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중간계에서

2003.12.13 20:2612.13

시각은 오후 5시. 엄마와 함께 밖으로 나가 슈퍼마켓으로 장을 보러
간다. '신선한 우유' 3통과 우엉, 연근, 야쿠르트, '달지 않은 케잌'
오뜨 1통과  칼국수, 떡국용 떡, 두부 1모와 빨래장갑, 고등어 통조림
2개와 꽁치, 그리고 이란산 석류 1개. 나는 마지막으로 석류를 떼를 써
서 골라 내었다. 아직까지 한번도 석류를 먹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그냥 실 뿐이라고 하시고 판매아주머니는 이란산이라 우리
나라 것과는 달리 새콤달콤하다고 하시는 이 석류. 나는 이 석류가
내 오늘의 생에 있어 커다란 사건이나 되는 듯 여겨져 조심스레
갈무리해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칼로 4등분하고
한 입 베어문다. 와사삭! 상큼하고 신 맛이 한꺼번에 입 안으로
퍼져든다. 씹기 시작하자 과육 안쪽의 씨가 딱딱하게 걸려온다.
엄마는 하나씩 빼내가며 먹으라 하셨지만 그냥 씨까지 통채로 우적
우적 씹어먹었다. 판매아주머니의 말은 틀렸다. 전혀 달콤함은
모르겠고 신맛이 강하다. 다행히 나는 신맛을 좋아했기에 그 맛을
음미하며 마지막 한 알이라도 놓칠새라 부지런히 이빨을 놀렸다.
처음 먹는 석류의 맛은 어느 이계에서 처음 맛보는 이름모를 과일
의 맛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몇시간이 흐른 뒤 나는 석류껍데기를 치우고 방으로 돌아와 컴퓨터
를 켰다. 그리고 내가 매일 밤새는 줄 모르고 하는 MMORPG 게임을
실행시킨다.  그 게임의 이름은 <Star Bugs Galaxies>. 유명한 영
화인 Star Bugs 시리즈를 배경으로 하여 만들어진 게임이라고나
할까. 나는 비록 그 시리즈 중 단 한 편도 본 적이 없지만 이 게임엔
이미 미쳐 있었다. 나의 하루 중 10시간 이상은 이 게임을 위해 쓰여
졌으니 이 SBG란 게임은 나의 삶의 40퍼센트가 넘는 비중을 차지하
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40퍼센트가 넘는 시간동안 나는 이 세계
의 주민이 아닌 SBG 속의 주민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완전한 상태. 나는 역시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잠이 오
면 자야 하는 '이계인'에 불과하다. 나의 존재는 SBG와 현실세계
라 불리우는 세계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걸린 채로 움직인다. 나는
skilling 에 힘쓰느라 열심히 SBG안의 몹들을 사냥하고 있는 동안
에도 다른 한켠에선 mirc란 프로그램으로 SBG에 접속해 있는 타인
들과 채팅을 나눈다. 그들역시 나와 비슷하게 두 세계 사이에 걸
쳐 있는 이계인들. 그러나 그들은 나보다 좀 더 두 세계를 오가는
상황에 자연스럽게 길들여진 듯 보인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속에서
그들은 자신이 새로운 타입의 존재들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모든 것은 내가 말하는 것처럼 딱딱하지 않다. 심각해 하
는 것은 오직 나뿐. 그들에게 이 모든 상황은 하나의 심심풀이 게
임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채널제목] 비상 사태! 시티홀 앞에서 제벨 마인 설치됨 -해체법
아시는 분 급구 / 생산직 분들 길드홀 프리보드 확인 요망
[제목변경] skyfood님 (2003년 XX월 XX일 오후 4시 40분 14초)
[19:34] <@안젤리스> 푸드님 사냥 안하세요? 저 펫하나 샀어요..
phenda 인가 pantha인가
[19:35] <@안젤리스> 호랑이 몹 23레벨 짜리
[19:35] <@skyfood> 지금 사냥중임.. 다만 as-sx는 없어요.  
[19:35] <@안젤리스> 어디서요?
[19:35] <@skyfood> 리퍼블릭 블라스터 테스트 사냥임..
[19:35] <@안젤리스> 오..
[19:35] <@안젤리스> 그론다나 테임해야겄다.
[19:37] <@滿天|투영> 흘흘.. 성과는 만족할만하죠?
[19:37] ***제니|Silent 님이 #serat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19:38] <@안젤리스> 점님
[19:38] <@滿天|투영> 네
[19:38] <@skyfood> 거참 답답하네..
[19:38] <@안젤리스> 콤포짓 아머 좀 싼걸로 풀셋 얼마죠?
[19:38] <@滿天|투영> 모르겠는데요
[19:39] <@滿天|투영> 전 아머스미스가 아니라서
[19:39] <@안젤리스> 아..
[19:39] <@안젤리스> 음..
[19:40] <@Keston> 음.. 도시에 건물 지었고 돈 넣었어요.
[19:40] <@滿天|투영> 넵 이제 시민이 되셧음 +_+
[19:41] <@滿天|투영> 잠시만요 서바이벌 가르쳐드릴게요
[19:41] <@滿天|투영> 흠.. 케스턴님
[19:41] <@Keston> 네
[19:41] <@滿天|투영> 서바이벌이랑 트랩 3이었던가요?
[19:42] <@안젤리스> 사냥하실분 안계신가요? 미션 하실분?
[19:42] <@Keston> 네 서바이벌하고 트랩 3단계요.
[19:42] <@滿天|투영> 서바이벌은 제가 가르쳐드릴 수 있는데 트랩
은 안되거든요 거기 시티홀 앞에 보면 스카웃 트레이너가 있어요
[19:42] <@Keston> 네.. 그것 만이라도 가르쳐 주세요.
[19:43] <@滿天|투영> 거기서 배우시는게.. 돈이 들긴 하지만..;;
[19:43] <@滿天|투영> 제가 알기론 길드에 트랩 트레인이 가능한
분이 거의 없거든요
[19:48] <@데쓰|셤공부> 흣!
[19:49] <@데쓰|셤공부> 쀍! 쀍~!
[19:50] <@滿天|투영> -_-
[19:50] <@데쓰|셤공부> 빽!빽!빽!빽!뺶!뺶뺶뺶뺶뺶!!!!!!
[19:50] <@데쓰|셤공부> 마인 해체(........)
[19:50] <@滿天|투영> 음-_-
[19:50] <@滿天|투영> 흠냐
[19:51] <@제롯> 오
[19:51] <@데쓰|셤공부> .......
[19:51] <@제롯> 데쓰사마 올앤만
[19:51] <@데쓰|셤공부> 오늘 아침인가 어제 아침에도 그러지 않았
던가요


여기까지. 나는 이제 그만 채널을 닫고 mirc를 종료시킨다. 나
역시도 이들마냥 SBG에 목매달은 녀석임에도 여전히 이들에게 거
리감이 느껴지는건 무엇 때문일까. 내 얼굴은 컴퓨터 모니터를 향
하고 열려져 있는 메모장 프로그램 위로 타이핑이 시작된다.



할 말이 더이상 없다.
나는 대체 어디쯤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어디쯤 나는 존재한다고 해야 할까.
나는 내가 마치 세계들 사이를 부유하는 이름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내가 속한 세계는 어디인가.
내가 속해야 할 세계는 어디인가.
나는 세계 없이도 존재하는가.
세계는 나 없이도 존재하는가.
이곳은 진정 어디인가. 나는 진정 누구인가.
여기 나에게 차라리 엘프와 드워프를 보여다오.
차라리 네버랜드와 오즈의 마법사를 보여다오.
이 정리되지 않는, 정리할 수 없는 세계는 내게 너무나 버겁다.
차라리 내게 익숙한 꿈을 보여다오.



그리고 잠시 뒤 이 내용은 저장되지 않은채 메모장의 종료와 함
께 사라져 버린다. 그 흔적이 언제 어디에 존재했었나 싶게. 그리고
나는 또다시 다른 곳으로 움직인다. 컴퓨터의 전원을 꺼버리고 의
자에서 일어나 집밖으로. 거기서 나는 검푸른 하늘, 떠가는 인공
위성이 별처럼 자신을 위장한 하늘을 보며 그 옛날 하늘을 보며
별자리의 신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아
득한 밤하늘. 주위를 밝히는 가로등과 무수한 색깔의 전기등. 문
득 이 알 수 없는곳에서 이렇게 길을 잃고 헤메는 것도 나쁘지 않다
는 생각을 하며 슬며시 입가에 웃음을 머금는다. 모든 것은 존재의
뜻대로. 아직 나에게 중간계를 떠날 자유는 부여되지 않았는지도.
그 전까지 가능한한 기꺼이 나에게 주어진 이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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