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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여나, 음악을 들으며 읽기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BGM으로 MOT의 '나의 절망을 바라는 당신에게' 를 추천합니다.
이 곡을 들으면서 썼었습니다.>




달의 깊은 크레이터와 작고 아담한 토끼 시신에 대하여

1.
"어째서 입니까! 제가 무엇을 잘못한 겁니까? 우리는 더 높이 뛸 수 있습니다. 헌데, 당신들은 시도도 한번 해보지 않는 건가요? 왜 더 높게 뛰려는 저를 비난하는 건가요? 이건 옳지 않습니다!"

검은 커튼처럼 하늘에 어둠이 짙게 깔려있던 밤, 자신을 둘러싼 토끼들의 비아냥 어린 시선을 받으면서도 플레처 린드는 목청 높여 소리쳤다. 그는 당당했다. 자신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믿었기 때문에. 큰 바위 위에 앉아 플레처의 말을 조용히 듣던 회색 털의 토끼는 그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이상은 좋은 것이네. 그것이 현실의 문제에 도움이 될 때 만이지. 하지만 대체 높이 뛰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이득을 준다는 말인가? 빨리 뛴다면 모를까, 높이 뛰는 것은 오히려 매의 눈에 잘 띄게 되고 살쾡이에게 우리가 있는 곳을 가르쳐주는 것에 지나지 않지. 우리에게 해악이 될 이상, 이는 애초에 꿔서는 안될 꿈일세. 자네는 자신의 이상 때문에 우리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어."

이 회색털 노묘老卯의 말이 기폭제가 된 마냥 주위의 비난이 물밀듯이 플레처에게 쏟아졌다. 온갖 입에 담기도 험악한 욕설에서 부터 플레처의 멀고먼 조상, 어쩌면 오랜 시절 이 땅에 살았던 그들 자신의 조상을 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정도의 비난까지... 온통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애써 참으며 플레처는 손가락으로 하늘의 초록빛 달을 가리켰다.

"더 높이 뛰면 더 멀리 볼 수 있습니다! 더 많은 먹이를 발견할 수 있고 더 빨리 천적을 볼 수 있어요! 아니, 무엇보다도 노력만 하면 우린 저 달까지 뛰어오를 수 있습니다! 저 달이 무엇 때문에 저리 푸르다고 생각하십니까? 달은 사시사철 푸른 잔디로 뒤덮여 있습니다. 우리가 저기까지 뛰어오를 수만 있다면, 대대로 식량 걱정은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다!"

순간 정적이 일었다. 그리고는 터져 나오는 웃음이 숲을 가득 메웠다. 하하하 호호호 낄낄낄 까르르. 토끼들의 회의를 엿듣던 생쥐와 밤새들은 그 큰 웃음소리에 놀라 화들짝 도망쳤다. 그 바람에 풀숲이 흔들리며 사르르하고 소리가 났다. 실컷 웃던 토끼들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귀를 곤두세웠다. 기다려도 아무소리가 나지 않자 다들 긴장을 풀고 다시금 플레처를 비웃었다. 여태까지 엄숙함을 유지하고 있던 노묘 역시도 어이가 없다는 듯 허허하고 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가진 건 이상이 아니라 공상이었군? 그것도 터무니 없는 공상!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니, 내가 자네를 과대평가 했었나 보이. 물론 달이 풀로 뒤덮여 있다는 말은 많지. 저렇게 푸른 달을 보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야. 하지만 어떻게 저 먼 곳까지 뛸 수 있단 말인가? 우린 토끼네. 독수리처럼 높게 날지도, 호랑이처럼 멀리 뛰지도 못하는 토끼란 말일세!"

플레처는 온몸에 붉게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생각이 단지 공상으로 치부되었음에 분노가 일었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외마디 고함을 지르며 플레처는 수많은 군중을 헤집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누군가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이를 무시했다. 한참을 달리던 플레처는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는, 힘껏 뛰어올라 아름드리 계수나무의 가지에 걸터앉았다. 두 눈가에 촉촉히 맺힌 눈물을 앞발로 닦으며 플레처는 생각했다.

"내가 잘못된게 아니야. 난 이렇게 나무 위까지 뛸 수 있게 되었는걸? 조금만 더 노력하면 저 달까지 뛸 수 있어!"

플레처는 꿋꿋이 믿어왔다. 토끼는 위대하다고, 두 뒷발만으로도 세상을 상대로 일어설 수 있는 존재가 토끼라고, 비록 나약하고 협소해서 한계에 부딪히지만 그렇기에 발전할 수 있는게 그들 토끼라고 생각했다. 플레처는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더 높은 곳을 향한 플레처의 열망이 구체화 된 그곳. 플레처는 달에 닿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가진 그 어떤 것도 내놓을 수 있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었지만. 초록빛으로 물든 푸른 달, 이를 열망했던 하얀 토끼는 밤어둠 속에서 함께 푸르러져 빛을 냈다.

다음날부터 플레처는 뜀뛰기 연습에 더욱 열을 올렸다. 이제 자신에게 뭐라할 이들은 곁에 없다. 게다가 달까지 닿으려면 여태껏 해온 노력의 갑절은 더 필요했다. 그는 뛰고 또 뛰었다. 체력이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 뛰었다가 지치면 쓰러져 잠들고, 다시 일어나 뛰고.. 그러다 보니 플레처는 먹는 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많이 먹으면 높이 뛰지 못한다 생각해서 먹는 양을 최소한으로 줄였던 탓도 있고, 뜀뛰기에 열중하다 보니 식사를 거르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점점 길어지는 점프 높이에 비해 착지에는 제대로 요령이 익지 않아 플레처는 안정된 착지에 실패하는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다리를 삐거나 몸에 상처를 입는 경우가 허다했다.

플레처는 날이 갈수록 점점 야위고 온몸에 상처가 늘어갔다. 하지만 플레처는 기뻤다. 이미 독수리의 그것은 훨씬 압도하는 정도의 높이, 그는 자신이 여태껏 봐왔던 산보다도 훨씬 높은 곳의 공기까지 맛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이 뛰어오를 수 있었다. 숨쉬기는 약간 곤란했지만 높은 곳에서 맛보는 공기는 그야말로 상쾌했다. 땅 근처의 공기와는 비교할 필요조차 없는 청명함에 그는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연 듯한 기분을 느꼈다. 플레처는 잘 몰랐지만 대기권과 우주 사이의 미묘한 경계, 바야흐로 플레처는 그 높은 곳까지 닿아 있었던 것이다.

최초로 그 높은 곳까지 뛰어 달의 모습을 티끌 하나 없이 보았던 그때, 플레처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공중에서 그의 눈물이 아름답게 빛을 뿜으며 산산히 부서졌다. 손만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 플레처는 푸른 달을 향해 두 팔을 뻗으며 손으로 움켜지는 시늉이라도 해봤다. 하지만 플레처는 지구로 다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손에서 점점 멀어지는 달을 바라보며 플레처는 적잖은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플레처는 발이 다시 땅에 닿자마자 어쩔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너무나도 기뻐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맙소사! 이렇게 높이 뛰다니! 조금만 노력하면 달에 닿을 수 있을거야!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아무도 자신을 믿지 않았지만 그 자신은 이렇게까지 발전했다. 곧 꿈을 이룬다는 생각에 플레처는 전율했다. 플레처는 그간의 고난을 떠올렸다. 자신을 이해 못했던 다른 토끼들의 손가락질, 하지만 이제서야 플레처는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조금만 더 뛰면 되니까, 달로 가면 자신을 무시할 이들은 없을테니까. 알려지든 알려지지 않든, 자신은 최초로 달까지 뛴 토끼가 되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 족했다.

허나 성공 전에는 가장 큰 장벽이 있는 법. 대기권 너머를 향하기에는 플레처는 힘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되는데, 그 조금의 발전을 가로막는 벽이 너무나도 거대했다. 몇날 며칠을 뛰고 또 뛰었다. 더 높이 뛸 수 있도록 다양한 자세를 연구하고 점프를 해도 도저히 그 한계점 이상에 닿질 못했다. 플레처는 좌절했다. 울고 싶어졌다.

그래서 울었다. 울고 다시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이 이상을 뛸 수 있을까? 하나, 자신의 몸무게를 최소한으로 줄여 도약력을 높인다. 둘, 독수리의 날개와 유사한 것을 달고 뛰어 한계점에서 날개짓으로 오른다. 셋, 최대한 다리의 힘을 키워 도약력을 높인다. ...'

사실상 더이상 줄일 몸무게도 없었다. 그래서 플레처는 날개를 만들기로 생각했다. 밤새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주워모아, 가지로 뼈대를 만들고 송진으로 잎을 붙여 독수리날개와 유사한 것을 만들었다. 플레처는 이것으로 땅에서 먼저 테스트를 했다. 들어진 날개를 양 앞발에 달고 힘껏 아래위로 저었다. 얼추 밑바람도 생기는게 공중에서 올라갈 수도 있을 듯 했다. 왠지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게 잘 될 것만 같았다.

그 다음날, 플레처는 일어나자마자 큰 점프를 위한 준비를 했다. 네 다리를 유연하게 풀고 날개를 머리 위로 펼쳤다. 플레처는 한껏 몸을 웅크리더니 뒷다리를 쭉 뻗었다. 굉장한 도약이었다. 순식간에 산의 높이를 넘고 푸른 하늘로 뛰어올랐다. 다시금 예의 경계까지 닿은 플레처, 다시 땅으로 떨어지기 전 그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날개를 휘저었다.

"야아! 올라간다, 올라가고 있어!"

날개짓을 하자 생긴 바람이 그를 대기권 바깥까지 끌어올렸다. 날개를 흔들면 흔들수록 점점 더 달에 가까워져가고 있었다. 플레처는 환상을 거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날개짓을 하며 떨어지고 있던 것이다. 달을 향한 염원에 플레처는 달과 가까워지는듯한 환상에 사로잡혔을 뿐, 단지 그뿐이었다. 플레처는 다시 땅에 떨어졌다. 환상에 빠져 플레처는 땅으로 추락하는지도 몰랐다.  플레처는 그대로 지면에 부딪혀 기절해버렸다.


2.
아버지, 저는 모욕 당했어요. 그들은 저를 비웃었죠. 왜 쓸데 없이 뛰냐고. 먹을 것을 찾는데 열중해보라고. 배우자를 얻어 아이를 보라고 그들은 말했지요. 하지만 아버지, 토끼는 먹기 위해 사는 존재인가요.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 사는 존재인가요. 토끼는 자신의 꿈을 좇아서는 안되는 건가요. 저는 그래서 울었습니다. 서럽고 원통해서 울었습니다. 그들은 몰랐어요. 내면에 잠들어 있는 자신만의 꿈을. 그래서 그들은 먹이를 찾고 자손을 만들었겠지요. 그래서 저는 나왔어요. 나와서 제 꿈을 좇았어요. 헌데, 그 결과가 이건가요. 제가 꾸었던 이상, 그게 잘못 되었던 걸까요. 이렇게 상처입고 정신마저 아득해질 꿈이었다면 차라리 꾸지 않는 편이 나았을까요. 아버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꼭 끌어안으셨다. 나는 이미 다 커버린 토끼. 어린 날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아.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나를 어린 아이 보듬듯이 품으셨다. 아버지의 품은 따뜻했다. 더없이 푸근하고 편안해서.... 어릴적부터 나는 눈물이 많은 아이였지. 하하, 지금도 그런가. 나는 펑펑 울었다. 그래, 나는 어린 아이였다. 몸은 다 자랐지만,  아직 마음만은 여리디 여린 존재. 나는 아버지의 품에 더 깊숙히 안겼다. 아버지는 나를 안으신 채 은은하게 초록빛을 내셨다. 마치 내가 그리도 갈망했던..... 푸른 달빛처럼.

"아버지..."

플레처는 앞발을 허공으로 뻗었다. 발에 닿은 것은 은은한 달빛, 느껴지지는 않지만 따뜻하면서도 포근한 그 감촉이 앞발을 감쌌다. 그는 들어올린 앞발을 봤다. 반쯤 부러진 대만이 발에 묶인 채 날개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찢겨진 나뭇잎과 부서진 나뭇가지들이 바닥에 산산히 흩어졌다..

"실패... 구나.."  

자신이 정성들여 만든 날개의 잔해들을 보면서도 플레처는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느낌을 받았다. 초록빛으로 가득찬 밤의 숲속. 플레처는 이미 달의 드넓은 초원에 와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저 달빛이 자신을 인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뛰면 될까?'

플레처는 앞발에 묶인 가지를 풀어 던졌다. 바스락 소리를 내며 그것은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일어섰다.

- 일어나지마. 편히 쉬어. 너 아프잖아. 아픈데 무리하지마.

땅이 속삭였다. 지면에 부딫힌 충격 때문에 온몸이 후들거렸다. 일어나려다가 그는 다시 주저앉아버렸다. 도저히 못 일어날 것만 같은 고통. 하지만 그는 앞발로 옆의 나무를 짚고 일어섰다.  

'지금 뛰어야 돼.'

- 그냥 있어. 너 그렇게 힘든데 어딜 가려고. 그런 몸으로 계속 움직이면 낫질 않아.

숲이 속삭였다. 하지만 플레처는 계속 일어나려고 했다. 어쩐지 발가락뼈 하나가 부러진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상관 없었다.

'달이 부르고 있어!'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버티면서  토끼는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는 그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으로 지면을 찼다. 그는 다시 뛰어올랐다. 뛸 때의 충격으로 커다란 바람이 불었다. 사르륵 사라락  쏴아아아.. 상쾌한 음을 내며 나뭇잎이 공중으로 흩날렸다. 숨어있던 밤새들이 그와 동시에 날아올랐다. 온갖 나뭇잎과 새들이 날아오르는 그 중심을 뚫고 토끼는 곧게 하늘로 올라갔다.

- 그렇게 가는구나. 돌아오라고 해도 돌아오지 않을거지?

하늘이 속삭였다. 마의 벽이 가까워졌다. 플레처는 자신이 더 이상 이 정도 높이로 뛰어오를 수 없을 것임음을 직감했다. 다리는 낫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은 곧, 여기서 떨어지면 이제 달로 갈 수 없게 됨을 의미했다. 그래서 플레처는 달에게 빌었다. 자신을 제발 데려가 달라고. 초록색 달빛이 계속해서 그를 비췄다. 플레처는 대기권의 경계에 닿았다. 플레처는 눈을 감았다.  

- 잘 가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친구.

세계가 그에게 속삭였다. 플레처는 눈을 떴다. 그리고는 눈을 크게 뜨며 깜짝 놀랐다. 마치 달빛에 이끌리는 것처럼, 그는 그렇게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비해 속도는 크게 줄어들었지만, 천천히 천천히 그는 달로 향했다.

"성공이야! 성공이라고! 우와, 우와하!"

플레처는 이리 저리 몸을 움직이다가 극심한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기뻤다. 역시 그 벽이 마지막이었다. 머리 위에는 푸른 달이 그에게 계속해서 빛을 비췄다. 그 은은함에 고통조차 사그러들었다. 위를 바라보다 뭔가가 생각난 듯 토끼는 멀어져 가는 지구를 내려다 봤다. 초록색 달과는 다르게 지구는 굉장히 파랬다. 마치 이른 새벽, 깊은 숲속에 있는 옹달샘처럼 맑고 푸른 지구. 플레처는 지구 역시도 저렇게 아름다웠음을 깊이 깨달았다. 그런데 왜 저 아름다운 곳의 속내는 추악하고 힘겹기만 한걸까.

토끼들의 하루하루는 죽음과 가까이 닿아 있었다. 들개, 살쾡이, 부엉이, 솔개 따위의 천적들은 수도 없이 많았고, 먹이는 항상 사슴이나 고라니 같이 풀을 먹는 커다란 친구들에게 빼앗기기 일쑤였다. 그뿐인가, 멧돼지라는 천적보다도 포악한 녀석은 토끼굴을 파헤쳐 못 쓰게 만들지 않았던가. 토끼들이 간신히 쟁여놓은 먹이를 빼앗아 먹기 위해서 말이다. 쥐 같이 조그만 녀석들도 토끼를 두려워하지 않아 먹이를 몰래 훔쳐갔지만 토끼들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 조그만 녀석들은 그들 나름대로 노련하게 빈틈을 찾아냈고, 쫒아가도 토끼보다 더 작은 굴속에  숨어서 나오지를 않았으니까. 때문에 토끼들은 항상 신경이 예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꿈을 꾸지 못했지.    

하지만 자신이라고 그리 잘 먹고 지내지는 못했다. 살쾡이나 부엉이에게 쫒겨 죽을 뻔한 적도 수십번. 하지만 생존보다 더 중요한 꿈이 있었으니까 뜀뛰기에 열중했던 것일뿐이다. 유토피아-하지만 분명 존재하는-에 대한 열망. 플레처는 그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에게 꿈을 심어줬던 존재, 자신에게 더 없이 위대한 아버지에 대해서.


3.
"꿈을 꾸지 않는 토끼는 더 좋아지지 못한단다. 토끼는 위대해져야 해. 들개도, 고양이도, 솔개도 이룰 수 없는 그 큰일을 토끼는 이룰  수 있다는거 아니겠냐."

솜털이 보송보송나 있던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  모든 토끼는 나처럼 작고 나약하다고 생각했었어.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목소리는 진실됐어.

"아빠, 우리가 정말 그렇게 대단해? 그렇게 무서운 것들보다 더 세질 수 있어? 그런데 왜 쫒기는 거야?"
  
아버지는 나를 들어 그 듬직한 어깨에 올리시며 말씀하셨어.

"지금 우리들은 먹고 살기가 너무 바쁘단다. 그 무서운 것들에게 도망치면서도 먹이를 찾아 아이들을 돌봐야 되거든.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생각 못하는 거지. 슬픈 일이지만 그게 지금 우리 토끼들이 처한 현실이란다. 위대하지만 세상의 벽에 막혀 그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게 우리 토끼야. 그래서 우리는 너희들을 믿고 있단다. 우리가 살기 바빠서 못한 것들을 너희들이 이뤄주기를."

그때 아버지는 말꼬리를 흐리시며 땅을 항해 눈을 깔며 조용히 혼잣말을 하셨었다.

".... 무책임한 도피일지도 모르지. 우리들의 숙제를 자손들에게 떠넘기는."

나는 그 혼잣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었어. 어린 나에게는 그 앞의 문장도 이해하기 벅찬데다 그 혼잣말은 내가 모르는 단어가 다소 있었기 때문이지. 멋도 몰랐던 나는 앞발을 흔들며 소리쳤지.

"그럼, 그럼, 아빠! 무서운 것들이 없고 먹을거 이따만큼 많은데를 찾으면 토끼들도 대단해지겠네?"

그 말을 들으셨던 아버지는 허허 하고 웃으셨어. 천적이 없는 풍요로운 장소라.. 사실 애들이나 생각할 수 있을만큼 허무맹랑한 얘기잖아. 이 세상에 그런 곳이 어디에 존재한다는거야.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나에게 농을 던지시는 대신에 커다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셨어.

"그럼! 당연하지! 무서운 것들도 없고 먹을게 많은 곳? 찾아내기만 해서 토끼들을 거기로 데려갈 수만 있으면 토끼는 이 세상 어떤 녀석들보다도 더 멋지게 될거란다."  

나는 그 말에 더 없이 흥분해서 아버지의 어깨 위에서 방방 뛰었어. 아버지는 그러다 내가 떨어질까봐 나를 껴안고 땅에 다시 내려주셨지. 나는 아버지의 앞에서 마구 깡총깡총 뛰었어.

"그럼, 그거 내가 찾아볼래! 멋지잖아! 그런데를 찾아내면 난 엄청 대단한 토끼가 되겠지, 아빠?"

아버지는 허리를 숙이시더니 살짝 눈을 감으시며 미소지으셨어. 비록 그 존재는 작고 미미하지만 하나의 꿈을 가지고 있는 작은 새끼 토끼를 향해서. 아버지가 다시 눈을 뜨셨을 때 나는 봤어. 그 깊은 눈동자 속에 담긴, 아버지가 지탱하고 있는 세상의 무게를.

그건 나였어.

" 암! 우리 플레처가 크면 꼭 그런 훌륭한 토끼가 되어야지. 그래야 이 아빠랑 그리고... 저 달에 있는 엄마도 기뻐할 이유가 생기지 않겠어? 하하."

하하.... 하하하.....하하하하.....
그렇게 아버지는 내게 큰 꿈을 주고 아주 멋지게 가셨지.

"플레처, 절대로 여기서 나오면 안돼! 아빠가 나오라고 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나오지마! 알았지!"

아버지는 메말라버린 소나무 밑둥에 생긴 작은 구멍 속에 나를 집어넣으시고는 신신당부하셨어. 나는 상황을 잘 몰랐지만 아버지는 굉장히 급박한 듯이 그렇게 소리치셨어. 나는 무서웠지. 아버지가 그렇게 무섭게 말씀하셨던건 처음이었거든.

"아빠, 가지마! 나랑 같이 있어! 무섭단 말이야!"

아버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보시더니 그 옆의 돌덩이로 그 구멍을 막으셨어. 내가 안에서 밀면 빠져나올 수 있을 정도로. 아버지는 그러시면서 슬픈듯이 하지만 굉장히 엄한 어조로 말씀하셨어.

"조용히 해! 내가 됐다고 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나오지도 말고 무슨 소리도 내지마! 알겠어! 안 그러면 정말 혼쭐을 내줄거다!"

나는 무서워서 벌벌 떨며 알았어요 라고 말했어. 구멍이 완전히 막히기 전 아버지는 나를 한번 빤히 바라보시고는 그대로 구멍을 막아버리셨지. 빛 한줄기조차 들어오지 못한 그 어둠 속에서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어.

".... 플레처, 열심히 살아라."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었어. 부스럭 부스럭하며 뭔가가 뛰어가는 소리와, 잠시 뒤 으르릉 컹컹 하고 들려온 들개들의 날카로운 소리가 내가 있는 곳을 재빠르게 지나쳐 갔지. 아마 나는 반나절쯤 그 속에 있었을거야. 울고 또 울어서 눈가가 눈물범벅이 된 채로 메말라 버렸을 때까지. 돌을 힘껏 밀고 나오자 그때는 이미 밤이었어. 하지만 어둡지 않았지. 하늘은 커다란 보름달이 자기를 보란듯이 초록색으로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으니까.

나는 전까지 몰랐던 사실을 그때서야 깨달았어. 토끼들에게 끝내주게 좋은 곳, 천적은 없고 먹을 것은 엄청나게 많은 곳. 그곳은 달이었어. 저 달을 봐봐. 아무리 봐도 무언가 움직이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온통 초록빛으로 넘실거리지. 그건 내 생각이 옳다는걸 말해주는 거야. 그때 나는 어렴풋이 아버지의 죽음을 느끼고 있었지. 정황이 그렇잖아. 나도 어느 정도 세상의 이치는 알고 있는 나이였고 말이야. 하지만 왜인지, 그때 내 머릿속에 든건 오로지 달에 대한 생각뿐이었어. 달이야 말로 토끼의 유토피아라 깨달은거지. 그때부터 나는 달을 향해 뛰어올랐지. 다른 토끼들은 아버지를 잃은 충격에 내가 실성했다고 그러더라고. 하하, 내 커다란 꿈도 모른채 그렇게 나를 매도한거지.

나는 토끼들에게 나와 함께 달로 향해 뛰어보자고 설득했어. 하지만 글쎄, 내가 미친 거라 모두가 편견을 가져버린 그 상황에 누가 내 말을 들어줄까. 결국 나에게 남은 것은 내 몸뚱아리와 나의 이상, 그리고 달뿐이었지. 그래도 외롭지는 않았어.

아버지... 그 분이 없었다면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내가 이토록 큰 꿈을 향해 매진할 수 있었을까? 달을 향한 한 번의 뜀뛰기는 이 힘겨운 세상에 대한 절절한 도피이며, 달을 향한 두 번의 뜀뛰기는 내 이상에 대한 자기만족이며, 달을 향한 세 번의 뜀뛰기는 나의 위대한 아버지... 그리고 달에 계실 -나도 알아, 죽은 자가 달에 있을리는 없다는 것쯤은- 어머니를 향한 내 마음이었어.

그리고 지금 나는 달로 향한다.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지금의 나처럼 뛰어오를 수만 있으셨다면 그렇게 들개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셨을텐데. 아버지 역시도 세상의 벽 그 너머를 보지 못하셨던 것일까. 그래도 아버지, 저는 이제 이뤘어요. 아쉽게도 저 혼자뿐이지만, 그래도 이것으로 토끼에게는 더욱 성장할 가능성이 있음이 증명된 것이겠죠. 그 어떤 존재들보다 더 높이 뛰어오른 토끼. 아버지 말대로 토끼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해질 수 있는 종족이에요! 또 눈물이 나네. 젠장, 나는 더럽게 눈물이 많은 토끼야. 이렇게 기쁜 날에 왜 눈물이 나는거지. 달님이 보면 뭐라고 그러겠어. 울보 토끼라고 놀리지는 않으실까.

거대한 우주 속에서 플레처는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작지만 이 광활한 어둠 속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눈물 한 방울. 플레처는 그 눈물이 달빛, 아니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다고 느꼈다. 잠시동안 눈물을 바라보던 그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잠이 파도처럼 쏟아졌다.

그는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편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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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4 단편 마치 좀비처럼 2011.09.09 0
1333 단편 용 사냥1 이정도 2011.09.09 0
1332 단편 폐허로 만들어진 성 Leia-Heron 2011.09.14 0
1331 단편 리무버4 gozaus 2011.09.22 0
1330 단편 황금빛 추억1 김진 2011.09.24 0
1329 단편 글레바력 13세기 hallyeia 2011.09.26 0
1328 단편 거미에게 나비를 모베 2011.10.01 0
1327 단편 뼈의 발견자 Mothman 2011.10.03 0
1326 단편 장미 행성 Mothman 2011.10.03 0
1325 단편 화장터 목이긴기린그림 2011.10.03 0
1324 단편 질식 김진 2011.10.04 0
1323 단편 괴 산 전광용 2011.10.06 0
1322 단편 [엽편]피리 명인2 먼지비 2011.10.09 0
1321 단편 오덕후 김박사의 위업 OMB-J2 2011.10.10 0
1320 단편 유물(Artifacts)1 앤디리 2011.10.11 0
1319 단편 별의 여인 Mothman 2011.10.12 0
단편 달의 깊은 크레이터와 작고 아담한 토끼 시신에 대하여 술펀하루 2011.10.2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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