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안심

2011.07.14 17:2307.14

사흘 전의 꿈을 기억나는 대로 글로 옮겼습니다.
중간에 한번 깼다 이어서 꾸는 통에 연결이 매끄럽지 않아 연결 부분에 조금 손을 댔습니다.
----------------

흐릿한 시야 사이로 활기 없는 시장통이 보인다. 틈새로 맷돌을 끼고 앉아있는 작은 소년이 보인다. 맷돌질하여 하루 벌어먹는 소년에겐 아직 일감이 없었다.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피던 소년은 구운 은행을 주섬주섬 꺼낸다. "따악!" 맷돌 틈에 은행을 끼고 어처구니를 처억 당겨 은행 까는 손놀림이 자주 해 본 모양새다. 소년은 이쪽을 보고 시익 웃는다. 까맣고 마른 얼굴 사이에서 하얀 이가 반짝 빛난다. 어디서 난 지 모르는 두 뼘 되어 보이는 꼬챙이로 은행 속을 찌른다. 가볍게 손을 놀리자 잘 벗겨진 은행 열매가 이쪽으로 휙 날아온다. 나는 소년의 앞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소년은 계속해서 은행을 꼬챙이로 던진다. 나는 은행을 계속 받고 있지만 하나도 먹진 않는다. 나는 그보다 더 작은 소년이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맷돌과 살아온 맷돌 영감님을 소개합니다. 맷돌 영감님은 1920년, 시장에서 맷돌 품을 팔면서 처음 맷돌과 만났습니다. 21세기에 접어든 지도 이미 한참인데요, 맷돌 영감님은 아직도 맷돌만 있으면 못하는 게 없으십니다."

흙바닥의 서문시장이 보인다. 맷돌을 사이에 두고 하릴없이 앉아있는 두 소년이 있다. 주위엔 사람이 없다. 은행 껍데기가 조금 떨어져 있다. 소년에서 조금 눈을 떨어뜨리면 새끼 돼지가 보인다. 아니, 새끼 돼지를 본 적은 없지만 돼지 같은 잿빛의 털 짧은 동물이 길 사이 틈에서 꾸물거리고 있다. 소년은 알 수 없는 눈으로 돼지를 쳐다본다. 사람들이 보인다. 다만 시장은 아니다. 소년은 장돌뱅이의 고함소리를 그리워한다. 옛날의 그 서문시장에서 모두들 무언가 하고 있지만, 이제 장사치는 없다. 장이 서지 않는 서문시장에서, 소년들은 돼지만 쳐다본다.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네, 그는 최고의 땜장이였어요. 맷돌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옷도 감고, 옹기도 붙이고, 은수저도 이었는데 언제나 맷돌 하나만 갖고 있었죠."

소년이 보인다. 아니, 소년이었을 작고 까만 사람이 보인다. 여전히 작은 덩치에 맷돌 하나를 끼고 있지만, 그리고 그 옛날 돼지를 바라보던 알 수 없는 표정이 남아 있지만, 소년 때와 다름없는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지만, 왠지 모르게 여기 저기 주름이 져 있다. 조금 더 까맣다. 더 이상 소년은 은행을 까지 않는다. 무언가 갈고 있다. 한 때 소년이었던 그의 손에는 시멘트 조각이 말라 불어 있다. 옛날 흙바닥 그대로의 서문시장에 무언지 모를, 아니 사실은 나에게는 익숙한 것들이 보인다. 라디오는 시끄럽게 무언가 떠들어 댄다. 사람들은 고무장갑을 팔고, 반짝거리는 책을 팔고, 처음 보는 것을 입에 물고 팔고 있다. 뭐라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느긋이 구경하는 사람조차 없다. 물건은 있는데, 시장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누런 색조로 가득 찬 오밀조밀한 거리는 그저 답답해 보일 뿐이다.

노인은 말을 잇지 못한다. 노인을 둘러싸고 있는 카메라와 마이크는 허둥지둥 하고 있다. 어쩌면 몹시 귀찮게 되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나는 노인을 본다. 노인의 눈에 어처구니 없는 맷돌이 비친다.

소년이 보인다. 아니, 소년이었을 작고 까만 사람이 보인다. 여전히 작은 덩치에 맷돌 하나를 끼고 있지만, 그리고 그 옛날 돼지를 바라보던 알 수 없는 표정이 남아 있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소년도, 청년도 아니다. 이제는 맷돌을 두고 앉아 있지 않다. 더 이상 흙바닥의 시장도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처음 보는 건물로 가득 차 있다. 좁고 높다란 건물이 이상하게 기울어 있다. 광택이 설깃 지나가는 건물 표면이 눈을 어지럽힌다. 그는 위를 본다. 나도 위를 본다. 시커먼 상처 같은 흉한 금이 가 있다. 조금 작아 보이지만, 여전히 무거워 보이는 맷돌을 지고 올라간다. 건물에는 계단도, 엘리베이터도 없다. 건물 벽에 발을 딛고 올라간다. 도무지 어딘지 모르겠지만 그는 여기 저기 발을 잘 딛고 오른다. 그는 맷돌을 돌린다. 두 발로 벽에 선 위태로워 보이는 그의 손에 들린 맷돌에서는 잿빛의 가루가 끈덕끈덕 거리며 흘러나온다. 건물 벽을 맨손으로 매만지는 그의 모습에서 사당패의 모습도, 장인의 모습도 스쳐 보인다. 건물에서는 무언가 고개를 내밀고 그를 본다. 건물 안에서는 잿빛 돼지가 보인다. 그리고 고개를 내밀고 있던 무언가 알 수 없는 것도 보인다. 그가 손을 놀릴수록 흡사 시멘트를 바른 아파트 같은 흉한 몰골의 건물이 되어간다. 느닷없이 어처구니가 부러진다. 모든 게 느릿느릿 흘러간다. 그를 본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알 수 없다. 쉴 새 없이 맨손으로 열심히 건물을 더듬는다. 부러진 어처구니가 어디론가 떨어졌다. 건물도 어디론가 부러졌다. 더 이상 건물은 기우뚱하지 않다. 곧게 바닥에 처박혀 있다. 그는 더 이상 맨손으로 건물에 매달려 있지 않다. 어딘가에 있을 거다.

익숙한 잿빛 하늘이 보인다. 소년이 보이지 않는다. 이상한 건물도 보이지 않는다. 익숙한 도시의 자동차와 보도블록이 보인다. 인터뷰는 가짜다.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다. 나는 한 번도 맷돌을 본 적이 없으니까. 좁고 더러운 건물 사이로 다시 들어간다. 밖은 산과 하늘이 있고, 누군가에겐 정치와 혁명도 있겠지만, 나에겐 여기가 안전하다. 지상 12m의 반지하 같은 바닥에서 벽 한 칸, 기둥 하나를 두고 사람들은 앉아 있다. 익숙한 활기 없는 분위기가 나를 감아온다.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주위랄 것이 없다. 양 팔조차 바로 펼 수 없는 좁은 틈에 틈이 꼬불꼬불 이어져 있다.

언젠가 중국, 영국, 홍콩 같은 것을 신경 쓰며 살던 때가 있었다. 그 때는 누구든 걸어 다녔다. 맷돌을 들고 있던 나를 기억한다. 아니 알고 있다고 믿는다. 나는 맷돌 소년을 그리워한다. 그 때에도 희망은 없었지만, 대신 평화가 있었다.

나를 따라오는 무엇이 있다. 지저분한 콘크리트와 시멘트와 판자 조각 깊은 곳으로 발길을 향한다. 사이렌 소리도, 달리는 소리도, 호루라기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내 뒤에는 무언가 있다. 사람들 사이로 뛰어 들어간다. 복잡한 길을 뛰어간다. 아니, 뛰고 싶지만 잿빛 돼지가 사람 틈새마다 꾸물거리고 있다. 잿빛 큰쥐도 보이고, 잿빛 뿔강아지도 보인다. 모두 잿빛에 살찐 동물들이다. 비쩍 마른 사람들은 살찐 잿빛 짐승들을 본다. 사람들에게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그저 밟지 않게 달려갈 뿐이다. 왜 밟지 않아야 하는지 모른다. 그들은 이미 없다. 그들은 이 밖에서 올림포스의 거인과도 같았으나, 여기에서는 나와 같은 초라한 싸움꾼이었다. 사람들 깊숙이 숨자 그건 더 이상 따라오지 않는다. 그들의 흔적이 아직 남아 숨을 곳을 만들어준다. 나는 지쳤다. 오래 전부터,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남지 않았다.

"지금의 구룡성채의 둥지는 그가 일궈냈지. 우리조차 잊은 표준 기수법으로 응원군을 안전하게 착륙시킬 인간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이봐 인간, 포기하지 말게. 자네는 그의 후계자 아닌가. 힘내게, 우리는 떠나지만 우리의 물건은 모두 자네들에게 남겨두고 갈 테니."

그들이 처음 왔을 때부터인지, 그것이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인지, 오래 전부터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었다. 마지막 물건을 물려주고 밖으로 나갈 테다. 마지막 햇볕을 쬐며 마지막 공기를 마시고 마지막 달리기를 하고 떠날 테다. 나는 앉아있지 않은 사람을 찾기 위해 계속 달려간다. 맨손으로 시멘트를 바르던 맷돌 소년의 모습과 위태로운 구룡성채 판자지붕에서 표준 기수법으로 난파선을 맞이하던 그의 모습이 흐릿하게 겹쳐 보인다. 독수리의 둥지에 매를 맞이하려 했으나, 이제는 닭장 같기만 하다.

익숙한 잿빛 하늘이 보인다. 소년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 소년은 원래 없었다. 익숙한 도시의 자동차와 보도블록이 보인다. 인터뷰는 가짜다. 테이프를 보았던 기억이 나지만, 사실 나에게는 테이프를 볼 방법도 없다. 바닥에서 잿빛 돼지와 큰쥐가 꾸물거리던 구룡성채는 없다. 더러운 강아지와 시궁쥐라면 모르겠다. 맷돌 소년이 은행을 까던 서문시장도 없다. 북적거리는 서울역이 보인다. 안내 방송은 틈만 나면 다음 열차와 도착하는 열차에 대해 떠들어 댄다. 아니, 곧 그렇게 될 서울역이 잠시 보였다. 서문시장의 고무장갑상 같은 얼굴의 경비에게 쫓겨나기 전에, 알코올에 절어 있는 노인의 품에서 컵라면 하나를 훔친다.

나는 매일 밤 맷돌 소년, 아니 맷돌 노인의 인터뷰를 본다. 매일 밤 구룡성채의 배신자들을 저주하며 돼지를 피해 달린다. 그리고, 지금 막 서울역의 하루를 본다. 매일 아침 누구 주머니에서 나온 지도 알 수 없는 동전으로 끼니를 때우지만, 나는 맷돌 소년도 구룡성채의 사나이도 만나지 않았다. 아직 인간만이 사는 곳이다. 오늘, 세 번째 꿈을 꾸는 사람이 생길 지 결정된다. 잘만 된다면, 나는 그의 세 번째 추락을 보는 대신 그에게서 가끔 컵라면을 훔쳐올 수 있다. 그는 최고의 무언가가 되는 대신 평범한 구걸꾼으로 살 수 있다.

늘 나가던 계단 대신 역사 어딘가로 향한다. 이 힘들고 지친 작고 까만 노인에게는, 오늘 해만 무사히 진다면 내일부터는 안심이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377 단편 [번역] 아마릴리스호 - 캐리 본2 이형진 2011.06.11 0
1376 단편 택시 조원우 2011.06.12 0
1375 장편 추적追跡 - Chapter 1. 인과응보因果應報 [File 9] 최현진 2011.06.12 0
1374 단편 2845 곰돌이5 빛옥 2011.06.15 0
1373 단편 Flash K.kun 2011.06.17 0
1372 장편 추적追跡 - Chapter 1. 인과응보因果應報 [File 10]1 최현진 2011.06.18 0
1371 단편 Siren (By Demonvein) + 이메일1 최병찬 2011.06.20 0
1370 단편 꿈꾸는 문들의 도시 빈군 2011.07.02 0
1369 단편 신림역 살인마 니그라토 2011.07.03 0
1368 단편 빌딩 마리아주2 조원우 2011.07.08 0
1367 단편 앨리스는 더 이상 여기 살지 않는다 김진영 2011.07.10 0
단편 안심 위기백 2011.07.14 0
1365 단편 외계인2 광몽 2011.07.16 0
1364 단편 놀라운 배우들 강민수 2011.07.16 0
1363 단편 노래하는 빵1 irlei 2011.07.18 0
1362 단편 [Machine] K.kun 2011.07.23 0
1361 단편 11시 이정도 2011.07.23 0
1360 단편 [재업로드] 월세가 저렴한 방 헤르만 2011.07.27 0
1359 단편 무소식이 희소식 고요 2011.07.28 0
1358 단편 ATM 언어유희 2011.07.28 0
Prev 1 ... 74 75 76 77 78 79 80 81 82 83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