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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각(燒却)

2003.09.19 00:2109.19

소각(燒却)





재가 얼굴로 날아든다.

오래 전의 일, 그들은 소각을 감행했다. 딴에는 완성을 위해서라 변명하며. 불은 세차게 타올랐으나 누구의 기억에도 각인되지 않았다. 이제는 검은 흔적만이 남아있다. 그것을 본다.

불을 지핀 후 그들은 떠났다. 변명과 망각은 그들을 따랐다. 세차게 타오르던 불은 자신이 존재했던 그 짧은 순간과 그 좁은 장소마저도 모두 태워 없앤 후에야 멈추었다. 검은 흔적만을 남기고 불은 사라졌다.

이제는 누구도 이곳에 도달할 수 없다. 오로지 직관과 혜안을 가진 선지자만이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물끄러미 그것을 본다. 소각의 흔적을 본다.

재가 얼굴로 날아든다. 재를 날리는 것은 바람. 고개를 들어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무엇을 보았는가?

상승하는 검은 회오리, 하늘과 땅을 잇는 거칠고도 거대한 탑.

회색빛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려댈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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