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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쟈민은 사각 우리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한바탕 폭풍우가 오려는 모양이었다. 우리의 천장은 널빤지로 빈틈없이 막혀 있지만 벽은 침엽수 기둥을 촘촘히 세운 형태라 찬바람과 비가 들이칠 수 있었다. 모피를 가지고 벽을 감싸고 숨구멍을 남기고 비닐 장막도 쳤다. 벤쟈민은 두려워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난 벤쟈민을 쓰다듬으려 했으나 벤쟈민은 고개를 돌려 피했다.

  나의 오리 벤쟈민 프랑크푸르트. 아버지가 내게 남겨준 것이라곤 이 집과 벤쟈민 뿐이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것이 나도 그만 자야할 것 같았다. 아직 해가 질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밤새도록 거센 폭풍우가 몰아쳤다. 폭풍 속에서 잠을 자며 아주 어렸을 때 꿈을 꿨다. 아버지는 다른 어른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마치 우리가 그 자리에 없는 듯이 우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누군가 "아이들을 데려갈 순 없네. 저 아이들은 다 기억할 거야."라고 말했다. '그래, 그 땐 아버지들이 아니었어.' 아버지가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가 가까이 가자 아버지는 모자를 벗으며 무릎을 굽혀 우리와 눈을 마주쳤다. 아버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에도 각각의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 할 수 있었다.

  바로 그렇게 우리를 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가 쓰고 있던 야구모자 밑으로 그늘이 졌지만 생생하던 무표정하면서 냉정한 푸른 눈이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잘 듣거라. 내가 말하는 것만이 진실이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벽체가 흔들리는 만큼 나도 흔들리는 것 같았다. 오래된 집이라 나무가 건조되고 수축되면서 노치에 빈틈이 생겨 있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아버지의 꿈을 꾼 날은 언제나 이렇게 식은땀을 흘리다가 깨어나곤 했다. 땀에 축축해진 이불을 밀어냈다. 커텐을 젖히니 햇살에 눈이 부셨다. 비는 완전히 그쳐 있었다. 머리맡에 있는 주전자에서 물을 한 잔 따랐다.

  꿈속에서 뭔가를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지? 물을 마시며 습관적으로 벤쟈민의 우리를 살폈다. 벤쟈민의 우리는 침실 창문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놔두었다.

  물잔을 쥔 손에 힘이 빠졌다. 물잔은 무릎위로 물을 쏟아내곤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창밖으로는 카키색 모피로 둘러싸인 벤쟈민의 우리가 보여야했다. 하지만 우리를 둘러쌌던 카키색 모포는 진흙탕에서 구르고 있었고 참나무 버팀목은 부러져 있었다. 침대에서 뛰쳐나가다가 주전자를 쓰러뜨렸다. 바닥이 물로 흥건해지는 바람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아픈 무릎을 살필 겨를도 없이 뛰어나갔다. 날카롭게 잘려나간 버팀목은 자연의 솜씨가 아닌 인간이 한 짓임을 말하고 있었다. 무릎이 후들거려 반쯤 쓰러진 우리를 붙들고 주저앉았다. 벤쟈민, 나의 벤쟈민!

  나는 벌떡 일어나 우리를 발로 걷어찼다. 우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오, 나의 벤쟈민 프랑크푸르트! 살아 있어다오! 살아만 있어다오! 반드시 널 되찾고 말 것이다. 널 내게서 앗아간 자는 응분의 대가를 치룰 것이며 만에 하나라도 네가 죽었다면….

  나는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난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대가를 치루게 될 것이다. 넌 반드시 대가를 치룰 거야.


  범인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놈은 내가 벤쟈민에게 모이를 주고 쓰다듬는 걸 늘 사납게 노려보곤 했다. 놈은 항상 벤쟈민을 탐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까지 벌일 줄은 몰랐다. 짐작했어야 했어!

  난 주먹을 쥐고 통나무로 만들어진 벽을 내리쳤다. 나뭇결에 손이 쓸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두터운 자물쇠로 잠긴 유리장을 열었다. 묵직한 라이플의 무게가 손에 잡혔다. 아버지가 사라진 후 열쇠를 찾는데는 오래 걸렸었지만 결국 찾아냈다. 하지만 탄창은 하나 뿐이었다. 아버지들이 어디서 탄창을 구해오는지 우린 알지 못했었다. 그래서 사냥을 할 때 별 수 없이 덫을 사용해야 했다.

  식탁위에 있던 것들을 한 번에 쓸어 버리고 라이플을 올려 놓았다. 리시버 커버를 벗기고 스프링을 뽑고 노리쇠뭉치도 빼어 총을 완전히 분해, 점검했다. 신중해야 했다. 놈은 지금쯤 내가 올 걸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부엌으로 가서 과도를 꺼내 오랜 시간 갈아 칼을 뽑으면 바로 빠질 얇은 칼집 안에 갈무리해 부츠 안에 넣었다. 준비는 끝났다. 하지만 낮은 너무 위험했다. 내가 다가가는 게 한 눈에 보일 것이다.



  달이 떴다. 창 밖으로 푸르스름한 달빛이 정원을 음산하게 비추는 것이 보였다. 복수하기 좋은 밤이다. 놈의 피가 이 서늘한 밤을 더욱 음침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놈의 집은 마을의 끝에 있었다. 마을 중앙의 공터를 지나는 동안 들리는 건 부엉이와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뿐이었다. 마을의 집들은 돌보는 사람이 버려져 있었다. 아버지들이 사라진 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음울해졌다.


  놈의 집은 불이 꺼져 있었다. 허술하게 만들어진 울타리를 넘어 놈의 침실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잠겨 있지 않았다? 나의 벤쟈민을 데리고 가고도 창문을 잠궈놓지 않았다는 말인가? 웃음이 나올 뻔 한 걸 눌러 참았다. 어쩌면 침실에 없을지도 모른다. 난 창문을 열었다. 창문은 삐걱하는 작은 신음을 토했다. 달빛을 내 몸으로 가려 방안은 어두웠다. 침실 문으로 길게 내 그림자가 비췄다. 놈은 이불 안에 있었다. 흐릿하게 놈이 숨을 쉴 때마다 이불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난 미리 장전해 둔 총의 방아쇠를 망설이지 않고 당겼다.

  반동으로 어깨가 뒤로 제쳐졌다. 창문을 완전히 열고 안으로 들어가 피가 벌겋게 번진 이불을 젖혔다.

  "베, 벤쟈민!"

  다리가 후들거려서 주저앉을 뻔한 걸 라이플로 버텼다.

  "벤쟈민…."

  벤쟈민은 숨을 껄떡거리고 있었다. 손이 부들부들 떠렸다. 뒤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쿡, 쿡쿡- 아하핫-"

  어느새 침실 문이 열리고 놈이 들어와 있었다. 얄미울 정도로 깔끔하게 빗어 넘긴 갈색 머리, 같은 색의 눈동자, 얇은 입술. 머리와 옷차림을 제외하고 언제나 거울 속에서 보는 모습이었다. 나와 같이 태어난 놈은 입술을 보기 흉하게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죽여버리겠어!"

  내가 다시 라이플을 장전하기 무섭게 놈이 외쳤다.

  "형, 형! 나의 형! 그게 정말 벤쟈민이야?"

  놈에게 겨눈 총구를 내리지는 않았다. 난 놈에게 허튼 소리 하지 말라고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야, 형. 그게 정말로 형의 벤쟈민이야?"

  놈은 형의 벤쟈민이라는 말의 음절 하나하나마다 힘을 주어 또박또박 발음했다. 난 총구를 내리지 않은 상태로 고개를 돌려 이제 죽어 있는 오리를 살폈다. 그건 벤쟈민이 아니었다. 이건 놈의 오리였다.

  "벤쟈민은? 벤쟈민은 어디 있어?"

  "그렇게 흥분할 거 없어. 형의 벤쟈민은 잘 있으니까."

  놈은 다시 음흉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역겨웠다. 나와 같은 얼굴에서 내게선 나올 수 없는 징글맞은 표정을 보고 있다는 건 참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벤쟈민이 먼저였다.

  "날 벤쟈민에게 안내해!"

  라이플을 어깨에 받쳐 언제든 놈을 쏠 준비를 하고 나는 외쳤다. 놈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연극배우처럼 과장되게 침실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나갔다.

  "불을 켜."

  "네네, 분부대로."

  놈이 거실에 있는 램프에 불을 붙였다. 거실의 벽난로 옆에 나의 오리, 나의 사랑하는 벤쟈민이 열십자로 묶여 있는 것이 보였다. 벤쟈민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심장에 통증이 느껴졌다.

  "벤쟈민! 이 자식이!"

  내가 벤쟈민을 보고 흥분한 사이 놈이 달려와 내 복부를 걷어찼다. 아픈 와중에도 총을 놓치지는 않았으나 놈이 허리가 굽어버린 내 목 뒤를 가격하자 총을 떨어뜨렸다. 놈은 총을 발로 걷어찼다.

  "내가 바라는 게 뭔 줄 알아?"

  놈은 쓰러진 내 얼굴을 구둣발로 짓눌렀다.

  "형의 눈앞에서 저 망할 놈의 오리를 죽이는 거야."

  난 일어서려 했으나 놈이 내 배를 차자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놈은 내 등뒤로 올라타 셔츠를 잡아당겼다. 단추가 뜯어지며 옷이 벗겨졌다.

  "오리를 포기해, 형.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겠어. 정말이야, 형."

  놈은 내 바지 벨트를 풀고 어린 시절 장난처럼 날 강간했다.

  "오리에게만 신경 쓰는 형은 예전의 형이 아니야. 오리 따위 없어도 우리 둘이서 잘 살았잖아. 형도 내 오리를 죽였어, 내가 저 오리를 처치하면 공평해지지. 안 그래?"

  놈은 내 귓불을 핥으며 신음소리와 함께 속삭였다.

  "대답해!"

  놈은 내 머리를 들어서 바닥에 박았다. 억하는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놈은 내 고개를 돌리고 키스했다.

  "형, 사랑해…. 제발, 포기한다고 말해, 그럼 살려줄게."

  짭짜름한 액체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놈은 울고 있었다. 난 몸에서 힘을 뺐다. 절정의 순간이 지나자 놈은 내 위로 쓰러져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놈의 눈물에 어깨가 축축해졌다. 난 몸을 돌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

  다음 순간 난 부츠에 숨겨놓았던 칼을 꺼내 휘둘렀다. 놈은 재빨리 피했지만 어깨에 상처를 입었다. 놈은 몸을 굴려 아까 던졌던 라이플을 집어들었다. 난 밖으로 달려나갔다. 놈은 쫓아오는 대신 허공에 대고 총을 쐈다.

  "두고 봐, 형! 저 망할 놈의 오리를 죽여버릴 테니까! 죽이고야 말 거야, 알아? 죽여버릴 거라고!"

  놈의 외침을 뒤로하고 난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 들어와 문과 창문을 모두 잠그고 혹시 놈이 쫓아왔나 밖을 살폈다. 밖은 여전히 조용했다. 2년 전만 해도 마을에선 항상 일하고 있는 아버지들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2년 전 동생과 나는 사냥을 갔다. 동생은 늘 나와 둘이서 사냥을 하거나 채집을 하고 싶어했고 한 번씩 날 안곤 했다. 나도 굳이 싫진 않았기에 내버려두었었다. 그 날따라 놈은 유난히 날 놔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결국 평소보다 늦어 어둑해질 무렵에야 마을로 돌아오는데 마을에 낯선 자들이 있었다. 동생과 나는 반사적으로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그들이다. 그들이 온 거야!
  그들은 파란 옷을 입고 있었고, 처음 보는 차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오리에게 인간처럼 옷을 입히고 다정하게 대했으며 아버지들을 거칠게 대하고 묶었다. 아버지들 중 다친 사람도 상당수 보였고 우리들의 아버지는 죽어 있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들은 아버지의 몸을 하얀 천으로 덮었다.

  아버지가 언제나 이야기한 존재, 오리를 인간처럼 취급하는 비정상적인 인간들. 그들이 와서 아버지들을 죽이고 오리를 가져갔다.


  마을에는 우리 둘만이 남겨졌다.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물품들을 찾으며 집을 뒤지다가 아버지의 침대 밑에서 비밀 지하실을 발견했다. 거기에 벤쟈민이 있었다. 오리를 감춰뒀었다니! 아버지가 법을 어겼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오리를 감춰두는 건 가장 큰 죄악이었다. 하지만 처벌을 받을 아버지도, 처벌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난 그 오리에게 벤쟈민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키우기로 했다.

  내가 오리의 우리를 짓는 동안 녀석은 내내 못 마땅한 표정이었다. 난 녀석을 무시했다.


  어느 날이었다. 덫을 돌아보고 오는데 놈이 벤쟈민을 아프게 하는 것이 보였다. 벤쟈민은 발버둥치고 있었다. 난 들고 있던 토끼를 집어던지고 달려들어 녀석을 한 방에 날려버렸다.

  "당장 벤쟈민으로부터 떨어져!"

  "무슨 짓이야, 형? 오리는 공동소유야."

  바닥에 쓰러져 찢어진 입술을 훔치며 녀석이 으르렁거렸다.

  "벤쟈민에게 손대지마!"

  그 말 외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벤쟈민을 다시 우리에 넣고 우리 앞에 자물쇠를 달았다. 놈은 이를 들어내고 짐승처럼 날 노려보고 있었지만 막지는 않았다.

  그 며칠 후 사냥을 나갔다가 새로운 오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토끼 덫에 걸려 쓰러져 있던 그 오리는 도움이라도 청하듯 나를 보며 애처러운 울음 소리를 냈다. 난 오리에게 다가가 머리를 쳐 쓰러 트리고 잘 묶은 후 규칙에 따라 혀를 잘랐다.



  놈은 팔짱을 낀 채 내가 하는 짓을 보고만 있었다. 난 놈의 짐을 밖에다가 내놓았다.

  "갖고 꺼져. 어디든 가버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놈은 낮게 중얼거리곤 오리와 짐을 들고 다른 집을 골라 갔다. 그 뒤 놈과 나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 때로 마주쳐도 모르는 척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놈은 내 앞에서 여유를 부렸다. 아마도 언젠가 내가 벤쟈민에게 싫증을 내리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난 점점 벤쟈민에게 빠져들었다. 나의 오리,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나의 오리, 나의 벤쟈민 프랑크푸르트.



  놈에게 맞은 상처는 심하지 않았다. 자, 이제 어떡한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지 않으면 당할 것이다. 다행히 놈은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거라곤 과도뿐이었다. 부엌을 뒤져 고기 써는 칼을 찾아냈다. 칼 두 자루로 라이플을 가진 놈을 상대해야 한다는 생각에 암담했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칼을 갈은 후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놈은 오늘 밤 뜬눈으로 날 기다릴 것이다. 어쩌면 술을 마실지도 모르지. 체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차가운 공기에 눈이 떠졌다. 일부러 얇은 모피를 덥고 잤었다. 난 무기를 재정비하고 놈의 집으로 갔다. 이상하리 만큼이나 조용했다. 뒷목이 서늘해왔다. 난 살금살금 뒷문으로 접근했다. 문을 밀자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약은 녀석.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바로 달려드는데 발이 걸려 넘어졌다. 동시에 머리 뒤로 강한 충격이 왔다. 고기 써는 칼이 멀리 미끌어져 갔다.

  "어서와, 형. 위험을 무릅쓰고 오다니, 아주 감동적인데?"

  놈이 라이플을 내 머리에 겨눴다.

  "마지막이야, 형. 오리를 포기하겠다고 말해."

  "나의 벤쟈민을 건드리지 마!"

  "제기랄!"

  철컥하는 비정상적인 금속음이 울렸다. 불발이었다. 난 바로 일어나 놈이 다시 장전을 하기 전에 라이플을 잡았다. 우린 라이플을 사이에 두고 바닥을 굴렀다. 탁자에 몸이 부딪히며 술병이 떨어져 박살이 났다. 놈의 입에서 역한 술냄새가 풍겼다. 난 이빨로 놈의 손목을 깨물었다. 와악하고 녀석이 비명을 울리는 틈을 타 총을 유리창으로 집어 던졌다. 유리창이 깨지며 파편이 몇 개 튀었다. 내가 얼굴을 돌리는 틈을 타 놈이 내 위로 올라타 목을 졸렸다. 바닥을 더듬어 되는 대로 잡아 머리를 날렸다. 손이 타는 듯이 아파왔다. 깨진 병을 쥐고 내리친 것이다. 놈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벨트에서 칼을 꺼내 놈의 복부를 찔렀다.

  "허억!"

  놈의 눈이 커다래지고 벌린 입에서 혀가 튀어 나왔다. 난 박힌 나이프를 옆으로 돌렸다가 뽑았다. 놈은 내 어깨를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한 번 더 찌르려고 했으나 꺼멓게 변해가는 나와 같은 얼굴을 보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놈은 천천히 앞으로 무너졌다.


  셔츠를 찢어 대충 상처를 묶은 후 방마다 뒤졌다. 벤쟈민은 보이지 않았다. 이층으로 올라가자 어디선가 신음소리가 들렸다. 방문은 잠겨 있었다. 난 보이는 의자를 들고 내리쳐 방문을 부쉈다. 나의 오리, 나의 벤쟈민 프랑크푸르트가 밧줄에 묶여 있었다. 난 달려 들어 벤쟈민의 묶인 줄을 풀었다.

  "괜찮아, 벤쟈민. 이젠 다 끝났어."

  벤쟈민이 손을 앞으로 내미는 것 같았다. 총성과 벤쟈민이 날 밀치는 것 중 내가 먼저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벤쟈민의 가슴에서 피가 흘러 내 옷도 붉게 물들였다. 난 비명을 지르며 다가가 놈에게서 라이플을 뺏아 들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없었다. 난 라이플로 놈의 머리, 얼굴, 다리, 몸 할 것 없이 두들겼다. 거의 의식을 잃어가고 있던 놈은 꿈틀거리지도 않고 맞고만 있었다. 놈을 때리던 걸 멈춘 건 벤쟈민의 신음소리 때문이었다.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이럴 때가 아냐! 난 벤쟈민에게 달려가 벤쟈민을 품에 안았다. 왜? 왜, 나의 벤쟈민? 언제나 날 두려워 했었는데. 내가 건드리기만 해도 몸을 움츠렸었는데. 그런데 왜? 왜 나를 위해? 나는 벤쟈민을 끌어안고 목놓아 통곡했다.


  "…혀…형……."

  아직도 질기게 숨이 붙어 있는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동생이 간신히 고개만 든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눈앞이 흐려 놈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난 어떤 얼굴로 놈을 보고 있었을까? 증오, 분노, 고통에 찬 눈…?

  "그건 오리가 아니야… 그건… 엄마야……."

  동생의 목이 떨어졌다. 완전히 죽어버린 것이다. 나의 오리, 나의 벤쟈민도 내게 몸을 맡긴 채 죽어가고 있었다. 오, 나의 오리, 나의 벤쟈민.

  난 벤쟈민의 풍성한 금발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친 손으론 벤쟈민을 느낄 수가 없었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이를 악물어도 신음이 터졌다.

  "오, 벤쟈민…."

  벤쟈민의 상처는 심각했다. 벤쟈민은 조금씩,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었다. 헐떡이는 눈으로 나만을 응시하면서….

  난 벤쟈민의 목을 안은 손에 힘을 줬다. 벤쟈민은 미약하게 바둥거렸으나 곧 잠잠해졌다.

  가엾은 나의 오리. 아버지는 언제나 상처를 입은 가축은 고통을 없애줘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아진
댓글 4
  • No Profile
    서진 03.10.09 00:27 댓글 수정 삭제
    어딘가 섬뜩하면서도, 혼란스럽네요. 하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계속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 No Profile
    moodern 03.10.09 14:16 댓글 수정 삭제
    이 글이 품고 있는 정서가 마음에 드는군요..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벤자민에게 꽃다발을~
  • No Profile
    서진 03.10.09 15:44 댓글 수정 삭제
    그리고 생각 난 거 하나 덧붙입니다.
    "벤쟈민"이라고 쓰셨는데, 우리나라 표기법을 보면, "ㅈ" 이란 자음에는 "ㅑ, ㅕ, ㅛ, ㅠ"와 같은 모음 대신 "ㅏ, ㅓ, ㅗ, ㅜ"쓰도록 규정되어 있다지요? 발음 상에는 거의 차의가 없고, 이중모음을 내려고 하다보면 자음"ㅈ"의 발음마져 흔들리게 된다는 게 이유라는군요.
    하지만 저는 그렇다고 해서 쓰지말라고 하는 건 조금 무리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 No Profile
    아이 03.10.09 16:50 댓글 수정 삭제
    오오, 너무 좋습니다. 뭔가 부조리한 분위기도 나고, 비현실적이고(좋은 의미입니다), 주관적인 성격(마찬가지로 좋은 의미)까지 풍기는 작품이네요. 제가 좋아하는 요소들은 죄다 들어있어요. 다른 소설도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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