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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슈뢰딩거의 디버깅

2012.07.23 17:5407.23

"아, 아직 안시켰어? 미제의 똥물은 그만 마셔야 하는데. 아무튼 나는 뉴요커니까 아메리카노" 라고 뒤늦게 들어온 노대리가 말했다.

"어우 형은 왜 그래요. 허세는 여전해" 점심값 계산을 하는 노대리를 놔두고 먼저 식당에서 나와 커피숍에서 자리를 잡은 일행. 그중에 허서방이 노대리를 타박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뉴요커 흉내를 내던 노대리가 이정훈에게 물었다.

"어? 정훈씨? 그 주황색 고양이는 뭐야?"

브레이크포인트가 걸린 지점이었다. 갑자기 주변이 회색의 공간으로 팽창하는 느낌을 참으며, 이정훈은 노대리를 쏘았다. 슈뢰딩건의 엄청난 반동으로 몸이 뒤로 밀려났지만 그는 목표물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았다. 노대리의 몸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그러나 그 파편들은 계속해서 노대리의 것이었다. 이정훈은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시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반복되겠지. 하지만 이정훈은 알고 있었다. 이제 한번만 더 돌면 루프문이 끝난다는 것을.

코난에서 배포한 '슈뢰딩거 디버거 Ver 3.2 메뉴얼'에 따르면 슈뢰딩건에서 발사된 관측하지 않은 핵은 '붕괴한 핵'과 '붕괴하지 않은 핵'의 중첩으로 설명되지만, 한 시간 후 디버깅 필드를 해제했을 때 관측자가 볼 수 있는 것은 "붕괴한 핵과 죽은 벌레" 또는 "붕괴하지 않은 핵과 죽지 않은 벌레"뿐이다. 그럼 언제 이 계의 중첩 상태가 끝나고 하나의 상태로 고정되는가?

무슨 소리에요? 이정훈이 물었을 때, 디버거 작동법을 알려주던 김무성이 말했다. 아 정훈씨는 디버깅을 잘 모르죠? 음..  쉽게 말해서..이 디버거가 슈뢰딩거 유사 공간을 형성해서 사람-벌레 융합체의 불확정성을 급격히 증가시키는 것은 알고 있죠? 이정훈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음..암튼.. 그렇게 해서 벌레를 잡는거에요. 이놈들이 하도 지독하게 진화를 해서 한번 사람에게 침투하면 도저히 감염된 사람을 살릴 수가 없었는데 이런 식으로 '사람인지 벌레인지 불확정한 상태'로 바꾸어 놓고 잡는거죠. 그리고 요번에 추가된 타임슬립 기능으로 이 과정을 몇번이고 반복할 수 있어요. 특정 지점에 '브레이크 포인트'를 걸면...하하.. 이거 아무래도 GDB UI라 헤깔릴텐데... 고양이 UI로 바꿔줄께요. 이녀석 귀를 잡아당기면 특정 시점에 멈출수 있게 되구요, 물론 반복 횟수도 설정가능해요.. 대충 100번을 디폴트로 해놓을께요,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으면 루프가 빠르게 돌구요...

'노대리도 아니었단 말야? 누구지. 도대체!!' 빨리감기를 한듯 흘러가는 사람들 속에서 이정훈은 고개를 흔들었다. 엄청난 속도로 일행들이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커피는 내가 살께', '비가 참 많이 오는구만', '정훈씨, 데려온 후배 인사 좀 시켜줘.' ...

인간에 감염되는 연가시가 급속 진화를 했고 한국의 기후가 아열대성으로 바뀐 상황이 겹쳐져서, 한국의 여름은 점점 더 위험해졌다. 비만 오면 극성을 떠는 연가시 때문에 갑작스럽게 주변 사람을 물어뜯거나, 달리는 자동차에 뛰어들거나, 강, 바다 등으로 몸을 던지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일상적이되었다. 하지만 몇년의 연구끝에 코난이 슈뢰딩거 디버거를 상용화에 성공했고, 얼마전엔 고양이 인터페이스 형태로 리테일 제품을 내놓기까지 했다. 이정훈이 마침 IDC에 설치하려고 그 최신 버전을 들고 나온게 행운이었다.

다시 까페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오고 있었다. 회사근처에 볼일이 있다며 시간을 내서 보기로 했고, 마침 회사 사람들과의 점심약속도 겹쳐서 그냥 이김에 소개시켜 주기로 했었다. 산뜻한 옷차림과 귀여운 미소의 그녀가 두리번 거리며 이정훈을 찾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고양이가 자동으로 디버깅 모드로 전환되었었지. 이정훈을 발견한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이정훈은 그녀의 눈을 피했다. 최초에 이정훈은 그녀를 쏘았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디버깅 필드의 불확정성 초점의 균형이 이동했고 인간-벌레 불확실융합체는 다른 곳으로 전이되었다. 이 디버깅은 일종의 두더지 잡기와 비슷했다. 두더지가 구멍으로 들어가듯 디버깅 타이밍을 놓치면 불확정성은 필드 전체로 고르게 펴진다. 그리고 다시 초점이 형성되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그 생성 시간과 위치가 무작위적이다. 루프가 도는 동안 일행들은 여러번 파괴되었다. 그녀를 처음 한번만 쏜 것도 아니었다. 이제 이번을 마지막으로 디버깅 모드는 해제될 것이다. 이정훈은 알고 있었다. 만약 이번에 잡지 못하고 현실로 돌아오면 인간 파편으로 가득한 까페에 홀로 남게 된다는 것을.

"아, 아직 안시켰어? 미제의 똥물은 그만 마셔야 하는데. 아무튼 나는 뉴요커니까 아메리카노" 라고 뒤늦게 들어온 노대리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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