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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단편] 불꽃놀이

2003.11.27 01:1511.27

불꽃놀이

성냥을 긋자 파르스름한 불이 피어올랐다. 매우 따듯했다. 이윽고 그 불은 화려한 불꽃이 되어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일본에서의 여름은 꽤 더웠다.

**


1

        “여행이라도 가려고?”

고모할머니께서는 무뚝뚝한 어조로 내게 질문하셨고, 난 밥그릇을 손 위에 올려놓은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작 몇 시간 안 걸리는 거리인데 이 곳은 다른 나라이다. 난 젓가락으로 밥을 먹으려다가 한숨을 삼키면서 밥그릇을 내려놓았다. 불편했다. 밥그릇을 들고 먹는 것은 여간해서 익숙해지지 않는다. 벌써 이곳에 온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말이다.

        “몸 상태는 괜찮겠니?”

무뚝뚝함 가운데 스며있는 따스한 정을 느끼면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고모할머니께서는 여전히 못내 못마땅하신 듯한 기색이시다.

        "더운 계절이다. 선선해졌을 때 움직여도 괜찮을 텐데-. 화상이 아직도 다 낫지 않지 않았느냐.”

난 대답 대신 가만히 물을 마시는 것으로 의사를 표현했다. 고모할머니께서도 역시 한숨으로 내 의사에 대한 못마땅함을 표현하셨다.

화상을 당한 것은 지난 해 이맘 때 즈음이었다. 커다란 불이 붙은 천장의 무엇인가가 바로 코앞에 내려앉았을 때도 그저 난 멍하니 손 안에 토슈즈만 들은 채로 주저앉아 있었다. 실감이 안 났다고 해야 할라나. 마치 영화를 보는 듯 했다. 뜨거움마저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병원의 침대 위였다. 사색이 되어서 달려온 정석 오빠는 그야말로 좀비 그 자체이었다. 큰 언니는 전신에 붕대를 감고서 누워있는 날 보자마자 하얗게 질리면서 그 자리에 그대로 스르르 주저앉아버렸다. 마치 불길 속에서 내가 주저앉았듯이.

살아남은 것 자체만으로도 기적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주제넘게도 고맙지가 않았다. 하나도 말이다. 다시는 춤을 출 수가 없는데-. 이제 어찌하라고-. 그런 생각만이 가득했었으니까.

        “치료는 미리 받고 어디로 여행을 갈 것인지 말하고 가려무나.”

고모할머니께서는 입가를 냅킨으로 닦으시면서 말씀하셨다. 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이미 익숙해진 듯 고모할머니께서는 한숨만 내 쉬면서 나가셨다. 단지 눈앞의 한 사람이 나갔을 뿐인데, 갑자기 매미 소리가 찌를 듯이 크게 들려온다. 은은한  풍경소리가 후덥지근한 바람 사이로 들려오고 있었다.

아, 여름이다.

갑자기 든 생각에 난 피식 웃어버렸다. 바보. 화상으로 인해서 일년 내내 더운 여름인 것을.

**


2

현대 의학이 아무리 진보했다 한들 완치할 수 있는 질병은 대체 몇 개나 될까? 난 책장을 조용히 넘기면서 생각에 잠겼다. 세 번 정도는 읽은 뒤라 이미 다 외워버린 의학서이다. 특히 화상에 관한 부분은 글자의 자간 높이마저도 다 익힐 정도이다. 뛰어난 기억력 때문에 편한 적은 많았었다. 발레를 하면서 실수가 없었다. 안무의 하나하나가 마치 텔레비전의 영상이라도 되는 듯 선명하게 떠올랐으니까.

하지만-. 불이 나던 순간부터 불이 내 몸에 들러붙는 순간까지의 그 과정을 되풀이해서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던가, 꿈으로 다시 꾼다던가 하는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은 괴롭다. 다름 아닌 뛰어난 기억력 때문이라면 고마운 마음은커녕 저주하고픈 마음 밖에는 안 난다.

        “많이 나아졌네. 그래. 여행을 간다고?”

시원스러운 은아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창문 밖에는 내 얼굴을 한 은아 언니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새하얀 케이크 상자가 대롱거리고 있었다.

        “잘 생각했어. 이거 먹자. 요시에 さん. これちょっとお願い.凉しいお茶一杯得て飲むことができましょうか? (이것 좀 부탁해요. 시원한 차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을까요?)”

새하얀 케이크 상자에서는 눈처럼 새하얀 것으로 뒤덮인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나왔다. 화상을 입은 것은 내 몸이지 마음은 아닌데. 난 내 쌍둥이인 은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은아는 알로에 젤을 거즈에 발라서 붙이고 있는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 쉬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2도 화상에 가깝게 입은 사람 치고 넌 회복력이 빠른 편이야. 다행이지 뭐니.”

차가운 아이스크림 케이크는 치즈케이크 맛이 났다. 부드럽고 달콤하고 그리고 다소 느끼한 아이스크림 케이크의 맛은 쌉싸름한 센차와 기막히게 어울렸다.

        “다리- 뭐라고 하셔?”

달칵-. 은아가 찻잔을 내려놓자, 요시에 さん은 바로 찻잔을 채워주었다. 난 두껍게 내려진 발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붕대를 감은 손가락을 움직여서 대답을 만들어내었다. 화재 전에 찍었던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벙어리 간호사이었던 것이 요즘은 감사하다. 그저 일을 위해서 수화를 배운 것이 이리 쓰이게 될 줄은 몰랐다.

        [흉터는 안 남을 듯 하다고 하셔. 그래서-.]

난 센차를 한 모금 들이마시고서 케이크를 한 조각 더 입안에 떠 넣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바로 갈아붙인 알로에 젤은 매우 시원했다.

        “어디로 가려고? 같이 가자. 휴가 받을 수 있을 거야.”

은아의 목소리는 매우 명랑했다. 화재가 난 그 날, 아니 화재가 누군가의 방화였다는 것을 안, 그 날 이후로 은아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검이었다. 덕분에 그녀의 애인인 유이찌 さん이 매우 마음의 고생이 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곳)에 가려고 해.]

내 수화를 읽은 은아의 눈썹은 매섭게 치켜 올라가고 있었고, 그녀의 목소리에는 또 한번의 날이 날카롭게 서리고 있었다.

        “무엇하러-! 위험할 지도 모르잖아. 그 사이코 같은 자식이 널 또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가장 큰 불꽃놀이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정 가고 싶다면 정석 오빠와 같이 가. 혼자 가서 또 다치지 말고!”

하긴 은아의 심정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그녀에게는 소중한 사람을 잃고 또 잃을 뻔한 경험을 두 번이나 하게 해 준 곳이니까 말이다.

작년 이맘 때-. 난 화재로 화상을 입었다.
그리고 십년 전 이맘 때-. 같은 장소에서 나와 은아의 생모인 어머니는 사고로 돌아가셨다.


**



3
다시 가 본 그 장소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고요했다. 일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집 안의 곳곳에서는 매캐한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여길 왜 굳이 오고 싶어 하는 지 진짜 네 마음속은 정말이지 자다 깨다가도 모르겠다.”

정석 오빠의 투덜거리는 소리에 난 그저 피식 웃어 보이기만 했다. 집은 제법 모양새를 갖추어서 수리가 되어 있었다. 근대화가 갓 되기 시작했을 때의 그 건축양식을 충실하게 따라한 그 집은 아니 저택은 다시 증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괴했다. 첫 인상 그대로.

        “궁금해졌어.”

약간 쉰 듯한 내 목소리이지만 나직하게 목소리가 되어서 흘러나오자 오빠는 깜짝 놀란 듯 날 돌아다보았다.

        “너 목소리가-. 나오는 거야?”

굉장히 기쁜 듯한 목소리여서 난 쓴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석 오빠의 얼굴에는 뭐라고 해야 할까나 매우 기분이 좋은 듯한 미소가 크게 그려져 있었다.

        “신이 들린 듯이 나 발레만 계속 해 왔어. 은아 언니의 청으로 가수 생활과 배우 생활을 하면서도, 아버지의 회사 일을 도우면서도, 내 안에는 발레만이 전부였어. 이제 화상은 거의 다 나았지만. 아직도 내 안에서는 뜨겁게 타오르고 있어. 불꽃놀이- 아직은 끝나지 않았어.”

매끄럽기만 했던 내 얼굴 피부 위에 무엇인가 딱딱한 것이 얹혀져 있다. 누군가 날 무척이나 미워하는 이가 시작한 불꽃놀이의 흔적이-. 지금도 밉다. 방화범이 말이다. 똑같이 아픔을 되돌리고 싶을 만큼. 하지만.

        “내 안의 미움이 다 소거되기 전까지는-. 다 타버리기 전까지는 이 불꽃놀이는 안 끝날듯해. 그래서 정리하고 싶어서 왔어. 태울 것은 다 태워버리고-. 남아있는 불꽃놀이 역시 다 해버리고 싶어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서.”

그리고 어머니 역시 이런 날 기대하고 계실 테니까. 그렇게 생각해. 나는 가지고 온 배낭에서 불꽃놀이 셋트를 꺼냈다. 저택의  안 마당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고즈넉했다. 기운차게 울어대던 매미마저도 조용했다.

작년 이맘 즈음에는 나무들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서 매우 시원한 편이였는데 화재로 인해서 다 타버린 지금은 꽤 더웠다. 아무리 많이 나아져서 햇볕을 쬐어도 좋다는 판결을 받은 지 꽤 오래되었다 싶더라도. 여름은 여름이다.

성냥불이 정석 오빠의 손에서 내게 넘겨졌다. 파르스름한 성냥불은 여러 가지 형태의 불꽃놀이 위에 옮겨 붙었다. 그리고 이윽고 끝없이 뻗어있는 하늘 위로 하나 둘 씩 솟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일본에서의 여름은 꽤 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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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화상 火傷 (burn)  
불이나 뜨거운 물에 의한 피부조직의 상해(傷害).
화상은 열상(熱傷)이 라고도 한다. 국소의 증세에 따라 제1∼제3도, 또는 제4도까지의 3∼4단계로 나누는 경우가 많다.

제1도 화상은 보통 60.0 ℃ 정도의 열에 의해 생긴다. 화상입은 국소가 붉어지고 따끔따끔하며 부기가 생기는 일도 있다. 며칠 안에 증세는 없어지지만, 그 자리에 가벼운 낙설(落屑)과 색소침착이 남는 일이 있다. 즉시 찬물로 식히는 등의 처치만으로도 효과를 본다.

제2도 화상은 발적(發赤)·부종(浮腫)이 뚜렷하고 몇 시간 또는 24시간 이내에 크고작은 수포(水疱)가 형성된다. 자각적으로는 작열감(灼熱感)·동통이 심하다. 수포가 터지면 미란면(靡爛面)을 나타내고 다량의 분비액이 나온다. 응급처치를 하고 나서 피부과 전문의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 화상입은 면적이 체표면적의 약 15~30 % 이상에 이르는 경우에는 특히 주의를 요한다. 1주일에서 몇 주일로 치유되지만, 그 자리에 색소침착·색소탈실이 남는 일이 많다. 2차감염을 일으키면 국소증세는 더 심하고 경과도 오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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