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어둡다. 너무 밝아 눈부시기 때문이다.
                                                                                                                                           - 기형도, 1984

                                                                  검은 것은 아름답다
                                                                  (Black is beautiful)


1. 제희
  끝없이 달리고 있었다. 어둡고 축축한 기분 나쁜 풀숲. 불유쾌한 공기가 몸의 끈적이는 땀과 함께 달라붙고 있었다. 물씬 풍기는 소금기 섞인 땀내, 음산한 땅과, 빛 하나 들어오지 못하게 하늘을 가려버린 나뭇가지들이 나를 가두어 놓고 있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나 자신에서든, 땅에서든, 하늘에서든. 어떻게 해서든 이 불길한 풀숲을 벗어나야만 했다. 발목이 울렸다. 나는 맨발이었고, 찢어진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그 무엇이 앞을 가로 막아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뾰족한 모서리의 돌을 거침없이 밟았고 까칠한 흙바닥을, 진흙탕처럼 물이 고여 더러운 곳도 발바닥이 찢어지는 줄 모르고 세차게 달음질 하였다. 단지 달리고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을 뿐, 그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조원이 교재를 들고 기관에 대해 알려주면, 나는 구조가 상하지 않도록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우리가 학습해야 하는 기관을 찾아내었다. 이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 이전에, 스킨을 걷어 내거나 지방을 제거하는 일 또한 도맡아 하는 편이었다.  
  카데바(cadaver)의 뱃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손가락으로 내장을 헤쳐, 이론 시간에 배웠던 장기를 관찰한다. 내장에 코를 박지 않도록 숨을 멈춘 채, 사지가 굳는 듯한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날숨- 귓속으로 두근거리는 나의 심장 소리가 들려온다. 꼼짝 못하는 무기질의 내부를 잔인하게 파헤치고 있는 유기질의 알리바이가 명백해지는 이 순간, 들숨- 강렬한 포르말린 냄새와 부패한 내장의 악취가 간간히 섞여, 코끝과 입술 사이로 차가운 기운이 들어오는 것이다. 이공간의 무기질과 3차원의 유기질이 하나가 되어 눈앞은 온통 청록으로 물들여졌다. 담즙으로 물들여 진 것은 내장기관 뿐만이 아니다. 이것 봐, 옆구리 터진 녹색 만두야. 어디선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상상을 한다. 교재를 들고 있는 소현에게 메스를 쥐어주고 일부러 두꺼운 정맥을 가리켜 주는. 카데바에 손을 대는 것을 극히 꺼리는 소현에게 ‘너만 깨끗할 테냐?’ 노려보면서 소리친다. 다른 세 명이 가혹한 처사라고 흰 동자를 굴리면, 나의 동공에 굴복할 때까지 강력하게 밀고 나갈 것이다. 소현은 동기들을 위해 메스의 날을 세워 스윽, 소리를 내듯이 팔목을 놀린다. 그리고 전기가 튄다. 하지만 전기의 날카로운 빛이 아니라, 포르말린과 오랜 보관시간에 변색된 보라 색 피가 솟아오를 것이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소현과 나의 눈과 턱, 성대 부분에 너저분하게 달라붙어, 웃는 소리는 일말의 비명소리로 뒤바뀐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림과 동시에, 구제 청바지 속에 있는 핸드폰의 진동이 격렬하게 울렸으므로, 나는 카데바의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반질거리는 지방이 잔뜩 묻은 수술장갑을 내던지고, 조원들에게 잠시 쉬었다 하자고 했다. 왠지 눈이 몹시도 피곤하다. 고개를 들고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 나다. 저녁에 외식을 하려고 하는데 해인이 너 없으면 안 나온 댄다. "
  달갑지 않은 목소리. 권위적인 힘을 잔뜩 실어 투박하게 낮은 바리톤으로, 상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나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을까. 내키지 않는 전화번호를 누르면서 그 두툼하고 굳게 닫혀 있는 입가는 불쾌함으로 잔뜩 뒤틀려 있었을 것이다.
" 7시, A동에 있는 저번 그 레스토랑으로 늦지 않게 나와라. "
  뚜욱. 그것이 전부였다. 할 말이 모두 끝난 상대는 너에겐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 일말의 배려도 두지 않은 채 통화를 끊는다. 초대가 아닌 일방적인 통고. 너의 대답 따위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아버지’의 행동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갑자기 차가운 캔 음료가 볼에 닿아서 흠칫했다. 모를 미소를 띠며 진헌이 어느새 옆에 와 있었다. 캔 음료를 건네며 진헌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진헌의 하얀 손이 '네스카페' 라고 써있는 캔 음료의 로고에 닿아 있었다. 나는 로고가 보이지 않도록 진헌의 손을 맞잡았다.
  하얀 손. 나는 남자의 것 같지 않도록 하얗고 마른 진헌의 손이 좋았다.
" 포르말린 냄새난다. 실습 끝나고 학교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면 사람들이 모두 쳐다 봐. 의대건물이라 모두 실습 때문인 걸 알고 있으면서도 냄새난다고 일부러 흉을 보지. 장난이더라도 가끔 기분 상할 때가 있어. 그래도 가장 기분이 상할 때는, 네 손에 이상이 생기는 거야. 그럼 꼭 내 몸에도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거든. "
  진헌은 웃었다. 항상 포르말린 냄새가 배겨 있긴 하지만 나도 자기 손이 좋다고, 함부로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실습이 끝나면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했다. 나는 따라 웃으면서 선약이 생긴 것 같아 안 되겠다고 대답한다.
  다시 핸드폰의 진동이 왔다. 액정에 발신번호가 뜨지 않지만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진헌에게 고갯짓을 하고 잠시 창가로 나왔다. 예상했던 해인의 목소리가 전화기 저편으로 흘러나온다.
" 내키지 않으면 오지 않아도 돼, 제희야. "
  항상 나를 구원해 주는 목소리. 물론 아버지를 본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해인을 본다는 것 또한 다른 의미로 괴로운 일이었다. 실습실로 먼저 돌아가는 진헌의 뒷모습이 보였다.
" 어머니 뵌 지도 오래됐고. 갈게. "
  '어머니'라는 어감이 혀에서 감길 때 나는 실눈을 떴다. 오래 전부터 꺼내지 않던 단어였는데. 나는 냉소했다.
  쉬는 시간이 끝나는 벨이 울리고 있었다. 해인에게 간단하게 인사말을 하고 나는 통화를 끊는다. 해인은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실습실로 들어가면서 다시 포르말린의 차가운 기운을 느낀다. 다른 조원들이 웃었고, 배속이 다 헤집어진 카데바가 손을 들어 「여, 친구, 나머지 얼렁 해줘」하면서 웃고 있었다. 나는 수술장갑을 끼고 핀셋을 집어 들며, 「내 솜씨가 마음에 들었나 보군」하고 웃었다. 카데바의 복부 스킨을 열어 재끼면서 다른 조원들의 웃음소리도 커졌고, 카데바의 웃음소리도 커져갔다. 눈이 찔러오듯 아파온다. 카데바의 얼굴을 덮은 거즈가 카데바의 웃음소리로 들썩거리고 있었다. 나는 카데바의 귓가에 입을 대고 「모두가 쳐다보잖아. 이제 조용히 해」하고 속삭였다. 카데바는 내 말을 잘 들었다. 조원들의 웃음소리와 카데바의 웃음소리는 동시에 그치고 눈의 통증도 말끔히 사라졌다. 나는 이내 해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해인은 세련된 체크무늬의 깔끔한 연두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하얀 살결과, 어깨를 살짝 스치는 검은 내추럴 웨이브. 언젠가 로마그리스 신화 책에서 본 삽화에서 아리아드네 공주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머리가 소의 형태를 하고 있는 괴물에게서 용사를 구해내기 위하여 지혜를 짜내고 있던 순결한 눈의 아리아드네 공주. 미궁 안의 괴물, 괴물을 처치한다 하더라도 미궁 속에서 헤매다 죽을 운명이었던 용사를, 이 순진하고 아름다운 공주는 온 마음을 바쳐 사랑한다. 그리고…… 버림받는다.
  레스토랑은 예전에 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고급스러운 샹들리에가 눈부셨다. 붉은 빛을 띠는 윤기 나는 원목 탁자와 의자가, 아라베스크 자수가 놓여진 상아색 실크 식탁보와 잘 어울렸다. 한 가운데 놓여진 안개꽃과 장식된 한 떨기 노란 장미는, 어머니의 취향을 고려한 아버지의 특별 주문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하필 노란 장미꽃이라니, 왠지 뜻을 알 것도 같아 나는 슬쩍 조소했다. 주변은 어둑한 조명으로 샤콘느(chaconne)가 애잔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고풍스러운 분위기에는 일찍이 익숙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나는 항상 이방인이었다. 남이라도 알 세라 쉬쉬하며 길러왔던 처지여서 한 집에서 살았던 적도 없고, 아버지, 어머니 또한 부모다운 애정을 제대로 베풀어 준 적이 없었다. 한 달에 두어 번 숨죽여 해야 했던 어머니와의 통화,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자신에겐 힘이 없다고 말하곤 했었다.
  나는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해인의 눈총을 받고 있었다. 일부러 그랬음을 단번에 알아챘는지 내 허벅지를 꼬집고 있었다. 청바지라서 그녀의 손가락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나만 알아채도록 한숨을 쉬는 해인에게 나는 눈웃음 지어 보였다. 언제나 해인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났다. 처음 해인을 보았을 때에는 울고 있었지만, 그 이후로 해인에게 눈물을 보인 적은 없었다.
  어머니는 불안한 미소를 띠며 내내 침묵을 지키고, 아버지는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해인에게 안부를 묻는다. 멋지게 분산된 분위기였다.
" 향수 냄새가 너무 짙구나. "
  아버지가 침묵하던 불편한 심기를 마침내 드러내었다. 아버지의 눈은 여전히 나를 향하지 않은 채였다. 레드와인을 마시며 디저트로 나온 과일푸딩을 포크로 적당히 잘라 내고 있었다. 여린 푸딩 조각을 잘라내는 데에도 아버지의 굵고 힘 있는 손동작을 보면서, 저 손으로 메스를 잡으면 다른 구조들이 한꺼번에 잘려나가 모두 상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섬세하지 못한 손길에 분노한 지방덩어리가 저 건방진 손목을 질퍽하게 감아올릴 것이다. 아마도「날 내버려 둬!」라고 소리치는 것이겠지. 그렇다. 카데바는 좀더 소중하게 다루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오늘 해부학 실습이 있었거든요. 포르말린 냄새를 없애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향수를 이렇게 뿌리지 않으면……. "
  나는 잠시 곁눈질로 해인의 동태를 살폈다. 해인의 눈은 '안돼.' 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개의치 않기로 한다. 해인에게 눈치를 준 것은 알아서 할 테니 끼어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 손이고 얼굴이고 내장 기름이 묻어서 이상한 냄새가 나거든요. 물론 포르말린에 깨끗하게 소독하고 절인 시신에서 나온 거라 썩은 냄새는 심하지 않겠지만. 아직 하고 있는 실습은 어떤 영화에서 나왔듯이 뇌를 꺼내는 단계는 아니에요. 있잖아요, 살아 있는 사람을 마취약으로 취하게 해서 두개골을 그대로 쪼갠 채, 뇌를 잘라서 프라이팬에 지지는 장면이요. 우린 아직 압도멘(abdomen)의 스킨을 잘라……. "
  챙캉ㅡ! 차가운 금속성이 차이나 접시를 날카롭게 찍어내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푸딩 위로 포크를 내지르듯 던진 것이다. 상아색의 윤기가 흐르던 실크 식탁보 위에는 연두색 푸딩 파편들이 참담하게 튀어 있었다. 어머니는 어두운 표정으로 나와 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보고, 해인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샤콘느의 애처로운 G단조 선율은 이윽고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다다다단다다……. 나는 점차 빨라지고 있는 바이올린의 선율을 따라 마음속으로 흥얼거리고 있었다. 다단다다다, 다다다단…….
" 널 부르는 게 아니었는데. 다시는 네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
  박차고 일어서는 아버지의 거친 의자 소리가 음침한 G단조와 어울리는 듯싶었다. 나는 여유 있는 웃음으로 의자에 깊게 눌러 앉았다. 어머니는 어쩔 줄을 모르다가 이내 핸드백을 가지고 아버지를 따라 황망하게 자리를 일어섰다.
  아버지 앞에서는 딸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붙이지 못했던 친어머니가, 곱디고운 자태로 어두운 조명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다다다-다, 따-다ㅡ안.
  자, 하나의 희극 디 엔드.

  끝없이 달리고 있었다. 어둡고 축축한 기분 나쁜 풀숲. 나는 몹시 넘어지고 뒹굴어서 보기 흉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잘려진 머리카락에는 흙과 마른 나뭇잎이 한데 섞여 지저분한 모습이었다. 발목이 시리고 아팠다.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나는 닦을 생각도 없이 개처럼 헐떡거리면서 달리고 있었다. 추웠다. 햇빛이 들었으면 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알을 굴렸다. 거미줄처럼 얽힌 나뭇가지들은 조금의 빛도 새어 들어오지 못하도록 나를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었다.
  물이 필요했다. 물은 없었다. 힘이 없어 비틀거렸지만 중심을 잡으려고 필사적이었다. 그래서 우스꽝스런 포즈로 춤추듯 한 바퀴 돌다가 넘어졌다. 습기 젖은 흙바닥 때문에 특별하게 통증이 오는 곳은 없었다. 단지 이빨 하나가 침 섞인 선홍색 피와 함께 툭, 하고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타들어 가는 듯한 끔찍한 갈증을 조금이나마 없앨 수 있을까, 잇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있는 힘껏 빨아들인다. 나는 발목에서 흐르던 피에 허리를 숙여 짐승처럼 핥고 빨았다. 모자랐다. 앞 이빨을 내 발목에 박는다. 피가 난다. 다시 핥고 빤다. 그리고 웃었다. 이 비릿하고 짭짤한 맛이 땀인지, 피인지 구분할 수도 없을 정도로 나는 한 마리의 짐승이 되어 있었다. 혹은 모른다. 눈물이었는지도…….

* 카데바(cadaver) : 해부용 시체
* 샤콘느(chaconne) : 토마소 안토니오 비탈리(Tomaso Antonio Vitali, 1660~1711)
* 압도멘(abdomen) : 복부


2. 해인과 제희
  나는 괴물이었다. 나를 두려워 한 인간들이 매년 7명의 소년과 7명의 소녀를 바쳐왔다. 사춘기 아이들의 육질은 적당히 질기고 육즙이 신선했다. 복부는 피하지방이 많아 씹는 맛이 별로였지만, 허벅다리 안 쪽의 내전근과 종아리의 탄력적인 비복근은 그야말로 최상급이었다. 그러나 가장 아껴 먹는 것은 두 눈알이었다. 눈꺼풀에 손톱을 박아 그대로 파내면 댕글댕글한 것이 선홍색 시신경과 함께 달려 나왔다. 입안 깊숙이 넣고 어금니로 깨물었을 때 터지는 시큼한 방수가 또 다른 묘미였다.
  이틀에 한 명씩, 야금야금……. 14가 13이 되고, 13은 곧 10이 된다. 그것은 곧 9, 8, 7, 6……. 숫자가 작아질수록 아이들은 미쳐간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거나 알 수 없는 말로 끝없이 중얼거린다. 개중엔 목이 쉬어라 웃어대다가, 며칠 씩 혼절해 버리는 것들도 있다. 그렇게 창살이 울리도록 시끄럽게 구는 녀석은 잡아먹기 전에 혀부터 뽑아 버린다. 이미 시체와 같이 정신이 나간 아이는 그 순결한 신체를 마음껏 유린한 다음, 손톱과 발톱부터 천천히 뜯어먹었다.
  나는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해인이 계속 빤히 쳐다봐서 머쓱해졌다. 해인은 둘만 남은 레스토랑에서부터 줄곧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중간에 진헌에게 전화가 왔을 때를 제외하곤, 자신도 벅찬 빠른 걸음을 하다가, 뒤를 돌아 내 얼굴을 쓱 쳐다보고 다시 걷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였지만 싫지 않았다.
  해인의 길고 가느다란 다리가 연두색 치맛자락 아래에서 보였다가 숨었다가 했다. 어둑한 저녁, 해인의 하얀 다리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앞서 걸어가는 해인의 저편으로 강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람이 조금씩 차게 불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해인이 얇게 입었을 텐데 추울 것 같았다. 실제로 내 손을 잡은 해인의 손은 얼음장 같이 찼다. 마치 받침대에 가만히 누워 나의 메스와 핀셋을 기다리고 있는 카데바의 연고동색 살갗처럼.
" 전화 했던 사람은 남자친구인가 봐. "
  강변의 둔치에 치마를 오므려 앉으며 해인은 지나가듯 말했다. 진헌을 말하는 건가하고, '으응' 하면서 얼버무렸다. 아버지를 화나게 했던 나의 무례한 태도를 나무라지 않을까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해인이 내뱉은 말은 뜻밖이었다.
" 잤어? "
  나는 잠시 놀란 눈을 했다가 피식 웃었다. 해인이 그런 것을 물어오는 것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나온 김빠진 웃음이었다. 하지만 해인은 퍽 기분이 상했는지 토라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해인이 그런 것을 물어오는 것에 장난스러워졌다. 가지런히 옆에 앉아서 한 쪽 다리를 해인의 흰 다리 위에 걸친다. 다리가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고 발목을 움직여 내 쪽으로 당겼다. 너는? 하고 묻자 해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얗고 얇은 발목은 금방 내 쪽으로 끌려 들어온다. 오므렸던 치마가 벌어지자, 해인이 서둘러 치마 사이를 잡는다. 그 사이 해인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서 간지럼을 태웠다. 캇,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넘어지자, 나는 해인의 등을 받쳐서 다치지 않게 했다. 가볍다. 처음 만났던 10살 적이나, 스무 살이 넘은 지금이나 해인의 몸무게는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해인은 목까지 빨개져서 짓궂다고 난리도 아니다.
" 나 길 잃었을 때, 언니가 집 찾아줬었지. "
  '언니' 라는 말에 반응하는 건지 해인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내가 능청스레 웃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해인도 웃어 버렸다.
" 오랜만에 들어본다. '언니' 라는 말. 제희, 너 보기 흉하게 울고 있었잖아. 길 잃어 버려서. 처음 만난 날이었어. "
  해인은 내가 살고 있었던 '소망의 집'을 찾아 주었다. 양 길가의 버드나무가 푸르게 늘어져 있던 화창한 초여름 날이었다. 평소와 같던 그다지 뜨겁지 않은 햇빛, 적당하게 불던 바람이 유달리 인상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한 줄기 바람을 따라 터뜨렸던 울음은 나에게 해인을 데려다 주었다.
  훗날 우리가 피로 연결된 사이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하지만 각자 다른 씨로 한 어머니 몸에서 잉태하여 났다는 사실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래도 우리 둘의 사이는 변함이 없었다. 법적으로는 해인의 '아버지'를 나도 '아버지'라 불러도 된다는 것, 그러나 나는 해인의 집에 들어갈 수가 없고 해인의 '아버지'도 나를 딸로서 완고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따위는 해인과 나를 갈라놓을 만한 충분한 계기가 되지 못하였다.
" 제희야,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 "
  해인은 스무 살이 되자 집에서 아주 나왔다고 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아버지와의 갈등이 이유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갈등이 나로 인해 비롯되었다는 것 또한.  
  아버지가 내키지도 않는 나를 가족모임에 불렀던 것은, 내가 없으면 해인도 고집을 피우며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 라는 존재는 당신에게 있어 '하나 뿐인' 딸을 만나기 위한 가장 합당한 빌미였다.  
  강바람이 차가웠다. 해인의 어깨도 으스스 떨리고 있었다. 먼저 일어나 해인을 일으켜 줄 심산으로 손을 내밀었다. 해인이 내 손을 잡았다. 다른 손으로 해인의 하얗고 작은 손을 맞잡았다. 언제 보아도 흡족한 손이었다.  

  끝없이 달리고 있었다. 어둡고 축축한 기분 나쁜 풀숲. 이빨이 떨어져 나가고, 발목엔 살점이 뜯어진 생채기가 있어 절뚝거리면서도 달리고 있었다. 갈증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입술주변엔 말라붙은 피가 너저분했다. 흙투성이인 손으로 입술을 쓸었다. 부르터서 갈라진 입술에서 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까칠한 혀로 가까스로 핥고, 한 발짝씩 어렵사리 걸음을 옮겼다. 아까처럼 달음질을 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어느덧, 물 냄새. 분명히 들려오는 이 소리는 '물'이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허겁지겁 다리를 움직인다. 휘청, 몇 번이고 쓰러져도 필사적으로 몸을 놀리기 시작한다. 우스운 모양으로 허우적대도, 발바닥이 데인 것처럼 고통스러워도,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것은 신기루가 아니었다.
  우물이 있었다. 돌 틈마다 이끼가 끼고 무성한 잡초가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우물에서는 물이 넘치고 있었다. 우물 안을 들여다 볼 틈도 없이 흘러나오는 물을 손으로 받아 마셨다. 차갑지만 상처 때문에 뜨거웠다. 세수를 한 다음 발목부터 닦아내, 스커트 자락을 올려 땀에 젖은 허벅지와 둔부를 씻어내었다. 어깨와 가슴에 물을 내던지듯 씻어낸다. 젖무덤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간지러웠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차갑다 못해 시린 기운을 느낀다. 옷은 모두 젖어 온몸에 흉측하게 달라붙었다.  
  우물 안의 물은 어두컴컴하여 고여 있는 물마저도 검은 색으로 보이게 했다. 우물도 하나, 나도 하나였다. 어두운 풀숲, 나는 계속 혼자였다.

  현관문을 열자 플로럴 계열의 방향제 향기보다 유화물감 냄새가 먼저 느껴졌다. 해인이 그림을 전공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물감냄새가 강렬하게 느껴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더 좋았다. 정말 해인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캔버스와 이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한 쪽 벽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화구 박스가 몇 개씩이나 그 앞에 쌓아 놓여져 있었다. 그 밖에는 침대 하나, 작은 옷장과 오디오가 전부였다.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문지르며 욕실에서 나오자, 해인이 티셔츠와 반바지를 내놓았다. 갈아입으려고 등을 돌렸더니, 웃는 소리가 난다. 어느새 해인의 손에는 콩테와 크로키 북이 들려져 있었다. 나도 따라 웃어주고 윗도리를 벗었다. 해인은 나에게 주었던 티셔츠를 도로 가져갔다. 눈빛이 ‘아직 안돼’ 라고 말하고 있었다. 무슨 뜻인지 곧 알아차리고 청바지마저 주저없이 벗어 버렸다.
  침대에 배를 깔고 누워 해인이 가져다 준 과자를 먹는다. 침대에 있던 쿠션과 인형을 만지고 해인이 벗어둔 연두 색 원피스를 껴안았다. 몸을 일으켜 원피스를 가슴에 안고 스탭을 밟았다가, 오디오로 핑크플로이드(Pink Floyd)를 틀었다. 현란한 전자기타 음과 워터스의 허스키 보이스가 좋았다. 해인의 원피스를 몸에 대고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인다. 크로키 북 너머 해인의 눈이 웃고 있었다. 손놀림이 빨라지고 크로키 북의 장수가 넘어가는 속도도 빨라졌다. 나는 발끝으로 자연스럽게 턴했다. 턴턴턴, 턴!
" 머리, 길러볼까. "
  길게 누운 자세로 크로키 북을 한 장씩 넘겼다. 그 안에서 벌거벗은 여자가 침대에 누워 과자를 먹고 있었다. 인형과 원피스를 들고 어설픈 춤도 춘다. 핑크플로이드의 음악은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 기르지 마. "
  해인은 무언가를 찾는 듯, 그 많은 캔버스를 어질러 놓고 있었다. 나는 흐응, 하고 대답하면서 크로키 북을 계속 넘겼다. 간간히 크로키가 아닌 그림들도 있었다. 풍경이나 인물의 간단한 스케치 정도. 참 경치 좋은 곳을 다녀왔구나 생각하면서 마침 나오고 있는 ‘Goodbye Cruel World’를 따라 낮게 흥얼거렸다. 스케치 세 네 장이 지나가자 다시 크로키가 나왔다. 남자였다. 남자는 발가벗은 채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크로키 북이 내 손에서 없어졌다. 해인은 보여줄 게 있다고 하면서 크로키 북을 구석으로 내던졌다.  
  해인은 조금 큰 캔버스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 '널 생각하며 그린 거야' 라고 말했다. 붉은 색이 주축으로 된 강렬한 느낌의 유화였다. 유방이 한 쪽만 있고 머리카락은 하나도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잘록한 허리에 비해 과장하여 두껍게 한 허벅지가 탐스러웠다. 칼로 긋고 붓으로 뭉갠 필치가 여실히 드러났다. 사타구니를 그릴 때엔 손가락으로 문댔는지 부드러운 느낌이 났다.
" 그림 그릴 때 손가락 사용하지 마. 고운 손 상한다. "
  해인은 소리 없이 웃었다.
" 내가 아무리 머리가 짧아도 대머리인 건 좀 심했는데. "
  해인은 이 그림을 가져가라고 했다. 우리들의 ‘첫날밤’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확실히, 해인은 어머니를 많이 닮아 있었다. 어머니는 유달리 미모가 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나이가 들어도 고결한 청순함을 지닌 여자였다. 나는 부모님의 어느 쪽도 닮아 있지 않았다. 어머니를 닮았다면 해인처럼 하얀 살결과 밤하늘 같은 머릿결을 가졌을 것이다. 같이 살자고 해인이 나를 ‘집’으로 데리고 왔을 때,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었다. 「눈이 그 자식이야. 항상 그 눈이 마음에 안 들었지.」그리고 나는 내 발로 걸어 나왔다. 사실 나의 ‘친아버지’에 대해 ‘아버지’가 분노하는 것은, 그 어린 나이에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 집에 있기 싫다고 느낀 이유는, 해인과 아버지가 전혀 닮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노력해 봐도 아버지에게서 해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투박한 손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칙칙한 고동빛을 띠는, 마디가 굵고 주름이 많은 손. 싫었다. 해인의 손은 저렇지 않아.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갈 수 없다’라고 직감하자, 그것은 곧 쓸모없는 결의가 되고 지독한 자기혐오가 되어 버렸다. 왜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잤는지, 그리고 왜 나를 낳았는지 등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이, 아마 그 때쯤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 학기 초, 실습을 시작하기 전에 카데바의 얼굴을 보는 시간이 있어. 페이스(face)에 들어가기 전까진 포르말린을 뿌린 거즈로 얼굴을 덮어두거든. 거의 한 학기 내내 라고 보면 돼. 메스로 긋고 지방 제거하고 내장을 자르고 별 짓을 다 해봤지만, 가장 잊혀지지 않는 건 실습 첫 시간, 카데바의 얼굴을 봤던 거야. 이것도 정말 ‘사람’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유일하게 들었던 때였어. 무섭다는 생각보다 슬픈 기분이었어. "
" 나라면, 메스로 배를 가를 때가 가장 좋을 것 같아. 감촉도 그렇고 메스로 그으면서 배가 열리면 재미있을 것 같거든. 널 보면서 나도 죽을 때, 내 몸을 기증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봤어. 메스를 손에 들 수 있는 날은 죽을 때까지 오지 않을 테니, 죽어서라도 그 느낌을 직접 당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야. 내 몸에 칼이 들어와서 마음껏 파헤쳐 진다니, 멋진 상상이잖아. "
  캔버스를 침대 아래에 내려놓으며 ‘죽으면 그런 거 느낄 수 없잖아.’ 라고 말했다. 해인이 죽는다는 건 싫었다. 터무니없는 생각. 어느새 해인은 바로 뒤에 와서 내 허리를 감았다. 등에 해인이 얼굴을 대는 것이 느껴졌다.
" 이왕이면…… 네 손에 파헤쳐 지고 싶어. "
  나는 망설이지 않고 허리에서 해인의 손을 풀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해인과 눈을 마주치며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 죽는 건 안돼. 기증은 더더욱 안돼. "
  해인은 잠시 무표정하게 나를 올려다보다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
  단정하고 무표정한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해인은 내 양 팔을 잡았다. 상체가 기울면서 얼굴이 가까이 왔다.
" 강을 건너고 싶어 하는 전갈이 있었어. 그래서 개구리에게 자신을 태우고 강을 건너게 해달라고 부탁했지. 개구리는 전갈에게 꼬리의 독으로 자신을 찌를 거라며 거절했어. 그러자 전갈은 대답했어.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 둘 다 빠져 죽을 텐데." 개구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전갈을 등에 태워 강을 건넜지. "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더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 하지만 해인을 막을 수는 없었다.
" 한참 강을 건너다 전갈은 갑자기 개구리를 찔렀어. 개구리는 죽어가면서 전갈에게 물었지. 왜 나를 찔렀느냐고. 개구리와 물 속으로 가라앉던 전갈이 말했어……. 제희, 넌 뭐라고 했을 것 같아? "
  별로 궁금하지 않았기 때문에 ‘글쎄’ 라면서 말끝을 흐렸다.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해인은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얼굴이 더욱 가까이 왔다.
" 전갈이 말하길……. "
  벨소리가 울렸다. 이 숨 막힐 듯한 무중력 공간이 깨어졌다. 나는 벌떡 일어나 옷장 앞에 있던 가방을 뒤져 전화를 받았다. 해인은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등은 돌리고 있었지만 시선이 느껴졌다.
「여보세요」진헌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현관 밖으로 나갔다.

* 핑크플로이드(Pink Floyd) : 65년 영국에서 결성된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 로저 워터스(Roger Waters) : 핑크플로이드의 베이스 및 보컬리스트
* Goodbye Cruel World : Pink Floyd, 「The wall」, 1979
* 전갈과 개구리의 이야기 : 프랑수아 자콥(Francois Jacob),「파리, 생쥐, 그리고 인간(La souris, la mouche et l.homme)」
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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