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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나이팅게일

2010.02.21 00:3002.21

옛날에 쓴 글이라 부끄럽지만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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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팅게일



위의 자료를 보고 러시아 연방 정부군이 체첸 여인을 집단 강간하는 현실을 찍은 포르노그라피 다큐와 임계값에 가깝게 결정된 팽창율때문에 열적 죽음은 결코 오지 않는다는 우리 우주 법칙 사이에 어떤 상호 논리 역학적 관계가 성립하는지 A4용지 8장 정도 분량으로 논술하시오.


1.정아

겁나게 예쁜 여자애를 오늘 아침 보았다. 저기 일어서 있는 여자애다. 쟤야. 쟤. 없는 거울 친구 녀석이 아는 채 한다. 이 독서실 최고 글래머라고 소문 나 있는 애야. 그 말 듣고 보니 가슴이 더 커 보인다. 사귀는 애는 없다 하더라. 여기에서 사귀는 애가 없는 모양이지. 공부는 잘 한데? 못 하나 봐. 야, 짜쌰 좋아하면 저기 가서 뭐라 말 좀 걸어라. 여기서 나 붙들고 주절거리지 말고. 그렇잖아도 그러고 싶은데 웬지 좀 남자 친구가 허벌나게 많을 것 같아서 영 찜찜하다. 나는 숯처녀랑 사귀고 싶걸랑. 너는 순결하냐? 난 쑥맥이야. 증말? 이 짜슥은 뻥만 먹고 살았나. 쑥맥이란 말에 책임질 수 있냐? 다시 말하자면 나는 여자 친구 한 명 없는 순수한 쑥맥이다. 쑥맥이란게 자랑이냐, 빙신아. 니가 쑥맥이라면 발랜타인 데이 날 초콜릿 하나 못 받아봤겠네. 남녀합반이면 한 두개는 아무나 얻어먹는다. 근데 나는 지금껏 온통 남자 중학교에 남자 고등학교만 나오는 바람에 못 받았다. 이런 이런. 나는 남자 고등학교 나왔는데도 많이 받았어. 니가 받아봤냐. 난 한 번도 못 봤어. 받아봤어. 언제. 너랑 나랑 삼년 내내 줄곧 같은 반이었는데 내가 못 봤을 것 갔냐. 뻥을 칠려면 칠 사람한테 치시지. 이 짜식이 너야말로 뻥만 먹고 살았냐. 그래. 한 번씩 밖에 못 받아봤다. 너는 내가 뒷간 갔을때만 받았냐. 아니, 우린 항상 같이 다녔잖아. 실은 학교 끝나고 받았다. 하긴 우리 학교는 9시에 끝내줬으니 짬이 났겠다. 어떻게 짬 냈냐? 난 사귀는 애랑 같은 방향으로 다니거든. 아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맨 처음 살금살금 나갔냐? 아니 새벽에 만났어. 엉 근데 걔가 없어졌다. 화장실이라도 간 것 같다.

그 애 이름은 정아야. 정아? 성도 말해줘. 성은 몰라. 김정아, 김정, 이정아, 이정, 박정아, 박정, 최정아, 최정, 정정아, 정아, 정정, 송정아, 송정, 신정아, 신정, 유정아, 유정  . 성씨 많은 순서가 이게 아닌데. 나이는 나랑 비슷하고 처지도 나와 닮았다. 수능 문제집에 참고서를 들고 다니는데 나와는 달리 학습지가 아니라 교과서 중심으로 공부를 하는 듯싶다. 아마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부터 차근차근 배워나가는 모양이다. 가슴 뿐 아니라 엉덩이에도 디룩디룩 기름이 붙었는데 허리는 늘씬하게 잘 빠졌고 다리도 그랬다. 처음 여름에 봤을 때는 팔이 미끈한 것이 날씬하다. 후리후리한데 키 커보이는 힐이나 구두는 신고 다니지 않는다. 그녀는 나이키 운동화만 신는다. 내가 그녀 옆에 옆에 옆에 앉았을 때, 그러니까 그녀 왼쪽으로 세번째 칸에 앉았을 때 의자를 뒤로 빼고 그녀 다리를 살폈다. 청바지를 입어가지고 다리 곡선은 보이지 않았는데 나이스 정수기네. 약간 실망이다. 기왕 사려면 메이커를 사든가 숫제 상표 없는 걸 사든가 할 일이다.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구내 매점에서 점심, 저녁을 식권 사서 처리한다. 그녀는 가끔 친구들이랑 점심을 같이 먹는다. 나는 허구헌날 친구들에게 푹 싸여 음식을 먹는다. 너희는 내시, 나는 왕자, 그녀는 이국 공주. 그녀는 친구들이 토요일에만 일부러 찾아들온다. 요즘엔 자습을 하도 오래 해서 여자애들은 평일 오밤중엔 학교 밖에 나돌아다닐 엄두를 내지 못한다. 성격은 별로 밝은 것 같지는 않았다. 웃을 때는 항상 입을 가리고 웃는다. 뭔 상관? 운동화를 빼고는 옷이 전반적으로 괜찮은 것 같다. 부티나는 건 아니다. 그냥 깔끔해서 보기 좋다. 같이 먹는 친구들 가운데엔 크레디트를 들고 다니는 애들도 간간히 눈에 띈다. 그녀와 노래방, 호프, 롯데리아, 백화점에서 마주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애들 말을 들어보면 거의 독서실에서 살다시피 한다는 거였다. 아버지는 건장한 트럭 운전수인데, 트럭이나 그녀 아버지나 모두 덩치가 크고 잘 돌아간다, 새벽 1시에 그녀를 태우고 간다. 그러면 아침 6시에 그녀는 독서실에 와서 뒷산으로 조깅하러 나가곤 6시 40분에 돌아들온다. 의외로 뒷산에선 유명했는데 매일같이 나가서 그런 것 뿐이다. 누가 아는 채라도 하면 그녀는 고개만 까닥거린단다. 이 모든 건 조심 조심해서 알아낸 것들이다. 나도 조깅을 한다. 길거리에서 가방 매고 독서실 향해 열심히 뛰다닌다. 나는 생색내기 싫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나랴.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건 나도 알아. 그리고 내가 뭐 그 애를 좋아나 한데. 에이, 사실은 좋아하면서. 내 책 겉표지엔 여자들이 우글거린다. 맥 라이언, 샤넨 도허티, 산드라 블록, 알리사 말리노, 이승연, 김지호, 김남주, 이본, 김희선의 사진을 붙였는데 걔네들 깡그리 합친 것보다도 정아가 예뻐! 소설 포유강 사람속 에서 보니까 거기 나오는 30대 아저씨는 마스터베이션을 할때 정액을 화이트, 매직스 등속으로 받아낸다. 나는 화이트 광고를 신문에서 오려내어 마스터베이션을 하곤 그것을 오 마이 가디스 사진에 받는다. 하지만 생각나는 건 온통 정아 뿐이다. 정아는 지금 이어폰을 귀에 꼽고 잠들어 있다. 단발머리가 칸막이 위로 솟아올라 있지 않은 게 그 증거다. 서태지와 아이들, 김종서, 화이트, 주주클럽, 디제이 덕, 주주클럽, 양파, 녹색지대, 비틀즈, 마이클 잭슨, 휘트니 휴스턴, 셜링 디오 중 누굴까. 전혀 아닐지도 모르지. 재즈라도 되나? 성악이나 클래식이 아니었음 좋겠다. 레드 제플린, 스콜피온즈, 비틀즈. 그렇게 걔가 좋으면 내가 소개시켜 줄까. 아니, 싫어. 그녀를 떠올리며 딸딸이깟는데. 너도 같이 했잖아.

나는 일요일에는 독서실에 나가지 않는다. 일요일엔 보통 아이들이 독서실에 평소보다 더 붐빈다. 그런다고 안 나간다는 말은 아니다. 데니스 로드먼을 닮은 까만 농구공을 통통 튀기며 농구장을 다니던 것도 시들해져 나는 지금 책을 보고 있다. 사실은 아버지가 거기 지키고 있단 말이야. 와 니네 아버지 진짜 강적이다. 딴 친구들이 죄다 놀러들 간 것도 아닌데 방바닥에 진종일 뭉게고 있다. 내가 대학에 떨어지자 어버이의 태도는 변했다. 지방대라도 쓰지 그렇게 서울 소재 대학에 고집을 피워가지고. 전문대라도 보낼 것을 그랬어요. 전문대는 절대 안 돼. 또 떨어지면 취직이나 해. 아버지는 역정을 내더니 컴퓨터와 만화책들을 창고에다 처박었다. 야 그깟 일로 이렇게 많이 쇠주 퍼먹고 그러냐. 나는 게임기랑 만화책을 못쓰게 되어 버렸다. 게임기는 던져버리고 만화책은 찟어내버리고   하여튼 난리가 아니었다. 대학에 들어갔었다면 소형 카메라를 사달래서 정아 사진 하나 몰래 간직해두는 건데. 난 아직 어른이 아니다. 대학 졸업해도 똑같다. 민방위 끝나는 날까지 어른이 아니다. 대학 가는게 낫다. 아버지 말씀. 일본 봤지. 인생은 대학으로 선이 그어진다. 대학갈때까진 입시 지옥, 대학 나온 다음엔 경제 동물. 대학만이 일생의 유일한 낭만, 일상의 유일한 탈출구. 그 쓰레기통이 말이지. 독서실엔 안 가고 뭐하니. 어머니 말씀. 바른 생활이나 제갈길을 느끼고 싶다. 카메라에 가래침을 뱉든 사람이 버글버글한 비행기에 기관총을 쏘든 현실은 그대로. 나는 염세적 반자연주의자로 탈바꿈해간다. 영챔프, 세븐, 미야자와 리에, 더티 러브, 홀로코스트, 쇼킹 아시아. 나는 교보문고에 서서 책을 본다. 마계록, 요마록, 부부 생활을 즐겁게 하는 법. 주위의 무관심한 포식자의 눈이 나를 훑는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돈푼을 본다. 물물교환의 파괴자, 부당한 착취의 적법화, 승리한 이데올로기가 7만 4천원. 아끼고 아껴 간신히 모은 용돈. 난 몽땅 날리기로 작정했다. 부스에서 폰으로 프렌드를 콜한다. 서울랜드 야간 개장. 페스티발. 독수리요새, 범버카, 88열차, 버츄얼 리얼리티. 정아를 저 앞줄에서 본 듯하다. 밤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다. 나는 그 뒷모습을 눈조차 깜박거리지 않으려 조심하며 주시했다. 껄렁한 것들이 왁자지껄 우글거린다. 염통에 무리를 주기 위해 저 롤러코스트는 존재한다. 정아가 열차를 타면서 잠깐 나를 향했다. 틀림없어. 정아가 분명해. 친구들 중 하나가 교복을 입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장인 듯도 싶다. 그럼 정아는 정동고등학생? 그렇다면 퇴학이나 자퇴. 검정고시 준비. 그럼 날나리. 아니겠지. 그녀는 레일로 미끄러져 갔다. 제2의 성에서 본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는 레일 위로 달려와 레일을 이루는 쇠인 나를 할퀴고 갔다. 내 목이 온통 불구덩이다. 가슴이 턱 막히고 불에 달군 옛인두가 뱃속에 든 것 같다. 어떤 의사년이 수술하다 메스를 내 뱃속에 넣고 꿰맨거야, 누가 강제로? 프로메테우스는 사람을 향한 봉사탓에 독수리에게 간을 뜯어 먹혔다. 독수리. 대붕. 곤륜산을 옆에 끼고 북해를 넘어 태산을 발로 짓밟는 자에게 벼락을 맞아라. 그 시를 쓴 우리 조상의 이름은 기록에 없다. 헤어짐. 늦었구나. 나는 술냄새와 담배냄새 지우느라 늦었어, 이 짜증나는 연놈들아. 나는 얌전하게 내 방으로 돌아간다. 침대 위로 철푸덕. 환청에 가까운 자유스런 꿈들이, 꿈에 가까운 생각들이 나에게 스스로를 인큐부스라 착각한 채 덤벼든다. 너는 모기가 아니야. 자기 새끼를 위한다는 당위조차 없단 말이다. 너는 없어. 옴 마니 팟메 훔. 연꽃 속의 보석. 정아 몸 속 사리. 사리는 구슬 모양이고 실제론 딱딱하고 검지만 불교 전설 속에선 연분홍빛으로 부드럽다. 클리토리스. 능묘. 육봉. 오오라.


2.10년 후의 나 or 그

일어나십시오, 정광호씨. 제게 약속해두신 시간입니다. 그럼 음악을 틀어드리겠습니다. 숭어. 수우우웅어. 쓩어어어어!!! 나에게 여전히 클래식은 소음이다. 이 미친 오디오야. 맛 간 유토피아. 조용필 음악을 틀 것을 그랬나. 그래봤자다. 차트 좀 보여줘요. 볼수록 예뻐지네. 고마워요. 고마워요. 고마워요가 두 번이다. 세 번 되어버렸다. 하나는 간호사가 나한테. 또 하나는 내가. 마지막은 예시. 나는 멋진 여자들만 오면 매순간마다 흉부 진찰을 하고 싶어진다. 정아씨 들어오세요. 나는 보았다. 깔끔한 금발. 깊이있는 푸른 눈동자. 우주복을 닮은 검은 오토바이 재킷. 재킷 아래 길게 세로로 찟어진 배꼽. 아니다. 미즈 리는 분명 정아라 했다. 그녀는 언제나 최명숙, 김민주라는 식으로 말했었다. 그녀가 정씨라는 소리인가 아니면 러시아, 미국, 헝가리, 호주등지에서 온 여성이 공교롭게 정아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인가. 나는 천리안이 아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본다.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지면 도데체가 기억이 흐려 제대로 관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녀가 유창하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말한다. 저 소변 속에 피가 섞여요. 그것때문에 아픈건 아니에요. 열도 나고 허리가 자주 끊어질 듯이 아파요. 그녀가 얼굴을 찡그린다. 그녀가 살짝 턱을 내미는 바람에 그녀의 붉은 입술이 도드라져 보인다. 백치미가 풍겨온다. 이름이 정아 맞아요? 물론이죠. 저 혹시 아세요? 모르겠는데요. 나는 상반신을 뒤로 뺐다. 자 진찰합시다. 재킷을 벗어주세요. 정아는 스스럼없이 지퍼를 허리까지 내렸다. 노브라다. 젊은 여자는 병원에서 더 꺼리낌없다. 발그스름함이 배에서부터 귀밑까지 번져있다. 작고 오동통한 배 위로 크게 솟아오른 가슴이 보였다. 내가 왼쪽 가슴에 청진기를 가져다 대자 금속성 냉혈함에 풍만한 가슴이 바르르 출렁인다. 진홍빛 유두가 올라서는 것이 보인다. 아 저것을 쪽쪽 빨고 싶어라. 별 이상은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천진스럽게 웃더니 이상하리만큼 정겹게 말한다. 소변에 피가 섞여나와요. 좀 더 정밀하게 검사해봐야 할 것 같아. 미즈 리는 밖에 나가서 환자들한테 좀 기다리고 있으라 그래 봐요. 가뜩이나 손님이 없는데.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그녀가 물었다. 언어는 두 사람을 구분치 않았다. 패미니스트인가 보죠. 네. 결혼은 했데요? 그건 몰라요. 뢴트겐선 검사를 해야 합니다. 난 넌지시 그녀를 떠보았다. 정아가 점심을 먹다가 뢴트겐을 거론하는 걸 들었었다. 엑스 레이? 그녀는 안다. 그녀가 정아 본인일 가능성이 약간 높아졌다. 하긴 상식이야. 나의 욕망에 그녀가 접선을 보내줄려나 설혹 그녀가 본인이더라도. 초음파 진단실에 들어가보세요. 여러 군데서 닥치는대로 빚을 져가며 들여놓은 기계다. 가족. 친구. 은행. 사채업자. 그런데도 이자만 불어간다. 왜 이리 생활이 어렵나. 거기서는 옷 벗지 않아도 돼요. 내 시선은 잠시 그녀의 국부에 묶여 있었다. 금색 거웃. 그녀가 아니다. 아무리 유창한 우리말을 구사한다지만 트기거나 어렸을 때부터 우리 나라에 와서 산 외국계 우리나라 사람 혹은 외국인이다. 저토록 자연스럽게 우리말을 하는 여자가 정아가 아니라니. 상당히 오래 살아 말씨가 밴 지식인일지도 모를 일이다. 광호씨. 나는 순간 뒤돌아보았다. 그녀의 뇌쇄미는 모든 것을 초극했다. 원초적 본능. 정아가 맞아요. 우리 어릴 적에 초코파이 선전에 나왔던 정자가 아니라 성씨 정자에 아이들을 뜻하는 아자를 써요. 학원 다닐 때 저를 좋아했죠. 네  . 그러면 절 받아주세요.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왜 지금은 저를 받아주려하지 않는 거예요? 그때처럼 저를 받아줄 준비를 해줘요. 제가 보기 흉해요? 아님 헤퍼보여요? 아니에요. 당신은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네, 헤스티아, 모나 리자, 산타 루치아, 관세음보살, 세헤라자데, 칼리, 락쉬미, 쥴리엣, 샤롯데, 성춘향, 콩쥐. 나무 정아. 옴 마니 팟메 훔. 나의 아니디아. 나무 대자모 대우주. 일상을 뛰어넘는 최고의 가치. 나는 정아 속에 있다. 따스한 타액이 교환되었다. 끈적하게 뱨여나오는 땀이 헤파이스토스의 그물이었으면. 크로노스의 모래 시계. 가니메데스여 이 세상 모든 시간의 강물을 여기에 쏟아부어라. 내가 사정했을 때 정아는 내 밑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나와 정아 사이에 떠있는 섬에 우리는 헤엄쳐간다. 성부, 성자, 성령. 브라흐마, 비시누, 시바. 환인, 환웅, 환검. 나와 정아와 섬. 정아가 숨가쁘게 말한다. 신은 우리 사이에 있어요. 어떤 영화에서 본 거예요. 자 이제 치료해드릴께요. 정말 애를 쓸 거예요. 정아씨가 증상을 말 한 바에 따르면 신장결석인 듯싶군요. 이곳에선 아쉽게도 방사선 치료가 되지 않아요. 수술하는 것은 가능하다. 나는 가이아의 살을 파고들 자신이 없다. 종합병원으로 가 보세요. 가까워요. 가장 가까운 178번 버스 정류장으로 가시면 됩니다. 연락처를 아르켜주세요. 정아가 수줍게 혀를 빼꼼이 내민다. 오피스텔 주소를 가르쳐 드리죠. 아참 저는 염색 좀 했어요. 그리고  보이죠? 콘텍트 렌즈. 아름다운 암갈색 눈에 물기가 어려있다. 정아가 몇초 사이 영겁 동안 진료실 문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지나치게 유럽을 추구하는 듯하다. 재정 상황도 압박받고 있는데 손님들이 다 갔으면 어쩌나.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야. 벌써 4시 28분이야. 미즈 리한테 잔소리 듣겠군. 다음 손님 들어오라 그러세요.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요. 다시보니 바늘 시계는 3시 28분을 가르키고 있다. 환자랑 그런 짓 벌이면 병원 운영에 안 좋아요. 이름은 오피스텔이지만 그것은 직장과 엄연히 분리되어 있다. 개인 생활과 자유를 보장하는 공간에서 나는 샤워 줄기를 맞으려다 욕탕에서 나왔다. 샤워기에서 물이 한 방울씩 아롱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욕탕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내 몸 전체에 깊숙히 스민 정아의 체취. 전화벨이 귀족적 졸음에 빠진 이를 놀라게 하다. 건망증 때문에 8시 이후엔 30분 간격으로 자동으로 자동 응답 테잎을 돌리게 해놓았다. 눌러버리면 명령은 해제된다. 박살나는 무드. 선배왈. 개인 병원 하기 힘들지. 마침 종합 병원에 자리가 하나 났다. 하고 싶으면 우리가 늘상 만나던 곳에서 만나기로 하자. 이미 추천해뒀다. 호의를 거절하지 말아라. 오줌을 굳은 미소지어가며 참아야하는 종합 병원을 가라고. 어떻게 10년 전과 변한 게 없을까. 차임벨 소리. 에밀레종 소리가 난다. 정광호입니다. 누구세요. 제대로 찾아왔네요. 나는 알몸인 채 그대로 문을 열었다. 정아였다. 꺼져!라고 말하고 싶다. 그녀 옆얼굴이 엄정화가 연기하는 슬픈 얼굴과 겹쳐 보인다. 정아는 문을 잠그었다. 사타구니에 뜨거운 입술이 느껴졌다. 제발 그만해요. 저는 오줌이 마려워요. 그녀는 잇달아 자극을. 그녀는 오리온을 먹는다. 프렌치 키스. 나는 아껴둔 샴페인을 콸콸 따르고 촛불을 켰다. 표절. 원샷. 오예! 정아가 발그스름해졌다. 럼과 샴페인같은 섹스를 했다. 숨 좀 쉽시다. 내가 먼저 말했다. 온통 빨개진 그녀. 불경은 부처님의 말씀, 종소리는 부처님의 마음. 석불사의 여래불 모델은 신라 여인. 우리는 나란히 누웠다. 저는 사랑의 완성과 도움을 바라며 왔어요. 뭐든지 도와드리겠어요. 젓먹던 힘까지 내겠어요. 몇년 전에 부산에서 러시아 남자를 만났어요. 미하일로프라고. 백인이고 금발인데 키작은 매직 존슨을 닮았죠. 장래를 약속했어요. 집안이 반대하자 러시아 여자랑 짝을 맞춰 러시아로 달아나더군요. 제 신세가 참 불쌍하데요. 끝났는데도 집안에선 계속 저를 괴롭히는 거예요. 어느 사이 이웃들한테도 소문이 쫙 퍼져있데요. 저는 정말 괴로웠어요. 제 마음은 변치않았어요. 당신이 그때 당신을 주시하던 한 소년의 눈매를 보고 나에게 왔다는 믿음이 있어요. 내 허벅지 사이에 정아의 따뜻한 침이 고였다. 그녀의 빛나는 실체는 시나브로 나를 덮는다. 피곤해요. 정아는 아쉬워한다. 그냥 이대로 있어요. 서로의 속에. 그냥 이대로 영원히  . 그녀는 지금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다. 네 속에서 나갈께. 난 너를 돕기 싫어.


3.익사

컴퓨터 게임 종합 병원 을 텍스트로 삼은 멍청한 상상은 끝났다. 내가 무슨 수로 의예과에 들어갈 수가 있겠는가. 성적도 안 되지만 난 문과를 나왔다. 수학 투, 과학 모른다. 사랑은 추악한 리비도에 불과하다. 정아? 정이라고? 나와 정아 사이에 정은 없다. 불신하고 싶다. 레테. 상상에서조차 현실은 쓰레기통에 구겨지지 않는다. 절대적인 진, 절대적인 허무. 존재치않는 신에게서 전지와 전애를 뽑아내면 참된 진리 엑기스가 나온다. 영사기를 돌리며 클클거리는 진리여 뒈져라. 너 그렘린아. 우주여 사물 변화를 멈춰다오. 나는 내리고 싶다. 내리면 넌 더 이상 너이기를 포기해야 한다. 너는 내릴 수 없다. 어이. 담임 선생님이 부르셔. 밤 11시까지하는 자습을 12시까지, 일요일에도 야간 자습시킨 담임. 아으. 죽은 시인의 사회. 패닉. 봉사할 수 있는 길이 열렸어. 졸업한 우리가 말이지? 봉사하면 뭐한데냐. 종생부에 추가될 것도 아닌데. 담임한테 수가 있겠지. 그러니 부르겠지. 밑져야 본전이기에 나와 친구 세 명은 모교를 오래간만에 들리기로 했다, 내일. 오 늘이여. 오늘은 5월 18일이다. 한 친구가 다가와 말한다. 삥 뜯으러 나가자. 우리가 깡패냐. 우리같은 범생을 겁내겠냐. 졸업했는데 뭔 놈의 범생이냐. 그러니까 중무장을 해야 되는 거야. 난 과도있다. 넌 뭐 가지고 갈래? 나는 집에 가서 망치와 체인을 가지고 왔다. 검은 가죽 점퍼를 입으니 야 그럴 듯해 보이냐. 인상이나 살짝 써라. 오 그래 이거야. 너는 키도 크고 삭막하게 생겼으니 딱 어울린다. 아예 이길로 나가라. 그래서 내가 널 끌어들인거다. 친구따라 강남 가다. 나는 원인 제공자가 아니라고 자위하며 딴 동네로 가서 으쓱한 곳에 웅크렸다. 초등학교 4학년쯤으로 보이는 꼬마애를 하나 붙잡아서 앞뒤에 섰다. 친구가 먼저 목소리 깔고 말한다. 돈 좀 빌려 줘. 없는데요. 가. 다음엔 내가 했다. 약간 더 키는 컷지만 여자애였다. 날은 어두웠다. 뒤져봤다. 썼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돌아온다. 아침에 제대로 깰 턱이 없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 졸린 눈으로 학교에 갔다. 너 아픈 것 같구나 힘든 일인데 쉬어도 좋다. 할겁니다. 나는 어제 본 여자애처럼 우겼다. 정신 박약아들 모아놓은 학교에서 봉사해야된다. 며칠해야 하니 짬 좀 내봐라. 이건 불법이다. 아니. 너희가 봉사하는 거 말야. 이걸 하려면 이미 봉인된 종생부를 꺼내서 고쳐야 한다. 그쪽에 친구가 있어서 이야기를 해두었다. 그곳은 산동네에 있었다. 입지 선정때 남들 등살에 몰리고 몰려 간 마지막 절벽. 거기 가면 좋겠다. 왜? 야 너희 우월감 느끼겠다. 너만 느끼는 거야, 병신아. 나만이 중요하다는데서 오는 미망을 벗어 던지고 싶다. 그들에게 몰입해보는 거다. 나이를 알 수 없는 한 무리의 여학생들도 와있다. 그럴 줄 알았어. 여긴 불법임을 알면서 그것을 피해 봉사증을 작성해주는 곳이야. 조심하자. 무지하게 부려먹을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 여학생들 가운데 정아가 보인다. 제 몸 하나 추스리지 못하는 아이들을 도우며 스스로를 잊으려 한다. 내가 언제. 그럴 수 없다. 몸이 연약한 이들 - 아기, 노인, 장애자 - 를 보며 연민하는 건 좋으나 돌보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귀찮으니까. 그리고 이곳엔 그녀가 있다. 우리들은 억지로 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홀로 달라보였다. 나의 착각인지 몰라도 그녀는 진실을 담는 그릇이다. 매점에서처럼 수다는 별로 떨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눈과 그에 걸맞는 활달한 움직임. 정성스런 손동작들. 넌 참 잘하는구나라는 자원 봉사자들의 일방적 칭찬. 정아는 착실했다. 아니 그 이상이다. 엘프. 주홍 글씨. 나는 그녀를 힐끔 힐끔 곁눈질하는 것만으로 삶의 기쁨이라는 것을 느꼈다. 자그마하지만 예쁜 암갈색눈에 난 끝없는 물기. 넥타르. 소마. 감로. 곤륜산 서왕모. 항아. 베아트리체. 쟤 깔있는 애야. 나는 내가 돌보고 있는 지진아에게 눈을 고정시켰다. 왜 울어. 슬퍼? 응 슬퍼. 그럼 울어. 로베르또. 이왕 나왔는데 호프집이나 가자. 노래방은 2차. 여자애들 한 떨거지와 합방했다가 피바가지만 쓴 우리는 케이 오 에프. 털어봐야 먼지 부스러기밖에 없는 호주머니에 손을 질러넣고 먼거리를 걸어서 돌아간다. 차비는 남겼어야 했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끊임없는 두통, 치통, 생리통. 번쩍이는 고양이 눈이 내 손목에서 번쩍인다. 노란 불빛이 숫자판 옆에 나타난다. 5월 19일 02:40. 베르단디. 육체가 흐느적거릴때에만 정신이 니켈처럼 맑다. 어지러워. 독서실 옥상. 누가 뛰어내리려 한다. 티브이에서 같은 상황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똑같이 행동키로 한다. 그러지 마! 정아다. 나는 놀란다. 본 바대로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같이 마신다. 왜 뛰어내리려 했어? 아직 아름다울 때 아름다운 곳에서 죽고 싶었어. 여기가 아름다워? 별밭같지 않니. 독서실이 있는 건물을 방사형으로 둘러싼 간판들의 불빛은 정말 땅 위 미리내같다. 우리 머리 위로는 비스듬히 약간 이지러진 달이 본 적 없는 반딧불을 기억나게 한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밤은 아래위 태양으로 가득하다. 시멘트 바닥 위, 이슬에 젓은 두 알몸은 달빛 아래서 반짝거린다. 우리는 누운 채 서로 마주보았다. 나이팅게일에 관한 정아 이야기. 어떤 나이팅게일은 새장에 갇히면 노래도 않고 먹지도 않고 시름 시름 앓다 죽는다. 다음날 정아는 독서실에 있지 않았다. 병원에 갔데나. 정아 친구에게 물어도 아는 이가 없다. 잠깐 바람 맞으러 나가다. 아카디아가 나를 박살낸다. 이틀동안 병원에 누워있다가 목발 짚고 붕대감고 독서실에 귀가. 나는 그녀를 기다리겠다. 사물 변화가 내 정신을 앗아갈 그때까지.

숫제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오가는 시간조차 아깝다. 고정석 아래서 침낭을 꺼내어 지퍼를 열고 들어가 태아마냥 번데기마냥 웅크려 눕는다. 정아도 꽤 늦게 가는 편이다. 아니다. 나와 같이 독서실에서 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동침. 한 번 시계를 본다. 지금 5월 19일 01:30. 배꼽이 보인다. 누구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거대한 것이다. 연꽃이 된다. 십자가가 연꽃 위에 선다. 거기에 누군가 메달려 있다. 손목과 발목에 못을 박혔다. 정아다. 그녀 얼굴에 고통이 가득. 몸을 비트는 그녀. 구해줘야 한다. 구할 수 없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가위 눌렸다. 압박감. 나는 이것이 꿈임을 안다. 눈이 떠진 모양으로 영상이 밝아졌다. 눈 모습으로 시야가 바뀌고 윤곽 바깥은 여전히 어둡다. 정아 샅 클로즈업. 분홍빛 하늘에 걸린 새빨간 해. 옴 마니 팟메 훔. 깨어나지질 않는다.


4.종말

요요요요, 나 떨어져, 떨어져, 요요요요, 빠르도록, 느리도록, 감속하며, 가속하며, 어딘지 몰라, 유허(唯虛)로, 춥도록, 덥도록, 즐겁게도, 절망적이게, 떨어져, 요요요요, 살결이 느낄 수 없는 곳으로.

과거엔 상징, 현재는 기호, 미래엔 숫자. 인간은 죽었다고 누가 말했더라. 대학 입학 시험날엔 언제나 날씨가 나빴다 한다. 오늘 날씨가 며칠 뒤까지 이어진다면야 그렇게 되겠지. 나는 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보러 간다. 잿빛 하늘 아래 냉엄한 바람이 코트 입은 나를 날려버릴 듯 몰아친다. 버스 운전사는 좀 열받는 일이 생겼는지 대형차 통과 불가인 지하도로 내달린다. 그 지하도는 직선 통행이 금지되어 있지만 버스는 교차로로 향할 수가 없다. 버스는 도로 교통법을 거부하고 좀더 빨리 목적지에 이르는 것을 추구한다. 옴 마니 팟메 훔. 무사히 살아남길 온몸으로 기도하다. 무사 통과. 옆에서 트레일러라도 나와 버스를 받아버렸다면 좋았겠다. 짦은 고통 속에 삶을 망각할 수만 있다면. 공부할 때가 제일 나았다. 화이트 말씀. 저 감기 몸살때문인데 조퇴 좀 시켜주세요. 교문 밖에 이르자 뜀박질이 비롯된다. 내 주민 등록 번호는 뒷 부분이 1654444다. 수험 번호 4444번. 합격하면 중학교때 버릇대로 집에선 학교 걱정, 학교에선 집 걱정이나 하자. 오늘이 저물때까지 눈은 내리지 않았다. 잘빠진 스포츠차 한 대 내 등뒤를 지나친다. 모든 이미지가 내 등뒤로 사라져간다. 나는 없다.

@1996년에 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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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쓴 글이라 부끄럽지만 올려봅니다.

고2 때 쓴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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