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ATM

2011.07.28 16:3707.28

  ATM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잠시 동안이나마 괴로움을 잊을 수 있다.
  오디오에서 흘러나와 낮게 깔리는 중저음과 슬픈 음색이 가슴을 비집고 들어왔다.
소파에 앉은 채로 왼손을 뻗어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국제 전화 번호를 누른 나는 신호음이나 한참동안 들어야 했다.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떨어뜨리듯이 수화기를 놓았다.
  그렇다. 나는 나 홀로 있는 집안에서 외로움이 미쳐가며 죽어가고 있었다. 청소를 하지 않아 담배 연기로 찌들고 얼룩진 천장을 올려다보며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일어나서 커튼을 걷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텅 빈 배는 고프다고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부엌으로 갔다. 홀로 있으니 아침은 간단하게 먹는다. 토스트를 굽고, 땅콩버터를 꺼냈다. 냉장고에서 꺼낸 우유는 전자레인지에 살짝 데웠다. 구워진 토스트에 땅콩버터를 발라서 먹는다. 한 입 깨물면 땅콩버터의 고소함과 부드러움, 토스트의 바삭함이 조화를 이룬다. 문득 몇 입 먹다 말고 토스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 위에 수제 딸기잼을 얇게 세로로 한 줄을 발라 먹으면 정말 맛이 좋지만 지금은 딸기잼을 만들어줄 사람이 없다.
  갈색으로 된 식빵과 그 위에 놓인 연갈색 크림과 땅콩 조각을 보다가 거실로 가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시계를 보니까 지금 미국은 오후 5시 경일 것이다. 슬슬 저녁 준비를 할 시간이라서 집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기대하고 전화번호를 눌렀지만 뚜르르 하는 소리만 계속해서 들릴 뿐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자 극심한 우울함이 엄습했다. 소파에서 일어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직장으로 출근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등 뒤의 침대 아래에 놓인 가방 안에 넣어둔 휴대 전화 벨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지만 받지 않았다. 넥타이도 힘겹게 질끈 매고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나는 사무실 앞에 거의 다 와서 휴대 전화로 도착한 문자 메시지를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간이 아직 있기에 근처에 있는 주거래 은행으로 가서 현금 인출기 앞에 가서 섰다. 안에 있는 현재 환율 전광판을 보고 다시 한 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카드를 투입구에 넣고 건조한 전자 안내 음에 따라서 희망 액수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돈 세는 소리와 함께 돈 넣는 곳 뚜껑이 열리면서 현금 500만원이 튀어 나왔다.
현금은 ATM기 옆에 있는 봉투에 곱게 넣어서 창구 앞으로 가져갔다.
  “이걸 달러로 환전해서 뉴욕 뱅크로 송금했으면 합니다.”
  창구 여직원은 나를 흘끗 한 번 보더니 내가 건넨 쪽지에 있는 계좌번호로 송금하는 절차를 거치기 시작했다. 내가 송금을 하려는 곳은 미국에 있는 은행이고, 아내와 아들이 그곳에서 지내고 있다. 잠시 뒤에 직원이 송금을 했다는 영수증을 건네주었다.
영수증을 받아들고 보니 흡족한 웃음도 떠올랐지만 이내 우울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나는 은행을 빠른 걸음으로 나와서 사무실로 향했다.
  건물 앞에 도착하니까 경비원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목례로 인사를 하고 들어갔다. 마침 후배가 나오다가 나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어. 선배님. 날씨가 덥다보니 노타이이시군요.”
  나는 그제야 내가 넥타이를 매지 않은 것을 알았다. 생각해 보니까 집에서 넥타이 매는 것이 힘들어서 현관에서 집안으로 던져버린 것이 기억났다. 멋쩍은 표정으로 목을 매만졌다. 그대로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1층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에 회장이 타고 있었다. 나는 회장을 알아보고 허리 굽혀서 인사를 했다. 회장은 나를 보더니, “자넨 뭔가?” 하고 물었다.
  “어째서 출근하는데 넥타이를 매지 않은 건가?”
  딱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은 나는 히죽 웃었다.
  “가끔은 답답한 넥타이 따윈 풀어 던지는 것도 낫더군요. 회장님.”
  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쏙 들어갔다. 내가 올라간 직후 회장은 넥타이를 매만지다가 풀어보는 것이었다. 그러다 다시 맸다. 옆에 있는 비서에게 물었다.
  “저 친구, 누구인지 아는가?”
  비서는 손에 든 목록을 뒤적여서 말했다.
  “네. 업무부의 조문석 팀장입니다. 현재 아내와 아들이 미국에 유학을 가 있습니다.”
  “기러기 아빠인가?”
  "네. 평소에는 빠릿빠릿 일 잘 처리하고 유능하다는 평가이지만 최근에는 이상 행동을 보이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족과 떨어진 외로움에서 비롯된 증상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그럼 사원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 ‘외로운 사원 소개팅 프로젝트' 이라도 진행시킬까?”
  “……그런 프로젝트는 둘째 치고, 조 팀장은 유부남입니다.”
   나는 아래층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모른 채로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미 업무가 시작되어 있었다. 발소리를 죽여서 걸어서 내 자리로 갔다. 책상 위는 어제 퇴근 때와 변함이 없었다.
  조용히 앉아서 서류를 뒤적였다. 내 자리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늦었군. 조 팀장.”
  2팀의 팀장 서운전이었다. 그는 나의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넥타이는 어디다 두고 왔어?”
  “가끔은…… 자유로운 것도 좋아서.”
  “자유 이전에 몰상식을 먼저 논해야 할 것 같군.” 그는 보수적이고 딱딱한 성격이다. 그가 한바탕 말을 늘어놓으려고 할 때 나는 서랍을 열고 귀마개를 꺼내어 귀를 막았다.
  운전이 혀를 차면서 자리로 돌아가고 나서, 나는 서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주어진 업무를 하고 있는데, 집에서 듣던 음악이 미치도록 듣고 싶었다. 사무실이라는 공간 안에서 가진 직책은 남의 눈치가 보고 있을 신세가 아니지만 성격이 소심한 탓에 칸막이 너머로 고개를 살짝 내밀어 탐지했다. 대리 한 명이 일어나서 커피포트로 다가가 차를 한 잔 타고 있을 뿐, 나머지는 대부분 앉아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서랍 문을 열고 손바닥보다 작은 라디오를 꺼냈다. 이어폰을 연결하고 주파수를 맞췄다. 이윽고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기대와는 다르게 템포가 빠른 신나는 음악이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이어폰을 내 귀에 밀어붙이고 감상을 시작했다. 탁상시계 시계 초침이 스무 번을 움직일 무렵에 나는 누군가가 내 어깨를 건드리는 걸 알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부장이 지그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네, 뭐하고 있나? 일 안하나?”
  “일하고 있습니다. 생산력 향상을 위해 음악의 도움을 받고 있는 중이지요.”
  “내가 보기에는 없는 게 나은 것 같은데…….”
  핑계는 좋지만 부장의 말은 옳은 말을 하고 있었다. 음악을 틀기 전이나 튼 후나 나의 업무 처리 속도는 변함이 없다고 해야 좋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하다보면 반드시 좋아질 겁니다.”
  부장도 가버렸다. 이제 나 혼자가 되었다. 음악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류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펜을 쥔 손이 잘 놀려지지 않았다. 나는 펜을 책상 위에 놓고 등을 의자에 기댔다. 끽 소리를 내면서 등받이가 뒤로 젖혀졌다.
  그때 휴대 전화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받고 싶지 않았지만 특별한 벨 소리여서 마치 홀린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대로 팔을 뻗어서 전화를 받았다. 서툰 한국어가 들려왔다.
  “안녕 하세요. 아침에 전화했는데, 늦게 받으시네요.”
  말소리는 떠듬떠듬 했고, 서툴렀다. 나의 자세가 총알 같이 바르게 되었다. 그리고 기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소 사장님. 나흘 만이네요. 어쩐 일이십니까?”
  소 부장은 너머의 상대와 공적(公的)인 자리에서 대화 할 때 쓰는 가명이다.
  “별 건 아니고…… 일 끝나고 나서 한 잔 하실 수 있으신가요?”
  내 목소리는 어느새 활기에 차 있었다. 내가 외치는 소리에 사무실 안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물론입니다! 소 사장님. 퇴근하고 뵙겠습니다.”
  “팀장님에게 여자가 생긴 것 같아.” 여직원 중 한 명이 옆에 있는 동료에게 말했다. 그녀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그걸 모른 채로 나는 기쁜 몸짓으로 폴짝 폴짝 뛰면서 퇴근할 때까지 차 키를 만지작거리다가 퇴근 할 때가 되자 제일 먼저 내려갔다. 차에 올라탄 나는 서둘러 시동을 걸고 지하 주차장을 빠져 나왔다. 내가 간 곳은 집에서 멀지 않은 놀이공원 지하 주차장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선물가게에 들러서 전자 달력과 새하얀 작은 곰 인형을 샀다. 크기는 손바닥보다 조금 컸다. 그것은 선물을 할 것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한 여자가 내려와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멀리서 실루엣만 보고도 그녀임을 알아보고 크랙 숀을 빵빵 눌렀다. 여자가 소리가 난 쪽을 보고 달려와서 조수석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차 내부 등에 비추어진 모습은 해맑게 웃고 있는 금발의 러시아 여자였다. 이름은 소피아인데, 위에 있는 놀이공원 퍼레이드 무용수로 고용되어 있다. 그녀는 차문을 닫고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빨리 오셨네요.” 나는 웃음으로 화답해 보이고, 차 기어를 전진에 맞췄다. 나와 소피아가 탄 차는 지하 주차장을 빠져 나와서 근처에 있는 먹자골목으로 향했다.
  소피아는 가는 도중에 그간 좋은 소식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석 달 뒤에 있는 대형 퍼레이드를 앞두고 맹연습 중이에요. 아주 좋은 기회죠. 당신은요?"
  “미국은 한 달 뒤에 방학 시즌이에요. 가족들이 잠시 돌아오겠네요.”
  내 목소리는 흥분으로 격양되어 있었고, 떨리고 있었다.
  “그럼…… 한 달 뒤에는 당분간 지금보다 띄엄띄엄 만날 수밖에 없겠군요.”
  그녀의 낯빛과 말투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미리 산 조그만 선물을 내밀었다.
  “너무 실망 말아요. 어떻게든 시간을 내볼 테니까요.”
  소피아는 선물 봉지를 풀어보고는 매우 좋아했다. 전자 달력은 뒤로 하고, 흰 곰을 먼저 집어 들었다.
  “내가 곰을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당신이 러시아에서 왔으니까요.”
  소피아는 내 뺨에 다시 키스했다. 아내가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간 뒤로 여자와 접촉할 기회가 없던 나는 향기로운 향수 냄새를 맡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소피아는 자기 문화에서 하는 대로 내게 선물을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 것뿐이라고 입 속으로 수 없이 되뇌었다.
  먹자골목에 도착해서 소피아와 나란히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러시아 사람이라서 그런지 소피아는 술이 아주 세다. 한국 맥주는 싱겁다고 툴툴거리면서 500cc 를 마치 물처럼 단숨에 들이킨다. 내가 취할 정도가 되어서도 그녀는 잘 마셨다.
  “벌써 취하셨어요? 당신은 다 좋은데, 같이 술 마시면 재미없어요.”
뭐라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운전, 제대로 하실 수 있겠어요?”
  무리였다. 나는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취했다. 소피아는, “할 수 없네요. 가요.”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그녀의 부축을 받으면서 밖으로 나왔다. 남자가 여자에게 부축 받는 게 볼썽사나운지, 외국인 여자의 팔에 매달린 취한 중년 남자가 안 돼 보였는지 행인들은 한 번씩 돌아보고는 혀를 찼다. 나는 구경거리라도 났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혀가 잘 움직여주지 않았다. 아마 그 즈음에서 필름이 끊긴 것 같았다.

  나는 입가에 느껴지는 고통스런 갈증과 깨질듯이 압박하는 두통에 눈을 떴다. 천장과 이불의 무늬와 촉감, 옆에 있는 나이트 테이블 위에 놓인 연두색 스탠드가 내 집임을 보여주었다. 오늘도 혼자 일어난다고 생각했는데, 옆에 따스한 무언가가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순간, 나는 딱딱하게 굳었다. 소피아가 내 옆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이게 어쩐 일인가 싶어서 이불 속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나는데, 마침 소피아가 눈을 떴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잘 잤느냐고 인사를 건넸다. 생긋 웃으면서 일어나 앉는데, 속옷 밖에 걸치지 않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는데, 나는 트렁크 차림이었다.
  “왜 그래요? 잘 때는 속옷이나 잠옷차림으로 자는 거잖아요?”
하마터면 사고 친 거 아닌 가하고 침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었다. 나는 후닥닥 침대에서 나왔다. 방을 나와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좌변기에 걸터앉아서 내가 생각한 것은 부디 사고 같은 것을 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소피아의 목소리였다.
  “어젯밤은…… 정말 끝내줬어요. 당신은 그야말로 한 마리의 짐승, 아니 야수였답니다.”
  순간 머리를 큰 망치로 한 대 쾅하고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내가 그게 사실이냐고 더듬거리며 말하자, 소피아는 키들거리며 웃었다.
  “농담이에요. 당신은 술에 취해서 죽은 듯이 잤어요. 어서 씻고 나와요.”
소피아의 발소리가 멀어졌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턱과 코 밑에 수염이 듬성듬성 나고,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서서히 배가 나오기 시작하는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붙박이장에 놓인 전기면도기를 집어 들었다. 신혼 시절에 아내가 생일 선물로 사준 것이다. 지금껏 고장 내지 않고 잘 사용해 왔다. 스위치를 올리고 면도를 시작했다. 면도기 날이 지나가자 잘린 수염이 세면대 위로 떨어졌다.

  잠깐 사이에 턱이 깨끗해졌다. 양치질을 하고 밖으로 나갔는데, 주방 쪽에서 음식 냄새가 나고 있었다. 가보니까 소피아가 가스레인지에 프라이팬을 올려놓고 에그 스크램블을 만들고 있었다. 토스터 기에는 식빵이 구워지고 있었다. 팅! 하는 스프링 튀는 소리를 내면서 갈색으로 구워진 빵이 나왔다. 그녀는 내가 타온 것을 알고 “잼이 어디 있죠?” 하고 묻기에 나는 왼쪽 머리 옆에 있는 찬장 속에 있는 딸기잼과 땅콩버터를 꺼내려고 했다. 동시에 소피아도 손을 뻗었다가 손이 마주 부딪쳤다. 나는 손을 찔러 넣어서 잼을 꺼냈다. 딸기잼 병은 비어있었다. 냉장고를 향해 돌아서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찬 우유도 꺼냈다. 잠시 뒤에 간소한 아침 식사가 마련되었다.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식빵 한 조각을 소피아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받으면서 나에게도 식빵을 쥐어주었다. 작은 수저로 땅콩버터를 바르고, 큰 수저로 에그 스크램블을 한 수저 떠서 식빵 위에 올려놓는다. 한 입을 깨물었다. 바삭한 식감이 나도록 빵은 잘 구워졌다. 스크램블은 좀 짠듯했다. 나는 아무 말 않고 우유를 약간 마셨다.
  “어때요? 달걀, 맛있어요?”
  나는 맛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몇 입 먹을 동안 침묵이 흘렀는데, 소피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마치 연인이나 부부가 사이좋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비록 대화에 애정이 부족한 것 같지만.”
  그러자 소피아는 코맹맹이 소리로, “자기야.” 하고 말했다. 나는 놀라서 빵을 탁자에 떨어뜨렸다.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머쓱해진 나는 다시 빵을 집어서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빵과 우유를 다 먹은 나는 준비해야겠다면서 방으로 뛰어갔다. 소피아는 재미있다는 웃음을 지으면서 식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나와 소피아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나는 엄연히 유부남이다. 만일 내가 혈육이 아닌 다른 여자와, 그것도 금발 외국인 여자와 집에서 나오는 걸 들켜서 소문이 퍼지면 어떤 사단이 날지 불 보듯 뻔하다. 내가 먼저 주위를 살피면서 먼저 나와서 승강기 버튼을 눌렀다. 승강기가 올라오자 먼저 소피아를 태워서 지하로 보내고 나는 계단으로 이동했다.
  조심하는 거에만 신경쓰다보니까 숨이 차는 것도 몰랐다. 1층으로 내려와 보니 소피아는 차 뒤에 몸을 숨긴 채로 기다리고 있는데 그 폼이 사뭇 범상치 않았다. 그녀는 러시아 벌판에서 엽총 들고 사냥 나갔을 때의 스릴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며 좋아하고 있었다. 그녀를 대기시켜 놓고 주차장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손짓으로 불렀다. 그 다음은 전력질주였다.
  먼저 소피아를 차 안에 밀어 넣은 다음에 내가 탔다. 남은 것은 주차장을 신속하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나오는 도중에 출구에서 앞을 지나치는 아파트에서 유명한 수다쟁이 아주머니와 시선이 마주쳤다. 혹시 옆자리에 앉은 소피아하고 눈이 마주친 건 아니겠지? 근심걱정을 소피아는 알지 못하는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생글거린다.
  소피아는 직장 지하 주차장에 내려주었고, 나는 내 직장으로 향했다. 도중에 뉴스를 틀었는데, 공교육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남자 패널의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문득 2년 전에 아내가 한 말이 떠올랐다.
  “여보. 우리 성민이……. 미국에 가서 교육 시키면 어떨까요?”
  하루는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내게 아내가 할 말이 있다며 꺼낸 천정벽력 같은 말이었다. 성민은 초등학교 2학년짜리 외동아들이다. 넥타이를 풀다말고 그게 무슨 말이냐고. 상세히 이야기 해보라고 다그쳤다.
  “성민이의 미래를 위해서예요. 좀 더 교육 환경이 좋은 데로 가서 교육을 시켜야…….”
  나는 결단코 반대를 했다. 성민이는 아직 부모 곁에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며칠 간 설득하다가 나의 태도가 완고해서 힘에 겹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아내는 의외의 지원군을 데리고 왔다. 바로 처남이었다.
  “저도 귀여운 조카를 다른 나라로 내보낸다는 건 반대합니다. 하지만 이건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하니까……. 때마침 시기적절하게 저도 뉴욕 지점으로 전근 발령이 났습니다. 매형, 누님과 조카는 제가 보호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처남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무술을 좋아해서 태권도와 유도가 모두 검은 띠이다. 그와 아내의 설득에 굴복한 나는 알았다며 일어서면서 수속할 서류를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며칠 동안 나는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근처 구청을 찾아서 여권 3개를 만들고 출국 서류를 알아보았다. 그로부터 3개월 뒤에 세 사람은 미국으로 출국했다. 공항에서 배웅을 하고 돌아서는 나는 많이 오가는 인파들 속에서도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느낌이 들었다. 이제 집에 돌아가면 혼자 있게 될 것이다. 그게 무서워졌다.
  몇 개월 동안은 오히려 홀가분했지만 점차 어둡고 텅 빈 집에 들어가는 게 싫어졌다. 일에 빠져 들기도, 새로운 취미 생활도 가졌지만 효과는 몇 개월뿐이었다. 공부를 잘 하지 못해서 속을 썩이기는 해도 아들의 웃음이, 가끔 바가지를 긁긴 해도 아내의 살내음이 그리웠다. 그때 소피아와 만났다.
  밤에 동료들과 먹자골목에서 가진 술자리에서 처음 마주쳤다. 그때 옆자리에 러시아 여자 세 명에 한국 여자 한 명이 앉았었다. 러시아 여자들은 한국 여자가 가르쳐 주는 대로 삼겹살 쌈 싸먹기에 도전하고 있었다. 상추에 참기름을 살짝 찍은 익은 돼지고기를 올려놓고 된장을 조금 올려놓는다. 여자가 파와 마늘이 더해져야 진정한 쌈의 완성이라고 하지만, 나중에 도전하라면서 일단 마늘을 빼주었다. 상추와 삼겹살만 넣은 쌈은 우물거리면서 잘 먹었지만 파와 마늘이 더해진 쌈을 먹을 때는 울상을 가득 지었다. 나와 동료들은 그 모습이 우스워서 소리 낮춰서 킬킬거리며 웃었다.
동료 한 명이 호기심에 쌈에 대해 가르쳐 주겠다면서 한 여자에게 집적댔다. 여자가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러시아어로 뭐라고 짜증 섞인 듯이 중얼거리니까 멋쩍은 표정으로 작은 목소리로 욕설을 섞어가며 중얼거리며 물러섰다. 나도 러시아어를 몰랐지만 같이 앉은 한국인 여자가 러시아어도 할 줄 알아서 통역을 해준 모양이다. 여자가 벌떡 일어나서 러시아 어로 따지고 들었다
  “이 여자가……. 너 로스께냐? 한국에 왔으면 한국말로 해!”
  나는 중간에 끼어들어서 말리려고 했다. 한국 여자를 쳐다보았는데 그녀는 다행스럽게도 통역을 할 줄 알았다. 잘 됐다 싶어서 “외국인에게 한국의 친절과 맛을 알려주고 싶어서 그랬는데, 고의가 아니니 결례를 용서해 달라.” 는 말을 통역해 달라고 청했다. 통역을 들은 러시아 여자는 표정이 누그러졌다. 화해의 표시로 동료와 악수를 했고, 우리는 테이블을 붙이고 동석했다. 그중 한 명이 소피아였다. 톨스토이의 문학을 좋아하고, 혼자 지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나와 그녀는 친해지게 되었다. 소피아는 한국에 온지 1년여 밖에 되지 않아서 말은 아직 서툰 감이 있었다. 가끔 만나서 한국어를 가르쳐 주면서 얼굴을 맞대다보니 나는 소피아에게 끌리고 있을 느꼈다. 그녀는 미인이었고, 마음씨도 고운 것 같았다. 나와 그녀의 사이를 친구에서 꽁꽁 묶어 놓은 것은 내가 아내와 아들이 있다는 유부남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와 소피아의 사이가 점차 가까워지고 손도 잡고 걷고 있다는 데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솔직하게 소피아에게 이야기 했더니, 그녀는 “걱정 말아요. 나에게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에요. 특별한 친구.” 하고 말했다.
듣고 나서는 섭섭한 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마음이 편해졌다.
  하루의 업무 중에 휴식 시간을 가질 때에 메일을 확인하고 있는데,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이라고 쓰인 메일이었다. 바로 아내의 것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열어보았는데, 나타난 아내의 메일을 읽은 나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학에 한국으로 가지 못할 것 같아요. 성민이가 미국 친구들과 여기저기 놀러 다니는 데 재미를 들렸어요. 그리고 생활비가 다 떨어져 가요.

  500만원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는 휴대 전화를 쥐고 있었고, 손가락은 국제 전화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드디어 아내와 전화가 연결되었다. 거리 탓인지 몰라도 목소리가 피곤하게 들렸다.
  “여보세요. 당신이에요?”
  “응. 나야. 잘 지냈지? 성민이는?”
  “지금 학교에 있어요. 거의 올 때가 되었네요.”
  나는 용건을 말했다.
  “성민이 한테 잘 말해봐. 당신과 성민이를 정말 보고 싶어.”
  “당신 아들은……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아서 미국에 머물러 있고 싶어 해요.”
나는 중얼거렸다. “왜 그러니. 아들아. 아빠가 보고 싶지 않은 건가?”
  “왜 아니겠어요. 성민이도 당신을 보고 싶어 해요.”
  “차라리 내가 갔으면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거 알지? 내가 책상을 비우면 모든 게 끝이야.”
  아내의 대답은 한참동안 들려오지 않았다. 내가 애가 타는 목소리로 몇 차례나 부르고 나서야 일정 조절을 해보겠다고 아내가 대답했다. 나는 그러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한 번에 밀려왔다.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신입사원이 검토를 부탁하러 왔다가 겁을 먹고 물러섰다. 나는 뭘 그리 겁을 먹느냐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사원 손에 있는 서류를 빼앗듯이 낚아챘다. 나는 기획안을 살펴보고는 좋다면서 사원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고 뒷걸음질을 치면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만일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다면 황소 같은 울음으로 서럽게 울었을 것이다. 나는 휴대 전화를 들어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소피아에게 이었다. 오늘 만나서 술 한 잔 하자고 했다. 얼마 뒤에 답신이 돌아왔는데, 맹연습 중이라서 힘들 것 같다며 상황을 봐서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싸매었다.

  술이라도 퍼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그날은 자주 있던 회식이 없었다. 동료들은 바쁜 약속이 있다며 퇴근했고, 나는 홀로 덩그러니 퇴근길에 올랐다. 돈 문제부터 해결해 볼 생각으로 은행에서 24시간 운영하는 ATM 기기 앞으로 걸어갔다. 카드를 넣으려는데, 문득 손이 멈칫했다. 자신과 이 기계를 번갈아 봤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가족과 정을 나누지도 못하고 돈이나 보내주는 신세가 사람이 요청하면 돈만 뱉어주는 이 기계와 내가 다를 바가 무엇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길로 호프집에 가서 홀로 앉아 맥주를 마셨다. 알딸딸하게 취할 즈음에 누군가가 옆에 다가왔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소피아였다. 나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연습 있다더니. 다 끝나고 온 거예요?”
  소피아는 연습 마치고 왔다면서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사람은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바쁠 때가 가장 좋을 때라고, 근면이 가장 좋은 미덕이라고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소피아는 맥주를 주문하고 내 말을 다 들어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 혼자만 술에 취해 잔뜩 떠들었다. 맥주는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소피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껏 나 혼자서 계속 떠들었네. 괜찮으신가요?”
  “물론이죠. 계속 더 해보세요. 생각보다 철학적이네요.”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랐던 나는 가장 비싼 안주를 주문했다. 그렇게 소피아와 대작을 해가면서 술을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나는 또 필름이 끊겨버렸다.

  나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나는 집 침대 위에 홀로 누워 있었다. 침대 옆 화장대에는, ‘나 출근해요.’ 이라는 문구가 빨간 립스틱으로 쓰여 있었다. 그녀의 장난에 나는 피식 웃고는 걸레를 가져와서 박박 문질러 지웠다.
  거실로 나가보니까 아침 식사로 자른 호밀 빵과 러시아식 수프가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식탁 앞에 앉아서 딱딱한 호밀 빵을 수프에 적셔 먹었다. 수프는 소금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짜다.” 하고 중얼거렸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고 나서 달력을 보고 나서야 빨간 날이라서 직장이 쉬는 날임을 알았다. 오랜만에 가지는 한가한 시간이다. 소파에 앉아 무엇을 할지 생각하다가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김조현 씨 되십니까?”
  여자의 목소리였다. 누구냐고 물었다.
  “저는 소피아가 소속된 팀의 매니저입니다. 잠시 ○○병원으로 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소피아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들어보니 연습 도중에 세트로 있는 전등이 떨어져서 이마에 직격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서 대충 옷을 꿰어 입고 입원했다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에 가보니까 소피아가 부상 입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3개월 뒤의 큰 행사가 멀지 않았다면서 침대에서 일어나지는 못해도 팔은 움직일 수 있다면서 팔을 열심히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건강해 보였다. 의사는 체력이 좋은 편이라서 머리만 다치지 않았다면 당장에라도 퇴원이 가능하다고 소견을 말했다.
  “혹시 이상이 있을지 모르니까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합니다.”
  나는 보호자 자격으로 소피아의 입원 수속을 처리했다. 병실로 돌아와 보니까 그녀는 병실의 환자들 ―모두 중년 남녀나 나이든 노인들이었다.― 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막에 내놓아도 잘 살아갈 사람일 것이다. 나는 소피아 옆에 두어 시간 있어 주었다. 내가 집으로 간 건 미국에서 왔다는 편지를 가져온 집배원의 문자 메시지를 보고 나서였다.

  한달음에 달려간 나는 서류 봉투 한 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안에는 아내와 아들, 처남이 찍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사진을 보던 중에 나는 아내와 아들이 현지인 가족들로 보이는 네 사람과 찍은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남편은 구레나룻을 기른 큰 덩치의 사내였고, 아내는 정숙해 보이는 여자였다. 그들 앞으로 두 남녀아이가 맑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고 있었다. 몇 장의 시선을 더 넘겼다. 내 손이 멈췄다. 아내와 젊은 백인 남자, 아들이 함께 교정인 듯한 장소를 배경으로 한 사진이 찍혀 있었다. 뒤를 보니까 ‘Bob 선생님과 아들과 함께. 학교에서.’ 이라고 쓰여 있었다. 사진을 본 순간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역겨운 느낌이 있었다. 구토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면 니글거리는 속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해질 것 같았다.
  사진을 다 본 다음에 봉투 안을 더 들여다보았다. 나는 몇 장의 종이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것들은 앞으로 성민이의 공부에 대한 방향과 진학할 대학, 장래 직업에 대한 세밀한 계획서였다. 마지막장 말미에 앞으로 이렇게 나갈 계획이니까 당신의 생각을 보내달라는 아내가 직접 쓴 문구가 있었다. 나는 이 메일로 내 생각을 보냈다. 공부 스케줄이 너무 팽팽한 것 같으니까 조금 느슨하게 하고, 대학 진학까지는 말리지 않겠는데, 직업은 성민이가 나중에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고 기다리는 게 좋을 거라는 내용으로 보냈다. 아내에게서 답신을 받은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답신 잘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성민이의 교육 방침을 정했어요. 나는 계획서에 쓴 대로 하고 싶어요. 그리고 Bob은 나의 교육 방침을 지지해 줍니다.

  마치 자기 의견을 지지해주지 않으면 나를 버리고 Bob이라는 남자에게 갈 것 같았다. 나는 당황해서 한참동안 한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다. 화가 치밀었다. 내가 어떻게 등골 빠지게 일해서 만리타향에 있는 아내와 자식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데, 이제 와서 나를 버린단 말인가. 분을 누를 수 없는 나는 즉시 따지는 내용의 이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가족이 떨어져 있으면서 힘들게 일해서 돈 보내준 것과 나중에는 홀로 지내며 계속 기다린 외로움을 호소했다. 아내에게 답신이 온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성민이와도 이야기를 마쳤어요. 우리 아들도 내 계획이 좋다고 말했어요.

  화가 끓어올랐다. 아들은 이제 겨우 초등학생이다. 어린 아이가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는가. 성민이의 직업 선택은 훗날 자신의 몫이니,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 두고 부모인 자신은 뒤에서 지켜보다가 적절한 때에 조언이나 지원을 해주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는 자신의 생각과 달리 하고 있었다. 옆에 있으면 이야기를 해서 의견을 조율할 텐데 떨어져 있으니 그럴 수가 없다. 전화세가 비싸기 때문에 겁이 나서 잘 걸지 않던 국제 전화를 걸기 위해 수화기를 들었다.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아무리 떨어져 있다지만 어떻게 나한테 상의 없이 이럴 수 있지?”
아내가 대답한다.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어서 그랬어요,”
  “훗날 성민이가 중고등학교 즈음에 자신의 자아를 깨닫고 어머니가 정해준 길에 반항하는 걸 생각해 보기나 했어? 성민이 길은 성민이에게 맡겨 두는 게 좋아.”
  “그때는 늦을 수도 있잖아요? 나는 하루 빨리 길을 정해서 가게 해주려는 것뿐이에요.”
  “늦지 않아. 전혀 늦지 않아. 너무 빠르면 부작용이 올 수도 있어.”
  아내가 자신의 뜻을 굽히려고 들지 않자 나는 최후의 카드를 빼들었다.
“만일 자기 뜻만 내세운다면, 나는 부쳐주는 돈을 겨우 먹고 살 수준으로 조정할 수 있어.”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협박이었다.
  그러자 아내가 대답한다. “저 역시 이쪽에서 먹고 살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떨리는 목소리로 Bob의 이름을 말하자 아내는 맞았다고 대답했다.
  “네. 그가 제게 진지하게 사귀자고 이야기를 꺼냈어요.”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번 달은 종전처럼 부쳐주지. 한 번 생각해 봐.”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소파에 앉아서 홀로 생각에 빠졌다. 저녁이 되고 어두워졌을 때도 나는 불을 켜지 않았다. 그대로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대로 아침까지 뜬 눈으로 지새웠다.
나는 충혈 된 눈으로 아침도 거르고 출근했다. 사원들이 어찌된 거냐고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나는 약간 짜증스런 어투로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고 나서 내 자리로 향했다. 나는 부하직원들을 불러서 어제 맡겨 놓은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작년도 자료 정리 말씀이시군요. 곧 끝나갑니다. 1시간 내로 가져오겠습니다.”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멍텅구리 같은 놈! 간단하게 끝나는 것을 내일까지 질질 끌다니! 너 같은 월급도둑이 대체 왜 이 회사에 있는 거야?!”
욕설도 섞어서 퍼붓자 사원들이 나를 쳐다본다. 나는 더 소리를 질렀다.
  “45분 내로 가져와! 그렇지 않으면 보고해서 인사고과에 불이익이 가도록 하겠어!!”
  나는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화를 풀기 위해 희생양을 찾아 눈을 번득였다. 그걸 알아차렸는지 누구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내가 엄한 다른 사람들에게 화풀이나 하는 속 좁은 사람인가 하는 자책감과 미안한 마음이 잠깐 들었지만 이내 미간이 찌푸려지고 주먹이 꽉 쥐어졌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는 한 사람이 난간에 기대어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힘들어서 쉬고 있는 사람인가 보다 하고 마시고 싶은 자판기 커피나 뽑으려고 자판기 앞으로 다가가는데, 별안간 남자가 난간 위로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남자를 향해 달려갔다.
  “무슨 짓입니까?! 왜 뛰어내리려고 하는 겁니까?!”
  남자가 느리게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보았다. 순간 흠칫해서 손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초췌한 표정의 중년 사내는 눈동자가 죽어 있었다. 그래서 산송장처럼 보였다. 남자는 말없이 팔을 흔들어서 내 손을 떨쳐냈다.
한 남자의 죽음을 목격한 뒤로 나는 심적 피폐함을 겪었다. 며칠 뒤에 소피아가 병원에서 퇴원한다고 하기에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직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지만 그녀는 활기차 보였다.
  “나, 요양하러 고향에 한두 달 동안 갔다 올게요.”
  나는 울먹이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여기 있어주면 안되겠어? 한국에서도 요양은 할 수 있잖아.”
  너무나도 섧게 울면서 붙잡기에 소피아는 당황하면서도 아버지, 어머니가 기다리신다며 한사코 뿌리치며 나흘 뒤에 간다고 했다. 그녀가 거처로 돌아간 뒤에 나는 한동안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아내와 아들이 떠난 뒤로 내가 정신적으로 의지가 되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한두 달 뒤에 돌아온다고 했지만 멀리 있는 러시아라서 꼭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소피아가 만드는 대로 러시아 식 수프를 만들어 보았다. 재료를 넣고 끓이다가 간을 해서 접시에 담았다.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은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소피아가 만들어 주는 것보다 짰다.
  “소금을 적당히 넣은 것 같았는데…….”
  수저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갑자기 서글픔이 확 밀려왔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물이 손 아래로 흘러 내렸다.
아침이 되어 화장실 거울을 본 나는 멍하니 있었다. 하루 밤 사이에 얼굴이 늙어 있었다.
  나흘 후에 소피아를 배웅하러 그녀를 태우고 공항으로 갔다. 가장 친한 동료 2명이 함께 했다. 다른 때와는 소피아와는 한 마디도 없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소피아에게 줄 것이 없음을 깨달은 나는 잠시 앉아있으라고 하고 나서 근처에 있는 ATM 기기를 찾았다. 기기에서 돈을 얼마간 인출한 나는 그걸 달러로 바꿔서 곱게 봉투에 담아 돌아와서 소피아에게 건네주었다.
  “얼마 되지 않지만 여비에 보태 쓰도록 해요.”
  소피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다가 쭈뼛거리며 손을 내밀어 봉투를 받아들며 감사를 표했다. “언제나 당신의 호의에는 감사하고 있어요.”
이윽고 모스크바로 출발하는 비행기가 곧 이륙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나는 마지막으로 소피아를 꼭 끌어안고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소피아도 알았다고 응답했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캐리어를 질질 끌고 게이트 너머로 향했다.
활주로가 보이는 곳으로 가서 내려다보았다. 넓은 아스팔트 위를 비행기 한 대가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저기에 타고 있겠지. 이윽고 비행기가 떠오르더니 이내 하늘 저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서 비행기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무도 없어서 을씨년스러운 집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집에 사람 사는 것 같은 온기를 더해주던 사람마저 떠나 버렸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곰곰이 생각했다. 이 집에 다시 사람이 사는 것 같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 가?
  그로부터 나는 며칠 동안 출근도 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전화통에 불이 나도록 전화가 왔지만 나는 열 번이 넘었을 때부터 전화선을 뽑아버리고 받지 않았다.
급기야 회사 동료들이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고, 벨을 눌렀지만 나는 나가지 않았다. 며칠 후에 의외의 인물까지 찾아왔다.
  “조 팀장은 거기에 있나? 나 사장일세!!”
  사장까지 예까지 찾아왔다. 원래 기행적인 행동으로 이름이 나 있는 사람이지만 일개 팀장의 집까지 왕림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여가면서 현관 앞까지 가서 렌즈를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예닐곱 쯤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문 앞에 진을 치고 서 있었다. 계속되는 쓸쓸함에 지쳐버린 나다. 맞아들이고 싶었지만 창피해서 그럴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집에 틀어박혀 있어 봤자 자네만 손해야. 어서 이 문을 열어봐!”
  신경 쓰지 말라고. 잠시 이대로 더 있고 싶다고 외쳤다. 하지만 사장은 원하는 대로 떠나주지 않았다.
  “그렇게 틀어박혀 있다고 해서 무슨 일이 잘 될 것 같나? 안에 있기만 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나?!”
  한참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아파트 문이 삑 하는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나는 얼굴을 차마 다 들지 못하고, “들어오시죠.” 하고 말했다. 사장 이하 동료들은 내 집으로 거리낌 없이 활개를 치면서 당당하게 들어왔다. 그들이 들어오면서 한 첫 마디는, “집 안이 왜 이렇게 우중충해? 혼자 지내는 거 티내나?”
하면서 거실 커튼을 열어젖힌 건 서운전 팀장이었다. 그는 목이 마르다면서 부엌에 있는 정수기로 걸어가서 물을 한 컵 벌컥벌컥 마셨다. 사장은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손님이 오셨는데, 내 오는 게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커피 믹스라도 탔다. 뜨거운 물을 잔에 붓고 휘휘 저어서 가져갔다. 사장은 한 모금 마시더니 얼굴을 확 찡그렸다.
  “으, 역시 커피는 원두커피가 최고지. 안 그런가, 부장?”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커피는 갓 내린 원두로 마셔야 참맛을 느낄 수 있지요.”
이럴 때면 부장의 턱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나는 꾹 참고 소파에 앉았다.
  “그래. 무슨 일 때문에 회사에를 며칠씩이나 나오지 않은 건가?”
나는 머뭇거리다가 사장이 몇 차례나 재촉하고 나서야 자초지종을 말했다.
  “으음……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뭔가 해야겠는데, 무척 개인적인 일이로군.”
  사장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흔들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내게서 신경을 돌릴만한 유희를 제공하기 위해서 카드와 담요를 가져왔다. 그리고 TV를 틀어주었다. 마침 인기 가수가 나와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하고 있었다. 그들은 금방 거기에 빠져들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여 가며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을 닫을 때까지 그들은 내가 나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역시 나에게 진심으로 관심이 있던 건 아니었군.” 하고 중얼거리며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내 주머니에 있던 자동차 키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평소 출근용 바지에 넣어두던 열쇠가 집에서 아무렇게나 입는 반바지에 들어있는 건 무슨 이유일까? 그리고 내 발길이 내 차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건 무슨 까닭일까? 차 앞에 멈춰선 나는 손에 든 열쇠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차에 타서 어디론가 떠나라는 계시일까. 그렇게 생각도 해보았다. 고민하다가 나는 눈을 감고 열쇠의 자동 버튼을 눌렀다. 짤깍! 하는 소리를 내면서 문의 잠금이 풀렸다. 손잡이를 잡고 당겨보니까 스르르 열렸다.
  나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액셀을 밟으니 스르르 움직였다. 그대로 핸들을 틀어서 고속도로로 통하는 길을 탔다.
그대로 미친 듯이 액셀을 밟아서 100km가 넘는 속도로 달린 끝에 내가 도착한 곳은 서해안의 이름 모를 도로였다. 한적한 곳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내렸다. 찬 밤바람이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차를 둔 채로 바닷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물이 밀려오는 곳까지 오자 신발을 벗어놓고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짜고 시원한 물이 쓸려가면서 모래들이 발가락 사이를 간질였다. 여태껏 삶과 일에 치여 사느라 미처 모르고 지냈던 자유로움을 다시 알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코로 바닷바람을 들이켰다. 바지를 걷고 무릎이 오는 데까지 들어가서 두 손으로 물을 가득 떴다. 내려 보다가 앞에다 홱 뿌렸다.
  나는 더 깊이 들어갔다. 바닷물이 아랫배를 적셨다. 그때 윗주머니에 넣어둔 휴대 전화 벨이 울렸다. 열어보니까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아들에게서였다.

  아빠, 나예요. 잘 지내셨어요? 저랑 엄마는 잘 지내고 있어요. 다름이 아니라 전 보이 스카우트에 참여하고 싶어요. 아빠 허락해 주실 거죠? 그리고 참, 읽고 싶은 책이 있어요. 그런데 엄마는 사주지 않아요.

  나는 그 길로 바다에서 나와서 가까운 은행을 찾았다. 30여분을 돌아다닌 끝에 간신히 기기가 운영 중인 무인 은행을 찾을 수 있었다. 기계 앞에 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카드를 넣고 미국 은행 계좌 번호를 눌렀다. 잠시 후에 돈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고 나는 중얼거렸다. “내겐 네가 희망이란다. 꼭 큰 인물이 되어다오.”
송금을 마치고 나오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는 하늘에 대고 크게 웃었다. 마침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마음 놓고 목이 찢어져라 웃어댔다. 눈물이 흐르고 침이 땅을 적실 정도로 웃었다. 한참동안 웃고 나서 나는 일어서서 걸어갔다. 힘없는 걸음으로나마 어둠 속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ATM 끝―
언어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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