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가치의 기준

2011.11.20 14:2211.20

가치의 기준

네 놈이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면 살려주지.
녀석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난 벌벌 떨던 허벅지를 멈추고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칼은 내 눈앞에서 날카롭게 번뜩였다. 나는 얼떨결에 되물었다. 녀석은 칼끝으로 내 관자놀이에서 볼 끝까지 살며시 쓸어내렸다.
“네 놈이 공기를 축 낼만한 가치가 있는지 증명하라는 거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뭘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일단 살려준다는 건 확실했고 그것이 정확히 어떤 뜻이냐고 다시 물어보면 칼은 내 관자놀이에 박혀 있을 것만 같았다.
“난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
녀석이 칼날에 엄지손가락을 대며 말했다.
“돈 떼먹고 날으는 인간들은 대체 어떤 삶을 살고 싶어서 그런 짓을 할까? 대체 얼마나 잘 살려고,”
녀석이 나를 쳐다보며 묻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모른다. 내가 왜 돈을 빌렸는지 진작에 잊어버렸다. 다름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저 도박자금이 필요했을 것이다. 강원랜드가 내가 없으면 굶어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그런데 그건 알아야 돼. 남을 피해주고는 결코 제 명대로 살 수 없다는 거. 돈을 빌렸으면 당연히 갚아야지. 안 그래?”
“모든 맞는 말이에요.”
내가 말했다. 말을 할 때마다 부어오른 입술이 덜렁거렸다.
“최소한 전 도망은 안 가죠.”
“그러니까 네가 쓰레기라는 거다. 다른 놈들은 살려고 노력이라도 하잖아. 근데 너는 그냥 앉아서 이딴 거나 보고 있는 꼴이라니.”
난 절정에 다다른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을 슬쩍 보았다. 저것들은 내가 맞는 30분 내내 저짓거리였다. 난 코를 킁킁 거렸다. 비염이 있는 사람은 흔히 그러듯, 평생 달고 살아야하는 습관이었다.
“돈은 생기는 대로 갚아나갈 생각이었어요.”
“자리나 맡아주면서?”
그는 강원랜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도박 자금이 없는 사람들은 도박으로 돈을 잃으러 온 제 2의 자신들을 위해 몇 시간이고 자리를 맡아주고 돈을 받았다. 그리고 그 돈은 또 모조리 강원랜드의 품으로 돌아갔고. 그런 것이 무한 반복되는 곳이었다.
“이자만 천 만원이 넘어. 이 후레자식아.”
“천천히 갚아나갈게요.”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 얼굴을 칼 손잡이로 내려찍더니 들고 있던 칼을 다른 손으로 옮겨 주먹으로 나의 관자놀이를 후렸다. 의자에 칭칭 동여매져 있던 나는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고 의자는 우지끈 부러졌다. 중국산(山) 나무로 만든 듯 했다. 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는 칼을 다시 옮기더니 손목을 빙빙 돌렸다.
난 누워서 스케이트를 타는 것처럼 발을 퍼덕이다 천천히 중심을 잡고 일어났다. 맞는 것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는 놈이었다. 누워서 밟히는 것보다 일어나서 배를 내주는 편이 훨씬 괜찮았다. 토하면 토한대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물론 그 토삿물에 몸이 처박힌다는 게 문제지만.
“기본을 아는 녀석이군.”
녀석은 나를 칭찬했다. 그리고 상으로 내 머리 끄덩이를 잡고 배를 가격했다. 위산이 넘어올 것만 같았다. 실제로 마음만 먹었다면 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텔레비전 안테나 위에 토삿물이 있었으므로 굳이 뱉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나의 집이었다.
그는 나를 샌드백처럼 몇 번 더 두들겨 패다 더 이상 때려봤자 게임 속 몬스터처럼 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이래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해탈을 했는지 주먹질을 그치고 일어설 힘조차 없어 바닥에 널브러진 나를 개똥보듯 쳐다보았다.
난 녀석의 다음 말을 예상했다. 일주일을 준다. 흔히 사채업자들은 그렇게 말했다. 한 다섯 번 정도. 그러다 정 안되면 실컷 두들겨 팬 다음 친한 의사에게 데려가는 것이었다. 난 그것을 다른 사채업자들에게 두 번 정도 당해봤고 이미 나에겐 떼어갈 것이 없었다. 눈깔 밖에. 난 이것이 몇 번째인지 가만 생각해보았다. 두 번 째일 것이다. 그렇다면 경고였다. 난 마른 침을 삼켰다.
“돈이 없으면 빌리지를 말아야지.”
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채업자들의 흔한 레퍼토리였다. 사채업자들은 종종 저렇게 철학적인 말을 지껄이곤 했다. 돈이 없으니까 빌린 것을 주먹을 쓰는 순간엔 까맣게 잊어버린다.
“정말 죄송합니다.”
내가 쿨럭이며 말했다. 입 안에 홍시를 머금은 것처럼 끈적끈적했다. 혀로 동그란 것이 잡혔다. 몇 번째 이일까? 난 본능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다. 난 슬쩍 그것을 뱉어냈다. 침묵이 흘렀다. 한참을 얻어맞으면 잠이 온다. 운동을 최고치까지 한 후 오는 잠이랑 비슷하다. 몸은 숨 쉬는 것 말고 어떠한 행동도 불능상태가 된 것이다. 난 몰려오는 잠을 굳이 쫓아내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은 사채업자가 할 거고 잠이 든다고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죽이려면 진작 죽였을 테니까. 난 사채업자가 어서 가기를 바랐다. 좀 울고 싶었다. 이렇게 망가진 내 삶을 위해서.
사채업자는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의 거친 숨결이 내 얼굴에 닿는 듯 했다. 아마 어떻게 해야하나 생각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난 점점 더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저러다 말겠지. 헛수고야. 콩팥이나 가져가라고. 이미 없지만.
그 생각을 한 것이 헛수고였다. 그는 나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한 다섯 시간만인 것 같았다.
“일어나보라고, 친구.”
난 거의 반 쯤 잠들어 있었음으로 그의 말을 받아들이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사실 난 엄마가 날 깨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0년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난 10년 전으로 돌아가 있고 엄마는 나에게 어서 학교가라고 지각이라고… 그는 나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힘이 억셌다. 난 그제서야 눈을 떴다. 흔히 맞으면 눈을 감는데 그러면 더 아프다. 주먹을 끝까지 보고 맞아야한다. 그래야 충격이 덜하다. 난 더 때릴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좀 독한 녀석이었다.
“정신 좀 차려봐, 응?”
그가 굳은살이 손톱까지 박힌 손으로 나의 볼을 툭툭 건드렸다. 피 맛이 섞인 한숨이 나도 모르게 뿜어져 나왔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얼굴은 주름이 자글자글 했다. 우리 아빠보다 10살은 많아 보였다. 누가 노약자라고 했는가?
“나도 이제 지친다고.”
그가 여전히 내 멱살을 단단히 잡은 채 말했다. 난 파블로프의 개가 침을 흘리듯 무조건 죄송하다고만 연발했다.
“죄송이고 지랄이고.”
그가 내 멱살을 놓으며 말했다. 그는 거친 숨을 헐떡였다. 그는 양복을 벗었다. 몇 명이나 던졌는지 우락부락한 근육이 셔츠를 터트리려 하고 있었다. 그는 양복바지에서 양복을 만들다 남았는지 양복과 똑같은 원단으로 보이는 손수건을 꺼내 땀이 차오른 이마를 닦았다.
“이 짓을 하기엔 난 너무 늙었어.”
난 그 말에 수긍하지 못했다. 그건 억지였다. 내 부어오른 몸뚱아리가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방금 니가 한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까지 합치면 한 백만 번째 그 소리를 듣는 걸꺼야.”
그가 코를 횅 풀었다. 비염환자가 보기에 부러워 죽을 만큼 시원한 코풀기였다.
“문제는 내가 그 말에 이제 신물이 난다는 거고, 장가를 간 아들놈은 이제 3일 후면 애아빠가 된다는 거지. 나도 이제 할애비라고.”
“축하드려요.”
가만히 있기 뭐해서 난 아무 말이나 지껄인다는 게 이딴 말을 내뱉었다. 그는 살기를 품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자전거를 끌어주는 할아버지는 못돼도 적어도 온화하게 웃는 할아버지는 돼야 할 거 아냐.”
그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금 내 미소가 어때?”
난 차라리 자전거를 끌어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멋지십니다.”
“멋질 뿐이야. 그리고 그건 쫄아서 하는 개소리고. 절대 손자에게 보일 수 없는 미소에, 주먹이야.”
그가 주먹을 쥐어보였다. 차라리 망치가 더 부드럽게 보일 것이었다.
“세대 교체라고. 세대 교체.”
그가 감독이 교체 좀 해주라고 사정하는 듯한, 한 손을 세우고 그 손끝에 팔을 올려놓는 자세를 취했다.
“이런 일을 하기에는 젊은 것들이 너무 많고, 별로 떳떳한 것도 아닌데 말이지. 난 이제 너 같은 약골 하나 부러트리지 못할 정도로 늙었어. 직원은 밀크커피를 블랙커피처럼 타오는 머저리 같은 아줌마가 전부고, 그녀나 나나 집에서 쉬워야 돼.”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개소리 마!”
그가 나를 노려보았다. 쫙 찢어진 눈은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네 놈이 인생막장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었어. 사채업자들에게 이리저리 쫓기다가 장기 몽땅 잃고 그런데도 도박을 못 끊어서 어디서 또 돈 빌릴 데 없을까 두리번 거리다가 나처럼 늙어빠진 사채업자가 하는 곳을 보고, 아! 저기 돈 좀 떼어먹을 수 있겠다! 싶어서 온 거 나도 알아. 날 만만히 보고 온 거 나도 안다고.”
난 고개를 저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늙었다고 만만히 본 건 아니었다. 그저 사무실 구조가 낡고 좁아서 어깨가 몇 명 없을 것 같았을 뿐이었다. 체인점이 아닌 다음에야. 설마 노인이 직접 수금하러 다닐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실 요 근래 적자야. 빌려준 놈이 열 다섯인데 받은 건 3명이고 밟은 놈은 너 하나야.”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의 머릿속은 끝없이 공회전 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죄다 토꼈고.”
“아, 안타깝습니다.”
머리를 쥐어짜낸 대답이 겨우 이거였다. 수학 문제를 푸는 기분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신고할거야.”
난 웃음을 터트렸다. 조폭이 맞았다고 신고하는 거랑 마찬가지였다. 그는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5년만 젊었다면 전부 다 찾아냈지. 그래왔듯이.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못해. 부산이 동쪽에 있는지 남쪽에 있는지 목포는 어디 있고 여수랑 여천이랑 다를 게 뭔지 이제는 헷갈려. 늙어서 그래. 몰락이야. 늙은 사채업자의 몰락.”
머리는 또 공회전하고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넌 착한 놈이야. 최소한 도망은 안 쳤으니까. 그 점에서 네 녀석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은데, 삭감은 안 돼. 이자를 빼더라도 넌 천을 더 갚아야 하거든. 천 만원이 박 썰어서 나오는 게 아니잖아? 하지만 이자까지야.”
“그럼 천만원은 어떻게든…”
“아니, 난 오늘부로 은퇴야.”
그가 말했다.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담배 갑을 꺼내더니 담배 하나를 입으로 끄집어냈다.
“와서 돈 갚아라 죽인다, 이제는 힘들어. 난 은퇴라고. 완전히.”
그가 바지를 뒤적여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대체 라이터와 담배 갑을 왜 따로 따로 놓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슬며시 물었다.
“너 오늘 죽일거야.”
그의 담배에서 연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그는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니 눈깔을 가져갈테야.”
내가 한 만 번째 살려달라고 말을 하려고 할 때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넌 착한 놈이야. 그래서 기회를 주고 싶어.”
“기회요?”
“그래, 기회. 말했잖아. 네가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면 살려준다고.”
“그게 그 뜻이었습니까?”
“극적 효과지.”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난 그것이 맞는 말인지 모르겠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치를 증명해 봐.”
“어떻게요?”
그는 한참 생각하는 듯 눈알을 굴리더니 곧 내 피가 묻어있는 백금 시계를 보았다.
“지금 통화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난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사실 볼 필요도 없었다. 시간이 새벽 1시든 오후 3시든 내게 통화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친구는 없었고 형한테 얹혀살며 편한 노후를 살고 있는 아빠, 형, 형수, 조카 두 명. 그리고…
“한 백 명 가까이 될 걸요.”
“전부 통화해.”
그가 손가락을 튕겨 바닥을 멀리 던졌다.
“간단해. 너가 그 녀석들에게 전부 통화해서 천, 아니 1억만 빌려달라고 해봐. 그리고 빌려준다고 하면 살려줄게. 넌 1억의 가치가 있는 놈이니까. 하지만 네 인맥이 바닥이 날 때까지 돈을 구하지 못하면 넌 아웃이야. 난 사채업자야. 금융업이지. 모든 건 가치로 본다고. 싫으면 여기서 눈깔을 내놓던가.”
억지였으나 이 보다 더 극적 효과가 어디있는가? 난 다만 백 명이나 되는 유령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을 뿐이었다. 난 중국산(山) 의자를 가져다 토삿물이 얹어진 텔레비전 옆에 전자파를 잡아먹는다는 선인장 옆에 웬 여자 사진 옆에 전화기로 손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수화기를 들었다.
내겐 가족이 있었다.
신호음이 들렸다. 아직 번호를 바꾸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한 30번 정도 신호가 간 다음 웬 축축하게 젖은 신발 같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였다.
“저예요. 아버지.”
침묵이 흘렀다. 저 쪽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끊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코 누군지 몰라서 침묵을 유지하는 것은 아닐터였다.
“덕만이냐.”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사회에서 내 이름은 병철이었다. 딱히 뜻이 있어서 그렇게 지은 건 아니었다. 덕만이보다는 나으니까 그렇게 지은 것이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아니다.
“웬 일이냐.”
“1억을 빌려달라 해.”
그가 내 관자놀이에 칼을 대며 말했다. 난 인상을 찌푸렸다. 난 수화기에 귀를 뗀 채 조용히 말했다.
“어떻게 다짜고짜 그래요? 최소한 안부는 물어야지.”
“아직도 안 물었어?”
난 다시 수화기에 귀를 댔다.
“그냥 보고 싶어 전화해 봤어요.”
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칼 끝을 세운 채 칼 끝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이른 새벽에 보고 싶어 전화했다고? 너 미국이냐? 아니면 죽기 직전에 그래도 애비라고 목소리 듣고 싶어 한 거냐? 어느 쪽이든 잘못 생각했다. 넌 내 아들이 아녀. 그러니까 니가 지금 엄청 곤란한 상황에 빠졌어도 난 네 놈을 책임질 수 없다고. 무슨 말인지 알겄냐?”
“1억을 빌려달라 해.”
그가 재촉했다. 난 입맛을 다셨다.
“돈 좀 빌려주세요.”
“내 말 뭘로 쳐 들은 겨!”
아버지가 소리쳤다. 난 수화기의 해바라기처럼 송송이 난 구멍을 꽉 잡았다. 목소리는 구멍을 빠져나가 이 지옥을 헤집으려 무던히도 애쓰고 있었다.
“네 놈이 전화한 이유야 불 보듯 뻔했지만, 어쩜 그려! 고작 몇 년만에 해서 한다는 말이 돈을 빌려달라고? 네 놈이 우리 누렁이를 팔아넘긴 걸 난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어! 다른 놈들은 그딴 짓 했으면 최소한 성공해서 오기라도 하지, 너는 누렁이보다 못한 놈이 돼서 한다는 말이 돈을 빌려달라? 저리 꺼…”
“돈이 없다네요.”
내가 전화를 끊으며 말했다. 그는 엄지로 칼 끝을 문지르며 말했다.
“99명 남았어.”
난 한숨을 쉬었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제는 누구 남았지? 아빠가 저 정도면 형은 말할 것도 없고 조카들은 초등학생이고… 난 일단 수화기를 들었다.
난 나도 모르게 아무 번호나 눌렀다. 신호는 갔지만 전화는 받지 않았다. 난 그를 슬쩍 보고 다시 다른 번호를 눌렀다. 아주 단체로 나를 씹기로 작정했는지 신호는 갔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니 친구들은 전부 모범적인 가보지? 이 시간에 벌써 자고 말이야?”
12시 20분. 양아치도 이 시간에 잠을 잘 것이었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그래요. 받은 게 기적이죠.”
“이런 걸 보면 가족만한 것도 없어. 안 그래?”
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형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형한테 해보는 건 어때?”
난 전화기의 번호판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전화할 사람은 없었지만 되지도 않을 사람에게 전화를 걸만큼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이가 안 좋아요.”
내가 말하자 그는 미소 지었다.
“가족하고는 전부 맹탕이군.”
그는 눈길을 돌려 선인장 옆에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가 물었다.
“이 여자는 누군가? 연예인은 아닌 것 같지만 자네 집에 걸려있을 만큼 질 나빠 보이지 않아 보이는데.”
난 사진을 쳐다보았다. 빨간 루즈를 바른 채 밝게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의 사진. 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실제로도 대수롭지 않은 관계였고.
“와이프예요.”
“위자료는 얼마 줬나?”
“무슨…”
난 말을 잇지 못했다. 난 입을 꾹 다물고 또 다시 아무 번호나 눌렀다.
“그냥 집 나갔어요. 아직 합법적으로…”
난 말을 멈췄다. 그녀에게 불이익이 떨어지면 어쩌지? 난 그녀의 전화번호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부부에요. 법적으로요. 혹 제가 죽거든 이 년을 찾아 족치든지 해요.”
그는 똥을 가린 강아지를 보듯 대견스런 미소를 지었다.
“콩팥을 소개시켜 줘 고맙네.”
그때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난 나도 모르게 받았어요, 라고 말한 뒤 친근하게 인사를 했다. 실제로도 반가웠다. 적어도 내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해줄 사람을 구한 셈이었다.
“어떻게 지내?”
“누구쇼?”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는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누구쇼? 자동 응답기 일 수도 있었다.
“나야, 병철.”
“병철?”
“그래. 자식아.”
“술 취했냐? 지금 형한테 자식이라고?”
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어서 1억을 빌려 달라 하라고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 니 친구 병철. 나 모르겠어?”
“내 친구 중엔 병철이 없는디. 누구쇼?”
“어이구, 답답아.”
그러면서 난 그를 보며 씩 웃었다. 눈빛으로 끊임없이 우리는 친구에요라고 말하면서. 하품 소리가 들렸다.
“아무튼 난 일단 자야겠으니, 끊어요. 내일 다시 통화하던가.”
그는 정말 뒤끝 없이 끊었다. 끊겼다는 신호음이 들렸지만 난 최소한 시도는 해봐야 했다. 난 계속 대화를 하는 척을 하며 1억 얘기를 꺼냈다. 그가 바짝 다가와 내 어깨에 턱을 대며 물었다.
“빌려준데?”
난 기다리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응. 응. 그래, 역시 너 밖에 없어.”
난 재빨리 수화기를 덮었다. 그가 내 어깨에 기댔던 턱을 빼내며 물었다.
“그래, 뭐래?”
난 밝게 미소지었다.
“돈이 없데요.”
“그런데?”
“하지만 친구들에게 한 번 말해본데요. 절 아는 녀석이 몇몇 있거든요.”
그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친구들 이름은 뚜뚜, 뽀뽀, 빠빠 이런가?”
난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에요?”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방금 니 친구는 삐삐삐삐 거렸잖아. 그건 어느 나라 언언가?”
그는 칼잡이로 나의 코를 내려쳤다. 피가 왈칵 쏟아졌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들켰다는 데 오는 수치심과 두려움이 온 몸을 타고 흘렀다. 마치 피 자리에 대신 채워지는 듯 했다.
“구라를 치려면 제대로 쳐야지. 개 같은 것.”
그는 코를 지혈하느라 고개와 허리를 굽히고 있는 나를 보며 말했다. 그는 어디로 가 잠시 후 이불을 가져오더니 나에게 던지며 말했다.
“지혈해.”
차라리 면봉을 쑤셔 박는게 더 나을테 였지만 난 딱히 방법이 없었기에 이불로 피를 닦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에 무심하게 내 와이프의 사진을 바라보더니 내게 말했다.
“이 여자한테 해보지 그래?”
난 밝게 미소 짓는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내 꼴이 우습다는 듯 미소 짓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얗게 고르게 나있는 저 이빨을 모조리 깨버리고 싶었다. 한 때 내가 입을 맞췄던 저 입술까지. 난 고개를 저었다.
“말했잖아요. 도망갔다고요.”
“한 번 해봐. 번호는 알잖아.”
“받을 리가…”
그가 내게 칼을 들이댔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해.”
그가 무심하게 말했다. 난 수화기를 집었다. 번호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는 코로 깊게 숨을 내쉬었다. 제발, 제발. 눈에 비치는 번호판이 이질적으로 보였다. 잘만하면 앞으로 5분 후 나는 이것을 보지 못하리라. 저 찢어버리고 싶은 사진도.
내 몰골도.
난 다이얼을 눌렀다.
“막 누르면 곤란하네. 직접 확인해볼거야. 물론 1억을 빌려준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그가 킬킬 거렸다. 사실 번호가 맞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해본 것이었다. 기억을 더듬 더듬 더듬거려서. 잘하면 아내나 잊어버렸던 친구 한 두 놈이 재수 없게 걸려들 수도 있겠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목소리에도 색이 있다면 그녀는 똥색이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나 변비 후에 보는 똥만큼 반가운 건 없는 법이다.
“어, 안녕?”
내가 다급히 말했다.
“나야. 수미야.”
침묵이 흘렀다. 망할 놈의 침묵. 나에게 전화를 받으면 누구든 일단 침묵부터 시작했다. 나를 받아주는 건 오로지 114 뿐이다.
“그래. 안녕.”
그녀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혹시 지금 연극해? 목소리가 초등학교 때 읽었던 동화책 같은데?”
“아니야. 그딴 거.”
“1억을 빌려달라고 해.”
그가 말했다. 난 그를 바라보며 제발 기다려 보려고 말을 하려다 그가 지금껏 충분히 기다렸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 뭐해? 혹시…”
“내 번호는 용케 알고 있었네?”
난 그를 슬쩍 바라보았다.
“도망을 갔으면 번호도 바꿨어야지.”
“도망간 여자한테 전화는 왜 해?”
그녀가 날카롭게 말했다. 잠시 침묵 후 그녀가 말했다.
“자기는 내 번호 모를 줄 알았어.”
이번엔 내가 침묵을 지켰으나 오래 끌 수는 없었다. 그는 한켠으로 물러가 어떻게 찌르면 잘 찌르나 예행연습이라도 하듯 칼을 이리저리 휘둘러보고 있었다.
“나 돈 좀 빌려 줘.”
그가 나를 쳐다보았고 그와 동시에 수화기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돈?”
“1억만.”
그가 미소 지었다. 그는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수화기로 귀를 들이댔다.
“지금 돈을 빌려달라는 말이 나와?”
그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허벅지께에 있는 칼이 어쩐지 번쩍번쩍해보였다. 목소리가 계속 흘렀다.
“거기다 1억? 이 미친놈이 미쳤나.”
“금방 갚을게.”
내가 습관처럼 말했다. 또 웃음소리가 들렸다. 양 옆에서.
“또 어디서 돈을 빌렸니? 아니면 써야 되니? 어디니? 내가 지금 칼로 찌르러 갈테니.”
“그럴 필요 없소. 내가 찌를 거니까.”
그가 말했다. 난 재빨리 수화기를 막았지만 소용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옆에 누구야?”
“아무도 아니야.”
또 침묵 후 그녀가 말했다.
“상관없어. 술 취했으면 곱게 자고 안 취했으면 저리 꺼져, 이 미친놈아.”
“끊어.”
그가 말했다. 난 그를 바라보다 전화기의 번호판을 바라보았다. 번호판에 먼지가 많이 끼어 있었다.
“번호는 왜 안 바꾼거야?”
내가 물었다.
“뭐?”
“번호 말이야.”
“난 회사원이니까. 회사원이 번호 마음대로 바꾸리?”
그를 슬쩍 바라보니 그는 예수가 마지막 만찬을 먹었듯 마지막 대화를 계속 하라는 듯 팔짱을 끼고 있었다.
“혹시 내가 전화할까 봐 그런 거 아니야?”
“이거 연극 맞지?”
“한 김에 연극 계속 해볼까? 나 1억없으면 죽어. 그러니까 1억만 빌려줘.”
“거기까지.”
그가 수화기를 뺏어 덮으며 말했다.
“선을 넘었어. 반칙이야.”
난 그를 바라보았다.
“발악이었어요.”
“지랄도 작작해야 애교라네. 일어나. 빨리 처리하러 가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일으켰다. 힘쓰면 내 눈깔이 다친다는 듯. 엎어줄 태세였다.
“별로 안 아플 거야. 살아있는 상태에서 뽑아야 싱싱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든가 말 잘 들면 마취로 끝내지. 물론 영원히 암흑 속에 살아야겠지만.”
그는 내 셔츠의 어깨선을 잡고 끌었다. 난 그가 절대 좋은 할아버지가 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손주에게 가르칠 것이 주먹과 삥 밖에 없을 테니까. 난 전화기를 쳐다보았다. 전화기는 조용했다. 마지막 순간 전화가 울린다던가 하는 건 없었다. 영원히.
그녀는 나를 찾아왔다. 막 현관문을 열 때였다. 반쯤 열린 현관문으로 초인종을 누르려던 그녀가 보였다. 세 명의 사람은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놀란 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얼굴이 거의 물에 불린 감자가 된 피투성이 남자 때문에, 그는 집을 잘못 찾아온 건 아닌 듯 멀쩡한 허우대로 초인종을 누르려는 젊은 여자 때문에, 나는 원래 놀라 있었다.
제일 먼저 말을 꺼낸 건 나였다. 난 아내를 보며 말했다.
“너야?”
아내도 똑같이 물었다.
“너야?”
“나야.”
“나도.”
잠시 우린 아무 말이 없었다. 그가 말했다.
“방해해서 미안하네만 좀 비켜주겠소? 처리할 일이 있어서.”
그가 내 옷을 잡아당겼다. 그녀는 굳어버린 건지 아니면 비켜줄 마음이 없는건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짤막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무슨 일인지 대충 알겠군.”
“항상 일어나던 일이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한데.”
“외상일 뿐이오. 내상을 못 보셨 구만.”
그녀는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슬쩍 쳐다보다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경찰을 부르겠어요.”
그가 낄낄 거렸다.
“편하실 대로. 하지만 적어도 공기가 있는 곳에 나를 모르는 경찰은 없을 거요. 저기 제주도에 신고를 해보지 그래요? 거기라면 혹시 모를까.”
“당장 그 손 놔요.”
“대신 당신을 잡아갈 순 없잖아.”
그녀는 입술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야, 라고 말하는 눈빛이었다.
“찾아올 줄 몰랐는데.”
내가 말했다. 그녀는 자기도 왜 그런 짓을 해서 골머리를 썩히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술을 마셔서 그래. 마시면 감상적이게 되거든.”
“술 별로 안 마시잖아.”
“데이트할 때는 다르잖아?”
맞는 말이었다. 그녀와 첫 관계를 한 것도 술을 마시고 나서였다. 망할 년.
“망할 년.”
그가 재밌다는 듯 낄낄 거렸다.
“부부는 하늘이 정해준다는 말이 맞는가 보군. 아주 쿵짝이 잘 맞아. 하지만 거기까지야.”
그는 다시 나를 끌고 가려 했다. 그녀가 손으로 막기까지. 그녀는 내 어깨를 잡아 끄는 영감의 손등을 후려치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죠?”
“아는 의사한테.”
“세상에.”
그녀가 마치 열이 난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나요?”
“이제는 무덤덤할 때가 되지 않았나?”
“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리에요?”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내가 황급히 둘러댔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다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1억은 없어요.”
“안타깝군. 사랑하는 남편이 밥을 먹으려고 탁자를 더듬거리는 꼴을 봐야 하다니.”
“그딴 건 관심 없어.”
그녀가 냉랭하게 말했다.
“다만 이 나라의 성량한 사회복지사로써 말도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거에요.”
“복지사였나?”
그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다 그녀를 쳐다보았다.
“대체 뭐가 부족해서 인생을 막장으로 사는 거야?”
“저도 모르겠어요. 그건.”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됐다는 듯 손바닥을 들어 올리고 다시 나를 끌고 가려 했다.
그녀가 말했다.
“차차 갚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난 은퇴야. 완전히 발 뺄 거라고. 그 전에 돈을 빨리 받아야 돼. 그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지. 현재로써 말이야. 로또를 맞던가 그냥 갚던가.”
그가 내 사타구니 조금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비어 있을 그 부분이 욱씬거렸다.
“먼저 3천을 드리죠.”
그녀가 숨을 한 번 몰아쉬며 말했다.
“그 다음 우리 둘이 50씩 해서 한 달에 100씩 갚아드릴게요. 정말 연금 복권이지 않아요?”
그는 진정으로 솔깃하다는 듯 나와 그녀를 훑어보았다. 정말 빚 받을 게 1억이었다면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나를 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난 받을 게 2천이고 저 여자는 즉시 3천을 줄 수 있다고 하는군. 그럼 난 2천만 받으면 되는 거야.”
“그럼 그렇게 해요.”
“그렇지. 그러면 되지. 하지만 자네 가치가 고작 3천 밖에 되지 않을까?”
“그건 또 무슨 개소리에요?”
“난 저 여자에게 진정으로 흥미를 느끼네. 그래서 몇 번 더 시험을 해볼까 하는데. 어때?”
“절대 개소리에요.”
“2천은 받지 않겠네.”
난 눈알을 굴렸다.
“좋을 대로 해요.”
그는 헛기침을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무슨 소리를 했는지 몰라도 어때요?”
그가 고개를 돌렸다.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 언제 도망갈 줄 누가 아나?”
“제 남편이 도망간다고 그래요?”
“남편과 얘기한 건 시시콜콜한 것이었어. 아무튼 난 급전이 필요해. 그럼.”
그가 다시 나를 잡아끌었다.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봐.”
난 하라는 대로 했다. 사실 표정 짓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 됐는데 지금도 충분히 죽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그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아예 없는 건 아니라고.”
난 본능적으로 말했다.
“콩팥인가요?”
“아닐세.”
그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난 당신과 하룻밤을 원해.”
숨이 턱 막혀 온 것이 바로 이것일까? 난 뱀이 모가지를 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넋이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결혼식장에서 신부와 신랑 사이에 또 다른 사람이 껴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정의 완벽한 붕괴였다.
“뭐라고요?”
그녀가 물었다.
“말도 안 돼!”
나도 소리쳤다.
“1억의 가치로써는 쓸 만하지.”
“1억이 아니잖아!”
내가 소리쳤다. 난 그녀를 보며 소리쳤다.
“1억이 아니야! 2천이라고! 2천이면 돼! 그러니까 이런 개소리는 무시해버려!”
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1억 2천이라고?”
“2천이네.”
그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2천이면 돼.”
“그러니까 2천만 주면 되잖아!”
그가 고개를 저었다.
“거기가 황금으로 되어있고 고자도 가게 만드는 전설적인 창녀도 잠자리에 2천은 받지 않을 걸?”
“무슨 소리야?”
내가 말했다.
“무슨 개소리냐고?”
“2천이 2천원은 아니잖아? 아마 최대 한도가 3천인 것 같은데, 한 번 자는데 모든 걸 삭감해준다면 꽤 괜찮을 것 같은데?”
“무슨…”
그녀가 쉿쉿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니까 뭐야? 그럼 왜 1억이라 한 거지?”
“가치지.”
그가 말했다.
“이 자식의 가치의 기준을 알고 싶었어. 그래서 1억을 선뜻 빌려주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빚을 모두 탕감해준다고 했지. 난 정말 은퇴하거든. 보다시피.”
그가 주름살이 제법 심한 목과 눈가를 차례차례 가리키며 말했다.
“은퇴야.”
그가 미소 지었다.
“2천 받고 꺼져버려.”
내가 냉혈하게 소리쳤다.
“누가 2천을 준데?”
그녀가 말했다. 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우리 둘을 쳐다보았다.
“2천이 얘들 장난이야? 한 달에 200버는 년이 2천 벌기가 쉬워?”
“무슨 소리야, 당신?”
“내가, 씨팔 왜 당신하고 결혼했지?”
“무슨 소리냐니까!”
“난 아무 것도 안하겠어.”
그녀가 말했다.
“그냥 콩팥 떼줘 버려.”
그가 웃었다.
“내상이 심하다니까.”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
“내상이 너무 심각해. 이제는 눈깔 밖에 안 남았어.”
그가 혀를 비죽 내밀었다.
“아니면 나머지 콩팥마저 떼줘 버리고 병신으로 살던가.”
그녀가 바늘에 궁둥이 찔린 것마냥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알잖아. 나 쓰레기인 거.”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깨를 으쓱거릴 것 밖에 없었다. 그녀는 주먹을 부르르 쥐었다.
“이건 완벽한 이혼감이야.”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완벽한 구제불능이야.”
그는 나를 잡아당겼다. 그는 현관문을 열었고 밖으로 나갔다. 물론 나도. 그녀는 멀뚱히 나를 쳐다보았다.
따라오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 소리가 뱀처럼 내 귀를 파고들었다. 두려움이 덮쳐왔다. 난 바둥거렸다. 물에 빠진 5살 아이 마냥.
“한 번 줘버리면 되잖아! 그냥 한 번 대주면 끝나잖아!”
그녀는 씩씩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처녀를 주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계속해서 버둥거렸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더 세게 내 셔츠를 쥐어 잡았다.
“다른 남자한테 막 주는데, 남편을 위해서는 못 주는 거야?”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 말도.
현관문이 천천히 닫혔다.
“경찰에라도 신고해보라고! 이 망할 년아!”
그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끌려갔다. 넘어질 것 같아서 몇 번이고 핸드레일을 잡았다. 그때 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자네의 가치는?”
그가 나를 보며 속삭였다.
나도 모른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난 그냥 눈을 감았다. 귀도 막아버렸다. 이 암흑이 끝나던 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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