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8

2012.03.21 06:2103.21

8.










누이에게 활을 건네준 이가 늙은 고참 군관인 황 별장(別將)임을 뒤늦게 알았다. 말마따나 진갑이 다 되도록 병영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젊었을 적부터 들과 산을 누비며 사냥으로 닦아온 궁술을 인정받아 일평생 군영과 군영을 떠돌았다. 수염 사이로 가래침 섞인 기침을 터뜨려가며 활은 온 몸으로 쏘는 것이라고 일갈했는데, 꺼칠한 손에 주름이 잡혔어도 몸은 아직 강건하였다. 불줄통이 쏘아내는 요란한 탄환질이 잦아질 적에 그는 방패 사이로 움츠렸던 몸을 펴고 화살을 날렸다. 이백 걸음 바깥에서 단번에 왜적 셋을 꿰는 솜씨였으나 창칼을 다루는 재주는 신통치 않았다. 고령에 무리하게 몽치를 휘두르다 허리를 삐어 결국 정 비장이 쓰던 침상을 물려받게 되었다. 황 별장이 누운 침상에는 아직 정 비장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늙으면 양기(陽氣)가 가랑이로 모이지 않고 입으로 올라온다더니 그는 쑥뜸으로 허리를 지지며 누이의 활에 대해 실토했다.



“내 주었으이.”



“누이에게 활을 말입니까.”



“대단한 물건은 아니었어. 심심파적 삼아 만든 작고 짧은 활이지. 박달나무로 다듬어 튼튼하긴 해도 작은 멧즘생이나 잡지 사람 목을 꿰는 힘은 없네.”



“누이는 했습니다. 군관께서 가르쳐주셨는지요.”



“그런 신궁(神弓)이었던들 내 여기서 바닷바람에 늙겠나. 자네 누이가 타고난 재준게지. 일이 풀리거든 이름난 궁장(弓匠)을 찾아 입문토록 허게. 활줄을 더듬더듬 잡을 때부터 내 알아봤지.”



“군관께서 거두시지요.”





황 별장은 처연하게 웃었다. 얼굴의 주름살이 활시위처럼 어그러졌다.





“마흔 해가 넘도록 활을 다뤘으나 그저 응석 부려 쏜 게지. 자네 누이를 보니 더 그런 생각이 들더란 말이야. 누가 가르치지 아니하였는데 활줄을 말아쥐는 법, 당기는 법, 놓는 법을 스스로 깨쳤어. 화살만 얹으면 그대로 천릿길도 날아가겠더구먼. 억지로 활을 괴롭혀가며 쏘는 나와는 뿌리부터가 달랐어. 어설피 늙어버린 재주로 그런 신묘함을 어찌 깨우치게 하겠나.”





평생을 활로 늙어온 군관의 눈에는 누이가 명궁(名弓)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눈이 어두운 누이가 누구를 쏘고자 활을 배운 것은 아닐 터였다. 누이에게는 활도 그저 악기였다. 아버지의 꾸지람 때문에 화살을 얹지 않았으나 활줄의 울림을 느끼고 스스로 멀리 쏘는 법을 알았을 터였다. 활이 길고 명징하게 울수록 멀고 정확히 날아가는 화살의 꼬리께가 눈에 선했다. 화살을 날려 활의 울음을 알고자 밤마다 성벽에 올라 어둠의 속살을 그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내심 말을 돌렸다.



“일이 잘 풀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모두에게 살아갈 길이 보이겠지요.”





황 별장은 입을 다물었다. 늙은 군관의 눈에도 전황은 어지러웠고 좋지 않았다. 일이 잘 풀린다 함은 전황이 뒤집혀서 저 왜군들이 산산히 흩어지고 깨어져 더 이상 하늘을 뒤덮는 까마귀와 짙은 피냄새 쇠냄새를 맡게 되지 않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정 비장과 함께 군세를 다듬고 있었다. 옥쇄(玉碎)의 의지가 언뜻 비쳤으나 따로 여쭐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철벽처럼 비장하였다.



“걸을 만 하더냐.”



아버지가 짬을 내어 내 침상으로 찾아왔을 때 내 몸도 어지간히 나아 있었다. 부뚜막으로 나가 아낙들의 밥 짓는 일이라도 도울 셈이었다. 어지간히 눈꼴이 박힌 누이보다야 내가 나을 터였다. 아버지는 말리지 아니하였다. 다만 말을 덧붙였다.





“일을 도우면서 아녀자들에게 떠날 채비를 해두라 일러라. 남정네는 부상자와 연로한 이를 제외하고는 날붙이를 잡도록 할 터이다.”



“……예?”



“공성과 수성 간의 격차가 크다. 이 곳을 싸움터로 삼아 끌어들여 단번에 멸해보자꾸나. 묵류의 병법에서도 가장 하지하(下之下)의 전략이나 다른 수가 없다. 오수(汚水)와 오물, 건초와 짚더미를 구해두었다. 불줄통을 못 쓰게 하고 접전(接戰)으로 맞설 셈이다. 왜도(倭刀)가 길다 한들 장창에 비할 바 아니다. 장창으로 밀어내고 구석으로 몰아붙여 도륙하면 승산이 있다.”





비싼 종이에 적힌 나의 글이 허공으로 둥둥 떠 흩어질 때 아버지의 말과 글은 그대로 전략이 되어 현실이 되었다. 아버지의 몇 문장이 성벽을 높이 세웠고, 아버지의 몇 마디가 병졸들의 진법을 바꾸었다. 붓을 꺾고 벼루를 깬 나는 아낙들의 군일을 도우며 내 말과 글이 흩어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땅의 잔해를 고스란히 비추는 하늘은 어둡고 더러웠다. 누이와 아버지와 함께 어미뫼 위에 얹힌 맑은 하늘을 볼 날이 다시 있을 것 같지 아니하였다.





정 비장과 황 별장은 낮밤을 바꿔가며 싸울 수 있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추려내었다. 전장에서 단련된 눈은 꾀병과 거짓을 잔혹하게 골라내었다. 나이가 어려도 뼈대가 굵고 튼실한 아해들을 추려 병장기를 쥐어 후열에 서게 했다. 눈물바람의 젊은 아낙들이 만든 주먹밥이 짜다는 소문이 그때쯤에서야 투덜투덜 입소문을 타고 돌았다.





바닷바람에 갉혀 졸아든 고령의 노인네들이 함께 늙어가는 며느리와 사위의 어깨를 빌려 살 곳을 찾아 후문으로 나갔다. 후문을 지키던 번졸들을 지휘하여 그들을 성 바깥 멀지 않은 곳까지 전송하는 일 또한 내 몫이었다. 곱지 않은 시선이 젊은 소년 적장이 휘두르던 칼날처럼 사방으로 넓게 퍼졌다. 나는 애써 그 눈빛들을 외면했다. 그 눈빛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바다를 찾아 헤매다가 어느 틈에 다시 돌아와 내 뒤통수를 긁었다. 권위란 그런 것이었다. 있어봐야 무겁고 당해내지 못하면 상처 입기 마련이었다. 울돌 어멈이 내 뒤통수에 남긴 흉터가 새삼 쓰라렸다.





그런 권위의 실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산 같이 높은 가마를 몰고 앞서 나가는 이가 있었다. 말할 것 없이 성주와 그 휘하의 고관대작들이었다. 사재(私財)를 털어 전비(戰費)를 충당토록 했음에도 숨겨둔 재물이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금전은 아버지와 적대하던 학파의 수제자인 여류 기술자 공수반이 만들어낸 비밀 병기였다. 반짝반짝한 자태로 사람을 홀려 태산처럼 쌓아두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착각에 빠지도록 만든다고 했다. 더 무서운 것은 그 것들이 씨돼지처럼 시도 때도 없이 교접하여 새끼를 친다는 것이었다. 금전을 가진 이의 주머니는 갈수록 불어나 찢어지고 터져 새 주머니가 늘었다. 주머니 속에 금전이 없는 이는 배를 곯으면서 금전을 채울 주머니를 만들어 바쳐야만 했다. 뜻도 마음도 금전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금전의 무게에 홀린 성주와 고관대작들은, 제 생명이 어데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품 속의 금전만 믿고 살 곳을 찾아 떠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말처럼 이 성의 주인된 이는 손님처럼 황황히 떠나갔다. 그 꽁무니를 내려보던 아버지는 공수반을 추억하며 쓸쓸하게 웃었다.





“장대한 여자였느니라. 비록 여자였으나 그 헤아림이 끝도 없이 넓었다. 누군가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 누구도 모르는 새에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구어버리는 그런 병기를 만들었구나. 아름다운 독이요, 드러난 암살이다. 보고 보이는데도, 말리지 못하는 살인이다.”





바다가 내 뒤통수 뒤로 철썩철썩 우는 듯했다. 짠 바람이 멀리서 날아와 내 등골과 뼈마디를 파고 들었다. 성주보다 바다를 의지해오며 살던 늙은 백성들도 모를 리 없었다. 바다의 아픈 부름에 고개를 돌려 눈물짓는 이들은 역시 백성들이었다. 백성들의 발걸음이 무겁게 꺼지는 사이, 가마는 날듯이 휘청휘청 앞서 나갔다.








*          *         *







성 안은 마침내 매듭싸움(決戰)을 맞이할 태세로 온전히 바뀌었다. 성 안에 머무는 이들 중 싸움과 관련 없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다만 누이만이 여전히 전쟁의 무게에서 상관없이 비교적 가벼워보였다. 톺아보면 언제나 바깥으로 겉돌던 누이였다. 고향에서도 이 곳에서도 누이가 중심일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심지어 누이는 자신의 삶에서조차 구태여 중심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누이는 언제나 중심에서 비껴난 곳에서 소리만 벗하고 있었다. 늘어진 해금줄 사이로 켜는 소리가 어그러져 귓가에 소름이 돋았다. 정 비장의 말처럼 해금 활을 잡은 누이의 손매무새는 칼을 쥔 듯 매서웠다. 해금을 켠다기보다 그 목줄을 틀어잡고 하나하나 끊어내는 듯해보였다. 가시돋친 소리에 지치면 황 별장의 짧은 활을 쥐고 날듯이 성벽으로 올랐다. 울돌 어멈이야 가까워서 맞혔다지만 바다처럼 몰려든 왜적들을 하나하나 분간할 재주는 없는 누이였다. 누이는 천지에 내지르듯 화살을 쏘았다. 화살이 누구를 맞히고 어데서 떨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바람도 소리로 읽는가.” 침 바른 손가락으로 바람이 찢어지는 결들을 확인하며 황 별장은 누이를 우러러보았다. 누이의 화살은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언제나 멀리 날아갔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피로에 찌들은 아버지의 눈과 허허로운 누이의 눈빛이 화살처럼 짧게 부딪혔다가 서로 갈 길로 사라졌다. 그 가운데 내가 있었다.





아버지는 말없이 내게 더운 차를 따라주셨다. 다소 진하게 우린 찻물이 붉었다. 찻물 같은 노을이 성 안에 내려앉았다. 누이의 해금 소리가 땅에서 하늘로 찌르듯 치받아올랐다.



“붓을 꺾고 벼루를 깼다 들었다.”



달리 할 말이 없어 찻잔으로 입술을 가렸다. 입술 바깥으로 새려는 말을 찻물로 꼴깍 넘겼다. 코 가까이 올라온 손가락에서 부엌데기의 냄새가 배었다. 내 문장에서 볼 수 없는 삶의 냄새였다.



“깨어져야 세운다. 내 미처 너와 네 누이를 돌보지 못하였는데 스스로 부족함을 알고 한계를 깨달음이 가상하다. 이 아비가 네게 무엇을 달리 이르겠느냐.” 말끝에 아버지는 미리 챙겨놓은 듯한 보따리를 내게 내밀었다. 풀기도 전에 아버지의 말이 앞섰다.





“지필묵이다. 이제 겨우 하나를 꺾고 깼을 뿐 아니냐. 더 많이 꺾고, 더 많이 부수고, 더 많이 깨져야 한다. 그래야 너의 말과 글을 세운다. 넉넉히 챙겼으니 무수한 아픔을 견뎌내며 스스로 말과 글을 단련해라. 문(文)의 단련도 무(武)의 그러함과 본질이 다르지 아니하다.”





아버지와 나 사이의 침묵을 누이의 소리가 가로질렀다. 덫에 치인 토끼가 내지르는 단말마 같았다. 아버지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소리가 음률과 음률 사이를 지르는구나. 정해진 오음(五音)으로 짚어내기도 매어잡기도 어려운 소리다. 네 누이의 소리는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 바깥에 있다. 한 대륙의 음률을 빌린 우리는 알 수 없는, 네 누이만의 소리인지 모른다. 정해진 소리 안에 있는 나는, 정해진 세상 바깥에 있는 네 누이에게로 닿을 수 없을 게다.”



아버지의 표현이 묘하게 낯설었다.



“저도 아버님과 마찬가지로 정해진 소리와 세상 안에 있을 뿐입니다.”



“사유가 닿지 못하는 곳은 없다. 사유의 형태가 말과 글이다. 말과 글로 설명할 수 없다는 도가(道家)의 가르침은, 아직 그에 어울리는 말과 글을 찾지 못했을 따름이다. 네 누이의 소리가 분명히 들리되 열두개의 음계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네 아비는 이제 늙었다. 전쟁처럼 바뀌어가는 이 세상조차 발 맞추기 어렵구나. 너도 나와 같기 전에 네 누이를 살피거라. 네 누이의 세상을 표현하여 경지에 올라라. 그러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나는 올라오는 눈물을 차와 함께 넘겼다. 뜨거운 물기가 목구멍에 맺혀 올라오지도, 내려가지도 아니하였다. 아버지의 말은 비장하였고, 검게 타들은 표정은 오로지 하나만을 의미하였다. 아버지는 이 곳에서 묵류의 마지막 뜻을 다할 생각이었다. 나는 그를 말릴 수 없었다. 정 비장과 황 별장 또한 정해진 세상에서, 정해진 뜻을 가지고 이 성 안에서 골육혈정(骨肉血精)을 묻을 모양이었다.














나는 아직 뜻을 정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누이에게도 따로 물을 수가 없었다. 대신 자기 뜻을 다른 존재에게 맡기는 이들이 점점 늘어났다. 죽음을 앞두고 약해지고 겁에 질린 사람들의 뜻을 거두어가는 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천신(天神), 지기(地祇), 인귀(人鬼)처럼 살아 있는 것의 명운(命運)을 관장한다고 알려진 오래된 존재들이었다. 그들을 섬기라는 글도 있었고, 믿어서는 아니 된다는 글도 있었다. 글은 몰랐으나 말로 이루어진 가르침은 경험이 되어 남은 백성들 사이를 떠돌았다. 성 안에 남은 이들은 지니고 달아날 수 없는 땅을 떠메고 사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땅에는 부모와 자식이 묻혔고 친지와 조상이 묻혔다. 그들은 한동안 잊고 살았던 가르침을 다시 파내었다. 쓰러져 가던 서낭당 나무가 힘을 얻었고, 조악한 솜씨의 장승이 병졸처럼 줄을 맞춰 섰다. 젊은 축에 속하는 정 비장은 쓸데없는 짓이라며 혀를 찼으나, 늙은 황 별장은 때때로 장승에서 허리를 수그렸다. 무당이 도망쳐 휑해진 신집에서 난데없이 무당 행세를 하며 혹세무민하는 기녀(妓女) 몇을 병졸들이 잡아왔으나 아버지는 크게 탓하지 아니했다. 대신 그녀들을 모두 부뚜막에 보내 밥을 짓게 했다. 입이 댓발이나 나온 기녀들이 화장을 지운 꺼칠한 모색으로 몇 남지 않은 아낙들을 도와 지은 밥은 푸석거렸다. 제대로 씻지 않아 흙과 모래가 잔뜩 씹히는 밥은 질척거리거나 혹은 너무 되었다. 어서 빨리 이 지겨운 싸움이나 끝났으면 싶은 밥이었다.







“니미, 먹어봤자 죽는거여.” 몇 개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 주먹밥을 허위허위 몰아넣던 한 군졸이 밥알을 튀기며 투덜거렸다. 늙어버린 말에 비해 너무 젊은 모색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살고자 먹지만 때가 되면 죽을 것이었다. 그의 거친 말은 결국 죽기 위해 먹는 우리의 뿌리깊은 모순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의 입을 막고자 나는 말없이 물을 떠주었다. 젊은 군졸은 캬들캬들 징그럽게 웃었다. 저 성벽 밖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있을 수많은 불줄통이 연상되어 몸서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젊은 군졸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양손 다 합쳐 손가락이 여섯개밖에 되지 않는 그의 손놀림은 어색했다. 그는 가로세로를 엇걸어 묶은 열 십 자 모양의 나뭇가지를 꺼내고는 마치 대단한 부적이라도 되는 양 그 것을 품에 안고 중얼중얼 침을 튀기며 떠들었다. 소슬한 주문 같아 주위 사람들의 안색이 해쓱하게 변했다. 아낙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이보오, 싸움터에서 이게 무슨 해괴한 짓이오!”



내 외침에 그는 키들거리면서 두 개밖에 남지 않은 왼손가락으로 장승을 가리켰다.



“저건 괜찮고?”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가 품에 도로 소중히 갈무리하는 나뭇가지 묶음을 턱으로 가리켰다. 다른 이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그 군졸을 쳐다도 보려 하지 아니하였다.



“당신은 무부(巫夫)요? 그 나뭇가지 엮은 것이 신을 모신 증험이라도 된단 말이오?”



군졸은 혀를 쯧쯧 찼다.



“칼 대신 붓이랑 벼루 차고 거들먹댐스롱 글줄이나 읽는 줄 알었는디 인자 보니 순 놀량패고만 그려. 내가 모시는 신은 이런 쪼그만 땅에 붙박인 잡스런 것들하고는 영판 다른 것이여. 맨발로 바다를 건너와 세상을 구원하는 분이랑게.”



어디선가 듣던 말이라 나는 코웃음을 쳤다.



“맨발이 아니라 나뭇잎 하나는 탔을 것이오. 한 대륙이 일통되기 이전에 그 땅에 부처 말씀을 전하러온 달마(達磨) 조사를 모시는 모양인데, 표식이 틀렸소. 열 십 자가 아니라 만자 만(卍)을 쓰는 거요.”



내가 허공에 표식을 대충 그려 보여주었으나 그는 사납게 웃으며 손가락 모자른 종주먹을 내 앞에 들이대었다.



“아아나, 니 애비 좆이다. 씨벌눔, 좆두 모르면 가마니나 쓰고 앉었지, 누가 사람 밑에서 싸지른 부처 따윌 믿는다대? 이 분은 말여, 색목인들이 모시는 힘쎈 양반이여. 손만 대면 나병(문둥병)도 제꺽 낫고 죽은 뒤에 저 하늘에서 평생투룩 배부르게 사는건 일도 아니란 말여. 어차피 이 세상에서 제대로 사는건 틀렸응게 나는 내세에서 이 양반 덕이나 볼 판여. 늬랑 늬 누부(누이)랑 늬 애비는 열화지옥에서 튀겨질겅게 낯짝이나 볼란가 모르겄네?” 희롱조의 말끝에 그는 돌연 억눌린 살기를 내비쳤다. “씨벌 잡것들. 묵류 좋아허네. 니들 말만 믿고 죽어나간 아아들이 을매나 많은 줄 알어? 천주(天主)께서 느이 연놈들을 싸잡아 그냥 두지 않을 거잉게로.”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어디서 색목인들의 믿음이 흘러나왔는지 알 턱이 없었다. 그는 비록 거칠었으나 가르침을 정순히 받은 듯 성경(聖經)이라고 불리우는 그들만의 경문을 외웠고, 그 글만 외우면 죽어서도 천당에서 부자로 다시 날 수 있다고 떠들었다. 두려워하던 주위 군졸들과 아낙이 밥그릇과 밥주걱을 팽개치고 그 주위로 개미처럼 스멀스멀 모여들었다. 좋지 아니한 징조였다.












그 날 저녁, 어데서 싹을 틔웠는지 알 수 없는 색목인들의 믿음이 그 뿌리를 드러냈다. 왜군 진영에서 하얀 깃발을 내건 십여 필의 말이 가지런히 줄을 지어 성문 앞으로 달려왔다. 성벽 위에 올라 활을 들고 있던 누이가 날듯이 와서 나에게 전했고 황 별장은 분기탱천하여 활과 화살을 쥐었으나 아버지는 성문을 열도록 지시했다. 섬나라 출신이었으나 오랜 내전으로 단련된 그들은 말을 수족처럼 부렸다. 섬의 전쟁터를 내달리던 말들은 작고 단단했으며 피부에 거친 소금기가 피땀처럼 맺혀 있었다.





“색목인?”





횃불 아래 드러난 이형의 외모에 정 비장이 놀라 외쳤다. 다른 왜인들에 비해 칠척장신을 자랑하는 탄탄한 몸의 색목인이 작달막한 왜마(矮馬)를 가랑이 사이로 덮어누르듯 타고 앉았다. 왜인들의 어깨 높이보다 한 발은 더 치솟은 그 높이 위로, 볏짚 같은 노란 머리칼과 푸른 눈, 촘촘한 갈색 수염, 준령 같은 콧날이 드러났다. 그는 도롱이 같은 길다란 천으로 목 아래의 장대한 체구를 겨우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후에 망토라는 이름을 알게 된 색목인 전통의 길다란 천자락 앞에 매달린, 반짝이는 십자 표식을 보았다. 색목인은 십여 명 남짓한 왜인들의 우두머리 행세를 하며 앞장서서 말하였다. 색목인의 왜말 발음은 정 비장보다 어눌하였으나 표현은 유창한 듯 했다. 그러나 정 비장은 말끝에 고개를 꼬았다.





“신부(神父)? 신의 아버지라? 내가 맞게 들은건가? 허참, 이 바다 건너 두억시니 같은 것이 스스로 신의 아버지라는군?”





순간 나는 점심 나절에 들었던 젊은 군졸의 믿음을 떠올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낯선 색목인들이 왜인들에게 백기를 내세워 이 곳까지 온 연유를 알 듯도 했다. 그는 일단 전쟁의 총 책임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청했고, 도망간 성주를 대신하여 아버지가 서책을 낀 채 그를 맞이하였다. 아버지는 묵류의 비전서(秘典書)를 들여다보며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찾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인삿말도 없이 그 색목인은 아버지에게 몹시 감탄한 듯했다.





“호쿠사이의 쇼군과 사무라이들은 모두 칼을 신처럼 모시고 정결하게 다루었습니다. 헌데 이 곳의 장수들은 하나같이 서책을 끼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놀랍고 훌륭합니다.”





“그렇소? 서로 살아오며 바라는 바가 달라 그럴 거요. 헌데 이 곳에 사는 이들과 용모가 다른 그대는 뉘시오.”



품격 있는 아버지의 대답에 색목인은 비로소 정중하게 대답했다.



“저는 제 고국에서 천주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소명을 받고 바다를 건너온 신부 요한입니다. 호쿠사이를 지나 반도 왕국까지의 먼 길을 보아 부디 내치지 말고 천주님의 말씀을 전해들으시길 바랍니다.”



아버지는 서책을 밀어놓고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하늘을 관장하는 이의 이름은 호쿠사이도, 대륙도, 반도도 다 다르게 부르나 그 뜻은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바요. 그대가 말하는 천주가 곧 우리가 말하는 상제(上帝)와 같소?”



“사람 생각이 다르면서도 다르지 아니하니 미신들 중에서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을 것입니다. 허나 천주님의 말씀만이 진리요, 다른 신은 거짓되고 허무맹랑하고 그 가르침은 그릇되어 따르는 사람을 열화지옥의 아수라(阿修羅)로 떨어지게 만듭니다. 천주께서는 마음이 바다처럼 넓으시기에 창조주의 뜻대로 만드신 우리 인간이 행복하길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같은 이들을 파송하여 지옥불로부터 당신네들을 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구려. 이 몸도 젊었을 적 싸움을 대신하는 노예로 떠돌며 당신 같은 색목인들과 교분을 쌓은 적이 있소. 허나 그대처럼 보고 들음과 이름지음 너머의 깨달음(形而上學)을 말하는 이들은 없었소. 다른 자리였다면 그대들의 믿음에 관한 깊은 담(談)을 논할 수 있었을 터. 허나 이 곳은 싸움의 자리니 엄정히 물음을 허물치 마오. 신의 종복을 자처하는 이가 이 자리에 온 연유가 무엇이오?”



신부 요한은 몸을 꼿꼿하게 펴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천자락으로 가린 거대한 체구가 숨길 수 없이 용트림했다. 주위에 시립한 왜인들과 대비되어 그는 기둥처럼 장대해보였다. 그는 첫 마디로 아버지의 눈썹을 움직였고,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장군께서는 이 싸움을 진정 이길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아버지는 눈썹을 내려앉히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장수된 이가 어찌 질 싸움을 마음에 두겠소.”



“부디 잘 생각하십시오. 천주께서 보여주신 호쿠사이와 한 대륙의 모습을 저는 직접 보았습니다. 한 대륙의 어진 자들이 땅이 품은 비밀을 캐내어 불꽃을 일으키는 신비한 검은 가루를 만들었으나 그를 효율적으로 다루는 이들은 우리 서역인들입니다. 대단히 무례하게 들릴 줄 압니다. 허나 이 곳의 황인(黃人)들은 몸가짐과 생각이 나약하게 굳어져 자연을 즐기고 경외함에 만족하지만, 우리 서역인들은 자연을 도구로 이용하며 바다 건너에서 풍요한 문명을 이루며 발전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여 만드신 천주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것을 쓰라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 그 자체로 오롯이 완벽하시고 이 세상을 흐르고 받치는 끊임없는 법칙의 흐름입니다. 한낱 피조물의 존재로 누가 그 흐름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장군께서는 부디 깊게 생각하십시오.”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한참 동안 입술을 비틀며 말없이 푸른 눈을 지닌 거구의 사제를 바라보았다. 신부 요한은 아버지의 눈을 맞받으며 푸근하게 웃었다. 그의 눈은 우리의 검은 눈동자와 달랐다. 밝고 맑아 속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였지만 그 끝은 보이지 않았다.



“피조물이면서도 주인된 자의 뜻을 거슬러 흐르는 게 있더이다.”



아버지는 품 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어 던졌다. 신부는 굵고 두꺼운 손으로 그 것을 받아 살폈다. 피가 말라붙어 지저분한, 흠집투성이의 동전 한 닢이었다. 알 수 없다는 듯이 손 안의 동전과 자신을 바라보는 요한 신부를 향해 아버지는 차갑게 웃어보였다.



“그 동전 한 닢 덕에 목을 바친 군졸의 수를, 나는 셀 수 없소.”



“안타까운 일입니다. 천주님의 뜻을 모르면 세상의 것만을 좇다가 허망하게 목숨을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요한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은근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서역의 신부를 칼처럼 몰아세웠다.





“우리보다 나은 도구를 쓴다고 하여 그 문명을 천주의 복된 뜻으로 여기는 당신은 그와 다르더이까? 하늘 위에 계신 누군가의 뜻을 빙자하여 스스로 그 도구됨을 자처하면서도 다른 이들을 도구로 여기는 당신도 그와 다르지 않소. 당신은 저 불줄통을 다루는 기술과 왜인들을 속박하여 제 뜻대로 다루는 힘을 천주의 복이라고 자신하는 듯 하나, 저 금속 조각들도 원래는 사람의 도구였소. 도구와 주인됨이 서로 바뀌어 뒤엉키는 세상에 복처럼 귀히 치는 저 도구들이 행여나 당신의 명줄을 끊게 된다면 그 또한 천주의 뜻인지 내 감히 여쭙고 싶소.”





신부는 말이 없었다. 그의 네모진 턱이 조개처럼 굳게 다물렸다. 왜인들은 눈을 데굴거리며 저들이 모셔온 사제를 올려보았다. 한참 후에야 요한은 말을 씹어뱉었다.



“천주의 뜻은 피조물이 함부로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천주의 뜻은 언제나 그대의 뜻에 합당하기만 하오?”



“그를 가리는 기준 또한 피조물의 작은 헤아림입니다. 천주님의 큰 헤아림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 수 없다 들었소. 하물며 사람의 헤아림을 벗어나는 큰 헤아림이 어찌 뭇 사람에게 도움이 되겠소?”



“……장군의 뜻이 이미 굳었군요.”



“그럴 것이오.”





서로 표정이 바뀌었다. 미소가 옮겨간 듯 아버지는 푸근하게 웃었고, 요한의 눈동자는 푸른 불꽃 같았다. 무덤가에 노니는 도깨비불 같기도 했다. 그는 턱으로 아버지의 창을 가리켰다.



“호쿠사이의 쇼군들은 총에 무너진 다음에야 칼을 버렸습니다. 장군도 그 창을 꺾을 날이 머지 않을 것입니다.”



“병기가 달라져도 무(武)의 정신은 끊기지 않으리라 믿을 뿐이오. 나는 이제껏 그리 배웠소.”





요한은 악귀처럼 싸늘하게 웃었다.

“두고 봅시다.”





사신을 대접하는 법도에 따라 요한 신부와 그를 모신 왜인들은 성의 한 귀퉁이에 잠자리를 얻었다. 그들은 품에서 십자가라 부르는 나무 표식을 꺼냈고, 손가락이 모자란 젊은 군졸이 외우던 경문들을 훨씬 능란하게 외웠다. 왜인들 중 몇은 발음이 정확치 아니하여도 우리 말을 할 줄 알았다. 그들은 젊은 군졸을 비롯하여 색목인들의 믿음에 관심이 있는 이들을 끌어모아 유세하였다. 요한 신부는 품에서 기기묘묘한 서역의 물건들을 꺼내어 몰려든 이들에게 보여주었다. 정 비장이 저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다스려야 한다 목소리를 높였으나 아버지는 듣지 않았다. 말없이 창자루만 쓰다듬으며 밤을 새워 그 모습을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다음날 새벽 기도의 의례를 마친 요한 신부는 아침 일찍 무리를 모아 떠났다. 찾아올 때는 적었으나 돌아갈 때는 그보다 더욱 많은 수였다. 젊은 군졸을 비롯해 수십 명의 사람들이 새 믿음과 삶을 찾아 떠나기를 원했다. 아버지는 막지 아니하였다. 정 비장과 황 별장은 허탈하게 웃었다. 나는 역발산 기개세(力拔山 氣蓋世)의 용력을 지녔던 한 영웅이 사방을 에워싼 고향 노래에 뜻을 꺾고 말았다는 옛 이야기를 떠올렸다. 성은 안으로부터 이미 허물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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