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택시

2011.06.12 15:0706.12

야간택시

청년은 택시에 몸을 실었다.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택시 기사에게 XX아파트로 가달라는 말과 함께, 푹신한 뒷좌석에 천천히 몸을 기댔다. 기사는 뒷좌석에서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약하게 나는 술 냄새와 살짝 초점 없는 눈동자가 그가 분명히 취했음을 알려주고, 원래는 고급 실크 원단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한 수트는 어디에서 넘어지기라도 했는지 흙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 눈에 띄는 옷차림만 제외하자면 청년은 남들에게 기억되기 힘든 사람의 종류에 속했다. 얇은 눈썹과, 커 보이지 않는 쌍꺼풀 없는 눈, 약간 뭉뚝한 코와 아랫입술이 약간 두꺼운 그의 얼굴은 앞에 있는 택시 기사에게는 매일 적어도 다섯 번 정도는 만나게 되는 전형적인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런 얼굴에 비해 유난히 하얀 피부색은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근육이라고는 전혀 붙어있지 않은 가녀른 팔뚝이나, 곱게 뻗은 손마디는 택시기사에게 평범한 이 청년이 아무런 걱정 없이 부모가 준 돈으로 자라온 부자 집 청년임을 알려주는 하나의 징표였다. 기사는 백미러를 흘끗 쳐다보며 그에게 말을 걸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보통 이런 부류의 술 취한 사람들은 자신이 살갑게 말을 걸면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듣기에는 얼토당토않은 인생론부터 시작해서 비관적인 드라마 남자 주인공을 연출하다가, 종내에는 다른 20대 청년들과 다를 바 없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여자 이야기로 끝을 맺기 마련이었다. 술 냄새 나는 입으로 자신에게 신세 한탄을 하는 사람들을 기사는 제일 싫어했다. 팔자가 좋아 술에 취해, 술기운에 취해 어딘가에서 진탕 뒹굴다가 자신이 돌아갈 위치를 잃어버려 택시를 잡아타는 청년들, 기사 자신에게는 그런 시절이 없었기 때문인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하루에 7만원씩 사납금이라는 명목으로 회사에 갖다 바치고, 그 반절도 안 되는 월급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자신이 더욱 초라해지기만 했다. 기사는 자신이 손님들에게 마구 화내는 장면을 생각하다가 웃어버리고는 액셀러레이터를 지그시 밟았다. 화를 냈다가, 고객 불만 편지라도 접수된다면 오늘의 사납금도 끝이었다.

청년은 창문을 바라보며 빠르게 명멸하는 가로등 불빛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술만 마시면 세상은 그토록 아름다워졌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고 - 흔들렸다. 불빛은 비현실적으로 타올랐다. 손 댈 수 없는 뜨거움이 아니라, 그저 환하다. 세상의 불꽃들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50년 전의 불꽃과는 다르다. 몇 천 년 전의 어느 정신 나간 그리스 신이 인간들에게 불꽃을 전해주었다고 그는 알고 있었다. 나무와 나무가 부딪혀 불이 일어났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불을 만들었다는 일반론적 ‘불의 발견’을 그는 믿지 않았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자신이 23년간 살면서도 본 적이 없는 매우 희박한 경우였고, 그 이전에 신이 인간에게 불꽃을 전해주고 신 자신의 전능함을 포기해버리는 이야기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얼마나 유치한 이유인가. 청년은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어지럽게 흩날리는 밤의 불빛에서 눈을 떼고 택시 기사를 쳐다보았다. 백미러를 통해 자신을 힐끔 힐끔 곁눈질 하고 있는 저 기사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술에 취한 채 택시를 탄 저 청년이 택시 요금을 제대로 낼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더군다나 할증까지 붙어 이젠 잘 쓰이지도 않는 10원 단위까지 알뜰하게 붙여가며 악착같이-끊임없이 올라가고 있는 택시 요금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비 현 실 적 이 다 라고 그는 말하려고 했으나 순간 입을 다물었다. 저 택시미터기 안에 생명체가 있었다. 그것은 매우 힘차게, 악착같이-끊임없이 달리고 있었다. 택시가 빨라지면 빨리 뛰었고, 반면 택시가 멈춰 있어도 멈추는 법이 없었다. 혹사당하고 있는 말 한 마리. 말은 신나게 돈을 차 올렸다. 청년은 자신이 내야 하는 택시 요금의 대가가 자신을 목적지까지 이동시켜서가 아니라 저 말 한 마리를 움직이게 한 대가라고 확신했다. 더군다나, 저 말은 빛까지 내고 있었다.
거칠게 투레질을 하고 있다- 그는 중얼거렸다.

택시 기사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요즘 불황인지라 정말 안 그래도 힘든 시간들인데. 염병... 택시 기사의 입에서 저절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주가가 2000을 넘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네 마네 하는 작금의 이 시점에서, 택시 기사들은 대리운전 8000원에 사활을 걸고 밀고 밀리는 이 시대에. 뒷자리에서 태평하게 코를 골던 저 청년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그리 큰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5년의 택시 경력에서도 이런 일이 없었음을 미루어 볼 때, 이것은 어쩐지 자신의 직업에 대한 도전인 것 같았다. 동시에 순간, 택시 기사는 자신이 이 일을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당황했다. 직업이라고? 좋아서 시작한 일도 아니고, 영원히 택시 하면서 인생을 끝낼 생각도 없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딱 3년이면 자신의 원래의 잘 나갔던 샐러리- 맨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샐러리- 맨의 시대는 돌아오지 않았고, 창의성과 신선함과 기발함을 중시 여기는 사회 풍조가 자신이 응당 돌아갔어야 할 부장의 직위를 팀장으로 바꾸어 버렸다. 아주 크게 본다면, 그가 좋아하는 말로 대체한다면 ‘거국적으로 볼 때’ 그러한 시스템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에게는 부장의 능력은 있으되 팀장으로서의 능력은 낙제점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20년 가까이 몸담은 회사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고급 영어 회화와 수준급의 컴퓨터 실력을 갖추기에는 그의 나이가 너무 늦었다. 늦었다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 생각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늦었다. 갖추려고만 하면 갖출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변명이 아니라, 이 나이에 고급 영어 회화와 수준급의 컴퓨터 실력을 갖추고 있는 45세 이상의 대머리 대기업 부장을 평사원이나 부장에 준하는 대우로 채용할 만한 회사는 적어도 이 나라에는 없었다.
택시기사라는 일을 선택한 후, 방송국에서는 언제나 서민 경제가 어렵다고 할 때면 어김없이 택시기사들을 찾아왔다. 자신도 인터뷰를 해 본 적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좋은 기억이 없다. 서민의 발이 되는 대중교통에 택시만 쏙 빼놓을 때는 언제고, 이럴 때만 와서 택시기사들이 어렵다고 생색을 내는 것인가. 기사 대기소에서 바둑을 두는 동료들에게 분개하며 말하는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화를 내면서도 인터뷰를 거절한 적은 없었다. 어릴 적 자주 불렀던 동요처럼, 텔레비전에 자신이 나오면 그는 다시금 자신이 뭔가 중요한 위치로 돌아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는 자신의 현재 위치를 잠깐이나마 잊고, 예전의 잘 나갔던 자신의 모습을 회상했다.

말을 가두는 발상은 아주 간단했다. 생떽쥐베리였던가 하는 작가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방식이었다. 다이어리를 연다. 빈 공간에 그림을 그린다. 상자를 그리고 그 안에 말을 가둔다. 냉장고에 코끼리를 넣는 방법과 유사한 이 방식은 오래되었지만 효과가 좋았다. 빨간 색 4B 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청년의 손끝에서 상자를 그려냈다. 청년은 이 일이 자신에게 신이 내린 어떠한 사명이며, 신탁이라고 느꼈다. 이 어두운 밤에 홀로 미친 듯이 날뛰며 돈을 갈취하는 빌어먹을 적토마. 저것은 여포나 관우도 감당치 못할 괴물이었다. 하루에 천리가 아니라 만 리, 백만 리라도 돈만 주면 뛰어가는 괴물. 청년은 이윽고 그의 신성한 일을 완성시켰다. 어릴 적 배운 직육면체 그림을 그렸을 때처럼 삐뚤어지고 흔들린 그림이었으나 이것으로 저 작은 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택시기사가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사이 자신이 무언가 그리고 있자 뒤를 돌아보고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봐요 아저씨, 당신도 저 놈한테 속고 있는 겁니다. 저 말을 움직이는 마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구요. 머리가 까진 대머리 아저씨는 이미 진실을 구별하는 방법을 잊은 듯 했다. 그런 표정 지으실 필요 없어요. 제가 편하게 해드리죠. 청년이 싱긋 웃으며 다이어리 속의 상자를 내밀어 말을 잡아챘다.

택시기사는 경악했다. 허우대 멀쩡한 청년은 미터기를 발로 걷어차 버리려 했다.

그리고, 세상이 흔들리고 청년은 쓰러졌다. 말은, 그 말은 어떻게 됐지? 청년은 극적으로 말하고 싶었으나 입에서는 실상 신음 소리 밖에 나오지 않았다. 택시 기사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이 느껴졌다. 잘나가는 영화에서도 이러한 화려한 효과는 연출하지 못할 것이다.

이봐요!

그러나 말은 여전히 달리고 있었고, 오히려 붉으락푸르락 성난 인상을 지으며 자신을 위협하고 있음을 청년은 깨달았다. 빨갱이다. 아니, 파랭인가? 킬킬 대던 청년은 자신이 굉장히 난감한 상황에 직면했음을 알았다. 자신이 미지의 고위 관료 친척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돈을 마음대로 다루는 신비한 능력자가 아니라면 분명 이 택시의 행선지는 청년이 원했던 자신의 집이 아니라 경찰서의 차가운 유치장 바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어쩐다. 그는 자신의 원흉, 불공대천의 원수인 말을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의 미적 능력으로 사라졌어야 할 말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뛰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생떽쥐베리를 모르거나, 저 말이 어린왕자를 모르거나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곤란해 진 것이 확실했다. 어느 새 말의 몸값은 만 원이 훌쩍 넘었다. 저 말을 이기기란 힘들겠어. 청년은 자신의 거룩한 성전이 불과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실패로 돌아갔음을 직감했다. 이 상황에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을 생각해냈다. 술을 마신 사람은 취한 척 잠들 수 있었다. 이 관대한 나라에서 이 필살의 전법을 쓴다면 자신에게 어떤 큰 피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술을 먹고 취했다고 하면 끝날 일이다. 청년은 그 생각과 동시에 죽은 듯 잠에 빠져들었다.

택시 기사는 뒷좌석에 쓰러진 청년을 바라보았다. 미터기를 차려다 괴성을 지르며 다이어리를 던져 버린 청년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택시 기사는 미친 듯 돌아가는 자신의 미터기를 바라보았다. 심야할증에 시외요금까지 붙어서, 요금은 낮처럼 살금살금 올라가지 않았다. 잠깐 사이에 천 원 단위로 마구 올라가버리는 요금을 보고 기사는 이 골치 아픈 청년을 끌어 내리기보다는 청년의 가족에게 택시비만 받아내도 일이 원만하게 해결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더 이상 돌발행동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XX아파트는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있었고 저 정도 수트를 입고 있는 청년의 집안이라면 몇 십만 원 정도는 흔쾌히 지불하리라는 견적이 섰다. 적절한 이유를 붙여 술 취한 청년을 경찰서에 데려다 줄 수도 있었지만 귀찮아지기만 할 수도 있었다. 괜히 자신에게 뭔가 캐물을지도 모를 일이지 않는가. 이전엔 아니었지만, 이제는 택시기사는 무언가를 찾아주고 올바르게 돌려놓는 일에 이골이 났다. 가만히 있던 여자가 갑자기 성추행이라며 소리를 지르며 파렴치한으로 신고했을 때는 정말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식은땀이 나는 순간이었고,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높은 수납함을 부착해 어떻게 해도 허벅지를 만질 수 없는 구조임을 증명해도 경찰에서 지랄 맞은 경우니까 대충 적당 선에서 쇼부 치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대로 경찰서로 택시를 몰고 돌진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었다. 그러지 못한 것은, 단순히 택시가 자신의 소유가 아닌 택시회사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택시기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호의라면 질색이었고, 손님들은 그냥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족했다. 그는 이 직업을 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봐왔고, 그 여자는 그 중 악질에 속하는 편이었을 뿐이다. 평소에도 가난한 사람들은 택시에 달린 내비게이션대로 가지 않으면 빙-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매번 자신에게 항의하곤 했다. 아니, 가난한 사람 모두는 아니지.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좀 잘산다고 착각하고 있는 어정쩡한 사람들이 매번 그랬다. 이 바보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 바닥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전문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이던 그들은 자신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로 그들의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제야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돈을 꺼내 자신에게 내밀었다. 자신에게 화를 낸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팁 같은 것을 지불하는 사람은, 애석하게도 전혀 없었다. 팁을 줄만한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냐고 하면 - 자기 소유의 기사가 있거나, 술 마시고도 차를 타는 쿨한 성격이거나, 아니면 나이트에 쳐 박혀서 둘리라는 멍청한 이름의 웨이터에게 만원 씩 꽃아 주며 ‘좋은 여자’를 찾거나 하는 그런 사람들이었지 밤에 택시에 타지는 않았다. 그런 면에서 청년은 보기 드문 경우였다. 좋은 수트에, 팔자 좋지, 걱정 없지. 택시 기사는 자신의 대학 시절을 생각하며 빙그레 웃었다. 청년의 집에 그를 데려다 놓는다면 그의 집에서는 고주망태가 된 한심한 그들의 아들을 집에 데려다 놓은 이 드라이브 전문가에게 응당 보상을 치룰 것이다. 드라이브 전문가는 차를 인도 쪽으로 대고 잠시 휴식을 취할까 생각도 해 보았다. 그 순간에도 미터기의 돈이 마구 올라가고 있다는 점이 그를 기분 좋게 했다. 그야말로 운수 좋은 날이었다. 택시기사는 그의 정확한 집 주소를 알아내기 위해 조수석 쪽으로 떨어진 다이어리도 주워, 가장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청년은 자취에는 이골이 났다. 졸업반인 그는 4년 내내 자취를 했고, 면접 시즌이 되어 세탁소에서 빌린 양복을 입기 전까지 항상 후질 근한 AMERICA 티셔츠를 입고 다녔다. 아니면 EUROPE나, ENGLAND, FRANCE 따위가 적혀진 티셔츠였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지구마을이라고 불렀다. 싸구려 옷일수록 옷에 쓰인 글자는 티셔츠의 디자인과는 상관없이 무지막지하게 커져 마치 팻말같이 보였다. 오늘은 어찌 어찌 찾아간 면접장에서 1500만원의 연봉을 자랑스럽게 제시하는 인사담당자에게 욕을 퍼부어줄까 하다가 어색한 미소만 짓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오는 길에 포장마차에서 속상한 마음에 술과 순대 안주를 시켰는데 무려 3만원이 나와서 분명히 덤터기를 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에 탄 택시였다. XX아파트는 그의 집 근처에 있는 주상복합 아파트였고, 그는 항상 그 곳에서 내려 집까지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청년은 택시에 타기 전까지 끊임없이 생각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스스로 대범하게 나서지 못한다. 스스로 대범하게 나서지 못하는 사람은 가난하다. 뭘 해도 어딘가에 걸려버리니 돈이 없고, 가난에 얽매여 버리니 사랑이 힘들다. 내 여자에게 14K 반지라도 선물할까 싶다가도 내일 끓여먹을 너구리 생각에 동네 문구점 앞에서 5백 원짜리 뽑기를 돌리고 나온 후질 근한 반지를 쳐다보며 이것으론 안 되겠다- 생각한다. 거참 되는 것이 없다 생각하며 그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디지털시계로 숫자를 7개의 선으로 표현하는 싸구려 시계다. 청년은 잠에서 깨어났다. 12시가 넘었으니 할증이 붙는다는 생각에 잠이 번쩍 깼다. 청년은 항상 그랬다. 잠에서 깨어 택시를 둘러보니 택시기사는 말 같은 얼굴로 아주 천천히 택시를 몰고 있었다. 오래된 차에 비해 유난히 돋보이는 최신식의 카 오디오에서는 최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저급 트로트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몸이 달아올라 오늘 밤 좀 있다 가라는 내용을 연이은 뽕짝 리듬에 실어서 내보내고 있고, 기사는 연신 핸들을 손가락으로 탁탁 쳐가며 나름대로의 리듬을 타고 있었다. 이 공간에서 청년은 갑자기 카 오디오가 불쌍해졌다. 허울 좋은 카 오디오가 이 택시에서 낼 수 있는 소리는, 뭐 그런 것들이었다. 청년은 고통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카 오디오가 자기 같기도 한데, 목이 마른 것이 술 때문인 것 같기도 한데, 그것보다 이 답답한 택시는 너무 더웠다. 멍청한 택시기사가 에어컨이 아니라 히터를 틀어놓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이 택시가 자연스럽게 보도블록 옆에 매끄럽게 정차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자신이 잠에 빠지기 전과 택시가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좌석에 사람이 있었다. 요새 유행하는 스타일의 야상과 양털 부츠를 걸쳐 추위로부터 중무장한 20대 초반의 아가씨였다. 청년은 술에 취했지만, 앞자리의 이 여자가 굉장한 미인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청년은 마른 입술을 혀로 살짝 핥았다. 저기요 - 청년은 말을 걸었다.

그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청년은 이상한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술에 완전히 취한 모양이야. 아니면 자신이 생애 처음으로 택시기사의 윤리라는 것을 저버리고 온갖 샛길로 빙빙 돌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알아챘던가. 택시기사의 윤리라는 말이 이상하긴 하다. 도대체 어디다 써먹는 윤리가 택시기사의 윤리냔 말이야. 하지만 청년은 그런 심각하고 중대한 일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는 모양인지, 풀린 눈으로 조수석을 바라보고 있다. 술주정이로구만. 기사는 이제 그만 20대의 이 풋내기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청년이 크게 웃었다. 저게 보입니까? 뭐가 보인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기사는 청년의 눈이 닿아있는 방향으로 같이 눈을 돌렸다. 일방통행 표지판. 저것을 보고 말하는 것일까. 기사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얼른 이 넋 나간 인간이 차라리 아까처럼 조용히 입 다물고 뒷좌석에서 자 주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예쁘네- 청년이 중얼거렸다. 일방통행 표지판이 예쁘다는 건가? 저런 멋대가리 없는 표지판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구만. 기사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농담 식으로 한 마디 던졌지만 청년은 듣지 않았다.

밝은 불빛과 달리는 말 속에 그녀가 있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청년은 손을 뻗어 여자의 얼굴로 손을 뻗어...
잡지 못했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마치 홀로그램처럼, 하지만 어릴 적 기억 속의 홀로그램보다는 더 현실적으로 마치 영화처럼 여자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그녀가 누군지 그제야 알아챘다. 그녀는 다시 말하면, 자신의 여자 친구였다. 그 얇고 별로 붉지 않은 입술이 그녀를 반하게 만들었었다. 별로 크지 않은 눈과 크다고 할 수 없는 키, 모든 것이 그냥 그랬던 그녀는 그래서 특별했다. 그 작은 입술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청년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해주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2년이 지나도 사랑에 관여한다는 호르몬은 멈추지 않았지만, 돈이 바닥났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의 호르몬이 이상 현상을 일으켰다. 더 이상 청년을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녀는 조수석에 2년 전과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주 기품 있게, 무엇보다도 품위 있게 천천히 청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것만으로 청년은 심장이 막혀 옴을 느꼈다. 알코올의 힘은 이 여자 앞에서 그저 16.8도 혹은 70도의 사랑의 수치로 환산되었다. 도수가 높을수록, 취할수록 세상이 흔들리고 여자는 또렷해진다. 청년은 안타까움을 느낀다. 다시 술에 취할 수 있다면.
“왜 나를 구해주지 않아?”
그녀가 말을 한다. 이상한 말을 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청년의 얼굴에서 읽어낸 그녀가 아주 천천히 택시의 미터기를 가리킨다. 말. 또 말. 그 말. 청년은 깨달았다. 여자는, 말에게 잡혀있는 것이다.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다시 그녀를 되찾아오기 위해 선택된 영웅이 된 것이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이 아까 이뤘어야 할 그 위대한 마법의 실패에 대해 탄식했다. 위대한 마법사는 실패에 좌절하지 않지. 청년은 위대했고, 그는 실패에 좌절하지 않는다. 멋진 논리다. 대뇌에서 수많은 뇌 세포들과 간의 알콜 분해 효소들이 박수를 쳐댄다.
“날 다시 사랑할 수 있게 해줘.”

도대체 저 뒷좌석에 앉아 아까부터 정신 놓고 있는 저 녀석은 아까부터 뭘 할 수 있다고 중얼대는 거지? 택시기사는 이제 아예 청년이 마땅치 않았다. 청년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기사를 바라보고, 씩 웃었다. 한숨을 쉬며 택시기사는 XX 아파트의 인도 쪽으로 차를 가져다 댔다. 그러나 여전히 청년은 정신을 차릴 생각을 하지 않고, 택시기사는 몇 번 청년을 부르다가 잠시 쉬기로 했다. 택시 안에서 담배가 이제 불법이라지만, 왠지 모르게 담배가 생각났다. 제기- 불법이라 안 피우나. 안 걸리면 장땡이지. 택시기사는 ‘스카이 단란주점’이라고 쓰인 검은색 일회용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자신은 가보지도 않은 단란주점 라이터로 불을 켜고 있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는 창문을 열고 연기를 내뿜었다. 이제 어쩐다? 일단 담배를 피우는 동안 청년의 다이어리를 구경하기로 했다. 예상대로 청년의 다이어리의 스케쥴은 빈틈없이 깨끗했다. 거의 쓰지 않는 모양이다. 택시 기사는 대신 휘갈겨 쓴 메모와 엉성한 그림들을 슬슬 넘겨보았다. 몇 장 넘겨보던 택시 기사는 이내 다이어리를 탁, 하고 덮었다.
이거 아주 욕만 잔뜩 써 놨구만.

청년이 시도 한 것은, 말의 질식사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 앞자리의 말의 목을 두 손으로 조르기 시작했다. 푸르릉 거리던 말은 버둥버둥 거리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애초부터 물리적인 힘을 쓸 것을 너무 고차원적인 소거 방법을 선택해서 아까는 힘만 낭비했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여자는 죽은 말을 보고는 청년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아직도 돈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청년은 정신이 반짝 드는 느낌을 받았다. 여자는 청년이 보는 앞에서 말로 변한다. 반짝이다가, 점점 작아지다가, 기계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신기한 일이다. 청년은 놀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말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기계 안으로 돌아갔고, 다른 점이라면 더 이상 말이 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요금은 11만원 정도에서 멈춰 있었고, 차도 멈춰 있었고, 기사도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마저 멎어버린 듯, 청년은 거대한 말에게 뭔가 당했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말은 인간보다 영리했고, 자신은 이용당했다. 억울해, 나는 아니야. 청년은 자신의 여자가 말에게 잡혀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여자가 말과 같은 종족이었다니. 청년은 배신감을 느꼈다. 저 인간의 돈을 빨아 먹는 괴물이, 내 여자 친구와 동족이었다니. 그렇다면 나는 그녀를 구하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이었을까.

“십 일만 원입니다!”
택시기사는 당연히 청년이 들을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예의상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블랙박스가 녹음까지 되는 세상이니 증거를 남기기 위함도 있었다. 아무튼 택시기사는 일어나지 않는 청년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 완전히 취했구만, 맛이 갔어. 그는 인사불성의 청년을 끌어내기로 마음먹었다. 택시기사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돈도 없었고, 갑자기 미터기를 걷어차려 할 정도로 술버릇도 개차반이었고, 다이어리를 보니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 자신에게 상처 입힌 여자 이야기를 가득 써놓는 그냥 20대였다. 택시기사는 뒷좌석의 문을 열고, 청년을 끄집어냈다. 기운이 빠진 청년은 그대로 끌려 나온다. 멋지게 멱살을 잡고 욕지거리라도 할까 생각하다가, 온 몸에 아무 힘도 주지 않은 청년이 의외로 무거워서 그의 생각대로 한 번에 순순히 딸려 올라오지는 않았다. 갑자기 그는, 그의 의지나 신념이 모두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냥 길거리에 청년을 내팽개쳤다. 십 년만 젊었어도, 라고 중얼거리며 그는 숨을 돌리고 다시 차에 올라탔다. 돈 좀 버나 싶었더니만. 택시기사는 입맛을 다시며 청년을 내버려 둔 채 빠르게 택시를 몰았다. 택시의 테일 램프는 어지럽게 흔들리다 - 멈췄다가, 이내 첫 번째 사거리의 오른쪽으로 붉은 불빛만을 남긴 채 흩어졌다.

어딘가에서 스믈거리며 올라오는 찬 기운에 청년은 눈을 뜬다. 자신이 왜 길바닥에 엎어져 있는지 생각하다가 퍼뜩 자신의 소지품들을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소지품들은 자신의 수트 주머니마다 모두 들어 있었다. 흙이 묻은 수트를 보고 한숨을 내 쉰 청년은 흙을 대충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가운 겨울밤의 향기가 청년을 뒤흔들었다. 온 몸에서 느껴지는 욱신거림에 청년을 얼굴을 찌푸렸다.
“재수도 없는 날이야.”
머리를 긁적이며 그는 드라이 클리닝 비가 얼마인지 생각하면서 좁은 골목길로 발을 옮겼다.
“아아... 집에 도착하면 따뜻한 물이나 나왔으면 좋겠는데...”
청년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도 골목길의 어둠 사이로 흩어졌다. 부쩍 내려간 날씨 탓인지 몇 안 되는 거리의 사람들은 저마다 옷깃을 여매며 총총히 지나갔다. 이제 겨울이었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377 단편 [번역] 아마릴리스호 - 캐리 본2 이형진 2011.06.11 0
단편 택시 조원우 2011.06.12 0
1375 장편 추적追跡 - Chapter 1. 인과응보因果應報 [File 9] 최현진 2011.06.12 0
1374 단편 2845 곰돌이5 빛옥 2011.06.15 0
1373 단편 Flash K.kun 2011.06.17 0
1372 장편 추적追跡 - Chapter 1. 인과응보因果應報 [File 10]1 최현진 2011.06.18 0
1371 단편 Siren (By Demonvein) + 이메일1 최병찬 2011.06.20 0
1370 단편 꿈꾸는 문들의 도시 빈군 2011.07.02 0
1369 단편 신림역 살인마 니그라토 2011.07.03 0
1368 단편 빌딩 마리아주2 조원우 2011.07.08 0
1367 단편 앨리스는 더 이상 여기 살지 않는다 김진영 2011.07.10 0
1366 단편 안심 위기백 2011.07.14 0
1365 단편 외계인2 광몽 2011.07.16 0
1364 단편 놀라운 배우들 강민수 2011.07.16 0
1363 단편 노래하는 빵1 irlei 2011.07.18 0
1362 단편 [Machine] K.kun 2011.07.23 0
1361 단편 11시 이정도 2011.07.23 0
1360 단편 [재업로드] 월세가 저렴한 방 헤르만 2011.07.27 0
1359 단편 무소식이 희소식 고요 2011.07.28 0
1358 단편 ATM 언어유희 2011.07.28 0
Prev 1 ... 74 75 76 77 78 79 80 81 82 83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