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소울의 대부

2011.08.02 21:5408.02

-1-

사내는 고개를 들어 오른쪽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11시였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비라도 내릴 듯이 어두침침하기 그지 없어서 환한 카페의 안에 비하면 밖은 밤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내와 그 앞에 앉은 남자는 이미 커피를 시켜놓고 일을 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누구도 커피에는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사내는 일을 빨리 마무리하고 점심을 먹고 싶었다. 하지만 맞은 편의 사내에게 그런 요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내의 맞은 편에는 있는 사람은 [고객]이었다. 국방색 점퍼를 입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적은 머리 숱을 가진 파리한 남자였다. 두 남자는 테이블 위에 간략한 서류들을 꺼내놓고 검토하는 중이었다. A4지 몇 장, 그리 많은 내용이 쓰여진 것도 아니었건만 점퍼의 사내는 읽고 또 읽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사내는 자신이 말릴 때까지 계속 남자가 계약서를 읽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원하시는 모든 부분을 담았습니다. 확인은 상부에서 다 검토가 되어 온 겁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거나 그러는 건 아니죠?”

“우리는 말이 공신력입니다.”

“내가 과장님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말입니다. 왜 예전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를 따르면 개인적으로 거래를 성사시키고 사람을 속이는……”

“예전에 소규모 지역단위 조합으로 계약이 이뤄질 때 일입니다. 남유럽에서 심했죠.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19세기에 국제규약이 이뤄졌거든요. 이젠 중앙에서 다 관리합니다. 우린 대리만 할 뿐이죠.”

양복 입은 사내의 목소리는 명확했고, 알맞게 울리는 공명이 있었다. 금테안경 사이로 비추는 눈 역시 지극히 이성적인 관리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작 계약당사자는 마지막 관문에서 계속 주저하는 중이었다. 그의 손에는 약간 빛이 바랜 듯한 노란색이 감도는 종이가 하나 쥐어져 있었다. 그게 종이가 아니라 곱게 무두질된 양피지라는 것은 어지간히 자세히 보지 않고서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하여간 고풍스러운 장식이 가득 들어간 증서의 마지막 서명란은 아직 공란이었다. 사내의 서명대신 양피지에는 사내의 손에서 배어 나온 땀이 묻어나고 있었다. 양복 입은 사내는 가볍게 숨을 고르더니 자신의 재킷에서 금장이 박힌 멋들어진 만년필을 꺼내 고객 앞으로 가볍게 밀어 넣었다.

“서명하십시오.”

“…잘하는 짓일지 모르겠네.”

점퍼 입은 사내는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쉬면서 양복 입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신용파탄으로 살아온 지 3년 반, 친척들은 피하고 가족들은 내몰린 지 오래시죠?”

양복 입은 사내의 말은 독백에 가까웠지만 순간 [고객]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이것저것 안 해본 일이 없지만 채무는 눈덩이처럼 쌓여갑니다. 애들 학비 생각하면 몹쓸 짓도 생각해 보셨겠죠. 하루 이틀입니까?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게 아니죠. 계속 이렇게 살아간다는 게 무서운 거 아닙니까.”
  
고객은 말이 없었지만 그의 눈은 금장만년필에 못 박힌 듯 멈춰 있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양복사내의 말은 한없이 늘어지는 듯 천천히 또박또박 나오고 있었지만 맞은 편 사내의 눈동자는 그와 반대로 짧고 빠르게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땀이 한 방울 뺨을 타고 흘렀다.

“순간의 고생은 금방이고 세월이 지나면 추억이라고 하죠.  하지만……”

고객의 눈에 핏발이 떠오르는 게 양복사내의 눈에 들어왔지만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순간은 영원한 거죠. 그리고 시간은 순간순간이 뭉쳐서 만들어지는……”

갑자기 고객은 부릅뜬 눈을 치켜 올리더니 만년필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뚜껑을 열자마자 양피지의 마지막 칸에 또박또박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이 이름 석자에 담긴 듯 갑자기 무너지더니 만년필을 떨어뜨리고 양피지를 사내에게 건넸다. 사내는 침착하게 이름을 확인하고 곱게 접어서 다른 서류뭉치와 함께 서류철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내는 차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계약은 체결되었습니다. 내일 오전에 정확하게 선생님의 계좌로 입금될 겁니다.”

“……얼맙니까. 내 영혼의 대가가.”

“금액은 중앙본부에서 산정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예상보다는 훨씬 많습니다.”
  
“내일이요?”

“심사가 있으니까요.”

오늘 돈이 필요한데 라고 점퍼사내는 혼잣말처럼 말하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고, 하늘은 여전히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잠시 희번덕거리던 고객의 눈동자가 양복 입은 사내에게 다시 고정되었다. 양복 입은 사내는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약간 크게 떴다.

“지금 바로 땡길 수 있어요?”
점퍼 입은 남자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물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죽어가던 눈망울에 물기가 돌며 반짝거린다. 언제 봐도 같은 반응들이지만 사내는 솔직한 욕망의 발현을 보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하지만 손님에게 예의를 차리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결이 가능합니다만……남은 생에서 수명을 감합니다. 10년 정도면 현재 금리를 따져서 20억 정도죠.”

“내가 얼마나 살 지 알 수 있나요? 잔여수명 같은 거?”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100살까지 살고 90세에 돌아가실 수도 있고, 어쩌면 오늘 밤에 돌아가실 수도 있죠.”

갑자기 얻었던 용기가 순식간에 꺼져버린 듯, 남자의 당혹스런 얼굴이 침묵에 빠졌다. 그제서야 사내는 고객의 얼굴에 나이보다 훨씬 많은 잔주름이 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점퍼 남자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하루를 기다리겠다고 말했고, 사내는 현명한 결정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며, 고객은 엉거주춤 일어서 가볍게 인사를 하고 카페를 빠져나갔다. 카페를 빠져나간 남자는 잠시 하늘을 보더니 들어올 때와는 달리 가슴을 죽 펴고 절도 있는 걸음으로 카페에서 멀어져 갔다. 남아있던 사내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서야 인상을 찌푸리고 서류를 다시 확인해 본 뒤 가방을 닫았다. 이미 식을 대로 식은 커피에 손을 댄 건 갈증에 따른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이미 11시는 한참을 넘긴 뒤였다. 다시 사내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과장님. 그 새 한 건 하셨나 보네.”

어느 샌가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동시에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바로 뒷자리에 흰 색 츄리닝을 입고 가슴엔 금목걸이를 철렁철렁 늘어뜨린 올백머리의 중년이 한쪽 입술만 올린 채 다리를 까닥거렸다.

“갈 곳 없는 영혼 하나를 또 꼬신 모양이구먼?”

“갈 곳 없는 영혼을 위한 마지막 피난처지요.”

“입은 까졌다고 말씀은 잘 하셔, 악마주제에.”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어차피 자발적인 대출인데요.”

“망할, 누가 뭐라고 했어? 시대가 시대니……참 나 누군 호시절이고 누군 파리만 날리네.”

“시대가 바뀌는 거죠.”

곰 같은 덩치의 사내는 괜히 말을 걸었다는 듯 쩝쩝대며 입술을 다시더니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를 단숨에 삼켜버리고 길게 트림을 내뿜었다. 옆자리의 아줌마 두 명이 흘끗 쳐다보며 눈총을 줬지만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점점 심하게 다리를 떨어댔다.

“이봐 마과장,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쪽에 들어온 고객들에게 귓바람 불어넣지 마. 요즘 자네 말고도 여기저기서 설치는 친구들이 좀 있는 것 같던데.”

“천실장님이나 대출 완료된 우리 고객들에게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씀하지나 마십쇼. 어차피 서명하면 끝나는 거 아닙니까.”

“우리 사장님의 빌어먹을 고객사랑은 한이 없으셔서 그런 건 솔직히 염두해주지 않아. 그냥 내가 처리하기 곤란하니까 실무적 차원에서 안 하는 거지. 더군다나 난 한 번도 그런 적 없다고. 과장님 잘 알잖아?”

양복 입은 사내는 고개를 끄덕거리곤 흰 옷의 사내처럼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이 끝났으니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더군다나 경쟁업계의 인물과 같이 있는 것은 아무래도 불편했다. 실장이라 불린 흰옷의 사내 역시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유들유들한 미소가 다시 과장의 얼굴을 마주했다.

“오늘 일은 끝났나?”

과장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가방을 잡고 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낮고 명확하게 귀로 들어왔다.

“비번이면 나중에 술집에 들르게. 한 잔 사줄 테니까.”

사내는 가타부타 대답 없이 카페를 나섰다. 봄 날씨에 걸맞게 싸늘한 바람이 어두운 하늘 아래로 불어오는 중이었다. 사내는 하늘을 쳐다보더니 말없이 고객이 사라진 반대편으로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아까의 정연한 모습과는 달리 온 몸의 정기가 다 빠진 듯 피곤한 걸음걸이였다. 흰 추리닝의 사내는 카페의 유리창 너머로 양복 입은 사내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늘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2-

과장은 자신의 작은 아파트에 앉아서 서류가방을 다시 열기 시작했다. 곱게 접은 양피지 안에서 서명이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는 것이 양피지의 뒤쪽으로 얼핏 보였다. 그는 재빨리 겉면에 받는 주소와 이름을 금장펜으로 적고 허공에 띄웠다. 사내의 중얼거리는 독백과 함께 양피지는 점점 형체가 희미해지더니 급기야는 푸르스름한 빛을 허공에 살짝 남기고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손님의 이름이 뭐였던가? 과장은 기억력을 되살리려 애쓰다 머리를 흔들었다. 이젠 떠난 일이다. 아마 지금쯤 양피지는 영계(靈界)어딘가를 날고 있을 것이다. 사내는 고래부터 내려오던 양피지 방식이 좋았다. 이메일로 보내더라도 어차피 다른 차원의 문을 통과하는 시간이 걸렸다. 꼬박 하루. 그럴 바에는 고풍스러운 방식을 선호하기로 한 것이다. 영업사원들에게도 격식은 존재하는 법이니까.
일은 끊이지 않고, 고객은 줄어들지 않는다. 사내는 언제부터 일을 했는지 이젠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사람들의 복장이 바뀌고, 음식이 바뀌고, 언어가 바뀌었고 운송수단과 통신수단은 수도 없이 변화하고 있었지만, 그가 업무를 마치고 자신의 집에 돌아와서 행하는 마무리과정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해 오던 일처럼 느껴졌다. 사실, 이 일말고는 다른 일은 이제 할 수도 없었다. 망할, 사내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순간, 과장의 눈에 또 다른 양피지가 하나 들어오기 시작했다. 양피지는 스멀스멀 벌레가 과육을 파 먹고 얼굴을 내밀 듯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천천히 밀려나오고 있었다. 검은 직인이 눈에 들어오자 사내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영업부 공문이 틀림없었다.

사내는 땅바닥에 떨어진 양피지를 애써 무시하고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낸 뒤 천천히 컵에 따랐다. 언젠가부터 하루 일과를 처리하고 나면 갈증이 몰려왔다. 최근 들어 경제불황으로 수요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고객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었고 업무는 줄지 않았다.
어떤 이유로건 자신의 영혼을 팔러 오는 이들은 대의명분이 있었고, 힘에 겨워했다. 그리고 간절히 그들의 절망을 해소시킬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돈이었다. 돈은 모든 절망에 관여해서 근원적이고 치명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사내의 하얀 이가 슬쩍 드러났다.

“대체 어떤 물건이 악마인지.”

사내는 물을 들이켜고 오늘 거래한 점퍼차림의 사내를 다시 생각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봐도 그 사내는 채무를 변제할 능력이 더 이상 없었다. 아마 자신을 찾지 않고 흰옷의 천실장을 찾았다면 실제적인 문제점은 해결되지 않은 채 희망을 품은 채 인생을 버텼을 것이다.  희망이란 건, 사내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봤을 때는 채산성 없는 부도수표였다. 최소한 자신은 고객들에게 실물을 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발적인 선택을 그는 존중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게 소위 [운명]이라는 것이니까. 무엇보다도 하루 앞의 끼니가 죽은 뒤의 영혼보다 훨씬 절박하다.
인간들이란 그런 법이다.

그는 천천히 침대 옆의 작은 책상에 앉아서 본부에서 내려온 하달공문을 읽기 시작했다. 700명. 1년치 목표가 아닌 1/4분기 목표가 700으로 수정되어 날아왔다. 사내의 입에서 욕이 독백으로 흘러나왔다. 망할. 중앙본부에서 이런 호황을 마다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만 이건 현장영업직에게 과한 행동이었다. 이미 컵 안의 물은 깨끗이 비워진 뒤였다. 갈증은 사내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언제쯤 되면 본부로 발령을 받아낼 수 있을까. 언제쯤 이 지긋지긋한 인간군상을 안 보게 될까. 이미 800년이 지났는데. 사내는 공허하게 자기 이름을 양피지에 내갈기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이니까. 일이니까 하는 짓이지. 이젠 본부로 들어갈 때도 되었는데.

본부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었다. 모든 근무자들은 안다. 사내처럼, 인간으로 살다가 본부로 들어가는 경우는 극히 드문 케이스였고, 더군다나 아무런 특이사항 없이 일선영업으로 뛰다가 본부로 들어가는 경우는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중앙부서는 늘 같은 부류의 순환과정이 반복될 뿐이었다. 순수한 자들. 혈통자체가 다른, 태어날 때부터 보통 인간이 아닌 자들.

“자네라면 가능해. 최고의 영업통 아닌가. 이번 4/4분기 후에 대규모 인사이동이 있어. 내가 한번 힘써 볼 테니까 지금처럼만 하라고.”

쉬어터진 목소리의 대부팀 차장이 올 초 신년의례때 했던 말이 환청처럼 귀에 들려왔다. 영업부 상사의 말을 믿느니 천사의 말을 믿는 게 신상에 좋은 법이지만 사내에게는 감언이설 이상의 힘이 느껴지는 격려였다. 사실, 실적만으로 따진다면 극동, 아니 아시아에서 그를 따라잡을 개인영업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그게 올해는 가능할까? 설마 설마 하면서 보낸 게 800년 아닌가. 히죽히죽 웃던 사내는 고개를 다시 흔들고 비틀비틀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작은 원룸이지만 냉장고와 책상, 침대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내의 공간은 오히려 작은 방을 공허하게 만들 정도였다.
  
사내는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벌렁 누워버렸다. 선택과 운명. 두 단어가 사내의 머릿속을 다시 힘차게 휘젓기 시작했다. 운명. 그리고 선택. 그의 눈 앞에 비명과 불길이 들렸고, 거역할 수 없이 강력한 음성이 바로 옆에서 말하듯 또렷하고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었다.

-모두 태우라. 전부 남김없이.-

사내는 도리질을 하곤 뜻 모를 신음을 내뱉으며 이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사내가 누운 작은 방은 이미 어두움이 가득 찬 상태였다. 손가락 하나 볼 수 없는 완벽한 칠흑이 사내의 몸을 감쌌다. 사내는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누워있을 뿐이었다. 목이 다시 말랐다.

-3-

며칠간 계속 기압골에 갇혀 당분간은 어둡고 음습한 날씨가 될 거라는 일기예보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바깥의 풍경은 사람들을 움츠리게 만들 만큼 스산했다. 과장은 시내의 또 다른 한적한 커피숍에 앉아있었다. 아침 나절에 그를 급하게 찾는 목소리 덕이었다.

“이 전화가……그 전화 맞아요?”

어린 아가씨의 목소리에 과장은 인상부터 써졌다. 웬만한 젊은 친구들은 거래를 받지 않는 것이 그의 영업상 불문율이었다. 대부분은 같잖은 고민 하나를 가지고 와서 죽을 것처럼 떠들다가 정작 양피지를 내놓으면 야단맞는 학생 같은 표정이 되어서 꽁무니를 빼는 게 십중팔구였다. 그런 식으로 영업이 알려져 봤자 궁극적으로는 좋은 일이 될 수 없었다. 경쟁업체와의 오래 된 협약에 의거하여, 공공연한 영혼매도는 규약위반이었다. 실무적으로 눈감아주곤 있지만 소문이 퍼져서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아이들을 찾아 다니며 밤에 기억을 지워버리는 몽마들에게 추가 수당을 지불해야 했다. 경력자들은 사람을 골라 받았다. 하지만 신참들은 사람들을 골라 받지 않았고, 나름대로 조직 내에서도 그건 골머리를 앓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전화로 먼저 연락이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맞습니다. 영혼을 매도하시려고요?”

“점심때 봐요. 장소는 어디인가요?”

“우리는 아무하고나 거래를 트지 않습니다.”

“영혼을 팔겠다는데 사람 가리는 게 어디 있어요. 난 심각해요.”

여자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굳어있었다. 의외였다. 과장은 여자가 심심풀이로 전화한 것은 아님을 알아챘다. 하지만 어린 아이에게 계약을 쓸 만큼 과장은 실적에 눈이 멀고 싶지는 않았다. 고함이나 한번 질러서 잠시 기절이나 시켜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숨을 들이마시던 그의 눈에 냉장고에 붙여놓은 공문이 눈에 들어왔다.

[700명, 1/4분기]

이런 염병할 자식들.

과장은 들이 쉰 숨을 고스란히 한숨으로 바꿔서 내뱉었고, 시간과 장소를 고객에게 알려주었다.

“12시, 충정로 사거리 기영빌딩 1층의 커피숍으로 오십쇼.”

고객은 쓰다 달다 말없이 전화를 가차없이 끊었다. 바로 세 시간 전의 일이었다.



과장은 먼저 커피숍에 도착해 서류를 정비하고, 다른 회사원이 있는지를 둘러보았다. 같은 곳에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은 금물이었다. 남유럽에서 불법계약이 한참이던 16세기 이후 바뀐 법이었다. 담합과 조작 사절. 다행스럽게도 주변에서는 어떤 동료의 자취도 감지되지 않았다. 다들 어디선가 열심히 절망에 빠진 인간들의 냄새를 맡고 있는 모양이었다. 주변이 안정되자 그는 자신에게 전화한 고객에게로 관심이 옮겨갔다. 무작위로 걸려오는 전화번호는 인터넷 깊숙이, 오컬트 집단의 최종레벨에서, 종교집단의 비밀스런 전승으로, 그리고 도서관 가장 깊은 곳에 숨겨놓은 연락처였다. 보통은 고객을 찾아 이쪽이 움직이는 것이 영업의 기본이었다. 먼저 연락이 온다는 것은 사안의 심각성을 아는 사람이었고, 대부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래를 했다. 어디서 그 아가씨는 정보를 얻은 것이었을까.

“전화 받으신 분인가요?”

고객은 갑자기 소리소문도 없이 과장의 앞에 나타났다. 하얀 정장을 입고 청바지에 단화를 신은 여대생 차림의 아가씨였다. 과장은 자기도 모르고 머리를 숙이고 자리를 권했다. 아찔할 만큼 뛰어난 미모의 아가씨였다. 오히려 이 아가씨를 위해 영혼을 팔아먹을 남자들이 더 많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출문(出門)한 수녀나 비구니인 양, 여인은 가냘픈 외모와 길다란 생머리의 청순함으로 내면의 색기(色氣)를 갈무리하고 있었고 수많은 인간군상을 만나 본 과장이었지만 잠시 사내의 욕망이 울컥 치미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상 외네요. 음산한 분일 줄 알았는데 평범한 세일즈맨 같으시니.”

“시대가 바뀌었으니까요. 고객님도 뵙기 힘든 미인이십니다.”

살짝 보이는 처연한 미소가 여인의 미모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과장은 과장된 몸짓으로 안경을 끌어올리고는 당면한 업무에 더욱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커피를 두 잔 시키고 능숙하게 그는 대화를 이끌어갔다.

“영혼을 매도 하시겠다고요.”

“예.”

“요구사항은 뭔가요.”

“사람을 하나 죽이고 싶습니다.”
과장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진부하지만 동정할 만한 내용이었다. 사랑하던 남자의 뒷바라지. 국가고시에 합격, 새롭게 생긴 부유한 약혼녀. 그리고 권세 있는 집안에 의한 핍박. 그녀는 변심한 사내에 의해 유산하고, 직장도 잃은 채 빈털터리가 되어 있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말하듯 덤덤히 말하던 그녀는 조실부모한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할 때 살짝 눈에 이슬을 맺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강단이 있는 여인이었다.

“사람의 생사여탈과 영혼을 거래하는 건 대가가 큽니다. 잔여수명은 보장 못해요.”

“압니다.”

커피가 나와 두 사람의 이야기는 중단되었다. 종업원이 돌아간 뒤에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묵묵히 김이 오르는 커피를 보며 앉아있었다. 여전히 정오가 가까운 시간이 되도록 찌푸린 하늘은 변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제 이 맘 때 거래했던 사내의 숱 없던 뒤통수가 갑자기 뇌리를 스쳐갔다. 생사여탈권의 부여나 재산의 증식이나 거래상 다를 바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과장은 다시 목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뜨거운 커피를 후루룩 반쯤 입에 털어 넣었고, 안경을 잠시 벗은 채 눈을 감았다.

700명이라니, 1/4분기에 그렇게나 많이 받아서 뭐할 건데. 진짜 돈이라도 생기는 일도 아니면서. 예전 같았으면 어린 아가씨들은 겁을 줘서 쫓아냈을 터였는데.

“고객님.”

“강현희라고 합니다.”

“현희씨.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예쁜 눈썹이 갑자기 부서진 스프링처럼 위로 휙 꼬여 올라갔다.

“지금 무슨 말씀이신가요. 저 장난치러 온 거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혼의 매매대가로 사람의 생명을 요구하는 건 자신에게도 빠져나갈 수 없는 일입니다.”

“영혼을 매매하면 어차피 구제 받지 못하는 거 아닌가요.”

마치 가게에서 물건을 고르는 듯한 말투였다. 과장은 바싹 입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어렵게 입을 떼면서 안경을 치켜 올렸다. 어지간한 고객에게는 누설하지 않는 실무 내용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었다.
“매매를 하더라도 하루가 지나기 전 바로 회개를 하면 취소가 됩니다. 가까운 교회나 성당, 절이라도 좋으니 종교기관에서 의탁하면 말이죠. 거래도 자동취소가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생명을 늑탈하면 빼도 박도 못하는……”

“관둬요. 악마 맞아요?”

앙칼진 목소리가 사내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제서야 과장은 고객, 아니 강현희라는 여자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한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을 툭툭 잘라 내뱉었다.

“알지도 못하면서……누군 좋은 줄 알아요. 더 이상 참을 수 없단 말이에요. 힘들단 말이야. 그런데 왜 당신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해. 뭐가 좋은지 모를 것 같아? 뭐가 좋은지는 나도 안단 말이야. 왜 당신이 그런 말을 나한테 하는 건데.”

여자는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는 마치 실수라도 저질렀다는 표정이 얼굴에 스쳐가는 듯 하더니 다시 카페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또렷한 눈동자가 다시 과장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 선택입니다. 서명하게 해주세요.”

혀를 내두를 만한 자제력이었다. 그리고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선택.

과장의 머릿속이 다시 웅웅 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고 갈증은 목을 바싹 말릴 정도로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안경을 벗어 들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머릿속의 웅웅거림은 쉽게 사그러 들지 않았지만 냉정하게 거래를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고객의 의중을 확신했으니 증서는 내일 이 자리에서 드립니다. 저희도 서명양식과 고객조사에 하루가 걸립니다. 고객님도 하루의 생각할 시간을 더 벌 수 있습니다.”

“하루가 더 지난다고 바뀌는 건 없어요. 거짓말도 아니고요.”

“그럴 것 같군요.”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여인은 살며시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바삐 사라졌고, 사내는 발작하듯 남아있는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여인의 모습은 그새 보이지 않았다. 그리 오래 걸린 거래도 아니었건만 참으로 오랜만에, 그는 영겁의 세월을 지낸듯한 기분이 들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날 밤, 사내는 북적대는 인파가 오가는 시내 중심가의 신축한 빌딩 2층에 앉아 있었다. 밤비가 부슬부슬 창에 빗자국을 남기며 방울 져 미끄러져 내리고 있었지만 가벼운 재즈가 흘러나오는 술집에 모여 삼삼오오 술을 마시는 남녀들의 옷차림은 화사하니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는 바에 기대 앉아 무심하게 창 밖의 빗방울과 가로등과 버스와 승용차들의 꼬리를 문 행렬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두툼한 손바닥이 그의 어깨에 얹히는 것이 느껴졌다.

“비번인가. 잘 왔어.”

예의 짤랑 대는 금목걸이를 건 채 하얀 슬림자켓을 입은 천실장이 그의 옆자리에 와서 넉살 좋게 웃었다. 사내, 과장은 웃지 않았다. 멀뚱하니 천실장을 보더니 다시 북적이며 우산을 쓰고 가는 밤거리의 인간군상들을 보고 있었다. 흰옷의 사내가 온더락으로 채워진 술잔 하나를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의 눈은 검은 옷의 사내를 유심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오전에 여자 고객 하나가 거래를 트러 왔었죠.”

“예뻤어?”

“무척이나.”

“아까운 일이네.”

과장은 그제서야 피식 웃으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천실장 역시 발을 까닥거리며 그의 옆에서 창 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밤이 깊었지만 우산의 왕래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예쁜 여자가 거래를 트러 왔는데 뭐가 그리 울상이신가. 마과장.”

“거래하기 싫었습니다.”

경쟁업자의 눈이 동그랗게 되더니 술잔을 줄 때와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과장의 안경 너머 눈을 살펴보고 있었다. 사내의 눈은 평범한 중년 샐러리맨의 눈동자에 다름없었다. 실장은 슬쩍 어깨를 과장의 옆으로 슬쩍 당겨 앉았고, 과장은 그를 흘끗 보더니 다시 창 밖을 보고 말을 이었다.

“영혼을 담보로 사람을 잡아달라더군요. 웬만하면 하지 말라는 말까지 했는데 말이죠. 완강했어요.”

“맺힌 게 많은 영혼이로군.”

“자신의 선택이랍니다.”

“누구나 선택을 하지.”

과장은 안경 너머로 왼손을 넣고 눈을 문질렀다. 사내의 얼굴은 영락없이 피곤에 찌든 직장인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알코올이 몸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지언정, 분위기가 그를 느슨하게 만들고 있었다. 피아노 선율이 굴러가듯 바와 바 위에 매달린 술잔들을 건드렸다.

“몽크로군요.”

“델로니어스 몽크.”

“어디 있는지 아세요?”

“글쎄? 자네 쪽에 없었나? 우리 쪽에 있나? 확인 안 해 봤는데.”

“저도 확인 안 해 봤습니다.”

사내는 말을 줄였고, 흰 자켓 안에 목걸이를 절그럭거리던 중년은 자신의 술잔을 빙빙 돌리다 양복입은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 왜 그리 들어갔어?”

“예?”

“아무리 봐도 그 쪽 사람은 아닌데.”

“실장님도 그 쪽 사람으로 안 보여요.”
하얀 이가 가지런하게 드러나며 과장이 웃었고, 그 웃음을 보던 실장도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금새 과장의 얼굴은 석고상처럼 굳어지면서 술잔에 다시 입을 가져갔다. 한숨과 함께 그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제가 고른 길입니다.”

“언제였어?”

“……십자군이요.”

“수 많은 사람들이 그 때 넘어갔지. 이교도들을 없애고 털끝만큼도 후회가 없으셨나?”

“그 곳이 아니라 돌아온 다음이었죠.”

작은 영주의 종자였다. 신앙의 정립을 위한 열정으로 떠났지만 전쟁터는 열정이 통하는 곳이 아니었다. 살육과 살인에 대한 회개가 나날의 연속이었다. 살기 위해서 죽이는 일에 신앙은 까맣게 잊은 뒤였고, 기도는 일과가 되어버린 뒤였다. 살아서 본 지옥에서 남은 일념은 오직 귀국뿐. 그렇게 버텨낸 2년이었다.

“고향에 돌아간 그 날.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죠. 영주님의 동생과 영주님의 부인이 결혼식을 열고 있더군요.”

“뭐라고?”

“죽은 줄 알았던 겁니다.”

실장은 혀를 차며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안 봐도 아는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자네가 왜 어쩌다가.”

과장은 말없이 비오는 밤의 일그러진 가로등을 쳐다보았다. 영주는 너무나도 차분하게 병사들을 정렬시키고 성내 주민들과 신랑신부를 교회 안으로 밀어 넣었다. 주례를 집전하던 사제까지 같이. 그리고는 그에게 횃불을 건네주었다. 돼지기름이 끓으며 떨어지던 횃불 냄새, 교회의 촛불냄새와 진칫상의 음식냄새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코 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이지러진 가로등불은 그 날의 횃불과 이상하리만치 비슷했다. 그리고 그를 쳐다보며 울고 있던 마을 사람들. 기도하는 성직자들. 그리고 말없이 그를 친척들과 사랑하던 처자의 눈동자까지.

“자네의 결정은 아니잖은가. 영주의 명이었잖아. 의아하군.”

실장이 갸웃거리며 과장을 쳐다보았다. 과장은 석고상 같은 얼굴로 창 밖을 쳐다보았다.

“전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죠.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빗장을 걸고 앞에 나가 불을 질렀습니다. 용서할 수 없었어요.”

“배신에 대해서?”

“모두가 혐오스럽더군요.”

“후회하지 않았나.”

“죽은 뒤에요.”

실장은 더 이상 가타부타 말이 없었고, 과장 역시 조용히 창 밖을 응시하며 술잔을 돌리고 있었다. 입맛을 한참 다시던 실장이 슬쩍 눈치를 보더니 운을 뗐다.

“나도 비슷한 경력이 있지. 난 그때 윗사람 말을 안 듣는 망나니였거든. 죽을 때까지 반항하다가 까마귀 밥이 되었지.”

“희생이었습니까?”

“결과적으론 그렇지만 그냥 기분 나빠서 말 듣기가 싫었을 뿐이야.”

실장은 잠시 뜸을 들이다 주저하듯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과장을 쳐다보았다.

“그 여자의 선택이 싫은 거로구먼.”

“앞을 아니까요.”

“내가 막아줄까.”
순간 실장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고 과장은 생각했다. 흠칫 등쪽에서 소름이 돋았다. 과장은 조심스럽게 말을 받았다.

“자유의지를 막는 건 불법 아닙니까. 더군다나 죽음에 관련된 일이라면 실장님이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어차피 그건 위에서의 일이고 필드에서는 다르지. 영업하면서 별 일 다 생기는 법 아닌가.”

“제가 곤란해지지 않습니까. 이번 분기 목표실적만 해도……”

과장은 말을 급히 잘랐다. 더 이상은 나눌 이야기가 아니었다. 실장은 어깨를 으쓱 하더니 다시 히죽 웃고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너무 많은 대화가 오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실장은 최소한 이 도시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영업통이었다. 규칙을 깨고 규칙을 적용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소문도 있었다. 과장은 그제서야 자신이 천실장의 서열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술 한잔 하러 오라는 그의 꾀임에 속아 넘어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영혼을 하나 구제하는 것보다 악마를 하나 추방하는 게 훨씬 이득 아니겠는가. 천실장은 물끄러미 과장의 눈을 살피더니 슬쩍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다 선택이겠지. 자유의지고. 그것을 누구에게 말하겠나.”

과장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남은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둘 다 취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맨 정신인 것을 보이지는 않았다. 적당한 태도, 적당한 반응. 그리고 부드러운 말대접. 두 영업사원은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에 맞춰 합창하듯 멜로디를 흥얼대고 있었다. 몇몇 젊은이들이 테이블에 앉은 채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었다.    

-4-

“사실관계와 신용도는 이상 없었습니다.”

과장과 여인은 어제 만났던 카페에 다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과장의 설명에 여인은 고개만 슬쩍 끄덕거렸다. 과장은 천천히 [매도약관]이 적힌 안내서류를 고객 앞에 들이밀었다. 여인은 천천히 레포트라도 읽듯 유심히 그 서류를 읽더니 다시 보일락말락 할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이 나온 것은 과장 쪽이었다. 그는 천천히 양피지와 금장만년필을 가방에서 꺼내어 여인 앞에 밀어 넣었다.

“서명을 하시면 거래가 완료됩니다. 서명을 하신 뒤 정상거래는 다음 날부터 효력이 발생되죠. 하지만 효력은 지금부터 유효합니다. 한 번 서명을 하시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특히나 생사여탈에 관련한 조항을 주로 넣으셨으니까……”

“왜 하루를 더 기다려야 하나요.”

사내의 눈이 안경 너머에서 여인을 쏘아보았지만,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과장의 눈을 맞보고 있었다. 작은 입술이 달싹거렸다.

“지금 서명을 하면 효력은 유효한데 왜 하루를 더 기다리나요?”

“서명에 대한 본부의 절차가 남아있으니까요.”

“전 서명하자마자 바로 일어나기를 원해요. 그냥 그 사람이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요.”

“정상적인 절차가 없으면 곤란합니다.”

“어제 말씀하신 그 하루의 유예기간 말인가요? 되돌릴 수 없다면서요.”

사내는 안경을 다시 고쳐 썼다. 여인은 생각보다 훨씬 강단 있을 뿐 아니라 영리하기도 했다. 과장은 자기도 모르고 혀로 입술을 핥았다. 실무적인 차원에서 천사와 악마가 하루 유예를 두는 것이 업계의 관행이라고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사내는 다시 목이 간지러워지는 걸 느꼈다. 갈증이 시작되고 있었다.

“강현희씨.”

“예.”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싫어요.”

“그럼 사람에 대한 건 말고 돈이면 안되겠습니까?”

“왜 악마인 당신이 그런 일을 생각하죠?”

여자의 목소리에 조금씩 예리함이 묻어 나왔다. 사내는 계속 입맛을 다셨다. 영업사원 800년, 여인의 미모보다 뛰어난 이도 있었고 더 처절한 원한도 경청해 봤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증오를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참지 못하거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던 사람들이었다. 한마디로 절망에 모든 것을 밀어 넣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앞에 앉은 이 여인은 자신의 선택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명확하고 이성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인생을 기획안처럼 말하고 있다. 과장은 갑자기 그저께 자신에게 영혼을 팔고 나갔던 점퍼사내의 이름이 생각났다. 김현태였던가. 김현태. 그런데 왜 갑자기 그 이름이 생각나는 걸까? 여인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이마에 주름을 만들고 있는 과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돌이키지 못한다는 걸 환기시키고 싶었습니다.”

“충분히 각오하고 있습니다. 생각도 해 봤습니다.”

“결정이 되신 거죠?”

“같은 이야기 되풀이하지 마세요. 제가 궁금한 건 지금 바로 원하는 걸 달라는 거예요. 이미 효력이 시작되었으면 왜 못하는 건데요.”

“생사여탈을 제 전결로 조작하게 되면 위험부담비용이 발생하는데……바로 수명감축이 시작될 겁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계약자가 즉사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상관없어요.”

“대신 금전보상으로 바꾸시겠다면 전결로 20%를 끊어드리겠습니다. 위험부당비용 없이.”

“대체 왜……”

“이유는 묻지 마십쇼.”

“그럼 제게도 이유를 묻지 마시죠. 그 사람이 혐오스러워요. 내가 하루라도 이 땅에 숨이 붙어 있는 한, 한시라도 빨리 그 사람이 죽기를 원합니다.”

매끄러운 혓바닥과 차가운 사고,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기분이었다. 과장은 자신이 여기서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으로, 그는 자기자신이 고객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존재가 되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사내는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고 조용히 앉아있다가 금장펜을 들어 고객요구사항에 예스러운 글씨체를 일필휘지로 적었다. 만년필은 붓처럼 소리 없이 그가 남기는 글자를 검은 흔적으로 남겼고, 그 자국은 희미하게 눌어붙은 옅은 불꽃을 남기며 양피지에 새겨졌다.

-특정인의 죽음: 매도자의 요구사항과 희망에 의거한 긴급요청. 위임전결 -

여인은 잠시 양피지를 신기한 듯 쳐다보더니 금장만년필과 양피지를 자신의 앞으로 가져온 뒤 추후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 내려갔다. 서명이 끝나자 기나긴 한숨이 터져 나온 것은 여인이 아닌 사내의 입에서였다.

“끝이죠?”

“……예. 거래는 끝났습니다.”

“언제쯤 이뤄지나요.”

“빠르면 지금, 늦어도 한 시간 이내.”

여인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그리고는 급하게 카페를 벗어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대로변으로 뛰다시피 사라져갔다. 마치 시간에 쫓겨서 친구와의 약속을 급하게 끝낸 사람인양.

사내는 천천히 서류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테이블을 깨끗이 치우고 나서야 그는 식은 커피를 한숨에 들이켜고 시계를 쳐다보았다. 20시간이 아닌 20분이 지난 뒤였다. 그제서야 사내는 천실장이 카페의 유리창 너머에 그와 아가씨를 번갈아 보면서 눈을 휘둥그래 뜨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과장은 손을 절레절레 흔들어 신경 끄라는 몸짓을 하고 서둘러 자리를 박찼다. 더 이상 앉아있을 여력도 없었다.

그날 밤, 과장의 방 안에는 수 많은 양피지가 벽면을 가득 채우며 둥둥 떠 있었다. 이미 거래가 완료된 1/4분기의 계약서들이었다. 강현희의 것을 제하더라도 300여 개가 넘는 서류들이 그의 작은 거실과 침실 위를 움직이는 거대한 칠판처럼 떠다니는 중이었다. 수많은 이름과 수많은 거래종류들. 그리고 수많은 조건들이 그의 앞에 보였다.

과장은 아래 써 있는 이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기억이 나는 이름도 있고, 기억에 없는 이름도 많았다. 기억에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나하나 하루의 일과였을 뿐이다. 돈이 필요해서, 사랑이 필요해서, 부모를 살리기 위해, 자식을 살리기 위해. 욕망과 명예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을 담보 잡았지만 정작 그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고 있었다. 입술이 말랐다. 그는 냉장고로 천천히 걸어가며 히죽 웃음을 지었다.
800년을 근무한 이래 가장 웃기는 저녁일과가 아닌가. 올 해 1/4분기가 지나기 전에만 계약한 게 이 300명이었다. 수많은 시간 동안 그가 데려간 영혼은 적게 잡아도 수백만이었다. 전쟁터를 누비며 영혼을 갈퀴로 긁어 모으다시피 한 적도 있었고, 홍수와 기근이 오던 지방에서 양피지가 공급되지 않을 때까지 사람들의 계약을 받은 적도 있었다. 애인을 하나 죽이려는 계집애 하나 때문에 감상적으로 된다는 것 자체가 합리적이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이미 애인은 죽은 지 몇 시간 정도 지나고도 남을 시간일 것이고, 여인의 목숨도 적게는 30%정도 감소하게 되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그 여자의 선택이었을 뿐, 과장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다. 단지 그 여인의 냉철한 자세와 눈동자가 맘에 걸렸을 뿐이었다. 그는 물컵은 한 손에 들고 오른손을 허공에 휘저었고, 순식간에 그의 앞에 펼쳐져 있던 양피지는 공간이 접히듯 한쪽으로 우르르 몰리더니 곧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사내의 목으로 차가운 물이 흘러 들어갔다. 하지만 갈증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갈증이 계속 그의 목 깊숙한 곳에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귀찮은 감각. 어서 빨리 중앙본부로 돌아가야 이 육신의 탈을 벗어 던질 텐데. 그래야 이런 감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연중 불타오르지만 그것이 항상 목마른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불타오르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는가.

-모두 태우라. 전부 남김없이.-
강현희의 눈동자. 그 눈빛이 그저 귀찮았던 것 아니었던가. 왜 그랬을까? 예전 어디선가 애절하게 거래를 했던 그 누군가와 닮아서였겠지.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그 누군가……

-모두 태우라. 전부 남김없이.-
그제서야 과장은 그 눈빛을 까마득한 기억에서 되살릴 수 있었다. 그건 잊을 수 있는 종류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 눈빛은 마지막까지 그를 응시하던 여인의 눈빛. 빗장을 걸 때 자신을 쳐다보던 애인의 눈빛. 자신을 이 자리로 오게 만들었던 그 사건에서 유일하게 기억나는 그 눈빛.

손에서 컵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고, 컵은 데구르르 구르며 책상 아래로 사라졌다.

그제서야 과장은 목마름이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갈증의 시작은 가슴에서 시작되는 것이었고, 그건 엄밀히 말해 갈증이 아닌 통증이었다. 사람들이 이걸 뭐라고 불렀는지가 기억났다. 이건 갈증이나 목마름이라고 표현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것이었다.

죄책감이었다.

-5-

노파는 주섬주섬 빛 바랜 코트를 집고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며 공손히 인사를 하고 카페를 나섰다. 아침 나절 괴로워하는 인간을 붙잡고 엮어낸 첫 번째 고객이었지만 과장은 일에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죄책감이었다니. 800년간 겪어온 갈증이라는 게 죄책감이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여전히 흐린 하늘 아래로 사람들은 목까지 단추를 채우고 걸어 다니는 중이었고, 과장은 따스한 카페 안에서도 목을 한껏 움츠린 채 커피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 인간의 육신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이 상황을 벗어나지 못할 성 싶었다. 앞으로 몇 명을 더 잡아 보내야 중앙으로 발령이 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영업으로 일선에서 영겁을 맞이할 가능성이 다분하지 않은가. 700명 1/4분기를 채운다 해도 4/4분기까지 몇 명을 더 잡아가야 할 지를 생각하니 까마득했다.

- 그 쪽 사람이 아니야 -

천실장의 말이 뇌리에 감돌았다. 이쪽에서 일할 사람이 정해져 있는 건 딱히 아니었지만 그의 말은 과장 자신의 머릿속을 대신 정리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방도가 없지 않은가. 인생에 되돌아 갈 수 있는 하행선이 있던가. 모든 것이 순간의 선택이었을 뿐. 후회는 부질없는 짓일 게다. 과장은 자라처럼 움츠렸던 고개를 다시 빼고 주섬주섬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일은 오직 하나. 육신을 벗어버리고 중앙본부에서 사무관리직으로 넘어가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지금보다 더 나은 영업성적과 고과밖에 없지 않은가. 커피를 입에 털어 넣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방법이 없지.

그때였다. 스멀스멀 그의 테이블 앞으로 검은 봉투가 형체를 띄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안경 너머에 있던 그의 눈동자가 있는 대로 커졌다. 눈의 흰자가 안 보일 정도로 동공이 확대될 지경이었다. 가슴이 퉁탕거렸다. 죄책감이 아니라 전혀 다른 떨림이었다.

블랙페이퍼. 영업부 회신 사유서

말이 회신 사유서지 비상발송을 의미하는 봉투다. 영업사원에게 이 봉투가 날아드는 것은 흔치 않았다. 세계대전 같은 일이 아닌 담에야 일반 직원들은 구경도 못하는 서류였고, 개인적으로 이 서류를 구경한 직원치고 말로가 좋은 직원은 하나도 없었다는 풍문이 도는 서류였다. 그 봉투가 영업사원으로 입사한 지 800년 만에 과장의 눈 앞에 나타나는 중이었다. 사내는 재빨리 카페 안을 훑어보았다. 누구도 그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지만 사내는 가방을 테이블 위로 옮겨서 봉투가 바닥에서 튀어나오는 장면을 아무도 보지 못하게 막았다.
검은 봉투의 앞에는 시뻘건 인장이 찍혀 있었고 그의 이름과 지시사항이 고딕체로 음각되어 있었다.

-        긴급 송신, 해당 사원 외 촉수금지 –

그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었다. 그 안에는 달랑 한 장의 서류만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간략한 사항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었다.

-        거래취소, 강현희. 치명적인 계약위반사항 발생. 거래금 회수요망 –

사람이었으면 혼이 빠져나갔을 것이다. 거래취소라니. 치명적 계약위반은 또 무엇인가. 자세한 세부사항은 하나도 써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혹스러웠던 것은 마지막 줄이었다. [거래금 회수요망]이라니. 이제 불가능한 일이었다. 돈이라면 다시 채워 넣을 방법이라도 있겠지만 이미 죽인 남자를 어떤 수로 되살린단 말인가! 그건 영업직이 할 수 있는 범위 너머의 사안이었다. 그제서야 왜 블랙페이퍼가 자신의 손에 들어왔는지 알 수 있었다. 문자 그대로 발칵 뒤집어질 사건이 터진 것이다. 계약이 취소되었는데 사람을 잡았다! 맙소사. 맙소사. 머리 속이 하얗게 비었다. 뭔가 생각을 해야겠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왜 계약이 취소된 거지? 뭣 때문에 취소된 거지? 서류상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는데. 그 여자는 스파이였나? 신원조사까지 다 해 봤는데. 그럼 뭐지? 누군가 훼방을 놓기라도 한 것인가?

천실장.

갑자기 한 사람의 얼굴과 직함이 머릿속에 확 떠올랐다. 술집에서 뭐라고 떠들었던가. 자신이 데려가면 어떻겠냐고? 이런 망할. 천사의 훼방이라면 이건 공식적인 전쟁선포나 다름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면 영업실적과 무관하게 승진이 아닌 좌천이 따 놓은 당상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자신의 업무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살갑게 들어주다가 뒷통수를 친 천실장의 유들 거리던 얼굴이 떠오르자 갑자기 분노로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지저분한 흙탕에도 짐승들의 규칙이 있다. 생 초보도 아닌 작자가 이런 식으로 지저분하게 일을 처리한다면 나에게도 지저분해질 권리가 있는 법이다. 얼러서 되지 않으면 들이 받아버리는 것. 이것이 영업통의 수 백 년 된 암묵적 규율 아닌가.  그는 재빨리 금장 만년필을 뽑아서 주머니에 쑤셔 넣고 엊그제 천실장을 만났던 술집으로 가방을 낀 채 달려갔다. 다행히도 그가 일하는 카페에서 두 블록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천실장은 텅 빈 가게에 홀로 앉아 있었다. 하얀 추리닝에 금 목걸이를 잘랑거리면서.

“여, 과장님, 일은 안 하고 웬 일이셔? 벌써 한잔 빨러 오신거야?”

과장은 대답 대신 가슴의 포켓에서 금장펜을 뽑았다. 펜은 손아귀에서 막대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번쩍이던 펜촉은 순식간에 길어지며 날카로운 끝이 바늘모양으로 크게 휘어졌다. 휙 하고 노란연기가 피어 올랐다. 천실장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고, 과장의 손에 들린 낫은 시각을 속이듯 이미 천실장의 목을 향해 세차게 날아가는 중이었다.찍 하는 소리와 함께 흰 추리닝이 찢기는 소리가 났다. 이미 천실장도 몸을 뺀 뒤였다. 천실장의 얼굴은 하얗게 변한 채 머리털이 고슴도치처럼 하나하나 곤두서 있었다. 그는 거칠게 금목걸이를 잡아 뜯더니 자신의 오른 손에 칭칭 감았고 곧 손에 두껍게 감겨진 금사슬에서는 불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악마새끼가 미쳤나 어디서 썩은 내를 풍기고 지랄이야?”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전투는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체인과 낫이 수십 차례 격돌했다. 작은 술집 안은 금빛과 암흑과 불과 유황이 작렬하며 마찰하는 불꽃과 소음으로 가득 찼고 천둥과 번개가 사방을 휘감고 여타의 다른 빛을 허용하지 않았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과장의 안경이 산산조각 나서 날아갔다. 날카로운 낫이 실장의 추리닝 상의 한쪽을 다시 찢어발겼다. 어차피 천사와 악마의 싸움이라는 것은 결판이 날 수 없는 것이다. 누가 죽거나 소멸하지도 않는다. 단지 유일하게 서로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존재기에 피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두 사내는 이후에 벌어질 사태도 훤히 꿰고 있었다. 이런 난장판이 벌어지면 곧 상부에서 출동할 것이고 그 때까지의 난장판이 직원들의 몫인 것이다. 아무쪼록 호되게 얻어맞거나 찢기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과장은 내심 천실장이 여간내기가 아닌 싸움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사가 되기 전에는 정말 뼛속까지 망나니인 인간이었던 듯, 밀어붙이는 박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오히려 싸움을 건 쪽이 밀리는 상황이었다. 불타는 주먹이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왔고, 과장은 비틀거리며 가까스로 보이지도 않는 주먹을 피해 바닥을 굴렀다.

“야, 마과장. 너 뭐야? 왜 아침부터 이 짓거리야?”

씩씩대며 윗도리가 갈기갈기 찢어진 천실장이 말했다.

“누가 할 소린데! 왜 남의 영업을 엉망을 만들어! 나 망했다고! 엉? ”

“뭔 소리야? 야 임마, 무슨 개소리냐고?”

“이 새……너 강현희 중간에 꼬셨잖아! 어제 내 고객! 이 더러운 새끼야! 계약 완료된 인간을 꼬셔가 놓고 발뺌을 해? 지금 다 엎어졌단 말이야! 나 망했다고! 뭔 소린지 알아?”

“이게 뭔……나 아니야. 미친놈아. 나 아니라고!”  
  
“그럼 누가 그런 건데? 엉? 너 말고 누가 있느냐고! 엉? 말해 봐!”

갑자기 실장의 얼굴이 보통의 안색으로 변했고 불타던 손의 목걸이도 순식간에 짧아지며 화르륵 불꽃이 사그러 들었다. 과장도 천천히 손을 내렸고 금장펜도 보통의 필기구로 돌아왔다. 실장은 상대의 뒤를 응시하고 있었고, 그제서야 과장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일단의 무리가 이미 뒤에 서 있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채 오와 열을 맞춰 서 있는 험상궂은 얼굴들과 흰 투피스 정장을 입은 여인과 백색 트렌치코트를 걸친 준수한 사내의 모습. 상부 감찰단이 생각보다 빨리 현장에 뜬 것이다.

“마과장, 막 나가는구먼. 본부를 발칵 뒤집어놓고 이젠 전쟁까지 벌이나?”

산더미 같은 덩치를 지닌 검은 양복의 사내가 뱀 같은 눈동자로 과장을 쏘아보았다. 인종구분조차 안 되는 얼굴로 봐서 그는 중앙에서 직접 파견 나온 인물임이 분명했다.

“거래취소를 발생시킬 사안은 이 쪽의 농간밖에 없습니다.”

“나 안 했다니까 왜 아까부터 지랄이셔?”

천실장의 걸디 건 응답이 바로 튀어나오자, 뒤에 서 있던 두 백의남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과장의 앞에 서 있던 검은 양복은 잠시 천실장을 예리하게 노려봤지만 곧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과장은 뭔가 일이 꼬였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쪽이 당혹스러워 하는 중이었다.

“마과장, 자네의 일차 추리는 타당하지만 이번 사건은 저쪽 회사하고 상관없네. 전적으로 자네 탓이야.”

“예?”
과장은 그제서야 상관의 뒤에 서 있는 두 명의 양복사내들을 보았다. 한 명은 낯이 익었다 같은 도시에 근무하는 신입사원. 그리고 한 명은…직속상관, 지역본부 대부 차장이었다. 대부팀 차장의 안색도 안색이지만 신입사원의 얼굴은 말 그대로 사색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그 때, 대부팀 차장이 천천히 앞으로 와서 두 장의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강현희, 이중계약. 동일한 날 다른 계약에 서명하고 일시불로 계약조건을 타 갔어.”

앞에 선 상관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고, 사색이 된 신입사원은 고개를 떨군 채 바닥이 뚫어져라 말이 없었으며, 대부팀 차장은 가래끓는 소리를 내며 분을 참고 말하는 중이었다.

“과장 자네에게는 전 애인의 목숨을 담보로 잡았고, 대리에게는 일시전결로 290억을 타갔네. 우리 서류 심사에 하루 여유가 있고, 전결권을 각 계약당사자가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던 계집애야. 이쪽 바닥에 빠삭한 인간이야. 대리 말에 따르면 여자가 먼저 연락을 했다던데?”

이른 아침에 전화를 걸었던 기억이 났다.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차장은 얼굴 가득 주름이 생기더니 가래를 뱉어 낼 듯 격렬하게 소리쳤다.

“이 년이 우릴 갖고 놀았단 말이다! 사기 쳤어!”

“신원조회는 정상이었습니다.”

“당연히 정상이고, 그 여자의 처지도 진술한 것 맞아. 그 여자는 두 가지를 동시에 원한 거다. 배신자의 최후와 자신의 금전적 이득.”
화가 가라앉았는지 상관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이 나라를 떠났다. 타 지역 관할로 넘어갔어. 추적이 안 돼.”

“그럼 여자의 영혼은……”

“못 건졌다. 애 먼 사람 하나 지옥으로 떨어진 것이 그나마 다행이지만 현금회수는 요원해. 그리고 지옥으로 떨어진 그 인간은 정상적인 절차로 떨어진 게 아니야. 저쪽 회사하고 지리한 합의가 벌어질 거다. 별로 좋게 살아온 놈은 아니지만 절차위반이야. 이런 일은 난생 처음이라……”
상관은 조용히 말을 하다 다시 분이 치밀어 오르는지 머리를 잡아 뜯기 시작했고, 곧 그 분노는 과장에게 쏟아졌다.

“대체 뭘 한 건가! 영업으로 800년을 살면서 사기꾼인지 아닌지 구별도 못 하나?”

“그녀의 선택을 존중했으니까요. 그게 저희 회사 첫 째 방침 아닙니까.”

“망할”

상관이 고개를 거의 직각으로 꺾고 분을 삭이고 있을 때, 천천히 두 명의 백의남녀가 상관에게 다가왔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공식적인 표정이었지만 묘한 승리감과 비웃음이 깔려 있었다.

“귀사의 사정은 안타깝지만 이번 전쟁은 책임소재를 확실히 물어야겠군요.”

천장을 잠시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던 대부차장은 항복이라고 하듯 두 손을 어깨위로 올렸다.

“우리 입장 좀 생각해서 합의합시다. 과장 저 친구 처지엔 가장 그럴 듯 한 추측 아니오.”

트렌치코드의 남자는 어깨를 으쓱거렸고 여인은 온화하지도 건방지지도 않은 미소를 살짝 입가에 띄우더니 차장을 쳐다봤다.

“우리가 알 바 아니죠. 하여간 이번에 죽은 인간하고 같이 묶어서 얘기해요. 그나저나 그런 아가씨라면 우리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뭐, 그건 그때 이야기하기로 하고.”

정말 성의 없는 악수가 끝나고 남녀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고 상관은 이를 드러내며 대놓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들 역시 희뿌연 연기와 함께 조금씩 자취가 희미해지는 중이었다. 어차피 사건의 결말을 알았으니 영업현장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자네 상시 대기해. 조치 있을거야.”

마지막으로 메아리처럼 울리는 차장의 목소리를 뒤에 남기고 과장과 천실장은 아무도 없는 술집에 덩그러니 남겨져 버렸다. 천실장이 멍하니 서 있는 과장의 뒤로 다가와 여느 때와 다름 없는 말투로 말했다.

“결국 그 여자는 무사하게 된 것 같군.”

“그렇군요.”

비석처럼 굳은 채 서 있는 과장의 어깨를 천실장이 손으로 툭툭 치기 시작했다. 이미 상의는 멀끔하게 회복된 뒤였고 술집은 멀쩡하니 복원 된 후였다. 과장은 텅 빈 머리 속으로 이젠 무얼 해야 하는 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본사에서 무슨 조치가 오는 가에 대해서도 고민이었다. 800년간의 업무가 하루 아침에 헛수고가 되어버린 절망감 역시 거대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커다란 느낌이 그의 가슴속을 채우고 있었다. 그는 강현희라는 여자를 증오하는 게 굉장히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어쩌면 처음으로
그는 목이 마르지 않았다.

-Epilogue-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사이 창 밖의 화단엔 완연하게 초록색이 감돌고 있었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한결 가벼워졌고 더 이상 무거운 코트를 껴 입고 다니지 않았다.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정오에 내리기 시작한 비는 밤이 될 때까지 계속 내릴 듯싶었다. 많지 않은 비가 오랫동안 소슬하게 내렸다. 가로등 불이 어두워진 그늘을 밝히러 가냘프게 빛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우산을 펴 들고 그 아래를 다채로운 바퀴살처럼 흘러갔다.

과장은 술집 아래로 말없이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표정은 심각하기 그지없었지만 손으로는 열심히 얼음이 들어있는 컵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그의 옆자리에는 말끔하게 차려 입은 백색 정장의 사내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중이었다. 반짝이는 금목걸이가 넥타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천박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도 바빴나?”

“늘 바쁘죠. 요즘 안 바쁜 적이 있던가요.”

“난 여전히 파리만 날리는데.”

“그래도 안 잘립니까?”

“내가 누군데 날 잘라.”

과장은 천실장을 슬쩍 어깨 너머로 바라보고 히죽 웃으며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천실장은 그를 흘깃 쳐다보고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이, 마과장.”

“예.”

“그 일 이제 결정 났다며? 어떻게 된 거야?”

“남의 회사 방침에 관심이 많으시네”

“뭐 우리가 남인가. 같이 주먹질도 한 사인데.”

과장은 유리창을 뒤로 하고 술집 안쪽으로 돌아앉았다. 한쪽 입술이 올라가 있었지만 피곤에 찌든 그의 얼굴이 묘하게 서글픈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는 영화배우처럼 어깨를 한번 들썩거리더니 천실장에게 말했다.

“타지 발령이 났습니다. 어차피 이 지역에 사건이 터졌으니 제가 더 이상 책임자를 맡을 수는 없죠. 그 신입대리도 어디 다른 데로 발령이 날 테고요.”

“어딘데……북극 같은 곳인가?”

“아뇨. 영업통을 그런데 보내는 건 아니죠. 뉴욕이나 동경으로 갈 겁니다. 아마 더 많은 실적을 처리해야 하는 곳으로 말이죠. 밤새도록 일을 해야 하는 곳 말입니다. 사람들이 집에서 자는 시간을 쪼개서 샌드위치를 먹고 일하는 그런 동네들 있잖습니까.”

“지옥이구먼.”

“비슷해요.”

두 사내는 서로의 얼굴을 보더니 다시 싱긋 웃음을 짓고 술잔을 마주쳤다. 천실장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과장은 천천히 천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강현희 아직 안 잡혔어요.”

“질긴 계집애네. 자네들이 못 잡는 애도 있다는 게 이상해.”

“그럴 수도 있죠. 저희는 완벽한 조직이 아니니까요.”

과장은 다시금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중앙본부에서 그에게 추살령을 내려 끝까지 여자를 잡아오라고 시킨 것을 천실장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나름대로 선을 대서 추적한 것이 두 도시였다. 최소한 두 곳 중에 한 군데는 있을 것이다. 세월과 시간은 의미가 없으니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지. 하지만 만난다 하더라도 강현희를 문책할 것인가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과장은 솔직히 그럴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이가 그 일을 맡게 놔 둘 수도 없었다. 자신의 영전은 그 여자 때문에 막혔지만,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를 보면 최소한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그 날 이후 생겨났다.

천실장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저벅저벅 창문으로 다가가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수 많은 우산들과 그 아래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넉살 좋던 그의 얼굴에도 한 줄기 무표정이 스쳐갔다. 영겁의 시간을 일하고 있는 사내들이 종종 내비치는 표정이었다. 과장은 실장의 얼굴이 자기하고 많이 다르지 않음을 새삼 느끼는 중이었다. 세상에 다른 것도, 달라진 것도 별반 없었다. 시간은 찰나와 영원이 다름이 없었다.    

“그래도 잘 해 주라고. 한 번 고객은 영원한 고객 아니던가.”

천실장의 독백과도 같은 말에 과장은 놀라 머리를 들었다. 유리창에 비친 천실장의 얼굴에 다시 사람 좋은 미소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과장은 피식 웃음을 짓고 자신의 술잔을 얼굴위로 가져가 올렸다.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술집의 음악은 끊어지지 않고 흐르는 중이었고, 가로등 아래 사람들의 행렬도 줄어들지 않고 계속 움직이는 중이었다.

아마도 계속 그럴 성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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