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윈저 력 1254년

        “신이시여! 감사드립니다!”

해맑은 햇빛이 스며 들어오는 방이다. 그 방 한 가운에서 건장한 중년의 사내가 눈물까지 찔끔찔끔 흘려가면서 감사를 드리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감사한 것인지..

        “드디어! 저 원수 같은 딸년 시집보내게 생겼습니다. 그것도 분에 넘치는 사내에게! 오오! 신이시여. 당신께서는 정녕 저를 굽어 살피시고 계셨습니다.”

감사의 기도를 경건하게 드리고 있는 사내의 뒤에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 부드러운 흑갈색 머리에 짙은 녹색 눈빛을 지니고 있던 그 청년은 한숨을 가볍게 내 쉬었다.

        “사촌 누이를 신부로 데려가려고 하다니.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거 참.”

물론, 신부라고 추정이 되는 여인은 그녀의 아버지가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 날 하루도 열심히, 그녀의 일에 충실할 뿐이었다.

        “어째서? 여제께서는 이런 간신배들의 청을 수납해 주시는 거람? 이건 불가야. 불가. 피오란트. 이거 가지고 가요. 어디서 이런 엉뚱한 청을 하고 있어?”

꽤나 시원시원한 일 처리 솜씨이다. 아니 그 이전에. 신부가 있는 집무실에도 환한 햇살이 내려오고 있었다. 짙은 흑갈색의 머리가 환한 갈색으로 투영되어 보일 만큼 매우 따스한 햇살이었다. 투명한 외알 안경 밑으로는 시원스러운 짙은 푸른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앞서 두 방안의 분위기로 봐서는 분명히 귀족 가문인 듯한데, 그녀의 옷차림은 대조적으로 수수해 보였다. 짙은 갈색의 부드러운 옷은 확실히 귀족 영애가 입는 옷의 기장과는 달리 매우 짧은 편이었다. 정작 옷을 입는 그녀는 이것 역시 쓸데없이 길다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말이다. 물론 레이스라던가, 칼라라던가, 헤드 드레서 따위는 일체 없었다. 장신구라고는 은빛으로 투명하게 반짝이는 로켓 그거 하나 뿐. 고집스럽게 앙다문 그녀의 입매는 매우 야무지게 보였다.

        “피오란트? 이 녀석 또 이런 청이네? 이것도 기각해 버려요. 자아, 어디 보자. 12 장 정도 남았군? 좋았어. 이 것들을 여제께 올리면 오늘 임무는 끝.”

한편 피오란트로 불린 은발의 사내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자신에게 넘겨진 이른바 “기각” 서류들을 익숙한 태도로 난로의 불에 집어던져 버렸다. 그리고 그의 상관인 레이디는 상큼한 태도로 일어서서 후드를 입고서 외출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제의 그 일이 있은 직후에도 말이다. 어이하여, 자신이 저 레이디의 직속 부관이 되었는지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릴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약점을 잡힌 그가 운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피오란트는 꿋꿋한 기상과 태도로 그의 레이디에게 고했다.

        “여제께 하아-. 정녕 지금 행차하실 요령이십니까? 레이디 훼인?”

레이디 훼인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그녀의 부관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팔 안에는 서류 뭉치가 가득 들려 있었다.

        “피오란트 오늘 이상하군요. 설마, 어제 그 정도의 일로 겁을 집어 먹으신 겝니까?”

재미있다는 듯 웃는 그녀를 보니 상관이고 무엇이고 한대 때려주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 머리 끝까지 박차고 올라왔지만.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피오란트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한숨만을 내 쉬었을 뿐이었다. 그의 고운 약혼녀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확실히 어제 일은 사건이라고 불리울 만한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무어, 정녕 그 자가 기사라면-. 하찮은 계집 후후훗. 의 말에 발끈할 그런 일은 없겠지요.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성까지는 저 혼자 가겠습니다.”

피오란트는 기가막히다는 듯 레이디 훼인을 바라보았다. 레이디 훼인은 짖궂은 미소를 가득히 띄워보이고 있었다.

        “너무 오래 붙잡아 두지를 않았습니까? 어제부터 밤을 새었고, 이러다가 행여 몸에 탈이라도 났다간 제가 곤란합니다. 제 친구의 약혼자님을 이리 부리다 무슨 푸념을 들을라고요. 아, 사양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이만 실례.”

일사천리로 내뱉는 저 여자의 독설은 과히 일품이다. 피오란트는 멍하게 집무실에 서서 애꿎은 머리카락만 쥐었다가 놓았다. 그러한 그의 머리 속으로 생각하기도 싫은 어제의 일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확실히, 어제의 그 일은 사건은 사건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뤼트론 딘. 그 자가 관련된 일이니 말이다. 피오란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니까 말이지요. 레이디 헬레나 훼인. 다른 누구도 아니고 딘 가문의 뤼트론 그 자를 건들이다니. 아니 그 이전에. 하아-. 다른 누구도 아닌 그에게 가서 애를 재우라고 하시다니요-”

한편 헬레나 역시, 어제 일을 떠올리면서 기분 나쁜 듯이 열심히 궁시렁 거리면서 황궁으로의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녀의 저택에서 황궁까지 걷기에는 꽤 먼 거리이다. 하지만 역시 그녀 특유의 고집으로 마차를 부리지 않고서 직접 걸어가고 있었다.

        “사내가 되가지고서는 말이야. 이런 소문이나 퍼트리다니. 보기보다 쪼잔한 놈일세. 참 내. 기사가 되어가지고서 말이야. 문관 집안의 영애여서 이런 말 하는 것은 선입견이 될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사내가 되가지고서, 어찌 그리 쪼잔한 거야. 쳇. 들은 풍문으로 미루어 봤을 때는 꽤나 괜찮은 사내로군. 하고 생각했건만.”

갈색 의복을 꽤나 많이 걷어 올려서 묶은 채로 성큼성큼 걷고 있는 갈색 머리의 헬레나의 행차는 꽤나 진풍경이긴 했지만, 윈저 국의 다리아 수도에서 서민적이고 고집불통인 이 희귀한 영애는 이미 사람들에게 익숙한 존재이었다.

        “정말이지-. 놀라운 레이디로군.”

물론 간혹 가다가, 다른 나라에서 방문한 여행자라던가 사절단으로 방문한 귀족 가문의 자제라던가 하는 자들에게는 더 나위 할 바 없는 눈요기 감이 되었지만 말이다. 특히, 저렇게 위풍당당하게 걸어서 황궁까지 가는 헬레나 그녀에게 어제 그토록 구박을 당하면서 결국 애를 재워야 했던 뤼트론 딘 본인 그 자신이라면 말이다.

*******

어제 일을 떠올리던 뤼트론 딘 안, 뤼트론은 쓴 미소를 지었다. 감히 딘 공국의 기사단장이며, 후계자인-. 그것도 이번 전쟁에서 중요한 자문을 맡아서, 발표를 하려고 하던 그런 엄숙한 자리에 막사의 천막을 걷어차면서 뛰어 들어온 여자. 그 여자의 놀랍도록 시리도록 커다란 푸른 눈을 보면서 순간 뤼트론은 멍해졌었다. 아니 숨이 막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토록 심장이 죄어들도록 놀란 적은 처음이었다. 비밀스럽게 회의를 하는데 난입 당해서라기 보다는-. 왜 소란스러운 순간이 고요하게 느껴졌는지 말이다. 그저 또렷하게 그녀의 모습만이 각인되어져 왔다. 야무지게 묶어 올린 옷과 머리 모양이라던가, 땀을 흘리고 있던 얼굴이라던가, 오밀조밀 무언가 자신에게 쏘아붙이느라 벌려지고 움직이는 입술 모양하며. (......-_-.....) 확실히 레이디 다운 그런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하게도 안고 싶었다. 매우 자극적인 모습이었으니까. (.....-_-.....) 그녀가 불쑥 내미는 것(?)을 얼떨결에 받아 들고 보니, 고막이 터지도록 울어대는 어린 아이- 그것도 걸음마도 못하는 어린 아기이었다. 왜 이 아이를 내게? 라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또 화를 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 때는 그녀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한자 한자 전달되어져 오고 있었다.

        “도대체가! 아무리 그 놈의 바보 같은 전쟁 준비를 위해서 라고는 알지만 말이죠. 이런 회의를 왜 고아원 막사 옆에서 굳이 해야 하는 겁니까? 네? 조용한 곳을 원하면 저어기! 황성의 도서관에 가서 해요! 도서관장인 내 직권으로 허락해 줄 터이니까! 내가 몇 시간을 이 아이를 재우는데 소비했는지 알아요? 네? 간신히 열병에서 낫구어서 재워놓았나 했더니! 덕분에! 서류 작업할 시간이 낭비가 되었잖아요! 또!”

그녀는 태연스럽게 숨을 몰아쉬더니, 회의 중에 마시라고 준비 해둔 술이 담긴 음료가 담긴 컵을 들어서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컵을 탕 내려놓자마자 그녀의 공격(..)은 다시 계속 되었다.

        “그 놈의 철거덕거리고 소름끼치는 소리가 나는 그 따위 갑옷들은 좀 벗을 수 없어요? 아직 전쟁은 시작되기도 전이고! 여긴 전선이 아닙니다! 알기나 해요? 여자들이 지쳐 버리면, 전쟁이건 무엇이건 당신들은 이길 수 없어요. 절대로! 그러니까!”

푸른 눈은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 틀리다. 저 눈은. 생선처럼 죽어 있는 그런 푸른 눈이 아니다. 생동감과 열기가 이글거리는 살아있는 자의 눈이었다. 시원스럽고 깊이가 있는 그런 푸른 눈. 다소 옅은 갈색으로 그을린 가냘픈 손가락이 자신에게 쭉 뻗어진다.

        “당신이 깨운 이 아이! 당신이 재워요!”

비밀 회의가 진행이 되는 막사 안은 순간 고요해졌다. 딘 가문의 수장. 아니 공국의 후계자. 냉혹한 검은 전장의 검은 사신. 이렇게 불리는 뤼트론 딘에게 어디서인가 생뚱하게 들어온 여자- 그것도 채 소녀 티를 갓 벗은 듯한 어린 여자가 들어와서 애를 맡기면서 재우라고 고함을 지른다. 뤼트론 딘 본인은 어이가 없는 듯 표정의 변화가 없이 그런 여자를 내려다 보고만 있었고, 뤼트론의 절친한 친구이자, 윈저 국의 기사단장인 케일은 키득거리면서 웃고 있었다. 물론 막사 안에 있었던 지긋한 노장들은 대뜸 노호성을 지르기에 바빴지만 말이다.

        “저런! 버릇없는 여자가 다 있나? 무엇하는가? 밖에 아무도 없는.. 부..부인? 무어하는 게요?”

과연, 과연. 여심전심이라던가. 케일은 노장들의 부인인 귀족부인들이 노기등등한 표정으로 막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 숨을 죽이면서 웃기에 바빴다. 깐깐하다는 윈저 국의 귀부인들. 그것도 장군들의 내자들인 그녀들이 인정해 줄 만큼의 배포가 있는 레이디라면. 한 사람 밖에 없다.

        “레이디 헬렌 훼온. 처음 뵙습니다. 크크큭. 저..저의 이름은 케일 드라스 라고 합니다. 애를 제가 대신 재우면 아니될런지요? 아실런지는 모르겠지만 뤼트론 이 친구 아니 그러니까, 뤼트론 딘 경께서는 지금 긴급한 안건을 올려야 하는 지라.”

케일 드라스는 키득거리는 웃음을 애써서 갈무리하면서 매우 정중한 태도로 레이디 헬렌 훼온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기사가 레이디를 대할 때의 최고의 예. 하지만 레이디 헬렌 훼온은 역시나 당차게 케일 드라스의 손을 튕겨 버렸다.

        “바람 몰고 다니면서 레이디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케일 드라스 경을 모르면 그건 윈저 국 사람이 아니겠지요. 친우를 위하시는 마음은 알겠습니다만. 자신이 만든 일은 자신이 해결을 봐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매끄럽게 자신의 말을 받아치는 레이디 헬렌 훼온은 과히 명성 그대로이었다. 희대의 현자라 일컬어지는 여제의 부군이자 수상인 게일라이트 경이 한탄했다는 것이 끄덕거려질 만큼 말이다. 듣기로는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저런 희대의 현자가 하필이면 여인의 몸에서 났단 말이던가.”

케일 드라스는 구박에도 불구하고 꿋꿋한 기상으로 (...) 레이디 헬렌 훼온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그렇겠지만 말입니다. 예외의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조금이라도 그 하해와 같은 이해심과 아량으로.. 아악!”

막사 안은 또다시 고요함으로 가득 차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레이디 헬렌 훼온을 비호해 주기 위해서 들어온 장군의 부인들의 손에 들려 있던 커다란 솥이 그의 머리를 사정없이 난타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휘두른 것은 그녀들이 아닌 레이디 헬렌 훼온 그녀이었지만.

        “시끄러워요! 애 재우는 것이 얼마나 중노동인지 알아요? 당신 어머님도 당신 재우려고 아마도 밤잠 못 주무셨을 거란 말입니다. 그 뿐인 줄 아세요? 주방일도 봐야하지요. 당신처럼 말만 청산유수인 바깥주인 내조한답시고 시중을 들어야 하지요. 그렇다고 누군들 알아주는 이가 있나. 사내들이란! 다들 이 솥으로 한번씩 다 맞아야 정신을 차리죠! 해봐야 이득 하나 나오는 거 없는 전쟁 따위를 그것도 말싸움 한번에 덜컥 시작해 버리는 당신들 따위는 그저 이 솥단지로 얻어맞아야 정신을 차릴 겁니다!”

케일 드라스는 매우 억울했다. 자신이 맞아야 할 이유는 하등 없었기에. 물론 피할 수 있었다. 명색이 기사단장이 아니던가? 천천히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는 솥단지의 공격 따위는 문제없이 피할 수 있었지만-. 순간, 케일 드라스는 자신을 차갑게 응시하는 뤼트론 딘의 야청색 눈을 보고 말았기에 그냥 맞은 것이었다. 하지만 아픈 것은 아픈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그 솥은 매우 두꺼운 재질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무어, 그렇게 레이디 헬렌 훼온의 “애 재워요!”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 나는 듯 했다. 레이디 헬렌 훼온이 당차게 다시 뤼트론 딘에게 돌아서서 선언하고서 나갔으니까 말이다. 보무도 당당하게!

        “하여간! 책임지고 애 재워서 고아원 막사로 돌려보내요. 그렇지 않다가는 저 바람둥이 기사단장처럼 이 솥에 맞게 될 터이니! 레이디들? 가시죠!”

뤼트론 딘은 자신의 손에 남겨진 아이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울 기운이 남았는지 아이는 팔과 다리를 휘저어가며 악을 써대면서 울고 있다. 확실히 보통 아이는 아닌 듯싶다. 기도가 당당한 여럿 무장들이 모여 있는 막사에서도 줄기차게, 꿋꿋하게 울어대는 아이라니. 기실, 뤼트론 딘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무언가 상당히 난감했다. 총 지휘관인 제럴드 휘온 장군은 난감한 듯 눈썹을 찌푸려대고 있었다. 아이가 질러대는 울음의 소음은 매우 듣기가 괴로웠다.

        “저, 딘 경? 그 아이. 밖의 호위병에게 맡기게나.”

제럴드 휘온 장군은 헛기침을 해 대면서 멍하니 아이를 내려다보고만 있는 딘 경에게 말을 건넸다. 기실 그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딘 공국의 도움이 없다면 이번 전쟁은 지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딘 공국의 후계자이자, 딘 공국의 기사단장인 검은 사신 뤼트론 딘에게 건방지게 애 재우라는 명을 내리고 간 사람이 자기 나라 사람이니. 하지만 뜻밖에도 뤼트론 경은 자신의 팔에 안겨진 아이를 어설프나마 얼추 어르기 시작했다. 휙휙 무작정 흔들어대는 것이긴 했지만. 물론 아이의 울음소리는 더 커지고 있었다. 막사 안은 아이의 드센 울음소리만으로 가득했다. 그런 아이를 내려다보던 뤼트론 딘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 쉬면서 눈썹을 꿈틀거렸다. 수려한 그의 미관에는 무언가 고민하는 기세가 역력했다. 그러한 딘 경을 심술궂게 바라보던 케일 드라스는 머리 위에 난 혹을 어루만지면서 투덜거렸다.

        “이봐. 그렇게 흔들어대면 아이가 더 놀라잖나. 무언가 주위를 끌만한 것을 흔들어 봐.”

케일 드라스의 제안을 서두로 막사 안에서는 “그게 아닌 듯한데. 내 손자를 봤을 때에는 배가 고플 때 저리 울어대는 것이었는데만.” “그게 아닐세. 혹시 볼일을 봐서 그런 것은 아닌가.” “그냥 졸려서 저리 우는 것일 수도 있네만.” 이라는 의견으로 떠들썩해지고 있었다.

무어, 한 가지 확실한 듯 하다. 우는 아이에게는 제 아무리 용맹한 노장이라도 꼼짝 못 하는 것이 말이다. 뤼트론 딘 경은 주변의 의견을 나름대로 신중하게 받아들였다. 자신의 손 보호대를 벗어서 흔들어대었으니 말이다. 물론 주위에서는 “그렇게 시끄러운 것을 흔들어대면 더 울지를 않겠는가!” 라는 야유가 있었지만.

        “그..그쳤다!”

케일 드라스 경은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아이는 손 보호대가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옹알거리면서 꺄르르 웃음까지 내면서 투명한 은수정 자질의 손 보호대에게 손을 뻗어서 쥐려고 하고 있었다. 뤼트론 딘 경의 치켜 올라갔었던 눈썹은 이제 제 위치로 내려오고 있었다. 울 때는 그리도 미워보이던 아이었다. 하지만 배내짓을 하면서 꺄르륵 웃어 보이는 아이의 모습은 삭막한 전장을 누비고 다녔던 노장들의 꼬장꼬장한 마음을 녹여주고 있었다.

        “어디-, 이 손 보호대도 좋아하려나?”

이렇게 말하면서 손 보호대를 흔들어 대려는 제럴딘 휘온 장군을 탓하지만은 말자. 한참을 꺄르륵 거리던 아기는 끝내, 뤼트론 딘 경의 은수정 손 보호대를 꼭 끌어안고서 새근새근 잠에 빠져들었다. 아이가 완전히 잠들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5시간이었다. 전장의 어느 순간에서도 이렇게 진을 빼본 경험은 없었다. 뤼트론 이하 제럴딘 휘온 장군까지도 말이다. 물론 회의는 무산되었고, 뤼트론 경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고아원 막사까지 갈 때 갑옷의 마찰음이 안 들리게 하려고 신경을 쓴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침대 위에 아이를 내려놓으려고 할 때 아이가 또 한번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한 것에 비하면 말이다. 아마도 꽤나 뤼트론 딘 경의 품안이 포근했었나 보다. 결국 그날 밤 내내 뤼트론 딘 경은 한숨도 못 자고 아이를 안고 있어야 했다. 사방은 마법탄이 묻힌 샤딘 평원 보다도 더 한 위험지대이었다. 그의 갑옷 마찰음에 이곳저곳에서 히잉- 훌쩍- 거리는 이른바 깨려는 움직임이 번번했으니 말이다.

확실히 피곤한 밤이었다. 이가 갈릴 정도로 말이다. 이름이 무어라고 했더라? 피곤한 눈가를 어루만지다가 침대 위에서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킨 뤼트론 딘 경은 어제 그 레이디를 떠올렸다. 다른 것은 생각이 안 난다. 옷차림이 어떠했더라? 머리색이 무어였지? 그저 생각나는 것은 푸른 눈. 커다란 푸른 눈. 시원스러운 짙은 푸른 눈.

        “살아 있었군 그래. 이크-”

뤼트론 딘은 무의식중에 자신이 던진 단검을 매끄럽게 피하면서 받아 낸 케일 드라스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이름 알고 싶지 않나?”

다시 단검을 던지려던 뤼트론 딘 경은 다급하게 소리친 케일 드라스의 말에 멈칫했다. 케일 드라스의 금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글거리고 있었다. 케일 드라스는 자신의 백금발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넘기면서 손을 펴서 내밀었다.

        “무어, 쉽게 얻는 정보는 값어치가 없는 법. 아, 친구 사이인데 큰 거 요구 안 하겠네. 그냥 그 손목 보호대를 넘기지 않겠나?”

차릉- 은 수정 손목 보호대는 투명한 마찰음과 함께 케일 드라스의 손에 쥐어졌고, 케일 드라스는 히죽 웃으면서 줄줄줄 정보를 내뱉었다.

        “레이디 헬렌 훼온. 저명하신 문관 가문 고명딸이며. 현재 나이 17세. 혼기 놓쳐서 부친이 걱정하고 있는 중이니, 부친을 공략해 보면 될 것이네. 헬렌 훼온이 하는 일은 황궁의 도서관 관리와, 여제께 올라가는 상소문 중간 검토를 하는 일을 맡고 있지. 아, 참고로 지금 이맘때쯤이면 아마도 그녀-, 황궁으로 향하고 있지 않을까? 걸어서 가기로 유명하네. 검소한 그녀이거든. 모든 노귀부인들이 며느리감으로 탐을 내고 있으며-, 모든 젋은 사내들이 아내로 맞이하기를 꺼려하는 인물로서.”

케일 드라스는 귀한 은수정으로 만든 손목 보호대를 바라보면서 어느 새 휑하니 나가버린 뤼트론 딘 경을 보면서 크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저 차가운 놈의 마음에 불을 질러놨으니-. 레이디 헬렌 훼온. 그대도 인생이 순탄치만은 아니하겠습니다?”

확실히, 케일 드라스의 머리 위에 난 혹은 꽤 커보였다.

************

뤼트론 딘 경은 처음으로 여인의 옷 아래로 드러나는 발목이 그토록 유혹적일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확실히- 그의 아버지가 누누이 강조하던 사내라면 한 번 정도 여인에게 콩깍지가 씌워 보여야 한다. 그 이론이 그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 원망스러웠지만.

        “뭡니까?”

헬렌 훼온은 기겁했다. 그도 그럴것이 쪼잔한 녀석 같으니라고- 한참 신나게 욕하고 있었는데 그 장본인이 나타나서 정중하게 자신에게 한쪽 무릎을 세우고 꿇어앉아 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이 장본인은 한술 더 떠서 그녀의 오른 손을 나꾸어채서 손등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지엄하신 여제 폐하께 보고를 올리려고 막 들어선 알현장에서 말이다. 급한 일인 줄로 알고 뤼트론 딘 경을 여제께서는 들였다가 웬 진풍경을 보시게 된 셈이어서 즐거워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나 뤼트론 딘 -. 감히, 레이디 헬렌 훼온에게 수호기사가 되기를 청합니다.”

손 등이 타오르는 것 같다고 헬렌 훼온은 생각했다. 약하지만, 손등에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을 때, 기묘한 오싹거림이 그녀 등 뒤에서 목으로 그리고 머리 위까지 스멀거리면서 올라오고 있었다. 거기다가 손힘이 어찌나 강한지. 새삼 이 사람 기사이로군. 이라는 생각이-. 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거절합니다!”

이렇게 당차게 거절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뤼트론 딘 이 작자는 끝까지 헬렌 그녀의 손을 붙들고서 손등에 또 한번 입을 맞추고 있었다. 스멀거리는 그 감촉에 소름이 끼친 헬렌은 손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여제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여제는 금갈색 눈 가득히 흥미로운 빛만을 보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긴, 아끼는 여제, 그녀의 신료 중에서도 각별히 총애가 깊은 사람이었으니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거절한다고 했지 않습니까? 지엄하신 여제 앞이십니다. 놔요! 이거 안 놔?!”

알현실은 숨을 죽인 호기심으로 번쩍번쩍 빛을 내는 여제를 위시하여 궁전의 시녀들과 다른 신하들의 시선을 휘황하게 빛나고 있었다. 도움 주는 인간들이 한 명 없군! 헬렌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의 손을 붙들고 있는 뤼트론 딘 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부친 되시는 이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허락을 구한 듯 합니다만.”

이 인간 보기보다 인간 말종 아닌가! 물론, 전장의 냉혹한 검은 사신- 그런 호칭 들어 본적은 있는 헬렌이었다. 그렇기에 그 냉철한 미남 딘 경께서 설마 나 따위에게 이런 식으로 복수할까? 하고 자신만만했던 그녀이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보복을 하다니. 그것도 혼기가 꽉 차서 넘어선-. 즉 구설수에 민감한 그녀에게 말이다. 윈저 국에서 혼기가 된 처녀들에게 청혼의 승낙을 얻어낼 수 있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녀의 부친 되는 또는 모친 되는 보호자에게 사전 승낙을 얻어내던가, 아니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청혼을 하는 것이다. 또는, 최고의 지도자에게 승낙을 얻어내던가.

        “여제시여, 나 딘 공국의 뤼트론 딘. 감히 청을 하겠습니다. 레이디 헬렌 훼온의 수호기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시옵소서.”

물론 뤼트론 딘 경은 자신의 청을 약간 소리 높여서 드려야 했다. 옆에서 헬렌이 발끈하면서 펄쩍 뛰었으니 말이다.

        “누가! 당신 같이 쪼잔한 사람에게 시집갈 것 같아?”

냉혹한 전장의 사신 옆에는 이성적이고 똑 부러지는 자신의 가장 총애하는 신하가 있었다. 순간 여제는 한숨을 나직하게 내 쉬었다. 그녀에게 만일 아들만 있었더라도 당장에 왕자비로 삼았을 터이다. 하지만 여제 그녀는 이제 갓 결혼한 신부일 뿐이다. 오늘 밤에 자신의 남편인 대공을 닦달해야겠군.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헬렌 훼인의 부친인 훼인 공작이 시집을 보내달라면서 귀찮게 굴던 터이었다. 어제의 그 모종의 사건을 들어서 알고 있었던 여제로서는 내심 반가웠었다. 뤼트론 딘 경의 난입이 말이다. 자신의 가장 총애하는 신하를 딘 국의 후계자인 뤼트론 딘 경에게 시집보내면, 나라간의 외교도 돈독해지고-. 꿩 먹고 알 먹는 격이었으니 말이다.

        “여제시여! 어찌 제게 이러 실 수 있으십니까?”

헬렌 훼온의 원망스러운 외침을 듣던 여제는 짐짓 노기를 띄운 목소리로 하문을 했다. 그 기세에 헬렌 훼온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그것에 약간은 미안한 감정이 들었지만, 여제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어제 헬렌 훼온 자네가 한 일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지금은 전시이고 딘 공국간의 사이가 틀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자네야 말로 내게 이리 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여제는 눈물까지 찍어내는 명연기를 보였다. 물론 그 와중에, 순진하게 청혼만을 위해서 난입한 딘 경의 황당하고 분노에 찬 시선 따위는 태연스럽게 무시하고서 말이다. 참, 어리석을 정도로 순진한 사내가 아닌가. 분명, 여인 따위는 모르고 자랐을 위인일세. 하긴 그런 것이 레이디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을 터이지만. 자네 복 받은 줄 알게나. 헬렌 훼온 같은 천하의 제일가는 신부가 어디 있다고.

물론, 자신의 공국와 가문을 내 세워서 걸고넘어질 생각은 아니었던 뤼트론 딘은 뼛속까지 지도자인 클레딘 여제를 기가 막힌 듯 바라보았으나, 굳이 반박론을 펼치지는 않았다. 어차피 최후의 카드로 남겨두려고 했던 그것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자신의 앞에서 눈에 띄게 창백해지면서 손의 힘을 거두는 헬렌 훼온을 보기가 씁쓸했지만 말이다.

한편 헬렌 훼온은 화르륵 노여움에 타오르고 있었다. 왜 문관의 집안의 여식으로 태어나서! 검을 잡지 못했던가! 내게 검을 다룰 수 있는 재주만 있었더라도! 이 눈앞의 뻔뻔한 사내 쯤이야! 확실히 이성적인 헬렌 훼온의 사고는 훠이훠이 날아간 뒤였다. 어전에서 검을 뽑아들었다가는 바로 역모 죄 인 것도 까먹고 있었으니 말이다.

요행히 그 자리에서 분기로 인해서 기절해 넘어가지 않은 것이 그녀답다고 해야 할라나. 간신히 떨리는 목소리로 수호기사가 됨을 허락하고 나서, 꿋꿋한 태도로 여제에게 올렸을 상소문에 대한 보고를 올리고 나서도 당찬 보무를 보였으니 말이다.

        “레이디 헬렌 훼온. 제가 댁까지 모시겠습니다.”

물론 옆에서 따라 붙는 딘 경을 무시하고서 총총 걸음을 걷는 그녀이었다. 한편 뤼트론은 찬바람이 도는 헬렌을 보면서 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쩐지 이 소식을 들을 그의 아버지가 배를 부여잡으면서 웃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다.

        “아하하하! 부인! 들었소? 그 녀석이 마음을 뺏긴 레이디가 나타났다는 구려. 가문까지 들먹일 만큼 빼앗고 싶은 레이디가. 가문의 대가 끊기나 했더니만.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어째, 원수 같은 자식을 키운 아버지가 훼온 공작만은 아닌 듯 했다. 어쨌건 뤼트론 딘 경은 파들파들 분노로 몸을 떨면서도 기절하지 않고서 꿋꿋하게 걸음을 옮기는 그의 레이디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단지, 자신을 바라보는 그 푸른 눈에 분노만이 아니라 다른 감정이 비쳤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지만 말이다. 무엇보다도 당장이라도 저 높이 올려 묶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는 새하얀 목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싶었다.

        “모실 필요 없으니 어서 꺼져요!”

상당히 유쾌한 어휘를 발휘하는 헬렌 훼온은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뤼트론 딘 경을 돌아보았다.

        “호위 기사는 자신의 레이디를 두고서 꺼지지는 않는 법입니다.”

이거 보기보다 걸물일세? 헬렌 훼온은 주먹을 쥐었다가 펴면서 호흡을 골랐다. 물론 거칠게 들썩거리는 그녀의 가슴을 멍하니 바라보는 뤼트론 딘 경의 시선은 의식하지 못한 채였다.

        “그럼 예외를 만들어 두지요. 지금 여기서 꺼지시면 새로운 법이 생겨나겠네요.”

헬렌 훼온은 이죽거리면서 손가락질을 서슴치 않았다. 어떻게 안 가고 버텨온 시집인데! 다른 이도 아니고 이런 쪼잔한 소인배에게 그녀의 인생을 맡길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아주 한가하시네요? 왜? 어제의 그 뭐냐. 비밀회의는 안 하실 건가 보죠? 과연, 딘 공국의 앞날이 걱정이 되는군요.”

명백한 도발이었다. 내뱉은 헬렌 훼온 역시 속으로 ‘내가 미친게야!’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혼인하기도 전에 벌써 제 가문의 앞날까지 걱정해 주는 것이십니까?”

강적이다. 강적이야. 뭐? 순진한 냉정남이라고? 그런 것 개나 줘버리라고! 헬렌은 눈앞에 새하얗게 됨을 느꼈다. 싱긋 미소를 잔잔하게 짓는 뤼트론 딘 경의 모습은 헬렌 그녀의 눈에 지옥에서 강림한 대마왕처럼 보였다. 그렇게 강력하게 한방을 먹은 헬렌 그녀는 바들바들 떨면서 주저앉으려고 했다. 아니 스르르 무너지려고 했을 그 때이었다. 흡사 가벼운 짐이라도 다루는 듯 그녀를 번쩍 들어서 말 위에 앉힌 것은. 준비도 철저하게 내리기 어려운 기사 전용의 안장 위에 그녀를 앉히고서 뒤에 올라타 앉은 뤼트론 딘은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 인간 말종아! 네가 그러고도 기사냐! 당장 내려놓지 못 해애애애애!”

때는 윈저 력 1254년 따사로운 봄날이었다. 전시의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윈저 국의 수도 다리아의 한 복판에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이 후로 자신의 레이디를 안아 태우고서 달리는 행사가 생긴 것은 확실히 전쟁이 종결되고 난 이후부터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윈저 력 1254년이다. 그리고 헬렌 훼온이 납치당한(?) 곳은 그녀의 집이었다. 계속 악을 써댄 것이 허탈해진 헬렌은 우르르 몰려나온 그녀의 아버지이며 기타 사람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물론 뤼트론 딘 경의 태도는 더 나위 할 바 없이 정중했다. 미래의 장인어른(?)에게 딘 경은 정중하고도 매끄러운 태도로 사과를 했다.

        “귀한 따님을 소중히 모시지 못 한 것 사과를 드립니다.”

물론 그의 장인어른은 호탕하게 웃기에 바빴다. 그 뿐이던가? 친근한 척 팔 까지 두드리면서 작은 다과를 열라 지시한다.

        “괜찮네. 아예 이대로 데리고 딘 공국으로 갔어도 괜찮네. 흠흠. 어떤가? 간단하게 다과를 준비하라. 전시인지라, 술은 안 되겠지만, 간단한 다과 정도야 괜찮겠지. 어서 들게. 자, 어서 안으로.”

헬렌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허탈해졌다. 서글픈 감정마저 밀려오고 있었다. 훼인 가문을 이어야 할 외동딸인 입장에서, 아무리 여제가 다스리는 나라라고는 하나, 사내들의 기세등등함을 내치고 지금껏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공적을 아버지란 사람은 역시 딸은 시집을 가야해. 라는 이유만으로 내 버리려고 한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살아 왔던 이유가 누구 때문이었는데! 눈가랑 콧잔등이 시큰거리면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헬렌은 입술을 깨물면서 참았다. 이 보다 더 지독한 일도 참아왔다.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페릴 가문에서 자신을 음해하고자 아랫것들을 보내어서 강간을 시도했을 때도 이토록 비참하지는 않았다. 하긴 그 이후부터이었을 것이다. 확실히 사내들의 접촉을 꺼려했던 것이. 헬렌은 그녀의 허리에 손을 넣어서 말 위에서 내리려고 하는 뤼트론 딘의 손길에 흠칫거리면서도 꿋꿋하게 참아내었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자신의 방안으로 도망치면 그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계획은 가뿐하게 안아들은 뤼트론 딘에 의해서 저지당했다.

        “죄송합니다만, 어르신. 따님의 거처가 어디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아까도 쓰러지실 뻔 하셔서.”

소리를 치고 싶은데, 목에 무엇인가가 울컥울컥 차오르고 있다. 너무나도 분한 나머지 헬렌은 창백해진 얼굴로 뤼트론 딘의 수려하게 생긴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물론 주위 사람들은 분노로 창백해진 헬렌의 얼굴을 오해했고, 차라리 딸을 안고 들어가서 신방까지 차렸으면 하는 아버지인 지 심히 의심스러운 훼인 공작은 아랫것들을 내몰아서 헬렌의 방까지 안내했다. 결국 헬렌의 말문은 그녀의 침대 위에 곱게 내려진 이후에야 터졌다. 물론 용의주도한 아버지 훼인 공작의 술수에 의해서 그녀의 방문은 굳게 닫혀졌고, 어디서 용케 구해왔는지 소음을 새어나오게 하지 않는 사일런트 마법 부적까지 척- 하니 붙인 이후이었다.

        “도대체 왜!”

침대에서 벌떡 뛰어오른 헬렌은 순간 핑 하고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런 헬렌에게 물 잔을 건네주는 뤼트론 딘의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그의 야청색 눈에는 차가운 분노가 보이고 있었다. 그 기세에 헬렌은 움찔하면서 다소 움츠러들었지만, 뤼트론 딘의 말투는 가차 없었다.

        “누구입니까?”

누구라니? 뭐가 누구란 말이야? 헬렌은 눈을 깜빡거렸다. 하지만 뤼트론 딘의 어조는 단호했다.

        “당신에게 이렇게까지 절 거부를 하게 만드는 상대(...)의 이름 말입니다.”

하-아? 헬렌은 입을 딱 벌리고서 자신의 눈 앞에 서 있는 딘 국의 후계자이자 자신의 청혼자를 올려다 보았다. 심각하잖아? 이거? 자신이 완벽한 줄로 아는가 보지?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는군. 헬렌은 정말로 울고 싶어졌다.

        “있었으면 당신이 감히 제게 청혼했다는 것을 알고서 쳐들어 왔겠지요. 하아- 그만 나가주시겠습니까?”

고개를 숙이고서 한숨을 내쉬던 헬렌은 순간 목덜미에 느껴지는 뜨겁고도 축축한 무엇인가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거친 숨결이 자신의 귓가를 스치고 가서야 정신이 들은 헬렌은 손에 잡히는 대로 침대 위의 것들을 뤼트론 딘에게 던져대고 있었다. 그 날-. 사내들에게 추행 당할 뻔 했던 그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 날 밤 내내 새하얗게 새웠더랬다. 욕조에 앉아서 하염없이 씻으면서. 다행히 그 놈의 빌어먹을 순결은 지켰지만-. 그 끈적거렸던 입맞춤이라던가, 지분거리는 손길이 아직도 몸에 남아있는 듯해서, 씻어 내리고 또 씻어 내렸더랬다.

        “무..무슨 짓이야! 이 XXX 아! 당장 꺼져!”

뤼트론 딘 역시 멍해진 상태에서 그대로 자신에게 던져지는 물건들을 맞고만 있었다. 정말로 그리 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한숨을 내 쉬면서 고개를 숙일 때 보인 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이게 무슨 망신이람. 이지적인 여인이니까, 설득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뭔 놈의 조화 속인지, 저 푸른 눈과 하얀 목만 보면 정신이 아찔해졌다.

정신없이 헬렌의 공격(?!)에서 벗어나서 방문을 열고서 나온 뤼트론 딘은 자신의 등 뒤에 문으로부터 무엇인가, 매우 둔탁한 충격음이 느껴지는 것을 알고 나서야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한 그를 빤히 바라보는 신록의 시선이 있었다. 갈색 머리에 신록의 눈을 지닌 젊은이는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서 인사를 했고, 뤼트론 딘 역시 얼떨결에 그 인사를 받았다.

        “뤼트론 딘 경? 아니, 뤼트론 딘 저하가 되시지요? 전 헬렌 훼온의 사촌 오라버니인 헨리 훼온이라고 합니다. 훼온 공작께서는 제 작은 아버지가 되십니다. 제 지위는 남작입니다.”

뤼트론 딘은 자세를 바로하고서 또 한번 목례를 해보였다. 헨리 훼온 남작은 그러한 뤼트론 딘에게 호감이 어린 미소를 보였다. 다분히 동정심이 가득 어린 미소이었기는 했지만 말이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여, 뤼트론 딘은 조용히 절도가 있는 기세로 헨리 남작의 뒤를 따랐다.

한편, 방에 홀로 남겨진 헬렌 훼온은 거친 숨을 내몰아쉬다가 결국 침대에 드러눕고 말았다.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인데.. 하지만 체력의 소모가 너무나도 컸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이성을 잃고서 내던진 물건들의 처참하게 부서진 잔해를 보기가 두려웠다. 그 어마어마한 낭비의 현장을 보는 것이 두렵다고 해야 할라나.

        “시집 따위-! 전시만 아니더라도!”

그래-. 전시만 아니더라도 훨훨 날아갈 버렸을 일이다. 헬렌 훼온은 목덜미에서 느껴지던 더운 숨결과 축축하고 뜨거웠던 그 무엇인가를 회상하면서 진저리를 쳤다. 너무나도 분해서 그런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아서 그것이 더 그녀의 약을 올리고 있었다. 남들 같으면 지쳐서라도 그대로 누워서 자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헬렌은 일어서서 그녀가 부순 값비싼 파편들을 주워나가기 시작했다. 빠짐없이 다 담고 나서야 헬렌 훼온은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그녀를 방 안에 붙들어 두라고 지시를 받았던 아랫것들은 헬렌의 성난 기세에 말도 못 하고서 그저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헬렌 훼온이 집을 나서서 향한 곳은 고아원 막사 쪽이었다. 고아원에 가서 봉사하는 것은 아버지도 모르고 있던 일이라, 설마 이곳을 찾는 일은 없겠지-. 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가는 도중에 자신이 부순 값비싼 집기랑 장신구들을 돈으로 넉넉하게 바꾸어서 들고 가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레이디 헬렌? 다음 주 경에 오신다고 하지 않으셨? 아니, 안색이 안 좋으셔요? 무슨 일이라도?”

원장 여신관은 놀란 듯 헬렌 훼온을 맞이했다. 헬렌은 그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아이들이 잠을 이루는 작은 막사 안으로 기어들어가서 쪼그리고 누워서 잠을 청했다. 원장 여신관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지친 듯 해 보이는 헬렌의 위로 그저 담요 한 장을 덮어두고서 조용히 나왔을 뿐이었다. 한번도 지친 내색을 안 해보였던 저 철의 여인이 아이처럼 잠들다니. 어지간히도 그 시끄럽게 한 청혼이 지치게 한 모양이로군. 원장 신관은 아이들에 의해서 전해들은 청혼을 생각해 내고서 고개를 흔들면서 바느질을 계속했다.

한편 훼온 공작은 자신의 딸이 집을 나갔다는 것을 알고서 대노했다. 이래저래 불쌍한 이들은 아랫 사람들이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어리석은 것 같으니라고. 아 뤼트론 딘 경. 혼인식이고 무엇이고 필요 없소이다. 그냥 데리고 가서 사시오. 무엇 하느냐. 짐을 꾸려서 뤼트론 딘 경께 드리지 않고서!”

헨리 훼온은 그러한 자신의 작은 아버지를 보면서, 새삼 자신의 사촌누이가 불쌍해졌다. 기실, 여자의 몸으로 관리직을 꿋꿋하게 이어온 누이를 봐서라도 저리하면 안 될 것이다. 차를 들면서 헨리는 단호한 어조로 뤼트론 딘에게 못을 박았다.

        “힘들게 살아왔소. 물론 전장을 누비신 뤼트론 딘경만큼은 아닐런지도 모르지오. 하지만 이것만큼은 알아주시오. 밖에서 나라를 지키시는 분들만큼 우리 문관들도 안에서 나라를 보살피느라 힘들다는 것을. 여인의 몸으로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 쉬운 일은 아니오. 거기다가, 몇 해 전에는 여인이기 때문에 끔찍한 일도 당할 뻔 했으니-.”

물론 페릴 가문의 소행을 듣고 난 뤼트론 딘 경의 시선은 사신의 그것이라고 해야 할 만큼 서늘해져 있었지만 말이다. 일종의 DO 와 Don't 리스트를 알려주면서도 헨리 훼온은 솔직하게 동정을 금치 않았다.

        “애 먹을 거요. 뤼트론 딘 저하. 그 날 이후로, 워낙에 남녀간의 일을 기겁하는 아이이지만. 숙모께서 일찍 세상을 뜨시는 바람에, 여인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자라지는 않았소. 그러니 명심해 주오.”

뤼트론 딘은 그저 조용하게 그 말을 듣고 있었지만, 그의 머리는 기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러이러한 곳을 가보시면 찾을 수 있을 거요. 라는 헨리 훼온의 말을 듣고서 뤼트론 딘이 향한 곳은 엉뚱하게도 황궁 쪽이었다.

        “그래서-. 내게 원하는 것이 그것이 다입니까?”

여제는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여제의 옆에 있던 여제의 부군인, 게일라이트 공은 무언가 불만이 가득한 듯, 턱에 손을 괴고서 자신의 사랑하는 여제와 이웃나라 왕자인, 뤼트론 딘 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페릴 가문을 그대 손에 붙이는 거야, 무어 어렵겠습니까.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페릴 가문 악랄하여서 내치고 싶은 마음이야 하늘을 찌르고 있지만. 나름대로 인지도라는 것이 있어서 말이지요. 페릴 가문을 내어드리는 대신 무엇을 이 손에 붙이시렵니까?”

빈틈이 없는 아내의 말에, 게일라이트 공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 쉬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 것은 우리 무시하도록 하자. 어찌 되었건, 뤼트론 딘은 단호한 어조로 여제에게 무엇인가를 말했고, 그것을 들은 여제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 모종의 만남이 있은 후, 정확히 7시간 이후이었다. 레이디 헬렌 훼온이 먹던 스프에 사례가 들려서 캑캑거린 것은 말이다. 소식을 전해 준 원장 여신관은 흥미로운 기색으로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인 레이디 헬렌 훼온을 바라보았다.

        “페릴 가문이 문을 닫아요? 이유가 뭐랍니까?”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면서 레이디 헬렌 훼온은 자리에 도로 주저앉았다. 이리 될 줄 알았다면 어제 그 우는 아해를 들쳐 안고서 막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이었거늘. 뒤늦은 후회를 해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옛 말에 의하면 드래곤 잡으러 들어갔다가 해츨링 잡아서 멸문지화를 당한다고 했던가. 원장 여신관은 더 나위 할 바 없이 침착한 태도로 그 뒤의 이야기를 이었다.

        “헨리 훼온 남작의 고발이라고 합디다. 무어 페릴 가문을 에워싼 무리들은 딘 공국의 병사들이라고도 들었습니다만.”

그리고 더 나위 할 바 없이 완벽한 무심함을 가장하면서 원장 여신관은 직격탄을 투여했다.

        “아무래도 전쟁 이전에 내전이 날 듯 합니다만.”

무언가 조용한 흐름이 뚝-! 하고 끊어지는 듯했다. 여신관이 고개를 들어보니 싹싹 접시를 비운, 헬렌 훼온이 야무진 태도로 고아원 막사를 나서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면서 여신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물론 그와 동시에 막사의 한 쪽 구석에서 헨리 남작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등장한 것은 그 때이었다.

        “협조에 감사드리오. 신관 프메리온. 내, 약조한 대로 고아원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을 참이오.”

신관 프메리온은 그저 고개를 담담하게 주억거렸을 뿐이었지만, 새삼스럽게 뤼트론 딘 경을 동정하고 있었다. 화가 잔뜩 났으니 이를 어찌할꼬. 무어, 그와 같은 생각을 헨리 남작 역시 하고 있었다지만 말이다.

*********

        “이봐요. 뤼트론 딘 저하!”

뤼트론 딘 경은 두근거리는 심장의 빨라짐을 느끼면서도 태연한 척 뒤를 돌아서 당차게 자신을 노려보는 여인을 마주했다. 물론 뤼트론 딘 경 옆에 서 있던 케일 드라스 경은 웃음을 참느라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원수 같던 친구의 가면을 벗겨 낸 레이디 헬렌도 헬렌이었지만. 시치미를 뚝 뗀 친구의 모습 또한 가증스러울 정도의 구경거리이었다.

        “레이리 헬렌 훼온. 지금껏 어디 있었소?”

걱정스러운 듯 자신에게 다가서는 뤼트론 딘 경을 노려보면서 헬렌은 잽싸게 팔짱을 꼈다. 자신의 손등에 그 놈의 빌어먹을 예를 취할까 해서이었다.

        “친구 집에 있었지요. 그건 알바 아니고. 저하께서는 지금 내정간섭이라는 것을 하시는 것을 알고 계신지요?”

뤼트론 딘의 짙고도 단아한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있었다. 그것을 보던 헬렌 훼온은 치가 떨리고 이가 갈렸으나 다부지게 내뱉었다. 케일 드라스가 결국은 숨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기겁하게 만든 그 이야기를.

        “그렇게 제가 좋습니까? 좋아요. 데려가시지요. 저하. 어디 실컷 안아보시지요. 그리하면 불쌍한 윈저 국 사람들이 그 놈의 빌어먹을 전쟁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헬렌 훼온은 거친 숨을 잠시 골랐다. 뤼트론 딘의 사납고 냉정해진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서 붙박힌 채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 느껴졌으나, 꿋꿋하게 서 있었다. 한편 케일 드라스는 분위기를 모면하고자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뤼트론 딘의 시선에 질려서 입을 떼지를 못했다.

        “친구. 잠시 자리를 피해 주겠나.”

자아, 이제부터 시작이다. 기회를 놓칠 줄 알어? 헬렌 훼온은 케일 드라스가 뤼트론 딘의 기세에 밀려서 달아나기 전에 냅다 소리쳤다.

        “세 가지 의뢰! 수호 기사로서 당신의 레이디가 부탁하는 세 가지 의뢰를 들어주시죠.”

케일 드라스는 말 그대로 굳어져서 헬렌을 바라보았다. 물론 이들의 대화를 두근거리면서 엿듣고 있던 헨리 남작이라던가 헬렌의 부친이 되는 훼온 공작 역시 뻣뻣하게 굳어져 버렸다. 세 가지 의뢰를 들어주지 못하는 수호기사는 레이디가 보는 앞에서 자결을 해야 하는 것이 그 관례이다. 물론 그 관례가 지켜진 예는 없었지만. 뤼트론 딘의 입가에는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고. 그 미소는 헬렌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첫 번째 의뢰를 받들겠습니다. 무엇인지요?”

승리의 달콤함(?!)을 누리면서 헬렌은 거만하게 자신의 손등의 그 예의 입맞춤을 허용했다. 여전히 소름이 쫙 올라오고는 있었지만.

        “그러니까.”

헬렌의 시선은 그들이 있던 넓은 집무실로 향했다. 페릴 가문 집무실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아무리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정도로 증오스러웠던 페릴 가문의 집무실이었건만, 헬렌은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집무실이 영 탐탁치 않았다. 하여, 매섭게 그녀의 호위기사에게 단호한 태도로 명을 내렸다.

        “페릴 가문의 이 집. 현재, 뤼트론 딘 저하의 손에 붙이신 겁니까?”

뤼트론 딘은 즐거운 듯, 그렇소만. 이라고 대답했다. 역시 효과가 있었군. 이라는 뿌듯한 미소와 함께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헬렌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뤼트론 딘에게 첫 번째 의뢰를 했다.

        “그렇다면, 이 페릴 가문의 이 집. 제 손에 붙여주실 수 도 있으신지요?”

물론, 짐작하던 바라 뤼트론 딘은 흔쾌히 이 청을 수락했다. 그러자, 헬렌은 또 한번의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두 번째 의뢰입니다. 이 집무실의 바닥을 걸레로 깨끗하게 닦으세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해 내셔야 합니다. 그 동안 전 부서진 집기들을 내 버리지요.”

뤼트론 딘을 제외한 모든 남자들의 입은 쩌억하니 벌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호기롭게 헛기침을 하면서 들어서던 제럴딘 장군마저도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헨리 오라버니께서는 고아원 식구들을 여기로 다 데리고 오도록 하셔요. 어차피 문을 닫은 가문의 집. 제 손에 붙이셨으니, 활용도 제 마음이겠지요. 무어 하십니까?”

심술궂도록 매혹적인 레이디 헬렌 훼온의 미소가 매력적으로 그녀의 입가 위에 그려지고 있었다.

        “왜, 여기 다들 머물러서 걸레질 하는 뤼트론 딘 저하를 지켜보기라도 하실 요령이십니까?”

케일 드라스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려고 했을 때이었다. 제럴딘 장군이 헨리 남작과 같이 케일 드라스를 이끌고서 나간 것은.

        “이만 나가세.”

그리고 뤼트론 딘 경은 오기에 찬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바닥에 주저앉아서 걸레질을 시작했다. 물론 그 모습에 헬렌은 짧은 웃음을 터트렸지만, 내심 두려워지고 있었다. 뤼트론 딘의 야청빛 눈은 더 나위 할 바 없이 진지했으니까. 평생에 걸쳐서 악몽으로 꿀 그 날 밤. 그 때 그 사내들의 눈빛과는 달랐다. 희대의 명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페릴 가문으로 옮겨온 고아원 아이들과 훼온 가문의 사람들, 그리고 딘 공국의 부관들은 자신의 상관인 뤼트론 딘이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면서 걸레질을 하고 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고아원 아이들은 매우 즐거워했지만 말이다. 레이디 헬렌 훼온 역시, 그냥 멍하니 서 있지만은 아니했다. 까다롭게 여기저기를 가르치면서 걸레질 지시를 내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의 의복 역시 열심히 부자재들을 치우느라 매우 더러워져 있었다.

밤의 장막이 내렸을 무렵에서야 페릴 가문의 집무실 아니, 이제부터 프메리온 고아원이 된 집무실은 매우 윤이 반들반들 나고 화사하고도 청결한 장소가 되어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프메리온 여신관 역시 번들거리는 땀을 훔치면서 청소의 끝을 알렸고, 천 조각인지 걸레인지 상태가 의심스러운 것을 깨끗이 빨아서 오던 뤼트론 딘 역시 아픈 허리를 피고서 꼿꼿하게 일어섰다. 걸레질이 그리도 힘든 중노동인지 그는 처음 알았다. 딘 공국으로 가자마자 걸레질하는 시종들에게 당장 휴가를 주리라. 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자신에게 이런 의뢰를 떠맡긴 그의 레이디를 바라보았다. 그의 레이디 역시 계속되는 청소로 인해서 상당히 힘든 듯한 표정이었다. 뤼트론 딘은 입의 한쪽 끝을 올리고서 자못 심술궂게 미소지으면서 성큼성큼 고아원 아이들과 자신의 부하들을 밀치고서 레이디에게 걸어가서 걸레를 당당한 기세로 바쳤다. 헬렌은 자신에게 다가온 그 기세에 주춤거리면서도 태연스럽게 걸레를 받아들였다. 이글거리는 야청색 눈에 그녀의 푸른 눈이 또렷하게 투영되어져 보이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걸레를 쥐여진 자신의 손을 잡아당길 때만 해도 그저 예의 그 예를 차리는 줄로 생각했다. 그래서 야청색 눈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도 그저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무어-.”

숨 막힐 정도로 강한 팔 힘이었다. 손 등위에 머물렀던, 그리고 목 위에 잠시 머물렀던 그 뜨겁고 물컹거리는 무엇은 자근자근 그녀의 입술을 애무했다. 묘한 소름끼침에 헬렌은 몸부림을 쳤고, 그 와중에 무엇인가가 그녀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명색이 도서관장 이었다. 많은 서적을 접해봤다. 남녀간의 은밀한 구애라던가 그 방식. 입맞춤에 대해서 들어왔었다. 하지만.

        “쿨럭 쿨럭-!”

숨이 막힌다 말이다! 헬렌은 거칠게 기침을 해 대었다. 그제서 놀란 듯 그녀를 풀어준 뤼트론 딘은 헬렌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자신을 때리고서 달아났을 때도 가만히 있었을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뤼트론! 피가. 입술에서 피가 나지 않는가?”

케일 드라스는 기겁을 하면서 뤼트론 딘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누군가에 안내에 의해서인지는 모르지만, 페릴 가문 아니 이젠 고아원이 된 그 집의 한 방을 차지하게 된 헨리 남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사람 잡겠습니다.”

하지만 그 옆에서 욕조를 사용하던 케일 드라스는 더 나위 할 바 없이 상쾌한 소리로 대답을 해 주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헨리 남작. 저 녀석 지금까지 내숭떨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걱정해야 할 분은 헬렌 훼온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그나저나 진풍경이 아닙니까? 걸레질을 하는 기사단장이라. 낄낄낄.”

확실히 절친한 친구는 아니신가 보군요. 헨리 남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편, 뤼트론 딘은 땀으로 얼룩진 몸을 깨끗하게 씻어 내려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달콤했다. 상큼한 사과 향이 아직도 그의 입술에 혀 끝에 묻어나는 듯 했다. 비록 입술 한쪽 끝이 깨물려서 퉁퉁 부어오르고 있었어도 말이다. 게다가 확실히 헬렌의 손은 매서웠다. 고개가 한쪽으로 확실하게 돌아갔으니까. 하지만, 벌겋게 손자국이 난 그 뺨을 만지면서 히죽거리는 뤼트론 딘 이었다. 물론 그런 상관의 모습을 본 딘 국의 부관들은 절규를 해야 했지만 말이다. 저런 넋이 나간 사내가 자신들의 군주라니. 믿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전시의 기운은 긴박하고 급한 법이다. 하지만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뤼트론 딘과 헬렌 훼온의 이색적인 로맨스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의외로 사람들의 얼굴에 찌푸림이 아닌 작은 미소를 만들면서 말이다. 확실히, 헬렌 훼온 그녀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있었다.

        “물! 물 좀 가져오라구욧. 아직도 메슥거려. 우웩”

헬렌은 벌써 30분 째 입을 헹구어 내고 있었던 참이었다. 사내들이란! 어떻게 지저분하게 혀로 핥아 댈 수가 있는 거야? 온 몸에 소름이 돋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프메리온 여 신관은 한숨을 나직하게 내 쉬고 있었다.

        “신관인 나보다도 남자에 대해서 그리 모를 수 가 있습니까. 정말이지. 구애의 한 방법입니다. 서적을 안 접해 보셨습니까?”

프메리온 여신관은 능숙하게 그녀의 품 안에 아이를 어르면서 계속해서 이어서 말했다.

        “그리 남자를 싫어하시다가 나중에 후사는 어찌 하려고 합니까? 아이를 원하시지 않습니까? 아이를 좋아하시지 않으셨던가요?”

난 먹을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할짝거리면서 온 몸을 핥아댈 것을 생각하니 소름이 다 끼쳐요. 그렇게 냅다 고함을 지르려던 헬렌은 무엇인가 묘한 자극에 흠칫 몸을 사렸다. 설마. 그러려고.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다. 어차피 결혼해서 이 나라를 떠나야 하는 것쯤은 말이다. 딘 국과의 관계가 돈독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여제에게 가장 큰 충성을 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두려웠다. 그 날 밤의 영상이 아직도 뇌리에서 떠나고 있지 않기에.

        “그래. 세 번째 의뢰는 무엇으로 하시렵니까?”

프메리온 여신관은 어느 새 새근새근 잠이 든 아이를 품 안에 안으면서 헬렌을 유심히 살폈다.

        “전쟁을 중단해 달라고 해 주고 싶어요. 무어, 난 미망인이 되기는 싫으니까 말이지요.”

힘없이 흘러나오는 헬렌의 말에 프메리온 여신관은 피식 쓴 미소를 지었다. 결국 이 아가씨도 인정은 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메리온 여신관은 피곤한 듯이 자리에 눕는 헬렌을 보고서 슬며시 방을 나왔다. 확실히 전시이긴 하다. 아직 수도인 이곳까지는 아니지만 앞으로도 많은 사상자가 생겨날 것이다. 그 사상자가 뤼트론 딘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고아원에 있는 고아들도 부와 모가 살아 있다면 매우 귀하게 자라났을 아이들이다. 하지만 한 가지 그냥 넘겨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전시라는 긴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뤼트론 딘과 헬렌 두 사람이 만날 계기도 없었을 테니까. 그저 그렇게 무심히 스쳐지나갔을 두 사람 일지도 모른다.

        “이런 청을 하시고 싶어 하시는데, 뤼트론 딘 저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단아한 태도로 자신에게 엄격한 질문을 던지는 프메리온 여신관을 보면서 뤼트론 딘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렇게 정색을 한 자는 뤼트론 딘 뿐만은 아니었다. 방 안의 모든 이들이 그렇게 침통한 분위기이었으니 말이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뤼트론 딘 저하. 저하의 자식이 저희 이 고아원에서 자라날 수도 있음을 명심해 주시지요.”

냉철한 여신관의 말은 뤼트론 딘의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고 있었다. 단지 품고 심다고 생각했다. 아니, 평생을 같이 하고 싶었다. 기지에 반했고, 영민함이 사랑스러웠다. 그 푸른 눈 가득히 넘치는 총명함과 근면 성실함이 어여뻤다. 그래서 숨 막히도록 입 맞추고 싶었고 안고 싶었다. 이래서야, 단지 추잡한 사내의 욕심일 뿐이 아닌가. 그래.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전사할 그 날에는 뒤에 남겨진 그녀는.

*******

        “떠났습니다.”

헬렌은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프메리온 여신관의 말에 빙글 뒤로 돌아섰다. 떠났다고 누가? 헬렌의 의아함에 프메리온 여신관이 대답을 했다.

        “르튀론 딘 저하께서 전선으로 떠나신다고 합니다. 그간의 무례와 결례를 용서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쨍그랑-. 프메리온 여신관은 그녀의 발치 근처에 날아와서 깨진 물 잔을 바라보았다. 헬렌의 짙푸른 눈은 노여움으로 가득 불타오르고 있었다. 역시-. 자신의 짐작이 맞은 것에 프메리온은 고개를 숙이면서 아주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 몹쓸 작자 같으니라고! 그래. 이리 소동을 일으켜 놓고서 도망을 가아?”

헬렌은 히스트렉하게 외치면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녀를 본 그녀의 부관인 피오란트는 입을 벌리고서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소리를 지른다? 천하의 냉정한 그녀가? 한편, 헬렌은 보무도 당당하게 출진준비를 냉정하게 르튀론 딘의 거처로 들어갔다. 물론 그렇게 가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제지와 방해가 있었지만-. 그녀의 독설 한 마디에 그냥 주저앉았다.

        “살아서 돌아오겠습니다. 그 때 못난 호위 기사를 받아주시겠습니까?”

기세 등등하게 들어가서 르튀론 딘의 야청색 눈빛을 마주했더니, 흘러나온 말이 고작 저것이다. 이 비겁한 인간 같으니라고! 간신히 마음 다잡고 시집가 주려고 했더니! 뭐가 어째? 헬렌은 성큼성큼 다가가서, 당황한 뤼트론 딘의 양 귀를 붙잡고서 흔들어 대었다.

        “엄한 처자의 혼사길 막아놓고서 무엇이 어째?!”

헬렌은 말 그래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적군의 누군가가 이런 그녀를 봤다면 단연코 그녀를 사살하라고 했을 것이다. 군 전체의 사기의 요인인 냉혹한 검은 사신인 뤼트론 딘의 귀를 잡고 저리 흔들 수 있는 위인이니 말이다.

        “그런 마음 가짐으로 용케도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왔군요. 난 적국의 포로가 될 마음 따윈 추호도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날 지금 안은 후에 죽이던가!”

숨이 막혀왔다. 상큼한 사과 향에. 멈칫멈칫 하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에게 서툰 입맞춤을 시도하던 그녀에게-. 깊은 입맞춤을 되돌리고 그대로 손을 내려서 안아버린 것도. 아찔하게 만드는 사과향 탓이었다. 새하얀 목덜미에 원하던 그대로 살짝 그리고 깊게 입을 맞춘다. 그리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왜 이렇게 옷의 끈은 길기만 한 건지. 여성의 옷에 대해 별반 감정이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뤼트론 딘은 리본이 겹겹이 달린 여성의 속내의에 욕이란 욕은 다 퍼붓고 있었다. 물론 자신의 옷가지에도 마찬가지이었지만. 뽀얀 가슴의 굴곡에 입술을 가져다 대면서 기도했다. 태어나게 해 준 것을 감사드린다고. 보드라운 몸을 더듬으면서 감사의 기도를 쉬지 않고 올렸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다리 사이에 엄청난 아픔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헬렌은 사실 그렇게 역겨웠다거나 혐오스럽지만은 않았다. 확실히 말이다. 그 날 밤과는 확실히 틀렸다. 온 몸 가득히 돋는 소름은 이내 기분 좋은 입맞춤이 되어서 그녀의 몸을 훑고 있었다. 확실히, 이내 다급한 신음소리와 함께 바싹 달라붙는 르튀론 딘의 모습에 자동적으로 차 버린 것은 예정보다도 늦은 시각이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헬렌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 쉬었다. 왜? 라는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르튀론 딘에게 헬렌은 더 나위 할 바 없이 상큼한 태도로 명을 내렸다.

        “생각해 보니 세 번째 의뢰를 못 드렸잖아요. 이기고 와서 안아 주세요. 혼인은 화려하게 하기 싫습니다. 신전에서 검소하게 하겠어요.”    

물론 출전은 예정보다 하루 늦춰졌다. 하지만 늦어진 출전만큼 적국의 병사들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덤벼드는 (...) 르튀론 딘에 의하여서 끔찍한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윈저 력 1261년. 긴 세월을 이끌고 오던 전쟁을 막을 내렸다. 물론 백전백승을 생각하고 있었던 적국은 그 내막을 알 리가 없었다. 한 사람의 여인에게 의하여서 전쟁의 승패가 갈릴 줄은 아무도 몰랐을 터이다. 이 숨겨진 내막은 전쟁 종결 후, 정확히 윈저 력 1278 년에 딘 공국의 공녀, 헬렌 주니어에 의해서 한 편의 아름다운 사랑의 서사시(..)가 되어서 세상에 나오게 된다. 해독이 상당히 불가능하긴 하나, 헬렌 주니어가 마지막 원고에 적은 문구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역자로써, 지워진 그 글자들의 숨은 뜻을 알고 싶은 욕구가 상당하다.

        //열일곱의 나이에 이제 갓 태어난 동생을 돌보기도 지긋지긋하다. 부모들이지만 정말로 주*바*지*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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