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하마드리아스 -하-

2011.11.21 19:4111.21

  쏴아아아아-  
  엄청난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구름과 하늘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온통 짙은 먹구름으로 가득 찬 컴컴한 하늘에서 세찬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지표와 건물위로 빗줄기가 거침없이 쏟아져 튀어 오른 물방울이 뿌연 물안개를 형성했다. 그나마도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도시의 강우량에 비하면 외곽에 위치한 눈앞의 요새성 주변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성 주위 곳곳에는 듬성듬성 움푹 파여진 구덩이가 펼쳐져 있었다. 그 중에서 유난히 큰 곳은 빗물이 고여 거대한 웅덩이로 변해 있었다. 웅덩이 가장자리의 흙이 밖으로 쏟아져 나온 형태나 작은 돌들이 깨져 있는 걸로 봐서는, 파헤쳐진 게 아니라 뭔가가 폭발해 버린 듯 했다. 크고 작은 바위가 부서지고 깨진 채 굴러다녔고, 여기저기 꺾여 진 나무나 아예 갈기갈기 찢어진 나무줄기도 눈에 띄었다. 그 사이사이로 언뜻 보이는 잘려 나온 병장기들이 요란한 날씨와 어울려 을씨년스러운 모습이다.
  갑자기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숲 저편을 가리키며 웅성거린다. 병장기를 들어 올리며 날카로운 경고음을 지르던 경비병들이 화살을 쏘아댄다. 난데없이 숲속에서 나타난 사내를 포착한 모양이다. 성을 향해 달음질 치고 있는 사내의 주위로 화살이 무수히 내리 꽂혔다. 달려가는 사내의 속도가 어찌나 빨랐는지 세찬 빗속에서 뿌연 장막을 형성할 정도였다. 사내와 병사들과의 거리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날아가던 화살도 뜸해진다. 저마다 병장기를 뽑아든 병사들 무리와 사내의 윤곽이 뒤엉킨다. 고함과 비명이 뒤섞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잠해질 무렵에는 단 한 사람만 서 있었다.
  짚단처럼 허물어져 내린 병사들 사이에서 사내가 고개를 치켜든다. 구름으로 뒤덮인 성의 제일 꼭대기 층만이 불이 밝혀져 있다. 그 주황빛 불빛이 흘러나오는 방을 향해 사내는 잔뜩 찌푸린 눈길을 보냈다.
  사내가 성문으로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위층의 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층층으로 이어진 층계참의 창문을 통해 계단을 올라가는 사내의 모습이 여러 번 포착됐다. 마침내 오렌지색 불빛의 맨 꼭대기 층에 사내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모든 계단을 올라온 사내는 눈앞의 방문 앞에서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병사들과 대면하고서도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던 사내였다. 사내는 거친 숨을 빠르게 내뱉고 있었다. 가슴은 들쭉날쭉 불규칙적으로 요동쳤다. 사내의 손이 문 앞의 손잡이로 올라가려다 멈칫 하더니 다시 내려갔다. 사내가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호흡을 가다듬은 사내가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며 문고리로 손을 가져간다. 사내의 손이 손잡이에 닿자 미세하게 떨린다. 문고리가 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들어오세요.>    
  문고리가 저절로 돌아가더니 빼꼼히 열린다. 사내가 놀란 듯 황급히 뻗었던 손을 움츠렸다. 사내가 문을 밀자 문이 좌우로 밀려들어가면서 방안의 정경이 눈에 들어온다. 대리석 바닥에 길게 이어진 고급 양탄자를 따라가자 중앙에 위치한 탁자와 맞은편의 책상이 보인다. 그리고 책상너머 의자위에 앉아 있는 젊은 청년.
  쟌센이었다.
  쿠구궁!
  뇌성이 가까운 곳에서 울리며 방안이 환해진다. 창문이 툴툴거리고 벽이 진동했다. 번갯불이 반사된 듯 사내의 눈이 푸른빛을 뿜어낸다. 사내의 비에 젖은 망토와 가죽신이 카펫을 적셨다. 쟌센은 놀란 얼굴을 하고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랬지?>
  사내가 낮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윽고 놀란 표정을 뒤로 한 채 쟌센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제 마지막 배려를 무시했군요.> 편지에 쓰인 떠나라는 추신이 마지막 배려였다고 쟌센은 고백했다. ‘이리 와서 차나 한잔 하시죠, 날이 춥군요.’ 하며 자리를 권하는 쟌센이 비에 젖은 사내를 한 번 더 힐긋거리며 덧붙인다. <귀한 카펫이지만…, 뭐 그리 서두를 것도 없으니….>
  흠뻑 젖은 사내의 머리에서 연신 빗물이 뚝뚝 떨어진다. 쟌센이 차를 가지고 왔다. 하나는 사내 앞의 탁자위에 가져다 놓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책상 위에 내려뒀다. 찻잔을 잡은 쟌센의 오른손 위로 푸른색 보석이 박힌 반지가 반짝인다.
  <왜 죽였지?> 사내에게서 바람이 불어오는 듯 탁자위의 촛불이 흐늘거린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의 얼굴 명암이 크게 대비되었다. 한들거리는 불빛에 묘한 표정이 된 쟌센이 사내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수수께끼를 풀어내셨군요.> 사내가 눈썹을 꿈틀한다. 쟌센은 사내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꽤나 복잡한 퍼즐이었을 텐데…….> 쟌센의 표정이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걸 어떻게 푸셨죠?>
  사내가 품에서 허가서를 꺼냈다. 사내의 상체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주르르 팔과 손을 거쳐 종이위로 흘러내렸다. 물에 젖은 허가서에 잉크가 덜룩 번진다. 확산된 잉크는 마블링처럼 종이전체로 번져나갔다. 거기에, 화장대 앞의 여성이 있었다. 잉크가 확산된 젖은 종이위에 눈 화장이 크게 번진 통곡하는 여자가 있었다. 젖은 사내의 몸을 통해 흘러내린 물이 허가서에서 눈물처럼 맺혀져 뚝뚝 카펫을 적셨다. 화장한 여자가 크게 우는 모습처럼, 믿었던 인간남자에게 배신당한 순수한 처녀처럼, 숲의 요정 아넬라처럼.
  <네 서명과 인장이 찍힌 허가증으로…….>
  쟌센의 동공이 흔들린다. 입술로 가져가던 쟌센의 찻잔이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는다. 잔뜩 경직된 표정으로 뚫어지게 허가서를 응시하던 쟌센이 찻잔을 다시 입가로 가져갔다.  <허허.> 하고 쟌센이 웃었다. 사내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듯 찻잔너머 쟌센의 웃음은 어딘가 모르게 비틀린 미소였다. 쟌센은 ‘그게 아직까지 존재한단 말인가…….’ 하곤 이내 찡그린다.
  쏘아 보는 사내의 눈을 잠시 마주하며 쟌센이 말했다.
  <그걸로 모든 걸 알아냈나요?> 사내가 수통을 보여주며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독을 삼켰더군.> 비에 흥건히 젖은 사내에게서 물비린내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내 여관에 침입해왔던 녀석들도 네가 보낸 거냐?> <하하하 그럴 리가요. 어차피 그들은 당신의 상대가 되지 않을 텐데….> 쟌센이 덧붙인다. <그들 스스로 행동한 겁니다. 당신이 그들을 추적하자, 정체가 탄로 날까 그랬겠죠. 딴에는 잘하는 짓이라고 행했겠지만… 과잉충성은 때론 골치 아프게 전개 되는 법이죠.> 검은 남자들을 보낸 의도는 사내를 어쩌지 못한다는 걸 잘 알지만, 그들이 죽거나 자살함으로써 사내를 곤경에 빠뜨려 이 나라에 있지 못하도록, 조사를 방해하려는 목적과 의도였다고 쟌센은 털어놓았다.  
  사내가 인간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짓이라고 이미 그 남자들은 정신이 뒤엉켜 심각한 상태였다고 비난하자, 쟌센은 ‘그렇게 해서라도 지켜야 될 비밀은 지켜져야 하지요.’ 라며 응수한다.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쟌센이 살핏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문을 이었다. <당신의 가장 큰 실수는 나에게 당신의 조사내용을 그대로 전해준 사실과 사람을 너무 믿은 탓이죠. 후후.>  
  <동료들을 왜 죽였지?> 사내가 또박또박 말했다. 창문을 때린 빗줄기가 방울져 유리창에 달라붙어 있었다. 수많은 물방울들이 아래로 미끄러지며 합쳐져 이내 주르륵 한 줄기가 되더니 밑으로 흘러내린다. 쟌센은 차를 입가로 가져가더니 그대로 들고서 입술을 뗐다. <인간은 욕망에 사로잡힐 때 추악하고 더러운 심성을 가지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쉽게 타락할 수밖에 없는 존재죠.> <똑바로 말해.> 사내가 내뱉었다. 사내의 시퍼런 서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쟌센은 지난 시절을 회상하는 듯 말을 이었다.
  <하! 당신과 헤어진 지 삼십 년 만인가요? 처음 만났을 때가 제가 스물다섯 살이었으니…. 그 후 나와 동료들은, 아니 우리들은 이 나라에 정착했었죠. 이 왕국에 정착하자마자 우린 귀족들의 상류사회에 적응해야했어요…. 그렇게 수년을 보내고 나니 서서히 기회가 오기 시작했죠. 우리 동료들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어요. 세월이 흘러 많이 변했죠. 아주 많이…. 그리고 제가…, 그 더러운 뒤치다 거리를 모두 도맡아 했답니다.> 쟌센이 씁쓸하게 말했다.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사내가 얼굴을 찌푸린다. 쟌센의 칙칙한 검은 동공이 사내의 녹색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며 마주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동료들도…, 다른 위정자들처럼 목적을 위해서라면 정적들에게 온갖 모략과 누명을 씌우고 수많은 살인까지 서슴없이 저지르는 인간들이었다는 겁니다.>
  <거짓말이야.> 사내가 즉시 부정한다. 창밖에서 거센 빗소리가 들린다. 사내의 반응을 살펴 본 듯이 쟌센의 입 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그들이 그런 정적 암살과 모략을 위해 움직이게 한 게 바로 접니다. 그들의 사람이 아니라면 죄 없는 사람조차 가차 없는 판결을 받게 되었지요.>
  <너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사내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떨린다. 강한 바람이 창밖에서 부딪혀 오자 창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쟌센이 두 손을 마주 잡고 그 위에 턱을 올리며 덤덤한 눈으로 사내를 응시했다. <가엾은 아를…. 당신은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존재지만, 고작 백년도 제대로 못사는 인간을 아직 이해 못하다니….> 언성을 조금 높이는 쟌센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렇게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 귀찮은 일과 더러운 일까지 도맡아 처리했던 나를, 그들은 점점 멀리 했었죠. 그들이 최고의 위치에 오른 후에도 말입니다. 오히려 더 만나기 어려울 정도였죠. 마치 더러운 오물을 피하기라도 하듯이…….>
  <아니야!>
  쿠르릉! 굵직한 낙뢰에 창밖에 푸른빛이 번쩍인다. 뇌성이 잦아들자 빗줄기가 세차게 창을 때리는 소리가 살아났다. 강한 비바람에 유리창이 털털거렸다. 사내의 일갈에 촛불이 흔들린다.
  <하하하. 아직도 인간을 모르는 겁니까? 한때 당신과 우리들이 처음만나 대륙을 여행했던 때를 한낱 철없던 시절의 객기라고 말했던 게 그들이에요. 알프마을에 살다가 권태와 선망으로 인해 인간세상으로 나왔는데 그 모험의 종착역이 겨우… 큭큭큭.>  
  <그럴 리가…….> 얼이 빠진 채 사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천둥소리가 사내의 메아리를 집어삼켰다. 창에 서린 뽀얀 김이 번개에 푸른 안개로 비춰졌다.
  <당신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제가 한 말은 사실이랍니다.> 쟌센이 가엾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권력에 맛을 들인 그들로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겠지요. 저도 그랬지만….> 쟌센은 고개를 비스듬히 뉘이며 말했다. <뭐… 작금의 상황을 겪고 있는 까닭도 '데' 펠트로와 아스타를로아의 인식과 가치관의 차이라고 할까요. 귀족이라는 계급체계가 존재하는 인간과 요정들 세계의 괴리라고 할까요.>
  <당신은 나를 어렸을 때 궁정마법사를 꿈꾸던 어린 애로 봤겠지만, 동료들이 최고의 위치까지 오르는 걸 지켜보자 묘하게 예전의 그런 꿈이 되살아나더군요. 어릴 때부터 마법사가 꿈이었던 아이에게 왕실마법사는 너무나 매력적인 자리였습니다.> 마지막 말에 쟌센은 너털 웃으며 끝맺었다.
  사내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겨우… 그런 이유로?>
  <당신은 모릅니다. 인간이 아니니까. 당신이 본 인간들은 어떤가요? 우리들의 동료들과…, 그리고 나와 그리 다르진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동의를 구하는 듯이 쟌센의 눈길은 진지해 보였다.
  지금까지의 일을 반추하는 듯 사내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간다. 잠시 후 떠오르는 결론에 할 말을 잃은 듯 사내는 침중한 기색이다. 비가 더욱 거세지는지 굵은 빗방울들이 창문을 깨듯이 두드려댔다. 파바박 창문에 무섭게 부딪혀 오는 빗줄기 소리가 침중한 주위를 환기시켰다. 쟌센은 창밖을 바라보더니 멍하게 서있는 사내를 보며 앞서의 조각상 이야기를 꺼냈다. 형제들도 서슴없이 죽이는데 하물며 피붙이도 아닌 동료들은 말할 것도 없다는 쟌센은 당신은 그때 느꼈어야 했다고, 인간의 역사를 알면 풀기 쉬웠을 거라고, 당신 눈으로 보아온 인간이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면 그런 심적 고통이나 갈등은 없었을 거라고 지적했다.
  <그런데도 당신은 여전히 인간 동료를 믿고 있습니다. 그 근거가 굳이 백작의 허가서를 찾아서 확인한 점이라고 할까요.> 또한 쟌센은 옛 동료의 조언도 환기시켰다.
  <코라레스도 말했었지만, 다른 모든 인간들이 천성이 선하거나 심성이 착한 건 아니지요. 당신은 불특정다수에게 자신과 같은 심성을 기대하고 있겠지만…….> 사내가 일전에 동료들은 다르다고 말한 데 대해 쟌센은 한결 냉소적인 반응이었다. 인간을 향한 신뢰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데 대한 위안을 받을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라고 충고했다. 현명한 알프 종족인 사내가 인간이라는 존재의 정의를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며, 인간에게 속고 있는데 대해 쟌센은 사내가 본질적으로 우월한 존재인데도 열등하다고 비웃어댔다.  사내의 얼굴이 복잡한 표정을 내비쳤다.
  <유일한 인간 동료들에 대한 애정과 신뢰 때문에 알프라는 존재적 특유의 냉철한 이성까지 마비되어버리다니. 후후.>
  쟌센은 계속해서 이죽거렸다. <오년간 인간의 문물을 봐왔다고 해서. 아니 그보다 더 오랜 기간이라 해도 인간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가치관이 다른 존재가 인간을 이해하고 있다는 바로 그 오만이! 당신을 그렇게 진창으로 빠뜨린 겁니다. 언제나 냉철하고 이성적인 당신을.>
  <처음부터 호감 있게 다가온 코라레스 같은 인간 동료들이 생겼기에 당신은 더 할 나위 없이 기뻐했을 테고, 당신은 그들을 무비판적이고 비이성적으로 수용 했을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기에 당신과 동료들이 오년 정도의 시간이나 더 짧은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그들을 대하는 감정은 이미 예사 것이 아니게 되겠죠. 인간에 대한 호기심의 첫 대상이 그들인 만큼, 그들의 좁은 테두리 안에서, 그 작은 시간의 테두리 안에서 당신은 인간과 인간세상을 판단한 겁니다.
  당신은 미성년이 가정에서 보호받듯이 인간세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동료들의 죽음과 함께 인간의 실체와 맞닥뜨리게 된 겁니다. 바로 그러한 현실감과 동료들의 충격적인 실체를 지금 접하고 있는 셈이겠죠. 당신이 접촉한 인간세상은 모두 서로에게 상처를 주거나 심성이 곱지 못한 면이 한가지 씩 있지 않나요? 인간들은 하마드리아스(Hamadryad: 숲의 요정)에 대해 호의적인 배려가 결여되어 있지 않던가요? 당신은 사회에 대한 결벽증처럼 이러한 현상에 실망하고 상처받았을 겁니다. 아마도 이 심리적인 결벽증은 존재론적 태생에서 기인하겠죠.>
  쟌센은 차로 목을 축이더니 재차 말을 이었다. 사내의 안면에 점점 더 짙은 명암이 드리워졌다.
  <내 짐작이지만 아를 당신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쟌센은 사내의 귀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의 그 귀….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갓 인간 세상에 나온 자신감 넘치고 강인한 알프였는데, 우리와 여행하면서 당신은 그 귀를 밋밋한 둥근 귓바퀴로 바꿔 버렸습니다. 당신은….>
  <인간이 되고 싶었던 겁니다.> 쟌센은 사내의 기분이나 심리상태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걸 지적하며, 인간은 거의 그렇지 않다고 지적했다. 바로 사내가 알프인 까닭이라고 덧붙였다.
  <인간과 같은 귓바퀴를 하고, 인간처럼 육식을 한다고 해서 인간이 되지는 않습니다.>
  사내의 굳은 표정을 응시하며 쟌센이 재차 말했다. <하긴, 당신이 검술을 가르쳐준 코라레스 경에게 깊은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건 알지만…….>
  잠자코 듣고만 있는 사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쟌센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저 멀리 두터운 구름 사이로 새파란 빛이 번쩍인다. 순간, 창문이 바람에 거세게 열리며 비바람이 실내로 들이친다. 촛불이 팍 꺼진다. 차가운 비바람이 조명을 꺼트리더니 사내를 때렸다. 뇌전이 반사된 것인지 사내의 눈이 그 순간 빛을 뿜어낸다. 차가운 비에 정신을 차린 듯 사내의 얼굴에 드리우던 침중한 명암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니.>
  냉정을 되찾은 듯 아를이 쟌센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난 여전히 알프 아스타를로아지.>
  아를은 반짝이는 눈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네 말대로 나는 스스로를 인간으로 착각 했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착각은 인간을 이해하려다 보니 생긴 필연적인 실수일 뿐이야. 바로 이 순간 너를 통해 깨달은 거였지만…. 인간이 되고 싶은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 인간과 생활했지만 알프라는 정체성은 잃지 않았었지. 너는 귀를 바꾼 내가 인간이 되고 싶어 한 증거라고 했지만, 너희들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 존재의 본질은 흔들림이 없었어. 다만 나의 외관과 인간존재에 대한 정의만 달라졌을 뿐이지.  
  내가 귀를 바꾼 것은 내가 인정한 인간 동료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서였다. 알프와 비슷한 유일한 종족인 인간들, 대부분이 아름다운 외모의 일률적인 알프들 보다는 생김새가 각기 다른 인간이 좋아서였다. 한곳에 정착해서 죽을 때까지 여생을 한군데에서 보내는 알프라는 존재의 권태보다,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지배하며 살고 있는 인간 세상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모험과 여행을 좋아하는 내 열망을 따라 인간에게 다가갔었지. 어느 사회에서든 마찬가지겠지만 인간을 이해하고 같이 부대끼기 위해선 믿음과 신뢰가 필요하더군.>
  쟌센은 또 한 번 입을 삐죽거리며 냉소를 보냈다. <인간을 믿은 게 잘못이었군.>
  아를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너는… 대체 언제까지 이런 말장난을 할 셈이냐?> 창밖을 보며 아를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도시에… 무슨 짓을 한 거지?> 어둠이 드리워진 창밖으로 온 도시를 뒤덮고 있는 시커먼 구름이 보였다. 쏟아지는 빗줄기 아래로 강물은 금방이라도 범람할 듯 모래 색으로 넘실거렸다.
  <크큭. 당신의 그 타락한 인간 동료들을 위해서 날 단죄할겁니까?> 쟌센은 처음 그 눈길로 아를을 냉랭하게 응시하며 말했다.
  <…….> 아를은 말이 없다.
  <인간은 본래 모순적인 존재죠. 거기다 당신은 당신이 그렇게 끔찍이 사랑하는 인간 동료들을 위해 또 다른 동료 한명을 죽여야 하니까. 그러고 보니 당신 역시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모순투성이에요. 정말 우습군요. 아를. 난 당신 같은 현명한 존재가 이렇게 모순될 수도 있다니 놀랍기 그지없네요. 아이러니컬하다고나 할까? 하하하.>
  쟌센은 아를이 알프의 특성과 인간의 어리 섞음 둘 다 가진 하프알프라고 비웃었다. <아니, 하프알프라면 이해하겠지만 하프알프라고도 부를 수 없군요. 하하하 하프알프가 될 수도, 인간이 될 수도, 요정이 될 수도 없는…….>
  아를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나도 모순투성이야. 인간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인간세상을 좀 더 알기위해서 인간을 뒤집어썼다. 인간의 모든 것을…, 모순된 점 또한. 그리고 넌 잘못 알고 있어. 알프 또한 모순된 존재다. 그 정도가 인간에 비해 훨씬 덜 할뿐이지. 신에 가까운 것이 곧 신은 아닌 것처럼.>
  아를이 다시 덧붙였다.
  <그리고 그들은 널 죽이지 않았어. 네가 말한 대로 인간은 모순된 존재라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있어 널 계속 이용해먹었지만, 네 녀석처럼 그 정도 쓰레기는 아니야.>  
  쟌센이 냉소한다.
  <날 버린 그들은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더 큰 이유는 나를 위해서였지만…….>
  인간세상은 인간에게도 때로는 뜨악하고, 그악스럽고, 선뜩하다고 표현 될 수 있을 정도라고 쟌센은 말했다. <옛 현자의 명언이나 속담 등이 뜻하는 바를 거꾸로 뒤집어, 반대방향으로 나아가다보면 인간이란 정의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다 라는 목적지에 닿게 되지요.>  
  <더 해야 할까요? 인간사에 서툰 하마드리아스를 위한 강의를 계속해야 할까요? 인간이 남긴 보편적인 지혜 중 가장 긍정적인 것의 반대의미를 계속 깨우쳐 드려야 하나요?>
  <뭣 때문에 이런 짓을…….>
  <난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할 이유가 있거든요. 코라레스 경 일파를 제거해도 이 나라 관료들은 여전히 날 못 미더워하더군요. 전쟁이란 건 말입니다…. 압도적으로 승리했을 때 경제적인 효과도 엄청나지만, 그에 못지않게 정치적인 파급효과도 큰 법이죠. 거기다 침공군 총사령관이라면…….> 쟌센이 히죽 히죽 웃는다.
  <너는…, 틀렸구나. 너를 위했다곤 하지만 그게 아닐걸? 내가 얘기해볼까?>
  아를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중얼거린다. 아를의 말에 쟌센의 얼굴은 마치 자신이 정말 그런 것처럼 미소가 사라지고 있었다.
  <공작파의 시해는 국왕파가 음모를 꾸미는 시발점이 됐겠지. 네 스스로 동료들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그들과 협력해 일을 벌이고 국왕파에 투항했겠지만, 국왕파는 이 기회를 빌어 적국의 암살로 발표하여 더 큰 효과를 냈지.>
  아를의 말이 이어질수록 쟌센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너는 이번 사건으로 일석이조를 얻었을 거야. 궁정 마법사라는 자리와 침공군 사령관이라는 든든한 정치적 기반을 말이야. 국왕파에서는 암살 사건이 마로니카에 대한 정당한 침공명분을 제공하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아했을 테고, 군비증강에 유리한 효과도 가져왔겠지.
  하지만 국왕파 일당은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큰 이득을 봤어. 첫 번째는 네 손을 빌려 정적인 공작파를 숙청하여 정권을 장악한 점이 가장 괄목할만한 성과였겠고, 두 번째로 정당한 침공명분을 얻어 군비증강을 이뤘으니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했을 테지. 그 다음은 데 팰트로후작이라는 마음대로 제어 가능한 사냥개를 얻었다는 점이야. 또 이와는 별개로 국왕파  는 정치적 방패막이로 써먹을 너라는 면제부를 덤으로 얻은 셈이지.
  네가 궁에서 급히 떠난 건 국왕파와 너의 의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결과였겠군. 너는 야망을 위한 디딤돌로 총사령관 직을 원했을 테고, 국왕파 역시 껄끄러운 불청객인 나를, 왠지 못 미더운 너에게 맡기는 건 용납할 수 없었을 테니까…….>  
  아를이 꼬집어낸 숨겨진 의도 때문인지 쟌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를의 목소리가 가팔라진다.
  <그 증거가 허가서에 명백히 쓰여 있는 너의 이름과 직위겠지. 그들은 충분히 허가서 따위 없애버릴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어. 네가 침공군 사령관 직무를 예상외로 충분히 성공하여도 그들은 이 허가서로 널 파멸 시킬 거야. 침공에 실패해도 넌 죽어. 국왕파로 책임이 돌아오면 그 핑계로 널 처형하면 되니까. 침공에 성공하여 막대한 재산과 정치기반을 이루기도 전에 넌 죽어. 어차피 넌 반대파의 흔적일 뿐이야. 넌 일석이조를 보고 행동했지만 결과적으로 국왕파는 오히려 널 이용해서 일석 삼조의 효과와 언제든 사용가능한 면죄부도 만들어 냈지. 너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냥개 노릇만 한 거야. 결국… 네 자신까지 모두 망친거야.>
  얼굴을 붉힌 채 마구 일그러지던 쟌센이 쿡쿡 웃음을 참더니 호탕하게 입술을 열어 젖혔다.
  <하하핫! 역시 알프는 천성적으로 현명하군요.>
  <전쟁의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이 전쟁의 끝이… 국왕파에서 네 효용가치가 다하는 시점이 될 거야.> 아를은 동정어린 시선으로 말했다.
  <하하. 내가 바보같이 그런 녀석들에게 휘둘릴 거 같아요? 이건 내 판단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쓴 웃음을 짓던 쟌센은 단호한 어조로 소리쳤다. <후회하진 않습니다. 그 상황이 닥치면 또 그럴 겁니다. 더 철저하고, 더욱 치밀하게! 그 정도 생각을 못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남을 수 있어요 숙청되는 동료들을 보면서 깨달은 게 많았답니다.> 쟌센이 오른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검지 손가락 밑동에서 작은 반지의 윤곽이 드러났다. <이게… 날 위협하는 모든 이들로부터 절 도와줄 겁니다. 우선… 내 앞을 가로막는 당신부터…….>
  아를이 찬찬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 쉬더니 가엾다는 듯이 바라봤다.
  <아무리… 그 반지가 대단해도 한낱 마법이 깃든 물건이야. 게다가 나로선 널 어찌할 생각이 없어. 네 행동에 따른 대가는 앞으로 닥쳐올 상황이 대신 할 테니까. 지금이라도 모든 걸 관두고 살길을 찾아보는 게 좋을 거야.> 아를은 그 와중에도 쟌센의 처지를 동정하며 등을 돌렸다.
  <도대체 누가 누굴 동정하는 겁니까!> 쟌센이 격노한 듯 소리쳤다. 아를은 아랑곳 않고 쟌센을 등진 채 걸음을 옮겼다.
  이내 아를의 등 뒤에서 공기가 무겁게 밀려나는 듯한 묵직한 저음이 들려왔다. 어두워진 밤하늘과 꺼진 조명 탓인지 그 실체를 도통 확인 할 수 없었다. 아를 역시 그 소리를 들었는지 직감적인 결과물인지 반사적으로 몸을 홱 돌리며 왼손으로 앞을 가린다.
  <이게 무슨 짓!……>
  퍽!
  아를이 충격으로 뒤로 몇 걸음 비치적거리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단단한 망치로 내려 친 듯이 왼손에 들고 있던 검 집은 산산조각 나버렸고 칼에서는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른 손을 치켜든 쟌센이 저편에서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수계(水系)… 정령 마법인가?> 아를은 자신이 입은 타격보다도 어둠속을 날아온 뭔가에 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듯 했다. 쟌센이 오른손을 놀리자 푸른빛이 번쩍인다. 후웅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묵직하고 둔중한 무언가가 쏜살같이 아를에게 날아간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형편없이 뒤로 밀려난 아를이 의자와 부딪히며 나뒹굴었다. 어느새 아를의 칼은 손잡이만 남아있었다. 벽에 쳐 박힌 아를이 몸을 구부리며 신음을 토해냈다.
  <큭… 어떻게… 주문도 없이.>        
  쟌센은 아를의 꼴을 보고 비웃으며 재차 손을 놀린다. 쟌센의 오른손에서 푸른빛이 뿜어진다. 조명이 꺼진 어둠 속이라 제대로 실체를 가늠하긴 어려웠다. 무거운 바위덩어리가 공기를 가로지르며 날아오는 느낌이었다. 차가운 느낌의 묵직한 덩어리를 육감으로 확인한 듯 이번엔 아를이 날렵하게 피해냈다. 아슬아슬하게 회피한 아를의 뒤쪽에서 와르르 뭔가가 허물어져 내렸다. 고개를 돌려 응시한 아를은 그 광경에 흠칫 했다. 단단한 석벽의 일부가 무너진 채 그 사이로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벽의 일부를 무너뜨린 서늘한 느낌의 덩어리에 아를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를은 어둠 속의 쟌센을 노려보며 자신의 칼이 산산조각 나는 바람에 또 다른 칼을 빼어들었다. 광원도 없는 어두운 방안에서 그 칼은 기이한 광택을 뿜어냈다. <조유즈(Joyeuse)? 코라레스의 칼?> 쟌센이 눈매를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자세를 가다듬은 아를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짧게 중얼거리자 그의 몸 주위에서 아지랑이 같은 것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서늘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를의 입에서 더운 김이 흘러나왔다. 아를 주위의 급격한 온도 변화로 창문에 뿌연 김이 서리고 있었다.
  쟌센은 어둠 속에서 아를을 정확히 응시하며 짓궂게 웃고 있다. 쟌센의 오른손이 다시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냈다. 동시에 아를에게서 흘러나온 아지랑이들이 그의 왼손으로 흘러들어가자, 아를의 손바닥에 그려진 기묘한 도형들과 글자가 환한 빛을 발했다. 환하게 빛나는 왼손을 검에 가져다 대며 아를이 알 수 없는 말로 몇 마디를 크게 외쳤다. 아를의 외침에 황금빛 광채가 푸른빛으로 바뀌어 손바닥을 타고 검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푸르스름한 빛을 내던 코라레스의 검이 새파란 빛을 머금어 더욱 빛나고 있었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공기를 예리하게 가로 지르며 아를에게 쇄도했다. 마치 어둠 속을 날아가는 칼날 같기도 했다. 아를은 푸른빛을 주입받아 더욱 빛나는 칼로 간단히 퉁겨 내버렸다.    
  쟌센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대단하시군요. 마법을 펼치지 않고 검으로 막다니… 설마 루네(Rune)를 더 이상 공부하지 않은 건가요? 하! 하마드리아스들은 엉뚱한 면이 있군요. 그걸 본격적으로 익힐 줄이야.> 컴컴한 저편에서 날아오는 투명하고 차가운 그것은 물이었다. 빛나는 검신에 점점이 맺힌 물방울이 그 증거였다. 카펫을 흥건히 적신 물에서 물비린내가 올라왔다. 아를은 도처에 널려있는 유연하며 무정형한 물의 위력에 놀란 눈치였다.    <마법이 아니야.> 아를이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쏴아아아
  쟌센이 다시금 수를 썼는지 창밖의 빗소리보다 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를은 푸르게 빛나는 쟌센의 손을 응시하며 좀 전과는 다른,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기이한 소리로 중얼거린다. 아를의 칼이 이번에는 녹색으로 달아올랐다. 세찬 물소리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아를에게 날아가는 소리였다. 빛나는 칼이 광원이 된 덕분에 번뜩이는 빛을 발하는 물줄기들이 보였다. 여러 가닥의 물 화살이 방안을 가득 메웠지만 아를은 오히려 물줄기 쪽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아를은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검을 휘둘러 댔는데 그 중의 몇 줄기가 망토와 가죽 옷자락을 헛되이 꿰뚫었을 뿐이었다.
  무산된 공격에 쟌센의 눈이 흔들렸다. 아를은 그 틈에 한 발짝 더 다가서면서 단검을 던졌다. 빙그르르 회전하며 날아가던 단검은 쟌센 앞에 나타난 물줄기 앞에 맥없이 떨어졌다. 그 틈에 아를은 쟌센에게 더 다가서고 있었다. 쟌센은 그런 아를을 흥미롭다는 듯이 차분히 응시했다. <여태껏 당신이 검술을 왜 배웠는지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오늘 보니 그게 아니군요.> 아를은 은연중에 쟌센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아를은 상대적으로 신속한 쟌센의 공격을 막아내기 보단 검으로 회피하는 수단을 택한 듯 했다. 그러면서 쟌센의 오른손이 빛을 발할 틈을 주지 않으려 의도적으로 거리를 좁히는 듯 보였다. 그 의도를 알만하다는 듯 쟌센은 슬그머니 다가오는 아를의 발끝을 보고 실소를 머금고 있었다.  
  쟌센의 손에서 여태까지와는 다른 더욱 새파란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소용돌이치는 물기둥이 바닥에서 뿜어져 나온다. 하나, 둘, 셋……. 회전하는 물기둥의 개수가 늘어갈수록 쟌센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갔다. 힘겨운 듯 보이는 쟌센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소용돌이가 높이 솟아오른다. 쟌센을 보호하듯이 둘러싼 물기둥에 아를은 더 접근하기를 포기한 듯 보였다. 제법 넒은 방안을 가득 채운 물기둥에 천장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고 방안의 벽들이 우르릉 무너질 듯 진동했다.
  거친 소음과 허연 물보라를 일으키는 물기둥을 본 아를이 칼을 바닥에 꽂고는 입술을 들썩거린다. 낮고 빠르게 흥얼거리는 듯 했다. 어느 새 아를의 몸 주위에 투명한 아지랑이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쟌센이 다급히 일갈하자 수 개의 물기둥이 소용돌이치며 아를을 집어삼킬 듯 덮쳐들었다.    다가오는 물기둥을 노려보며 아를이 두 팔을 위로 치켜 올렸다.
  쿠우우우.    
  지근까지 접근한 물기둥에도 아를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천천히 두 손을 앞으로 뻗을 뿐이다. 고요했다. 마치 아를 주위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듯 보였다. 마침내 아를의 두 팔이 활짝 펼쳐졌다. 아를의 두 손이 밝은 청광을 띄더니 연녹색의 장막을 넓게 형성했다. 용트림 치며 날아오던 물줄기들은 별수 없이 아를사이에 생겨난 장벽에 거세게 부딪혔다.  
  콰콰쾅.
  맹렬하게 회전하던 물줄기들은 연녹색의 빛에 부딪히면서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물줄기들은 폭발의 여파로 방안의 사면에 물벼락을 때렸는데, 그 충격으로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충격파로 인해 방안의 벽은 남아나질 않아 휑하니 바깥의 전경을 허용했다. 천장 곳곳에 구멍이 뚫려 비가 들이쳤는데 둘 다 맨 몸으로 비바람을 맞이해야 했다. 아를은 멀쩡했다. 빛의 장막도 물줄기와 함께 사라져 버렸지만.
  태연히 서 있는 아를의 모습에 쟌센의 눈이 커진다. 쟌센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씩씩거렸다.
  <이!…, 이!…. 어떻게 그런!>
  아를도 놀란 듯 주변을 둘러보다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 인간이 어떻게 그 정도 마법을 구사하는 거지?>
  쟌센의 오른손은 여전히 푸르스름하게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쟌센의 빛나는 손가락을 아를이 고개를 갸웃하며 응시했다. 창백하게 질린 쟌센이 의아한 듯 아를의 눈길을 쫒았다. 자신의 오른손에 멈췄을 때, 쟌센은 지친 와중에도 ‘흐흐’ 웃어 보였다.
  <이게 궁금하신가보군.> 쟌센이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싸움이 멈추자 비로소 쟌센의 오른손에 끼워진 반지가 드러났다. 아를은 그제야 쟌센의 손에서 빛나는 반지에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푸른색의 보석이 박힌 반지. 아무런 조각도, 글자도 없는 평범한 반지였다.
  <킬킬 이 반지… 아주 대단하지. 절대적인 힘!… 그 자체라고 해도 좋아. 난 이 반지의 진면목을 최근에야 알아냈지. 아, 그리고 미처 언급하지 않은 게 있는데 그들이 날 멀리 한 이유 중에는 이 반지 때문이기도 했었지. 이 반지…. 그들의 정적을 죽일 때 굉장히 유용했으니까….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깨끗한 살인 도구…. 이 반지의 내력을 알게 되자 다들 반지를 내놓으라고 야단이었지만. 흐흐.>
  창백하게 번들거리는 얼굴로 쟌센이 반지를 바라보는 눈은 몽롱했다. 반지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쟌센에게 아를은 코웃음을 쳤다. <흥, 그까짓 마법도구가 뭐 그리 대단…….> 무심코 반지를 응시하던 아를의 눈이 커진다. 급히 말을 멈춘 아를이 능글거리는 쟌센의 반지를 찬찬히 뜯어본다. <설마…….> 아를은 눈을 크게 뜬 채 공허하게 반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라… 라구(LAGU)의 반지?… 어떤 색도, 냄새도, 아무 맛도 없는… 모든 가능성을 암시하는 모체(Matrix)… 4원소의 증거?…….> 자신이 말하고도 어안이 벙벙한 듯 아를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모습이다. <다, 단지 전설일 뿐으로 언급 되었을 텐데…….> 믿을 수 없다는 듯 말꼬리를 흐린 아를은 연신 반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아를의 반응이 재밌는지 쟌센이 히죽 웃었다.
  <굉장히 오래된 반지지. 정확한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아를이 의문에 가득 찬 어조로 대꾸했다.
  <잠재적인 씨앗의 루네(RUNE)가 겨우 네 녀석에게… 동조한단 말이냐?> <어리석긴…, 눈으로 직접 보고도 모르는군.> 쟌센이 비꼬면서 말했다.                          
  아를이 반지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그럼… 이 폭우도….> 그리곤 구멍 뚫린 벽 사이로 밖을 바라보곤 놀란 듯 입을 반쯤 벌리며 말했다. <저 엄청난 홍수도… 다 네가 한 짓이냐?> 성 밖의 광경은 엄청났다. 갑작스런 홍수였다. 가옥의 지붕에 닿을 정도로 물이 차 있었다. 지붕위로 피신한 몇몇 사람들이 멀찍이서 보인다. 하천은 이미 범람한지 오래 된 듯 했다. 황토색 흙탕물이 키 큰 나무의 잎사귀마저 적시고 있었다.
  <나와 라구(LAGU)의 의지에 달려있지. 난… 이 반지랑 아주 죽이 잘 맞아.> 쟌센이 히죽거리며 반지를 만지작거린다. 아를은 어이가 없는 듯 그저 바라만 봤다. 히죽 거리던 쟌센이 갑자기 웃음을 멈췄다.
  <아무튼… 나 혼자 힘으로 당신을 어찌 할 순 없겠군. 후후.> 이상하게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비가 들이 쳐서 그런지, 더욱더 납빛같이 변한 얼굴로 쟌센이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쟌센은 아를을 정말 질린 다는 듯 바라보며 고개를 젓는다.
  <당신은 정말 대단하지만… 여기까지야.> 쟌센이 뜻 모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곤 공허한 웃음을 남기며 반지를 향해 무언가 중얼거렸다. 비바람이 들이치는 소리에 잘 들리진 않았지만, 뭔가를 불러내는 듯 했다.
  이윽고 반지가 푸르스름한 빛으로 물들며 여태껏 느낄 수 없었던 기이한 공명을 울렸다. 반지에서 투명한 물줄기 하나가 흘러나왔다.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카펫바닥에 웅덩이가 생겨났다. 하지만 바닥을 적시지는 않았다. 곧이어 그곳에서 물기둥이 높이 치솟았다. 이내 물기둥 아래의 두터운 부분이 두 부위로 갈라졌다. 맨 위 부분은 둥그런 구체로 깎아진 듯 매끈하게 변했다. 양 옆에서 물줄기가 하나씩 가지처럼 툭툭 튀어나온다. 아랫부분은 두 개의 기둥처럼 매끈한 형태를 갖추며 복사뼈의 형태가 드러났고, 양 쪽에서 튀어나온 물줄기 끝은 세세하게 여러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구멍이 뚫린 지붕에서 쏟아지는 빗줄기가 물기둥에 합쳐져 사람 형상의 그것은 점차 거대해졌다. 천장이 제 기능을 상실할 만큼 엉기성기한 지붕 밖의 하늘은 시커먼 구름과 그 속에서 이따금씩 번쩍이는 우레만 보일 뿐이었다.  
  완전한 사람의 형상을 갖춘 거대한 물기둥이 뒤를 돌아본다. 옆으로 비틀린 허리는 질감이 있는 듯 푸딩이나 젤리처럼 주름진 형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 냈다. 투명한 거인의 얼굴에서는 코로 추정되는 큰 굴곡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마 아래 두 군데가 함몰되면서 동그란 눈꺼풀을 만들어냈고, 그 눈꺼풀이 뜨여지며 투명한 눈동자가 쟌센을 바라본다. 아래턱의 조금 위에서는 도톰한 둔덕이 생겨나더니 위아래로 갈라지며 활짝 열렸다.
  [으하하하하하-]
  실내의 창문이 모두 깨진 것은 물론, 찻잔이나 유리병 등도 그 자리에서 터져나갔다. 성의 모든 유리창들도 깨졌는지 아래쪽에서 난잡한 소음이 들려왔다. 내리던 빗줄기마저 대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며 직선이 아닌 기괴한 곡선을 그리며 진동했다.
  갑작스런 광소에 아를이 움찔한다. 쟌센은 특별한 존재의 등장과 포효에도 익숙한 듯 놀라지 않는 모습이다. 쟌센의 표정이 이상하게 어두웠다. 쟌센은 전보다 더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쟌센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투명한 거인에게 중얼거리며 아를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투명한 거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를을 돌아봤다.
  그 손짓과 시선에 아를은 쭈뼛…… 소름이 돋는다.
흠칫 놀란 아를의 목젖이 꿀꺽 움직였다. 갑자기 쟌센이 눈을 감은 채로 알 수 없는 말을 길게 읊조리기 시작했다. 쟌센의 주위에 회오리바람이 이는 듯 바닥의 물이 원형으로 잔물결을 치기 시작했다. 아를이 눈을 찌푸리며 다가가려 하자 투명한 물의 거인이 앞을 막아섰다.
  쟌센의 행동과 거인의 반응으로 사태를 짐작한 듯 이내 아를은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기 시작했고 곧 아를의 양손에서 심상치 않은 흐름이 포착됐다. 아를의 성량은 이전과 달리 크게 높아져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으로 노래하는 시간도 훨씬 길어졌다. 쟌센과 마찬가지로 허옇게 질린 채 땀을 비오는 듯 흘렸다.
  아를주위에서 새로운 기류가 생성되자 이윽고 또 다른 소용돌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투명한 거인이 자신의 몸을 회전시키고 있었다. 순식간에 거대한 소용돌이로 변형된 물줄기가 허연 물보라를 일으키며 세차게 아를의 주위를 에워쌌다. 규모를 더 해가는 쟌센 주위의 기류와 눈앞의 회전하는 물줄기를 향해 당혹한 시선을 던지던 아를은, 결심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돌연 아를의 두 손바닥에 그려진 도형의 한 쪽 모서리에서 각기 황금빛의 환한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를에게서 뻗어 나온 휘황한 광채가 용트림치는 거인의 물줄기와 충돌했다.
  쿠쿠쿵.
  물의 장벽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장벽 저 너머에서 아를이 여기저기 빛줄기를 쏘아대는 모양인지 군데군데 폭음을 일으켰지만, 세차게 회전하는 소용돌이를 뚫고 나오진 못했다. 마치 폭풍우속에 태양을 가두어 놓은 듯 했다.  
  이윽고 노랫가락을 마친 쟌센이 허옇게 질린 채, 이따금 번쩍이는 폭발을 삼키며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물의 장벽을 바라보고는 힘겨운 미소를 보냈다. 쟌센 주위의 기류는 어느새 잦아들어 있었다. 대신에 두 팔을 하늘 위로 뻗은 쟌센 위의 따뜻하고 거대한 공기층이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또 다시 굉음과 함께 세차게 회전하던 물의 소용돌이 안에서 환한 빛이 세어져 나왔다. 쟌센이 크게 일갈하며 다급히 두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눈이 멀 것 같은 새하얀 광채가 그를 중심으로 발작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빛다발이 물의 장벽에 접근하자, 놀랍게도 물줄기가 좌우로 갈라지며 쟌센의 빛줄기를 허용했다.
  엎친 공격에 당황한 듯 아를의 눈이 큼지막하게 벌어진다. 휘황찬란한 허연 광채가 아를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동시에 아를은 육박해오는 새하얀 빛줄기를 향해 황금빛 광채를 무수히 뿜어냈다. 휘황한 빛줄기에 아를의 모습이 가려진다. 두 빛줄기가 충돌하자 굉음과 함께 터져나갔다. 곧이어 엄청난 대폭발이 아를의 외침마저 삼켜버린다.
  시야를 하얗게 가릴 정도로 눈부신 대폭발이 일어났다. 제법 넓은 방을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날려버린 빛의 폭발은 그것도 모자라 성의 아랫부분까지 휩쓸었다. 성이 무너지고 있었다. 기둥이 쓰러지고 성벽을 쌓아올린 커다란 바위덩어리들이 무너져 내렸지만 쏟아지는 폭우에 먼지 하나 일어나지 않았다. 자그마한 동산위의 성이 붕괴됐지만 주변의 폭우와 뇌성으로 인해 소음은 그리 크지 못했다. 조용한 붕괴였다.
  저 멀리, 곳곳에 균열을 일으켜 사이사이로 물이 세어 나오던 도시 외곽의 거대한 댐이 기어코 붕괴되고 있다. 억압에서 해방된 물은 삽시간에 산더미만한 파도가 되어 있었다. 흡사 해일 같은 거대한 파도는 드넓은 검은 그림자를 만들어 낼 정도였다. 도시에 인접한 야산이 제일 먼저 물벼락을 맞았다. 여파로 발생한 급류에 숲의 나무들이 이쑤시개처럼 꺾이거나 부러졌다. 이윽고 산의 거목과 바위들이 쓸려 내려와 가옥을 으깨버린다. 더불어 폭우와 홍수로 이미 한 차례 범람했던 하천의 수량이 급격히 늘어나며, 크고 작은 너울이 만들어 졌다. 그 서슬에 줄기의 대부분이 물에 잠겨 있던 가로수와 정원수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뽑히거나 부러져 나갔다.
  갑작스레 생겨난 너울성파도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지붕위에 올라가 안심하고 있던 사람들의 머리 위로 솟구쳐 올랐다. 미처 피할 겨를도 없어보였다. 불어난 물은 지붕 위의 몇몇 살아남은 사람들마저 휩쓸었고 급기야 도시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변두리의 자그마한 동산을 제외한 도시의 모든 것이 물에 잠겼다. 요란한 홍수의 소음이 잦아들자 예의 빗소리만 다시 찾아왔다.
  붕괴된 성의 잔해 위로는 장대같은 비가 연신 돌조각을 딱딱 때리고 있었다.

  불투명한 사선을 긋는 장대비 사이로 번뜩이는 번갯불이 간간히 비쳤다. 구르릉 뇌성이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비구름 아래로 무너진 성의 잔해가 보인다. 붕괴된 성벽의 잔해 사이로 빗속의 흐릿한 형체가 얼핏 눈에 들어왔다. 사람으로 보이는 거무스름한 윤곽의 형체주위에는 기이하게도 돌무더기가 쌓여있지 않았다. 무심한 듯 서 있는 초로의 노인은 극심한 붕괴의 현장에서도 멀쩡했다. 머리가 희끗하고 주름이 자글했지만 낯이 익은, 어디선가 본 듯한 노안(老顔)이었다. 물의 거인은 온데간데없이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저편의 커다랗게 쌓인 바위덩어리들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아주 잠깐, 돌무더기가 움직인 듯 했다. 순간, 노인의 눈이 번뜩였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도저히 노인의 눈동자라고 볼 수 없는 새파란 눈빛이었다. 돌무더기가 다시 한 번 움찔했다.
  툭투둑. 잔돌조각이 붕괴된 매끈한 벽면을 타고 구르고 있었다. 돌연 돌무더기가 불쑥 솟아올랐다가 다시 주저앉는다. 무언가가 돌무더기 아래에 있는 모양이었지만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한동안 잠잠했다.
  갑자기 거대하게 쌓여있던 돌무덤이 크게 솟아오르더니 폭발과 함께 돌조각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노인에게로 날아든 파편들은 어느새 생겨났는지 회전하는 물기둥에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노인이 폭발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린다. 한 사람이 우뚝 몸을 일으켰다. 비에 젖어 마구 헝클어진 금발에 칙칙한 녹색 눈동자. 군데군데 찢겨나간 옷 사이로 빗물과 섞인 불그레한 선혈이 흘러내렸다. 아를이었다. 그런데, 아를의 귀가 이상했다. 밋밋한 둥근 귓바퀴의 전과는 달리 위쪽이 뾰족한 형태였다. 인간들과는 확연히 다른 뾰족한 귀의 아를이었다.
  사방은 온통 물바다였다. 도시를 집어삼킨 모래색 물결이 작은 동산 아래 기슭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시야를 흐릴 정도로 쏟아져 내리는 비속에서 노인을 목도한 아를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이내 노인의 검지에 있는 푸른색의 반지를 보고는 두 눈을 빛냈다. 작고 수수한 푸른색 반지. 그제야 노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모습의 노인에게서 쟌센의 흔적을 유추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본 모습으로 돌아온 둘은 서로를 빈틈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쟌센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던 아를이 순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쟌센의 동공은 무저갱처럼 공허했고 도무지 초점이 없어 보였다.
  <너, 설마!…….> 놀라움과 당혹함을 감추지 못한 아를의 주의력이 산만해지자 틈을 놓치지 않고 쟌센이 팔을 휘저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반지에서는 푸르스름한 빛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수직으로 내리던 빗줄기가 동요하며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뭔가에 이끌리 듯 덜컥 쟌센의 손짓에 호응했다. 깡마른 손을 따라 직각으로 방향이 꺾인 빗줄기가 바늘처럼 우수수 날아갔다.
  동시에 아를의 검이 다시금 빛을 발했다. 아를이 검을 휘두르자 쨍, 쨍. 하는 쇠울림과 함께 날카로운 물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아를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옆구리에서 붉은 선혈이 물씬 베어나오다가 빗속에 연하게 묽어져 흘러내렸다. 아를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상처에 슬쩍 손을 갖다 대며 출혈을 막았다. 상의를 찢어 상처를 동여맨 아를이 더 이상 빛나지 않는 반지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어떻게… 반지를 통하지 않고서?…….> 아를은 쟌센의 공허한 동공을 쏘아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넌 누구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던 아를은 급기야 몸을 가느다랗게 경련했다. 물의 거인이 보이지 않았다. <네, 네 몸속에… 설마… 그?…….> 아를이 부릅뜬 눈으로 중얼 거렸다.
  쟌센은 무심한 듯 그런 아를을 응시하며 반지가 없는 왼팔을 가볍게 저었다. 빗줄기들이 한 지점으로 방향이 집중되자 아를 앞에서는 단단하게 뭉쳐져 날카로운 쐐기모양으로 날아들었다. 여지없이 아를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반구형의 장막을 형성하며 가까스로 막아냈지만, 후폭풍에 발이 뒤로 주욱 미끄러지는 데는 아를도 별 수 없어 보였다.  
  <……!>
  간신히 몸을 추스린 아를이 앞으로 고개를 돌리곤 눈을 부릅떴다. 입이 떡 벌어진 채 경악한 표정이다.
  콰아아아!
  거대한 파도였다. 두 팔을 높이 들어 올린 쟌센을 배경으로 언덕을 넘어 범람한 물이 높이 용솟음 치고 있었다. 흙과 모래, 여러 불순물들이 뒤섞인 흙탕물의 파도였다. 쓰러진 나무나 큼지막한 바위도 가세해서 위력을 더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너진 성의 가장자리에서 넘실거리던 물이었다. 궂은 날씨의 해안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거대한 물결이 시야를 가득 메우며 사방에서 밀려왔다.
  아를은 급히 칼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 눈을 감고 다급한 어조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중 가장 큰 성량이었다. 거기다 시간도 훨씬 길어져 있었다. 흥얼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분명하고 단호한 어조였다. 성량이 높아질수록 전신은 땀으로 가득했고 두 다리가 미미하게 떨리더니 급기야 입술이 파리하게 질려갔다. 반복되는 후렴구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창백한 안색으로 숨을 헐떡일 정도가 되어서야 아를이 겨우 멈췄다.
  서 있기 조차 힘에 부친 듯 입술을 질끈 깨문 모습이었다. 주위에 따뜻한 아지랑이 같은 것이 구름처럼 뭉쳐져 있었다. 거쿨지며 다가오는 파도들은 뇌성과도 같은 웅장한 소음을 토해내며 빗소리마저 집어삼켰다.
  마침내 아를이 길게 일갈하자 양 손에서 초록색 빛 무리가 둥글게 뻗어 나왔다. 푸른 녹색에 그치지 않고 새파랄 정도로 짙은 녹색이었다. 푸른빛에 밀려난 빗물이 사방으로 쫘악 튀어나갔다. 위에서 떨어지는 장대 같은 빗줄기가 빛의 장막에 닿자 스러지더니 막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다. 세찬 물보라를 머금은 거대한 파도가 덮쳐오는 가운데 녹색 방어벽을 둥글게 친 아를은 급류속의 작은 구슬 마냥 위태로워 보였다.
  이내 모래 빛 파도가 녹색장막을 강타했다. 푸른 장막에 부딪힌 폭포수 같은 급류가 굉음을 토해냈고 빛의 장막은 거세게 진동했다. 거친 급류가 반구형의 장막 주위를 연신 세차게 부딪히고 있었다. 격렬하게 흔들리던 구형의 녹색 방어막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급기야 깨져 버린다.
  콰콰콰콰. 여지없이 그 안으로 거센 급류가 쏟아져 들어간다.
  거대한 급류의 소용돌이는 푸른빛의 장막과 돌무더기를 집어삼키고는 저지대로 빠져나갔다. 거센 급류에 휩쓸린 바위와 성의 잔해들이 저 아래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거대한 파도와 급류가 흙바닥을 파내버렸는지 저지대에는 막대한 토사가 쌓여 작은 섬을 이루었다.  
  시야를 가득 메우던 세찬 물살이 빠져나가자 그 자리에 흐릿한 형체가 드러났다. 땅 속 깊이 박힌 칼을 두 손으로 꽉 붙잡고 있는 아를이었다. 칼을 바닥 깊숙이 박아 넣고 그걸 의지해 버텨낸 모양이지만 만신창이가 된 채 연신 기침을 하며 물을 토해냈다.
  쟌센의 눈이 허공을 향했다가 바닥으로 내리 꽂힌다. 빗물이 순식간에 허공에서 뚤뚤 뭉쳐지더니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하강했다. 아를은 데굴데굴 몸을 굴려 가까스로 물 덩어리를 피해냈다. 묵직한 물벼락이 돌조각들을 갈아버린 듯 바닥에 구멍을 뻥 뚫어 놓았다.
  겨우 몸을 일으킨 아를이 이리저리 빠르게 움직이며 위기를 모면했다. 틈틈이 아를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손에서 황금빛 빛줄기를 쏘아보내기도 했지만, 거대한 물의 장벽에 번번이 막혀버렸다. 빛과 물의 충돌로 생긴 폭음과 섬광을 틈타 아를이 단검을 힘껏 내던졌다. 쟌센이 방어하는 동안 시야가 가린 점을 노린 모양이었다.
  바람소리와 함께 날아간 아를의 칼이 쟌센을 깊숙이 헤집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단검은 마치 물속을 향해 던져진 듯이 속도가 눈에 띄게 떨어지며 쟌센의 등 뒤로 빠져나와 힘없이 떨어졌다.
  <이게 무, 무슨·…….> 아를은 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쟌센은 멀쩡했다. 관통 된 곳에서는 한 방울의 피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런 상처가 없었던 듯 했다. 수면을 향해 칼을 던진 것처럼. 마치 칼로 물을 벤 듯이 살이 베였음에도 쟌센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어 보였다. 그가 공허한 눈으로 아를을 응시하자 한 줄기의 세찬 소용돌이가 아를을 강타한다. 칼의 배면으로 엉겁결에 맞부딪힌 아를의 몸이 충격으로 가랑잎처럼 허공을 날아갔다. 컥. 기울어진 커다란 기둥에 등을 찍고 흘러내린 아를이 신음을 내질렀다.
  <허억… 헉…….> 아를의 코와 입에서 뽀얀 수증기가 밀려 나온다. 가슴은 가쁜 숨으로 들쭉날쭉했다. 아를이 다시 터져 나오기 시작한 옆구리의 상처를 압박하면서 성치 않은 몸을 일으킨다.
  <마, 말도 안 되는….> 쟌센이 팔을 아를에게 내뻗자 떨어져 내리던 빗줄기가 방향을 바꿔 날카로운 물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내리던 빗줄기가 일제히 방향을 바꿔 사방에서 날아드는 모습에 오싹한 전율을 느꼈는지 아를의 몸이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켰다. 널찍한 석벽의 잔해에 몇 개의 물줄기가 적중하자 놀랍게도 자그마한 구멍이 숭숭 뚫린다. 그 광경에 아를은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부릅떴다.
  아를이 다급하게 몸을 피했다. 무너진 벽을 향해 돌진하던 물줄기들도 허공에서 방향을 바꿨다. 급격히 선회하는 쉭쉭 하는 소리가 아를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를이 더 이상 피해 낼 수 없었는지 몸을 반전시킨다. 뒤돌아선 아를이 보일 듯 말듯 희미한 푸른 기운이 내비치는 칼을 휘두르며 물줄기들을 흘려보냈다. 그 서슬에 구멍이 숭숭 뚫린 아를의 망토가 너덜거렸다.
  아를이 재차 가느다란 푸른 빛줄기를 내뿜었지만 회전하는 소용돌이에 맥없이 막혀버린다. 쏘아내자마자 다리가 휘청했다. 여기저기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정신없이 쟌센의 공격을 피하던 아를은 쟌센의 단 한 번의 일격에 흉하게 바닥을 굴렀다. 일어날 새도 없이 수많은 물줄기가 날아들었다. 아를은 사력을 다해 검으로 물줄기를 걷어내려 애썼다. 숨 가쁜 아를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있다. 점점 상처가 늘어나면서 바닥을 구르던 아를은 코너에 몰렸다.  
  촤아아아.
  저 편에서 허연 물보라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물기둥이 보인다. 아를은 마지막 일격임을 감지했는지 부들부들 떨면서도 이를 악물고 검을 들어올렸다. 이제 저 물줄기가 아를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으리라. 아를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취이이익.
  난데없이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안개인지 물입자인지 모를 뜨거운 수증기가 뭉실뭉실 일어났다. 닿기만 하면 금세 액화될 정도로 뜨거운 수증기가 비에 걷히자, 여기저기 찢어진 옷에 피투성이의 아를이 보인다.
  용틀임 치며 다가오던 물줄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여태껏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던 쟌센도 놀란 기색이다.
  땡그렁. 아를의 칼이 둔탁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보다 당혹한 시선을 던지며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질적인 시선으로 앞을 응시하는 아를의 동공이 큼지막하게 벌어졌다.
  아를의 앞에서 아찔할 만큼 화끈한 열기가 쏟아져 나왔다. 붉디붉은 선홍색으로 달아오른 시뻘건 형체가 아를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단순히 불덩어리라고 하기엔 부족해 보였다. 커다란 인간의 형상을 한 이 불의 거인이 좀 전의 차가운 물기둥을 증발시켜 버린 듯 했다. 활활 타오르는 거인의 발이 바닥에 고여 있던 웅덩이에 닿자, 끓는 기름에 물이 튄 듯 파바박 놀란 물방울이 튀어 오르며 푸스스하고 뽀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그 순간 아를과 쟌센의 당혹한 시선의 초점은 같았다. 더 이상 쟌센도 아를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된 아를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쟌센은 갑자기 등장한 시뻘건 거인에게 주목하고 있었다.
  새로운 존재의 등장에 아를이 위협을 느낀 듯 머뭇머뭇 거리더니 칼을 집으려 신중하게 다가간다. 아를이 떨어뜨린 검은 거인의 지근거리에 놓여 있었다. 칼의 손잡이에 아를의 조심스레 떨리는 손이 닿았을 때였다.
  <악!>
  고통스런 비명을 내지르며 아를은 불에 댄 사람처럼 황급히 손을 움츠렸다. 칼 전체가 어느새 지글거리는 선홍색으로 물들어있었다. 불타오르는 거인의 시뻘건 열기 때문인 듯 했다. 신음하던 아를이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심한 화상을 입은 듯 불그레한 수포가 볼록 일어나 있다.
  시뻘건 거인의 주위에선 눈에 보일 정도의 이글거리는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눈을 쏠 정도로 지글거리는 열기를 발산하는 붉은 거인은 흡사 용광로의 그것과 비교될만했다. 엄청난 열풍에 서늘한 빗방울마저 아를의 위에서 따뜻한 온기를 머금고 떨어지고 있었다.
  불의 거인이 급히 몸을 부풀렸다. 용틀임치는 커다란 물의 소용돌이가 거세게 부딪혀 왔기 때문이다. 둘의 접촉면에선 여지없이 뽀얀 수증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고 아를이 있는 거인의 뒤로는 거센 열풍이 휘몰아치는 상반된 풍경을 연출했다. 그 잠깐의 시간동안 이글거리는 열기가 비에 젖은 아를의 물기를 몽땅 앗아가고 있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이젠 은은한 열기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거인이 물줄기와 힘겨루기를 하느라 처음의 그 맹렬한 기세는 아니었지만, 은은하고 따뜻한 열기는 주위를 뭉근하게 데우고 있었다. 거인이 나타난 순간부터 빗줄기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거인에게서 뿜어져 나온 열기가 아를의 몸을 데웠는지 그의 어깨와 머리위에서 희고 가느다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젖었던 옷도 대충 말라 거적 했다. 출혈도 멈췄는지 흐르던 피가 엉겨 붙었고 부상과 추위에 파랗게 질려있던 입술이 혈색을 되찾고 있었다.
  불의 거인이 후끈한 열기를 사방으로 뿜어내며 무섭게 달아올랐지만, 허연 물보라를 일으키며 회전하는 차가운 물줄기 역시 만만치 않았다. 선홍색의 불꽃을 뿌려대며 요동치는 불의 거인은 빗물과 범람한 하천의 물을 이용하는 쟌센에 시나브로 밀려나고 있었다. 불의 거인은 연이은 싸움으로 열기가 다 해 가는 듯 했다. 몸체의 대부분은 아직 시뻘건 열기를 뿜어냈지만 가장자리에서는 차가운 빗방울이 닿을 때마다 오렌지색 불길로 피식피식 식어갔다.
  처음 아를의 두려움과 고통에 가득 찬 눈이 이제는 경건한 그 무언가로 바뀌었다. 아를이 염려스러운 눈으로 불의 거인을 바라봤다.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듯 아를이 자신의 칼로 슬금슬금 몸을 움직인다. 아까와 달리 칼에 몸을 의지하지 않고 자립했다. 아를이 호흡을 가다듬자 날숨으로 비에 젖은 가슴팍이 부풀었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하다가 서서히 그 기복이 잦아든다.      
  구무럭 몸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아를을 본 쟌센이 무시무시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괴성을 지른다. 그러자 언덕 주변에 모여 있던 물이 일제히 솟구쳐 오르면서 용틀임 치더니 아를에게로 덮쳐들었다. 높이 솟아 오른 파도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불의 거인 역시 포효하자 거인의 몸에서 거센 열풍이 쏟아져 나와 떨어지던 빗방울을 모조리 날려 보냈다. 거인이 마지막 힘을 불태우는 듯 전신이 벌건 화염으로 넘쳐흘렀다. 뜨겁게 달아오른 붉은 거인이 허공에 붉은 궤적을 남기며 여러 갈래로 흩어지자, 아까와는 다른 새빨간 빛줄기가 줄기줄기 뻗어나갔다. 지글거리는 열기를 발산하는 뻘건 빛줄기와 차가운 물줄기가 충돌했다.
  꽈꽝!
  붉은 섬광과 함께 거대한 파도가 급격히 흩어지며 불길을 삼켜버린다. 물줄기 중 일부는 증발해버렸다. 그 바람에 막대한 수증기가 둘 사이에 뿌연 장막을 만들어 놓았다.
  아를이 불쑥 허연 수증기속을 뚫고 나왔다. 탐방거리며 달려온 아를이 쟌센에게로 몸을 날렸다. 때를 같이해 수증기속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새빨간 불줄기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아를의 검으로 스며들었다. 아를의 칼이 금세 선홍빛으로 달구어졌다. 처음의 그 엄청난 열기였다. 아를 역시 모든 기력을 다하는 듯 얼굴이 잔뜩 상기된 채로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붉게 타오르는 칼을 맨 손으로 거머쥔 아를은 뜨거울 만도 하련만 오히려 더욱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아를의 검이 쟌센을 찔러 들어간다. 쟌센이 물기둥으로 벽을 쳤지만 시뻘건 칼이 물줄기를 가볍게 꿰뚫고 쟌센의 가슴에 꽂혔다. 물웅덩이에 돌을 던져 넣은 듯 쟌센의 중심에서 물결처럼 파문이 일어났다.  
  [캬아악!]
쟌센의 입에서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쟌센이 발악하며 손을 휘젓자 아를의 몸이 가랑잎처럼 허공을 날아간다. 공명을 하듯 떨리는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아를의 칼은 더욱더 선홍빛으로 불타오르더니 그 기운이 칼날을 타고 쟌센에게로 옮겨갔다.
  한순간 쟌센의 몸이 물처럼 투명하게 변했다. 순식간에 모든 빛을 받아들이는 물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그 투명한 몸체 안쪽에서 선명하리만치 붉은 기운이 잉크가 확산되듯 사방으로 퍼졌다. 증발하고 있다. 쟌센의 몸은 액체처럼 한 방울 한 방울 사라져가고 있었다.
  [크아아악!]
쟌센이 두 팔을 마구 휘둘러 칼을 뽑아내려 하지만 붉게 달아오른 칼자루에 닿자마자 두 손이 수증기로 화해버린다. 인간의 목소리라고는 볼 수 없는 기인 괴성과 팔을 미친 듯이 휘두르는 것을 끝으로 쟌센의 투명한 액체 같은 형상이 산산이 흩어져 갔다. 대자연은 밑으로 내리고 쟌센은 위로 솟아올랐다.
  허공으로 기화되는 쟌센을 아를은 멀찍이서 지켜봤다. 아를의 눈에서 단 한 번도 찾아볼 수 없었던 젖은 물기가 이제는 줄줄 새어 나온다. 차갑게 내리는 비와는 다른 뜨거운, 자연의 포용과 관대함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수분이었다. 지금 내리고 있는 대자연은 갖고 있지 못한 고통과 슬픔의 하강이었다.
  쟌센이 증발하자 수증기 속에서 아를의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를도 풀썩 앞으로 쓰러진다. 땀에 젖은 아를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모든 기력이 쇠진한 듯 아를은 엎어진 그대로 한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

  아를이 얼굴을 쳐 박고 있는 작은 웅덩이가 그의 불규칙한 호흡으로 잔잔한 파문이 인다. 맑은 물웅덩이의 표면으로 비구름이 세차게 이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아를의 얼굴에 미소가 어린다. 아를은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땀에 젖은 얼굴로 저 멀리 개이고 있는 먹구름을 가만히 응시한다.
  날이 완전히 개였다.
  노오란 태양이 비구름을 멀리 쫒아버리고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비추자 아를이 고개를 들었다. 부스럭거리며 몸을 추스르더니 무릎을 일으킨다. 비구름은 완전히 물러갔지만 도시전체를 집어삼켰던 물은 콸콸콸 흘러가면서 서서히 하류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를이 깊이 숨을 들이 마신다. 비온 뒤의 맑고 깨끗한 공기다. 벌써부터 새들이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저만치에서 지저귀고 있었다.
  자신의 칼 앞에서 조심스럽게 두 무릎을 굽힌 아를이 칼을 안아든다. 햇살이 밀려오고 있다. 여전히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아를이 몸을 일으키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를이 걸음을 떼자 자갈이 밟히며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그동안의 충돌의 여파로 무너진 성의 벽면과 잔해들은 자갈처럼 곱게 부스러졌다. 아를이 뭔가 밝히는 소리에 발밑을 내려 다 본다. 푸른색의 작은 반지였다. 아를이 반지를 천천히 집어 든다. 순간 아를은 반지를 팩 내던지려다가 멈칫하더니 콱, 움켜쥔다. 그리고는 저 만치, 먼 산에 걸려있는 구름을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세상의 깨달은 현인들과 성인들이 인간사회에 환멸을 느껴 모습을 감추었을 거라는 쟌센의 의견은 당시에는 와 닿지 않았지만, 의당 타당한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이 지금 내 현실이 그러했다.
  나지아 산맥은 광활한 삼림지대였다. 산맥의 정상부근은 죄다 암벽이 성곽처럼 늘어선 바위산이었다. 과연 거인이 살만했다.
  넓은 숲 속에서 사흘을 헤매야 했다. 둥근 귓바퀴를 가진 인간을 볼 수 없고 그들의 말과 숲이 벌채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기름칠한 쇠 냄새와 매캐한 화연을 맡을 수 없는 외부와 가파르게 단절된 적당한 곳을 물색하기까지 말이다. 거인이 아무리 욕심이 많기로서니 작은 집 한 채 정도는 허 할 테니까. 인간들처럼 요란하게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하마드리아스 하나쯤은 눈 감아 줄 성도 싶었다.
  빛도 들지 않는 숲을 벗어나자 제법 넓은 구릉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평한 초지위로 우뚝 솟은 커다란 암석 하나가 떡하니 자리했다. 구릉지대를 둘러싼 기괴한 형태의 무성한 수목들 덕분에 자연적인 폐쇄성을 지닌 곳이었다. 구릉지 중앙의 저지대에는 잔잔한 호수가 펼쳐졌다. 가장 중요한 식수원도 해결된 셈이다.
  산 너머에서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봉우리에 걸린 구름떼가 구르릉 하고 잠시 지체했다. 저 소리를 듣자 그날의 기억이 구름처럼 뭉실하게 떠올랐다.
  이제는 그날의 경험을 호수 저 깊은 곳으로 각인시켜 놓을 때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혀야 할 시기다. 던져 넣어야 한다. 나는 호수를 향해 힘껏 돌을 던졌다. 조약돌은 거울처럼 햇빛을 반사하며 결코 속을 보이지 않는 저 잔잔한 호수의 깊은 곳까지 가라앉을 것이다. 고요한 호수가 원을 그리며 물결친다. 무수한 물결에서 나이테가 떠오른 것은 지극히 단순한 연상과정에서였다. 지금은 연한 줄기를 보호하기 위한 단단한 외피가 필요한 시점이다. 물렁한 변재부분이 단단해 져야 할 시간이다. 벽을 만들어야 할 때다.
  어느새 산허리에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인간 학자들 중  누군가 그랬다. 인간은 원래 그렇다고. 가능한 한 그 누구와도 깊은 신뢰관계를 맺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인간 학자는, 그래서 자신도 인간에게 뭔가를 기대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꼭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점점이 떨어지는 빗방울과 저 비구름들이 내가 반지를 버리려다  도로 가져온 이유를 새삼 일깨워 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인간의 그러한 가능성이라는 그 날의 깊숙한 각인은 저 호수 밑바닥 깊숙이 새겨져 있을 테니까.
  나는 세상을 향한, 인간을 향한, 첫 번째 울타리에 못을 박기 시작했다. 그렇게 최초의 울타리를 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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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317 단편 시메트리(symmetry) 술펀하루 2011.10.24 0
1316 단편 채취선 천공의도너츠 2011.10.26 0
1315 단편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김진영 2011.11.02 0
1314 단편 한때 그곳에 심장이 뛰었다. 쿼츠군 2011.11.07 0
1313 단편 [엽편]해를 지키는 별1 먼지비 2011.11.10 0
1312 단편 Knights of Cydonia 빈군 2011.11.11 0
1311 단편 [엽편] 인어공주 황당무계 2011.11.13 0
1310 단편 [엽편]밤을 태우는 별 먼지비 2011.11.13 0
1309 단편 아내1 강민수 2011.11.14 0
1308 단편 열꽃 김진영 2011.11.15 0
1307 단편 회한의 궁정 먼지비 2011.11.15 0
1306 단편 아이러니 쿼츠군 2011.11.17 0
1305 단편 배달의 기수, 강필중 빈군 2011.11.17 0
1304 단편 가치의 기준 이정도 2011.11.20 0
1303 중편 하마드리아스 -상-1 권담 2011.11.20 0
1302 중편 하마드리아스 -중- 권담 2011.11.20 0
중편 하마드리아스 -하- 권담 2011.11.21 0
1300 단편 [해외단편] 미아 구자언 2011.11.22 0
1299 단편 게이트에 이르는 이치 윤소아 2011.11.24 0
1298 단편 안녕, 하루1 너구리맛우동 2011.12.0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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