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너의 이야기

2003.10.10 22:1510.10






  있잖아. 말 좀 들어줄래? 그래. 지금 바쁘지 않다면 말야.
  고마워. 별로 재미없을지는 모르지만 난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었거든. 들어주는 이 없는 이야기라는 것, 그것처럼 서글픈 것이 또 있을까.
미안, 하소연이나 늘어놓고 있다니. 모처럼 시간을 내주었는데. 그럼 얘기 시작할게.

  그러니까…… 이건 뻔한 연애소설 같은 시작이지.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반했어.
  첫 눈에냐고? 그럴지도 모르지. 아닐 수도 있고. 그걸 왜 모르는가 하면 난 본인이 아니기 때문이야. 어쨌든 남자는 여자를 사랑했어. 간절하고, 또 간절하게.
  잠깐 여기서 다른 이야기--이것 역시 뻔한 이야기겠지만--를 하나 해야겠어. 조금 참고 들어주었으면 해.
  서로 좋아하던 연인이 있었는데 남자 쪽이 사고로 기억상실에 걸렸어.(이 이야기는 실은 여자 쪽이더라도 상관없어)
  남자는 다른 건 다 기억하는데 여자에 관한 것만 죄다 잊어버린 거야. 처음 만났던 날부터 사고 직전까지, 여자에 관한 건 그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해.
  자신에 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연인을 보고 여자는 절망에 빠졌대. 하지만 그녀는 굳은 의지를 지녔기에 포기하지 않았고, 시간은 조금 걸렸어도 남자는 마침내 기억을 되찾게 돼. 곤란을 이겨낸 둘의 사랑은 이전보다 더욱 단단해지고 깊어져서 두 사람은 행복했다지.
  내가 들려줄 이야기도 처음은 이것과 비슷해. 남자가 기억을 잃는 얘기거든.
이 남자 역시 여자를 사랑했던 시절을 잊게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여자를 봐도 어떤 감흥도 못 느끼게 되었지. 하지만 같은 건 거기까지.
  왜냐고? 실은 이 남자의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 아니었거든. 남자는 여자를 사랑했지만 여자는 아니었어. 여자에게 남자는 그저 많은 친구들 중의 하나. 다른 친구들보다 자신을 조금 더 잘 챙겨주어 고맙기도 하고 만만하기도 한 그런 친구였을 뿐.
  이후 남자는 가족과 친구들의 보살핌 속에 사고의 외상은 나아갔지만 기억은 도무지 돌아올 줄 몰랐어. 일년 남짓한 기억의 공동이 그의 인생에 허전함은 남겼을지라도 살아가는데 있어 큰 불편은 없었지. 그래서, 잊을만하니까 잊었으려니 하고, 정말 중요한 거라면 언젠가 떠올릴 수 있겠지 하고는 남자는 기억을 돌이키려는 노력을 그다지 하지 않았어.
  그는 사고 이후의 현재에서 행복을 찾았어. 그래서일지도 모르지. 잊어버린 기억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은. 이전부터 그를 보아왔다는 한 여자가 비워진 그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주었으니까.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이야기이지. 보답 받지 못할 사랑을 홀로 외로이 하여 서글프던 남자가 행복한 반쪽을 만났으니.
  하지만, 하지만 말야…….
  그렇다면 남자가 여자를 사랑했던 추억과 감정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그대로 증발해 버린 채로,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아있지 않게 되어버린 그 기억들은. 아무도 모르는 그 비밀스러운 기억은 영영 흩어져 버리는 걸까. 서로 사랑했던 연인들은 한쪽이 기억을 잃었을 때 다른 한 쪽이 회복하려는 노력을 하는데, 결국 영영 잊은 채로 지날지라도 기억을 잃지 않은 쪽의 마음 속에 계속 간직되어 남아 있을텐데……..
  슬프지만 충만했고 그러므로 행복했던, 가슴 아린 시간들이기에 더더욱 소중했을 남자의 감정들. 온 마음을 다했던 그 날들. 남자에게 한때는 보석처럼 소중했던 시간과 감정이 잊혀지면 그 뿐인 걸까. 그 가치는 그대로 묻혀버리는 거야? 함께 나눈 감정과 기억들이 아니었기에? 한쪽만 지녔던 감정이므로 그 한쪽이 잊으면 그만?

  그대로……. 이야기는 끝날 수도 있었지.
  그 사람의 기억들. 안타까운 감정들이 아무리 아쉬워도 잊혀지면 그만인 것일 테니. 그래 잊혀진 것은 의미가 없으니.
  헌데 그 감정은 '잊혀진다는 것'이 아무래도 억울했던 모양이야. 사라지질 않았어. 어디에라도 제 흔적을 드러내고 남기려했지.
  그래서 남자가 기억을 찾았느냐고?
  아니, 그런 건 아냐.
  앞서 말했듯 남자는 이제 여자를 봐도 사랑을 떠올리지 않아. 친구들과 함께 병문안 온 여자를 보게 된 순간 남자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낯선 얼굴에 대한 경계 같은 것이었어. 같이 온 친구들의 설명을 듣고서야 겨우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지.
  그래, 남자에게 여자는 이제 설명을 들어야 납득이 되는 사람이었던 거야. 특별하고 소중했던, 차마 말못해 안타까운 감정을 지닌 상대였던 이전과는 달리. 일년 전 동창회 때 만난 초등학교 동창 중 하나라고 하는, 그 간단한 설명 속에 의미가 한정되어 버리는 존재가 되어버린 거야.
  이 엄청난 추락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어. 내성적이었던 그 남자는 지금껏 제 감정을 잘도 숨겨왔거든. 오직 혼자만 감정인 것을, 다름 아닌 본인이 잊었으니 누가 알겠어.
  그런데 그 자리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사람은 있었어.
  그건 바로 남자의 어색한 인사를 맞닥뜨린 여자였어.

  이상도하지?
  남자가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처음 들었을 때에도 그저 아는 사람이 다쳤다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연민뿐이었는데. 바쁜 일이 자꾸 생겨 차일피일 미루다가 퇴원 직전에야 동창들과 우르르 몰려 문병을 오는 순간까지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병실에 들어서서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는 남자의 머리를 보는 순간까지도 그랬는데.
  여자도, 남자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은 문병오기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어. 그런가보다 했지. 병원에 도착할 무렵, '우릴 못 알아보면 어째?', '옛날 기억은 오히려 말짱하다던데? 최근 기억이 조금 그렇다고.', '야, 우리야 초등학교 동창들 아니냐. 뭔 걱정이냐?', '걱정은 무슨. 무슨 특별한 사이라고.'하고 동창들과 농담 반으로 이야기하기도 했었지.
  그런데…….
  남자가 자신을 향해 언제나 지어주던 표정. 눈가에, 입가에 묻어나던 따스함이 없다는 것이 여자를 무척이나 당황케 했어.
  그녀는 생각했지. 초등학교 땐 그저 얼굴이나 간신히 기억하는 사이였는데 최근에서야 친해졌던 탓이려니하고. 그래서 저런가보다. 그러니 당장 그 자리에선 '야, 서운하다! 옛날엔 잘 몰랐다지만 얼마 전까진 캠퍼스에서 날마다 같이 몰려다니던 놈이 겨우 그런 인사냐?'하고 호기 있게 외치기도 했어. 그녀의 활달한 제스츄어에 답해 돌아온 건 '그런가?'하고 반문하며 어색한 웃음을 짓는 남자의 모습. 여자는 어쩐지 가슴이 내려앉았지.
  쿵-.
  쿵---.
  쿵-----.
  자꾸만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어.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집에 돌아온 여자는 새삼 지난 일년간의 기억을 돌이키기 시작했어.
  신입생이 되어 들떠있던 시절. 여기저기 서클이나 환영회다 엠티다 쫓아다니다가 갔던 동문회. 그곳에서 남자를 다시 만났지.
  초등학교 시절, 특별한 추억이 있었던 사이도 아니었고, 다시 만난 지금도 눈에 확 띄는 사람이 아니었던 남자. 조용하고 말없이 웃음 짓는 모습이 특징이라면 특징인 남자.
  주변의 들뜬 분위기에 특별히 휩쓸리지 않는 듯 보이는 남자는, 한창 대학 새내기로서의 호기심을 잔뜩 품은 여자에게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지.
  이후 친구들과 어울려 자주 만나게 되면서 친분은 조금씩 쌓여갔지만, 여자의 마음속에서 남자의 위치는 만만한 친구 이상으로는 발전되지 않았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그저 '친구', 혹은 '동기'라는 이름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 그것뿐인데, 그것뿐인데 어째서 새삼 이런 마음인 거야.
  여자는 기억을 좀 더 떠올려 보기로 했어.
  시간이 좀 지나고 조급하던 마음이 느슨해지자 하나 둘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었어.
  취해서 투정부리면 그대로 다 받아주던 남자. 사소한 레포트 복사는 안 해주면서도 정말 중요한 레포트는 제 것을 이름만 바꿔서라도 메꿔주던 남자. 시험 때마다 꼭 필요한 소스를 잘도 뽑아주던 남자. 열람실 자리차지를 언제나 아쉽지 않도록 해주던 남자. 마치 언제나 지켜보고 있었던 듯, 소소한 불편을 쉬 해결해주던 남자.
  허나 무엇보다 인상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따로 있었어.
  눈이 마주치면 멋쩍은 듯, 그러나 부드럽고 다정한 느낌으로 웃어주던 남자의 얼굴.

  그 웃음이 '좋다'고 생각했던 건 언제부터였을까.
  돌아보면 항상 있던, 그래 아쉬움 없던 그 얼굴이 빈자리를 보인 것은…….
병원에서 마주쳤을 때, 남자는 분명 거기 있었지만 항상 돌려주던 미소는 그 자리에 없었지. 남자의 마음이 담겨있어 의미 있던 미소가 어색하고 딱딱한 미소로 대치되었을 때, 그래서 땅이 꺼져버린 듯한 충격을 느꼈을 때…….
  여자의 의식은 그제서야 알게 된 거야. 어느 때부터인가 그에게 반응하고 있었던 제 무의식을.
  이유를 깨닫게 되자 여자는 망연자실했어.
  - 가장 소중한 것은 잃고서야 깨닫게 된다.
  여자는 그 진부한 문장에 코웃음치던 자신이 원망스러웠어.
  속된 말로 '있을 때 잘 해'라고 하던가.
  지금껏 눈감고 귀 막고 있어 알지 못했던 남자의 신호들이 자신을 향한 것이었음을 알게되었는데. 또한 자신 역시 그 신호들을 기꺼워하게 된 것을 알게 되었는데. 언제든 자신을 향해있던 따스한 시선, 비 오는 날 자동판매기 종이컵을 넘겨받을 때 스쳐가던 손의 온기, 이름을 불러올 때마다 부드러움이 묻어나던 목소리까지. 왜 이제야 그런 것들이 떠오르는 걸까. 왜 이리 생생하게.
  아니, 그건 남자가 보내오던 신호가 아니라 자신이 그를 좋아하게 되어 그렇게 착각한 것인지도 모른다고도, 여자는 생각했어.
  하지만, 어느 쪽이건 간에 무슨 소용일까. 남자의 기억 속에 여자의 자리는 사라져버렸는걸. 여자의 느낌이 착각이건 아니건, 이미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는데.
  - 아냐. 늦지 않았을 지도 몰라. 지금이라도 기억을 돌이켜 날 떠올린다면……. 헌데 그렇게 쉬울까. 잃었던 기억을 찾는 것이? 뭐야. 미리부터 포기할 필요는 없잖아. 가서 부딪혀 보는 게……. 하지만, 그래도…….
  여자는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어. 허나 망설임보다는 일단 저질러놓고 보자는 것이 그녀의 성향이었지. 일단 남자를 찾아가기로 했어. 만난 뒤에 생각해보자고.
  여자가 남자를 다시 보게 된 건 사흘 뒤였어. 그간의 망설임은 둘둘 말아 구석에 처박아두고, 두 팔 걷어붙이고 무슨 결전이라도 벌일 듯 씩씩하게 찾아갔지. 그때 남자는 이미 퇴원한 상태였으니까 그녀가 간 건 남자의 집이었어. 집은 알고 있었지. 친구들과 온 적이 있었으니까.
  그땐 별찮게 보이던 대문과 담이 오늘은 왜 이렇게 높아 보일까. 초인종은 아무리 눌러도 절대 소리가 안 울릴 것처럼 보이고. 어쩌면 너무 큰 소리가 나서 심장이 덜컥 떨어져 내릴지도 몰라. 집에 있다고 알고 왔지만 어쩌면 급하게 다시 외출한 것은 아닐까.

  실제론 조그맣게 울린 초인종. 누구라는 것을 밝히자 순순히 열린 문.
  여자는 뭐랄까. 걱정했던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어. 긴장이 풀어진 상태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지. 문을 연 건 지난번에는 못 보았던 여자였어. 누난가? 여동생인가?
  새삼스럽기도 하지. 여자는 자신이 남자의 사적인 면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전에 왔을 때에도 남자의 어머니만 잠깐 봤을 뿐. 형이 있는지 동생이 있는지, 뭘 즐겨 먹는지, 잠을 많이 자는 편인지 아닌지, 어떤 책을 읽는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그간 대체 뭘 보고 있었던 것일까 싶을 정도로 아는 게 없다는 사실에, 여자는 서글퍼졌어.
  하지만 이제부터 알면 되는 거야. 그러니 지금은 딴 생각 말자. 지금 생각할 것은 어떤 말을 꺼낼 건가야. 아니지. 어떻게 말을 시작할 것인가를……. 그게 그건가.
  짧은 순간에도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갈 수 있다는 것 알아? 그래, 알겠지. 여자도 그때 그랬지. 문을 열어준 여자에게 목례를 하며 현관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수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순식간에 지나갔지.
  그런데 여자가 그 집에서 맞닥뜨린 것이 뭐였는줄 알아? 모른다고?
  그래……. 아니. 모르는 것이 당연하겠지.
  응. 다시 얘기 시작할게.

  여자는 말야, 거기서 생각지 못한 것을 보았어. 자신을 어색하게 맞이하는 남자의 모습이야 각오했던 것이었지. 벌써 기억이 돌아왔을 리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당황한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어.
  현관문을 열어주었던 여자와 아직 창백한 안색인 남자의 모습은 참 다정해 보였어. 자신을 향해있을 땐 굳어 있던 얼굴이 그 여자를 향할 땐 어느 때보다도 환해진다는 것을, 여자는 깨달았지. 여자는 이제 모든 감각을 남자에게 열어두고 있었기 때문에 금세 알 수 있었거든.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 사이에 끼어있는 것이 어색해져서 내내 불편하게 있다가, 여자는 자신이 찾아온 용건도 잊어버리고 말았어. 쾌유를 빈다는 뻔한 인사와 함께 집을 나왔지. 그러고는 혼자서 다시 찾아갈 용기를 잃고 말았어.
  여자가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된 건, 그로부터 한 달 뒤. 그때 그녀의 옆에는 항상 어울리던 친구들이 있었고, 그의 옆에는 그 여자가 있었어. 여자는 친구들 틈에 묻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했지.
  그 날 남자는 퇴원 축하 턱이라며 저녁을 샀어. 복잡한 심사를 감추고 뻘쭘하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여자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어. 남자가 웃고 있었거든. 그 언젠가처럼 눈 꼬리에 주름을 잡은 채 입술 끝을 슬쩍 말아 올린 채로. 남자는 말했어. 지난번에 찾아와 줘서 고마웠다고. 여자가 뭐라고 대답하려는데, 그녀의 옆에 있던 친구하나가 불쑥 큰소리로 외쳤어. '야, 야! 그런데 말이야!' 그렇게 시작한 친구의 말은 여자의 가슴속에 커다란 못이 되어 박혔어. 가볍게 눈을 흘기던 그녀는 그대로 굳어버렸지.
  친구가 뭐라고 그랬느냐고? 그러게. 뭐라고 그랬을까. 뭐라고 그랬길래 여자는 굳어버렸을까. 그래그래, 넌 모르겠지. 응? 머리가 아프다고?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금 더 들어주면 안 될까? 그래, 고마워. 얘기 마저 할게.

  친구는 말이지. 이렇게 말했어. '야 이 자식, 웃기는 놈일세! 약혼한다며? 어느 놈은 길바닥을 아무리 싸돌아댕겨도 옆구리에 끼워 찰 여자 얻기가 하늘에 별따긴데 어느 놈은 병실에 처박혀서도 여자를 꼬셔? 아이고, 눈꼴시어서 못 보겠네. 어째, 수상쩍다 했다. 아파서 처박혀 있었던 게 아니라 연애 사업하느라 바쁘셨던 거구만?'
  여자의 귀에 와서 박힌 말은 '약혼한다며?'까지. 그 뒤에 이어진 말과 다른 친구들의 놀림 반 진담 반의 축하성 발언은 들려오지 않았어.
계속 귀에서 맴도는 말. '약혼한다며?'
  눈앞에 보이는 사실. 쑥스러워하면서도 자랑스런 표정으로 나란히 앉은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는 남자의 모습.
  그제야 보였어. 남자의 손가락에 끼워진, 장식 없는 실반지가.
  전에는 못 봤던 것. 그 여자의 손에도 끼워진 것.
  자신의 손엔 없는 것.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
  지난 한 달간도 어떻게 지나왔는지 모르겠는데, 그때부터 시간은 여자에게 영원처럼 느껴졌어. 기계처럼 움직였지.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을 먹고, 학교를 가고, 아는 사람 보면 인사를 하고, 강의에 들어가고. 습관적으로 몸을 움직이던 여자는 어느 순간 정신이 들었어. 남자에 대한 소식을 들은 순간이었지.
  '있잖아, 걔네들 결혼한대. 올 가을이래나. 그래, 학생부부지. 뭐라더라, 한 동네 산다던가. 야, 뭐가 부럽냐? C.C도 연애할 때나 C.C지 그게 오래 가는 케이스가 얼마나 된다고. 도장 찍고 한 사람한테 꽉 잡혀버리는 셈 아냐. 아직 한창일 때 여러 사람 겪어봐야……. 아이고, 그래 잘났다. 문어다리에 지쳐서 정착할 사람 찾는 거냐? 어쭈, 니 스캔들 내가 다 아는데, 이게 감히 뉘 앞에서 발뺌을 해? 어, 근데 넌 또 왜 그러냐. 얼굴 되게 창백하다. 체했냐?'
  생각해보니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는 걸, 여자는 또 뒤늦게야 깨달았지.

  항상 그래. 지나간 뒤에야 깨달아.
  그 여자……, 남자가 아직 말짱하던 때에 여럿이 같이 몰려다가 자주 지나치던 여자였어. 학부도 다른데 참 자주도 마주친다 싶었었지. 그렇게 인사도 없이, 통성명도 없이 눈에 익어버린 사람이었어. 친구들 중 좀 잘나가게 생긴 누군가에게 '야, 쟤 너 쫓아다니는 거 아니냐?'라고 농담을 했던 기억도 나고. 이젠 정말 끼어 들 여지가 없다고, 여자는 생각했지. 그리고 마침내 남자가 결혼하는 날…….

  …….
  이제야 네 목소릴 듣는구나.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하니?
  외면하지마. 이건 네 이야기야. 그리고 그의 이야기이기도 해.
  눈감으면 편하겠지만, 그래선 아무것도 풀리지 않아.
  네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를 바래. 넌 이렇게 약한 애가 아니었잖아. 씩씩하고 활달한 네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조금 덤벙대고, 실수도 잘 하지만, 그래도 생기가 넘쳤던 모습. 그가 좋아했고, 내가 사랑했던 너의 장점들을 부디 하찮은 것으로 만들지 말아 줘. 이 좁고 어두운 골방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미안해. 널 이렇게까지 내 몬 건 내 책임도 있으니까. 그래서 온 거야. 널 데리러. 이렇듯 언제까지고 머물러만 있을 수는 없잖아. 이제 떠나자. 미련을 버려. 스스로가 왜 생을 버렸는지 잊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홀로 떠돈다는 건, 또 다른 이름의 고통인걸.
  네 집착의 이유도, 원인도, 이미 모두 떠나버린 세상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말자.
  집착의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 이제 그걸 버릴 수도 있는 거야.
  그리고, 그게 정말 너다운 모습 아니겠니.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면, 조금은 더 기다릴게.
  하지만, 원치 않는다면 굳이 내가 함께일 이유는 없겠지.
  이제 과거를 기억했으니 이유 모를 설움에 고통받지 않아도 될 테니까.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부디 기억해주길 바래.
  옛 아픔이 그저 아련하게 느껴질 어느 때인가,
  네가 정말 가야할 곳으로 가게 되었을 때,
  가끔 돌이켜 줘.
  너의 지난 이야기를.
  때를 맞추지 못해 어긋난,
  그렇기에 가슴 시리고,
  그렇기에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나를…….





  ---------------------------
  세상에 미련과 집착이 남아 떠도는 혼에 대해 생각하다가 끄적여 보게 된 글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왜 구천을 떠도는지조차 잊고
  그저 아픔, 혹은 한 그 자체만 남아 해원을 하지 못해 떠돈다는 존재들 말이지요. 표현이 좀 조야했습니다만.
  이 글은 실은 그 해원을 못한 존재 외의, 또 다른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댓글 4
  • No Profile
    서진 03.10.11 00:59 댓글 수정 삭제
    아릿하게 아프네요.
  • No Profile
    서진 03.10.11 01:25 댓글 수정 삭제
    그런데 글과는 상관 없는 질문 하나. 황드 2회 때 azderica란 닉을 쓰는 분을 본 기억이 있는데, 그 분 아닌가 싶어서요.
  • No Profile
    azderica 03.10.11 20:55 댓글 수정 삭제
    (뜨끔...)
    그, 그런건 기억하지 않으셔도 괜찮은데요. 핫..핫...; (어색한웃음)
  • No Profile
    서진 03.10.11 23:27 댓글 수정 삭제
    어색하게 웃으시다니. 아무튼 반갑습니다^^ 저는 jeff라는 이름을 썼는데, 아마 잘 모르실 거예요. "활동 다운 활동"을 안 해서. 아무튼 글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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