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시메트리(symmetry)

2011.10.24 01:3110.24

시메트리(symmetry

*
세상이 죽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홀로 남겨졌다. 아무리 현실을 부정하고 허공에 울분을 토해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랜 시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건물들 사이에서 나는 방황했다. 내가 알던 사람들이, 내가 아는 곳에 살았던 때가 그리웠다. 지금도 그들이 남긴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옆집 부엌의 식탁에는 한 입 베어 문 식빵 한 조각이 접시 위에서 가루가 되어가고, 앞집 창가에 놓인 화분의 물망초는 회색빛을 띤 지 오래다. 화분의 주인은 이 꽃을 소중히 여겼지. 멧돼지를 사냥하러 산으로 떠난 뒤 몇 년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여인은 꽃을 키웠다. 꽃말을 상기하며 그가 돌아오기만을 바랐을 터.

나를 잊지 말아주세요 라는 그 말.

쓸모없는 짓이건만, 그녀는 물망초를 애지중지 키웠다. 돌아오지 않는 남자, 사라져 가버린 남자. 그녀는 이 꽃을 볼 때마다 소원을 빌었을까. 그가 돌아오리라 믿으며……. 그렇다면 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물망초를 피워야겠지. 누구보다도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물망초를 먼저 피울 것이다. 돈을 더 모아 좋은 집에서 행복하게 살자고, 밥 굶는 일 없이 그렇게 행복하게 살아보자고 함께 꿈을 키웠던 때가 있었건만, 이제는 모두 헛된 일이다. 더 이상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 꿈을 꿔도, 꿈을 이뤄도 같이 할 사람이 내 곁에 없다. 꿈이 비어버린 자리에는 추악한 현실만이 들어앉았다.

그날 내가 용의 굴로 떠나지 않았다면, 차라리 아내의 말을 들었더라면……. 그 놈의 가문의 업 같은 걸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겠지. 뼈대 높은 용잡이 가문? 그따위 것이 뭐란 말인가. 옛날의 건국 설화에나 잠깐 등장하는 그 이야기를 선조들은 어째서 잊지 않고 이어왔단 말인가.

설화에 따르면, 본디 이 땅에는 당해낼 자가 없을 정도로 힘세고 포악한 용이 살고 있었다 한다. 용이 지배하고 있던 넓디넓은 영토는 하나같이 비옥하고 자원이 풍부해 누구나 탐을 냈다. 이 기름진 땅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기로 맘먹고 있던 지역의 거부인 태조는 군사를 모아 용을 잡으려 했으나 용의 강한 힘 앞에 번번이 패했다. 수차례의 패배에 근심이 쌓였던 그는 결국 병을 얻었다. 그때 등에 거대한 칼을 찬 사내가 태조의 앞에 나타나 자신의 무용을 자랑하며 용을 잡아오리라고 단언했다. 그의 호쾌함이 크게 마음에 들었던 태조는 남은 군사들 중 일부를 그에게 주었다. 군사들을 이끌고 용을 잡으러 갔던 사내는 구일 밤낮 동안 용과 치열하게 싸웠고, 많은 희생을 치룬 끝에야 용의 머리를 베어 태조에게 바칠 수 있었다. 용이 죽자 태조는 얼씨구나 하고 그 자리에 나라를 세웠고, 용을 잡은 그에게 큰 보상을 내렸다 한다.

그 인물이 바로 우리 가문의 시조고, 이 이야기가 우리 가문이 용잡이 집안으로 불리게 된 이유다. 그 뿐이다. 그 설화가 진실이라 한들 천 년이 훨씬 넘은 이 시점에서 과거의 영광이 무슨 소용 있는가? 몰락한 가문의 가장으로써 조부께서는 집안의 가난을 크게 걱정하셨다. 그리하여 상당한 보수를 받는 조건으로 용을 잡으러 나가셨다고 한다. 하지만 조부께서는 결국 유해로 돌아오셨다. 아버지께서는 형체조차 알아 볼 수 없게 으스러져버리신 조부를 끌어안고 우셨다. 그때 이후로 아버지께서는 용을 잡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셨다 한다. 아버지의 뜻대로 나 역시 용잡이를 포기했다면 좋았을 것을. 이제는 허상뿐인 가문의 역사를 숨기려 했던 아버지의 뜻과는 다르게, 나는 우리 가문의 이야기를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다. 아무리 아버지께서 감추려 했어도 타인들의 입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법이니까. 그 말에 혹해 위풍당당했던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비참할 따름이다.

붉게 타오르던 태양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산등성이로 떨어지는 진홍과는 대조적으로 그 반대편은 푸른 어둠이 빠르게 뒤덮였다. 나는 문고리를 잠그고 가구들로 문을 막아뒀다. 밤은 마지막 남은 인간에게 자비를 내리지 않았다. 대신 별빛 한 줄기조차 없는 어둠과 감당할 수 없는 공포만을 줄 뿐이었다. 이제 어둠이 세상에 완전히 내려앉는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기 전에, 나는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심스레 가리면서 촛불을 켰다. 아직 양초는 넉넉한 편이었다. 어떤 집이든 한동안 쓸 양초는 재어두니까. 다른 집의 양초를 가져온들 화를 내거나 신고를 할 사람도 없었다. 거실에 앉아 낮에 산에서 잡아 익혀둔 토끼를 먹으며, 나는 촛불에 비친 내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힘없이 흔들렸다. 나 또한 마찬가지일까.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살아는 있다.

토끼 한 마리를 다 먹었다. 나는 촛불을 들고 침실 벽 구석에 놓인 옷장 안으로 들어가 웅그린 채로 누웠다. 배가 불러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만 같다. 하지만 요즘 들어 편한 잠을 자지도 못한다. 밤이 되면 ‘그것‘들이 나타나 잠든 나를 괴롭혔다.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충분히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게, 그리고 정신적으로 그보다 더욱 고통스럽게, 이 세상을 잠시라도 잊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나를 깊은 잠에서 깨워냈다. 오늘도 그들은 나를 찾아다닐 터이다. 그나마 여기 옷장 안에 있으면 그들은 나를 찾지 못했다. 가끔씩 옷장 문 앞에서 서성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말이다. 나는 촛불을 불어서 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은근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그럼에도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며, 시야가 흐려지고 눈이 감겨왔다. 나는 곧 잠이 들었다.


*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두 아이가 마을 입구까지 따라와 나를 배웅한다.

“옆집 할머니가 용은 사람을 조종한다고 하더라고. 괜찮겠어? 너무 위험할 텐데.”

“아빠, 나쁜 용을 무찌르고 오세요.”

어째서인지 막내 딸아이는 아무 말 없이 나의 품에 안기며 운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앞에 있는데도 말이다. 나는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달랜다.

"용이 사람을 조종한다고? 세상에,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겠어. 다 소문일 뿐이야. 걱정하지 마. 용을 잡아서 꼭 돌아올게. "

동행하는 이들도 가족들의 배웅을 받는다. 우리는 장비를 짊어지고 마을을 빠져나와 수 킬로미터나 되는 평지를 지난다. 지평선 너머 산이 보인다. 중간에 잠시 휴식이나 식사를 하는 이외에는 계속해서 걷는다. 이윽고 우리는 용이 산다는 산에 도착한다. 나는 내 키에 맞먹는 커다란 칼을 등에 매고 산길을 앞서 오른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칼이다. 칼날에 은은히 비치는 검붉은 색, 손질을 하고 광을 내도 깊게 스며들어 지워지지 않는 적색은 이 칼이 그만큼 용의 피를 많이 마셨다는 증거다. 다른 이들은 석궁과 쇠사슬 등 용을 묶고 상처를 낼 무기들을 손에 든 채 나를 따른다. 오랜 시간 동안 흔적을 찾아서 용의 굴이 있을만한 곳을 탐색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낮은 비명을 터뜨린다. 우리는 여러 동물의 피와 뼈가 사방에 흩뿌려져 있는 걸 발견한다. 멧돼지나 사슴, 그리고 호랑이의 것으로 추정된다. 핏자국은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호랑이의 뼈가 셀 수 없이 많다는 게 신경이 쓰인다. 아마도 대여섯마리 이상, 산중의 왕 호랑이를 이토록 많이 잡아먹을 정도의 괴물은 아마도 그것 밖에 없을 터이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이윽고 모두에게 말한다.

"이 근처에 굴이 있는 듯 합니다. 한 시각 후에 여기로 다시 모입시다. 혹여나 굴을 발견하더라도 섣불리 들어가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흩어진다.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은 가던 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진 곳으로 들어간다. 약 삼십 분 가량을 들어간 끝에 우리는 신기한 광경을 본다. 뿔이 큰 사슴 한 마리가 수십 마리의 살쾡이 무리에게 둘러싸여 공격을 당하고 있다. 불가능한 일이다. 살쾡이는 단독 생활을 하는데다 그들의 사냥감은 쥐나 꿩 등 작은 동물들뿐이니까. 우리는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본다.

사슴은 달려드는 살쾡이들을 향해 온몸으로 맞선다. 저 큰 뿔은 분명 위협적이지만 살쾡이의 수가 너무나도 많다. 여러 마리가 다리를 물어 사슴을 넘어뜨린다. 사슴은 일어서려 하나 이내 살쾡이들에게 온몸을 뜯긴다. 버둥거리는 사슴의 발길질에 다리를 물던 녀석들이 나가떨어진다. 하지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사슴은 가냘픈 울음소리를 내며 결국 저항을 멈춘다. 가만히 누워 숨만 헐떡이는 걸 보아하니 기력이 다한 듯하다. 살쾡이들이 사슴을 둘러싼다. 그 수가 많아 사슴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약속된 시각을 맞추려면 지금 돌아가야 한다. 아직 제대로 수색하지도 못했지만. 살쾡이들이 고기를 탐하는 소리를 뒤로 한 채 우리는 약속했던 장소로 돌아온다. 몇몇 조는 이미 도착해있다. 나에게 누군가 묻는다.

"어떻소? 발견했소?"

나는 고개를 젓는다. 그러자 그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한다.

"그렇군. 우리도 발견하지 못했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조는 이제 하나뿐인가."

조금을 더 기다리고 있자니 마지막 조가 허겁지겁 달려온다. 모두는 그들이 굴을 발견했음을 직감한다. 그들 중 가장 먼저 뛰어온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말한다.

"차, 찾은 것 같네. 정말 엄청나게 커다란 굴일세."

그는 자기들이 달려온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가리키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린다.

"그럼 가봅시다. 모두들 각오 단단히 하십시오."

우리는 그들을 앞세워서 따라간다. 울창한 수풀을 마구 헤집고 한참을 들어가자 커다란 동굴의 입구가 시선에 들어온다. 안은 너무나 캄캄해서 보이지 않는다. 가히 용의 굴, 그 이하로써는 설명할 수 없을 크기다. 나는 입구 앞에 서 사람들을 모은다.

"다들 명심하십시오. 용은 무척 강하고 포악합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분들은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나는 흔들리는 몇몇 눈동자들을 바라보며 말한다. 누군가 떨리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답한다.

"이제 와서 돌아가 봤자 소용없는 짓이지. 우리는 용을 잡아가야만 하오."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을 지그시 감는 방식으로 모두가 그 말에 동의를 표한다.

"그러면…… 들어가 봅시다."

용 사냥은 벌이가 크지만 그만큼 위험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가난에 시달리는, 먹고 살 형편이 당장 궁한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들 목숨을 걸고 용을 잡으러 온 것이리라. 이것 밖에 다른 방도가 없기에. 그래서 이들은 돌아갈 수 없다. 나는 홰에 불을 붙이고 먼저 굴 안으로 들어간다. 다른 사람들은 들고 온 무기를 꺼내 손에 움켜쥐고 천천히 나를 뒤따른다. 축축한 공기, 고요할 때 들려오는 바람 소리. 용이 있는 위치가 가까워진다는 게 느껴진다.


*

‘쾅쾅쾅!’ 나는 눈을 떴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어두웠다. 칠흑 같은 밤, 옷장 안에 있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 당연했다.

‘쾅쾅쾅!’ 또다시 바깥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냄새를 맡고 찾아온 맹수들이 문을 뚫기 위해 저러는 것이리라.

‘쾅쾅쾅!’ 나는 몸을 좀 더 웅크리며 맹수들이 어서 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희망, 맹수들이 돌아가면 얼마 안 있어 '그들'이 나타나겠지. 그저 어서 이 밤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쾅!’ 마지막으로 몸을 힘껏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집 밖 멀리서 찢어지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늑대? 호랑이? 여러 맹수를 섞어 놓은 것 마냥 소리가 괴기스러웠다.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잠시 동안 정적이 세상을 메웠다. 고요한 정적과는 반대로 나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 심장이 터질듯이 뛰고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흔들렸다. 이제 곧 '그것'들이 온다. 그 사실이 소름끼친다.

갑자기 두꺼운 종이 찢어지는 소리가 거실에서 들렸다. 손발과 입술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소리는 또한 부엌에서 들렸다. 옆방인가. 소리는 여러 군데서 들렸다. 소리로 짐작컨대 그들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종이 찢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소리는 어느 순간부터 한 방향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 방안에서 들리는 소리들, 그리고 정적.

‘똑똑똑’ 갑작스런 노크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눈을 꽉 감았다. 내가 숨은 위치를 결국은 알아낸 걸까. 노크는 일정한 템포를 반복하며 계속 되었다. 한 스무 번 가까이 두드렸을까. 노크는 멈추고 다시 긴 정적이 흘렀다. 나는 숨을 죽이느라 턱을 타고 흐르는 땀마저 제대로 닦을 수 없었다. 다시 종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곳에서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인가. 소리는 점차 잦아들더니 결국 사라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이제 완전히 떠났겠지. 나는 갑갑한 옷장 안에서 나오려고 문을 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아빠.)

그 순간 반사적으로 눈물이 울컥 터져 나왔다. 막내 아이, 내 딸아이의 목소리. 그럴 리가 없다. 가족들은 전부 사라졌어. 하지만…….

(나 무서워. 어디에 있어?)

저 목소리는 분명히 딸아이 목소리다. 함정일 터이지. '그것'들이 가는 척 하며 딸아이 목소리를 흉내 내어 나를 꾀어내려는 속셈일게 뻔하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울고 있다. 덕분에 딸아이가 간절히 보고 싶어졌다. 내 딸아. 아버지는 이렇게 초라한 존재란다. 좁은 옷장 속에 숨어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런 초라한 인간일 뿐이란다.

(엄마도 기다리고 오빠도 기다려. 제발 돌아와. 아빠.)

마침내 아이를 흉내 내는 '그것'은 울음을 터뜨렸다. 흐느끼는 음성이 옷장 문을 통과해 들어왔다. 아이의 울음은 날카로운 갈퀴가 되어 내 가슴을 찢어놓았다. 저 목소리가 진짜라면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나를 부르는 딸아이를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가짜인걸. 속임수임을 알면서도 걸려들 리는 결코 없다. 그런데 왜 나는 떨리는 손을 옷장 문에 계속 대고 있을까.

(아빠, 미안해. 내가 배고프다는 소리 같은 거 안했으면 아빠는 가지 않았을 테지. 다 나 때문이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그때의 나는 가문의 명예에 눈이 멀어 있었단다. 용잡이 가문이라는 이름은 오랜 세월 동안 빛을 잃었었지. 내가 용을 잡기 시작한다면 우리 가문이 다시금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용을 잡으러 갔던 거야. 미안해 하지마라 얘야. 오히려 내가 큰 죄를 지었는걸. 나는 왜 문을 천천히 밀어내는 걸까. 저건 분명 거짓인데. 왜 나는 문을 열고 나가려는 걸까.

(아……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나는 무릎 꿇고 울었다. 가족들이 보고 싶어서. '그것'에게 제발 흉내 내지 말아 달라 속으로 빌었다. '그것'들이 나에게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온몸에 한기가 차오르며 팔다리가 끝부터 조금씩 굳어졌다. 정신이 몽롱해지며 눈앞에 새하얀 신기루가 펼쳐졌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

대단히 큰 무언가가 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한 사람이 내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귓속말한다.

"저 소리, 아무래도 그것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용이 아니라면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는 생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앞으로 조금만 더 간다면 용이 있을 터, 인원을 둘로 나눠 양옆으로 갈라집시다."

사람들은 서로 눈과 손으로 신호를 보내며 각자 위치를 정하고 나아간다. 나는 먼저 앞장서서 중얼거리듯 모두에게 말한다.

"용이 내 눈에 들어오면 일단 멈춰 서겠습니다. 큰 바위가 성기지 않게 적당히 있으니 웬만하면 들키진 않을 거요. 모두 멈추면, 때를 봐서 내가 먼저 달려가 용의 주의를 끌지요. 그러면 쇠사슬을 든 이들은 용의 옆구리로 달려가 쇠사슬을 힘껏 던지시오. 여기 사는 용은 몸집이 그리 크지는 않다 들었으니 지금 들고 있는 정도면 충분히 묶을 수 있을 터입니다. 그 뒤 남은 사람들은 용을 공격하세요."

"자네, 위험하지 않겠나? 상대는 용인데."

"걱정 마십시오. 그래봐야 용은 사람의 아래요. 이 대검이 그 증거이지 않습니까."

나는 기세등등하게 말한다. 단지 용은 덩치만 큰 도마뱀일 뿐이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저 용도 결국 이 칼을 붉게 칠할 염료가 될 것이 뻔하다. 우리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나아간다. 동굴을 울리는 호흡소리가 점점 더 웅장해진다. 수평에 가깝던 동굴 길의 경사가 다소 급해진다. 우리는 바닥에 몸을 붙여 전진한다. 아니, 기어간다고 하는 표현이 맞겠지. 비탈길의 끝이 가까워진다. 저 너머에는 우리가 맞설 대상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오른손으로 등 뒤에 매어놓은 검의 손잡이를 잡는다. 드디어 우리는 비탈길의 끝에 오른다.

아, 용이 시야에 들어온다. 호랑이 열 마리를 붙여놓아야 비등할 정도로 큰 갈색 몸통이 단지 숨을 쉬는 것뿐인데도 파도처럼 요동친다. 성인 남자의 절반에 가까운 크기의 발은 충분히 위협적이다. 게다가 등에 고르게 나 있는 침들은 거대하지만 바늘처럼 예리하다. 찔리면 그대로 관통되겠군. 다행인 것은 지금 용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언제 깰지도 모르니 다들 몰려가서 묶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원래 생각대로 하는 게 좋겠지. 나는 멈추라는 표시로 왼손을 든다. 사람들은 자리에 멈춰 나를 바라본다. 나 홀로 먼저 앞으로 뛰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다소 긴장이 된다. 은근한 두려움에 심장은 두근두근 뛰기 시작한다. 등에서 칼을 뽑아 양손으로 강하게 움켜쥔다. 시간을 세고 돌진하자……하나, 둘……셋!

나는 숙였던 몸을 펴며 소리 나지 않게 나아간다. 오로지 앞에 있는 저 거대한 용만을 바라보자. 공교롭게도 내가 달려가는 방향 앞에 용의 머리가 바닥에 기대어 있다. 저대로 깨지만 않으면 목을 칠 수도 있을 터다. 하지만 그런 내 바람과는 다르게 용은 기척을 느끼고 귀를 움직이는 동시에 눈을 뜬다. 어린아이의 피처럼 붉은 눈이 나를 응시한다. 들킨 이상 조용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죽을힘을 다해 전속력으로 뛴다. 아직 잠이 덜 깨었을 테니 잘하면! 용의 목까지 달려간 나는 그대로 목을 향해 찍어 내린다. 하지만 용은 아슬아슬하게 칼을 피한다. 용은 일어서서 크게 포효한다. 거대한 몸과 꼬리가 미친 듯이 움직인다.

"지금이오!"

쇠사슬을 든 사람들이 달려 나온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용의 옆으로 달려가 사슬을 던진다. 던진 사슬을 양편 사람들이 받아들고 힘껏 당긴다. 나에게 신경이 집중되어있던 용은 갑작스럽게 나타는 인파에 당황하다 그대로 묶여버린다. 용은 불꽃처럼 요동치며 쇠사슬 그물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사람들 역시 만만찮은 힘으로 사슬을 잡아당긴다. 급기야 무기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던 이들까지 달려 나와 사슬을 잡아당긴다. 용의 꼬리가 미친 듯 허공을 가르지만 사람들을 공격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쇠꼬리처럼 유연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용트림과 인간 다수간의 오랜 실랑이, 그 끝에 용은 지친 듯 몸을 축 늘어뜨린다. 몇 명이 쇠사슬을 놓고 내려뒀던 무기를 들어 용을 공격한다. 누군가 던진 죽창이 용의 몸통에 꽂힌다. 용은 고통스러워하며 몸부림을 치지만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다. 나는 칼을 용의 복부에 휘두른다. 용의 두꺼운 피부가 찢기고 그 속으로 나는 칼을 박아 넣는다. 용의 비명이 동굴 전체에 울려 퍼진다. 박힌 검을 온힘을 다해 옆으로 비틀자 용은 이리저리 고개를 휘젓다 바닥으로 떨어뜨리고야 만다.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용을 잡다니, 선조들이 돕고 있는 것일까.  석궁에서 발사된 화살들이 용의 눈과 목 언저리에 박히고, 계속해서 공격당하던 배는 너덜너덜해진지 오래다. 사람들은 벌써부터 희열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다.

"우리가, 우리가 용을 잡았어!"

용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가쁜 숨을 내쉰다. 바닥은 용의 붉은 피로 흥건하게 젖어있다. 심한 곳은 웅덩이가 져 끈적끈적한 파문이 일어난다. 나는 용머리 앞에 서서 검을 위로 힘껏 들어올린다.

"모두들 수고했습니다. 이제 큰돈을 쥐게 될 것입니다. 이게 다 당신들의 용기 덕분입니다."

용으로 태어난 걸 후회하거라. 나는 들어 올린 검을 모가지를 향해 그대로 내려찍는다.

초점이 흐려지는 용의 눈과 내 눈이 마주친다. 선홍빛 눈동자는 천천히 검붉어진다. 마치 피가 굳어가는 것처럼, 붉은 장미가 시들어가는 것처럼, 생기를 잃은 눈빛이 애처롭다. 하지만 파르르 떨리는 동공의 움직임만은 아직 녀석이 살아있음을 말해준다.

팔이 수평에 이른다. 검의 여정은 이제 절반에 이르렀다. 1,2초의 시간이 몇 십 분으로 늘어난 듯 너무나도 길다. 갑자기 용의 눈동자가 핏줄어린 홍채 안에서 사정없이 움직인다. 상자 속에 가둬놓은 벌 마냥 이리저리 움직이는 눈동자에서 나는 광기를 발견한다.

팔이 아래로 향한다. 이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용의 목을 벨 수 있다. 눈동자의 움직임은 점점 빨라져 더 이상 내 눈으로는 쉽사리 따라잡을 수 없다. 모든 것이 느릿느릿한 이 상황에서 저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다니. 눈동자의 움직임은 점점 더 빨라져 급기야 보이지 않게 된다. 순간 용의 눈에서는 눈부실 정도로 흰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빛이 동굴 안으로 넓게 퍼진다.

팔을 통해 검이 목에 닿는 느낌이 전해진다. 빛이 동굴 안을 가득 메워 나는 그 무엇도 볼 수 없다. 단지 느껴지는 이 감촉, 용의 비늘과 칼날이 만나는 그 경계의 느낌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단단하다. 아니, 붉은 건가. 너무나도 즐겁다. 그러면서 또한 차갑다. 아니, 노랗다. 이번엔 따뜻해진다. 대체 뭘까.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이 느낌들은……. 이젠 무섭다. 아프다. 그리고 허무하다. 슬프고 지쳐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다. 느린 시간 속, 내 두 눈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아니, 외롭다.



*
나는 뱃속의 태아처럼 웅크린 채 바닥에 기대어 울었다. 너무 아파서. 깨어나자마자 온몸에 지독한 고통이 파고들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밖에 던져져 있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맹수들이 밖에 서성이고 있을 텐데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따가운 햇살이 아픈 부위를 파고들었다. 금방이라도 그 부위가 끊어질듯 마구 떨렸다. 흔들리는 정신을 부여잡고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이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세상이 춤추듯이 흔들렸다.

"차라리 날 죽여, 죽여 봐! 이 빌어먹을 자식아!"

나는 가상의 대상, 아니 나를 이렇게 만든 그 놈의 용을 향해 소리쳤다.  평소에는 입에 담기 껄끄러웠을 육두문자를 쉴 새 없이 내뱉었다. 한참을 외치다 숨이 차서 나는 다시 주저앉았다. 서럽고 고통스러워 주먹으로 땅을 쳤다. 피가 나서 흘러내릴 때까지 계속. 갑자기 어릴 적이 생각나는군. 달리다 무릎이 까져 뚝뚝 떨어질 만큼 많은 피를 처음 흘렸을 때, 죽음의 공포를 느꼈던 나에게 어머니는 상처를 지혈해 주시며 말씀하셨다.

- 피가 흐른다는 거…… 그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지. 네가 건강하니 이렇게 피도 흐르는 것이란다.

나는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그때였다. 저 멀리 언덕 부근에서 찢어지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언덕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내가 여태껏 보지 못한 맹수들이 서 있었다. 늑대인가, 곰인가. 그것들은 여러 가지 기괴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것들이 날 향해 달려왔다.

나는 온힘을 다해 일어섰다. 집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뚝거리는 다리로 최대한 달렸다. 어째서일까. 방금까지만 해도 죽여 달라 소리쳤던 게 누구지? 어머니의 말대로 나는 살아있는가? 그래서, 생존에 대한 본능이 이 빌어먹을 절망보다 우위인가?

발을 헛디뎠다. 기울어지는 몸의 균형을 감각이 마비된 다리로는 도저히 바로 잡을 수 없었다. 제기랄, 바로 저 앞이 집인데. 나는 엎어졌다. 뒤를 돌아봤다. 괴물들의 모습이 더욱 자세히 보였다. 녀석들은 다른 맹수에게 뜯기다가 도망쳐 온 것처럼 모습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대부분이 배가 찢겨나가 내장을 쏟으며 뛰어오고 있었고, 가장 앞에 있는 늑대 같이 생긴 녀석은 대가리의 반이 뜯겨져 나가 속의 힘줄과 생살이 다 드러나 보였다. 나는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섰다. 저것들의 모습을 보니 도저히 일어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구역질을 하며 달렸다. 토사물들이 옷과 바지를 적셨다. 하지만 더러움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나는 결국 집 앞까지 왔다. 그리고 문을 당겼다.

하지만 열리지 않았다.

아뿔싸, 문은 계속 막혀 있었단 말인가. 더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뒤에서 개와 사람이 동시에 짖는 듯 한 소리가 들렸고, 나는 다시 달렸다. 앞집으로 들어가 문을 세게 닫았다. 쿵 소리와 함께 화분이 밖으로 떨어졌다. 화분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허겁지겁 가구들로 문을 막았다. 밖에서 놈들이 문을 세게 두들겼다. 급조된 방책, 어차피 금방 부서질 게 뻔하다.  

'제기랄, 집에는 칼이 있는데.'

아쉬워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안에서 쓸 만한 무기를 찾아봤다. 부지깽이…… 짧다. 빗자루…… 약하다. 삽…… 어쩔 수 없는가. 나는 삽자루를 꽉 쥐고 문 앞에 섰다. 밀려나오는 가구들을 다시 밀면서 버텼다. 순간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통째로 부서졌다. 그리고 곰처럼 생긴 녀석과 나는 눈이 마주쳤다. 나는 놈의 눈을 삽으로 찔렀다. 곰은 고통스러워하며 뒤로 물러섰고, 그 사이로 날개 대신 큰 날이 달린 독수리 비슷한 것이 가구들을 밀어내며 들어왔다. 나는 삽을 옆에 끼고 앞에 있는 의자를 들어 올려 그 녀석에게 던졌다. 의자는 대가리에 정확히 맞았고 나는 다시 삽을 들어 녀석의 몸통을 후려쳤다. 녀석은 뒤로 넘어졌다. 그러면서 왼쪽 날이 몸에서 떨어졌다.

'한꺼번에 공격하지 못하게 이 앞에서 계속 버텨야 해. 안 그러면 죽어.'

그때였다. 뒤에서 크르릉 하는 소리가 들려 돌아봤더니 늑대 녀석이 이빨을 벌리고 서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건가. 녀석은 멈칫하더니 곧 나를 향해 뛰어들었다. 나는 삽을 휘둘렀지만 떨쳐내지는 못하고 함께 뒤엉켜 쓰러졌다. 나는 내 위로 쓰러진 녀석을 발로 차 옆으로 밀어내고 얼른 일어섰다. 녀석은 삽으로 맞은 충격 때문인지 바닥에 누워 버둥거렸다. 나는 녀석의 모가지를 삽날로 힘껏 찍었다. 깨갱하는 소리와 함께 모가지 절반이 푹 파였고 피가 폭발하듯이 쏟아졌다. 쉴 시간이 없었다. 형용할 수 없게 생긴 녀석-하지만 왠지 사람의 여러 장기가 뒤섞인 듯 한 모습-가 꿈틀거리며 문으로 들어오는 중이었고 곰과 독수리는 이미 집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이대로 죽게 되는 것일까.

그런데 녀석들은 어쩐지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살기로 각오하고 싸우는 사람에게 쉽사리 달려들기 힘들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내가 앞으로 달리자 독수리가 엉겁결에 날을 휘둘렀고 나는 그것을 피했다. 나는 그대로 곰과 독수리의 사이로 빠져나와, 이상하게 생긴 녀석의 겉에 있는 뇌처럼 생긴 것에다 삽을 힘껏 찍었다. 뇌가 산산이 부서지며 체액이 터졌다. 나는 문밖으로 뛰쳐나와 뒤를 돌아봤다. 녀석은 짧은 시간동안 쉴 새 없이 경련을 일으키다 퍽하고 구조가 허물어졌다. 온갖 역겹게 생긴 것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근처에 대장간이 있다. 거기에는 칼이 있어.'

온힘을 다해 대장간으로 달렸다. 더 이상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도저히 힘을 못 낼 것 같은데 이렇게도 나는 싸우고 있다. 아까전보다 움직이는 게 훨씬 원활했다. 생존 본능은 이렇게도 대단한가. 나는 새삼스레 그렇게 느꼈다. 곰과 독수리가 내 뒤를 쫒아왔다. 다행인건 녀석들이 나보다 달리기가 느리다는 점이다. 나는 몸을 이끌고 대장간에 도착했다. 다행히 가문의 칼과 비슷한 칼이 보기 좋게 전시되어 있었다. 아주 손질이 잘 된 칼이다. 나는 그 칼을 쥐고 뒤로 돌아섰다. 이곳은 문 자체가 없어서 입구를 막을 수 없었다. 맞서 싸워야했다.

독수리 보다 곰이 먼저 왔다. 나를 보자마자 곰이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나 역시도 곰을 향해 검을 내밀었다. 녀석은 뛰어오다 내 바로 앞에서 그 흉포한 입을 쩍 벌렸다. 그 순간 나는 칼을 정면으로 눕힌 채 달려들어 곰의 아가리에 칼을 들이 밀었다. 곰은 가속 때문에 멈추지 못했고 그 큰 칼이 그대로 곰의 아가리 속 깊숙이 박혔다. 나는 달려오는 곰을 피해 옆으로 굴렀다. 녀석은 칼을 입에 문 채로 고통스러워하며 일어서더니 앞발을 마구 휘둘렀다. 나는 뒤로 돌아서 놈의 부패된 배에서 삐져나온 내장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뽑아 당겼다. 부패된 탓인지 기다란 내장이 끊어졌다. 끊어진 자리에서 검푸른 액체가 쏟아졌다. 곰은 목과 배에서 전해지는 고통 때문인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녀석은 이리저리 발을 휘두르며 대장간을 부쉈다. 그러면서 부패된 앞발 한 개가 떨어져 나갔고 그때를 노려 나는 재빨리 곰에게서 칼을  뽑았다. 그리고 녀석의 배를 가로로 갈랐다.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커다란 몸이 두 동강이 났다. 썩은 곰의 육신 따위는 잘 벼려진 칼 앞에서 그저 도마 위의 살코기처럼 쉽게 베어질 뿐이다.

독수리는 멀리서 그 광경을 주시하고 있다가 그대로 내빼려 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을 추격했다. 어차피 저런 녀석들은 살려두면 다시 공격하려 들 테지. 나는 녀석을 따라잡아 뒤통수에 칼을 내리 휘둘렀다. 녀석은 돌아서서 남은 오른쪽 날로 내 칼을 막았지만 칼과 부딪힌 충격으로 날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아슬아슬하게 그 날이 내 옆으로 비껴갔다.

독수리는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는 듯 뛰어올라 발톱으로 내 양 어깨를 붙잡았다. 발톱이 어깨 사이에 박혔다. 나는 아픔을 참고 칼로 두 발목을 잘라버렸다. 독수리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고 나는 녀석의 몸을 관통해 칼을 땅까지 박아 넣었다. 그리고 뒤로 물러섰다. 날개도 발도 없는 몸뚱이로 자리에서 이리 저리 요동치던 녀석은 천천히 몸이 굳었고 곧 녀석은 숨이 끊어졌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어깨에 박힌 발을 조심히 뽑아냈다. 그리고 웃었다.

"살았다…… 살았어……."

완전히 죽었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살아나다니. 이게 바로 기적인 것인가.

"살아있어……. 난 살아있다고……."


죽는 건 너무나도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까지라도 살아있는 걸까. 이 세상은 너무나도 절망적이지만, 역시 죽는 것만큼 무섭고 두려운 건 없어. 그래, 죽는 것 보단 차라리 이 세상이 행복할지도. 나는 손에 쥔 칼을 바라봤다. 가문의 칼을 대신해서 내 목숨을 구한 칼이다. 선조들이 도운 것이다.

- 죽였는가? 그래서 살아있는가?  인간이란 타자를 죽여 자신들의 생명을 이어가는 존재. 내 생각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갑자기 낮고 울리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절대로 사람이 말하는 소리로 들리지는 않았다.

"누구냐! 어디서 말하는 거지!"

목소리는 내 질문에 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직감했다.

- 행복한가? 즐거운가? 필요 이상으로 많은 생명을 빼앗고, 그리고는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행복해 하는 무지한 존재인가, 아니면 허황된 세상에 남겨지더라도 단지 타자의 생을 빼앗으면 즐거운 것인가? 인간은 전자인가 후자인가.

"너는 용인가! 나를 이렇게 만든 그 놈이냐!"

목소리는 순간 쉭쉭거리며 날카롭게 변했다. 하지만 울리는 느낌은 그대로였다.

- 인간은 무지하다. 평소에는 그 어떠한 것들보다 위대하다 소리치지. 허나 정작 공포에 사로잡히면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허상인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다. 타인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이 모든 것이라 생각하는 것. 이것은 복수다, 인간. 내 목숨을 지켜내기 위한 정당한 행위, 그리고 너희 인간이라는 종족의 오만에 대한 경고, 그것이 나의 복수다.

예상대로다. 그 놈의 용이었다. 용서 받지 못할 존재다. 사냥 당했으면 다른 동물들처럼 얌전히 죽어있을 것이지 이리도 비겁한 수를 쓰는가. 나는 보이지 않는 녀석을 항해 칼을 들었다.

"역시 그랬군! 당장 내 앞에 나타나! 숨어서 괴롭히는 짓 따위 비겁하지 않나!"

- 치사, 비겁…… 이를 말할 자는 누구인가. 인간이야말로 이 세상의 존재들 중 가장 비겁한 존재이지 않은가. 용은, 아니 그 어떠한 생물도 힘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의 규칙에 역행하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만이 그들을 위한 고삐를 끊고 파멸로 달려가지 않는가. 균형을 바라지 않는 종족, 그래서 너희는 비겁하다.

"헛소리 집어쳐, 개자식아! 내 가족을 돌려주지 않는 이상 난 네 녀석을 용서할 수 없어!

- 나약한 인간, 오만한 인간, 비겁한 인간.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보라.

용의 소리가 끊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삐 하는 이명이 시작됐다. 나는 녀석을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내가 보던 세상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마치 임시로 붙여둔 도자기 조각들이 다시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세상의 조각이 하나 둘씩 떨어졌다. 정적 속의 붕괴에 나는 겁을 먹었다. 집들의, 도로의, 하늘의, 땅의 조각들이 한없이 깊고 보이지 않는 심연 속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어둠이 대신했다. 오로지 나만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나는 어둠 속에 홀로 남았다. 나는 아무 것도 없는 공포에 몸을 떨었다.

순간 이명이 사라지고 대신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 말소리들이 내 주위로 다가왔다. '그것'들이 다시 온 걸까? 하지만 이상했다. 저 목소리들……. 전과는 다르게 익숙하지 않은가. 알아듣기 힘들게 메아리치고, 높낮이가 불분명한 음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럼에도 너무나도 익숙했다. 하지만 나는 사방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어차피 '그것'들은 나를 속이는, 그래서 죽여야 할 것들이니까. 칼을 통해 무언가 닿는 듯 한 느낌이 전해졌다. '그것'들도 물리적인 공격을 받는 게 분명했다. 어째서 나는 '그것'들에게 지레 겁먹고 숨기만 했었을까. 이렇게 칼에 베어지는 존재들을.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계속해서 칼을 휘둘렀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됐다.

그리고 빛이 있었다. 광선이 사방에서 나를 향해 퍼져왔다. 온통 어둠이던 아까와는 반대로 공간은 이제 빛으로 완전히 잠식되었다. 온통 하얀 빛이었다.

빛이 한 점으로 수렴되기 시작했다.


*
세상이 돌아왔다.

나는 몽롱한 의식을 바로잡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우리가 용을 잡던 그 동굴이다. 용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동굴 구석에 있었다. 용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바닥에는 시체가 널렸다. 순간 구역질이 올라와 나는 그 자리에서 토사물을 쏟아냈다. 제기랄.

"개자식, 네가 한 짓인가……. 죽여 버리겠어."

용은 나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날카로운 이빨들이 나를 찢어발길 듯 사납게 진동했다. 나는 주위를 다시 둘러봤다. 시체들은 말이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미안해졌다.

나는 용의 숨을 끊기 위해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이를 보고 용은 힘겹게 머리를 일으키더니 입을 벌려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아래로 몸을 눕혀 공격을 피했다. 용의 머리는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 쳤고 그 반동으로 용의 머리가 공중으로 잠시 치솟았다. 나는 자세를 바로잡고 곧바로 목 아랫부분을 향해 칼을 들이밀었다. 용은 칼을 피해 목을 들었고 순간 내 눈과 용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시간이 정지했다. 그리고 시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과 얼굴이 절반 정도 잘린 시체, 온통 육신이 휘저어져 마치 죽처럼 되어버린 시체, 입은 너덜너덜하고 몸이 절반으로 잘려 뱃속의 내용물이 흉하게 쏟아진 시체, 두 팔과 두 손이 잘린 채 배가 난자된 시체, 그리고 그 밖에도 수많은 시체……. 그것들이 전부 날 향해 다가왔다. 입이 있는 시체는 입으로, 손이 있는 시체는 손으로, 내장뿐인 시체는 내장으로 말했다. 날 왜 죽인거지? 그리고 자네는 왜 살아있지? 살아있어서 그렇게 좋나?

설마? 하지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나는 용을 향해 외쳤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말해. 개자식아!"

용은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니야! 내가 안 죽였어. 제기랄, 아니라고……."

용은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  그것이 너다.

동굴이 용의 목소리로 진동했다. 아니, 내 머릿속이 흔들렸다고 보는 게 옳겠다. 마치 용의 목소리에 공명하는 것처럼, 용의 목소리에 내 모든 것이 잠식당하는 것처럼. 용과 나의 생각이 억지로 균형을 이룬다.

그럴 리가, 나는 검을 거꾸로, 설마, 그것이 너다, 내가 왜 이러지, 쥐고 내렸다, 아니야, 이러지마, 내가 한 짓이 아닐 거야, 그것이 너다, 그렇잖아, 내가 했을까, 나는 칼끝을, 아니라고 누가 말해줘, 그것이 너다, 신이시여 제발, 목에 갖다 댔다, 절망적이다, 단지 나는 용을 잡아, 슬프다, 아내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억울하다, 그것이 너다, 목에서 핏방울이, 싶었을 뿐이었는데, 비극적이다,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은, 무섭다, 다 용에게 ,지쳤다, 죽었다고 말할까,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니야. 그래도, 우울하다, 내가 죽인거야. 그것이 너다, 내가 죽였어, 비통하다, 그건 변하지 않아, 그래서, 아프다, 미쳐버리겠어, 아니 이미 미친 걸까, 허무하다, 차라리 미쳤으면 좋겠는데, 죽고 싶다, 정말 미쳤나봐, 죽고 싶다, 그것이 나다.

시체들이 나와 함께 칼을 잡았다.

시체들이 웃었다. 하하하하.
용이 웃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그리고 내가 웃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우리는 같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칼을 내 목에 들이밀었다.
    









*
"엄마, 나 방금 아빠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아."

어린 소녀가  말했다. 여인은 그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벌써부터 아빠가 보고 싶은가 보구나? 곧 있으면 아빠는 돌아오실 거야."

" 나 기다리기 지루한데. 아빠 보러 산에 가면 안 돼?"

옆에 있던 어린 소년은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그 말을 거들었다.

"엄마, 나도 아빠 용 잡는 거 옆에서 구경하고 싶어! 아빠는 멋있으니까 용도 멋지게 잡지 않을까? 보러가자, 응?"

여인은 두 아이의 이마에 약하게 꿀밤을 먹이며 말했다.

"안 돼요 안 돼. 용 잡는 건 굉장히 어렵고 위험한 일이지. 하지만 아빠는 너희들을 위해 열심히 싸우시고 계실거야."

아이들은 그 소리에 툴툴댔다. 하지만 여인은 그런 아이들을 달래며 등을 떠밀었다.

"해도 지는데 이제 돌아가자. 저녁 먹을 시간이잖니."

아이들은 네 하고 먼저 집으로 뛰어갔다. 여인은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여보, 제발 무사히 돌아와. 애들이 이렇게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여인은 아이들을 뒤따라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여 문을 열다가 그녀는 어렴풋이 풍겨오는 물망초 향기에 그대로 멈춰 섰다. 그녀는 새삼스레 뒤를 돌아봤다. 사그라져가는 석양이 핏빛과도 같이 검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End-

2009-12-19 초고 완성, 제목 : 무제
2009-12-25 1차 퇴고, 제목 : 시메트리 (Symmetry)
2010-01-25 2차 퇴고, Fangal 등록.
2010-02-13 네이버 블로그 등록.
2011-10 -24 3차 퇴고. 거울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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