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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는 더 이상 여기 살지 않는다

어둠이 짙게 세상에 물들어 있었다. 그 어떤 것도 식별할 수 없는 아주 짙은 어둠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에도 영원함이란 없었다. 어둠 역시 그랬다. 어둠은 여명이 밝아오면 스스로의 처지를 알고 서서히 사라져갔다. 어둠이 사라져간 자리에는 여명이 자리를 대신했다.
나는 여명이 어둠의 자리를 대신한 시간에 눈을 떴다. 창문으로 밖을 보니 아직 여명이 어둠에게서 모든 자리를 넘겨받지는 못한 시간이었다. 나는 하품을 하며 밖으로 나왔다. 지평선 멀리로 여명이 밝아오는 것이 보였다. 여명이 밝아오는 것을 보며 나는 앨리스를 떠올렸다.
앨리스는 5년 전 어느 날 갑자기 마을을 떠났다. 마을의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말을 하고서 어디서 났는지 모를 해츨링을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갔다. 예전부터 그녀는 마을 밖 멀리까지 나가고 싶다고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어린 소녀들이 밖에 마을 밖 멀리 나갔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면서 반대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내게 찾아와 화를 내기도 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진정시키며 굳이 마을 밖으로 나갈 이유는 없지 않느냐고 물었다. 마을 밖을 나가지 않아도 우리 마을에서는 자급자족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런 말을 한 나는 앨리스에게 쥐어 박히기도 했다. 마을은 엄청 좁다고, 세상이 얼마나 넓은 지 아냐고. 가끔 마을 밖 먼 도시에서 오는 상인에게서 산책들 속에 얼마나 많은 새로운 것들이 있는지 아느냐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책들을 잘 읽지 않아서 무엇을 본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자연히 앨리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앨리스가 마을 사람들 앞에 해츨링을 데리고 나타난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앨리스가 데려온 해츨링을 보고 놀라 뒤로 잡아질 뻔 했다. 해츨링은 드래곤의 어린 새끼였다. 그런 새끼들을 함부로 데려왔다는 것은, 아무리 온순한 드래곤이라고 해도 당장 마을로 쳐들어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앨리스는 그럴 일은 없다는 얼굴로 마을은 절대로 드래곤의 공격을 받지 않을 거라 말하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앨리스의 말을 믿을 수 없었고, 앨리스는 해츨링을 데려온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나서 마을 밖에서 할 일이 있다고 하며 마을을 뛰쳐나갔는데, 그때 이상하게도 마을 사람들 중 누구도 그녀를 말리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왜 앨리스를 그냥 보낸 거냐고 묻자, 마을 사람들은 입을 맞춘 듯 이렇게 말했다.

“앨리스가 마을 밖으로 나간 건 신의 뜻이기 때문이야.”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신의 뜻 때문에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준 거라니? 갑자기 무슨 일로. 나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후에 촌장님께 들은 말로는 앨리스가 데려온 해츨링은 보통 해츨링이 아니라, 세상을 지탱하는 전설의 다섯 드래곤 중 가장 중요한 드래곤. 익시스의 해츨링이라는 것이었다.
예로부터 익시스는 해츨링 시절에 파트너를 정해 세상의 중심에서 세계의 운명을 정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 태어나고, 파트너로 선택된 사람은 그런 해츨링을 지켜 줘야하는 숙명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파트너 역할로 앨리스가 익시스의 해츨링에게 선택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촌장님께서는 앨리스가 마을을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고 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그럼 앨리스는 언제 마을로 돌아오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촌장님은 고개를 푹 숙이고 건조한 목소리로 내게 말하셨다.

“앨리스가 언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단다. 1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50년이 걸릴지 아니면 영영 못 돌아오게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른단다. 알다시피 마을 밖은 온갖 괴수들이 득실거리기 때문에 어린 소녀 혼자서 돌아다니는 건 힘들지. 하지만 익시스의 해츨링을 지켜주며 세상의 중심으로 가는 것이 그 애의 운명이라면, 우리는 담담히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거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앨리스는 어린 소녀라고 해도 힘든 역경을 잘 이겨낼 수 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잖니.”

그 말은 지금도 내 머릿속에서 가라앉지 않고 계속 떠올랐다. 가끔 멍하니 있을 때, 마을을 나와 도시에 가려고 할 때에도 촌장님의 말이 내 주위를 계속 맴돌았다. 나는 지금도 믿을 수가 없었다. 말괄량이 같은 앨리스가 무거운 운명을 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이후로 마을 사람들이 앨리스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도 내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앨리스가 마을을 떠난 후의 마을 사람들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정반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앨리스가 마을을 떠나기 전의 나는 앨리스를 정말 대단한 여자애로 보았는데, 앨리스는 마을의 그 어떤 또래의 소년들보다도 남자 같은 놀이를 즐겼고, 모험이라면 사정을 못서 마을 근처의 비교적 안전한 숲을 수시로 탐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마을 사람들은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 남자들이 좋아하지 않아 시집을 못 갈 수도 있다는 눈으로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정반대이니 내가 믿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나는 앨리스의 그런 당당한 면이 부러웠다. 그녀는 항상 어떤 일에서든지 주눅이 드는 일이 없었고, 그 어떤 역경도 스스로가 해결하려고 애썼다. 누구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는 적은 거의 없었다. 가끔, 아주 가끔 작은 벌레가 기어가거나 날아다닐 때 빼곤 그녀는 무척이나 당당했다. 그런 그녀가 지금은 마을을 떠나 여행을 하고 있었다. 세상의 운명을 어깨에 인 여행을. 지금 앨리스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앨리스의 무사를 빌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자 어둠은 모두 물러가고 날이 밝아있었다. 나와는 다르게 아주 찬란한 빛으로 세상은 빛나고 있었다.
내가 집으로 들어오자 어머니가 걱정 어린 눈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너 또 아침 일찍 앨리스 생각한 했니? 이제 그만 걱정해도 되지 않니. 그 애 스스로 정한 거고.”

나는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에게 앨리스를 생각한 게 아니라, 그냥 아침 공기를 마시고 싶어서 나갔다 들어온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역시 어머니여서 그런지 내 거짓말을 믿지 않으셨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을 내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여느 때처럼 아침을 먹었다.
아침을 먹은 뒤 공구를 챙겨 마을로 향했다. 곧 우기여서 마을의 목수들이 모여 집을 수리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을광장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무슨 일인가 하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은 하나같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무슨 일이냐며 다가오자 그들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근처에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나타났데.”

나는 그 말에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드래곤 슬레이어들은 드래곤을 사냥하는 사람들이잖아. 그래서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말이 붙었잖아. 그런데 우리 마을 근처에는 사납다고 해봐야 멧돼지나 호랑이과 짐승들이 전부인데 대체 왜?”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도 그 영문을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는 이 사실을 촌장님도 아시냐고 물었다. 그들은 그 물음에 어쩌면 촌장님도 아실 거라고 말했다. 하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수군거리는데 모르실 리가 없겠지.
하지만 정말로 이상했다. 그들,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어째서 이 마을에 나타난 걸까? 설마 앨리스가 데리고 간 그 해츨링 때문에 여기 온 건 아니겠지? 만약에 그렇다면 그들은 허탕을 치는 것이었다. 이미 그 해츨링은 앨리스하고 이 마을을 떠났으니까. 그랬으니까 곧 찾다가 돌아가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앨리스를 또 다시 떠올렸다.
그런데 그때, 촌장님이 마을광장에 나타나셨다. 촌장님은 모여 있는 우리들을 바라보고는 호통을 치셨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리 소란이냐! 곧 우기인데 집수리들 안 하고 뭐하는 거냐. 여기 이러고 있지 말고 어서 각자 할 일을 하러 가거라. 어서.”
그렇게 촌장님의 호통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로 촌장님을 바라보았다. 촌장님도 그런 내 시선을 느끼셨는지 내게 다가와 말했다.

“걱정 말거라. 슬레이어들이 나타난 건 절대 앨리스 탓이 아니니 말이다.”
“네?”
“지금 네 머릿속에는 앨리스가 데리고 떠난 해츨링 때문에 슬레이어들이 나타났다고 생각하고 있었잖니.”

나는 그 말에 정곡을 찔렸다. 앨리스, 아직도 잊어지지가 않는 그 이름. 하지만 이제는 잊어야 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아뇨. 이젠 정말로 잊었어요. 가끔, 아주 가끔 떠오를 뿐이에요.”
“가끔이라…. 그렇다는 건 아직도 완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는 거군. 넌 앨리스의 어떤 점 때문에 잊지 못하는 거냐.”

촌장님의 말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왜 앨리스를 잊지 못하는 거 냐니,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앨리스와는 이 마을에서 아주 오랫동안 사귄 친구였으니, 그런 친구의 부재 때문에 내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촌장님은 내가 그것 때문에 잊지 못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촌장님께 말했다.

“어떤 점이라면, 아마도 아주 오랫동안 곁에 있었던 친구였기 때문에 잊지 못하는 거겠죠.”
“하지만 오랫동안 곁에 있었던 친구였기 때문치고는 넌 자주 그 아이를 생각잖느냐.”
“그거야, 제가 앨리스와 무지 각별한 사이였으니까요. 그렇잖아요. 무지 각별한 사이였는데, 갑자기 그런 친구가 제 곁에서 사라졌다는 게 제게는 꽤 힘든 거였어요.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나는 그 말로 촌장님이 다음에 하실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이제 집을 손보러 가야 한다고 말하고는 재빨리 그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 자리를 떠나며 살짝 촌장님을 돌아보았다. 촌장님께서는 내가 떠난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떠나는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아마 알고 계시겠지. 내가 한 그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그래, 그 말은 거짓이었다. 내가 지어낸 거짓말. 나는 앨리스와 그렇게 각별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저 겉으로만 각별하게 보였지, 속은 알 수 없는 것으로 거리를 둔 사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앨리스와 친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고, 앨리스와 정이 많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앨리스가 떠나고 내가 그녀를 잊지 못하는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뭔가 알 수 없는 것. 설명할 수는 없는 무언가 때문에 나는 그 아이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명 촌장님과 어머니의 말씀대로 이제 그 아이를 잊혀버릴 때도 되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앨리스만을 생각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앨리스는 앨리스의 운명과 삶을, 나는 나대로의 삶을 살아가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분명 앨리스는 마을 밖 세상에서 잘 헤쳐 나가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걱정을 하지 않으래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기를 대비해서 집을 수리하는 동안 옆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계속 슬레이어들의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눈을 감고 다른 생각을 하던가, 망치질을 하면서 노래를 크게 흥얼거리면서. 그렇지만 그것은 헛수고였다. 그들의 이야기는 내 귀로 쏙쏙 박혀들어 슬레이어들과 앨리스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망치질을 그만두고 집을 수리를 돕는 목수들에게 말했다.

“그 애 때문에 그런 건 아닐 거야. 이런 촌구석 출신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알겠어? 그러니까 그냥 지나가던 사람들이겠지.”
“하지만 도시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게 없다고 하던데? 그러니까 그런 것도 다 알지 않을까?”

내 친구인 애드가 그렇게 말했다. 물론 도시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게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앨리스 출신에 대한 걸 알아서 어디에다 쓸까. 혹여나 우리 마을을 없애버릴 지도 모른다 해도 그런 것은 정말로 쓸데없는 짓이다. 이런 마을 없애도 그들에게 득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어째서 그런 정보를 손에 넣겠는가.
나는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며 망치질을 계속했다. 그런데 혹여, 혹시나 그들이 이 마을을 없애버릴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한편으로는 들기도 했지만, 그것은 아주 가능성이 낮은 일일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런 걱정 따윈 하지 않아도 된다며 스스로의 마음을 다독이며 계속 일에 몰두했다.
며칠 후 나는 마을 밖으로 나무를 하러 나가야 했다. 우기가 되기 전에 수리해야 하는 집들에 쓸 나무들이 거의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을 밖으로 섬뜩 나갈 수는 없었다. 그들, 슬레이어들을 나무를 하러 갔다가 만나면 큰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무를 하지 않으러 갈 수는 없는 일이어서 나는 마을에서 가장 친한 크리스를 데리고 나무를 하러 마을 밖 숲으로 향했다.
숲은 아주 고요했다. 전에는 많이 들리던 새소리가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이상하게도 너무 고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슬레이어들 그들의 살기가 새들의 노래 소리를 멎게 만든 것이리라. 그런 것이라면 새소리가 숲 곳곳에서 들리지 않는 것이 이해됐다. 그래서 빨리 나무를 하고 마을로 돌아가야 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그들과 마주친다면 큰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을 편히 가지러 애썼다. 여긴 마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여기까지 내려올 일은 없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잘 자란 나무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잘 자란 나무들이란 넓이도 넓고 도끼로 찍어서 나이테가 선명하게 난 것들이 좋은 나무들이었는데, 나는 그런 나무들이 어디에 많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곳은 지금 있는 곳에서 숲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야 해서 위험했다. 그래서 나는 근처에서 나무를 골랐다. 나무껍질이 단단한지, 나무에 벌레는 없는 지 등을 살피면서 말이다. 그러고는 나무를 정한 뒤 도끼로 나무를 찍어 쓰러뜨렸다. 나무는 도끼에 찍혀 근처의 나뭇가지들을 쓰는 듯 같이 바닥으로 떨어뜨리면서 쓰러졌다. 나는 나무를 들고 가기 편하게 나무 몸통을 두 개로 나누었다. 그리고 같이 온 크리스에게 그것들 중 하나를 들게 하고는 마을로 돌아가려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서늘한 기운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것이 어떤 기운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서늘한 기운은 슬레이어들이 내뿜는 기운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닥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따라서 나는 지금 당장

“당장 마을로 돌아가자.”

라고 크리스에게 말하고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일은 풀리지 않는 때가 더 많았다. 나와 크리스가 도망을 치려는 순간 어찌된 일인지 나 혼자서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점점 몸에서 열이 나기까지 했다. 도망치려던 크리스가 날 돌아보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먼저 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대의 공포가 나를 덮쳐왔다. 나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당장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 생각이 들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이 녀석인가? 이 녀석이 그 계집의 연이 가장 많이 엉켜있는 녀석인가 보군.”
‘계집?’
“마을에는 꼬마 익시스 녀석의 기운이 둘러싸고 있어서 우리 같은 슬레이어들은 들어갈 수 없었지. 그래서 마을근처 숲을 어슬렁거리면서 안에 들어갈 수를 찾다가 혹시라도 몰라 마법을 시전 해놨었는데, 뜻밖에도 이렇게 손쉽게 걸려들 줄이야. 우리 재수가 좋군.”

그러면서 목소리는 내게 다가와 내 머리채를 잡으며 얼굴을 들어올렸다. 내 눈앞에 검은 망토로 온 몸을 감싼 슬레이어가 있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 눈이 떨리는데 어서 처리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나와 목소리를 향해 또 하나의 목소리가 내 머리채를 잡고 있는 목소리에게 말했다.

“아니, 빨리 처리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도움 될 게 아무것도 없어. 모든 인간에게는 연이란 게 있어. 그 연은 모든 인간들의 몸을 칭칭 휘감고 있지. 그래서 그 연이 휘감겨 있는 횟수와는 상관없이 모든 사건들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으로든 영향을 미쳐. 그러니 죽이면 안 돼. 자칫 잘못해서 우리 일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까.”
[그래, 아직 그 아인 죽으면 안 되지.]

그런데 그때 내 머리채를 잡고 있던 목소리가 말하는 순간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 들려온 목소리는 슬레이어들도 모르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나는 움직일 수 없는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정말로 신기하게도 몸을 내 생각대로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되자 나는 있는 힘껏 내 머리채를 잡고 있던 슬레이어를 떨쳐내고 아무 방향으로나 달렸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숲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만일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숲 깊숙이는 거의 가보지 않았기에 길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일단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급했으니까. 그런 그때, 내 눈에 동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동굴로 뛰어들어 깊숙이 들어가 헐떡이는 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그들의 소리가 동굴 밖에서 들려왔다. 나는 가쁜 숨을 멎으며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숨은 동굴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그냥 지나쳐 가는 것이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다행이었다.

[허허, 그래 그거 참 다행이지.]

도망칠 때 들렸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목소리에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주위는 컴컴한 어둠뿐이었다.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나를 보고 목소리가 웃긴다는 듯 웃음소리를 냈다.

[난 바로 내 뒤에 있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동굴이 밝아졌다. 뒤에서 온화한 붉은 빛이 밝아왔다. 아주 따뜻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온기였다. 나는 그 온기와 불빛을 따라 몸을 돌렸다. 온기와 불빛을 따라 몸을 돌리자 커다란 알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커다란 알을 손으로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만졌다. 정말로 알이었다. 나는 놀라 알에서 손을 때고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목소리가 내게 말했다.

[날 그리 놀라하는군. 하긴 날 놀라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할 테지. 하지만 난 그들처럼 널 해칠 생각은 없다. 난 그저 네 도움이 필요할 뿐이야. 그래서 네 힘으로 날 이 알에서 벗어나게 해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해주면 된단다. 그러니 부디 날 도와주게나.]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이 목소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어째서 자신이 알을 깨고 나오려면 내 도움이 필요한 것인지 모두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면서 목소리에게 되물었다.

“알에서 나오려면 왜 제 힘이 필요한 거죠? 전 아무런 힘도 없는 평범한 인간일 뿐인데.”

그러자 목소리는 내 말을 듣고서 차분히 설명을 늘어놓았다.

[너의 연이 나와 이어졌기 때문이지. 그 아이가, 그 해츨링에게서 선택된 순간부터 갖게 된 숙명이 정해진 순간부터 넌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너의 존재 이유 중 하나가 날 알에서 꺼내주는 거란다. 난 익시스의 해츨링과 같이 세계를 유지하는 다섯 드래곤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존재다. 그들이 모두 깨어난다고 해서 세계는 절대 안정을 되찾을 순 없단다. 그들이 세계의 중심에서 세상을 안정을 위한 의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란다.]
“그럼 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도 되잖아요.”

내가 목소리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건 너여야만 하기 때문이지. 지금 이 숲과 마을에서 다섯 드래곤과 연이 가장 많이 감겨져 있는 사람은 네가 유일하기 때문이지. 날 밖으로 내보내려면 아주 강한 연이 감겨져 있어야 해. 그리고 날 익시스의 해츨링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다오. 나는 그 해츨링을 도와 세계의 멸망을 막아야 한단다.]

목소리는 아주 간절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난 그럴 생각은 절대로 추호도 없었다. 내가 유일한 사람이라고 해도 앨리스처럼 그런 일을 거리낌 없이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나 당당하던 앨리스를 보라! 내가 그런 애가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도망쳐야 했다. 목소리에게서 최대한.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살짝 눈을 돌려 동굴 입구까지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 살폈다.  
나와 동굴 입구까지의 거리는 그리 많지 않았다. 몇 발짝만 움직이면 동굴을 벗어날 수 있는 거리였다. 나는 잠시 목소리의 눈치를 보다가 도망칠 기회를 보았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도망쳐야 할까. 목소리가 지금 알 속에 있다지만 좀 전의 일들을 생각하면 목소리는 나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냅다 도망치는 것. 그것  뿐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런 생각을 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동굴을 입구 쪽으로 내달려 숲속으로 향했다. 내 발이 어디로 가는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내달렸다. 내가 지금 달리는 방향이 좀 전에 도망칠 때 왔던 길이라고 확신하면서. 하지만 달리다가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내가 있는 곳이 그때 그곳일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아무리 이곳에서 오래 살았다고 해도 숲이 워낙 넓은 게 아니었으니까. 마을 토박이라 할지라도 길을 잃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런 동굴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그런 동굴이 있었다면 내가 숲 깊이 들어간 적이 없더라도 누군가에게서 들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동굴에 대해서는 누구도 얘기한 적이 없었다.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에 달려왔던 곳을 뒤돌아보았다. 그때 멀리서 날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중에서도 크리스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크리스는 그 누구보다도 날 애타게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가 날 찾는 목소리들 중에서 목소리가 가장 컸으니 날 가장 열심히, 그리고 애타게 찾고 있는 게 분명할 거였다.

“이안, 내 말 들리면 대답하는 거야. 대체 어디 있어!”

나는 그런 그를 조금 더 힘들게 하지 않기 위해 얼른 대답했다.

“나 여기 있어!”

그 소리를 들은 이안과 마을 사람들이 내 목소리를 따라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자마자 내 안부를 물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웃어 보이며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짓고 있었다. 그들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자 나는 문득 슬레이어들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 그들은 분명 앨리스가 데려간 해츨링의 기운 때문에 우리 마을에는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말이 지금도 유효하다면 우리 마을은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것이 떠오르자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없을 거라는 표정을 지으며 마을 사람들에게 마을로 돌아가자고 했다.


마을로 돌아왔을 때는 해가 지평선 너머로 고개를 넣고 있을 때였다. 나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마을 사람들의 물음에 답하지도 않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런 그때 침대에 누워 목소리가 내게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내가 세상을 위해 해야한다는 그 일. 내게는 강한 연이 감겨있다는 그 말을. 나는 베개에 고개를 파묻고는 침대 옆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앨리스라면 앨리스라면 분명 그 말을 듣고 망설임 없이 수락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창문너머로 별들이 반짝였다. 앨리스는 지금 어디선가 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이 떠나온 것에 대해서 후회는 하고 있을까. 자꾸 앨리스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이렇게 앨리스의 빈자리가 이전에 느꼈던 때와는 다르게 다가왔다. 그때 동굴에서의 생각이 반전하고 있었다. 앨리스의 곁으로 가고 싶다는. 하지만 그 아이의 곁으로 가려면 그 목소리를 알에서 꺼내줘야 했다. 조금은 그럴 맘이 생기고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그러기 싫었다. 이 마을을 떠나기 싫었다. 나는 왠지 잠을 들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떠하리. 나는 그 목소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말이다. 창문 너머의 밤하늘은 별들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내가 다시 깨어났을 땐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새벽 어스름이었다. 해가 완전히 중천에 뜨면 마을 사람들이 내게 몰려들 것이었다. 그리고 내게 이렇게 물을 것이었다. 혹시 슬레이어들을 만난 게 아니냐면서.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해야겠지. 멧돼지를 만나서 숲을 헤매게 되었다고 말이다. 만약에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마을은 한바탕 난리가 나게 될 것이 뻔했다. 또 그것이 내가 이 마을에 남을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었다. 그래, 앨리스가 데려간 해츨링의 기운이 우리 마을을 지켜주고 있으니 슬레이어들도 마을을 어찌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어제 저녁부터 자긴 했지만, 지금 일어나봤자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조금 더 눈을 붙이기로 했다.

날이 밝아왔다. 햇살이 내 눈 위에 사푼히 내려앉았다. 나는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나 마을로 향했다. 마을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아마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일게 분명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의 눈에 들어가자 사람들이 내게 몰려들었다.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크리스 말로는 네가 위험하다고 알려줬다면서. 그거 정말이야?”
“설마 슬레이어들을 만난 건 아니겠지? 그 사람들한테 걸리면 끝장이잖아.”

그들은 그런 질문들을 내게 쏟아내며 내 입에서 답이 나오길 고대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답 같은 건 해주지 않았다. 당연한 거였다. 어제 다짐한 그 말은 아직 유효했으니까. 그리고 우리 마을 주위에 익시스의 해츨링의 기운이 있는 한 무슨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런 그때 촌장님이 불쑥 사람들 사이로 걸어 나오셨다. 촌장님은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내게 물으셨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혹여 내게 거짓을 말할 생각은 하지 말 거라.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다. 너와 이 마을의 사람들의 목숨이 걸릴 일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혹시나 정말로 슬레이어들이 널 쫓는 거라면 가만히 있을 순 없단다. 중앙정부에 당장 이 사실을 알려야 해.”

그렇게 말하는 촌장님의 눈빛과 분위기가 여태껏 보아왔던 촌장님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이 마을에 사는 동안 촌장님이 그런 눈과 분위기를 보인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일이 있어야지만 촌장님이 그런 눈과 분위기를 보이겠지만 알다시피 우리 마을은 아주 작고 평화로운 마을이었고, 그런 일들은 역사책에서나 배우는 일들이었다. 그러니 한 번도 그런 눈빛과 분위기를 보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는 그런 촌장님의 눈빛과 분위기에 압도당해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것들을 모두 내뱉어버렸다. 슬레이어들의 살기를 느끼고 붙잡힌 것에서부터 목소리에 관한 것과 목소리가 내가 세계를 위해서 해야 하는 일에 대한 것까지 말이다.
촌장님은 그 얘기를 듣고는 나를 좀 보자면서 나를 촌장님의 집으로 데려갔다. 촌장님은 나를 집으로 데려온 뒤 조용하고 차분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앨리스 때는 앨리스가 원했기 때문에 보내주었지만, 이번 일은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원하지도 않는데 그 목소리가 너에게 그 일을 강요할 수는 없지. 하지만 그 선택으로 인한 책임은 져야 한단다. 어떠한 선택이든 그에 따른 결과가 뒤따르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 결과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칠 게야. 세상은 항상 그렇게 흘러갔었으니.”

나는 촌장님의 말씀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 뒤 촌장님의 말을 곰곰이 되새기었다. 촌장님은 분명 내게 강요는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선택할 때는 신중 하라고 내게 말한 것일 것이다. 나는 천장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앨리스를 떠올렸다. 앨리스는 그때 원했기 때문에 그 길을 선택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일은 지금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세상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속에 나도 들어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 날 이후로 앨리스만 생각했다. 무얼 할 때도 그 아이만이 생각났다. 어떻게 하면 잊을 수 있을까? 몇 번이나 머리를 싸잡으며 고민하기를 반복했지만 잊을 수 없었다.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던 어제 새벽부터 지금까지 그 사이에 아주 잠깐 그 아일 잊었던 것 같지만 그건 급박한 상황 때문이었는지 나는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그 아이는 내게 불복종할 수 없는, 나를 끌어당겨 절대복종하게 만드는 무언가 이었다. 앨리스는 여기 없는데, 더 이상 이 마을에 살지 않는데도 그렇게 느껴졌다. 무엇 때문에 그녀를 잊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떠나간 옛 친구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나는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정리를 하기 위해서는 목소리에게 확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래, 그 목소리가 먼저 도와달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내 마음이 안정되어가던 것을 굳힐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날 하루 동안 온통 그 생각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고, 다음 날, 날이 밝자 나는 아무도 몰래 조용히 마을을 빠져나가 숲으로 향했다.
하지만 일단 숲에 들어오긴 했는데 작은 문제가 있었다. 어저께 갔던 그 동굴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무작정 나온 것이 잘못인 것 같았다. 좀 더 생각하고 움직였어야 했다. 게다가 아직 슬레이어즈가 우리 마을 근처를 맴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어저께 어느 쪽으로 도망을 쳐왔는지는 떠올랐기 때문에 마을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나는 떠오른 기억에 기대어 발걸음을 옮겨 숲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숲은 어저께와 비슷했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발 빠르게 움직이는 동물들의 기척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숨이 막힐 만큼의 고요한 정적이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계속 숲 안으로 들어갔는데 순간 도중에 멈춰서고 말았다. 더 이상은 어느 쪽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걸어왔던 뒤로 고개를 돌리며 그냥 다시 돌아갈까? 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기억도 떠오르지 않는 상태에서 그 동굴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그런 생각을 하며 제 자리에 서 있던 나는 내 머릿속으로 뭔가가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다시 날 찾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목소리는 내 머릿속에서 온 몸으로 퍼져나가 숨조차 멈추게 했다. 나는 그런 상태에서 말에 숨소리를 섞으며 말했다.

“근처에 없는데 어떻게 알죠? 마을에서는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그건 네가 내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마을과 내가 있는 곳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느냐. 하지만 그것보다 우린 해결해야 할 게 있지 않니? 내가 있는 곳을 찾는 거라면 목소리를 따라 오거라.]
“목소리?”

나는 목소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머릿속에서 들려오기 때문에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데 어떻게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갈 수 있을까. 나는 목소리에게 되물었다.

“어떻게 목소리를 따라가죠? 머릿속에서 사방으로 울려오는데 말이죠.”
[내 목소리에 집중해봐. 목소리는 다 시작하는 곳이 있지. 아무리 직접 귀로 듣는 말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들리는 말이라 해도 들려오는 방향에 따라 들리는 크기는 다르지.]

그 말에 나는 믿는 샘 치고 들려오는 목소리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목소리 크기가 다 똑같이 느껴졌다. 어디가 작고 어디가 크게 들리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앨리스가 읽었던 책들 중에 내가 읽은 책 중 어느 소설에서 집중할 때면 항상 눈을 감는 장면들이 많았다. 나는 어쩌면 그 소설에서 나온 대로 눈을 감는다면 도움이 될 것 같아 그 장면을 흉내 내며 눈을 감고 다시 목소리에 집중했다.
눈을 감고 다시 목소리에 집중했을 때의 처음은 눈을 감지 않았을 때와 똑같았다. 하지만 눈을 감고 몇 분을 목소리에 집중하자 목소리의 크기가 머릿속으로 달리 들려왔다. 나는 그것을 느끼고는 번쩍 눈을 뜨고 목소리의 목소리가 크게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동굴이 있었다. 어저께 목소리가 갖혀 있다는 알이 있는 동굴일 것이었다. 나는 목소리에게 내가 보고 있는 곳이 맞느냐고 묻자, 목소리는 내가 보는 곳이 맞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발걸음을 그곳으로 옮겼고, 한 발짝 한발자국씩 걸음을 옮기는 동안 나는 침을 목구멍으로 계속 넘기고 있었다.
그렇게 목소리가 있는 동굴에 도착하자 어저께 보았던 거대한 알이 동굴 깊숙한 곳에서 공간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그럼 어디 한 번 들어보지. 네가 결정한 그 선택을 말이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선택한 결정은 마을에 남는 거예요. 이 마을이 좋고 어딜 떠나기도 싫으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도와는 드릴게요. 제가 떠나지는 않더라도 당신이 가야한다면 당신 혼자만 가세요. 저는 그것까지만 도와드릴 거니까.”

내 말에 목소리는 웃는 것 같았다. 정말로 그러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냥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내가 웃는 것까지 느끼는군. 웃음소리를 내지 않는 데도 말이다. 그러한데도 나와 같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하지만 좋아. 네 말대로 하지.]
“그럼, 저는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잖은가. 그러니 때를 기다려 해야 하지. 지금 이 마을 주위에는 슬레이어들이 돌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자칫하다간 내 기운이 그들에게 느껴져서 내가 알에서 나오기도 전에 들켜 밖으로 못 나갈 수도 있단다. 그러니 그들에게 들키지 않을 때 초승달이 뜨는 날 밤. 그 날은 모든 신비로운 힘은 모두 사라진단다. 내가 알 밖으로 나갈 때 내뿜는 기운까지도.]

목소리는 내 말에 그렇게 답했다. 나는 그런 말에 알겠다며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목소리가 내 제안을 받아들었기 때문에 그 정도는 양보할 수 있는 거였다.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해요. 그런데 당신 이름은 뭐죠? 전 이안이에요.”
[이안, 그래 알고 널 구해줬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내 이름은 아락스. 고대 테카어로 알을 깨다, 라는 뜻의 이름이지.]
“그것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하지만 네 이름도 너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는 건가.]

나는 그 말에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아락스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이름말이다. 고대 테카어의 단어에서 이안이라는 말은 깨는 자라는 뜻이지.]
“그래요? 하지만 그건 고대의 언어로 그렇죠. 제 뜻은 목수예요. 목수. 마을에서도 목수일을 하고 있어요.”
[그래, 이 시대에서의 언어로는 네 이름은 목수를 뜻하지. 하지만 목수는 무언가를 만들지. 깨는 자 역시 부숨으로서 새로운 걸 개척하지. 그게 인생인지 무엇인지는 알 길은 없지만 말이다.]

나는 그가 지금 내 이름을 가지고 왜 그렇게 말하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름이 ‘깨는 자’ 여서, 그래서 내가 자신을 끝까지 도와달라고 말하는 걸 우회로 돌려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흥, 그래도 누가 끝까지 도와줄 것 같은가. 나는 알에서 꺼내주고 나면 내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누구도 건들 수 없는 일상. 있었을 때는 시끌시끌하고 없으면 뭔가 허전한 듯한 느낌을 들게 하는 앨리스가 빠진 일상으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락스에게 말했다.

“그럼 그 날 밤 당신은 알에서 세상으로 나와 앨리스가 향하는 세상의 중심으로 가겠죠?”
[그래, 하지만 네가 같이 간다면 더 좋을 것 같구나.]
“분명히 말해두겠지만 전 당신이 밖에 나오는 것까지만 도울 거예요.”

나는 그런 말을 아락스에게 던지고선 마을로 돌아갔다.
마을로 돌아온 뒤 나는 매일 밤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의 변화를 관찰했다. 달의 모양이 초승달이 되는 때 나는 앨리스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었다. 그럼 이 지독히 길었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겠지.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은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그 아이가 떠난 후로 줄곧 걱정하고 생각했었는데, 그 아이를 생각하는 걸 그만두게 되면 어떤 날들이 펼쳐질까. 그 아이가 떠난 후처럼 살까 아니면 다른 생활을 하게 될까. 별과 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두운 세상이 그 빛으로 인해 적당한 밝음은 잃지 않고 있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밤의 공기가 내 몸속으로 스며들어 정신을 맑게 했다.
그래, 어떤 선택이든 후회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 아이가 선택했던 것처럼 그 결정은 내가 한 결정이었으니까. 나는 창문을 닫았다.
나는 달의 모습의 변모를 매일 밤마다 바라보면서 그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날이 오자 아무도 몰래 아락스의 동굴로 향했다. 아락스의 동굴로 향하는 밤길은 그 어느 날보다도 밝은 달이었다. 보통 보름달이 달의 모습 중에서 가장 밝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날만은 초승달이 보름달보다 밝은 달이었다. 초승달 주위의 별들조차 초승달의 빛의 밝기에 자신의 빛을 보태었다.
아락스의 동굴 앞에 다다르자 내 심장이 요동쳤다. 아주 작은 일을 하는 것인데도 뭔가 떨렸다. 발도 부들부들 떨려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나는 휘청거렸다. 아락스는 그런 나를 보고 있었는지 내가 그의 앞에 섰을 때 이렇게 말했다.

[몸도 이 순간을 기다려 온 것 같은데, 내가 세상으로 나오면 나하고 함께 하지 않겠나?]

하지만 나는 그의 제안을 지난번처럼 딱 잘라 거절했다.

“자꾸 그러지 마세요. 그럼 전 돌아갈 겁니다. 이일을 끝내고 앨리스에 대한 기억을 털어내고 좋은 날들을 보낼 겁니다. 그러니 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 지나 알려주세요.”
[허, 그런가. 그 스스로를 선택한 아이가 네게 단단히 연을 묶어놓은 것 같군.]

아락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알겠다면서 내게 자신을 알에서 꺼내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아락스가 일러준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먼저 알 앞에 서고 두 손으로 알에 손을 가져다댄 후 눈을 감고 집중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락스가 일러준 대로 알 앞에서 두 손을 가져다댄 후 눈을 감고 온 신경을 알에게로 쏟아 부었다. 그런데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몇 분 동안 눈을 감고 집중했는데 변화라곤 고요한 정적과 밖에서 들리는 새 소리뿐이었다. 나는 알에 손을 가져다댄 후 눈을 감고 집중하면 알에서 빛이 나면서 큰 변화가 생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다니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눈을 감은 채 아락스에게 말했다.

“아무런 변화도 없는데요?”

그러자 아락스가 흐뭇한 웃음소리를 냈다.

“변화가 없다니? 무슨 소리냐.”

아락스의 목소리가 내 귀로 직접 들려왔다. 나는 놀라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내 눈 앞에는 거대한 붉은 새가 웅크리고는 목을 세우고 커다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새를 보고 놀라 뒤로 엉거주춤 물러났다.
내가 놀라 뒤로 물러나자 다시 아락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초승달이 뜨는 밤이다. 어떤 기운이든 그 어떤 누구라도 느낄 수 없는 날이야. 아주 뛰어난 감각을 지닌 존재가 아닌 이상은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는 날이지. 그래서 인간인 넌 나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없었던 게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쨌든 이제 내가 할 일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아락스를 떠나보내고 나는 마을에서 앨리스만 잊으면 나는 아주 평범한 생활을 보낼 것이었다.
아락스가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펴며 일어나 섰다. 가뜩이나 몸인 그는 두 다리로 바로 서자 크게 느껴졌던 동굴이 작게 느껴졌다. 그는 밖으로 나가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밟히지 않도록 빠르게 동굴을 나갔고 뒤따라 아락스가 동굴 밖으로 나왔다.
동굴 밖으로 나오자 아락스가 날개를 활짝 피며 기지개를 폈다. 아락스가 기지개를 펴자 사방에서 공기가 모여들며 바람이 불어들었다. 엄청난 바람이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는 바람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내가 할 일을 끝내서 자유롭다는 기분과 상쾌한 공기가 내 기분을 환기시켰다.
그런데 그때 마을 방향에서 작은 불꽃이 올라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붉은 빛이 마을의 밤하늘 위를 물들였고, 하늘에서 불꽃들이 떠다니다가 사라졌다. 그런 불꽃들 중 일부는 나와 아락스가 있는 곳까지 와 타다 소멸하기까지 했다. 누가 봐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순간 내 머릿속으로 좋지 않은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그럴 리가 없을 거였다. 그들의 힘도 아락스의 기운처럼 오늘 밤만큼은 사라지지 않는가? 그들의 힘 역시 신비한 것이니까. 나는 아락스를 돌아보았다. 아락스도 심각한 눈으로 붉은 빛으로 물든 마을의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아락스는 시선을 마을 밤하늘을 향한 채 당장 가봐야겠다면서 자신의 발 위로 올라와 다리를 붙잡으라고 말했다.
나는 아락스의 말대로 발 위로 올라가 다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곧바로 커다란 날개를 피고 힘차게 하늘 위로 올라갔다. 정말로 순식간에 풍경은 지상의 풍경에서 상공의 풍경으로 바뀌었다. 하늘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아주 작디작았고 세찬 바람이 내 얼굴로 불었다. 쉬원한 바람이었지만 타는 냄새가 섞여 내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아락스의 날개 짓 몇 번만으로 나는 불타는 마을 상공에 도착했다. 마을은 아주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건물들이 타고 있었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몇몇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을 중앙의 광장에 붙잡혀 밧줄로 묶여 있었다.
그때 아래에서 성난 불 몇 개가 나와 아락스에게로 날아들었다. 다행히도 아락스가 그 빛을 피해서 괜찮았지만, 피하면서 본 불은 가히 위협적이었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에서는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는 검은 망토둘이 보였다. 그들은 우리에게 당장 땅으로 내려오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렇지 않으면 붙잡힌 마을 사람들을 가만 두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무슨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쳐났다. 그런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락스에게 물었다. 마을사람들을 구할 방법은 없냐면서 말이다. 그러자 아락스는 자신만 믿으라면서 그들의 요구에 따라 아래로 내려가 날개를 접었다. 아락스가 날개를 접고 땅에 착지하자 나도 그의 발에서 내려 슬레이어들 앞에 섰다. 슬레이어들은 한 쪽은 덩치가 크고 다른 한 쪽은 작았는데, 그런 그들이 우리를 바라보며 킥킥 거리면서 웃었다.

“하늘 위에 조금 다른 강한 기운이 있기에 올려봤더니, 이거 웬 수확인지 전설의 아락스가 내 눈앞에 떡 하니 나타날 줄이야.”
“대체, 어째서 우리 마을을 이렇게 쑥대밭으로 만든 거야!”
“어째서라니? 네가 도망을 쳤고, 오늘은 초승달이 뜨는 초사흘이 아닌가? 이런 날은 당연히 보호 받는 마을이 보호에서 풀려나면 한 번 헤집어 줘야지 직성이 풀리거든. 안 그래?”

덩치가 작은 망토를 걸친 슬레이어가 덩치가 큰 슬레이어에게 말했다.

“그래, 맞아. 게다가 널 놓쳤기 때문에 화가 많이 났거든. 그러니 화풀이를 해야지. 그리고 말이지. 이제는 널 살려둘 필요가 없게 됐거든. 그 계집 녀석이 우리 작전에 말려들었거든. 이제부터는 너와 그 계집의 얽힌 연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야.”
“뭐?”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주먹을 꽉 쥐며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뭐라 하긴 그 계집이 우리 작전에 걸려들었다고 했다.”

덩치 큰 슬레이어가 나를 비웃듯 말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꽉 쥔 주먹을 들어 그 녀석의 얼굴에 세게 가져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둔탁한 느낌이 내 손을 통해 전달되었다. 손도 아팠다. 누군가에게 주먹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그러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때렸을 때 드는 느낌이 둔탁하고 손도 아픈 것일지라도 이번만큼은 넘어갈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 덩치 큰 슬레이어에게 덤벼들었다. 그런데 중간에 덩치가 작은 슬레이어가 끼어들며 발로 내 복부를 걷어찼다.

“저 녀석 참 맹랑하네. 다들 벌벌 떠는데 말이지. 이 마을의 주민들도 그러했고 말야.”

그러면서 그는 붙잡은 마을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런데도 덤벼들다니 대단하긴 하군. 하지만 우리한테 넌 죽을 거다. 이 마을의 주민들과 함께.”
“누, 누구 맘대로!”

나는 주먹을 다시 한 번 꽉 쥔 다음 덩치가 작은 슬레이어에게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덩치가 작은 슬레이어의 몸놀림이 어찌나 빨랐던지 그는 단 한 대도 때릴 수 없었다.

“이게 바로 너와 나의 차이라는 거다. 고작 하찮은 인간이 우리 같은 위대한 임무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들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하다못해 세계를 지키기 위해 헤츨링이 택한 아이도 그 운명은 스스로 정했지. 하지만 우린 다르지. 우리 스스로가 그 분이 직접 선택하셨고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운명을 주셨지. 우린 연이라는 그 실 같은 거에 묶이지 않지. 너희 하찮은 인간들만이 연이라는 실에 묶일 뿐이다. 애송아.”

덩치가 작은 슬레이어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그 눈은 나를 째려보았다. 기분 나쁜 눈이었다. 나를 얕보고 있었다. 게다가 앨리스까지 모욕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자세를 바로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때 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아락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연은 묶는 것이 아닌 많은 가능성들 중에서 하나의 가능성이 담긴 실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연은 절대로 벗어날 수도 없는 거지. 지금 너희가 믿고 있는 그 운명이라는 것도 사실은 너의 선택이지 않은가.”
“흥, 큰 닭이 참 말도 많으셔. 하지만 그 말은 틀려. 난 선택받았다.”

그리고 덩치가 작은 슬레이어는 높이 도약했다. 그러나 그 도약은 얼마가지 못했다. 아락스가 날개를 펼쳐 바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아락스가 일으킨 바람은 마을의 모든 건물에 붙은 불까지 꺼버릴 정도로 강했다.

“하, 강하긴 강하 군. 하지만 이 녀석을 우리가 잡는다 해도 그럴까?”

그러면서 덩치가 큰 슬레이어가 내게로 다가와 자신의 팔로 내 목에 걸고 졸랐다. 나는 팔을 풀려고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나는 아락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락스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붙잡힌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를 바라보지 마라. 그것도 네 선택이다. 지금 내가 저들을 쫓아버린다면 그들은 이곳에 다시 올 거다. 그리고 난 그때는 이곳을 떠나있겠지. 그럼 어떻게 할 거지? 그때도 또 마을이 불타는 걸 볼 건가?”

나는 그 말에 눈을 한 번 감고 다시 떴다. 그 말이 맞았다. 지금 내가 이들에게 당하고 있으면 또 그럴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내가 하겠다. 좀 전에 날렸던 주먹처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눈동자를 돌려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다. 그러다가 문득 거기를 때리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긴 그 누구라도 힘이 빠질 거니까. 그리고 마음을 먹은 순간 행동을 개시했다. 발로 있는 힘껏 그곳을 가격했다. 덩치 큰 슬레이어는 이내 내 목에 감고 있던 팔을 풀며 그곳을 양 손으로 부둥켜 앉으며 땅바닥을 굴렀다. 그것을 본 덩치가 작은 슬레이어가 눈을 부라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자, 하찮은 인간에게 당해본 소감이 어때? 난 그리 호락호락하게 붙잡히지도 않을 거야.”
“감히!”
“그래, 그 아이 말이 맞다. 우리는 이번에는 당했지만, 그래서 마을이 이렇게 엉망이 되었지만 다음에 또 온다면 우린 가만히 있지 않을 게다.”
“뭐?!”

어디선가 촌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와 슬레이어들에게 경고했다. 그 소리에 슬레이어들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나도 어떻게 된 것인지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촌장님과 마을사람들이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고 어떻게 된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촌장님이 슬레이어들 몰래 묶여있던 밧줄을 마을사람들과 다함께 끊으려고 노력해서 끊었다고 했다.

“자, 그러니 이제 당장 우리 마을에서 썩 물러가줬으면 좋겠네.”

촌장님의 말에 슬레이어들이 눈을 부라리면서 이를 꽉 물었다.

“좋아, 이번에는 그냥 가지. 하지만 너희들은 살아남지 못할 거야. 지금의 마을의 모습보다도 더 끔찍한 모습을 보게 되겠지. 크크.”

그리고 덩치가 작은 슬레이어는 덩치 큰 슬레이어를 발로 차 일으키고는 쏜살같이 도망쳤다.
그들이 물러가자 촌장님과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며 말했다.

“좀 전의 모습 정말 멋있더라니까.”
“그래, 네가 우리를 구한 거다.”
“제가 뭘요. 전 그냥 당연한 걸 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락스가 없었더라면 그렇게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감사는 아락스에게 해야 해요.”

그러면서 내가 아락스를 바라보자 마을사람들 역시 아락스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아락스는 그런 나와 마을사람들의 인사에 고개를 저으며 커다란 날개를 펴고 하늘 높이 날아올라 이제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밤하늘로 사라져갔다.
그 후, 시간이 지나고 마을도 조금씩 제 모습을 되찾아갈 때쯤 나는 짐을 쌌다. 그때 이후로 많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아락스가 떠나고 난 뒤로도 앨리스를 잊을 것 같았지만, 슬레이어들에게 앨리스가 자신들의 계략에 빠졌다는 소리에 도저히 그 아이를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 아이처럼 선택을 하려고 한다.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마을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는 거냐?”
“네, 가려고요. 이렇게 계속 그 아일 생각하는 것보다는 낳을 것 같거든요.”
“그러냐. 네 선택이니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후회하지 말거라.”

나는 촌장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을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뒤 마을 입구로 가 마을을 나섰다. 입구로 가는데 뒤에서 어머니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촌장님과 마을사람들의 괜찮다는 목소리도 들렸다.
숲은 그 일이 있은 후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한 결 같이 고요하고 새들의 지저귐만이 들렸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거대한 그림자가 있었다.

“날 기다리고 있었어요? 제가 안 오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네가 안 온다면 나도 네가 했던 것처럼 다른 선택을 해야 했겠지. 하지만 넌 이렇게 같이 가기로 선택했잖은가.”
“뭐 좋아요. 당신이 같이 있으면 그 아일 구하고 돕는데 도움이 될 거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에서는 아락스가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하늘은 맑고 푸르렀고 빛이 났다. 여행이라는 것을 떠나는 때에 아주 좋은 날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 마을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마을에는 정말로 앨리스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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