼 나는 너보다 일찍 이 세상을 떠나줄게!’ 라며 대수롭지 않게 듣고 흘렸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유미가 도피처럼 저 말을 뱉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안타깝게도 나는 윤희가 아니었고, 유미 또한 윤희가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쉽게 이 주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너 어디 아파?”

“아니.”

“그럼 요즘 힘들어?”

“아니.”

 

아무리 추측해봐도 답이 안 나오는 상황에 말없이 눈만 이리저리 굴려보던 찰나였다. 유미는 일정한 속도로 걷고 있으나 옆에 서 있던 나는 걸음을 느리게 옮겼더니 조금씩 벌어지던 거리는 어느덧 뛰지 않으면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 뒤따라 가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뒷모습을 가만 보고 있으니 조금 치사하게 느껴졌다. 내가 너라면 뒤따라 오지 않는 것도, 장난인지 뭔지 모를 말장난에 왠지 모를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것조차도 알아차렸을 텐데. 치사하다. 아무것도 모를 거면 옆에 있는 나도 아무것도 모르게끔 해주지. 상대가 너무 치사해서 눈물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어쩜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 나를 혼란에 빠트려 놓고는.

 

“야.”

 

유미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나와 눈을 마주했다.

 

“너는 왜 그렇게 슬픈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

 

네가 아무렇지 않아서 지금 내가 이상해지잖아.

 

 

 

*

 

 

 

이상한 건 유미가 맞다. 집 오는 내내 마치 옆에 유미가 없는 것처럼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말 한마디 걸지 않았지만 유미는 꿋꿋하게 우리 집 앞까지 걸어왔고, 뒤돌아 눈으로 확인해보지 않았으나 분명 내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을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슬픔이 짙어지니 괜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와 가방 정리를 하다 깊숙한 곳에 있던 체육복을 꺼내 들었다. 세탁물을 모아둔 통에 넣으려다 뜬금없이 유미와의 일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체육복 상의에 가려져 있던 유미의 배.

 

“넌 왜 이거 없어?”

 

여기서 말하는‘이거’는 다름 아닌 배꼽이다. 일부러 보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체육 시간 전 같이 체육복을 갈아입던 도중에 언뜻 봤던 유미의 배에는 구멍이 없었다. 그 말에 자신의 배를 쳐다보는 유미였는데 도통 이해를 못 한 눈치이기에 나는 살짝 옷을 들추어 배꼽을 들여 보였다. 이거 말이야. 배에 난 구멍.

 

“그게 있으면 좋아?”

“없어봐서 모르겠는데.”

 

아, 그럼 쟤는 있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구나.

 

들췄던 옷을 바로 하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근데 이게 그럴 수도 있나? 마음 같아선 반 아이들의 배를 까보고 싶었다. 명치 위에 손가락 하나를 올려두고 그곳을 시작으로 곧게 주욱 내려오다 보면 움푹 파인 틈을 파고든 손가락에 의해 주름지는 옷. 그 주름들을 보며 구멍을 메꾸는 상상을 했다. 상상이 도중에 멈추었던 건 유미의 팔이 주인 없는 책상 위로 뻗어 나갈 때였다.

 

예상컨대 유미는 반대의 상상을 했을 것이다. 구멍을 뚫는 상상. 돌연 가위를 잡았고 그대로 팔을 높이 들었으므로. 다급히 유미의 팔을 붙잡았다. 지금 뭘 하려던 거였냐며 묻는 목소리가 떨려왔다. 유미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어떤 상황이 일어났을지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있던 언니의 옷을 까뒤집었던 것은 다소 충동적이기도 했다. 처음에 언니는 미쳤냐며 몸부림을 치며 소리 질렀지만 그 외에 별다른 행동 없이 오로지 배꼽만을 들여다보고 있는 행동에 머쓱하단 듯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히 뭐 하는 거냐고 물어왔다.

 

감정을 문장으로 표현하고자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역동적으로 말했더니 역효과가 난 것인지 이미 반쯤 몸을 침대에 누운 언니는 이미 흥미를 잃은 듯했다. 말이 끝났음에도 뒤따라오지 않는 대답으로 알 수 있었다. 한숨처럼 언니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언니는 자신의 옷을 젖히며 "이 배꼽?" 하고 물었다.

 

“뱃속에 두고 온 거 아니야?”

“그런 사람이 있어? 언닌 봤어?”

“응. 아 넌 아직 어려서 못 봤겠구나.”

 

고작 세 살 차이 나는 언니는 이럴 때마다 어른인 척을 했다. 가끔은 출처 없는 여유로움이 해답이 될 때가 있었으므로 기꺼이 받아주기로 하고 언니가 말하는 배꼽 없는 사람에 대해 들었다. 그냥 구멍 하나가 빠진 것 같았는데 그게 오히려 매끈해 보였다며 조금 더 크면 배꼽을 메꾸러 가자는 말을 꽤 진지하게 했다. 사실은 자신의 헛소리를 제법 진지하게 듣는 내가 웃겨서 거짓말을 진실처럼 말했다는 것을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내 친구는 목소리도 거기에 두고 왔는데, 그깟 배꼽 쯤이야.”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린 언니는 대뜸 팔을 뻗어 내 옷을 들추더니 부끄러울 정도로 빤히 쳐다보다 옷을 내려주고는 결론을 내린 사람처럼 말했다.

 

“무엇보다 너처럼 못생긴 배꼽이면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저 언니가 진짜.

 

시간이 흘러 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느냐며 따져 묻는 것 또한 나중의 일이지만 아무튼 언니는 선의의 거짓말이라며 둘러댔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언니의 거짓말로 몇 날 며칠 앓았을 고민이 단숨에 사라졌고, 당일 날 고민이 없어 개운하게 자고 일어난 것 또한 사실이었으니.

 

유미에게는 배꼽이 없다.

잠에 들기 직전까지도 손가락으로 배꼽 부근을 간지럽히다 맡아본 손가락은 잠이 깰 법한 냄새가 났다. 이런 시큼한 냄새가 나는 구멍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도 나을 것 같았다. 언니의 말처럼 그다지 예쁜 구멍 같지도 않고.

 

그리고 다음 날, 만난 유미에게 말했다. 구멍이 나지 않는 네 배가 부럽다고.

그때 유미는 이렇게 대답했다.

 

넌 좀 이상해.

 

웃음이 은은하게 퍼진 얼굴로.

 

 

 

*

 

 

 

유미의 결석은 일주일 하고 4일이 더 지났다. 반 아이 중 한 명이 ‘근데 유미는요? 유미는 오늘도 안 와요?’ 하고 선생님에게 물어봤을 때 근처에 앉아있던 윤희가 나를 쳐다봤고, 그 시선을 은근슬쩍 피할 수밖에 없었다. 마주친 눈빛이 꼭 유미의 행방을 묻는 것만 같았고, 괜히 순서를 빼앗긴 기분이 들었으므로. 선생님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자신도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오늘처럼 나에게도 유미의 부재에 관해 물어볼 시간은 충분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것은 윤희가 자연스레 나를 쳐다봤던 것처럼 유미는 직접적으로 보이진 않지만 유미는 나와 연관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유미의 부재를 묻는다면 그건 우리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과도 같아서 꾹 참았다. 어쩌면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도. 윤희는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유미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 “유미는?” 하고 물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너희 싸웠어?”

“아니.”

“싸웠네”

“아니라니까!”

 

본의 아니게 커진 언성에 주변에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내게 잠시 머물렀다가 눈치를 살피며 공중에서 흩어졌다. 격한 부정은 오히려 긍정이라는 듯 윤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싸웠구나. 왜?”

 

들키지 않으려고 웅크리고 있었는데 다들 내 속도 모르고 자꾸만 파고든다.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마구 들쑤신다. 이제는 좀 서러울 지경이었다. 유미가 학교를 나오지 않는 동안 나는 할 수 있는 연락은 다 해봤으나 일방적으로 상대가 피하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열아홉까지 살아도 되니까 이걸 본다면 연락 좀 달라는 메시지는 남겼다. 화면을 꾹꾹 눌러가며 그 문장을 완성하던 순간을 떠올리자니 자꾸만 마음이 답답해져 왔고, 당장 눈앞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윤희가 앉아있었다. 뭐라고 떠드는지 상대방은 듣지도 않는데 미주알고주알 떠들고 있는 아이가. 이 마음을 좀 눌러보고자 윤희를 불렀다.

 

“내가 ‘나는 열아홉까지 살 수 있어.’ 라고 말했어. 그럼 넌 뭐라고 대답할 거야?”

 

눈만 깜빡이는 윤희의 표정을 마주하자니 조금 전 내가 무슨 말을 뱉었나 싶었다. 그래, 한 마디로 아차 싶었다는 소리다. 생각보다 빠르게 대답할 줄 알았던 윤희는 예상외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했다. 중간중간 만 나이로 측정하는 건지, 더 살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없는 건지 이것저것 물어 대다가 기어코 복제 인간을 남겨두고 죽는 가능성에 대해 물었을 때는 대답 듣는 것을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뜩이나 복잡한 머리에 윤희의 헛소리까지 담아낼 공간이 되지 못했으므로. 애초에 대상을 잘못 고른 것 같기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고민 중인 윤희를 뒤로 한 채 교실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윤희가 지수야 하고 이름을 불렀다. 그 덕에 몸이 어정쩡하게 공중에 멈췄다.

 

“만나서 반가웠어.”

 

다시 마주한 윤희의 얼굴에는 장난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라고 말할 것 같아 나는.”

 

조금 전까지 진지하게 대답해주던 모습은 빠르게 휘발되고 이런 건 왜 물어보느냐고 소름 돋는다며 온몸을 부르르 떨던 윤희였지만 행동과 달리 어떤 이유로 물었는지 추궁하지는 않았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사소한 것도 이유를 알려고 들었다면 못 이기는 척 유미와 나의 이야기가 아닌 척,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인 척 말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필 오늘 윤희는 다가가는 법보다 기다리는 법을 택했다. 무엇보다 윤희라면 이런 상황에서 장난을 쳐 상황을 무마할 줄 알았는데 줄곧 생각해왔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라 좀 놀라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가 다른 친구의 부름에 그곳으로 향하는 윤희의 뒷모습은 평소와 달라 보였다. 멀어지는 윤희의 뒷모습을 쳐다볼 뿐이었다. 만나서 반가웠다는 인사를 건넬 수 있도록 자신에게 미리 말해줘서 고맙다고 덧붙일 거란 윤희의 말이 돌림 노래처럼 계속해 귓가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나는 절대 저 아이가 될 수 없겠구나.

 

종일 멍하게 있던 나를 깨운 건 하교 하려고 나선 교실 앞에서 마주친 윤희였다. 사실 마주쳤다고 하기보다는 앞을 막아 세웠지. 자신을 지나쳐 갈 수 없도록.

 

“너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자.”

 

문장에 단호함과 비장함이 느껴졌다. 물음이 아니라 같이 가야만 한다는 말에 선뜻 거부하지 못하고 윤희와 동행했다. 끝없이 머리로는 유미를 떠올리면서.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윤희는 어디로 가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한 발자국 뒤에서 꼭 움켜쥔 윤희의 오른손을 보며 걸을 뿐이었다. 학교 안을 벗어나지 않았으므로 우리의 도착지는 예상 범주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얼마 가지 못했다. 3층에 머물던 우리가 학생은 출입하지 못한다는 경고문이 붙여진 지하 3층까지 도달했을 때“너 뭐해?” 하고 물었다. 교칙을 어기는 건 예상하지 못했으므로. 끝없이 걷던 윤희가 뒤돌았고 그제야 제대로 마주했다.

 

“우리 1학년 때 온클 들었잖아. 그거 담당하던 사람이 2학년 때 우리 반 선생이었거든. 귀찮음이 많은 사람이라 아직 없애지 않고 가지고 있더라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학생마다 노트북이나 패드에 충전기처럼 꽂을 수 있는 칩을 준다. 그 칩을 연결시키면 조금 전 윤희가 말했던 온클을 들을 수 있다. 온클은 온라인 클래스를 줄인 말인데 말 그대로 인터넷을 통한 화상 수업이라 생각하면 된다. 모든 학생이 똑같은 수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수업을 선택해 직접 시간표를 짜고 수업마다 정해진 시간에 화상 수업을 듣는 것이다. 그렇게 온라인 클래스로 1년을 듣고 2학년부터 대면 수업을 하는 형식이었다. 물론 비용도 비용이겠지만 몇몇 학생들이 장난이나 호기심으로, 다른 학교 측에서 정보를 빼낼 목적으로 서버 자체를 해킹하는 사례가 많아 우리 학년을 마지막으로 칩을 모두 회수한 뒤 온클 수업을 폐지했지만 말이다.

 

“갑자기 그게 왜.”

“그래서 내가 털어왔어. 유미 거야.”

 

조금 전부터 꼭 쥐고 있던 주먹을 펴자 손바닥에는 칩이 있었다. 그리고 칩에 써진 규칙 없는 숫자와 알파벳들은 유미의 코드이리라. 한마디로 윤희는 유미의 정보를 털어왔다는 소리다.

 

“이걸로 우리가 뭘 할 수 있는데?”

“몰라. 그냥 너한테 필요해 보였어. 복도 제일 끝에 있는 방이 영사실이야. 그곳에서 이 칩에 대한 정보를 열람할 수 있어. 나도 제대로 알진 못하지만, 간단한 인적 사항 정도는 알 수 있을 거야.”

 

출입 제한 구역과 손에 쥐어진 칩. 이 사이에서 우습게도 갈등 했다. 윤희의 말대로 이 칩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을지 아무도 모르니까. 이렇게 마음대로 알아내도 되는 건가 싶기도 했고. 어쩌면 유미에 대해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을 허락도 없이 봐도 되는가 하는 일말의 양심이었을 거다. 고민하던 찰나에 윤희가 어서 가라는 듯 손짓했다. 당장의 눈앞에 윤희가 있어 다행이었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지하 3층으로 걸어갔다.

 

열람실에 도착했을 때 느낀 기분은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았다. 아주 큰 유리창 너머로 메인 모니터 한 대와 그 아래에 보조 모니터가 8대 정도 놓여 있고, 책상에는 마우스와 키보드가, 그리고 작은 의자 하나가 있었다. 문득 유미와 같이 봤던 우주 공학 영화에서 주인공이 우주에 버려져 있던 우주선을 찾아 그곳에 처음 들어섰던 장면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누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아 고요히 잠든 공간. 홀린 듯이 공간을 훑어보다가 움켜쥔 칩이 아니었더라면 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정신을 끌어와 칩을 부착할 수 있는 구멍을 찾아 헤매다가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구멍 하나를 찾았고,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기구나. 먼지를 털어내고 칩을 넣자 꺼져 있던 모니터가 왼쪽부터 낡은 기계 소리를 내며 켜지기 시작했다. 칩 안에 있는 데이터를 불러오는 듯 검은 화면이 약간의 회색빛으로 변하더니 순식간에 흰 배경을 비추어 영사실이 환하게 밝아졌다. 숫자와 알파벳이 화면 가득히 채워지다 유미의 이름이 뜨고, 유미의 집으로 추정되는 위치가 뜨고, 수많은 자료가 뜨더니 별안간 저절로 모니터가 꺼졌다. 모니터가 꺼지면서 밝았던 공간은 다시금 어둠이 찾아왔다. 당황하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버튼을 꾹꾹 눌러댔다. 도중에 유리창을 쿵쿵 쳐보기도 하고. 피웁, 칩이 장치에서 분리되는 소리가 났다. 꼭 기계가 칩을 튕겨내는 것 같았다. 이 칩을 통해 뭘 알아내려던 것은 아니었으므로, 칩을 챙겨 돌아갈 생각이었다. 허무함과 동시에 불빛 하나 들지 않는 곳에 혼자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으려니 괜한 서늘함이 느껴졌다. 겁 없이 이곳으로 향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양새였다. 칩을 챙겨 영사실을 나가려던 찰나였다.

 

지이이잉-

 

제일 구석에 있던 모니터의 화면이 밝아지더니 작동이 되는 듯한 소리가 울렸고, 별안간 화면 안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몸을 돌려 유리창을 향했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거의 코를 박다시피 유리창과 가까이 다가가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유리에 맞닿아 되돌아오는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지금과는 다른 유미의 얼굴이다. 지금보다 키도 작고, 머리카락도 짧은 걸 보니 몇 년 전의 유미일 테다. 유미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웃었다. 화면이 한 번 검게 물들어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화면 속 유미와 닮은 얼굴이었다. 오래된 기계가 잔 고장을 일으켜서 생긴 단순한 오류. 하지만 다시 한번 모니터가 켜지고 나온 영상은 나를 고장 냈다.

 

 

「 당신의 아이는 인지 능력이 갖추어졌을 때 보존된 데이터를 주입 받게 됩니다. 현재로서 예측되는 수명은 16년, 16년입니다. 수명이 연장될 확률, 45%입니다. 」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주 작은 쌀알 같은 것이 작게 빛나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루에 차곡차곡 누적된 의문들이 결국엔 피로를 만들어냈다. 걸어온 길을 뒤 돌아보면 곳곳에 고단함이 묻어있을 것만 같았다. 정리되지 않은 것들을 한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제일 먼저 보인 건 소파 위에 앉아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으로는 휴지를 쥐고 무릎 위에 올려둔 옷을 벅벅 문지르고 있는 언니가 보였다. 나 왔어. 했더니 상대가 누군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 어, 왔어? 늦었네. 라는 형식적인 대답을 하는 언니였다. 그러려니 하고 곧장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언니의 옷이 시선을 끌었다.

 

“언니 그거 뭐야?”

 

누가 봐도 피 같아서. 빠르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눈에 띄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언니는 그제야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아니 글쎄 연이가…

 

연이. 이름에는 잊고 있던 것들을 떠오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니 언니의 친구 중 연이라는 친구는 태생적으로 청각과 구각이 약하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언니를 만나러 오던 연이 언니는 공사 중인 길 앞을 걸어왔다고 했다. 바로 옆에서 포크레인이 바닥을 뚫는 진동이 발바닥에서 느껴졌지만 늘 있는 일이었으므로 별생각이 없었댔다. 이번에 새로 생긴 위험 감지 로봇은 공사장마다 설치하는 것이 의무였는데 보통의 사람은 그 로봇이 앞에 있는 공사장이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최대한 돌아가는 편이라고 했다. 분명 연이 언니 또한 로봇을 봤으나 연이 그저 공사에 필요한 도구인 줄 알고 지나쳤다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알아서 피해갔던 길이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연이 언니는 그 길 위에 올랐고 한 다섯 발걸음 걸어 나갔을 때 5cm 정도 바닥이 푹 꺼져 무릎이 다쳐 급한대로 언니가 연이 언니를 업고 병원을 갔다 왔다고 했다.

 

“좀 비겁하지 않냐.”

 

언니는 신경질적으로 휴지를 던지고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가끔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처럼 느린 척하잖아. 그래 놓고 맨날 따라갈 수 없게 바뀌어서 뒤통수 쳐.”

 

그래서 현재 언니는 수화를 배우는 중이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는. 어깨 너머로 봤을 때 사이트에 동영상이 올라온 날도 기록 상 2012년이다. 무려 지금부터 20년도 더 된 영상이라는 소리다. 언니의 말대로 비겁하긴 했다. 따라올 수 없다면 따라오지 말라는 듯이 툭 잘라낸 것 같았다. 물론 세상이 잘라냈더라도 언제든 따라올 수 있도록 이음새를 만들던 사람이 있었을 거라는 믿음 또한 버리진 않는다. 하지만 상대가 세상이라, 끝끝내 끝없이 벌어지는 틈을 메꿀 순 없었겠지.

 

“언니. 나도 알려줘.”

“너는 왜?”

“그냥 알아두면 좋겠지. 그리고 뭐든 같이 해야 빨리 늘어.”

 

이왕이면 이음새를 만드는 쪽에 속하고 싶어서. 친구가 자신의 언어를 배워 달라 부탁한 것은 아니지만 친구와 계속해 이어지고 싶어서 남들과는 다른 언어를 배우고 있는 언니처럼.

 

“알아두고 싶은 문장이라도 있어? 말해봐. 내가 알려줄게.”

 

이 언니는 대체 무슨 문장을 말할 줄 알고 이렇게 기세등등한지 모르겠지만 뭐라도 알려주고 하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어려운 문장을 뱉을 순 없었다. 간단한 인사 정도를 말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타이밍 맞게 윤희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만나서 반가웠어.”

“그래.”

“할 줄 알아?”

“아니? 못하지. 앞에 빼고 뒤에만 알려줄게.”

 

뭘 또 이렇게 당당하게 말해.

헛웃음을 겨우 억누르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언니의 손가락을 쫓았다. 조금이라도 따라 하려고 하면 이게 아닌데, 하면서 다시 알려주기 급급했던 언니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 것들을 따라 하자니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타이밍 좋게 울린 초인종이었고, 나는 그것을 핑계 삼아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누구세요? 하고 외쳐도 상대방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으므로 며칠 전부터 작동이 되었다가 되지 않았다가를 반복하던 인터폰이 기어코 고장난 것이라 생각했다. 현관문을 열고 밖의 사람과 마주했다. 누구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물었다. “이지수 학생 되시나요?” 하고.

 

“같이 가줘?”

 

옷을 갈아입으려고 방에 들어왔더니 뒤따라 들어온 언니가 묻는다.

 

“아니. 혼자 다녀올게.”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 유미가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

 

 

 

앞으로 한 시간 동안 지수 학생이 듣고 말하는 것들이 녹음 될 거예요. 감시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보호하는 거죠. 지수 학생과 다른 모든 것들을요.

 

 

이 목소리는. 기억은 머리가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하는 건지, 몸이 먼저 반응했다. 어디선가 들었던 목소리다. 어디서 들었더라…

 

현재로서 예측되는 수명은 16년, 16년입니다.

 

영사실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너무도 유사했다. 고로 이 사람은 알고 있다. 유미가 어떤 존재인지.

 

“유미의 정보를 오늘 오후 누군가 열람했더라고요.”

 

저 말의 의도는 그 사람이 누군지 묻는 듯했으나, 상대는 이미 그 ‘누군가’가 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알게 된 사실이 있는 표정이네요.”

 

뒤따라 온 질문은 조금 전 의심에 확신이 들게 만들었다. 물론 상대 또한 확신이 있었으므로 나는 궁지에 내몰린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니라고 하기엔 마땅한 변명거리가 없었고, 내가 맞다고 하기엔 이 이후의 상황이 잘 상상되지 않았다. 결국 한참을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음성 하나를 들었어요.‘예측되는 수명’에 대해서요. 그 다음은 듣지 못했어요. 사실 이걸 들으려던 생각은 아니었고 오래 작동되지 않은 기계가 오류를 낸 것 같아요. ”

 

서로 가지고 있던 말을 털어놓자 그것이 신호탄이 되었다. 유미는 인공 배아로 태어났다. 사람의 자궁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든 자궁 속에서 크고 자랐다. 그렇게 태어나 지금의 유미가 있다. 유미는 수많은 감시를 받으며 자신이 하는 말과 듣는 말이 데이터로 남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유미를 찾아내 인체 실험을 하고자 하기에 보호였다고 했다. 유미에게 있어서 가장 많은 데이터가 측정되는 단어는 총 네 개 였다. 나, 우리, 너, 지수. 분명 저 네 개 말고도 수많은 단어가 있을 텐데.

 

“16년까지 살 수 있던 수명이 45 퍼센트의 확률로 연장되었잖아요. 그럼 앞으로도 그렇게 더 살 수 있는 거 아니에요? 한 번 늘어갔으니 퍼센트는 점점 내려가야죠. 자꾸 걔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더이상 살 수 없다는 듯이 말하지 마세요.”

 

꾹 눌러왔던 것들이 펑-하고 퍼지며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중 한 음절 정도는 저 사람에게 맺히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일부러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었다. 그 모습이 저 사람의 눈에 우습게 보일진 몰라도.

 

“45퍼센트도 기적이었죠. 애초에 그렇게 태어난 아이인 걸요. 누군가를 탓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어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허락도 없이 대화를 끝 맺었다. 나는 유미가 더 살 수 없다는 말을 들으러 같이 동행 하겠다던 언니를 마다하고 이곳까지 홀로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저는 유미를 만나러 왔어요.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앞에 있는 로봇을 따라가세요. 그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잔잔한 기계음을 내며 일정한 속도로 나아가는 로봇을 뒤따라 걸었다. 유미를 보면 무슨 말을 먼저 뱉어야 할지 모르겠기에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어보고자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우습게도 저 로봇까지 걸음을 늦춘다. 꼭 나와 나란히 걷듯이. 로봇이 멈춘 곳에는 문 하나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던 문에 숫자판 하나가 나타나자 로봇은 능숙하게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가락이 멈추자 문이 열렸다. 그리고 살짝 문에서 비켜섰다. 내게 길을 터주는 것처럼. 순간 지하 3층에서 나를 등 떠밀던 윤희가 떠올랐다.

 

“여기 있었네. 김유미.”

 

유미가 소리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하마터면 잘 참아왔던 눈물이 나올 뻔했으나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생길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참았다. 저 문을 넘는 순간부터 절대 유미의 앞에서 울지 않기로 다짐했으므로.

 

“아깝지 않아? 난 너무 아까워. 네가 밟지 않은 땅이, 네가 보지 못한 것들을 못 본다는 게. 지구가 이만큼 넓은데 아까워서 어떻게 떠나.”

 

천천히 걸어가다 보니 문장과 함께 유미의 앞에 다다랐다. 나와 눈이 마주친 유미의 눈을 가만히 마주하다 손을 맞잡아 손가락 사이마다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절대 먼저 빼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런 다음 다른 한 손으로 유미의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

 

 

 

학교는 5일 정도 결석을 했고 이는 언니도 허락한 기한이었다. 나는 이 5일을 유미에게 썼고, 유미 또한 5일을 내게 썼다. 나에게 있어서 고작 5일은, 유미에게 있어서 무려 5일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건 ‘반갑다.’ 라는 의미래.”

 

의미 있는 배움은 습득력과 비례하듯이 날이 갈수록 수화가 느는 언니에게 배운 것들도 알려주고. 이로써 유미와 나는 다른 세계의 언어도 배웠다. 고작 할 수 있는 문장이 반갑다, 만나다, 안녕이 전부이지만.

 

“온클로 우리 처음 만났잖아. 그때 딱 오류 떠서 다른 애들은 수업 못 들었는데 너랑 나만 남아서 단둘이 수업시간 내내 얘기했잖아. 사실 그거 오류 아니야.”

“그럼?”

“그냥 내가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몰래 학교 서버를 해킹했던 거야. 그 공간에 너랑 나만 남으려고.”

“너 진짜 무서운 애였구나. 해킹 안 했어도 우린 친해졌을 걸.”

“음, 그럴 수도 있었겠다. 그렇지만 나는 시간을 돌려서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이 해킹할 거야. 좀 더 빨리 친해지고 싶었거든.”

 

유미가 웃었다.

 

“너 맨날 지각할 때도 신호등 한 번 안 기다리고 뛰어왔다고 좋아했었지.”

“설마 너….”

 

이미 알고 있는 것부터 처음 알게 된 사실까지 정말 사소한 것들까지 모두 잘게 잘게 쪼개어서 나누어 가졌다. 3일째 되는 날은 대뜸 언니는 이런 우리가 부럽다고 했다. 우리처럼 정돈이 된 이별을 할 수 있다는 게 부럽댔다. 이 이야기를 유미에게 전해주니 이것마저 우리답다고 웃었다. 하지만 유미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면 저 말은 언니가 밤마다 우는 나를 달래주려고 한 소리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뜻을 담은 말이었다.

 

보통은 내가 더 많이 떠들었는데 5일째 되던 날이자 마지막 날, 그날만큼은 유미가 더 떠들었다. 이 말 저 말 다 하다가 끄트머리에는.

 

“내 기억은 데이터로 보관될 거래. 무언갈 남겨두고 떠나는 걸 보니 나는 아무래도 엄마를 닮았나 봐.”

 

라고 해서 유미는 나를 기어코 무력하게 만들었다. 유미의 앞에서 절대 울지 않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만큼. 누군가의 앞에서 아이처럼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던 적이 있던가 함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처음이었을 거다. 어릴 때도 속상한 일이나 슬픈 일이 있다면 꾹 참고 있다가 집에 와서야 숨어서 우는 나였는데. 한참을 우는 동안 유미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고,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조금 전 내가 하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했다. 내가 고개를 젖혀 나뭇잎을 바라보던 것을 따라 했듯이.

 

“난 슬프지 않아. 네 말대로 지구가 이만큼 넓은데 이 넓은 곳에서 네가 내 슬픔을 대신해주고 있으니까. 내 몫까지 네가 슬퍼하고 있으니까 아무렇지 않은 거야. 내게 주어진 시간과 네게 주어진 시간이 다를 뿐이야. 네가 좀 더 많이 가진 시간들을 나 때문에 슬퍼하는 것에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

 

 

 

더 자라지 못하고 열아홉에 머물러 있을 유미에게 미안하지만, 이기적이게도 유미 없이 혼자 자라날 내일의 내가 너무도 외롭게 느껴졌다. 더 자라지 않고 함께 열아홉에 머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므로. 수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데도 여전히 못 나눈 것들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물어볼 걸 그랬다. 혹시 혼자 먼저 커도 되겠느냐고.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이거 하나를 못 물어본 게 한이 된다.

 

선생님은 유미의 부재를 끝끝내 말하지 않다가 자꾸만 유미에 대한 괴상한 소문이 웃돌자 그제야 털어놓았다. 아무래도 죽음을 알리는 것을 몇 번이고 고민했을 거였다. 저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선생님은 끝내 울며 교실을 벗어났으나 그 누구도 선생님이 왜 저러냐는 둥, 장난을 치는 이가 없었다. 모두가 다른 형태로 유미를 떠올리는 시간이었다.

 

“너희 왜 나만 쏙 빼. 너희 둘이 유독 친한 건 알고 있었는데 나는? 나도 친구 아니야?”

 

지금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오히려 윤희일지도 모른다. 받아들이진 못했어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나였으므로. 윤희는 3일 내내 일방적으로 나를 피하다가 4일째 되던 날 대뜸 우리 집 앞으로 찾아왔다. 어디서부터 울었는지 모르겠지만 마주한 얼굴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너 괜찮아?”

“아니.”

“나도 안 괜찮아.”

 

나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우는 와중에도 자신과는 달리 울지도 않는 내 등을 토닥거렸다. 아무래도 눈치 빠른 윤희에게 울음을 참아두고 있는 것을 들킨 모양이었다.

 

언니는 더이상 수화를 배우지 않았다. 요즘 밤마다 방에 쏙 박혀 나타나지 않기에 남자친구라도 생긴 줄 알았더니 다름 아닌 연이 언니에게 목소리가 생겼다. 밤마다 연이 언니와 전화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시스템은 간단했다. 텍스트를 입력하면 음성 데이터로 변역이 된다. 물론 텍스트를 그대로 옮긴 것이지만 언니는 그 목소리가 연이 언니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고.

 

“내 친구랑 인사할래?”

 

신기한 마음에 언니에게 이어폰을 건네받았고, 연이 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숨이 가빠졌다. 대답도 않고 가만히 있는 나를 언니가 이상한 눈빛으로 봤지만 어떠한 행동도 사고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분명 그 목소리는 유미가 맞았으므로. 유미의 목소리는 가장 대화를 많이 한 내가 제일 잘 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이른 오후, 언니의 방을 두드렸다. 언니. 나 언니 친구랑 인사해도 돼? 언니는 선뜻 제 옆자리를 내어주었다. 이어폰을 건네받아 귀에 꽂는 순간까지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안녕? 네가 지수구나.”

 

유미를 다시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언니의 친구는 아무 말 없는 내가 자신에게 낯을 가리는 줄 알고 이런저런 말을 걸었으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어떠한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마 옆에서 지켜보던 언니가 답답함에 못 이겨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침묵이 계속 유지되었을 거였다. 언니 친구와 언니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방을 나왔고, 그대로 집 밖으로 나갔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목적지 없이 걷다 보니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나는 열아홉까지 살 수 있대.

 

예전에 유미가 이별을 예고했던 장소였다. 바람이 부는 소리와 나뭇잎과 나뭇잎이 스치면서 나는 소리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차 소리가 기체가 아닌 물체가 되어 숨겨줬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그것들을 방패 삼아 조금 울고 싶었으므로. 세상 그 누구도 모르게 울고 아무렇지 않게 이 장소를 벗어나고 싶은데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하굣길이었다. 언제부터 옆에서 걸었는지 모를 어떤 어린아이는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표정이 어두웠다. 일면식 조차 없는, 그저 길에서 만난 아이였으나 별생각 없이 물었다. 무슨 일 있니? 하고. 거리에는 아이와 나, 단 둘만 있었으므로 그 아이 또한 자신을 향한 물음임을 알았는지 슬쩍 나를 올려다봤다. 어떤 비밀이기에 이토록 조심스러운지.

 

“가끔은 여기에 머물러 있는 걸 밖으로 빼줘야 해. 그래야 해결되는 것들이 있거든.”

 

‘여기’ 라고 말하며 머리를 톡톡 쳤다. 한참 고민하던 아이는 이내 결심한 듯 손을 까딱거렸다. 허리를 숙여 자신과 시선을 맞춰 달라는 뜻 같았다. 걸음을 멈추고 무릎을 굽혀 쭈그려 앉아 시선을 맞췄다. 아이는 내 옆으로 걸어와 내 귀를 아프지 않게 움켜쥐었다. 그런 다음 자신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못하게끔 작은 손을 야무지게 오므렸다. 귓구멍으로 미묘하게 가빠지는 아이의 숨이 느껴져 간지러웠지만, 그럭저럭 참을만했다.

 

언니. 제가 신기한 거 말해드릴까요.

뭔데?

제 친구 중에 배꼽이 없는 친구가 있어요. 신기하죠?

 

 

 

*

 

 

 

있지, 유미야. 신호등이 내가 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초록 불로 바뀔 때, 갑자기 잘 되던 노트북이 오류가 뜰 때, 기꺼이 내게 자신의 차례를 양보하는 사람을 마주할 때면, 유독 나한테 친절을 베푸는 사람을 볼 때면 되살아난 네가 나한테 인사하는 것만 같아.

 

안녕, 나는 여기에 있어.

안녕, 여기에 내가 있어. 하고.

 

내 사랑은 너를 닮아 다정함이 그림자인가 봐. 너는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세상 곳곳에 연구소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너와 같은 존재가 많대. 너랑 같이 있었던 아이들이 아직 들키지 않고 잘 숨어있나 봐. 앞으로 나는 그들을 만날 거야. 어쩌면 찾는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만나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거야. 그 순간마다 그 목소리가 네 목소리라 생각할 거야.

 

 

 

*

 

 

 

어떤 이별이 있다. 서서히 멀어져 가다가 고요하게 정체를 감춰버리고 어둠이 찾아올 때마다 별이 되어 빛을 비추는 이별이 있다. 아름답고도 찬란하기에 들여다볼 때마다 아직은 눈물부터 나오는. 유미와의 이별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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