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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놀라운 배우들

2011.07.16 10:2707.16

박수소리와 함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자, 극장 천정에  노란 미등이 군데군데 들어왔다. 맨 뒷줄에 앉은 두 사람은 관객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다리를 꼬고 앉은 민 사장은 미간을 찡그린 채 발끝을 까닥거렸다. 지나는 그런 그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스크린 프로젝트가 완전히 꺼지고 극장직원이 청소를 하기 위해 들어왔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녀는 말없이 그를 따라 나갔다.
그들은 주차장에서 구형 렉서스를 빼 도로로 나왔다. 평일 늦은 시간이라 도로는 한산했다. 두 사람은 차를 타고 가면서도 서로 말이 없었다. 그는 운전을 하면서도 아직 생각 중이었고, 그녀는 얼굴을 창 쪽으로 돌리고, 핸드백에서 손거울을 꺼내 자신의 오똑한 코를 조심스레 비춰보고 있었다. 그리고 손거울을 다시 핸드백에 집어넣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영화 어땠어요?”
“괜찮은 거 같아.”
그가 왼쪽 깜빡이를 넣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깜빡이 소리가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여자 주인공 역할 제가 했으면 어땠을까요?”
“괜찮았겠지.”
그는 여전히 다른 곳에 있었다.
“오늘 기운이 별로 없어 보여요.”
그녀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차는 내려져 있는 부직포를 밀고 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벌거벗은 두 사람은 달아오른 몸을 식히며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조그만 모텔 방은 메케한 연기로 가득 찼다. 지나는 담배를 비벼 끄고, 손가락으로 민 사장의 거뭇한 젖꼭지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천정을 올려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상해.”  
“응?”
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남자 주인공.”
그가 그녀와 눈을 마주치면서 말했다.
“남자 주인공?”
“아까 본 영화. 남자 주인공말이야.”
“아, 근데?”
그녀는 그와 침대에 누워있을 때 늘 그러듯 은근슬쩍 반말로 되물었다.
“그 친구 우리 회사에 있었어.”
“정말?”
“나하고 대학동기이기도 하고…….”
그녀는 옆으로 누운 채 손바닥으로 자신의 머리를 받치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 친구 어때? 연기 말이야.”
“연기……? 잘하던데요.”
그녀는 직업적인 질문에 저도 모르게 다시 말을 높였다.
“내가 볼 때는 그냥 잘하는 정도가 아니야. 아마 올해 신인상은 물론이고, 잘하면 남우주연상까지 받을지도 모르겠어.”
“왜 그런 배우를 놓친 거예요?”
그녀는 그를 힐난하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말했다.
그는 라이터를 집어 들어 그녀에게 불을 붙여주고, 자신도 한 개비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 친구, 우리 회사에서는 10년 동안 단역 배우였어. 주연은 고사하고 조연 한 번 해본 적 없었지.”
“그럼 소속사 옮겨서 완전 용 됐네.”
그녀는 장난치듯 웃으려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 금방 정색했다.
“내가 이 바닥에 들어선 지 12년이야. 내가 그동안 무슨 수로 버텼겠어? 젊었을 때 연기도 해봤고, 제작사에서 PD로 일도 했지. 보는 눈은 있다는 말이야.” 그는 담배가 필터까지 타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말을 이었다. “그 친구 저 나름대로 열정은 있었겠지만, 재능 있는 연기자는 분명 아니었지. 솔직히 말해서 친구가 아니었다면 회사 입장에서는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어.”
“우리 회사에서 언제 나갔어요?”
“작년 11월.”
“음……, 4개월 정도? 그동안 무슨 연기 특강이라도 받은 걸까요?”
그녀가 스스로에게 묻듯 중얼거렸다.
“연기는 운전처럼 배운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럼 4개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내 말이.”
“뭔지 모르지만, 나한테도 그런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녀는 귀여운 척 혀를 조금 내밀었다.
“아니야. 넌 지금이면 충분해.”
그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넌 유명해 질 거야.”
두 사람은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는 뜨거운 호빵을 만지듯 그녀의 800만 원짜리 코젤 가슴을 조심스럽게 애무했다.

그는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다. 건물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그는 지나에게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왔다고 생각했다. 지나는 연기를 시작한지 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동안 영화 두 편과 드라마 한 편에서 단역으로 출연한 것이 경력의 전부였다. 그나마 출연작들에서 강한 인상을 남기지도 못했던 그녀에게 주연 배우 오디션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그에게는 안 봐도 뻔 한 상황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는 9층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하늘색 실크 넥타이를 더 조였다. 사실 이번 기회는 지나 뿐 아니라, 그에게도 간절했다. 그의 회사, 골든 미디어는 최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얼마 전, 2년 동안 끌어왔던 소속 여배우와의 소송에서 지면서 거액의 배상금을 물게 되었다. 돈도 돈이지만, 재판 진행 중에 덤으로 얻은 ‘소속 연예인의 등골의 빼먹는 기획사’라는 이미지가 더 큰 타격이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예인 스폰서와 노예계약에 대한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까지 받게 되었다. 이런 여파로 일부 소속 연기자들과의 재계약 여부도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그가 노크를 하려고 할 때, 문손잡이가 돌아갔다. 한 남자가 안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남 PD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문  틀을 사이에 두고 잠시 마주 보았다. 순간 민 사장은 불쾌한 기분을 느꼈지만, 당시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깡마르고 키가 큰 그 남자는 헐렁한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은 이마 뒤로 빗어 넘겼는데, 숱이 없어서 허연 두피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젖빛 피부에 얇고 긴 입술은 거의 보라색에 가까웠고, 길쭉한 코는 한 쪽으로 휘어있었다. 그리고 올림픽 기념주화만큼이나 커다란 두 눈은 심슨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툭 튀어나와 있었고, 유난히 작아 보이는 암갈색의 눈동자는 꼭 누가 흰자위에 찍어놓은 점처럼 보였다. 전체적으로 기괴한 인상이었다.
무표정한 두 점, 그것이 민 사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민 사장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그는 몸을 틀어 왕 눈이 지나갈 만큼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그의 내면에서 희미한 굴욕감이 피어올랐지만, 그는 그것을 애써 매너로 위장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왕 눈도 이 사이가 벌어진 보기 흉한 치열을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기다란 사지를 흐느적거리며 복도로 걸어 나갔다.
남 PD는 책상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민 사장은 그와 말없는 눈인사를 주고받고 소파에 가서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식은 커피가 반 쯤 담겨 있는 커피 잔 두 개와 종이 뭉치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맨 위장에는 이렇게 인쇄되어 있었다.

가제 : 의처증 / 오디션 대본

그는 대본을 집어 들고 소리 없이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남 PD가 통통한 손을 내밀며 다가왔다.
“아닙니다.”
민 사장이 대본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일어서서 남 PD와 악수했다. 남 PD는 테이블 위의 커피 잔을 치우고, 사무실 구석에 놓인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 두 잔을 새로 뽑아 왔다.
“바로 그겁니다.”
남 PD가 그에게 커피를 건네면서 말했다. 민 사장이 다시 대본을 집어 들었다.
“전화로 말씀드렸다시피…….” 남 PD가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올 여름 개봉할 공포영홥니다. 연출은 최 감독으로 정해졌고요.”
남 PD가 커피 잔으로 가리키자, 민 사장이 대본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는 잠시 대본을 만지작거리다 말을 꺼냈다.
“그럼 지나는 최 감독이…….”
남 PD가 중간에 말을 끊었다.  
“아닙니다. 연출은 조금 전에 결정됐습니다.”
남 PD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어깨 너머 책상을 가리켰다.  
“그럼?”
“지나 씨는, 이번에 운이 좋았어요. 아니, 그렇다고 지나 씨가 실력이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흠.”
남 PD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민 사장에게 건넨다. 그는 민 사장의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자기도 한 개비 꺼내 물었다.
“이번 영화 투자사에서 지나 씨를 좋게 보고 있습니다.”
“그래요? 어디 투자삽니까?”
“부·광·픽·쳐·스.”
남 PD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천정으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한자, 한자를 또박또박 뱉었다. 민 사장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쾌재를 간신히 억눌렀다.
“그렇군요…….”
“오디션은 다음 주 금요일에 할 건데, 괜찮겠죠?”
“일주일. 그 정도면 충분하네요.”  
“그리고…….”
남 PD가 잠시 뜸을 들였고, 민 사장은 기다렸다. 이봐, 뭘 그렇게 꾸물거리는 거야. 한두 번 장사하는 것도 아니면서.
“오디션 후에 곧 바로 촬영에 들어갈 거라서…….”
이번에는 민 사장이 남 PD의 말을 끊었다.
“그럼 투자사 대표님께 인사라도 드리려면 서둘러야겠네요.”
“그래서 말인데, 대표님이 내일 밖에 시간이 없다는 군요. 모레 외국에 나가실 일이 있으셔서…….”
남 PD가 커피 잔에 담배꽁초를 집어넣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흰 종이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민 사장은 대본 사이에 봉투를 끼워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겉치레 인사말을 나누고 사무실을 나서던 그는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그런데 조금 전에 나가신 분은……?”
“아참, 제가 깜빡했군요. 하하. 이번 영화 남자 주인공 매니접니다.”
“남자 주인공은 누가 합니까?”
“강 휘종 씨요.”

마치 수입차 전시장 같았다. 드문드문 고가의 국산차도 끼어 있었다. 민 사장은 벤츠와 아우디 사이에 빈자리를 찾았다. 렉서스가 그 사이로 조용히 미끄러져 들어갔다. 주차 등의 점멸.
그러고도 10분이 지났지만, 지나는 아직 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새하얀 블라우스에 무릎길이의 검은색 치마 정장차림이었다. 목에는 소라색 스카프를 두르고, 머리는 깨끗하게 뒤로 빗어 망을 씌운 쪽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가 마음에 안 드는지 손거울을 들고 쪽진 부분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스튜어디스 같았다. 몇 달 전, 드라마에 출연했을 때 연기한 바로 그 스튜어디스.
민 사장은 대시보드에 박힌 디지털 액정을 보았다. 6시 45분이었다. 정시에 도착하려면 늦어도 10분 전에는 출발해야 했다.
“늦겠어.”
민 사장이 말했다.
지나는 손거울을 백에 집어넣고 등을 뒤로 기댔다.
“조금만 있다가요.”
“늦어서 좋을 건 없어.”
“알아요…….”
그녀는 차창 밖에 세워진 아우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꾸했다. 그는 그녀의 매끈한 다리위로 손을 뻗어 글러브 박스를 열고 종이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봉투에서 은색 카드키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받아.”
그녀는 말없이 카드키를 받았다.
“2017호.”
그가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한 숨.
“이게 마지막이겠죠?”
“…….”
다시 한 숨.
“이제 올라가야 돼.”
“담배 하나만 피우고 갈게요.”
그가 입술에 힘을 주고 고개를 저었다.
“네, 네.”
그녀가 졸린 눈을 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녀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는 걸 보았다. 축 쳐진 어깨와 리듬감 없는 구두 굽 소리가 그녀를 해고당한 스튜어디스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엘리베이터가 실직자를 싣고 스위트룸으로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 차에 시동을 걸었다.

                                        ‘에티켓을 지켜라’ 신들린 흥행몰이
                                                      무명들의 반란
지난 17일 개봉한 하 진남 감독의 저예산 스릴러 영화 ‘에티켓을 지켜라’가 개봉 당일 6만 관객으로 흥행 이변을 예고하더니, 결국 개봉 2주 만에 전국관객 200만을 돌파했다.
이 영화의 신들린 흥행은 오랜 기간 무명이었던 두 남자가 이끌고 있다. 바로 감독 하 진남과 주연 배우 강 휘종이다. 하 감독은 조 감독 10년 동안 차근차근 쌓아 온 내공을 바탕으로 섬세하며 신인답지 않은 안정 된 연출력으로, 10년 동안 단역 배우였던 강 휘종은 관객들이 영화를 실제라 착각할 정도의 사실적인 연기로 평단으로부터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특히 한 비평가는 시사회 때, 배우 강 휘종의 연기를 두고 한국의 팀 로빈스라고 호평하기도 했다.
‘에티켓을 지켜라’는 연말모임의 초대장이 바뀌면서 기이한 파티에 참여하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잔혹스릴러이면서, 사회비판까지 가미된 날카로운 부조리극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
‘무명들의 반란’이라고도 불리는 이 영화의 흥행레이스가 어디까지 지속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배윤아 기자

민 사장은 신문을 접어 사무실 책상 귀퉁이로 툭, 던지고 창을 향해 의자를 돌렸다. 그는 의자에 몸을 묻고 깍지 낀 손으로 배꼽을 가렸다. 창밖에는 도시의 불빛이 반짝였다.
‘그래, 결국엔 낙숫물로 바위를 뚫었군.’
그는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를 뒤적였다.
친구 그룹에 있는 강 휘종.
잠시 망설이던 그는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통화 연결 음.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국번이오니…….”

오디션 장소는 남 PD의 사무실 옆에 있는 조그만 회의실이었다. 민 사장은 지나를 데리고 10분 전에 그곳에 도착했다. 텅 빈 회의실에는 접이식 철 의자 세 개뿐 아무도 없었다.(그것도 그냥 접힌 채로 벽에 세워져 있었다.) 10분이 지났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의자 세 개를 펴서 벽 앞에 나란히 놓았고, 대본을 말아 쥔 지나는 불안한 듯 방 안을 서성거렸다. 약속시간 30분이 지났을 때, 외출 중이던 남 PD가 돌아왔고,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야 최 감독과 투자사 여직원이 도착했다.
보나마나한 오디션이 25분 정도 진행되었다. 지나가 연기를 하는 동안 투자사 여직원은 고개를 숙인 채 대본만 읽고 있었고, 남 PD는 눈이 반쯤 감긴 상태로 팔짱을 꼈다 풀었다 했다. 그리고 최 감독은 노골적인 느림보 운행을 하는 택시기사를 쳐다보는 승객처럼 뚱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모두들 빨리 끝나기만 바라고 있었다.
오디션이 끝나자, 최 감독은 입술을 모아 앞으로 내밀고 잠시 대본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혼잣말처럼 말을 뱉었다.
“뭐, 어쨌든 잘 해 봅시다.”
어쨌든 잘 해 봅시다? 어차피 데리고 쓸 거면 좀 좋게 말해줄 것이지…….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다. 예전에 다른 신인 배우는 오디션에서 감독에게 이런 최악의 말도 들었다.
‘할 수 없지.’

만만찮던 꽃샘추위가 지나가고, 나른한 봄바람이 불어올 때쯤, 촬영이 시작되었다. 민 사장은 촬영 15회 차가 넘을 때까지 촬영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지나의 스케줄은 박 실장이 대신 관리하고 있었다. 그동안 민 사장은 집사람과 딸아이를 데리고 지방 온천에 다녀왔고, 배상금 문제로 장 변호사를 만나 혹시 쥐구멍이 없나 상의했고, 일간지 기자와 카페에서 간단한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남 PD와 최 감독을 단골 룸살롱에 데려갔고, 지방에서 올라온 18살짜리 연예인 지망생과 모텔에 두 번 갔다.
밤. 서울근교 주택가에서 스텝과 배우들이 16회 차, 야외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민 사장은 장비 차 뒤에 렉서스를 주차했다. 이제 곧 촬영에 들어간다는 조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 사장은 스텝들 뒤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스텝들 어깨 너머로 액션 사인을 기다리는 지나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 휘종이 서 있었다.
“액션.”
지나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주택가를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휘종은 그런 그녀를 뒤쫓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은 계속 달렸다. 그들이 카메라로부터 100M쯤 멀어졌을 때, 컷 사인이 떨어졌다. 박 실장이 달려가 지나에게 슬리퍼를 신겼다. 최 감독은 배우들에게 몇 가지를 주문한 다음 카메라 감독과 잠시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다시 같은 장면을 촬영했다. 액션. 컷. 액션. 컷. 액션……. 12번 만에 오케이가 떨어졌다. 지나는 반복된 뜀박질에 지쳐 보였다. 조 감독이 스텝들을 데리고 다음 장면 촬영 준비에 들어갔다.
“할만 해?”
민 사장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 지나에게 다가가 물었다.
“언제 오셨어요?”
지나가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좀 전에.”
“다리 좀 봐요.”
지나가 자신의 다리를 주무르며 툴툴댔다.
“오셨습니까?”
박 실장이 생수 한 병을 들고 걸어왔다.
“지나다 잠깐 들렸어.”
그 때, 박 실장의 등 뒤로 그가 지나갔다. 기분 나쁜 인상의 그 왕 눈. 그는 휘종을 데리고 밴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지나가 딴 곳을 쳐다보는 민 사장을 보고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민 사장이 대답하며 살짝 웃었다.
“근데, 사장님.”
지나가 불렀다.
“왜?”
“휘종 씨, 연기 정말 잘해요.”
“그래?”
“스크린에서 보는 거와는 또 달라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민 사장은 그렇게 말하며 박 실장을 쳐다봤다.
“내가 알던 강형이 맞나 싶더군요.”
박 실장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너무 비교되는 것 같아요.”
지나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민 사장은 말없이 휘종의 밴을 바라봤다. 여느 연예인의 밴처럼 창이 검게 선팅 되어 있었다.
“오랜 친구에게 인사라도 하고 와야겠군.”
“안 될 걸요.”
박 실장이 말했다.
“뭐?”
“두 사람 다 입에 자물통을 달았는지, 도통 말이 없어요. 최 감독과 가끔 몇 마디 나눌 뿐, 사적인 얘기는 전혀 안합니다. 나도 아는 척 했다가 몇 번이나 무시당했습니다. 참나.”
“저한테도 무뚝뚝해요. 상대 배역인데 말이죠.”
지나가 덧붙였다.
“그리고 촬영할 때 외에는 항상 저렇게 밴 안에 들어앉아 있죠. 둘이서 뭘 하는 건지.”
박 실장이 말했다.
“촬영 들어갑니다. 준비하세요.”
조 감독이 확성기에 대고 말했다.
“계속 계실 거예요?”
지나가 물었다.
“아니, 이제 가봐야 해.” 민 사장이 박 실장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수고 좀 해줘.”
“예, 알겠습니다.”

민 사장은 휘종의 밴 앞을 지나쳐 렉서스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둘이서 차 안에 틀어박혀 뭘 하는 거야? 이상한 놈들.
그가 렉서스에 도착해 차 문을 열려고 할 때,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이봐.”
그가 뒤돌아보았다. 반가운 얼굴이었다.
“오. 안녕하십니까?”
그는 상대가 내민 손을 서둘러 맞잡았다.
“인사도 안하고 가나? 섭섭하게 시리.”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여긴 어쩐…….”
그가 굽실거리며 물었다.
“나, 카메오야.”
“아, 그러시군요.”
정 도진와 함께 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던 배우, 김 영목이었다. 89년, 민 태식이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서 처음 얻은 일이 바로 배우 김 영목의 운전수 자리였다.(얼마 후에 김 영목이 영화계에서 은퇴하면서 비록 오랜 기간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자네는 여기 웬일인가?”  
“여 주인공이 저희 회사 아입니다.”
“아, 그렇구만. 아무튼 만나서 반갑네.”
“그동안 연락을 자주 못 드려 죄송합니다.”
“아닐세. 한 참 바쁠 나이 아닌가?”
“촬영은 끝나셨습니까?”
“끝났네. 이제 갈 참인데, 집사람이 좀 늦구만.”
“그럼, 제 차로 가시죠.”
“그래? 일단 집사람한테 전화 좀 해보고.”
노배우가 통화를 끝내고 말했다.
“그럼 좀 태워주게. 할망구가 딸네 집에 가서 잠이 들었다는군.”  
렉서스가 고속도로에 오르자, 두 사람은 달리는 차 안에서 서로 20년 전 기억들을 미주알고주알 주고받았다. 그러다 톨게이트를 지날 무렵, 노배우가 그 말을 꺼냈다.
“자네 혹시 남자 주인공 좀 아나?”
“예?”
“휘종이라는 친구 말이야.”
또, 연기에 대해 말할 참이군. 그래요. 인정합니다요. 그런 재능을 코앞에 두고 10년 동안이나 몰라봤습니다. 제가 병신이죠! 이제 됐습니…….
“예, 대학 동창입니다만.”
“그래? 그럼 그 매니저도 아는 사람인가?”
알다마다요. 호모새끼 아닙니까? 밴 안에서 배우들 자지나 빨아 주는…….
“한 번 본적은 있지만, 아는 사이는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는지?”
“예전에 알던 사람 같아서…….” 노배우가 말을 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한 번도 못 봐서 기억이 좀 가물가물하지만, 그 남자, 아마도 정 도진이 동생인 거 같군.”
“정 도진이라면?”
“맞네. 60년대 배우 정 도진이지.”
“제가 알기로는 지금…….”
“그래, 전신마비로 누워있지. 오늘 내일 하고 있다네.”
“한 번 찾아봬야겠습니다. 어릴 때 본 그 분 영화가 아직 생생합니다. 물론 선생님 영화도 마찬가지구요.”
“놀라운 배우였지. 연기력만 놓고 보면 난 비교가 안 돼. 당대 내로라하는 감독들이 그와 작업하지 못해서 안달들이었으니까.”
“동생 분도 배우였습니까?”
“아닐세. 그 친구는 정 도진이 매니저였네. 그 당시만 해도 전문적으로 관리해주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으니까. 그래서 가족들이 매니저를 대신하곤 했지.”
눈을 가늘게 뜬 노배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분명 자신의 시대를 떠올리고 있으리라.
“선생님…….”
민 사장이 말했다.
“응? 뭐라고?”
노배우가 눈을 깜빡거렸다.
“정 도진 선생님은 재능이 타고난 분이었습니까?”
“천재보다는 노력파에 가까웠지. 대기만성 형이었네.”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그도 아주 긴 무명 생활을 보낸 배우였어. 고생이 많았지. 극단 때부터 친구였기 때문에 내가 잘 알아. 처음엔 우리 둘 도 늘 단역이었다네.”
“그렇게 계속 노력하다 주연 배우가 되신거군요.”
“아닐세. 그 친구, 중간에 연기를 그만 뒀었어. 아마 62년도였을 거야. 무명 생활에 지쳤는지 어느 날, 술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지. ‘난 재능이 없더군. 이제 그만 둬야겠어.’”
“그래요?
“그런데 그 이듬핸가? 영화판을 떠났던 그 친구가 갑자기 다시 돌아와서 영화 주연 배역을 맡더군. 그리고 기찬 연기를 보여주기 시작하는데, ……뭐랄까, 전혀 다른 사람 같았지.”
“영화계를 떠나 계신 동안에는 무얼 하셨다지요?”
“나도 몇 번 물어 본 적이 있는데, 그 때마다 농담 식으로 에둘러대기만 하더군.”
옛 배우의 성공담을 듣는 동안 어느 새 노배우의 집 앞에 도착했다. 노배우가 차문을 열고 내리면서 말했다.
“이달 말에 정 도진이한테 갈건대, 자네도 생각 있으면 같이 감세?”
“예, 저야 영광입니다.”
민 사장은 노배우를 데려다 주고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차들을 추월해보기도하고 음악을 틀어보기도 했지만, 집으로 가는 내내 두 배우에 대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정 도진, 그리고 강 휘종…….

하얀 침대보가 깔린 매트리스가 들썩 거렸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민 사장의 허리가 요란하게 앞뒤로 움직였다. 양손을 옆으로 뻗어 하얀 이불보를 움켜 쥐고 있는 지나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동그랗게 뜬 토끼 눈이 순간, 꾹 감겼다. 그리고 막혔던 숨이 터져 나오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두 사람은 커다란 월풀 욕조에 누워 있었다. 욕조 가운데서 보글거리는 공기방울 사이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뜨거운 수건으로 눈을 가린 민 사장이 말을 꺼냈다.
“다음 주 화요일이 김 대표 생일이라더군.”
얼굴을 팩으로 가린 지나는 아무 말도 없었다.
보글보글보글보글…….
“가봐야 할 거야.”
그가 말했다.
“그 날 촬영 있어요.”
“괜찮아. 스케줄은 바꾸면 되니까.”
“…….”
“화요일, 11시에 데리러 갈게.”
“아침 11시?”
“아니. 밤.”
“생일파티하기엔 좀 늦은 시간이네요…….”
“비꼬지 마.” 그는 앉아서 눈을 가렸던 수건을 양손으로 비틀어 짜며 말했다. “그런 사람과 줄이 닿는 기회는 흔하지 않아.”
“그럼, 부를 때 마다 가야 해요?”
“당분간은…….”
그녀는 그가 말하는 도중에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멍청한 년. 이런 기회를 잡으려고 기다리는 무명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희종은 욕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조금 열린 문틈으로 눅눅한 수증기가 새어나왔다.
보글보글보글보글…….
그는 한 손에 대가리가 녹이 쓴 망치를 들고, 다른 손으로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의 목젖이 아래위로 움직였다. 꼴깍.
반 쯤 열린 문 사이로 욕조 안에서 말을 타듯 몸을 들썩이는 지나의 등이 보였다. 순간, 흔들리던 그의 눈동자가 굳어졌다. 욕실 문이 활짝 열렸지만, 지나는 누가 뒤에서 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점점 더 크게 신음했다. 타일 바닥을 밟고 선 그는 망치를 든 손이 높이 올렸다. 그의 눈가 근육이 꿈틀거렸다. 절정으로 상체를 뒤로 젖히던 지나는 거꾸로 선 휘종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오케이!”
최 감독의 시원시원한 목소리. 카메라 감독 뒤에 서 있던 민 사장은 담요를 들고 가서 지나의 몸을 감싸주며 말했다.  
“잘했어.”
모친상으로 아침 일찍 지방으로 내려간 박 실장을 대신해서 촬영장에 나와 있던 그는 전기난로 옆에 놓인 의자에 지나를 앉혔다.
“30분 쉬었다가 갑니다.”
확성기.
지나는 불 앞에서도 계속 몸을 떨었다. 그는 담요 한 장을 더 덮어주고, 난로를 더 가까이 붙여 주었다.
연기를 마친 휘종은 최 감독과 다음 장면에 대해 몇 마디 나눈 뒤, 세트장 출구로 걸어가고 있었다. 민 사장이 그에게 다가갔다.
“어이.”
휘종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돌아봤다.
“이제 아는 척도 안할 거야?”
휘종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힘없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혹시 그거 아나?”
민 사장이 허리에 양 주먹을 붙이며 물었다.
휘종은 팔뚝 안쪽을 손으로 긁으며 말없이 서 있었다.
“자네가 기획사를 옮길 때, 우리 회사와 계약 기간이 조금 남아 있었어. 3일 인가? 그럴 거야. 이중계약이지. 법적으로 명백한 위반이라네.”
민 사장이 미소를 띤 채 말했지만, 휘종은 반복적으로 팔만 긁적거릴 뿐, 반응이 없었다.
“농담이네.”
민망해진 그는 웃으며 괜히 휘종의 팔을 툭 쳤다. 그리고 그 때, 휘종이 긁던 팔뚝 언저리를 가리고 있던 소매가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휘종은 손을 바꿔 반대쪽 팔을 긁었다. 그 쪽도 희미하긴 하지만 군데군데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도 분장이야?”
민 사장이 휘종의 팔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 때, 세트장 출입구에서 왕 눈이 둘을 향해 흐느적흐느적 걸어왔다.
“무슨 문제라도?”
왕 눈이 둘 사이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오며 물었다.
‘마치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 왜가리처럼 노려보는군.’
민 사장이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이만.”
왕 눈이 배우를 데리고 세트장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민 사장은 다시 지나에게 돌아갔다. 지나는 스텝이 가져다 준 뜨거운 물이 담긴 양동이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양동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지나가 담요를 여미면서 물었다.
“어때요? 옛 친구는.”
민 사장은 세트장을 나서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음……, 유머감각이 많이 떨어졌더군.”

오전 내내 고속도로를 달려 지방으로 내려갔다. 도중에 노배우가 잠이 드는 바람에 민 사장은 졸음을 떨쳐내려고 보이는 휴게소마다 모두 들러야 했다. 정오가 다 되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은 요지였다. 공기가 맑은 교외지역이면서도, 도심의 대학병원까지는 차로 3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그래서 요양을 요하는 환자들이 많이 찾는 지역이었다.
민 사장은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진입로를 따라 들어갔다. 숲 안에는 단층 흙집이 한 채 서 있었다. 집 오른 편에 작은 텃밭이 있었고, 진입로 끝에는 빨간색 소형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는 소형차 옆에 나란히 주차했다. 그들이 차에서 내리자, 그곳에 상주하는 간병인이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간병인이 두 사람을 방으로 안내했다. 큼지막한 창문 아래에 놓인 의료용 침대에 그가 누워 있었다. 코에 튜브를 끼우고 있는 그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천정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안면은 약간 일그러져 있었는데, 마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40대 주부처럼 보이는 간병인은 창문을 반쯤 열었다. 소나무 향이 섞인 선선한 바람이 방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간병인은 노배우가 가져온 꽃을 받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달린 벽 구석에는 작은 책장 하나가 서 있었다. 그곳에는 다양한 책들과 함께 왕년의 스타가 출연했던 영화의 비디오테이프들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 포스터들이 벽에 붙어 있었다.
노배우 김 영목은 침대 앞에 놓인 등 받침이 없는 작은 의자에 앉아 굳어버린 친구의 손을 잡았다.
“이보게. 자네 팬을 한 사람 데려왔네.”
노배우가 말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민 사장이 목례했다.
침묵.
그리고 노배우는 민 사장이 알아듣지 못할 자기네들끼리의 옛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간병인이 꽃병과 차를 가지고 돌아오자, 두 방문객은 침대 발치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앉아 촌스러운 60년대 영화 포스터들을 감상하며 차를 마셨다. 간병인은 꽃병을 창틀에 놓아두고, 능숙한 솜씨로 환자의 침구를 갈아놓은 후에 다시 방을 나갔다.
두 사람은 다시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노배우는 친구에게 자신이 카메오로 출연한 것에 대해 얘기했다.
“예전에 둘이서 단역으로 함께 출연했던 거 기억나지?” 노배우가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때 난 은행원 2였고, 자넨……, 청원 경찰이었지 아마. 촬영 끝나고 둘이서 쥐꼬리만 한 출연료를 털어서 대폿집에서 소주를 사마시곤…….”
노배우는 말하는 도중에 다시 그 시절로 되돌아갔다. 민 사장은 창밖을 바라보는 노배우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보았다.
왕년의 스타는 천정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민 사장은 그의 팔만 바라보고 있었다. 팔뚝 안쪽에 울긋불긋한 무늬가 보였다. 그것은 보랏빛의 작은 점들이었다. 피부병? 그리고 민 사장은 이불 밑으로 드러난 그의 발등에도 똑같은 보랏빛 점들이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민 사장은 천정과 창밖을 멍하게 바라보는 두 노인을 내버려둔 채, 책장 앞으로 갔다. 세로쓰기로 인쇄 된 케케묵은 책들을 뒤적거리던 그는 책장 제일 아래 칸에 있는 서류철 하나를 끄집어냈다. 노배우는 등 뒤에서 신 내림을 받은 사람처럼 가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먼지가 쌓인 서류철을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안에는 누렇게 색이 바랜 종이 뭉치가 들어 있었다. 옛날 영화대본들이었다. 맨 위에 있는 너덜너덜한 뭉치가 정 도진이 첫 주연을 한 영화대본이었다. ‘서울의 청춘’ 그 다음은 두 번째 영화, ‘철로에서 산다.’였다. 그리고, 그 다음……, 또 그 다음……. 그리고 그의 마지막 출연작, ‘이별 여행’의 대본이 맨 아래에 깔려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 고모와 함께 본 그 영화의 대본을 한 장씩 넘겨보았다. 마지막 장을 넘기자, 그 밑에 또 다른 대본이 하나 나왔다. ‘집사’란 제목이 첫 장에 인쇄되어 있었다. 이건 뭐지? 이런 영화가 있었나?
그 때, 간병인이 들어와서 창을 닫았다. 노배우는 머리가 희미하게 꾸벅거렸다. 간병인이 노배우의 어깨를 살며시 흔들었다. 잠이 깬 노배우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런, 깜빡 잠들었나보군. 허허.”
노배우는 친구에게 다음에 올 때는 꼭 쾌차하길 바란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제 그만 가봄세.”
두 사람은 간병인의 마중을 받고, 차에 올라탔다.
“자주 오십니까?”
민 사장이 비포장도로를 빠져 나오며 물었다.
“매달 말에 이곳에 온다네.”
“그럼 그동안 동생 분과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하셨군요.”
“그게 아니라네. 간병인 말로는 그가 이곳에 온 적이 한 번도 없다더군.” 노배우가 말했다. “사고 이후로 단 한 번도.”
“매정한 사람이군요.”
“괘씸한 작자지. 형이 유명할 때는 거머리처럼 붙어 다니더만, 저렇게 되고 나니 나 몰라라 하고 말이야. 에이~!”
노배우가 가래를 한껏 끌어올려 창 밖으로 퉤 뱉었다.

산 속에서 야외촬영을 하는 날, 민 사장은 바로 그 괘씸한 작자가 그동안 밴에 틀어박혀서 무슨 짓을 해왔는지 알게 되었다.
주인공, 휘종이 산비탈을 타고 도망가는 한 등산객을 뒤쫓는 장면을 찍고 있었다. 찍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그러다 17번 째, 촬영을 하다 등산객이 땅을 뚫고 나온 나뭇가지에 걸려 발목을 접 질러서 촬영이 중단되었다.
대역이 필요했다. 연기자와 생김새가 비슷한 제작부 스텝 한 명이 대역으로 뽑혔고, 최 감독은 대역 배우에게 촬영 동선에서 대해 다시 한 번 설명했다.
아침부터 산을 오른 스텝들과 배우, 모두 지친 얼굴들이었다. 지나는 여자 스텝들과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민 사장은 그들이 어디에 있을 지 궁금했다. 쥐새끼들 같으니.
산 속에는 밴도, 주연 배우 개인 대기실도 없었다. 동굴이라도 찾아내서 그 안에 틀어박혀 있는 걸까? 민 사장은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숲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꽁초가 된 담배를 밟아 끄려던 그는 십여 미터 전방에 나무 사이를 걸어 들어가는 두 사람의 등을 보았다. 그들은 비탈에 박힌 커다란 바위 틈 아래로 들어가 앉았다. 민 사장은 그들이 자신을 볼 수 없는 길로 빙 둘러서 커다란 바위로 다가갔다.
나무 사이로 바위틈에 앉은 그들이 보였다. 피곤한 얼굴의 휘종은 바위에 머리를 기대고 사지를 쭉 뻗고 있었다. 그리고 왕 눈은 작은 손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비닐포장지를 뜯고 있었다.
민 사장의 위치에서는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그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들 맞은편에 성인도 한 아름에 앉지 못할 만큼 굵은 나무가 서 있었다. 그는 그곳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그리고 왕 눈이 가느다란 손가락 세 개로 들고 있는 주사기를 보았다. 주사기 끝에서 액체가 오줌을 지리듯 흘러나왔다. 휘종이 자신의 오른 팔 소매를 걷자, 딱지가 앉은 울긋불긋한 핏자국이 드러났다. 주사바늘이 팔뚝에 꽂혔다. 왕 눈이 엄지손가락을 밀었다.
민 사장은 왕 눈이 바지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바람에 몸을 잔뜩 웅크렸다. 마약인가? 이제 뜬 주제에 벌써 갈 때까지 갔군.
잠시 후,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왕 눈이 등을 돌리고 앉아 휘종을 가리고 있었다. 둘은 꼼짝 앉고 않아 있었다. 뭔가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민 사장은 몸을 숙이고 옆으로 기어 나왔다. 그의 발에 낙엽이 밟혔다. 바스락. 왕 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미어캣처럼 목을 빳빳이 세우고 커다란 눈알을 굴렸다. 민 사장은 작은 바위 뒤에 조용히 수그렸다. 때마침 근처 나무 뒤에서 청설모가 튀어나왔다. 휴. 왕 눈이 경계를 풀었다.
휘종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왕 눈은 가운데 손가락에 진자를 끼우고, 휘종의 얼굴 앞에서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렇게 일분 쯤 쇠구슬이 진자운동을 하다 스르르 멈추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바위틈에서 나왔다. 그들이 바로 근처를 지나가는 바람에 민 사장은 땅에 납작하게 엎드려야만 했다. 그는 그들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다 일어나서 촬영장으로 걸어갔다.
곧 바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대본에 쓰인 대로 휘종은 산비탈을 따라 대역배우를 미친 듯이 쫓아갔다. 휘종의 공격적이고 광기어린 눈빛에 난생처음 연기를 하는 대역배우도 실감나는 도망 연기를 할 수 있었다. 휘종이 바위를 뛰어 넘고, 고함을 치고, 대역배우는 뒤를 돌아보다 나무에 어깨를 찧고, 넘어져서 비탈을 미끄러져 내려가고……. 2번 더 촬영을 하고 오케이가 떨어졌다. 그리고 추가로 “굿!”
지나는 혼자 산비탈을 내려가면서 자신의 정부인 등산객을 찾는 장면을 연기했다. 그녀가 몸을 사린 덕분에 촬영은 해가 질 때까지 계속 되었다. 그동안 민 사장은 숲에서 본 장면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얼룩덜룩한 팔뚝, 주사기, 커다란 눈깔, 그리고 진자…….

김 대표의 생일파티는 서울시내 유명 호텔 연회장에서 열렸다.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들이 찾아와 김 대표의 생일을 축하했다. 쇼팽의 피아노곡이 흘러나오는 홀에서 김 대표는 점잖은 태도로 그들을 하나하나 응대했다.
9시 40분. 연회장 한쪽 테이블에서 남 PD와 최 감독과 함께 앉아 있던 민 사장은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 밖으로 나왔다. 이제 조금 있으면 생일파티 1부가 끝난다. 그리고 음탕한 2부가 시작된다. 지나를 데리러 갈 시간이었다.
지나는 이번에도 차 안에서 미적거리다가 마지못해 호텔로 들어갔다. 요즘 젊은 것들이란. 그저 공짜로 받으려고만 하니, 원.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다는 단순한 진리도 모르남. 답답하다. 답답해.
  
다음 날, 아침 일찍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자다 깬 민 사장은 어눌한 음성으로 전화를 받았다.
“예, 접니다. 사장님.”
상을 치루고 돌아 온 박 실장이었다.
“그래…….”
민 사장은 다시 눈을 감았다.
“지나가 집에 없는데요.”
“응,……응?”
그가 잠을 깨려고 눈을 깜빡이며 몸을 비스듬히 일으켰다.
“집에 없어요. 전화도 안 받고.”
“뭐라고?”
그가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벽시계를 봤다. ‘10 : 35’ 촬영은 아침 9시부터였지?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아직 김 대표와 같이 있는 건가?
“내가 알아보겠네.”
그는 전화를 끊고, 호텔 데스크에 전화를 걸어 김 대표가 체크아웃 했는지 물어보았다.
“네. 새벽 2시에 나가셨습니다.”
데스크 여직원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곧 바로 김 대표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김 대표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비서가 전화를 받았다. 골든 미디어 민 태식입니다. 대표님은? 안 계십니다. 어디에? 아직 출근 안 하셨습니다. 휴대폰을 안 받으시던데? 그건 저도…….
옷을 대충 걸친 그는 차를 몰고 지나의 집으로 갔다. 입구 계단에 박 실장이 앉아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민 사장은 가지고 있던 비상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집에 없었다. 어딜 간 거야? 그는 지나의 부모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들도 딸의 행방을 몰랐다. 놀란 부모가 이런 저런 질문을 퍼부었지만, 그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다. 어디 있는 거야? 씨팔!
혹시…….
그는 114에 전화를 걸어 자주 가는 모텔에 전화를 걸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주인이 전화를 받았다.
“예. 어제 밤에 오셨어요.”
지나는 민 사장과 자주 가는 모텔에 틀어박혀 있었다. 민 사장이 방에 들어갔을 때, 지나는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그는 당장 그녀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었지만, 애써 화를 억누르고 그녀를 살살 흔들어 깨웠다. 잠을 깬 그녀는 흠칫 놀라며 뒤로 몸을 뺐다. 마스카라가 번진 그녀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그는 그제야 테이블 위에 놓인 반쯤 비운 소주병을 보았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그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이불을 가슴 사이로 끌어 모으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민 사장을 보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스카라 얼룩이 눈물에 재차 번지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만 할래요.”
그녀가 목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의 음성이 높아졌다.
“이런 식으로는 더는 못하겠어요.”
그녀는 휴지로 눈물을 닦았다.
“이봐 지금은…….”
“그들이 날 강간했다고요!”
그녀가 소리쳤다. 그리고 제 화를 주체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뭐?”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강간이라니? 잠깐, 그들?
“그들이라니?”
“김 대표하고 그 사람 친구.”
그녀가 훌쩍거렸다.
2 대 1? 소문대로 추접하구만.
그는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것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손을 떨며 담배를 깊이 빨았다. 검은 색 매니큐어를 바른 집게와 중지 손톱이 부서져 있었다. 김 대표 얼굴에 할퀸 자국이라도 있으면 넌 오늘부로 이 바닥에서 끝장난 거야. 이 병신 같은 년!
그는 테이블 위의 소주를 병째 한 모금 마신 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긴 연기를 내 뿜으며 말했다.
“정말? 여기서 관둘 거야?”
“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후회 안할 자신 있어?”
그가 냉정한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네.”
조금 더 작은 목소리.
“그럼, 이제 명품은 어떻게 사려고?”
그가 내뿜은 담배연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또, 부모님 빚은 어떻게 갚고?”
그녀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리고 남동생 인슐린은 무슨 돈으로 살 건데?”
그녀의 촉촉이 젖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커피숍에서 테이블 닦고 설거지나 하면서 다시 구질구질하게 사려고? 약을 못 사서 동생이 게거품 물고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땐 어쩔 건데?”  
그는 재떨이에 담배를 꾹꾹 눌러 껐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는 닭똥 같은 눈물을 매트리스 위에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봐. 정신 차려. 이제 목적지에 거의 다 와 간단 말이야.’
그가 속으로 말했다.  
그는 그녀가 한참동안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울음이 그쳤다.
“죄송해요.”
그녀가 휴지로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닦았다.
“그래서 호텔에서 도망 나왔어?”
“아니에요.”
“그럼?”
“끝나고, 나 혼자 두고 그들이 먼저 나갔어요.”
“……심하게 반항했어?”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냥…… 울었어요.”
그녀의 눈이 다시 글썽거렸다.
“잘 했어.”
그가 그녀 옆으로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앉았다.
“날 봐.”
그녀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잊지 마. 거의 다 왔어.”

배우 정 도진의 장례식은 많은 동료 후배 영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하늘에서는 보슬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민 사장은 지나와 함께 식장을 찾았다. 입구에 카메라를 든 취재진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조문 절차를 마친 후, 먼저 와 있던 노배우가 앉은 테이블에 동석했다.
“잘 버텨오다가 결국 이렇게 가는 구만.”
노배우가 작은 종이컵에 담긴 소주를 입 안에 털어 넣고 말했다. 민 사장은 노배우가 따라 준 술을 말없이 받아 마셨다. 고인의 동생은 끝내 그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휘종도.
  
장례식장을 나서던 민 사장의 머릿속에 어떤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젊은 정 도진과 그의 매니저이자 동생인 왕 눈. 60년대의 촌스런 옷차림을 한 두 사람. 촬영 중에 지쳐 보이는 정 도진. 컷. 컷. 컷. 감독은 쉬었다 가기로 결정한다. 왕 눈은 그런 형을 데리고 클래식한 검은 도요타에 올라탄다. 기운이 없어 보이는 정 도진은 팔 다리를 늘어뜨린 채, 조수석에 앉아 있다.
지금보다는 머리숱이 많은 왕 눈이 가방에서 주사기를 꺼내든다. 그는 주사기의 공기를 뺀다. 약물 몇 방울이 얼굴에 튀었지만, 아무 반응이 없는 정 도진. 바늘이 그의 팔뚝에 난 무수한 울긋불긋한 바늘구멍 사이에 꽂힌다. 약물이 들어가자, 순간 정 도진의 몸이 꿈틀거린다. 정지된 정 도진의 검은 동공.
줄 끝에 매달린 쇠 구슬의 한 면에는 왕 눈의 얼굴이 비치고, 그 반대쪽에는 입을 살짝 벌어진 정 도진의 얼굴이 비친다. 구슬이 천천히 좌우로 흔들리자, 정 도진의 굳은 동공이 구슬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차에서 내린 정 도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열정적인 연기를 선보이고, 스텝들은 그의 연기에 감탄한다.  
피로. 주사기, 진자, 연기, 오케이.
피로. 주사기, 진자, 연기, 오케이.
피로. 주사기, 진자, 연기, 오케이.
그러다가…….
결국 촬영장에서 쓰러지는 정 도진.
왕 눈이 달려와 의식이 없는 형의 눈알을 뒤집어 본다. 그의 작은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한다. 스텝 중 한 사람이 망연자실한 왕 눈을 밀쳐낸다. 이리저리 살펴보던 스텝이 쓰러진 배우에게 입을 맞춘다. 그리고 양 손바닥을 겹쳐 흉곽을 압박하고…….

불행은 몰려다닌다고 했던가? 정 도진의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 영목이 아침을 먹고 식탁에서 일어서다 그 자리에 쓰러졌다. 뇌졸중.
지나 때문에, 아니 두 중년남자의 그룹섹스에 대한 환상 때문에 미뤄졌던 촬영 분을 다시 촬영하는 날이었다. 민 사장은 지나를 박 실장에게 맡기고, 노배우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아갔다.
그가 꽃을 들고 병실 문을 두드렸다. 초췌한 몰골의 딸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꽃을 그녀에게 건네고,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좀 어떠세요?”
그가 말했다. 노배우가 누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딸이 유리잔에 주스를 따라왔다.
“아직 말씀을 잘 못하세요.”
딸이 말했다.
노배우는 옹알이를 하듯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괜찮다고 하시네요.”
딸이 통역했다.
노배우는 피곤한지 몇 마디 더 웅얼거리다가 눈을 감고 얕은 숨을 내 쉬었다.
딸과 형식적인 말들을 나누던 민 사장의 눈에 창문 아래 놓인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아, 저거 정 도진 선생님 유품이에요.”
“유품이요?”
“네, 간병인이 집을 치우면서 아버지에게 몇 가지를 보내왔어요.”
“실례가 아니라면, 잠깐 볼 수 있을까요?”
“네.”
그가 박스를 탁자 위로 올리고 열어보았다. 안에는 고인의 책장에서 보았던 녹화된 테이프가 가득 담겨 있었다.
“정 선생님이 출연했던 영화들이군요.”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노배우의 딸은 그에게 실례한다는 말을 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노배우는 아직 눈을 감고 있었다. 얕은 숨은 점점 규칙적인 호흡으로 변해갔다. 민 사장은 선 채로 테이프를 하나씩 꺼내 보았다. 그가 아는 제목도 있었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제목도 있었다. 복도 밖에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이프 아래에 그 서류철이 깔려 있었다. 그는 서류철을 꺼내 제일 밑에 깔린 대본을 빼냈다. 집사, 저번에 훑어보다 만 그 대본이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서 다음 장을 넘겨 시놉시스를 읽어보았다. 정신이상자인 어떤 집사가 자식벌인 젊은 부르주아 부부를 살해하고 자신이 그 집의 주인이 되려는 이야기였다. 시놉시스를 읽고 있는데, 그녀가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 밀었다.
“죄송한데, 중요한 전화라 서요. 실례가 안 된다면 좀 기다려주실 수 있으세요?”
“네, 물론입니다.”
그가 흔쾌히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시놉시스를 읽어나갔다. 이런 결말이었다. 미친 집사는 젊은 부부 둘을 끝내 살해하지만, 그들의 아이는 놓치고 만다. 집사는 아이를 찾아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진다. 그러다 집사는 아이가 만든 함정에 걸려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식물인간이 된다. 아이는 식물인간이 된 그를…….
?
민 사장은 뭔가 알 수 없는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노배우의 딸이 돌아오자, 그는 빠른 회복을 빈다는 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는 차를 몰고 있었지만,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병원을 나온 후에 차에 올라타, 키를 꼽고, 기어를 바꾸고, 액셀을 밟아, 주차장을 나와서 길을 따라, 신호를 따라 달릴 뿐이었다.
그는 갑자기 울린 전화벨에 깜짝 놀랐다. 지나 전화였다.
“여보세요.”
그가 전화를 받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나?”
정적.
그리고 잠시 후 핸드폰 수화기에서 고막이 찢어져라, 여자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나? 뭐야?”
당황한 그는 차를 길가에 세웠다. 그가 핸드폰에 다시 소리쳐 물었다.
“무슨 일이야?”
뚜- 뚜- 뚜- 뚜-
그는 지나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 있었다.
도대체 뭐야?
그는 박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울렸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최 감독에게도 전호를 걸었지만, 마찬가지였다.
렉서스가 반대 차선으로 불법유턴을 했다.
끼익! 끼익! 끽끽!
“야, 이 미친 새끼야!”
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생각 중이었다. 그것도 아주 무서운……
‘정 도진이 집사를 연기하고……, 집사가 식물인간이 되고……, 정 도진이 식물인간이 되고……,
주사기와 진자, 그리고 마약과 최면.
강 희종이 의처증 남자를 연기하고……, 의처증 남자가 미치광이 살인마가 되고……, 그리고 희종이…….’
그는 액셀을 꾹 밟았다.

건물 밖에 비뚤하게 주차를 한 그는 곧장 세트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는 마지막 촬영이 진행되었을 침실 세트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투명인간들이 영화를 찍듯, 카메라와 다른 장비들만 제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가만 보니 침대에 누군가가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그는 천천히 다가가 이불을 걷었다.
목에 칼이 꽂힌 최 감독이 벌린 입 사이로 두툼한 혀를 축 내밀고 있었다. 하얀 매트리스 덮개에 검붉은 얼룩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민 사장은 작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고, 두 다리는 보행기를 잡고 서 있는 아기처럼 후들거렸다.
씨발. 이게 뭐야? 스텝들은 전부 어디로 간 거야? 그는 뒷걸음질 치며 다시 들어왔던 출입구 쪽으로 기듯이 걸어갔다.
아무리 손잡이를 돌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는 두려운 마음에 주먹으로 철문을 두드렸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순간 공항상태에 빠진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부들부들 떨기만 하다가 갑자기 반대쪽 출입구가 머릿 속에 떠올랐다.
그는 겨우 발걸음을 땠다. 걸어가는 동안 쓰러진 3명의 스텝을 발견했다. 남자 2명에 여자 1명. 모두 죽어 있었다. 세트 벽과 바닥 곳곳에 피가 튀고, 고여 있었다. 머리칼이 땀에 젖어 이마에 착 달라붙은 민 사장은 카메라 레일 사이에서 각목 하나를 발견하고 주워들었다. 각목 끝이 덜덜 떨렸다.
반대쪽 출입문에 도착한 그는 다리 힘이 완전히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 했다. 여기도 문이 잠겨 있었다.
어딘가에서 여자 비명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지나?
그는 삼면이 막혀 있는 작은 세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게 더 안전할 것 같았다. 주방 세트였다. 그가 싱크대를 뒤졌지만, 칼은 없었다. 그는 세트 구석에 등을 붙이고 한 손에 각목을 들고 다른 손으로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가 핸드폰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뭔가가 주방 세트 안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떼구르 굴러서 그의 발 앞에서 멈췄다. 사람 머리였다. 가는 머리카락은 피범벅이 되어 엉켜 있었고, 커다란 두 눈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그리고 세트장 불이 꺼졌다.
암흑.  
그리고 발소리.
겁에 질린 민 사장은 아무렇게나 각목을 휘둘렀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처음에는 소리가 작아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중얼거림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반복되고 있었다.

바람피우면 둘 다 죽는 거야.
너랑 내가 아니라, 너랑 그 새끼.

민 사장은 그것이 얼마 전,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바람피우면 둘 다 죽는 거야.
너랑 내가 아니라, 너하고 그 새끼.

모텔에서 지나의 대본 연습을 도와 줄 때였다. 그 때 그녀는 리얼리티를 살려야 한다며 그에게 도끼 빗을 쥐어 주었다.

바람피우면 둘 다 죽는 거야.
너랑 내가 아니라, 너하고 그 새끼.

대본에는 도끼 빗대신 ‘네모난 중식용 식칼’이라고 적혀 있었다.

바람피우면 둘 다 죽는 거야.
너랑 내가 아니라, 너하고 그 새끼.

이제 그 대사는 그의 코앞까지 와 있었다.

바람피우면 둘 다 죽는 거야.
너랑 내가 아니라…….

- 끝 -

minsy20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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