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2003. 7/17


(1)

#
"이별 이전에는 만남이 있지, 그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어"

화장실에서 비틀거리며 나오던 친구녀석이 무슨 선언이라

도 하듯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지금 부끄러워하고 있

다.

늘 비극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조잡한 코미디라고 말

하곤 하는 녀석이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것은 자기 경멸이 엄

습하는 그러한 때 뿐이니까.

아, 친구여, 너는 어찌 그리도 배배 꼬였는가.

세상에 대한 반어적 태도가 그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왈가불가 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얼마되지 않는 매력 중에 하나니까.



자정이 넘어 왠 여자와 함께 나의 자취방을 습격한 친구와

나는 간만에 술을 마셨다. 녀석과 여자는 이미 어느 정도

취한 상태였다. 여자의 얼굴은 그냥 평범했다. 벽에 등을

붙이고 머리를 기대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그 피곤한

표정과 마찬가지로.

친구가 말했다.

"그러니까 말이야..그것만이 희망이란 말야"

"뭐가?"

"그 이전의 것"

녀석이 키득대기 시작했다.

"이별이 만남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일종의

희망이란 말야?"

나의 말에 녀석은 고개를 흔든다

"아니, 그 반대야, 만남이 이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

  ..아니지, 만나기 전에는 서로 몰랐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

야. 그러니 이별은 긍정적인 거야."

" ..."

어느새 드러누워버린 녀석이 허공에 손을 휘젓다가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말했다

"사랑이라는 것은 공기를 부여 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을지

모르지"

  그리고는 녀석은 축축한 손을 폈다.

"아무리 주먹을 꽉 모아쥐어도 공기는 새어나가버리지

  그래도 보이진 않지만 무언가가 남아있어, 그것이 내 땀과  

같은,,내 안에서 나오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 손을 바지에다 문질러 닦으며 친구는 웃었다.

"그게 내가 '문란해지길 바라는' 이유가 아닐까.

어때 난 이제 나르시시즘도 받아들이기로

했다구.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뭐가 나빠."

술을 따라주는 나에게 녀석이 동의를 구하듯 물어봤다.

"그게 내 탓일까?"

"난 잘 모르겠어"

조금 머뭇거리며 나는 대답했다.

"나르시시즘에 대해서라면 별로 할 말은 없어.

그게 누구나 가지는 그런 보편적인 것이라면,

그에 대한 것은 단지 수준의 문제이지 않을까?

내가 보다 더 '나르시스트인가?" 라는 식으로 말야.

그러니 난 너의 괴로움이 일종의 결벽증이라고 생각되는데"

"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아냐!!"

녀석이 소리쳤다. 엄숙한 얼굴.

"난 희망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라고.

내가 나의 약점 때문에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나를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거라고.

난 더 이상 만남을 두려워하지 않아!"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나도 할말은 없어,

단지 니가 요즘 만남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것 같아서

그렇지"

"과도함이라고? 과도함이라고?"

녀석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나의 그런 '과도함'때문에 니가 나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 아니었어?"

녀석의 표정에는 어떤 즐거움이 배여 있다.

그래서 나도 내 대답이 그를 즐겁게 하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그런다고 해서, 모든 사람도 그렇지는 않겠지"

그리고 녀석과 나는 웃었다. 아, 이 오래된 '선민사상적'

쾌감. 착오적인 선택의 느낌. 그래 널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은 나밖에 없어, 날 오해할 수 있는 사람이 너 밖에 없듯이.

"그런데 말야.."

난 나의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난 너의 삐뚤어진 만남 찬양에는 약간 생각이 달라.

  넌 설사 실패에 가까운 만남이라 해도 손해될 것은

없다는 식으로 말하지. 안그래?"

"그래, 그 끝이 어떻든 만나는 것이 안만나는 것보다 나아."

  아니..

  난 나직히 어떤 이름을 말했다.

  녀석의 얼굴이 굳어진다.

  "..결국 후회와 상처만이 남았어. 그런데도 만나는 것이

   안만나는 것 보다 낫다고 할 수 있어? 모든 이별이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어?"

"어떻게.."

친구는 약간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그런게 가능하지? 어떻게 상처가 남을 수 있지?

  이 세상엔 나밖에 없는데?"

"뭐라고?"

"어째서 내가 나를 상처줄 수가 있는 거지?

그런 척 할뿐이야."

  아, 나는 그 순간 녀석의 희망의 근거를 간파했다.

  하지만, 난 솔직하게 말해주기로 했다. 녀석이 불편해

할 거라는 것을 안다 - 그러나 진실이라는 것이 다

그 모양이지 않는가

  "바보 자식, 이 세계에 다른 사람은 존재한다구"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친구여.


   (2)

#

새벽 5시쯤에서야 녀석과 나는 잠이 들었다. 대화가 지리멸

렬해 졌기 때문이리라.

얼마나 잤을까..뭔가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살짝 눈을

떠보니 친구가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한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방안의 쓰레기를 주워 담으면서 말이다.

늘 이렇다. 녀석은 항상 떠나기 전에 자신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자 했다.

너무 많은 것을 털어놓았다는 후회감에서일까, 아니면 언젠

가 말했듯, 이젠 더 이상 타인에게 단 한 방울의 진실도 흘

리고 싶지 않다던 그 맹세 때문일까.

극단적인 자기 노출과 그에 뒤이은 극단적인 철수..그래 너

의 특징은 바로 그런 '과도함'에 있었지. 나는 그냥 잠들어

있는 척 하고 있었다.

나의 감은 눈위로 녀석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아, 내가 손

에 맥주캔을 쥔 채 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녀석은 나를 깨

울까봐 차마 그걸 치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심함..

녀석이 자신의 '소심함'이라고 경멸해 마지않는..이러한

부분에서는 웃을 수 밖에 없다. 녀석이 살며시 문을 여닫고

나간 뒤에 나는 참았던 웃음을 나직히 터트렸다.



녀석이 남기고 간 것은 맥주캔만이 아니었다.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그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래 어제 녀석

과 같이 온 그 여자애였다.

내가 깨어난 것은 정오를 훨씬 지나서 거의 저녁이 다되어

가는 무렵이었다.

마침 그녀도 벽에서 머리를 떼고 - 밤새 앉아서 잤던 것이

다!- 막 일어서려는 참이었다.

그녀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뭔가 도화지에 검은 크레파스

로 색칠을 해 놓은 듯한 눈동자.

그녀가 말했다.

"안녕"

"어, 그래"

어색함을 떨쳐버리려고 나는 농담을 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

"뭐가?"

"어제 밤에 말야"

"..알아"

그녀는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투로 대답하곤 물었다.

"화장실이 어디지? 좀 씼어야 겠어"

나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옆을 가리켰다.


들어간지 한참이 되었는데 계속해서 물소리만 났다.

"어이, 뭐해"

"세수해"

"그렇게 대답한게 몇 번인줄 알아?"

"그러게 왜 자꾸 물어봐. 숙녀가 화장실에서 뭐하는지 그렇

게 궁금해?"

"...급하단 말야"

곧 그녀가 나왔다. 채 물기를 제거하지 못한 그녀의 얼굴

은..

.. 그녀는 얼굴이 없었다.


#

  "바보, 그냥 화장을 지운 것 뿐이라고"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모든 여자가 화장을 지운다고 얼굴이

사라지지는 않아'

  나는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유리로 되어 있었다.

  얼굴의 물기가 그나마 그녀의 윤곽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것들을 수건으로 훔쳐내며 그녀가 말했다.

  "여자 맨얼굴 처음봐? 급하다며?"

  나는 그제야 아픈배를 느끼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볼일을 보고 나오니 그녀는 다시 화장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 그린다는 표현이 이토록 어울리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꺼야"

  거울을 보며 막 주근깨를 그려넣던 그녀가 뒤돌아봤다.

  아직 눈은 색칠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강렬한 눈빛 - 순

간 나는 그 눈에 매혹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비록 그것이

내가 막 켠 형광등 불빛이 반사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고 해도.

"너 여자들한테 인기없지?"

나를 쳐다보며 -아니 그녀가 정작 무얼 보고 있는지 모르

기에 - 그런 자세로 그녀가 물었다.

"난데없이 무슨 소리야"

"좀 비꼬는 듯 들릴 수 있는 말투라서"

"뭐라고?"
  
그녀는 다시 거울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눈동자를 그려넣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나의 '특별함'에 콤플렉스라도 있었다면

어쩌겠어."

"..."

"걱정마, 물론 난 그런거 없으니까. 다만 충고했을 뿐이야."

"아아..고마워"


한참 뒤 그녀는 불투명해졌다. 그리고 소지품을 주섬주섬

챙겨들면서 말했다.

"내 연락처 남겨놨어"

"뭐? 어디에?"

왜 '어디에' 라고 물어본 것일까. 조금 후회하는 나에게

막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화장실에"

그녀는 웃고 있는 것일까. 과연 지금 저 말을 하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니, 과연 그녀가 표정이란 것을 가

질 수 있을까.. 그런 두서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는 이

미 그녀는 사라진 뒤였다.

나는 문득 내가 그녀에게 잘가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

을 깨달았다.


(3)

#

그 후로도 우리는 종종 만났다. 정확히 말하면 셋이서.

나와 친구는 미묘한 대화 끝에 그녀가 우리 사이를 오가는

것을 즐기고 있다고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그리고 단지 우리

둘 뿐만은 아닐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징검다리를 건너듯

이쪽저쪽 오가는 그녀가 오늘은 나의 머리 위에서 멈춘 것

뿐이리라. 친구와 그녀와 나, 이렇게 셋이서 또 술을 마시다,

답답해서 바람을 쐬러 나가려는 나를 따라오는 그녀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이슬만 마시는군, 너는”

안주에는 전혀 손도 되지 않고 끊임없이 술잔을 비우던

그녀를 떠올리며 내가 말했다.

“여자란 그래”

어이없는 그녀의 대답.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뭘 먹는 걸 본적이 없는데?”

그녀가 나직이 웃었다.

“알고 있으면서”

그리고 말했다

“내 위장도 유리로 되어있단다”

“근데 술을 마셔?”

“뭘 먹든 똑같아, 단지 찌끼가 끼는게 싫어서 액체만

마실 뿐이야”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근데 그 얼굴말이야”

“응?”

“좀 더 예쁜 얼굴로 그리면 안되냐? 어짜피 그릴 거면..”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런 얘기를 하지”

그녀가 지겹다는 투로 말했다.

“희소가치에 대해서면 이 몸뚱아리로도 충분해. 난 그냥 평

범한 얼굴을 원해. 난 돋보이고 싶은 것이 아니야. 그냥 ‘그

럴듯함’이 더 필요하다구“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 사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여름철이라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른다. 나는 그녀에게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 했다.

“아니, 이대로 있어”

그녀가 그대로 서서 말했다.

“괜찮겠어? 화장이 지워지잖아?”

그녀는 대답대신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얼굴이 녹아내

리기 시작했다. 눈과 코가 떨어져 나가고, 입술이 어느새 굵

어진 빗방울과 함께 흘러 내렸다.

유리로 된 얼굴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대개 남자들은 나의 이런 모습을 좋아

하던데”

그러면서 한걸음 물러섰다. 불빛이 없는 곳으로 그녀는 조금

씩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어둠을 머금자, 거기에

내 얼굴이 비치기 시작했다. 마치 거울처럼.

나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그 어둠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입에 나의 입을 맞췄다. 피맛이 났다.

입술을 베인 것이다.

  
#

며칠뒤 내 방에서 만화책을 보며 뒹굴던 친구녀석이 말했다.

“야, 내일 걔 생일이라는데”

“아, 그래”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하고는 물을 부어온 컵 라면을 건넸다.

그리고 녀석이 보고 있는 만화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거 재밌냐?”

“그저 그래”

라면을 몇 젓가락 먹다가 녀석이 얼굴을 찡그렸다.

“왜 맛없어?”

“아니, 그냥 좀 입에 상처가 나서”

“아, 그래..”

나는 안됐다는 듯 표정을 지으며 -찡그리지 않으려 노력하

며- 라면을 먹었다.


라면을 다먹고 녀석이 자신의 밧데리가 없다며 핸드폰을 빌

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러 나갔다. 나는

그 사이 녀석이 놓고 간 핸드폰을 집어들고 통화내역과 받

은 문자함을 살펴보았다. 아, 이 구질구질함이여..

곧 녀석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야, 전화왔다”

태연한 얼굴로 친구는 나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번호를 보니 그애의 것이었다.

친구는 만화책을 마저 보기 시작했다.


곧 그녀가 집으로 찾아와서 우리는 다시 예의 즐거운 시간

을 가졌다. 어떤 주제도 상관이 없다. 목표는 상대를 침묵시

키는 것. 점점 그녀를 사이에 둔 녀석과 나의 대화는 그러한

게임을 닮아가고 있었다.



(4)

#

다음날 우리는 영화를 보러 갔다. 정확히 말해서 그애와 나.

표를 사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어, 어디냐? 집 문도 잠겨있고”

“응, 그냥 영화나 볼까 해서”

“뭐보는데?”

“...있잖아”

녀석은 누구와 있냐고 묻지 않았다.

“그래, 재밌게 봐. 끊는다”

“응”

전화를 끊고나자 팝콘과 음료수를 사러간 그녀가 돌아왔다.

그녀가 건네주는 음료수를 받으며 나는 말했다.

“이런 영화도 보려는 사람이 많나보네. 아직도 줄이 안줄어

드니”

“무슨 소리야, 이게 요즘 얼마나 인기인데”

“내 취향은 아니야”

“그러면서 왜 보여준다고 했어”

“니가 먼저 보여달랬잖아”

“지금이라도 싫으면 말해. 보여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구”

그녀가 농담처럼 말했다. 그리고 어디론가 문자를 보내며

말했다.

“이거 본다고, 자랑해야지”

나는 곧 표를 샀다.


영화를 보고 나니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하늘, 축축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일단 어디 들어가서 밥 먹자. 배고픈데”

나의 말에 그녀가 물었다.

“니가 쏘는거야?”

“흠..왜?”

장난스럽게 그녀가 말했다.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아, 그래? 축하해”

“그게 축하하는 사람의 태도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

여름철의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쏟아지는 비에 흠뻑젖

은 우리는 나이트로 들어갔다. 생일인 것을 알았으니 자기가

원하는대로 해줘야 한다며 그녀가 나를 끌고 왔던 것이다.

사실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따라 나이트로 들어갔다.

번쩍거리는 불빛과 시끄러운 음악속에서 그녀가 앉아있다.

“...”

“뭐라고?”

“..라고!!”

나는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소란스러

운 침묵에 도달한 상태에서 나는 언제든 춤추러 나가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어째서 그녀는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걸까? 아니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전적으로 그녀의 잘못만은 아니리라.

잘못이라니. 누구도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녀

가 특별할 뿐이야. 점멸하는 조명에 따라 그녀가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분노이길 바

라며 왠지 심술궂은 표정으로 같이 춤추러 나가자는 그녀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그냥 자리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

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그녀와 부딪쳤다. 넘어지면서 그녀의

손 한쪽이 깨져나갔다.

나도 모르게 사람들 틈으로 달려들었다.


#

우리는 쫓겨났다.

멍투성이의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누가 싸우래. 그냥 그쪽에서 실수한 거잖아”

“실수라고?”

나는 금이간 그녀를 보며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너는 이리도 쉽게 상처받는단 말이냐. 그렇게 남을

괴롭혀 왔으면서 어째서 조금도 강하지 못하단 말야. 그녀를

미워한 내가 왠지 큰 죄를 지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

서도 한 편으로는 통쾌해 하는 나를 경멸하면서.


우리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수건을 가지고 와서 내 얼

굴을 닦아주려고 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상관없어.

나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옷을 벗겼다. 왼팔꿈

치 즈음에서 시작한 금은 가슴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이

미 그녀의 얼굴에도 잔금이 가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조

금씩 그녀를 눕혔다. 그때 친구가 들어왔다. 한 손에 케이크

상자를 들고서.



녀석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우

리는 주먹다짐을 했다. 온 방안을 휘저은 우리의 난투에 휘

말려 그녀는 결국 깨져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우리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힘을

뺀 뒤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유리조각에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내 위에 올라탄 녀석을 밀어내며 나는 말했다.

“이제 끝났어”

힘없이 옆으로 쓰러져 내린 녀석이 나를 보지도 않은 채

독백을 하듯 말했다.

“아. 아프다. 니가 말한 상처란게 이런 거였어?”

“몰라. 이제 그런 얘기는 집어치우자”

한참을 그렇게 누워있었다.

다시 녀석이 말했다.

진지한 목소리였다.

“정말 그애와 잘 생각이었어?”

“....”

“그건 불가능한 일이란 걸 알고 있잖아”



#

녀석은 돌아갔다. 나가기 전에 방안을 둘러보며 머뭇거렸지

만 곧 결심을 한 듯 녀석은 아무것도 치우지 않고 그냥 떠

났다. 그 파편들이 자기의 것이라고,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라고 확신할 수 없었겠지. 소심한 녀석. 그럼 이때껏 우리가

해 왔던 짓거리는 뭐란 말인가. 나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녀석이 떠난 뒤 한참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유리파편을 치우는 것은 성가시다. 꼼꼼히 청소를 했지만 그

래도 뭔가 반짝이는 것이 보이는 것 같다... 이미 금이 간 상

태였기에 그녀는 아주 자잘하게 깨져 버렸다.

하지만 나름대로 얼굴만은 그 형태를 그럭저럭 유지하고 있

었다. 다른 것들은 다 쓸어담아 쓰레기 봉지에 쏟아 버렸지

만 그것만은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망설였다. 문득 녀석이

가져온 케익상자가 생각났다. 케익을 빼고 빈상자에

그녀의 얼굴을 집어넣었다.

얼마간  상처투성이의 그 <나는> 얼굴을 보았다.

곧 상자를 닫고 테이프로 봉하는 것으로 청소를 끝냈다.

그리고선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울었다.



마침.


moodern
댓글 2
  • No Profile
    해랑이 03.10.02 14:11 댓글 수정 삭제
    흥미있는 단편입니다.
    도서관 탈출기 삭제하셨더군요.
    감상을 쓰려고 했었는데 아쉽군요.
  • No Profile
    moodern 03.10.02 17:53 댓글 수정 삭제
    감상씩이나..^^;; 영광이군요..도서관 탈출기는 분량은
    그리 길지 않지만 장편에 올릴 생각입니다. 그게 원래
    썼을때 의도했던 호흡이기 때문인지라..글구 맞춤법도
    손봐야 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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