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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Knights of Cydonia

2011.11.11 01:4811.11

아버지의 실종이 명확해지자, 사람들은 아버지가 실패했다고 말했다. 그것도 너무 쉽게. 마치 애초부터 아버지가 실패하기를 기다려왔던 사람들처럼. 사람들은 아버지의 실패에 과장된 수사를 덧바르고 의미를 채색해 성마른 애도사를 생산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떠난 순간부터 아버지를 기다린 나에게, 사람들의 애도는 일종의 과격하고 서툰 네크로필리즘처럼 느껴졌다. 산 사람을 질식시켜 절벽 너머로 떨어트린 후에야 먼 곳을 향해 바치는 애도. 그건 누구를 위한 애도였을까?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성공 같은 걸 믿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좌절한 영웅의 무덤에 꽃을 무더기로 바치며,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향해 엄숙한 제의를 행하고, 아직 먼발치서 빛나는 희망과 막아내야 할 절망을 노래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희망은 그런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 절망도 마찬가지로 도래하지 않는다. 삶이란 원래 그 중간의 어디쯤을 부표처럼 떠다니다가 고요히 썩어가기 마련이란 걸, 상상력이 부족한 이들은 미처 떠올리지 못한다.



아버지는 시대의 상식을 거부한 사람이었다. 언제 어디에나 이런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아버지의 젊은 시절은 이 시대의 가장 폭압적인 상식, 즉 사이도니아 기사단이 창설되고 자리를 잡던 시기라는 점이 중요하다.
사이도니아 기사단은 ‘실재하는 외계의 위협으로부터 인류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기사단 헌장 첫머리에 새겨진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두말할 것 없이 ‘실재(實在)하는’ 이다. 기사단은 해왕성 궤도에서 접근하는 일련의 외계 함대가 공식 확인된 후 창설이 결의된 국제단체이기 때문이다. 기사단은 외계 문명과의 최초접촉을 준비하고 그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인류의 첫걸음이었다. 물론 초창기의 기사단은 단순한 자문기구였을 뿐 권력집단이 아니었고 이름도 기사단이 아니었다. 지구상의 어떤 권력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자문기구가 세계정부를 방불케 하는 규모로 성장한 것은, 물론 기사단을 이용한 강대국들의 신경전과 이것을 거꾸로 이용한 기사단장의 교활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 역시 항공모함 스카이-스크레이퍼호 침몰사건으로 시작된 일련의 소동들이 큰 역할을 했다.
미 태평양함대 소속 스카이-스크레이퍼 호는 사고 당시 남지나해를 항해 중이었는데, 한밤중에 선체 중앙이 동강난 채 침몰했다. 삽시간에 수천 명의 군인이 희생당했다. 그런데 간신히 구조된 생존자들도, 곧바로 사건 조사에 착수한 미 군부도, 수 일이 지나도록 사고의 원인을 뚜렷이 밝혀내지 못했다. 누군가 함선에 공격을 가했거나, 함선 내부에서 테러가 자행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사건이란 걸 전 세계인이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누가,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국내의 엄청난 비난여론에 직면한 미국이 유난히 초조했던 이유는 마침 대선이 눈앞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머지않아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용의자, 중국이 대두됐다. 하지만 중국은 스카이-스크레이퍼호가 자국 근방에서 침몰했다는 이유만으로, 뚜렷한 증거도 없이 잠재적인 용의자로 몰리는 것을 적잖이 불쾌하게 여겼다.
국제사회의 기류가 걷잡을 수 없이 험악해지는 와중에 결국 중재에 나선 것이 최초접촉상황연구소, 오늘날의 기사단이었다. 기사단은 사건조사 보름 만에 이 사건을 외계인의 소행으로 결론내리고 UN에 최종 보고서를 올린다.
그 결과, 일주일 후 치러진 대선에서 미국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했다.
당시 취재기자로 현장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이 사건에 대해 제법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기사단의 최종 발표를 비웃었다. 아마도 기사단의 발표를 들은 전 세계인의 반응이 모두 비슷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중차대한 사건의 조사에 나선 국제기구가 외계인의 무력행사를 처음으로 ‘공식’ 인정했다는 충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정권교체 후 미국은 재조사에 임했지만 만족할만한 결론 – 즉 국제관계를 험악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국내 여론을 안정시키는 – 은 좀처럼 찾기 힘들었다. 기사단장, 당시 최초접촉상황연구소장은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UN과 미 정계를 바쁘게 뛰어다니며 조금씩 자신의 입지를 넓히고 기사단의 초석을 닦기 시작했다.
침몰 사건 2년 후, 기사단장은 UN 총회에 출석해 스카이-스크레이퍼호 침몰사건의 재조사를 촉구하는 한편 외계의 위협이 가까이 왔음을 경고한다. 이 때 기사단장의 연설이 전 세계에 사이도니아 기사단 창설을 처음 공표하게 된 역사적인 연설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단장은 연설 말미에 평소 좋아한다고 밝힌 뮤즈(Muse)의 노랫말을 인용해 미 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How can we win when *these* fools can be kings?
Don't waste your time or time will waste you.
You and I must fight for our rights.
You and I must fight to survive.”

이듬해, 재조사에 돌입한 스카이 스크레이퍼호 침몰사건이 외계인의 소행으로 공식 인정되고, 기사단이 창설된다. 기사단장의 역사적인 연설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이름은 사이도니아 기사단이 되었다. 아버지는 현장에서 기사단의 창설을 비웃는 기사를 쏟아내다가 해직 당했다. 아버지는 아직, 한 시대의 상식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기사단의 영향력이 커지지 않은 시기였던 덕택에, 아버지는 금세 다른 직장을 잡고 자신의 논조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고작 몇 해 후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늘날까지도 기사단의 권력에 그 위세를 제공하는 사건 – 인베이젼Invasion이 발발한 것이다.
아버지의 증언에 따르면, 인베이젼은 “광기 그 자체” 였다. 그것은 이후 한 세대를 지배하게 될 상식이 만들어지는 현장이자 일종의 시대적 트라우마가 세계인의 집단지성 한복판에 새겨지는 현장이기도 했다.
인베이젼 역시, 기사단장의 연설에서 시작됐다. 그는 미 상원에 출석한 자리에서, 세계 곳곳에 외계인의 하수인이 암약하고 있다며 유력한 세계 정·재계 인사의 실명을 거론했다. 그 중에는 현재 상원에 출석한 의원 한 명도 속해 있었다. 지적당한 의원이 단상에 올라와 기사단장에게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우리는 매카시즘을 경험한 나라이며, 이제 와서 똑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하진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가치와 시민의 힘을 경시하고 공포로 진실을 짓누르려 하는 교활한 수법은… 항의 연설이 절정에 다다를 무렵에 총성이 울렸다. 연설하던 의원이 쓰러졌고, 기사단장이 권총을 든 채 당황한 의원들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그는 즉각 총을 들고 출동한 국회 경위들에 의해 저격당하기 직전- 단상에 쓰러진 의원의 얼굴 가죽을 잡아 뜯었다. 고무 반죽처럼 찢겨져 나간 얼굴 뒤편으로 흉측한 녹색 피부가 드러났다. 아마 지구상의 누구라도 그 순간, 그 녹색을 보고 떠올릴 것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었으리라. 기사단장은 의원 – 그러니까 외계인 – 의 시체를 짓밟고 서서, 경악한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인을 향해 던지는 경고였다.
국회 사무처에 의해 고스란히 녹화된 이 영상은 단 몇 시간 만에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기사단은 곧 UN보고서를 통해 이와 같은 수법으로 지구에 침입[Invasion]한 외계인의 1차 리스트를 공개하는데, 아버지는 이 보고서 자체가 정치적으로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미 누구에게도 먹혀들 리 없는 주장이었다. 기사단의 리스트에 기재된 이들은 모두 신속히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가 실제로 외계인의 하수인임이 밝혀졌다(고 한다). 당연히, 아직도 지구상에 암약하고 있는 침입자가 더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세계를 사로잡았다.
이 무렵 외계인 감별을 위해 가장 유행했던 질문이 “스카이-스크레이퍼호 침몰사건이 외계인의 소행이란 걸 믿습니까?” 였다. 어떤 반론이나 여백도 존재할 수 없이 꽉 막힌 질문과 동반된 것은 그 질문 못지않게 무식한 폭력사태였다. 세계 곳곳에 외계 침입자를 축출한다는 명분 아래 활동하는 자경단, 시민단체, 정치세력이 출연했다. 결국 치안공백을 우려한 각국 정부가 기사단에 외계인 구별법을 공개할 것을 요구했지만, 기사단은 “그것은 기밀 정보이며, 지구 차원의 안보를 위해 있을 수 없는 일” 이라며 요구를 일축했다. 기사단장은 아예 한발 더 나아가 지구 궤도를 향해 접근중인 외계함대에 대한 정보 공개도 중단해 버렸다. 외계인에 대한 거의 모든 ‘믿을만한’ 정보는 지구 안보의 기치 아래 미지의 영역으로 사라져 버렸다. 기사단의 영역 바깥에 남은 거라곤 근거 없는 공포와 억측뿐이었다.
아버지는 데스크와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지면과 전파를 이용해 기사단의 정보차단과 월권행위에 대해 강력히 반발했다. 하지만 이미 모든 정보와 증거는 기사단의 손아귀에 있었고,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나약한 추측과 무너져가는 상식의 힘으로 쓰러지지 않기 위해 힘겹게 버티는 것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너무 쉽게 결론내리거나 포기했다. 쉽게 결론내린 사람들은 기사단이 지구를 지켜주고 있다고 믿었으며, 포기한 사람들은 기사단이 지구를 지켜주건 말건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별 상관은 없었다. 기사단이 세계경찰권을 위임받고, 정치범을 양산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으로 정복한 몇몇 국가에 대한 실질적 행정 권력과 막대한 이권을 손아귀에 넣고, 이윽고 독자적 군사권을 손에 넣었을 때에도 지구는 아직 멸망하지 않았으니까.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드는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긴 했지만 대부분 TV 속의 일이었고, 그저 이따금씩 외계인 색출을 위한 혈액검사에 동참하기만 하면 보통 사람들의 일상은 비교적 잘 유지되는 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모든 증거는 조작되었으며 외계인에 대한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기사단 비밀경찰이나 기사단의 내정간섭을 껄끄러워하는 당국에 체포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아버지가 상식을 거부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단순한 순응파나 온건한 반대파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더더욱 시끄럽게 소리를 내어 아예 반대파의 거두가 되는 쪽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열한 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의 얼굴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상식을 거부한 대가로 아버지는 세상에 끈질기게 흔적을 남겼다. 아버지의 발언 하나 하나는 늘 기사화되어 신문과 방송에 실려 나왔다. 아마도 기사단은, 어느 순간 아버지를 세상에서 아예 지워버리는 것보다는 아버지의 흔적과 공존하는 편이 좀 더 경제적이란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다만 그것은 단편적이고 왜곡된 흔적이었다. 신문과 방송에 남은 아버지의 흔적은 고약하고 교활한 외계세력 추종자, 혹은 좋아봐야 세상을 모르는 지나친 이상주의자 정도로 비춰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아버지가 신문이나 TV에 나올 때면 그저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건조하게 말할 뿐이었다.

“저 인간이 네 애비다.”

어머니의 결혼 조건은 아버지가 부서를 문화부나 경제부로 옮기고, 외계인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이었다고 한다. 아이를 가지는 조건은 더 확고했다.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 집에 붙어있지 않으면 아기를 해외입양 시켜버리겠다고 협박했단다. 물론 둘 중 어느 것도 지켜지지 않았건만, 그래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무수한 말들과 시간의 포화 속에서도 어머니는 아버지의 실패를 예단하지 않았고 늘 집에 없는 아버지를 영웅으로 떠받들지도 않았다. 다만, 기다릴 뿐이었다. 어머니의 기다림은 늘 가파른 희망과 숨막히는 절망 사이를 기약 없이 떠돌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바칠 수 있는 어떤 애도나 찬사보다도 삶의 진실된 맥락에 가깝게 가닿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내가 열한 살 되던 해에 결실을 맺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난장판이 되어버린 집 한 구석에 아버지가 앉아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은 채 혼자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아버지가, 나는 이상하게도 익숙했다. 항상 TV나 신문에서 보던 사람이라 그랬던 걸까, 아니면 언젠가는 돌아올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팔을 툭툭 치며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나를 유난히 낯설어했던 것은 오히려 아버지 쪽이었다. 마치, 자신에게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듯이.
나는 그 순간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아버지, 그런데 어머니는 어디 가셨어요?”

아버지는 나를 한참동안이나 내려 보다가, 품을 벌려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아마도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아이에게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만큼 상상력이 풍부하고 성실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어머니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어머니를 사랑했으니까,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뭐, 사실 그런 얘기를 상세히 들을 만큼 함께한 시간이 길지도 못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두 분의 사연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는지, 연애를 하긴 했는지, 외계인에 대한 어머니의 의견은 어땠는지.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등등. 그러니 내가 아는 거라곤 어머니가 누군가를 온전히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뿐이다. 나는 아직까지 그런 사람이라곤 어머니밖에는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먼 곳으로 떠났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도시였고, 앞으로 십수 년간 내가 살게 될 곳이었다. 맞다. 이제는 반군의 중심지로 불리는 미스테리 서클, 나는 전 세계에서 UFO가 가장 많이 출몰한다고 알려진 그 저주받은 지역의 중심부에 살고 있다. 물론 나는 단 한번도 UFO 따위를 목격한 적이 없다. 내 눈에는 오히려 간헐적으로 이곳을 정리하러 병정개미처럼 달려드는 기사단 휘하 비밀경찰들이 더 자주 보인다. 총성과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지만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여기가 밖에서 보기보다는 안전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미묘한 정치적 이유가 있다. 기사단이 아버지를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대신 세상에 남겨놓는 것을 택한 것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반군의 활동이 뉴스를 점령하고 기승을 부릴수록 기사단의 권력도 그에 비례하여 강대해지니까.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일각의 해석이란 점이 문제다.
반군 내부에도 세력이 분분해서, 일각에는 외계인의 존재를 실제로 믿고 따르는 분파가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또 일부분은 자신들이 실제 외계 함대와 교신에 성공했다고 주장하며, 그들이 머지않아 압제에 시달리는 지구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이들은 일종의 종교집단에 가깝다.
한편으론 외계인은 존재하나 아직 교신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분파도 있는데, 이들은 지구에 존재하는 외계인을 무작정 ‘침략자’ 로 규정짓고 살해하는 행위가 큰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한다. 즉, 우주적 평화주의자인 셈이다. 이들은 기사단이 실제 외계인의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에 반군을 섬멸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거나, 반군이 실제 외계 기술을 통해 기사단을 상대하기 때문에 미스테리 서클이 온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런 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발 디딘 땅에서 한 뼘도 날아보지 못한 인간이 섣불리 상상하기에 이런 말들은 너무나도 우주적이다.
좀 덜 우주적인 분파는 어떨까? 외계인의 존재를 믿지 않는 세력 간에도 분파가 다양해서, 그들의 침략은 부정하지만 함대의 존재는 믿는 세력, 침략과 함대의 존재 모두 부정하는 세력, 침략과 함대의 존재 모두 인정하되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고 믿는 세력 간의 계파갈등이 나름 심각한 편이다. 그래봐야 모두 한 줌도 안 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일이니- 누가 누굴 싫어하고 좋아하건, 떨거지들의 사정은 딱히 신경 쓸 일이 못된다. 어차피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일이다. 그들이 아는 단체는 오로지 하나밖에 없다. 암살단.
암살단은 민간에서 쫓겨나 이 곳, 미스테리 서클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을 ‘반군’ 이라 칭할만한 빌미를 제공한다. 그들은 자존심만 살아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이상적 평화주의자들과 입만 살아 정신적 상해만 입히기 일쑤인 단순 마초들만 가득한 이곳에서 유일하게 치명적인 무력을 사용하는 집단이다. 그러나 외계인의 접근에 대한 암살단의 정확한 입장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아마 암살단의 수뇌부라 할지라도 이 입장을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버지의 취재에 따르면 – 애초에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미스테리 서클에 자리를 잡을 무렵, 아버지는 이미 국제적으로 큰 명성을 얻은 언론인이었고, 아마도 입으로만 떠드는 저항활동에 제일 먼저 환멸을 느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기사단의 가장 큰 무기가 무력이 아닌 공포이기 때문이었다. 힘으로 짓밟은 자들은 힘이 빠질 때까지 끝없이 기어오르지만, 공포로 굴복시킨 자들은 공포가 가실 때까지 언제까지고 제 발로 기어들어간 수렁에 처박혀 있기 마련이다. 아버지는 전 세계가 기사단의 공포 앞에 제 발로 무릎을 꿇고 근거 없는 굴종의 수렁에 몸을 던지는 것을 무력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해직시키고, 책 출간을 저지하고, 라디오 채널을 차단하고, 법정에 세우고, 감옥에 집어넣은 것이 어디 기사단장 개인의 의지였을까? 권력 앞에 제 발 저린 자들이 벌이는 하찮은 방해활동에 허우적대다가 어딘가로 자빠지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기어코 그 자들이 아내를 잡아가고 아이를 고아로 만들었는데도?
아버지의 저항활동은 오랫동안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본질 – 즉 외계인의 존재와 관련한 인류의 태도 – 로 다가선다고 해서 문제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얼마 되지 않는 반군들은 앞서 설명한 몇 개의 분파로 나뉘어 서로 배척하고 딴죽을 울리는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들 모두를 섣부르게 욕하기보다는, 보다 깊이 생각했다. 아마도 암살단을 만나게 된 것이 결론을 내릴 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열네 살이 된 해였다. 세계인의 머릿속에 반군과 암살단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사건이 발발했다. 교황청을 방문 중이던 기사단 고위간부가 호텔에서 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기사단은 이 사건을 외계인의 소행으로 돌리고 싶었겠지만, 이미 발 빠른 암살자는 인터넷에 동영상을 띄우고 스스로의 정체를 공개해 버린다.
짤막한 비디오에서 암살범은 사건현장인 호텔에 직접 복면을 쓰고 등장했다. 침대 위에는 이미 숨이 끊어진 기사단 고위간부가 누워있었다. 일단 시체 옆에 서서 직접 그가 사망했다는 걸 카메라에 비춘 범인은 딱딱하고 서툰 영어로 말했다.

“우리는 암살단이다. 이 영상을 보고 있는 세계인에게 경고한다. 오늘날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외계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그들. 사이도니아 기사단이다. 그대들이 일치단결하여 이들을 몰아내지 못하면, 외계인이 도래하기도 전에 지구는 산지옥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암살단이다. 우리는 백신이다. 그대들이 스스로를 정화할 능력을 갖출 때까지, 그대들을 정화할 것이다. 명심하라.”

아버지는 비디오를 보자마자 로마로 날아갔다. 그리고 아마 그 곳에서 처음으로 암살단의 누군가와 마주했을 것이다. 자정능력을 잃은 인간들을 스스로 정화하겠다는 이들의 논리에 아버지가 얼마나 수긍했는지, 혹은 이들 조직을 이용해먹을 구체적인 복안을 갖춘 것뿐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어쨌건 아버지는 이 날 이후 암살단에 합류했고, 암살단에 합류한 이후 아버지와는 자세히 얘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으니까. 아버지는 오래도록 로마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 대신 집으로 찾아온 암살단의 요원과 함께 집을 옮겼다. 이후로도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분주하게 거처를 옮겨야 했다. 아버지의 구체적인 생각이야 어찌됐건 아버지가 내 처지를 훨씬 위험하게 만든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암살단에 합류한 이후로 아버지는 글쓰는 일을 중단했다. 절필을 공개선언한 일이야 없지만 아마 그런 짓까지도 저열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때문에 이후 실종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생각은, 나를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도 알려진 바가 없다. 짤막한 대화를 나누거나 눈빛을 교환한 것으로 누군가의 깊은 생각을 알 수 있는 거라면, 그나마 같은 집에 살았던 내가 아버지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가닿았을 확률이 높다. 암살단에 합류한 이후로 아버지가 제일 많이 했던 말은,

“미안하다.”

였고, 그 다음으로 많이 한 말은,

“무섭구나.”

였다.
미안하다는 것은 나에게 한 말이고 무섭다는 것은 자신에게 한 말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무엇이 미안하다는 건지는 알 수 있지만, 무엇이 무섭다는 건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말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절망 속에서 간신히 길어 올린 한 마디라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를 그토록 절망케 했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아마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도 ‘그것’ 일 것이다. 나는 아버지도 그게 뭔지는 잘 몰랐으리라고 생각한다. 직접 사람들의 목숨을 끊는 게 무서웠을까. 그러다가 자기가 누군가에게 죽게 되는 게 무서웠을까. 아니면 그러다가 하나 남은 자식도 누군가에게 잡혀가고 세상에 홀로 남게 되는 게 무서웠을까. 혹은 어찌어찌 그 모든 걸 다 겪어내고 난다 해도 세상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까봐… 그게 무서웠을까.
바티칸 암살 이후 기사단이 공식적으로 ‘암살단의 소행’ 이라 인정한 살인사건은 100건 남짓이다. 하지만 이 중 대부분은 암살단이 직접 스스로의 소행임을 인정한 것이고, 실제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크다. 기사단은 암살단의 존재를 감추려고 애썼다. 어째서? 기사단은 암살단과 같은 링 위에 서기를 꺼려했다. 기사단이 창설 이래 처음으로 누군가와 맞서 싸우기를 피한 것이다. 아니, 사실은 창설 이래 기사단에게 정면으로 도전한 집단이 아예 없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기사단은 정치집단이다. 이들은 복잡하고 교활하고 은밀하게 활동한다. 하지만 암살단은 범죄자 집단이다. 이들은 훨씬 단순하고 노골적이며 충격적이었다. 순수한 충격 앞에서 암살단을 외계인 추종집단으로, 지구 종말을 몰고 올 집단으로 묘사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오래된 프레임이며, 따라서 누구라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그림이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충격을 마주한 사람들이란 항상 자신들의 상상 너머에 있는 것을 원하기 마련이다. ‘인류의 백신’ 암살단은 그것을 가져다주었다. 조금씩이지만, 세계 곳곳에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 자신을 수렁 아래 무릎 꿇린 자들을 직시하는 조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기사단은 암살단을 세계에서 지워버려야 했다. 어떤 흔적조차도 남김없이.
이에 암살단은 – 어쩌면 최종 목표라 할 수 있는 암살대상을 설정한다. 기사단장을 암살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 임무에 자원한 것이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그 날 저녁을 나와 함께 먹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무슨 임무를 맡았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유난히 깊었던 침묵을 깨고 딱 두 마디를 꺼냈다.

“미안하다.”

그리고

“나는, 무섭구나…”

이 날 밤, 암살단은 임무를 받고 집을 떠난 아버지와 연락이 끊겼다. 기사단장은 석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있다.
암살단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아버지가 석 달 전에 기사단장 암살 임무를 받고 떠났지만 애석하게도 실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네들은 아버지의 실패에 관한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모든 증거는 여전히 기사단의 손 안에만 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려면, 흡사 손끝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몸을 뒤채는 느낌이 든다. 나는 암살단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무엇을 강요했으며 무엇을 기대했는지 그저 막연히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말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않겠니?”

나는 기가 막혔다.

“당신들은 마치 실패를 예정하고 움직이는 사람들 같군요. 이러려고 저를 훈련시킨 건가요? 그간 제가 숨통을 끊은 일곱 명은 거룩한 복수극이나 웅대한 실패를 위해서 쌓아올린 주춧돌 같은 거였나요? 아버지가 죽었다는 증거를 가져와요. 아니, 기사단장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증거를 가져와요. 그것도 못하겠으면 아버지가 기사단장을 죽이고 싶어 했다는 증거를 가져와요. 전부 다 안 되겠으면, 기사단장이 죽거나 내가 죽으면 세계가 좀 더 아름다워질 거라는 증거를 가져와요. 아무 것도 못하겠어요?”

그는 침착하게 응수했다.

“너는 할 수 있고, 우리는 너를 택한 것뿐이야. 정 네가 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을 보내겠다. 하지만 그건 누구에게도 최선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 뻔뻔한 면상에 쏟아 부을 말이 수천가지는 넘게 떠올랐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는 과연 기사단장을 암살하고 싶었을까. 아내를 잃고 스스로 암살자가 된 후 자식에게도 암살 훈련을 시킨 사람이 떠올릴만한 최종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아버지의 투쟁을 하찮은 복수극으로 마무리 짓고 내 손으로 그것에 종지부를 찍을 용기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웅대한 영웅극으로 만들고 내 손에 세계를 구할 피를 묻히는 것은 더더욱 상상하기 싫은 일이었다. 암살단은,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은, 어쩌면 기사단 스스로도 그런 결말을 좋아하겠지만- 남의 삶에 그런 식으로 간섭하는 것은 그가 누가 됐던 간에 몰상식한 짓이다. 더구나 그 사람은 내 아버지였다.
암살단 사람들은 내 완곡한 거부를 받아들이고 집을 떠나갔다. 나는 어머니가 그러했듯, 아버지를 기다리기로 했다. 아버지가 실패를 인정하고 스스로의 삶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아버지는 곧 내 기다림에 부응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너무 빨랐다. 그리고 이 뜻밖의 귀환 앞에선 나 역시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었다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마침내 아버지가 방에 들어와 불을 켰다. 나는 몸을 파묻었던 거실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외투를 현관 옷걸이에 걸던 아버지가 인기척을 느끼고 날 돌아봤다. 짧게 눈빛이 스치는 순간, 아버지는 흠칫 놀라는 눈치였고 내 심장박동은 주체할 수 없이 격해졌다. 꼬박 삼 년 만의 부자 상봉이다. 인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나는 손에 든 권총을 들어 아버지의 가슴을 겨눴다. 아버지의 동공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안녕하세요. 딴 생각 말고 손드세요.”

아버지는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나는 딱딱하게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어요. 아쉽네요. 사실 나도 아버지 변명을 더 듣고 싶었는데… 못 만났던 동안 TV에서 들은 걸로 대신하면 되겠죠. 대체 왜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하다. 하지만 나도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고민이 많았어. 내가 왜 스스로 내 신뢰를 떨어뜨리는 그런 말들을 자초했겠니. 네가 실망할 건 짐작하고 있었다. 암살단에서 날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내가 한 말들은 변명이 아니다. 진심이라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좋아요. 설명해 봐요. 아버지의 진심이란 건 이런 거겠죠. 스카이-스크레이퍼호는 외계인이 침몰시켰고, 그 외계인들은 지구인으로 변장한 채 세계 정 · 재계에서 암약하고 있으며, 기사단은 그걸 사전에 탐지하고 지구 방위와 안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간혹 인권탄압, 소수의견 묵살, 무고한 피해자 발생과 같은 피해가 있었으나, 이는 보다 큰 목적을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세계인은 기사단의 뜻 아래 단결해야 하며, 아닐 경우 지구는 머지않아 정복당하고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확한 정보를 밝힐 수는 없지만* 해왕성 궤도에서 처음 발견된 외계함대는 지금도 지구로 접근하고 있다. 맞나요?”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언제 자기가 틀렸다는 걸 알았나요?”
“…꽤 오래된 일이다.”
“어머니가 실종됐을 무렵이었겠죠? 그래서 그렇게 미안하고 겁났던 거죠? 부정확한 신념으로 자식을 위험에 빠트리는 게 미안했고, 언젠가 자신이 정말 틀렸다는 걸 인정하게 되는 게 겁났고?”
“나는…”

아버지가 고개를 숙였다.
자기모순에 빠진 아버지가 자기모순이란 말조차 제 손으로 적지 못한 채 절필하고, 암살단에 몸을 의탁해서, 그럼에도 자신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상상했다. 아버지가 기사단 기관보를 통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시작한, 그리고 이후 삼년간 지속된 뼈저린 고해에 근거한 상상이다. 아버지는 본래 글재주가 좋은 사람이었고, 좋은 글에 진심이 담기자 그것은 누구도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울림으로 다가왔다. 아버지의 귀환과 함께 반군은 깊은 타격을 입었다. 이것은 변절이나 배신 따위가 아니었다. 누가 보더라도 용기 있는 고백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고백을 받아들인 후에야 아버지의 삶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그래서 행동에 나섰다. 암살단은 내 결심을 못미더워했지만 한편으론 아직도 내가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한 것 같았다. 때문에 그들은 이 호텔을 장악하는 데에 암살단의 역량을 모두 기울였다. 대화를 나눌 시간은 넉넉했다. 만에 하나 아버지가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고 구원을 요청하더라도 달려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짤막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용기 있는 일을 했어요.”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 안에는 내가 더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겠죠. 제가 그걸 어떻게 다 알겠어요. 전 그냥 섣부르게 마침표를 찍는 일만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어머니가 그랬으니까.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아마 저도 이런 걸 아버지한테 겨누는 짓은 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기다렸겠죠. 돌아올 때까지. 혹은, 완전히 떠나갈 때까지…”

나는 말을 끊었다. 많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켜서,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너덜거렸다. 그 와중에 빨간 색 털실처럼 도드라진 말이 딱 한 가지 떠올랐다. 나는 맥락도 없이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아버지의 대답엔 한숨이 섞여있었다.

“미안하다.”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아버지가 어디에서 어떤 정보를 수집해서 마음을 바꾸게 된 것인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어쨌건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뼈아픈 자기 고백은 반만 들어맞은 셈이다.
지금 기사단이 보유했던 구체적인 사건자료들을 찾아볼 순 없다. 하지만 단순히 결론만 말하자면 이렇다. 외계인의 침입은 불확실하다. 하지만 외계함대는 확실히 지구로 오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를 저격한지 얼마 되지 않아, 기사단은 이제 외계함대를 육안으로도 관측할 수 있다며 대대적으로 보도 자료를 뿌려댔다. 그것은 반군을 향한 최후의 일격 같은 것이었다. 이 일격으로 반군 중 절반 정도는 완전히 말문이 막혀버렸다. 곧이어, 외계함대의 구체적인 관측 자료가 일반에 공개됐다. 모선(母船)으로 보이는 거대함선 열 두 척과 무수히 많은 자선(子船)으로 이루어진 외계 함대는, 뿌연 성운과 우주가스 속을 유영하며 저마다 보석과도 같은 노란 빛을 뿜고 있었다. 이들이 편대를 이뤄 미끄러지듯 지구를 향해 전진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막아선 안되는 예술처럼 보였다. 관측 자료에 따르면 이들 모선 열두 척의 크기는 작게는 제주도 절반 크기에서 크게는 아이슬란드 크기에 달했다.
순응하던 자들이건, 반항하던 자들이건, 어떤 이를 막론하고- 세계는 할 말을 잊었다. 유일하게 할 말이 있는 사람은 기사단장 뿐이었다. 그는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리고 폭포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카메라 셔터들을 향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간 비밀리에 준비해 온 지구방위계획이 있으며, 적의 수효가 아무리 많더라도 막아낼 자신이 있다. 하지만 아직은 기밀이 유지되어야 한다. 모든 군사계획을 섣불리 일반에 공개하기에는, 지구상에 적의 스파이가 너무나도 많다. 단상에 선 그의 노쇠한 얼굴에는 유독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나 압도적인 공포 앞에 사람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는 점이다. 기자회견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전 세계가 기사단의 지나친 비밀주의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기사단은 동원할 수 있는 무력과 정치세력, 언론을 총동원하여 여론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그 어떤 힘도 매일 밤 머리 위에서 불길하게 껌뻑거리는 수천 개의 노란 불빛이 뿜어내는 공포보다 압도적일 수는 없었다. 기사단은 자기 발목을 잡았다. 우리는 이십여 년 간 공포로 지구를 지배한 기사단의 종말이 가까이 왔음을 직감했다. 다만 그것이 인류의 종말과 닿아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머지않아 정보 공개를 요구하는 성난 군중 수천 명이 기사단 본부를 무력으로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들이 강제로 탈취한 기사단 기밀 정보가 기사단을 해체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놀랄 것도 없었다. 그것은 우리, 반군들은 물론이거니와, 사실 이 무렵에는 거의 모든 세계인이 직감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기사단은 외계 함대를 막을 능력도 없었고 그러기 위한 계획을 세운 적도 없다. 이들은 대신 비밀리에 기사단 요인들과 세계 주요 인사들을 우주선에 태워 대피시키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
예정된 배신이 현실로 다가오고 반쯤 단념했던 희망이 나락으로 떨어지자, 결국 전 지구가 분노했다. 세계 곳곳에서 시위와 폭동이 일어나고 몇몇 정부가 전복됐다. 실상 기사단의 ‘음모’ 에 반쯤 가담하고 있던 세계 주요 강대국에 대한 맹렬한 분노도 잇따랐다. 국가와 국가 간의 편 가르기는 세계 곳곳에서 소소한 군사적 분쟁으로 발전했다. 국제기류가 심상치 않았다. 이대로라면 인류는 외세에 의해 멸망하기 전에 전쟁을 벌여 자멸할 것처럼 보였다. 묘하지만, 이것은 애초에 암살단이 인류에게 경고했던 바와 동일했다. 정작 암살단원들은 대부분 깊은 혼란 속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다만 몇몇 암살자만이 암살자답게 순수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들을 정화하려면, 이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
얼마 뒤, 기사단장은 해단선언을 하기 위해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여러분의 공포를 느끼며 여러분의 분노에 공감합니다. 죄송합니다. 맞습니다. 기사단은 인류를 속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기사단 해체를 선언하며 마지막으로 할 말은, 이십여 년 전 기사단을 창단할 때 했던 말과 동일합니다.

How can we win when *these* fools can be kings?
Don't waste your time or time will waste you.
You and I must fight for our rights.
You and I must fight to survive.

여러분, 저는 얼간이었습니다. 허나 여러분은 부디 현명한 길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인류라면 그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글쎄.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현실을 직시하겠다고 말하다가도 어느 샌가 머릿속에서 익숙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자신을 그 안에 끼워 넣는다. 이들은 항상 너무 철딱서니 없이 낙관하거나 너무 힘없이 비관한다. 도무지 삶을 직시할 줄 모르며, 사랑할 줄도 모르고, 그렇기에 삶이 답변을 주고 온전한 모습을 드러낼 때 까지 기다릴 줄을 모른다.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다.
내 눈에는 기사단장의 해단선언을 접한 세계인의 태도가 딱 그러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불필요한 무력충돌을 그만두고 ‘최대다수 인류 생존을 위한 탈출 프로젝트’ 를 지속 실행할 것을 지지한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이 쉽게 진행될 리 없다. 떠나서 살아남을 자들과 남아서 죽을 자들을 감별하는 역겨운 작업이 진행됐다. 투표가 시작됐고 약소국 시민 중 상당수가 버림받았다. 모든 나라에서 안팎으로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지구 탈출자 재선정을 요구하며 군사력을 동원한 국가를 향해 ‘인류를 구하기 위한’ 무력행사가 개시됐다. 이윽고 희망이 없는 자들과 희망을 지켜야 하는 자들 사이에 아귀다툼이 시작됐다. 불길하고 은은한 외계의 불빛으로 노랗게 빛나던 지구의 밤하늘은 무자비한 조명탄의 빛세례로 물들었다.
그렇게 세계전쟁이 시작됐다.






“…그렇게 된 거야. 생각해 보면, 바보 같은 짓이지.”
“이상해. 왜 아무도 그 함대가 지구를 그냥 스쳐갈 거란 생각 같은 걸 하지 못한 거야?”
“지구인들은 세계의 중심을 지구에 두고 있으니까, 자연스러운 거야. 외계인들이 있긴 있는데, 여기 지구가 있고 지구인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는 걸 어느 누가 떠올리겠어? 더구나 매일 밤 불길한 불빛들이 번쩍거리는데. 그리고 내가 설명했잖아. 지구인들은 이십 년이 넘도록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략하고 있다는 소리를 지속적으로 들었다니까. 생각해 보렴. 심심할 때면 뉴스에서, 인간 얼굴가죽을 뒤집어 쓴 외계인이 등장했어. 누가 생각해도 아, 이놈들이 지구에 큰 관심이 있구나… 하지 않겠니?”
“그럼 그 외계인들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정말 관심 없었던 거냐고.”
“어떻게 물어봐? 외계인들은 전부 다 죽은 후에야 뉴스에 나왔어. 기사단 비밀경찰들은 수시로 사람들을 잡아가긴 했지만 그건 전부 멋모르는 인간들이었고. 진짜 ‘리스트’ 에 오른 외계인은 항상 즉결처분 감이었다고. 게다가 기사단에서 외계인들을 어떻게 구분했는지는 아직도 몰라. 전쟁 때 관련 자료가 다 소실됐거든. 가장 합리적인 추측은 역시나… 인베이젼 자체가 조작된 사건이라는 거지.”
“진짜 나쁜 사람들이네. 음… 그럼 지구를 떠난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
“몰라. 아무도 그 사람들하고 통신을 시도할 생각을 하지 않거든. 이따금 이산가족이 있긴 하지. 어머니가 타세요, 아니다 니가 살아야 한다… 눈물겨운 짓을 하다가 결국 찢어진 사람들도 있고. 하지만 지구에 남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떠나간 사람들을 되새기는 것조차도 싫어할 거야. 우리는 모두 살인자의 후손이다, 라는 말 들어봤지? 그런데 생각해봐. 그렇게 따지면 여기 남은 사람들은 모두 피살자의 친구들인걸.”
“아빠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아이를 향해 나는 피식 웃었다. 아이는 내가 오랫동안 암살자였다는 걸 짐작이나 할까.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전쟁 속에서 암살단과 반군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세계 곳곳의 반골들을 품어줬던 미스테리 서클의 복잡한 정치구조도 붕괴되어 버렸다. 우리는 여느 사람들처럼 다만 살아남기 위해 끝도 없는 절망 속을 헤맸다. 종말은 이미 예언된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수 있으리란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떠날 자들이 떠나고, 밤하늘을 뒤덮은 노란 불빛들이 점점 커졌다가 이윽고 거짓말처럼 사그라졌지만, 한동안은 누구도 그들이 ‘애초에’ 지구나 인류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다. 패배하고 남겨진 피살자의 친구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상상력이 부족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떠난 자들은, 어쩌면 아직도 깨닫지 못했을지 모른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남았다.
흥미로운 얘기 몇 가지만 덧붙이자. 전쟁이 끝난 후, 나는 일반에 공개된 ‘떠난 자’ 들의 리스트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했다. 물론 그 사람이 진짜 아버지인지, 단순히 동명이인인지는 영원히 모를 일이다. 다만 나에게는 아버지를 확인 사살할 용기까진 없었다. 눈을 질끈 감고 딱 한 발만 발사한 뒤, 아버지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만 확인하고 자리를 빠져나온 게 내게 허락된 용기의 전부였다. 어쨌건, 그건 그렇다 치고,
진짜 재밌는 건 그 리스트에 어머니의 이름도 있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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