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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세 번째 기적

2011.12.29 12:1612.29

크리스마스 이브를 하루 앞둔 겨울날 저녁, 퇴근하던 나는 도로변에 서 있는 악마를 보았다. 악마는 근사한 턱시도 차림에 실크햇까지 갖춰쓰고 있어 앞주머니에 꽂힌 손수건이 금방이라도 비둘기로 변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내가 막 그 앞을 지나치려는 순간 신호가 바뀌었다. 차를 세우자 악마가 다가오더니 창유리를 똑똑 두드리고는 손수건을 뽑아 펼쳐 보였다. 손수건에는 비둘기 대신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기적 팝니다-은전 한 닢.

은전 한 닢? 설마 중국 돈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평생을 매달려 간신히 얻어낸 물건만이 기적값이 될 수 있다는 건가. 진짜 기적이라면 아마 후자가 더 그럴듯하겠지만….

"아, 이 나라 놈들은 왜 하나같이 엉뚱한 생각만 하는 거야. 중국 돈이 아냐. 이 창의성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그냥 은색 동전 하나면 된단 소리야. 오백원이든 백원이든, 반짝반짝한 새 오십원이든."

왜냐니, 국정 교과서의 힘이지요 뭐. 나는 몇 해 전에 고인이 되신 모 수필가를 떠올리며 주머니를 뒤졌다. 오백원짜리 한 놈이 손가락에 걸렸다. 저런 수상쩍은 기적을 사느라 써 버리기엔 조금 아까웠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백원짜리가 안 나오는지라 별수없이 창문을 열고 악마에게 건네주었다. 동전을 받은 악마는 실크햇을 벗어 내밀며 말했다.

"자, 하나 골라 봐."
"고르라니, 아무것도 없잖습니까."

안을 들여다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어물거렸더니 악마가 내 손목을 붙들고 모자 속에 쑥 집어넣었다. 모자 안에는 토끼 대신 뭔가 둥글고 매끈한 물건이 잔뜩 들어 있었다. 옛날부터 뽑기 운은 최악이었는데. 나는 손을 몇 번 적당히 휘젓다가 대충 잡히는 놈 하나를 꺼냈다.

"오, 정직하네? 두 개 이상 꺼내면 빨려들어가는데."

그런 무시무시한 말은 좀 미리미리 하라고! 악마가 어쩐지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실크햇을 툭툭 치는 바람에 나는 오싹해졌다. 설마 이건 전에 빨려들어간 희생자들의 영혼인가?

"농담이야 농담. 그거나 빨리 열어 봐. 궁금하니까."

모자에서 나온 물건은 뽑기통에 흔히 들어 있는 플라스틱 캡슐이었다. 위아래가 다 불투명한 은색이라 안은 보이지 않았지만. 흔들어 보니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런 건 발로 밟아서 까야 제맛인데. 이걸 밟자고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손으로 열 수도 있나?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손 안에서 캡슐이 저절로 열렸다. 캡슐 안에는 파란 알약이 하나 들어 있었다.

"뭡니까 이게?"
"페니실린. 1928년의 기적이지."

속았다! 고작 이런 알약 따위나 사자고 오백 원을 날리다니!

"고작 이런 알약이라니. 페니실린은 발명된 이래 수십만 명의 목숨을 살려 왔다고."
"그건 그렇지만 기적이라고 하면 보통 이런 거잖아요.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거나, 불치병 환자가 씻은 듯이 낫는다던가."
"그리고 먹으면 곰 같은 아저씨라도 하루아침에 미소녀로 만들어 주는 약이라던가 뭐 그런 거 말이지. 그런 것도 있긴 있는데."
"마지막에 든 예는 별로 탐나지 않지만 그렇담 어쨌든 한 번 더!"

나는 동전을 찾아 주머니며 운전석 여기저기를 이잡듯이 뒤졌지만, 악마는 손을 홰홰 내저으며 물러섰다.

"안 돼 안 돼. 한 사람당 기회는 한 번씩이야.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기적이라는데 한 번도 대 바겐세일이지. 안 그래? 정 다시 하고 싶거들랑 환생해서 오던가."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기적 운운하기에 페니실린 한 알은 너무 흔한데. 나는 속으로 궁시렁거렸지만 악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신호가 바뀌었으므로 별수없이 출발해야 했다.

"나 왔어."
"일찍 왔네. 춥지? 내 감기약 사 왔어? 으으, 골이 띵하네."
"…아차, 깜박했다."
"으이그. 감기 몸살은 으슬으슬할 때 얼른 약 먹고 자야 떨어진단 말야. 이제 약국 문도 다 닫았을 텐데 어떡할 거야? 이런 쓸모없는 남편 같으니라구."
"미안 미안. 이거라도 먹을래?"
"그게 뭔데? 무슨 약이길래 포장도 없이 달랑 약만 들고 다녀?"
"페니실린이라는데."
"페니실린? 그거 처방 없으면 못 사는 거 아냐?"

퇴근길에 악마를 만났던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아내는 대번에 1928년의 기적을 뽑았네, 라고 말해 나를 놀라게 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그쯤은 상식 아니냔다. 일요일 아침 퀴즈 프로에나 나올 법한 잡학을 일반상식인양 말하지 말란 말이다. 자초지종을 들은 아내는 약을 냉큼 입에 집어넣고 물컵을 꺼냈다. 진짜 먹을 셈인가.

"그렇게 막 먹어도 되는 거야? 처방 없이 못 사는 거면 독한 약일 거 아냐."
"독약도 아니고 페니실린인데 뭐. 그리고 기적의 약이라며? 또 알아. 먹으면 깨끗이 나을지."

약을 꿀꺽 삼킨 아내는 대수롭잖다는 투로 말했지만, 30분쯤 지나자 병든 닭마냥 꼬박꼬박 졸기 시작했다. 역시 약이 독했나. 이마를 짚어 봤더니 열이 좀 있길래 방에 눕히고 찬 물수건을 대 주었다. 아내는 밤새 잘 잤다.



다음날 아침에 내가 죽을 끓일까 콩나물국을 끓일까 생각하고 있는데 안방에서 아내가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나왔다.

"다 나았다! 부활! 그 약 끝내준다! 진짜 기적이야! 그거 어디서 샀어? 나도 살래. 가르쳐줘!"

이마를 짚어 봤는데 정말로 열이 없었다. 안색도 괜찮아 보이고 오히려 평소보다 더 힘이 넘치는 것 같다. 페니실린이 그렇게 좋은 약이었나? 아니면 플라시보 이펙트? 설마 악마가 먹으면 어떤 병이건 하루아침에 낫게 해주는 기적의 약을 페니실린이라고 속인 건가? 그렇담 고작 감기나 낫게 하기엔 아까운데. 뭐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은 할 수 없지.

"알았어 알았어. 가르쳐 줄 테니까 일단 밥부터 하자. 오늘 사인회 한댔지? 든든하게 먹고 가야할 거 아냐."

우리는 부엌에 나란히 서서 밥을 하고 국을 끓였다. 아내는 고춧가루를 듬뿍 넣은 콩나물국에 다시 후추를 톡톡 뿌리고 밥을 그득히 말아 두 그릇이나 비웠다. 어제는 영 입맛이 없어서 말야. 일이 층에 죄다 불이 났구나. 배를 쓰다듬으며 히죽 웃는 아내에게 나는 고춧가루가 잔뜩 끼었다고 놀렸다.

"나중에 양치하면 되잖아. 어디서 샀는지나 가르쳐줘봐."
"XX사거리 근처였어. 응. 백화점 있는 데. 턱시도 입고 모자 쓴 키 큰 남자였어. 머리 하얗게 셌고. 은색 동전 한 개 주면 모자 안에서 뽑기 같은 걸 꺼내가라고 할 거야. 아, 근데 꺼낼 때 하나만 꺼내가야 한다? 두 개 집으면…."
"집으면?"


"영혼이 뽑기 속에 갇혀 버려."


"고춧가루 없지?"
"어. 깨끗해."
"사람 많이 올까?"
"글쎄다. 당신이 워낙 지은 죄가 많아야지."
"그러지 말고! 좀 무섭단 말야. 파리만 날리면 어떡하지?"
"걱정 마셔. 수천 명이 악덕 작가 타도를 외치며 구름같이 궐기할 텐데 뭐. 그보단 광팬한테 칼 맞지나 않게 걱정해라."
"아 진짜! 됐어. 나 갈게. 끝나고 회식 있으니까 밥 먼저 먹어."
"잘 갔다 와. 잘 되면 맛있는 거 사 와라."

아내는 유명 포털 사이트에서 웹툰을 그렸다. 그림체는 둥글둥글하니 귀엽지만 장르는 호러 내지는 추리물이라 뒤로 갈수록 등장인물이 줄줄 죽어나간다. 짧으면 5화, 길어야 20화를 넘기지 않는 옴니버스 형식이라 죽일 캐릭터는 무궁무진, 주인공은 100%죽고 애인이 있다면 당연히 죽는다. 조연도 몰살당하기 일쑤인데다 엑스트라는 그야말로 파리 목숨. 새 스토리가 시작되면 첫 댓글부터 검은 리본이 줄줄이 달리고 팬카페에선 살아남을 캐릭터를 놓고 단행본이 걸린 도박이 성행하며 인터넷에는 모 작가에게 끔살당한 작품별 희생자 목록이 짤방으로 떠돈다. 모 소년 탐정도 이렇게까지 많이 죽이진 않았다는 장렬한 해설과 함께. 아내가 합법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 만화 작가가 되었다는 설은 이제 공식처럼 굳어져 버렸다. 탐정만 매번 살아남다니 그런 건 반칙이다, 자기는 모든 등장인물을 공평하기 대하기 위해 그랬을 뿐이다 운운하며 본인은 부인했지만. 호러물은 그렇다쳐도 탐정에 범인에 관계없는 마을사람 다수까지 몽땅 죽는 그런 스토리를 가지고 잘도 추리물을 그려낸다 싶지만, 어쨌든 저렇게 사인회까지 하는 걸 보면 아내의 만화는 꽤 인기있는 모양이었다. 특히 중학생들이 좋아하는지 팬카페에 들어가보면 잡담란이 온통 중간고사며 보충수업, 담임 험담 따위의 화제로 가득하다. 내용이야 어쨌건 귀여운 캐릭터가 잔뜩 나오면 중학생은 좋아하는 걸까?

인터넷을 하고, 군것질을 하면서 TV를 보고, 냉동만두로 적당히 끼니를 때우다 보니 어영부영 크리스마스 이브가 지나갔다. 내일이 아니라 모레가 크리스마스라면 참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일요일이랑 겹치다니. 금쪽 같은 휴일이 하루 날아간 것도 억울하거니와 내일은 빨래 돌리고 청소도 해야 하는데. 그래도 크리스마슨데 저녁때 외식이라도 갈까? 아니다. 어차피 자리도 없을 텐데 치킨이나 시켜먹자고 하지 뭐. 피자도 좋고. 잡생각을 하면서 바닥을 뒹구는데 찰칵하고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볼이 빨개진 아내가 현관에서 케이크 상자를 내밀었다.

"후아 춥다. 이것 좀 저기다 놔줘."
"잘 하고 왔어?"
"어. 애들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몰라. 손목 나가는 줄 알았네. 귀엽긴 한데 무지 시끄럽더라. 내내 쫑알쫑알 쫑알쫑알. 진짜 이쁘게 생긴 여자애가 하나 있었는데, 토연을 살려 달라고 통사정을 하길래 엄청 난감했어. 글쎄요, 아무래도 좀 하고 얼버무리니까 눈물까지 그렁그렁해가지고선. 그래도 벌써 완결까지 낸 걸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아, 요번 주인공? 걔 절벽에서 떨어지고 끝났잖아. 웬만하면 살려 주지 그래? 그러려고 절벽 밑에 강 넣은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그런 데서 떨어진 인간이 어떻게 살아. 강이야 뭐 트릭 때문에 넣은 거였고."
"비정하다 진짜. 자비가 없어."
"됐으니까 케이크나 먹자. 저거 XX에서 나온 신제품인데 요전부터 꼭 먹어보고 싶었어. 매장마다 다 떨어졌대서 여기저기 돌아다녀가지고 겨우 샀다니까?"
"회식했다며. 실컷 먹고 온 거 아냐?"
"디저트 배는 따로 있는 법이야."

하긴, 아내는 술을 못 하니 연말 회식이래도 그닥 흥청망청하진 않았을 테지. 케이크는 맛있었지만 꽤 느끼해서 나는 커피를 연거푸 들이켜야 했다. 아내는 맨입에 그 단 케이크를 잘도 먹었다. 아담한 케이크가 1/4쯤 남았을 때, 내가 막 두 잔째 커피를 타오려고 일어서자 아내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맞다. 일어난 김에 내 코트 주머니에서 지갑 좀 갖다주라. 그리고 당신 왜 거짓말했어? 두 개 뽑아도 된다던데?"
"뭐? 진짜?"
"어. 내가 진짜 빨려들어가나 궁금해서 두 개 꺼냈거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마냥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랬더니 그 악마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지 뭐야. 왠지 다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아서 좀 무섭더라고. 근데 내가 장난이었어요 하고 하나 돌려주려니까, 괜찮다고 두 개 다 가져가라는 거야. 나 같은 여자한테는 특별히 하나 더 주겠다나."
"뭐야 그거. 남녀 차별인가."
"근데 한 개만 뽑는 게 더 스릴 있을 것 같아서 그냥 하나만 받았어."

죽은 사람이 도로 살아나는 약이나 불치병이 낫는 약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걸 차버리다니. 게다가 내 경고는 싹 무시하고 말야. 이번엔 아스피린이라도 나왔냐고 별 기대 없이 지갑을 건네주며 묻자 아내는 안에서 천원짜리 지폐만한 티켓을 한 장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티켓은 보통 종이만큼 얇았지만 액정 화면처럼 안에 있는 글자가 움직이고 색도 바뀌었다. 왼쪽에는 공중전화 박스처럼 생긴 기계 사진이 있었는데, 배경으로 깔린 하늘에서 쉴새없이 색색의 불꽃이 터져나왔다. 오른쪽에는 이런 글자가 번쩍이며 점멸하고 있었다. 축 당첨. 타임머신 왕복이용권. 이동 범위 무제한.

"굉장하지? XXXX년의 기적이래."

아내가 악마에게 듣기로, XX세기에는 타임머신이 발명되어 과학자가 아닌 일반인도 시간여행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여행을 하는 데는 지금의 우주여행만큼이나 어마어마한 돈이 드는데다 당시의 시간에서 멀리 떨어진 시간대로 갈수록 비용도 기하급수적으로 느는지라 우리 같은 서민에게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이야기라는 모양이었다. 전 재산을 다 털어도 몇 년 전으로 돌아가는 게 고작이라던가.

"그 시대의 시간여행이란 지금으로 치면 우주 관광 같은 거지. 그 있잖아, 몇 년 전에 러시아에서 미국인 사업가한테 340억 받고 1주일 동안 우주선 태워준 거. 그런데 어느 우주관광 재벌이 운영하던 동물원에서 1광년에 한 번 번식한다는 희귀 외계 생물이 새끼를 낳은 기념이라면서 타임머신 왕복이용권, 그것도 이동 범위까지 무제한인 걸 경품으로 걸고 이벤트를 했다는 거야. 이용권이 새로 출시된 초콜릿 안에 들어 있었는데, 엄청나게 많이 생산해서 전 우주에 판매했기 때문에 당첨되는 건 그야말로 우주적 기적이었다나. 들어보니까 확률이 로또는 명함도 못 내밀겠던데."
"그럼 지금 어딘가에는 미래인이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네?"
"그럴지도? 어차피 우린 XXXX년까지 살지도 못하고, 지금은 타임머신도 없으니 갖고있어봤자 소용도 없을 테니까 미래인을 만나면 이걸 비싸게 팔자. 우린 갑부가 될 거야!"
"좋았어, 이걸 팔아서 우주 관광을 가자고! 근데 미래인은 어떻게 찾지?"
"좀 수상하다 싶은 사람한테 이걸 보여주는 게 어때? 미래인이라면 알아볼 수 있을 거 아냐."
"글쎄, XXXX년 이전에 살던 사람이면 어떡해?"
"이 티켓, 아무리 봐도 요즘 기술로는 못 만들 것 같은데. 말아서 접으면 이렇게 작아지는데다 다시 펴면 접은 자국도 안 남고. 세게 눌러도 액정처럼 글씨가 깨지지도 않잖아. 미래의 기술로 만들어진 물건이 이런 시대에 와 있으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어?"

우리는 그 날 늦게까지 함부로 티켓을 내보이다가 검정 양복 입은 아저씨들이 찾아오는 거 아니냐, 미래인이 007에 나오는 레이저 총 같은 신무기를 들고 쳐들어와 티켓을 훔쳐가면 어떡하냐, 차라리 스위스 금고 같은 데 맡겨 놓을까, 미래인을 만나지 못한다면 이 티켓은 집안의 가보로 삼아 XXXX년이 올 때까지 자손 대대로 물려주자 따위의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슬슬 일어나. 벌써 11시가 넘었다고."

이불 속에서 꼼지락대던 아내가 느릿느릿 기어나와 씩 웃으며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나도 같은 말로 대답해 주었다. 계란 후라이라도 할까 하고 냉장고를 여는데 아내가 어제 먹다 남은 케이크를 꺼냈다. 난 이걸로 때울래. 아침부터 그 느끼한 걸 잘도 먹는다 싶었다. 여자들은 다 저런 건가.

여느 일요일처럼 우리는 밀린 빨래를 해치우고 집을 청소했다. 아내가 틀어둔 캐롤은 묘하게 박자가 맞아떨어져 나는 무슨 노동요를 듣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걸레질을 마치자마자 징글벨이 딱 끊어졌다. 동시에 화장실 청소를 끝낸 아내가 거실로 나왔고, 세탁기에서 탈수가 다 됐다는 신호음이 딩동딩동 울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맞춰 스피커에서 루돌프 사슴이 흘러나왔다.

"이따 저녁 어떻게 할까? 뭐 시켜 먹을래?"
"저기, 기적 말인데. 우리 한번만 더 뽑으러 가보자."

내가 팡팡 털어 온 빨래를 건조대에 널던 아내가 대답 대신 엉뚱한 소리를 했다. 처음에 악마가 한 사람당 한 번밖에 못 뽑는다고 그랬으니 안 될 거라고 했지만, 아내는 자기한테 다 생각이 있다면서 일단 가 보잔다. 뭐 가는 김에 마트에서 장이나 보고 오지. 저녁거리로 피자도 사고.

"그래. 가자. 가서 퇴짜 맞거든 미래인 알아보는 법이라도 물어보자고."

아내는 빙긋 웃으면서 크리스마스 트리에 걸어둔 은화를 빼 왔다. 스무 살 때 처음 떠난 해외여행에서 공항을 나서자마자 주웠다는 어느 외국 동전이었다. 그 뒤로 쭉 행운의 마스코트라면서 열쇠고리에 넣어 가지고 다니다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트리 장식으로도 썼는데, 이번에는 그걸 기적값으로 내려는 모양이다. 대체 무슨 생각이 있다는 걸까. 하지만 사거리에 악마는 없었다. 연인들이 넘치는 거리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근처를 샅샅이 찾아봤지만 턱시도에 실크햇을 쓴 백발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적잖이 실망한 눈치였지만, 찬바람을 맞으며 돌아다니느라 나도 아내도 발이 꽁꽁 얼어 버린지라 별수없이 따뜻한 마트 안으로 피신해야 했다. 마트는 쇼핑 나온 가족들로 가득했다. 피자를 예약하고 이런저런 먹거리들을 카트에 담은 뒤 우리는 언제나처럼 애완동물 코너로 소동물을 구경하러 갔다. 케이지마다 크고작은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높은 곳에 둔 새밖에 볼 수 없었지만. 아내는 토끼 케이지에 이마를 맞대고 나란히 선 남매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현듯 아내가 세 번째 기적으로 아이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손 대대로 티켓을 물려 주자고 말은 했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나도록 아기가 생기지 않아 병원에도 수없이 가 봤지만 뚜렷한 원인조차 찾지 못했다. 성과 없이 병원비만 무한정 들어가는 상황에 지쳐 치료받기를 그만 둔 이후로는 포기한 줄 알았는데. 나는 가만히 아내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만 가자. 피자 나왔겠다."
"…응."

돌아가는 길에 아직 미련이 남았는지 연신 뒤를 돌아보던 아내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 스톱! 저기 있다!"

아내는 백화점 앞에 세워진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 옆을 가리켰다. 하얀 손수건을 펴들고 서 있는 악마가 보였다. 나는 차를 돌렸다. 아내는 주차를 하자마자 뛰쳐나와 내 팔을 잡아끌었다. 빨리 빨리! 하지만 악마는 허겁지겁 달려온 우리들을 흘깃 보더니 예상대로 기회는 한 번 뿐이니 안 된다고, 다시 하려거들랑 환생해서 오던가 하라며 퉁명스레 말했다. 그러자 아내가 이렇게 대꾸하는 게 아닌가.

"우리가 뽑는 게 아녜요. 뱃속의 아기 걸 대신 뽑아 주는 거지."

나는 경악했다. 맙소사, 아기라니! 명색이 악마인데 그런 새빨간 거짓말에 속을 리가 없….

"나 참. 그러게 어제 두 개 가져가라니까."

하지만 놀랍게도 악마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순순히 왼손을 내밀었다. 은화를 건네며 아내가 해냈다는 듯 나에게 브이 표시를 해 보였다. 이번엔 하나만 뽑아야 된다면서 악마가 실크햇을 벗었다. 같이 하자. 아내는 손등 쪽에서 손가락 깍지를 낀 채 내 손을 모자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망설임없이 제일 처음 손에 잡힌 캡슐을 꺼냈다. 캡슐은 처음 내가 모자 속에 손을 넣었을 때보다 많이 줄어 있었다. 또 누가 무엇을 바라면서 은전 한 닢을 내고 저 기적을 사 갔을까. 그 사람들은 바라던 것을 얻었을까? 아니면 우리처럼 엉뚱한 것만 뽑고선 한 번 더를 외치다 퇴짜를 맞아 실망하며 돌아갔을까. 은색 캡슐은 이전처럼 손 안에서 저절로 열렸다. 안에는 작은 금색 로켓이 들어 있었다.

"이건 또 무슨 기적입니까?"

내가 물었지만 악마는 저번처럼 이렇다할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대신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댁이 처음에 뽑은 그 약, 페니실린 아니야."
"예?"
"위약용 소금덩어리지."

내가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듯 묻자 악마는 이 말만 남기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사라졌네, 순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멍하니 서 있다 아내의 중얼거림을 듣고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악마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이 로켓이 과연 어느 시대의 어떤 기적일지에 대해 한바탕 토론을 벌였지만, 그 큰 피자를 다 먹어 가도록 결론은 나지 않았다. 로켓은 디자인이 꽤 특이했고 손으로 잡아도 금속 특유의 차가움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외에는 딱히 이렇다할 특징도 없었다. 열어 보니 작게 접은 티켓을 넣어두기에 딱 알맞아보이는 공간이 나왔다. 아내는 로켓 안에 티켓을 넣어서 항상 목에 걸고 다녔다. 은화 대신이라면서. 은색 캡슐에도 끈을 달아서 크리스마스 트리에 장식했다. 꼭대기의 별 바로 밑이었다.




  "아, 아버지. 네. 끝났어요. 내일 돌아가요. 예? 그거 지금 하고 있어요? 보고 계신다고요? 참, 그날 사인해달라고 온 여자애가 제 거랑 똑같은 로켓을 갖고 있더라고요. 신기해서 좀 보여달래가지고 나란히 놓고 봤는데 무늬까지 다 같더라니까요. 그런 건 처음 봤어요. 은근히 따뜻한 게 감촉도 그렇고. 듣고 계세요?"

악마에게서 세 번째 기적을 산 지 9개월 뒤에 우리는 건강한 아들을 얻었다. 아내의 뱃속에 정말로 아기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 때 당신이 감기약을 사왔더라면 큰일날 뻔했지 뭐야. 아내는 임신 기간 내내 종종 그런 말을 했다. 참으로 다행이라고. 아이를 가지고선 자비로운 마음이 들었는지 아내는 사인회에서 만난 소녀의 부탁대로 토연을 살려줬다. 게다가 이전에 죽였던 주인공들까지 덤으로 몇 명 살려서 아예 고정출연 멤버로 삼아 버렸다. 지금까지 모두 픽션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실 모두 배우고, 추리 드라마를 찍고 있었던 거예요 하고 눙치면서. 팬카페에선 난리가 났다. 뭐 이건 어디까지나 추리물 쪽의 이야기고, 호러 쪽에서는 그 반동이었는지 이전보다 한층 더 잔인하게 사람이 죽어나갔으므로 결국 19금 딱지가 붙고 말았지만. 해서 아내의 팬은 대다수가 10대인 추리파와 고어 매니아로 추정되는 호러파 성인들로 갈리게 되었다. 호러파는 시끄러운 초중딩이 떨어져나갔다며 좋아하는 것 같았고, 추리파는 여전히 이번 시리즈의 범인을 맞히는 도박을 했다. 역시 단행본을 걸고서.

임신 기간 동안 저런 호러물을 그려 대서야 태교에 지장이 많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우리의 아들은 밝고 건강하게 자라나 지금은 4인조 밴드의 보컬로 활약하고 있다. 우연히 참가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한 뒤 유명세를 탄 아들의 밴드는 곧 전 세계에 광팬이 잔뜩 생길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팬레터는 벌써 오래전에 몇 통이나 왔는지 세기조차 포기해야 했고,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때는 집으로 날아드는 선물을 뜯느라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어느 날 우리 부부는 주말 연예 프로그램에서 방영해준 아들의 사인회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어쩌다 좀 오래 화면에 잡힌, 열네 살쯤 되어 보이는 한 소녀가 그 로켓을 목에 걸고 있지 않은가. 소녀는 오로지 아들을 만나고 싶어 몇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여기까지 왔다는 듯 반짝반짝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 눈매가 젊었을 적의 아내와 무척이나 닮았다.



우리가 로켓을 얻은 이래로 은색 캡슐을 세 개 매단 크리스마스 트리가 스물네 번이나 다시 거실을 장식했지만, 지금까지도 우리는 그 날 악마에게서 샀던 세 번째 기적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모른다. 병원에서도 포기했던 우리 부부에게 아이가 생긴 것이었는지, 그 아이가 자라 시대를 초월하는 대인기를 누린 끝에 수천 년 이후 태어난 후손에게까지 사랑받을 만큼 유명한 가수가 된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까마득한 후손이 아들의 노래에 반한 나머지, 그 아이 나름의 인생에 쌓였을 모든 실수와 잘못들을 만회할 기회를 차 버리면서까지 아들을 만나러 온 것인지를.
너구리맛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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