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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당신과 나의 고양이

2012.01.07 17:2101.07

울음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럽게 쏟아진 여름철 소나기와 뜨거운 아스팔트가 부딪혀 만들어 내는 불협화음 속에서 그 소리는 똑똑히 들려왔다. 태기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리의 진원지는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을 골목길 오른쪽 모퉁이에 서있는 전봇대 옆에 버려진 박스 속의 고양이였다. 아직 새끼 고양이로 보이는 그 검은 고양이는 태기를 본 것인지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앙증맞게 울어댔다.
태기는 고개를 돌렸다. 집에서 부쳐주는 용돈으로 겨우겨우 하루를 살아가는 가난한 자취생인 태기로써는 새끼고양이를 키울 여력이 없었다. 안타깝지만 외면해야만 했다. 태기는 우산을 좀 더 당겨쓰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걸으려고 하다 보니 괜스레 다리가 꼬이는 것 같았다. 태기는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발걸음을 세었다. 뚜벅.
“야옹.”
뚜벅. 뚜벅
“야옹. 야옹.”
뚜벅. 뚜벅. 뚜……. 벅?
“야옹. 야옹. 야……. 옹?”
태기는 걸음을 멈추고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버려진 사과박스 속에서 태기를 바라보고 있는 검은 고양이는 왜 그러냐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태기는 자신이 착각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시 한 발을 내딛었다. 뚜벅.
“야옹.”
착각이 아니었다. 태기는 놀란 눈으로 고양이를 보았다. 고양이는 왠지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태기는 뒤로 한걸음을 물러섰다. 뚜벅.
“야옹.”
태기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쯤대면 더 이상 무시할 수가 없었다. 태기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양이가 든 박스를 향해 다가갔다. 다리 끝과 꼬리 끝부분만 새하얀 검은 고양이는 태기를 신기하다는 듯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태기는 조심스레 고양이를 안아들었다. 한 손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온기가 태기의 품안으로 들어왔다. 고양이는 태기의 품이 좋았는지 기분 좋게 울었다.
그것이 태기와 고양이의 첫 만남이었다.

***

고양이가 울었다.
태기는 고양이를 집으로 데려온 것을 딱 삼 분만에 후회했다. 비를 맞은 고양이를 위해 따뜻한 물로 목욕을 시켜주려다 손등을 긁힌 순간부터였다. 태기는 쓰라린 손등을 부여잡으며 고양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고양이는 정당방위였다는 듯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마구 울어댔다. 태기는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시끄러운 듯 귀를 막으며 소리쳤다.
"대체 왜 우는 거야! 배라도 고픈 거야?"
태기의 외침에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태기는 기가 막힌다는 듯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뭐야. 정말 배가 고픈 거야?"
"야옹."
대답이 돌아왔다. 조금 얼이 빠진 태기는 두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내 말이라도 알아듣는 건가?"
태기는 새끼 고양이를 유심히 관찰했지만 보통 고양이와 다른 게 없어 보였다. 물론 다른 고양이를 제대로 본 적이 없어 비교하는 것도 무리가 있었지만 말이다. 태기는 부엌선반에 진열된 참치 통조림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가난한 자취생의 피 같은 비상식량이었지만 이 새끼 고양이의 울음을 멈추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고양이는 벌써부터 참치 냄새를 맡았는지 태기의 발치에서 동그란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태기는 한숨을 쉬며 작은 그릇에 참치를 덜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고양이는 기다렸다는 듯 작은 그릇에 머리를 파묻고 참치를 먹기 시작했다. 태기는 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배가 많이 고팠나 보네."
꼬리까지 바짝 세운 채 그릇을 핥아 먹고 있는 고양이를 보고 있던 태기는 문득 아직 이 새끼 고양이에게 이름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직 이름을 안 붙여줬구나."
태기의 말을 들은 새끼 고양이가 그릇을 핥는 것을 멈추고 태기를 바라보았다. 마치 기대하고 있는 표정 같았다. 태기는 턱을 괴어 곰곰이 생각을 하다 무언가 떠오른 듯 손뼉을 쳤다.
"그래! 고양이니깐 나비 어때? 예쁘지?"
태기가 회심에 찬 미소를 지으며 나비를 바라보았다.
"야옹."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불만이 가득 찬 울음소리였다. 태기는 조금 당황한 듯 나비에게 물었다.
"왜? 싫어?"
"야옹."
대답은 같았다. 자신의 네이밍 센스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태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다시 나비를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새끼 고양이를 붙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 미친 게 틀림없었다. 태기는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열 한자리의 번호를 누른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잠깐의 수화음이 울려 퍼지고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태기는 익숙한 목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인수야, 뭐하냐?"
인수는 태기와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란 가장 친한 친구였다. 인수는 목소리만으로 태기라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반갑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어? 태기구나. 왜? 일 때문이야?"
태기는 얼마 전부터 인수를 따라 봉사 활동을 하고 있었다. 특별히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일을 끝내고 나면 찾아오는 만족감에 몇 일째 계속하고 있었다.
"그게,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주워서 말이야."
인수는 어릴 적부터 동물을 유달리 좋아했다. 아니나 다를까, 인수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밝아졌다.
"뭐? 진짜? 언제? 어디서? 생후 몇 개월 정도 되는데?"
인수는 질문 공세를 쏟아냈다. 태기는 난감하다는 듯 나비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까 집으로 오던 길에 박스에 버려져 있어서 데려왔어. 생후 몇 개월인지는 모르겠고 손바닥보다 조금 큰 검은 새끼 고양이야."
태기의 설명에 전화 너머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 대게 귀엽겠다. 네가 키울 거야?"
"아니. 내가 그럴 만한 여력이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그래서 말이데, 네가 데려갈래?"
전화 너머에서 두 번째 환호성이 터졌다. 조금 전 보다 더 커진 목소리에 태기는 인상을 찌푸리며 전화기를 귀에서 조금 뗐다.
"진짜?! 와! 물론이지! 내가 데려갈게! 매번 고맙다!"
"고맙긴. 내가 더 고맙지."
태기는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내일 오전 11시에 너희 집 앞 공원에서 만나자."
태기는 인수와 약속시각과 장소를 정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비를 바라보았다. 나비는 지금까지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던 것처럼 태기를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태기는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애써 나비의 시선을 무시해보려고 했지만, 괜스레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태기는 반 정도 남겨둔 통조림 참치를 나비에게 모두 주었다. 나비는 작은 그릇에 다시 머리를 처박고는 참치를 먹기 시작했다.
"미안."
태기는 그런 나비를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야옹."
나비는 그런 태기를 향해 그렇게 울어주었다.

***

알람이 울렸다.
태기는 졸린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 했다. 약속시각까진 아직 1시간 30분 정도 남아있었다. 태기는 크게 기지개를 켠 후 나비를 바라보았다. 어제 꺼내준 담요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만 채로 새근새근 잠에 빠져있었다. 야행성인 고양이에겐 아직 이른 시간인 것 같았다. 태기는 나비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가볍게 씻은 뒤 나갈 채비를 마쳤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나비가 일어나질 않았다. 처음엔 죽은 줄 알고 무척이나 놀랐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나비는 단지 졸릴 뿐이었다. 자신의 옆에서 호들갑을 떠는 태기를 향해 졸린 것 같은 목소리로 ‘야옹’이라고 운 뒤 다시 고개를 담요 속으로 밀어 넣는 나비의 모습을 보며 확신했다. 태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비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강제로 데려가야만 할 것 같았다.
태기는 책상 옆에 세워 둔 작은 소가방 안에 작은 담요를 깔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며 휴지 몇 마디도 감아 가방 속에 넣었다. 그리고 아직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나비를 안아들어 손가방 안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다행히 나비의 몸집이 작은 터라 가방 속이 그리 비좁아 보이진 않았다. 나비는 흔들리는 가방 속에서도 계속 잠만 잘 뿐이었다.
“정말 이상한 고양이라니깐.”
태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현관문을 열었다. 태기의 집에서 인수네 집 앞 공원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제 내린 소나기 덕분에 무더웠던 여름 날씨가 한풀 꺾여 외출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태기는 왠지 모를 흥겨움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태기가 공원에 도착한 시각은 약속시간보다 10분 정도 더 이른 시간이었다. 한국인의 시간 개념으로는 무척이나 이른 시간을 뜻했다. 조금 들뜬 나머지 걸음이 빨라졌던 모양이었다.
태기는 공원 입구 벤치에 앉아 인수를 기다렸다. 주말의 공원은 의외로 한산했다. 평소라면 애완동물을 데려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을 테지만 지금은 한명도 없었다. 아마 그 사이코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부터 이 공원을 중심으로 떠돌이 동물이나 애완동물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다니는 사이코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태기는 괜스레 가방을 열어 나비를 확인해 보았다. 아직 새근새근 잘 자고 있었다. 태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든 순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있었다.
태기와 한 뼘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거리에서 태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그 소녀는 태기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굽혔던 허리를 폈다. 짧은 단발머리를 오른쪽으로 올려 묶은 그 소녀는 움직이기 편해 보이는 활동복을 입고 있었다. 태기는 약간 얼이 빠진 표정으로 소녀의 인사에 답했다.
“아……. 안녕?”
소녀가 태기의 인사에 만족한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태기가 들고 있는 가방을 가리켰다.
“귀여운 고양이네요.”
태기는 놀란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가방 안에 든 게 고양이라는 것을 어떻게 안걸까. 혹시 아까 가방을 열 때 본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그 소녀는 다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어제 전봇대 밑에 버려져 있던 걸 데려오셨네요. 따뜻한 물로 씻겨주려다 손등을 긁혔고 배고파하던 고양이에게 통조림 참치를 주었네요. 사람이 먹는 걸주면 별로 안 좋은데.”
소녀는 어제 태기가 나비를 데려온 일에 대하여 하나도 틀린 부분 없이 이야기 했다. 태기는 넋이 나간 듯 소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소녀는 그런 태기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음, 그리고 이름을 지어주셨네요. 나비라고요. 촌스럽게 나비가 뭐예요.”
소녀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태기를 가리키며 웃어댔다. 괜스레 기분이 나빠진 태기는 나비라는 이름이 뭐가 어때서라며 투덜거렸다. 태기는 아직 깔깔대며 웃고 있는 이상한 소녀에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혹시 네가 이 고양이의 주인이야?”
소녀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나 순진한 표정인 터라 조금의 의심도 바보스러워질 뿐이었다.
“그럼,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소녀는 태기와 나비에 대하여 모두 다 알고 있었다. 스토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태기는 자신이 스토킹을 당할 만큼 잘난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소녀는 태기의 물음에 주변을 살피더니 태기의 손을 잡고는 벤치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공원 산책로로 걸어 들어갔다. 태기는 영문도 모른 채 소녀의 손에 이끌려 공원 산책로로 들어갔다.
산책로로 들어온 소녀는 몇 번이고 주변을 주의 깊게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비밀인데요. 사실 저는요.”
소녀는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피고 태기의 귀에 속삭이듯 자신의 비밀을 밝혔다.
“동물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요.”
태기는 소녀의 비밀에 고개를 끄덕이며 꿀밤을 때렸다. 갑작스런 꿀밤 공격을 당한 소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태기를 노려보았다.
“아야! 왜 때려요!”
“쪼끄만 한 게 어디서 오빠한테 거짓말이야.”
“거짓말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빠는 무슨! 딱 봐도 아저씨구만!”
태기는 조용히 소녀의 머리에 꿀밤 하나를 더 먹였다. 또 다시 꿀밤을 맞은 소녀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신경질을 냈다.
“아! 진짜! 그만 때려요! 그러다 제 머리 더 나빠지면 아저씨가 책임 질 거예요?!”
아무래도 정신이 좀 이상한 애를 만난 것 같았다. 태기가 한숨을 내쉬며 벤치로 도로 돌아가려고 하자 소녀는 태기의 손을 잡았다.
“못 믿겠으면 보여드릴게요. 아무거나 생각해보세요. 맞춰 볼게요.”
소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양손을 허리에 짚었다. 태기는 한번 속는 셈치고 자신만 알고 있을 법한 비밀들을 떠올렸다. 소녀는 잠시 인상을 쓰더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 여섯 살 때까지 이불에 오줌을 쌌네요. 26년간 여자 친구 한번 못 사겨본 무적의 솔로시고요. 그리고 전 재산 십칠만 삼천육백이십사 원이 들어있는 아저씨의 통장 비밀번호는…….”
“그만, 거기까지.”
태기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소녀를 보았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 소녀는 정말 태기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혹시 꿈이 아닌가 볼을 꼬집어보았지만 아픔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태기는 아직 꺾을 수 없는 마지막 자존심을 세우며 지나가던 행인 한명을 가리켰다. 야구 모자를 쓰고 있는 태기 또래의 한 남성이었다.
“그럼 저 사람 생각도 읽어봐.”
소녀는 그 남성을 한번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전 동물의 생각만 읽을 수 있어요. 사람의 생각은 너무 복잡하거든요.”
“……. 그럼 난 사람이 아니고 동물이냐?”
태기는 다시 꿀밤을 때리기 위해 손을 들자 소녀는 급하게 방어 자세를 취했다.
“아! 쫌! 때리지 마요! 사람이 왜 그렇게 폭력적이에요?! 그러니깐 26년간 여자 친구를 못 사귀는 거잖아요!”
때리자. 인간 여자를 때리자. 돌로 때리는 거야. 잠시 멘탈 붕괴가 일어난 태기는 한숨을 쉬며 손을 내려놓았다. 상대 할수록 피곤해지는 타입이란 걸 깨달은 태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손짓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소녀는 그 손짓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싸우자고요?”
“아니! 설명해 달라고!”
태기의 외침에 소녀는 손뼉을 치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 일부러 이러는 것 같은데. 태기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에도 소녀는 여전히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태기가 메고 있는 가방을 가리켰다.
“나비 덕분이에요.”
소녀의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가방 속에서 나비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태기는 가방을 열어 나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잠에서 깬 나비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태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고양이 때문이라고?”
태기는 여전히 물음표가 그려진 것 같은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비는 평범한 고양이가 아니에요.”
소녀는 가방 속에 손을 넣어 나비를 안아들었다. 나비는 소녀의 손을 거부하는 기색 없이 소녀의 품에 안겼다. 소녀와 나비의 맑은 눈동자가 동시에 태기를 바라보았다.
“나비는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고양이에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태기는 지금껏 살아온 26년 동안 가장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과연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했을까. 태기는 왠지 모를 현기증에 비틀거리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저 안 미쳤어요. 정신 병원에 전화하지 마세요.”
“……. 남의 생각 마음대로 읽지 마. 그리고 내가 미친 것 같아서 그래.”
태기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저 애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생각을 읽는다는 사실은 진실인 것 같았다. 소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조금 전 태기가 가리켰던 사내를 가리켰다.
“아까 저 사람 생각을 읽어보라고 하셨죠? 나비가 읽어주면 저도 읽을 수 있어요. 한번 해볼게요. 나비야, 부탁해.”
“야옹.”
나비는 소녀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야구 모자를 쓴 채 공원을 배회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그런 나비를 유심히 바라보다 깜짝 놀란 듯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 남자…….”
소녀는 갑자기 태기의 손을 잡고는 수풀 뒤로 숨었다. 태기는 영문도 모른 채 소녀의 손에 끌려 수풀 뒤로 몸을 숨겼다.
“또 갑자기 왜 그래!”
태기가 소리치려고 하자 소녀는 태기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들고 쉿 하는 소리를 냈다.
“저 남자 말이에요. 야구 모자를 쓴 남자요.”
소녀는 수풀 위로 고개를 배꼼이 내밀어 그 남자의 동태를 살폈다. 태기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그 남자를 보았다.
“저 남자가 그 범인이에요. 요즘 우리 동네 동물들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사이코요!”
태기는 놀란 눈으로 그 남자와 소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정말이야?”
소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비가 저 사람의 생각을 읽어줬어요. 확실해요.”
태기는 소녀의 품안에 안겨있는 나비를 바라보았다. 나비는 여전히 동그란 눈동자를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태기는 조금 전 꺼냈던 휴대폰을 열었다.
“신고할까?”
하지만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 신고해봤자 증거가 없어서 금방 풀려날 거예요.”
소녀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해져 있었다. 지금 이 소녀가 조금 전 자신과 같이 있던 그 소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태기의 물음에 소녀는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디지털 카메라였다.
“증거를 잡아야죠.”
“그래서?”
“그래서 말이죠.”
소녀는 태기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 보여주었던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신고해서 포상금을 받아야죠!”
태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소녀는 여전히 환한 웃음을 지으며 태기를 바라보았다.
“도와주실 거죠?”
“뭐?”
태기는 당황한 듯 상체를 조금 뒤로 뺐다.
“어머? 설마 연약한 소녀가 사이코의 뒤를 쫒는다는데, 혼자 보내실 생각이셨나요?”
소녀는 가식적인 표정을 지으며 몸을 움츠렸다. 태기의 생각이 맞았다. 이 소녀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사람을 피곤해지게 만드는 민폐 소녀였다. 만일 나중에 딸을 낳는 다면 이런 딸은 정대로 가지고 싶지 않았다. 태기는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들었다.
“알았다. 알았어. 도와줄게.”
태기의 답에 소녀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양이에요.”
“양?”
태기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소녀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양이 아니라. ‘양이’ 라고요. 제 이름이요. 고. 양. 이. 가 제 이름이에요.”
“……. 네 부모님 얼굴 좀 보고 싶다.”
“네?”
“아니, 잘 어울린다고. 나는 태기야. 이태기.”
태기는 양이의 손을 잡았다. 양이는 뭐가 그리 기쁜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위 아래로 흔들었다.
“잘 부탁해요. 태기 아저씨. 자, 그럼 일단 나비부터 가방 속에 넣죠.”
“응? 왜?”
양이가 나비를 다시 가방 속에 넣자 태기가 이상하다는 듯 양이를 바라보았다. 나비가 있어야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게 아니었나? 태기가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자 양이는 조금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말이죠.”
양이는 다시 고개를 들어 야구 모자를 쓴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사내는 공원을 배회하며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저 사이코가 오늘 목표로 한 동물이 검은 고양이거든요.”
양이의 말을 듣는 순간 태기는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싱글벙글 웃고 있는 양이를 보며 조금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문을 걸어 잠갔다.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았다. 가방 속에서 나비가 꼬물거리며 기어 나왔다. 그리고 태기를 향해 귀여운 목소리로 울어댔다. 태기는 집으로 오던 길에 편의점에서 사온 고양이 사료를 뜯어 작은 그릇에 부어주었다. 나비는 아장거리는 발걸음으로 사료를 향해 다가갔다.
태기는 나비가 그릇에 작은 머리를 및어 넣는 것을 가만히 바라본 뒤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인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여보세요. 태기냐?”
인수는 조금 화가 난 것 같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태기는 미안한 마음에 휴대폰을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인수야. 진짜 미안하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다음에 밥 한번 살게.”
태기의 사과에 인수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알았다. 그런데 고양이는?”
태기는 나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사료를 다 먹은 나비는 두 눈을 반짝이며 태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엔 태기가 한숨을 쉴 차례였다.
“하아. 그것도 미안. 이 고양이. 내가 키울게.”
“뭐?! 진심이야?!”
인수는 무척이나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태기는 남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었다.
“어, 사정이 생겨서 말이야. 한동안 일도 못 나갈 것 같아.”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어지간히도 실망한 것처럼 보였다. 잠시 뒤 인수는 조금 진지한 목소리로 태기를 불렀다.
“알았어. 사정이 생겼다면 어쩔 수 없지. 그 사정이란 게 끝나면 다시 일 할 거지?”
“물론이지. 잠시동안만 쉬는 거야. 휴가라고 생각해 줘.”
태기의 답에 인수가 피식하고 웃었다.
“그래. 알았다. 나도 여름 휴가라고 생각하고 잠시 쉬어야겠다. 나중에 또 연락줘.”
“응. 고맙다.”
“고맙긴. 밥이나 살 준비해.”
태기는 인수와 몇 마디 농담을 던진 후 전화를 끊었다. 인수에게 미안한 일이었지만 양이와 약속을 한터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태기는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TV에서는 최근 일어난 사건 사고가 뉴스로 보도되고 있었다.
“우리 동네 이야기도 나올려나?”
태기는 오늘 아침에 만났던 야구 모자를 쓴 사내를 떠올리며 TV의 볼륨을 높였다. 하지만 뉴스 앵커는 여름철 물놀이 익사 사고와 교통사고, 최근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엽기 살인 사건을 차례로 보도한 뒤 뉴스를 마칠 뿐이었다. 떠돌이 동물이나 애완동물을 죽이고 다니는 사이코에 대한 뉴스는 없었다.
목숨과 생명의 차이였다.
태기는 씁쓸한 기분이 들어 TV를 껐다.

***

고개를 들었다.
오른쪽 편 테이블에 앉아있는 야구 모자가 보였다. 야구 모자는 커피 한 잔을 시켜둔 채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저 평범한 학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태기는 자신의 앞자리에 앉아있는 양이를 바라보았다. 양이는 카라멜 마끼야또를 홀짝대며 의미모를 미소만 짓고 있었다. 태기는 한숨을 쉬었다. 양이를 따라 야구 모자의 뒤를 쫒은 지도 어느덧 3일 차에 들어섰다. 하지만 야구 모자는 동물을 학대하기는커녕 동물 근처도 가질 않았다. 정말 동물을 마구 죽이고 다니는 사이코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태기의 생각을 읽었는지 양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러게요. 왜 저럴까요?”
양이의 말에 따르면 야구모자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먹었다고 했다. 그것도 태기와 양이가 미행을 결심한 그 다음 날부터 말이다. 마치 둘이 미행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 같았다. 위험한 게 아니냐고 양이에게 물었지만 양이는 괜찮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저 사람은 아저씨랑 제가 미행한다는 사실을 몰라요. 나비가 그렇게 말해 줬거든요.”
태기가 메고 있는 가방 속에서 나비의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태기는 조금 의심스런 표정으로 카페라떼를 마셨다. 뭔가 수상했다. 태기는 양이가 무언가를 자신에게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태기의 불안 가득한 표정을 가만히 보고 있던 양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저씨. 애 같아요.”
“애는 너잖아.”
태기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양이가 다시 폭소했다. 태기는 조금 울컥하는 마음을 추스르며 카페라떼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너 학교는 안가냐?”
태기는 양이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공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오른쪽으로 올려 묶은 단발머리에 활동하기 편해 보이는 츄리닝을 입은 채로 카라멜 마끼야또를 홀짝거리는 말괄량이 소녀. 눈앞에 있는 양이의 모습이었다. 바뀐 게 있다면 쓰고 있는 알 없는 안경 정도였다. 자기 딴에는 변장이라고 한 것 같아보였다. 양이는 조금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쓰며 미소를 지었다.
“여름 방학에 누가 학교를 가요.”
태기는 처음으로 방학이란 존재를 만든 사람에게 욕 한바가지를 쏟아 부었다. 방학이란 게 없었다면 자신은 이 민폐 소녀를 만날 일이 없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양이는 남은 카라멜 마끼야또를 원 샷하고 태기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저씨는 일 안 나가세요?”
윽. 태기는 조금 당황한 듯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이 민폐 소녀가 놓칠 리가 없었다.
“어머, 설마 아저씨. 백수예요?”
양이의 눈빛이 달라졌다.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배……. 백수라니! 취……. 취업 준비생일 뿐이야!”
태기는 애써 자기변호를 했다. 하지만 양이는 정말 고양이의 눈빛으로 태기를 보았다.
“헤헹. 그러니깐 사회적 무능력자라는 거잖아요.”
왠지 좋은 말인 것 같은 데 기분이 안 좋다. 태기는 콧잔등을 긁으며 바닥을 내려 보았다.
“그……. 그렇긴 하지만. 봉사활동도 하고 있고……. 사회적 무능력자까진 아니라고.”
목소리가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이는 조금 놀랐다는 듯 태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봉사활동이요?”
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수의 소개로 시작하게 된 일이었지만 정성에 맞는 것 같아 계속하고 있었다. 양이는 신기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떤 일인데요?”
“그냥 동네 쓰레기나 치우고 그런 거야. 딱히 자랑할 만 한 건 아니야.”
태기가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었다. 양이는 그런 태기를 다시 봤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의자를 조금 당겨 앉았다.
“사실 더도 얼마 전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했거든요. 이게 운명 아닐까요? 이히히.”
양이가 장난스런 웃음을 지었다. 봉사활동으로 운명을 이야기하는 게 조금 우스웠지만 그래도 소녀다운 발상이라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양이는 이미 비어버린 카라멜 마끼야또 통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다 태기를 바라보았다.
“저기, 아저씨.”
“응? 왜?”
태기는 마시던 카페라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양이를 바라보았다. 양이는 왠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혹시, 저 야구 모자를 잡고 포상금을 받으면 뭘 하실 생각이세요?”
태기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눈을 끔뻑였다.
“글쎄. 아직 생각해 놓은 게 없는데. 넌 뭘 할 건데?”
태기의 물음에 양이도 조금 놀란 듯 몸을 움찔거렸다.
“아, 그게. 저기. 저도 딱히 없어요.”
“뭐야. 싱겁게.”
태기가 피식 웃자 양이는 조심스럽게 태기를 바라보았다.
“그럼 아저씨. 둘 다 딱히 정한 게 없으니까요.”
양이는 만지작거리던 커피 컵을 내려놓고는 전매특허인 상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돈으로 사무소 하나를 차리는 게 어때요?”
“사무소?”
태기는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양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나비가 들어있는 가방을 가리켰다.
“나비가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잖아요. 그걸 또 제가 읽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 능력으로 작은 사무소를 차리는 거예요. 사람을 찾는 일이라던가 고민스런 일. 혹은 대형 범죄를 쫒는 일도 할 수 있는 그런 사무소요. 이를 테면 탐정 사무소 같은 거요.”
양이는 생각만 해도 기쁘다는 듯 양손을 마구 저으면 말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태기는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위험하지 않을까?”
“그러니깐 아저씨가 있는 거죠! 사장님!”
양이는 막무가내로 태기를 사장님이라 불렀다. 태기는 당황한 듯 손사래를 쳤다.
“사……. 사장이라니. 나는…….”
“에이. 그것도 낮다고요? 그럼 회장님!”
이 포커페이스 소녀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태기는 결국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다 들었다.
“알았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볼게. 일단은 저 야구 모자를 잡아야지.”
“넵! 알겠습니다. 사장님!
양이는 과장되게 경례를 한 뒤 배시시 웃었다. 태기도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은 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가방 속에서 나비가 자그마한 소리로 울었다.

***

오른쪽 골목을 돌았다.
야구 모자가 보였다. 태기는 황급히 귀퉁이에 몸을 숨겼다. 다행이 야구 모자는 이쪽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태기는 숨을 죽이고 야구 모자를 관찰했다. 야구 모자의 앞에는 떠돌이 개가 있었다. 떠돌이 개는 야구 모자를 경계하듯 온 몸의 털을 바짝 세운 채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야구 모자는 천천히 떠돌이 개를 향해 다가갔다. 양이는 조심스레 품속의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야구 모자 역시 천천히 자신의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일주일간의 미행으로 드디어 현장을 잡은 것이다. 태기는 마구 두근대는 심장을 간신히 억누르며 야구 모자가 꺼내 든 것을 바라보았다. 야구 모자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빵이었다. 맥이 풀렸다. 태기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 주저앉았다. 야구 모자는 빵을 조금 뜯어 떠돌이 개에게 던져주었다. 떠돌이 개는 조금 경계하더니 빵을 주워 물고는 황급히 골목길로 사라졌다. 야구 모자는 그 모습을 보며 다시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양이와 태기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만하자.”
침묵을 먼저 깨뜨린 것은 태기였다. 양이는 냉정한 그 목소리에 놀란 듯 태기를 바라보았다.
“뭐라고요?”
“그만하자고.”
태기는 화가 난 표정으로 양이를 노려보았다. 일주일을 미행했다. 하지만 저 야구 모자는 동물을 죽이기는커녕 빵조각을 나눠주고 있었다. 그런 야구 모자가 떠돌이 동물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사이코라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양이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더요. 저 사람 뭔가 꾸미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만 더 쫒아요.”
양이가 떼를 쓰자 태기는 화가 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꾸미기는 뭘 꾸며! 난 지금 네가 더 수상해! 저 사람이 어딜 봐서 범인이야? 그냥 평범한 사람이잖아!”
태기는 야구모자가 사라진 골목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그곳에는 아직 빵가루가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태기의 외침에 양이는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만…….”
“그렇지만은 뭐가 그렇지만은 이야! 네가 틀린 거라고! 난 더 이상 이 미친 짓 그만 하려니깐!”
태기는 자신이 메고 있던 가방을 벗어 양이에게 넘겨주었다. 가방 속의 나비가 흔들리는 가방 속이 어지러운지 구슬피 울었다.
“너랑 이 망할 고양이랑 마음껏 쫒아봐!”
태기는 망연자실하게 서있는 양이를 뒤로 한 채 골목길을 벗어났다. 왠지 고양이 울음소리가 따라 오는 것 같았지만 아랑곳 않고 길을 걸었다. 한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온 태기는 문을 걸어 잠갔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태기는 아직 진정되지 않은 감정을 억지로 억누른 채 거실 바닥에 누웠다.
거실이 넓어 보였다. 성인 남자 한명이 누으면 딱 맞는 크기의 거실이 너무도 넓어보였다. 태기의 눈에 작은 그릇이 보였다. 나비의 사료 통으로 쓰던 그릇이었다. 칠칠치 못하게 주변에 흘린 사료 몇 알도 눈에 띄었다. 태기는 고개를 돌려 리모컨을 찾았다. TV를 켜고 볼룸을 높였다.
하필 뉴스는 지난번 일어난 엽기 살인 사건에 대한 보도를 하고 있었다. 태기는 신경질 적으로 TV를 껐다. 똑바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몸을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숨이 나왔다. 태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양반다리로 앉았다. 한참동안 뭔가를 생각하던 태기는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리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현관문 옆에 놓인 나무 빗자루를 집어들었다.
현관문을 열었다.

***

가버렸다.
양이는 자신의 손에 들려진 가방을 바라보았다. 가방 속에는 나비가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구슬피 울고 있었다. 양이는 가방을 어께에 멨다. 태기가 가버렸지만 저 야구 모자를 계속 쫒을 생각이었다. 양이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는 야구 모자가 사라진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야구 모자는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야구 모자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뭐가 그리 신나는 지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양이는 조심스레 야구 모자의 뒤를 밟았다.
“슬슬 약효가 돌 텐데.”
야구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웃었다. 양이는 그제야 야구 모자의 앞에서 끙끙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떠돌이 개를 볼 수 있었다. 아까 빵을 먹은 개였다. 떠돌이 개는 어딘가 몸이 불편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빨리 자라. 애써 구해 온 마취약 아깝게 하지 말고.”
야구 모자는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떠돌이 개를 천천히 따라갔다. 양이는 긴장한 듯 침을 꼴깍 삼키며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번엔 진짜다. 양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야구 모자를 노려보았다.
“얼씨구. 지 알아서 무덤 속으로 기어와 주셨네.”
어느새 떠돌이 개는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와 무거운 몸을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야구 모자는 더 이상 경계를 할 힘도 없는 개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어느새 꺼내든 망치와 칼은 자주 사용하는 공구인지 마른 핏자국이 군데군데 묻어있었다.
“그럼, 오랜만에 환경 미화를 위해 힘 좀 써볼까?”
야구 모자가 망치를 치켜들었다. 이미 마취제가 온몸에 퍼진 떠돌이 개는 혀를 축 내민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야구 모자의 망치가 빠른 속도로 낙하했다.
치직.
허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야구 모자의 망치는 맨 바닥에 떨어졌다. 야구 모자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도 못한 채 자리에 쓰러졌다. 그 뒤에는 전기 충격기를 들고 있는 양이가 있었다. 양이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야구 모자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일어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양이는 휴대 전화를 꺼내들었다.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태기가 생각났다. 양이는 태기의 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음은 두 번도 울리지 않았다.
“야! 너 어디야!”
태기가 다급한 목소리로 양이를 불렀다. 양이는 승리의 기분을 느끼며 가슴을 당당히 폈다.
“아저씨. 저 잡았…….”
딱! 양이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바닥이 벌떡 일어나더니 양이의 몸을 덮쳤다.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아픔은 그 다음에 느껴졌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양이는 그제야 자신이 뒤통수를 무언가로 맞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가? 양이는 먼저 눈을 굴려 야구 모자를 바라보았다. 야구 모자는 여전히 흰자위를 드러낸 채 기절해 있었다. 야구 모자는 아니다. 양이는 그제야 처음 나비가 읽었던 야구 모자의 생각이 떠올랐다.
‘공범이 있다.’
양이는 아득해져가는 정신 너머로 누군가의 발을 보았다. 아. 머리 때리는 거, 제일 싫어하는데. 양이는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

흙냄새가 났다.
오랫동안 햇빛을 받지 못해 눅눅해진 곰팡이 같은 냄새였다. 머리가 뜨거웠다. 양이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밝은 빛이 보였다. 갑작스런 빛에 적응하지 못한 동공이 비명을 질렀다. 양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밝은 빛에 점차 적응이 되어가자 양이는 눈을 크게 떴다. 창고 같아보였다. 천장에 달린 백열등이 밝은 빛을 뿜어대고 정체 모를 박스들이 가득한 그런 방이었다. 양이는 몸을 일으키기 위해 손을 땅에 짚었다. 아니, 짚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손과 다리는 밧줄로 꽁꽁 묶여 있었다. 양이는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일어났어?”
양이의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양이는 몸을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백열등의 불빛이 닿지 않는 그늘에 한 남자가 서있었다. 그 옆에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야구 모자가 누워있었다. 공범이다. 양이는 한껏 적의를 드러내며 웃었다.
“네. 덕분에 푹 잤네요. 고마워요.”
공범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이런 걸 어디서 구한거야? 요즘은 청소년한테도 이런 걸 파나?”
공범은 양이가 들고 있던 전기 충격기를 잡고 흔들었다. 양이는 분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장미에는 가시가 많은 법이예요. 아저씨.”
양이의 말에 공범이 크게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늘에서 걸어 나왔다. 백열등이 밝게 비추는 부분으로 나온 공범은 태기였다. 왠지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안. 꽤 아팠지?”
전기 충격기가 들린 손의 반대편에는 나무 빗자루가 들려있었다. 양이는 그런 태기를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지 마시죠. 그래서 여긴 어디죠?”
양이는 붙잡힌 사람 같지 않게 당당하게 말했다. 태기는 그런 양이를 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여기? 처음 만났던 공원의 창고야. 왜? 경찰한테 전화라도 하게?”
태기는 턱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양이는 고개를 돌려 태기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박살난 양이의 휴대폰이 있었다. 양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기대도 안했어요. 나비는 어디 있죠?”
양이는 자신이 메고 있는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가방은 비어있었다. 태기는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도망갔겠지.”
태기는 천천히 양이를 향해 다가갔다. 양이는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태기는 조금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양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뭐죠?”
태기는 양이의 근처에 놓인 박스 위에 앉았다.
“너는 동물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했지? 나비는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했고. 그럼 내가 인수와 공범이라는 걸 알았을 텐데 왜 내게 접근 한 거지? 역시 거짓말이었나?”
태기는 아직 기절해 있는 야구 모자를 쓴 인수를 가리켰다. 양이는 그런 태기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아니요. 아저씨가 공범이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럼 일부러 접근한 거라는 거야?”
“네.”
양이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태기는 이해할 수 없는 듯 상자에서 일어났다.
“왜?”
“아저씨도 함께 잡아야 했으니까요.”
양이의 눈빛에 태기는 순간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양이의 말대로였다. 만약 처음 공원에서 인수만 신고하였다면 태기는 아무런 혐의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태기는 공급자였고 인수가 수요자였으니 말이다. 태기와 인수가 공범이라는 증거는 실 한 오라기조차 없었다. 양이는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엔 제가 물을 차례네요.”
양이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태기는 양이의 행동을 저지하려다가 손발이 묶인 여고생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냐는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네가 궁금한 게 있어? 내 생각을 읽으면 되잖아.”
“나비가 없잖아요. 그리고 확실히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양이는 진지한 눈빛으로 태기를 노려보았다.
“전에 봉사 활동을 한다고 했는데, 그게 이건가요?”
태기는 전에 양이와 나눈 대화를 곱씹는 듯 생각에 잠기더니 기억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그거? 맞아. 이게 내 봉사 활동이야. 쓰레기를 정리하는 일이라고 했지? 그 쓰레기가 저 더러운 짐승들이야. 쓰레기통을 뒤지고 아무데나 똥오줌을 갈기고 온갖 병균을 옮기는 저 더러운 짐승들 말이야. 난 저 쓰레기들을 정리하는 일을 한 거야. 그러니깐 봉사 활동이지.”
태기는 조금 나사가 풀린 것 같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양이는 태기가 한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아저씨가 말한 그 쓰레기가 한 생명이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은요?”
양이의 질문에 태기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질문은 서로 한번씩 주고 받는 거 아니였나?”
“다음 번에 질문하면 되잖아요. 남자가 쪼잔하게.”
태기는 아직 당당한 양이의 말투에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 답을 해주지. 답은 없다야. 처음 나비를 주워온 것도 인수에게 주기위해 데려왔던 거야.”
태기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양이는 만족한 답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기는 천천히 양이에게 다가왔다.
“그럼 이제 내가 질문하지. 넌 대체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한 거지?”
태기의 질문에 양이는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저씨는 저를 죽일 수 없으니까요.”
태기는 걸음을 멈췄다.
“어째서?”
태기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양이는 한껏 경멸의 표정을 지은 뒤 비웃음을 날렸다.
“아저씨는 한 번도 무언가를 죽여본 적도 없고 그럴 용기도 없으니까요.”
태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양이의 말대로였다. 태기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랬기에 태기는 수요자가 아닌 공급자 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기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난 널 죽일 수 없어.”
태기는 이를 꽉 깨물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자신은 언제나 누군가의 힘을 빌려야 했다. 태기는 몸을 돌려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저 녀석은 널 죽일 수 있지.”
태기의 시선의 끝에는 인수가 있었다. 인수라면 양이를 죽일 수 있었다. 언젠간 사람도 죽여보고 싶다고 늘 이야기하던 녀석이었다. 태기의 답에 양이는 다시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당신……. 혼자선 아무 것도 못하는 겁쟁이군요.”
태기는 조금 울컥했는지 양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곧 양이를 향해 조소를 날렸다.
“그래. 난 혼자선 아무 것도 못하는 겁쟁이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너 역시 혼자선 아무 것도 못하는 것 같은데?”
태기의 조소에 양이는 똑같이 조소로 맞받아쳤다.
“아니요. 전 혼자가 아니예요.”
“무슨 소리지?”
태기는 오싹한 기분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고 안은 조용한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양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벌써 잊으셨나요? 당신과 나의 고양이를?”
“야옹.”
상자 뒤에서 검은 새끼 고양이가 나왔다. 나비였다. 나비를 본 태기는 광소하기 시작했다.
“하하하! 저 조그마한 새끼 고양이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날 물기라도 할 텐가?”
“네.”
양이는 짧게 답했다. 태기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주변의 수많은 눈이 있는 것 같았다. 백열등의 빛이 닿지 않는 창고의 저 깊은 어둠속에서 으르렁 소리가 들려왔다. 태기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양이는 그런 모습을 보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나비야.”
수많은 눈동자가 빛났다.
“물어.”

***

눈을 떴다.
창문 사이로 은은하게 새어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방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게 기지개를 켜고 방문을 열었다. 맛있는 냄새가 났다. 부엌에선 엄마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에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화장실에 들어가 간단히 세면을 한 뒤 식탁 앞에 앉았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에요. 엄마.”
엄마를 향해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엄마도 미소를 지으며 수저를 가져다주었다. 수저를 집어 들기 전에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그리고 뉴스를 틀었다.
“오들도 나갈거니?”
엄마는 선반을 열어 고양이 사료를 꺼냈다. 그리고 사료 그릇에 고양이 사료를 조금 쏟아 부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거실 한 구석에 누워 있던 나비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아마 그럴 거예요.”
수저를 들고 밥 한 숟가락을 떴다. 그리고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사건 사고에 귀를 기울였다. 어제 12시경 물놀이를 하던 9세 김 모 군……. 이게 아니다. 원하는 보도는 좀 더 뒤에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뭐 하러 나가는 거라고 했더라?”
엄마는 가스레인지 위에 있던 김치찌개를 물에 젖은 행주로 감싼 뒤 식탁 위에 올렸다.
“아, 그거요?”
수저로 김치찌개를 몇 번 휘저었다. 고기 몇 점이 김치와 딸려 올라왔다. 미소를 지으며 그것들을 건져먹었다. 9중 추돌로 인해 37세 이 모 씨……. 이것도 아니다.
“봉사 활동이요.”
엄마를 향해 상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난 오후 11시 OO동 공원에서 변사체 두 구가 발견되었습니다. 결찰은 동물들을 이용해 피해자를 무참히 살해한 방법으로 보아 지난번 엽기 살인 사건과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저도 모르게 뺨을 어루만졌다. 나비가 울었다.
“미안. 아저씨.”
TV를 껐다.

***

아픔이 느껴졌다.
그것으로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태기는 몸을 일으키기 위해 힘을 주었다. 격통이 밀려왔다. 태기는 비명을 질렀다. 너무 아팠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태기는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양이를 노려보았다. 양이는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는 눈빛으로 태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양이가 천천히 태기를 향해 다가갔다. 주변의 동물들이 모두 양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 살아있죠?”
양이가 순진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태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는 양이가 포식자다. 태기는 살기 위해 양이의 말을 고분고분 듣기로 마음먹었다. 양이는 태기의 코앞까지 다가와 쭈그려 앉았다.
“아저씨 혹시 기억나요?”
양이가 옛 생각을 하듯 그리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말했었잖아요. 이 일이 끝나면 같이 사무소를 차리자고요.”
태기의 눈이 흔들렸다. 대체 그 이야기는 왜 하는 거지? 양이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이야기. 아직 유효한데, 어떡하실래요?”
양이가 태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태기는 그 손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이 손을 잡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다시 살 수 있나? 살아남으면? 이 미친 소녀와 이 미친 짓을 하고 다녀야 하는 거야? 그렇게 해서라도 살 수 있다면 살고 싶어. 손을 잡자. 잡고 살아남는 거야. 태기는 양이의 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짝!
창고 안에 날카로운 타격 음이 울려 퍼졌다. 양이는 멍한 눈으로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태기가 뺨을 때린 것이다. 태기는 그 마지막 일격으로 힘을 다 소모했는지 부들거리는 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엿이나 먹어.”
양이가 돌아간 고개를 천천히 돌려 태기를 바라보았다.
“유감이네요.”
양이가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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