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십일금무(十一錦舞)

2010.02.17 19:1402.17

十一錦舞                              


제 1장



1

“발끝을 세워야지.”
뒤를 돌아보니 화령(花翎)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柔利)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아.”
그녀는 화령이 지적한 대로 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를 돌아보자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유리…… 너는 말이다,”
속으로 말을 정리하려는 듯 화령은 자신의 관자놀이 근처를 매만졌다.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 중의 하나야. 그건 분명해. 가의(嘉懿)도 린(潾)도 훌륭하지만, 너를 따라오진 못해. 이건 미하(美夏)도 인정한 바야.”
건조한 목소리로 칭찬을 한 후 화령은 본격적으로 그녀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 멍하니 있는 버릇 좀 어떻게 안 되겠니? 대체 춤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데?”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노려보는 화령의 시선을 유리는 어색하게 피했다. 이번 수업만 벌써 세 번째다. 사실 아까 박자를 맞추는 박(拍)을 그녀에게 던지지 않은 것만 해도 많이 참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글쎄요…… 예를 들면,”
“됐다. 별로 듣고 싶지 않아.”    
화령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유리는 말을 하려다 멈췄다.
“내일 수업까지 검무 완성해서 와. 그 후에 매화 나간다.”
“네.”
유리는 얌전히 대답하면서 연습실 구석에 놓아둔 가방을 들어올렸다. 옷가지가 든 가방은 묵직했다. 유리의 머릿속은 이미 다른 생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가 일주일에 한 번 화령에게 개인 교습을 받게 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 동안 월무를 모두 배우고 이제 검무에 들어간 참이었다. 진도는 착실히 나가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왠지 공허했다. 과연 이게 내 길인가, 싶기도 했다. 유리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 주 후에는 학원의 정기 발표회가 있었다. 그 때문에 원생들은 요즘 정신없이 바빴다. 이번에는 각자의 특기 외에 다른 춤을 추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유리는 무대에서 출 춤을 미리 정해놓았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으나 다른 곳에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간밤에 꾼 꿈에 이상한 물건이 나왔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눈처럼 하얀 새가 물어다준 피처럼 붉은 상자. 그 상자를 열자 여섯 개의 면을 가진 작은 상자가 나왔다. 그 상자를 열자 또 다른 상자가 나왔다. 그렇게 몇 번이나 상자를 열고, 그 때마다 계속 다른 상자가 나왔다. 유리는 이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 * *

금관 학원. 원생 수가 200명 남짓 되는 작은 학원으로 경국(鏡國) 내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은 바로 최고의 무희를 길러내는 곳이었다. 학원에 들어가기는 매우 어려워서 입학을 시도했다가 탈락하는 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시생은 매년 늘어났다.
원생들 중에서 뛰어난 기량을 가진 자들은 어전에서 춤을 추는 궁중 무희로 발탁되었다. 궁중 무희가 되는 것은 최고의 영예여서 경쟁이 무척 치열했지만 매년 뽑히는 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금관에서 가르치는 춤은 4가지가 있었다. 월무(月舞), 화무(花舞), 검무(劍舞), 그리고 금무(錦舞).
월무는 다시 넷으로 나누어졌다. 달의 춤, 거울의 춤, 물의 춤, 비의 춤. 주가 되는 달의 춤을 세 개의 다른 해석으로 춘 것이 나머지 춤들이었다. 월무는 슬프고 처연했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눈물이 날 정도로 애절하게 만들어야 제대로 추었다는 평을 들었다.
화무는 반대로 부드럽고 화사했다. 이름 그대로 꽃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아름다운 동작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원생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춤이기도 했다. 벚꽃, 작약, 모란, 매화, 금낭화의 다섯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각각의 춤들은 추는 방식이 모두 달랐다. 벚꽃은 요염함, 작약은 고결, 모란은 매혹, 매화는 아리따움, 금낭화는 수줍음. 이는 여성이 지닌 아름다움의 여러 가지 측면을 꽃으로 표현한 것이라 한다.
검무는 이와 반대로 남성적인 춤이었다. 절도 있고 날카로운 동작들이 춤과 무예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다른 춤들에서 볼 수 없는 서늘한 우아함이 그 속에 배어있었다.  
그리고 금무. 무척 어렵고, 그러면서도 매우 아름다운 춤. 열한개의 비단의 춤이라 하여 십일금무라고도 불렸다. 어전에서 추어지는 춤으로 난이도가 상당했다.
학원의 반들은 상급반 4반, 중급반 5반, 하급반 6반로 이루어졌다. 보통 한 반의 인원은 10명에서 15명 사이였으나 유리가 속한 서 1관 1반은 예외적으로 3명밖에 없었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학생들을 따로 모았기 때문이다. 즉 실력이 뛰어난 학생들만을 위한, 이른바 특별반이었다.

* * *

밖으로 나오자 내담 벽에 햇볕이 내리 쬐고 있었다. 2월의 오후는 따스하면서도 아직 완전히 풀어지지 않았다. 유리는 옷깃의 앞섶을 다시 여몄다. 그 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지금 제정신이니?”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바깥의 후원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잠시 뒤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내가 너 이쪽에 눈에 띄지 말라 그랬지? 선배 말을 대놓고 무시하는 거니 지금?”
“저, 기숙사로 가려면 이 길 밖에…….”
순간 찢어지는 마찰음이 들렸다. 손으로 뺨을 때리는 소리였다. 유리는 얼른 후원으로 통하는 문을 찾았다.
“분수에 맞지도 않은 반에 들어가서 우쭐해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네 주제를 알아. 평민 주제에, 허드렛일이나 시켜야 마땅한 것을 연습생이라고 받아줬으면 알아서 기란 말이야!”  
쏘아붙이는 목소리는 계속해서 고조되어 있었다. 반면에 다른 목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리는 드디어 문을 찾아 안으로 들어가 외쳤다.
“린!”
고양이같이 치켜 올라간 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꽤 앙칼지게 보일 수 있는 인상이었음에도, 눈에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물이 이를 상당 부분 완화시켰다. 유리는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네. 우리 오늘 같이 연습하기로 했었잖아.”
반가운 목소리로 말한 후 유리는 맞은편에 서 있는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또렷한 인상의 여자아이였다.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은 분노가 날카로운 눈동자에 담겨있었다.
“동 1관의 아희 맞지? 미안, 내가 얘랑 약속이 있어서. 먼저 데려갈게.”  
유리가 생긋 웃으며 말하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리는 재빨리 린을 데리고 후원 밖으로 나왔다.
“왜 쟤랑 자꾸 상대해. 그냥 마주치지 않게 피해 다니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가볍게 타박했다. 린은 울상이 된 얼굴로 아무 말도 못했다. 둘은 남관의 기숙사에 도착했다.
“어? 무슨 일이야?”
방 안에 들어서자 가의가 곧바로 물었다. 방금 연습을 마치고 왔는지 얼굴에는 발그레한 홍조를 띠고 있었다.
“동관 애들이랑 부딪쳤어.”
아래로 살짝 쳐진 가의의 눈매가 야무지게 형태를 잡았다. 고위 귀족 가문 출신인 그녀는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가볍게 제압할 수 있었다.
“해도 해도 너무하네. 자기들이 무슨 상관이라고 남의 일에 참견이래?”
“그만해. 그냥 내버려두면 시들해지겠지.”
이대로 두면 당장이라도 찾아가서 싸움을 걸 기세였기에 유리는 얼른 가의를 달랬다.  
린은 그동안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 모든 소요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그녀는 뼈저리게 자각하고 있었다.
원래 학원에서는 귀족 출신밖에 받지 않았다. 수업료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들 뿐만 아니라 애초에 춤을 추는 것은 평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고귀한 일이라 여겼다. 그런 학원에서 평민을 받아들인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녀가 다른 원생들의 표적이 된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학원에 응시하기 위해 온 첫날, 그 날은 마침 분반 시험이 이루어지던 날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신입생으로 우선 하급반에 들어갔어야 했다. 그러나 마침 그 날 상급반에 응시하려던 학생이 오지 않아 자리가 비었고 그 자리를 대신 그녀가 채우게 되었다. 이 일은 한동안 학원 내에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평민이 학원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오자마자 상급반에 들어갔다. 실력이 출중하고 안 하고를 떠나 이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로 여겨졌다. 전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귀족 가문의 영애인 다른 원생들은 입을 모아 그녀를 내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당장이라도 매를 맞고 학원 밖으로 쫓겨날 기세였으나 린이 지금껏 버틸 수 있었던 건 유리와 가의 덕분이었다.  
유유리와 서가의. 이 둘은 말 그대로 천재들이었다. 그야말로 비교할 곳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서로 달랐다. 유리가 절제하는 춤이라면 가의는 드러내는 춤이었다. 유리가 감추어진 그믐달이라면 가의는 요요히 빛나는 보름달이었다.
그 둘의 출신 또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가의는 경국 내에서 알아주는 정치력을 지닌 귀족 가문의 외동딸이었다. 무용뿐만 아니라 무예와 학문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본인이 원하여 이 길을 선택했다고 했다.
유리는 어느 귀족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있었다. 부친이 누구인지에 관해 무성한 추측이 떠돌았다. 그로부터 엄청난 후원을 받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그녀의 어머니는 전설적인 무희 월영이었다. 두 사람 모두 여러 가지로 특별한 혈통이었다.
원내에서 그 둘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그 사이에 갑자기 끼어든 보잘 것 없는 평민 출신의 계집이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유리와 가의가 자기들보다 나이가 어린 린을 동생처럼 아꼈기에 더욱 시샘을 샀다. 유리와 가의에 비해 그녀는 2살 어렸다. 그 사실도 그녀를 주눅 들게 하는 원인 중 하나였다. 남들 같으면 오히려 자랑스러워 할만도 했으나 린은 선배들에게 죄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아직도 씩씩거리고 있는 가의를 어느 정도 진정시킨 후 유리는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앉아있었다. 린도 실내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 유리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린아, 작약 줄까?”
둘은 멈칫하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번에 거울도 하니까. 나눠 줄 수 있는데.”
유리는 린을 보며 말했다. 시선으로 수락할 것이냐고 묻고 있었다.
“선배…… 제가 어떻게 감히…….”
너무 놀라 제대로 말도 끝맺지 못하고 린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문제 될 것 없어. 어차피 한 반에 작품 세 개씩 하는 거였으니까, 나랑 너랑, 가의랑 각각 한 작품씩 하면 되는 거고.”
그건 사실이었다. 아직 린의 무대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번에는 제외되었지만 본인이 하겠다면 충분히 허락될 수 있었다.
“그래도…….”
린은 망설였다. 혹시라도 폐를 끼치면 어떻게 하나. 혹시라도, 혹시라도 무대에서 실수라도 하면…….
“뭘 그리 오래 생각해? 그냥 하면 되지!”
가의가 옆에서 소리쳤다. 성격이 급하고 생각한 것을 바로바로 말하는 그녀는 고민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 하겠어요.”
린은 엉겁결에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다. 아니, 가의의 기세에 어느 정도 눌린 것도 있었지만 완전한 타의는 아니었다. 그녀 자신 속에서 그녀도 예상치 못한 호승심이 이는 것을 느끼고 린은 깜짝 놀랐다.
“그래, 그럼 잘 해보자.”
유리가 생긋 웃었다.  


2

텅 빈 복도는 큰 동작을 연습하기에 딱 좋았다. 유리는 복도 끝에서부터 뛰어 오른 다음 소리 없이 착지했다. 날기를 연습 중이었다.
“여전히 가볍구나.”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유리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상냥하게 웃고 있는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미하 선생님!”
서 1관 1반의 담당인 려미하였다. 자상하고 이해심 깊은 성품으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선생님이었다. 젊은 나이였지만 학원 내에선 원장인 화령 다음으로 춤 솜씨가 뛰어났다.
“벌써 연습하러 온 거니?”
“잠이 일찍 깨서요.”
“들어가자. 문 열어줄게.”
미하가 열쇠로 연습실 문을 열며 말했다.
“오늘은 발표회 준비 때문에 동 1관 1반과 합동 수업을 하기로 했단다.”
“동 1관이요?”
미하의 말에 가방 안에서 무명천을 꺼내던 유리가 순간 멈칫했다. 어제 있었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 시간이 얼마 남았으니까 정식 무대랑 똑같이 할 거야. 공단화 가지고 있니?”
유리의 반응을 눈치 채지 못한 미하가 밝은 어조로 말했다. 평상시 연습할 때와 무대에 설 때의 신은 서로 달랐다. 연습할 때는 맨발에 흰색 무명천을 감고 연습했고 무대에 설 때는 분홍색 공단화를 신었다. 공단화는 무척 섬세하고 아름다웠지만 손으로 직접 만들어 가격이 비싼 게 흠이었다.
“네, 가지고 있어요.”
“그래, 잘됐다. 아, 가의랑 린도 왔구나.”
때마침 린과 가의가 들어섰고 미하는 유리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다시 전했다. 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기네들 연습실 놔두고 왜 여기에 와요? 그쪽이 훨씬 넓으면서.”
가의가 투덜거렸다. 연습실은 동관과 서관으로 나뉘어 각각 3개의 관이 있었는데 반이 위일수록 숫자가 앞인 연습실을 배정받았다. 동 1관에 소속된 원생들과 서 1관에 소속된 원생들 모두 상급반 출신이었지만 동관에서는 화무를 주로 배우고 서관에서는 그 외의 춤을 배운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가의의 투정에 미하는 웃으며 대답했다.
“우린 세 명밖에 안 되잖니.”
15분 정도 지나 동 1관 1반 학생들이 도착했다. 서로 쉼 없이 재잘대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유리는 마치 새가 지저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 다들 모였지? 이번이 진짜 무대라고 생각하고 연습하자. 각자 가볍게 몸 풀고, 준비되면 한명씩 앞으로 나오렴.”  
유리는 보관함으로 향했다. 원생들은 평소에 연습실 보관함에 공단화를 늘 넣어두고 있었다. 유리는 공단화를 꺼내 신은 다음 발목 부분에 달려있는 긴 띠 모양의 천을 묶어 발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바닥을 딛고 서는 느낌이 맨발일 때랑은 확실히 달랐다. 천을 여러 겹 덧댄 다음 아교로 굳혀서 밑창이 매우 딱딱했다.
“선생님―. 공단화, 없는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요?”
길게 잡아끄는 듯한 독특한 어조로 누군가 말했다. 화무 중 벚꽃의 춤이 특기인 원생이었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여성스러운 외모였지만 입가에 띈 미소는 어딘가 잔혹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 누가 안 가져왔니?”
“글세, 아마 돈이 없어서 못 산 것 아닐까 싶어요.”
이번에는 다른 원생이 말했고 동관 학생들 사이에서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유리와 가의의 눈이 순간 마주쳤다.
“저, 분명 넣어놨었는데…….”
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이라도 눈에서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그래? 괜찮아. 린, 물품실에 가면 여유분이 있을 테니까 가져오렴.”
미하가 상냥하게 말했다. 린은 고개를 푹 숙이고 복도 밖으로 나갔다. 아까 맨 처음 말을 꺼낸 아이가 옆에 있는 친구에게 뭐라고 귓속말로 소곤대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두 사람 모두 킥킥대며 웃기 시작했다.
“신예영이야. 당의관의 무남독녀. 분명히 무슨 장난을 쳤군.”
가의가 옆에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가문이 워낙 넓은 인맥을 보유한 탓인지 가의는 원내의 웬만한 영애들의 이름과 출신 가문, 부친의 품계를 모두 꿰뚫고 있었다.
원생들 간의 괴롭힘이 대놓고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주로 물건을 숨기거나 뒤에서 험담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 괴롭힘은 집요하고 음습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대부분 견디지 못하고 학원을 나갔다.
“차라리, 어제 같은 경우가 나을지도.”
유리가 중얼거렸다.
“누구, 천아희? 걔는 무가 출신이니까 이런 건 천성적으로 안 맞을 걸.”
춤을 추기 위해 앞으로 나가면서 유리는 예영을 스쳐지나갔다. 가슴에 달려있는 산호 노리개가 보였다. 한 개에 일반 가정이 일 년간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비싼 패물이었다.


3

새벽의 연습실은 추웠다. 린은 바닥에서 전해지는 냉기에 흠칫 놀라 발을 떼었다.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지금 연습실에 홀로 있었다. 발표회에 나가기로 결심한 이상 뒤처진 진도를 서둘러 따라잡아야 했다.  
우선 10가지 기본 동작을 행했다. 서기, 뻗기, 걷기, 빠르게 걷기, 제자리에서 돌기, 걸으면서 돌기, 제자리에서 날기, 움직이면서 날기, 숙이기, 앉기. 이는 모든 춤의 기본이 되는 동작들로 학원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들이었다.
원장인 화령은 언제나 기본을 가장 중시했다. 첫 수업 때 그녀는 무용이란 ‘움직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며, 그렇기에 춤출 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움직임에 신경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게가 느껴지면 안 된다, 발이 땅에 오래 닿아있으면 안 된다, 움직일 때 소리를 내지 마라. 동작에 대한 그녀의 기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격했다. 원생들은 그녀 앞에서는 함부로 지나다니지도 못할 정도였다.
숨을 가라앉힌 후 본격적으로 작약의 춤에 들어갔다.
화무는 월무와 확실히 달랐다. 월무의 몸짓이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와 비슷하다면 화무의 몸짓은 나비에 가까웠다. 그야말로 물과 공기처럼 대조적이라 감각을 익히기가 쉽지 않았다.
린의 기억은 과거로 흘러갔다.
월영. 그녀가 한번 팔을 움직이면 새들이 날갯짓을 멈추고 한번 걸으면 사슴이 머리를 숙였다고 한다. 그녀는 경국 최고의 무희로 바로 유리의 어머니였다.
린이 그녀를 본 것은 수년 전이었다. 우연히 일을 도우러 간 어느 귀족 집안의 연회실에서 월영이 춤을 추고 있었다. 아마 청을 받아 갔을 것이다. 그 때 그녀가 추고 있던 것이 월무였다.  
문득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가슴 속에 바늘에 찔린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찾아왔다.
사라진 공단화는 후에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다. 린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선배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찾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평생 남의 집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엄마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숙부님의 호의로 이렇게 학원에 올 수 있게 되었을 때는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했다. 그러니 이런 일로 힘들어 해서는 안 된다. 춤을 배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과한 것이다.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 더욱 연습에 몰두했다.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4

발표회는 하급생, 상급생, 중급생의 순서로 이루어졌다. 하급생이 먼저 군무를 춘 후 상급생이 독무를 추고, 마지막으로 중급반의 학생들이 군무와 독무를 함께 추었다.
무대 뒤편에는 검은 막이 쳐져있고 그 뒤로 금을 연주하는 사람이 있었다. 관객들의 시선을 오직 무희에게 맞추기 위해 연주자는 막으로 가리는 것이 원칙이었다.
유리는 대기실에서 머리를 묶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가의와 함께 서로의 머리를 묶어주었겠지만 가의는 상급반 중에서 제일 첫 번째 순서라 이미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유리는 서둘러 머리를 묶고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 객석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무대 옆에 나있는 숨겨진 통로에 가면 무대를 일부분이나마 볼 수 있었다.  
가의는 벌써 무대 위에 서있었다. 금을 타는 소리가 막 뒤에서 흘러나왔다. 모란의 춤이었다.
가의는 무대를 넓게 썼다. 넓은 도약으로 무대를 가로지르며 공간을 비약적으로 지배했다. 동작 하나하나가 화려하면서 압도적이었다.
‘멋지다!’
“저…… 혹시, 유리 선배?”
유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자그마한 소녀가 그곳에 서있었다.
“누구지?”
“저, 저는 소하예요. 민소하. 동 3관 2반이요.”
어딘가 낯이 익은 아이였다. 일자로 자른 앞머리에 발그레한 뺨이 귀여웠다. 유리는 기억을 더듬었다.
“아, 혹시 좀 전의 금낭화?”
“예, 맞아요!”
자신을 기억해 준 것이 기뻤는지 그녀의 얼굴이 더욱 발갛게 상기되었다.
“너도 가의를 보러 온 거니?”
“아, 아니요…… 사실은 길을 잃어버려서 헤매던 중에 우연히 유리 선배가 보여서…….”
소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무대 뒤편은 미로라고 해도 될 만큼 길이 복잡해서 하급생들은 길을 잃기가 일수였다.
“계단에 속지 마.”
유리가 말했다.
“예?”
소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육각형의 방 다음에 나오는 오른쪽 계단. 꼭 대기실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되어있어.”
“아……!”  
소하가 눈을 크게 떴다.
“어쩐지 자꾸 되돌아와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도중에 천장에 있는 줄 잡아당기면 방이 회전하니까, 손대지 않는 게 좋아.”
소하는 열심히 유리의 말을 경청했다. 유리는 설명을 마친 다음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대화의 마침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은 소하는 황급히 말했다.
“저, 선배, 죄송하지만 한 가지만 더요.”  
“응?”
유리가 의아하여 물었다.
“손목 쓰는 법 좀 가르쳐주세요.”
“손목?”
유리가 되물었다.
“네. 항상 춤추실 때 이렇게― 왼쪽으로…….”
소하가 유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손목을?”
유리는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네. 저도 따라하려는데 잘 안돼서…….”
소하가 부끄러운 듯 말끝을 흐렸다. 유리는 멍하니 소하가 들어 올린 팔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유리가 한숨을 쉬었다.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네! 뭐든지.”
소하가 힘차게 대답했다. 어떻게 해서든 유리에게 배우고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유리는 맑게 빛나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 대신 린의 춤을 보고 어땠는지 말해줘. 내가 바로 뒤라 공연을 직접 볼 수 없거든.”

* * *

무대 뒤의 기다림은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보통 사람에게는 한 순간도 견디지 못할 초조함과 부담감이었지만 유리는 그것이 오히려 익숙했다. 그 극도의 집중 상태, 매 초마다 달라지는 상황 판단이 그녀를 한계까지 이끌었다. 그 상태에서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그녀 홀로서 움직일 뿐이었다.
유리는 수면 위로 몸을 떠올리듯이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객석은 조용했다. 그녀는 관객으로부터 조금 비스듬한 방향으로 몸을 향했다.
그녀는 음악과 동시에 움직였다. 너무 자연스러워 언제 시작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롭다. 그녀의 이름 그대로 그녀의 춤에는 적절한 균형과 조화가 배어있었다. 거울의 춤은 달의 춤과 정확히 대칭되는 15개의 동작들로 이루어졌다. 유리는 그 모든 동작들을 능숙하게 해냈다. 연속 회전을 다섯 번이나 돌고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생긋생긋 웃으며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서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거울 속을 헤엄치는 잉어. 그 자체였다.
마지막에는 우아하게 몸을 숙여 절을 했다. 객석에서 비명과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가의는 무대 옆 통로에서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서가 누구였지? 가의는 무대 뒤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을 대기자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큰일이다.
‘이것’ 다음에 추어야 하다니.































제 2장



1

아침 연습을 마치고 방에 돌아와 보니 물품들이 도착해 있었다. 연습용 천, 비단 옷, 부채, 장신구에 백단까지.
“뭐가 그렇게 많아?”  
가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좀 나눠줄까? 백단.”
유리는 향이 나는 나무 조각을 들어보였다. 가의는 고개를 저었다.
“난 사향이 더 좋아. 고맙지만 사양할게. 다음 수업 어디야?”
“서 2관.”  
유리는 금무를 위한 개인 교습을 화령에게 따로 받고 있었다. 원생들은 각자 특기인 춤을 하나씩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배울 수 있었지만 금무는 현재 유리 외에 배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워낙 어려운 춤이었기 때문이다.
“아, 맞다. 오늘 목요일이었지? 그럼 끝나고 보자.”
가의는 손을 흔들더니 바쁘게 뛰어가 버렸다. 홀로 남은 유리는 짐을 정리한 다음 연습실로 향했다. 화령은 벌써 와서 유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발표회도 끝났으니까 원래 하던 걸로 다시 돌아가자. 설마 그새 잊어버리진 않았겠지? 일단 처음부터 다시 해봐.”
화령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엄격했지만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기대가 서려있었다. 늘 십일금무를 전수할 제자를 찾았지만 눈에 차는 아이가 없어 아쉬워하던 중 마침 눈에 띈 것이 유리였다. 사실 유리는 금무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억지로 붙잡아 금무를 추려면 다른 춤들도 모두 알아야 한다며 월무, 검무, 화무까지 전부 새로 가르친 화령이었다.
"자, 바닥 밀면서 가볍게 난 다음 착지. 발 바꿔서 두 번 빠르게 돌고."
귓가로 화령의 말을 들으면서 유리는 처음 학원에 왔을 때를 생각했다.

* * *

유리가 처음 무용을 시작하게 된 것은 6살 때였다. 월영이 그녀를 학원에 데려갔다. 학원에는 온통 여자들뿐이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자기가 하는 동작을 그대로 따라하면 사탕을 주겠다고 했다.  
여자는 여러 가지 동작을 유리 앞에서 보였다. 부드럽게 걷다가, 갑자기 몸을 숙였다가, 뛰었다가 팔을 들어 올리고 제자리에서 몇 번 돌았다. 유리는 그것들을 외웠다가 그대로 했다.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설마, 사탕이 없는 건가. 걱정이 되어 물어보려는 찰나 그녀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선 갑자기 밖으로 나갔다. 몇 분 후 이번에는 여러 명의 여자들이 연습실 안으로 들어왔다. 전부 바닥까지 끌리는 비단옷 차림이었다.
유리를 본 아까의 여자는 미안하지만 다시 한 번 조금 전처럼 할 수 있겠냐고 했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가 새로운 동작을 선보였다.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그림자처럼 고요한 적막 가운데 녹아들던 중, 그녀가 갑자기 날아올랐다. 그리고 허공에서 멈췄다. 2, 3초쯤. 그리고 다시 내려왔다.
열한개의 비단의 춤, 십일금무의 앞부분이었다. 물론 그 때는 그런 걸 알지 못했다. 어쨌든 유리는 그 동작을 따라했다. 그녀가 한 것처럼 허공에 멈추어 있었다. 더 오래. 동작을 모두 마치자 갑자기 연습실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유리는 덜컥 겁을 먹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모두 심상치 않았다. 무언가 잘못된 건가하고 생각했다. 그 때 무리의 뒤에 있던 여자가 무언가 들고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긴 천을 가져 와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길고 하얀 천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어보라고 했다.
“뛰어넘어요?”
“그래. 이것이 강이라고 생각하고 뛰어넘어보렴.”
유리는 바닥에 놓인 천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아무리 봐도 천인데. 이게 강이라고? 유리는 그것이 움직이고 있다고 상상했다. 하얗게 꿈틀대는 기다란 강. 유리는 그것을 건넜다.
“움직임에 기품이 있어.”
“거의 본능적…….”
‘기품’이 뭐고 ‘본능’이 뭔지 유리는 그때 잘 몰랐다. 그냥 가만히 서있는데 한 여자가 다가와 말했다.
“너, 여기서 춤을 배우지 않을래?”  
“춤이요?”
유리는 뒤에 서있던 월영을 바라보았다. 월영은 웃으면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이라고 말했다. 유리는 여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만, 거기까지.”
화령은 춤추고 있던 유리에게 멈출 것을 지시했다. 유리는 즉시 동작을 멈췄다. 기본기가 탄탄해서 흠잡을 때는 없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할 만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열의가 없었다.
유리는 어릴 적부터 편차가 심했다. 마음에 드는 동작은 몇 시간이고 따라했지만 필요 없다고 생각되면 절대로 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날기만 연습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해도 그녀의 수준은 늘 다른 원생들을 웃돌았다.
즉, 좋아하는 것은 잘했지만 흥미가 없는 것에는 극단적으로 없었다.
화령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장 선생님? 제가 어디 틀렸어요?”
유리가 물었다.
“아니, 아니야. 수고했어.”
유리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가방을 가지러 연습실 구석으로 향했다. 그 때 화령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참, 이번 과제 말이야. 제비뽑기로 결정하기로 했다. 내일 아침 연습 때 뽑을 거니까 늦지 마.”

* * *


수업을 마친 가의는 무명 수건으로 이마에 흘러내린 땀을 닦았다. 세수를 하기 위해 세안대로 가려던 가의는 문 앞에 누군가 서있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남자였다. 키가 컸다. 날카로운 눈매가 어딘가 익숙했다. 그 남자는 가의에게 뜻밖의 말을 했다.
“혹시 여기 유유리라는 학생 있나?”
“아! 유리요? 저랑 같은 반이에요. 방도 같이 쓰고. 실례지만 누구세요?”
“강서현. 유리와는 남매지간이다.”
강서현……! 가의의 눈이 순간 커졌다. 강(姜)의 가문의 자제다. 유리의 부친이 바로 강의 가주였다니.
“저랑 같이 가요. 저도 곧 유리에게 가려던 참이었으니까요.”
“그럼 실례하지.”
할 말만 하고 끊는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데 익숙한 듯 했다. 마치 조각칼로 다듬은 것 같은 날카로운 이목구비가 돋보였다. 그러고 보니 유리와도 어렴풋이 닮은 것 같았다.
“오빠가 있는 줄 몰랐어요. 유리가 워낙 가족 얘기는 잘 안 해서.”
“…….”
가의가 싹싹하게 말했지만 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 2관으로 향하는 복도를 걸어가던 둘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예영이었다. 그녀는 흠칫 놀란 얼굴로 둘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쩐 일이야?”
지난 일로 인해 예영이 결코 좋게 보이지 않았기에 가의는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상관없잖아. 무슨 일로 왔든.”
예영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긴장한 듯 보였다.
“어머, 난 또 지난번처럼 물건 훔치러 온 줄 알았지. 너희 특기잖아? 뒤에서 비열한 짓 하는 거.”
가의는 개의치 않고 큰 소리로 말했다. 서현은 관심 없다는 듯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무언가 대꾸하려던 예영은 입술을 깨물고 복도 밖으로 달려 나갔다.
“뭐야, 진짜 수상하잖아.”
불만스레 중얼거린 가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걸까. 속으로 계속 의심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던 가의는 유리가 모퉁이를 돌아 나타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서현을 본 유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라버니.”
“유리. 오랜만이군.”
가의는 서현이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절대 남 앞에서 웃지 않을 남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입가가 살짝 느슨해지는 정도의 희미한 미소였지만 어쨌든 미소는 미소였다. “가주께서 지난 번 발표회 때 오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나도 미안하군.”
“아니에요. 가주님께 선물 잘 받았다고 전해주세요.”
왜 아버지라고 안하고 가주라고 하지? 유리는 그렇다 치고, 서현까지 호칭을 다르게 부르고 있었다.
“……정말 괜찮은가?”
서현이 유리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정말 유리의 얼굴은 어딘가 살짝 긴장한 듯 보였다.
“아, 아니에요. 이건 원장 선생님께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어서. 그러니까…….”
유리가 당황한 듯 말을 빨리 했다. 유리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처음 보았기에 가의는 또다시 놀랐다.
“흠…….”
서현이 말끝을 흐렸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인가?”
유리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너무 어리광 받아주면 버릇 나빠져요, 오라버니.”
서현의 눈매가 느슨해졌다. 감출 수 없는 상냥함이 그 속에 배어있었다.
“그렇다면…….”
둘은 그 자리에 서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때때로 웃기도 했다. 가의는 약간 떨어진 곳에 서서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지.”
“어머, 벌써요? 조금 더 있다 가시지…….”
유리가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처리할 일이 많아서. 그래도 얼굴이라도 봤으니 다행이군. 편히 쉬어라.”
서현이 유리의 어깨에 살짝 손을 스치고 뒤돌아섰다. 가의와 눈이 마주치자 짧게 목례했다. 가의는 서현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고 있는 유리에게 다가갔다.
“남매라 그런지, 정말 닮았네.”
“응? 외모는 별로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유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가의는 유리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유리의 이목구비는 잘 정돈되어 단정한 인상을 주었다. 유난히 긴 유리의 속눈썹을 볼 때마다 가의는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남들에 비해 숱이 적은 속눈썹이 그녀의 남모르는 고민이었던 것이다.
“부럽다…….”
“응?”
“아니, 아니야.”
자신도 모르게 생각을 입 밖으로 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의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그리고 외모가 아니라 분위기 같은 게 전반적으로 닮았어.”
“음…… 그건 그럴 수도 있겠네. 오라버니의 성격은 나랑 비슷하니까.”
유리가 애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왜 너희 오라버니는 아버지를 가주님이라고 해? 집안 전통인 거야?”
가의가 물었다.
“아, 그건 오라버니가 나를 배려해서 하는 거야.”
“배려?”
“응. 솔직히 나는 상관없는데, 오라버니는 자기만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미안했나봐. 어릴 때부터 그래서 이제는 버릇같이 됐어.”  
유리가 옛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성(姓)도 호칭도 어느 한쪽에게만 주어진 이복남매의 사이에는 아무리 가까워도 넘을 수 없는 선이 존재했다. 반드시 지켜야하는, 조심스러운 예의 같은 것이.  
“우와, 대단한 오라버니네. 나 같으면 귀찮아서라도 그렇게 못하겠다.”
가의가 감탄한 어조로 말했다.
“역시 난 세세한 배려 같은 건 잘 못하겠더라. 나랑 안 맞아.”
“넌 너대로 좋은 형제가 되었을 거야.”
유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가의가 문득 소리쳤다.
“아까 복도에서 신예영이랑 마주쳤는데, 걔가 여긴 왜 있는 거지?”
좀 전의 만남을 떠올린 가의가 말했다. 본능적인 경계심이 다시 되살아났다.
“설마 이번에도…….”
“그건 아니야.”
유리가 옆에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가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유리를 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아?”
“원장 선생님이 끝나고 면담이 있다고 했거든. 아마 그것 때문에 왔을 거야.”
“아…… 정말?”
가의는 한숨을 쉬었다.
“난 또 이번에도 못된 일을 꾸미나 했네.”
“응…….”
유리의 대답은 건성이었다. 어딘가 정신을 다른 데 놓고 있는 것 같았다. 가의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유리는 흠칫 놀랐다.
“아니…… 저, 원장 선생님이…….”
그녀가 우물쭈물 말을 흐렸다.
“원장 선생님? 잠깐, 그러고 보니 너 좀 전에 무슨 이야기 들었다고 하지 않았어?”
가의가 물었다.
“응.”
유리는 조용히 긍정했다.
“무슨 이야긴데 그래?”
가의가 재촉했다. 유리는 말하기가 어려운 것 같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유리는 결국 포기하고 털어놓았다.
“이번 과제, 제비뽑기래.”
가의는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놈의 모란 공포증은 아직도 안 나은 거니…….”
유리가 모란의 춤을 극도로 꺼리게 된 계기는 입원식 첫 날의 시연회였다. 그 전까지 예비생으로 불리다가 15살이 되어 정식 원생으로 인정받게 된 연습생들을 대표하여 유리가 전 원생들 앞에서 춤을 선보였다. 그 때 추었던 춤이 모란의 춤이었다.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움직임이 연주에 한 박자 늦었다. 언뜻 봐서는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차이였지만 유리는 그 균열을 민감하게 느꼈다.
급한 마음에 일단 날았다. 날기 동작은 그녀의 특기였다. 최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기술에 끌어 모을 작정이었다. 객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때 정말 대단했었지.”
가의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유리가 고개를 푹 숙였다.
“다들 그렇게 아름다운 춤은 처음 보았다더라.”
그것은 유래가 없을 만큼 정교하고 화려한 춤이었다. 또한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모란의 춤이 아닌 유리의 창작이었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 뒤로 원장 선생님께 불려가서 혼난 거 생각하면 지금도 자다가도 놀라서 깨.”
유리가 지친 어조로 고백했다. 가의가 가엽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운 내. 설마 걸리기야 하겠어? 다른 춤도 많은데.”
“그럴까……?”
유리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2

“잠깐만, 너 머리끈이 끊어지려고 해.”
가의의 말에 반사적으로 머리 뒤를 더듬었다. 아슬아슬하게 연결되어 있던 비단 끈이 손을 대자마자 툭 끊어졌다. 유리는 끊어진 머리끈을 손에 들고 한숨을 쉬었다.
“끈이 닳은 것도 모르고 있었네. 나 은근히 둔한가 봐. 저번에도 누가 말해주기 전까지 난 내가 손목을 꺾는 버릇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니까.”
“어? 다른 건 그렇다 치고 그건 네 특징인 줄 알았는데.”
유리는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아니야!”
“그랬어? 그거 꽤 괜찮던데. 그냥 계속 하는 게 어때?”
가의가 태평한 어조로 말했다. 린이 옆에서 작은 소리로 쿡쿡 웃었다. 유리는 가볍게 린을 흘겨보았다.
“린 너까지…….”
“죄송해요, 선배. 그런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난 번 발표회 이후로 린은 자신감을 많이 되찾은 모습이었다. 유리는 체념한 채로 말했다.
“린까지 그렇게 말한다면야…… 머리끈 좀 빌려 줄래?”
“네.”
린이 씩씩하게 대답하고 단장함을 열었다. 단장함 안에는 색색의 끈들이 머리빗과 함께 들어있었다. 린이 그 중 하나를 꺼냈다.
“선배, 여기 있어요.”
유리는 머리끈을 건네받았다.
“고마워.”

*  *  *

미하가 제비뽑기함을 들고 왔다.
“자, 한 명씩 나오렴.”
가의가 먼저 나갔다. 함 속에 바로 손을 집어넣어 여러 번 접힌 종이를 뽑았다.
“검무예요.”
가의가 종이를 펴서 보더니 말했다. 미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린이 할래?”
린은 조심스럽게 함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이윽고 제비를 하나 골랐다.
“월무―달의 춤.”  
린이 종이에 적힌 글을 읽었다.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퍼졌다.
“둘 다 특기인 춤이 뽑혔구나. 운이 좋네. 유리는 뭐가 걸릴지 궁금한데?”
유리는 조용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신중하게 고려하는 표정으로 제비를 뽑은 그녀는 종이를 가의에게 건네주었다.
“어?”
“직접 못 보겠어. 대신 읽어줘.”
가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유리를 바라보더니 기꺼이 종이를 받아들었다. 글자를 읽은 그녀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가의는 재미있다는 미소를 지으며 종이에 적힌 글자를 크게 읽었다.
“화무―모란의 춤.”

*  *  *

“그건 징조였어.”
남관 안으로 들어서면서 유리가 말했다.
“뭐가?”
“아침에 끈이 끊어진 거. 틀림없이 불길한 일이 일어난다는 경고였던 거야.”
“허! 그럴 리가 있냐?”
가의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그 때 그녀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잠깐, 이게 무슨 냄새지?”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뭔가 비릿한 냄새가 나는데…….”
유리도 멈춰 섰다. 그와 동시에 안에서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온 관에 울릴 만큼 높은 비명소리였다.  
“우리 방 쪽이야!”
둘은 서둘러 달려갔다.  
“린!”
벽에 기댄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린이 보였다. 그녀에게 다가가려던 유리가 흠칫 멈췄다.
“소하……?”
발표회 날 무대 옆 통로에서 만났던 아이, 소하였다. 그녀가 린의 발치에 누워있었다. 린이 울음을 터트렸다.
“복도에 쓰러져 있었어요. 어디 아픈 줄 알고 걱정돼서 다가갔는데…… 피, 피가…….”
그녀가 소하의 상체를 가리켰다. 왼쪽 가슴에 꽂혀있는 하얗게 빛나는 은장도가 보였다.
“이게 대체…….”
가의가 아연히 중얼거렸다.
“죽은 거야……?”
유리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활짝 열려있는 방문을 흔들었다.
방 안은 난장판이었다. 누군가 서랍장 안을 온통 헤집어놓았다. 그 중에서 보란 듯이 방 한가운데 놓여있는 것은 갈가리 찢어진 가의의 비단옷이었다. 가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이런 짓을……!”
문득 유리의 시선이 꼭 쥐고 있는 소하의 오른손에 향했다. 그녀는 소하의 손을 조심스레 풀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복잡하게 장식된 산호 노리개였다.


3

예영은 이튿날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학원을 나갔다. 집에서 마중을 보내어 그녀를 데려갔다. 선생님들에게 사건을 알리기 전, 유리는 가의와 함께 노리개를 들고 예영을 찾아갔다. 그들의 추궁에 그녀는 가의를 보며 소리쳤다.
“다 너 때문이야!”
“나 때문이라고?”
가의가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네가, 네가 서현님 앞에서 나를 모욕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어! 그 계집애가 방에서 나오는 걸 봐버려서, 그래서 죽인 거라고!”
예영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말을 할 때마다 그녀의 두 눈은 점점 기이한 빛을 띠었다. 마침내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아, 서현님…….”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흐느꼈다.
“오라버니를…….”
유리가 조심스레 뒷말을 삼켰다.
예영의 집안이 워낙 고위 귀족 가문이라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살해당한 소하의 가문보다 더 높은 귀족이라는 사실이 사건을 조용히 수습하게 했다. 만약 그 반대의 경우였다면 이대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가라앉은 분위기에서도 학원의 수업은 계속됐다. 그러나 원생들의 표정에는 어딘가 두려움이 서려있었다. 평소보다 실수도 잦았다. 결국 그날의 수업은 안하느니만 못한 것이 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얘가 어디 갔지?’
가의는 유리의 모습을 계속 찾고 있었다. 하루 종일 그녀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연습실들을 하나하나 돌아다니던 가의가 유리를 발견한 것은 그녀가 막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텅 빈 연습실에 홀로 서있는 유리의 뒷모습이 보였다. 문가에 서서 그녀의 이름을 외쳐 부르려던 가의는 문득 위화감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유리는 눈을 감은 채로 가만히 서있었다. 그녀 주위에만 주변과 다른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가의는 숨을 죽였다. 유리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힘차게 날아오른 다음, 소리 없이 착지했다. 잠시의 간격도 없이 회전이 이어졌다. 긴 옷자락이 돌 때마다 발목에 휘감겼다가 풀어졌다. 팔을 뻗어 시선을 고정시켰다. 손끝의 모양이 새의 날개처럼 정교했다. 가의는 더 이상 보지 못하고 복도로 나왔다.
‘저것이, 십일금무…….’
머릿속이 멍했다. 저런 것은 본 적이 없었다. 문득 이상한 느낌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더니 손이 떨리고 있었다. 가의는 얼른 다른 쪽 손으로 손목을 붙잡았다. 죄어드는 느낌이 아팠다.

* * *

연습을 마치고 나온 유리는 복도에 서 있는 가의를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어?”
유리에게 묻는 가의의 목소리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유리는 당황하여 되물었다.
“그렇게 라니…… 무슨?”
“넌 기품이 있어. 남들은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그리고 너는 생각을 하지 않고 춰.”
공중에서 둘의 시선이 부딪혔다.
“난 너같이 되고 싶어.”
가의가 쥐어짜는 듯이 힘겹게 말했다. 유리는 괴로워하는 가의를 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같은 건 되지 마.”
깊은 자조가 담긴 어조였다. 가의는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오히려 너랑 린이 더 부러워. 너는 검무에, 린은 월무에 푹 빠져 있잖아. 그거 좋아서 하는 거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할 만큼.”
“응. 너는 안 그래? 금무, 좋아서 하는 것 아니었어?”
“나는 그냥 선생님이 시키니까 하는 것일 뿐이야. 저번에 발표회 보면서 솔직히 놀랐어. 나는 너희처럼 즐겁게 춘 적은 없는 것 같아.”
“무슨, 그렇게 잘 추면서.”
“아니야, 난 그냥 틀리지 않는 데만 신경 쓰니까 잘 추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그건 잘 추는 게 아니야.”
유리가 지친 얼굴로 미소 지었다.

* * *

유리는 자신의 처지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었다.
비록 정식으로 결혼하지 못했으나 강의 가주는 그녀의 어머니를 깊이 사랑했다. 냉철하기로 유명한 그였지만 단 한명, 월영에게만은 지극히 따뜻했다. 게다가 그의 도움으로 그녀들은 부족함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유리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어릴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유일하고도 지속적으로 열망하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 * *

“그렇게 말했어요.”
가의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직접 보셨어야 해요. 이건 춤을 잘 추고 못 추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살고 싶어 하지 않는 눈이었다고요.”
다시 그 때의 상황을 떠올린 듯, 그녀의 눈이 금속처럼 딱딱한 빛을 띠었다. 그녀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앞에 앉아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어떡하실 거예요? 원장 선생님.”
화령은 조용히 가의를 마주보았다.
“아끼는 제자잖아요? 이대로 둘 수는 없어요.”
“유리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아이야.”
화령이 가의의 말을 잘랐다. 가의는 불타는 눈으로 화령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출생의 탓이겠지. 유리의 가문이 어디인지 아니?”
“강의 가문. 어둠이라 불리는, 황실 다음으로 높은 가문이죠.”
“그래. 잘 알고 있구나.”
“황실의 정적 암살, 숙청을 맡는 이면의 그림자. 그게 왜요?”
가의의 어조는 거리낌 없이 당당했다. 화령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왜라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이 나라에 드물 거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예요. 유리가 원해서 그 집안에 태어난 것도 아니잖아요.”
화령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거야 그렇지. 다만 그 피가 영향을 미쳤을 지도 모른다는 얘기야. 월영이 강의 가주와 만난다고 했을 때, 나는 무척 걱정했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그 집안의 어둠이 그녀 또한 사로잡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화령의 눈이 먼 곳을 보는 듯 가늘어졌다.
“결국 내 예상대로 되었지만, 나는 월영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어. 그녀의…… 뭐라 해야 할지, 순수함? 천진함? 그것은 나름대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더구나. 하기야 원생 시절부터 알고는 있었다만.”  
마지막 말은 어딘가 골치 아픈 어조로 덧붙여졌다.
“유리는 그 양 극단의 기질을 부딪치고 융합하는 의무를 타고났어. 그건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일이겠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가 그 일을 무사히 마칠 때까지 지켜보는 것뿐이야.”  

* * *

유리에게 춤은 단지 자기 방어일 뿐이었다. 기품이니 뭐니 해도, 결국 남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본능적인 몸짓이 그렇게 보인 것이었다. 유리는 한 번도 남에게 자신을 온전히 드러낸 적이 없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녀는 자신이 홀로 있는 존재라고 느꼈다. 또래보다 일찍 자아가 발달하였기에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그나마 그녀가 받아들인 부분은 이복오빠인 서현과의 애정이었다. 그러나 그 외의 타인에 대해서는 지독하리만큼 무심했다. ‘모두 다 허상이 아닌가.’ 그것이 그녀가 가진 인간관계에 대한 인식이었다.

* * *

다시 새에 대한 꿈을 꾸었다. 아니, 상자에 대한 꿈이라고 해야 하나. 유리가 상자를 하나씩 열 때마다 그 크기는 점점 작아졌다.
‘뭐가 들어있을까.’
마침내 눈앞에 놓인 상자는 손 안에 들어올 정도로 작았다. 직감적으로 이것이 마지막 상자라는 것을 알았다. 유리는 두근대는 가슴으로 상자를 열었다.
안은 비어있었다.
유리는 허탈한 마음으로 상자를 내려놓았다. 머릿속이 멍했다. 자기 자신까지 완전히 비워진 느낌이었다.
‘이것이, 끝?’
점차 감정이 밀려왔다. 그 감정은 분노였다. 그 텅 빈 상자가 자기 자신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어째서!’
유리는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이렇게 화가 난 적은 처음이었다. 격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유리의 눈에 주위의 모습이 들어왔다.
11개의, 각기 다른 크기와 무늬, 색깔을 가진 상자들.
유리는 그것들을 내려다보았다.
‘11개.’
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
11개의 상자. 11개의 방. 11개의 세계.
11개의 비단.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내용이 아닌, 바로 형식 그 자체였다. 유리의 눈빛이 깊어졌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유리는 상자들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단편 십일금무(十一錦舞) sylvir 2010.02.17 0
1656 중편 [뱀파이어는 완벽하지 않다] 1.삼차신경통(4) 하늘깊은곳 2010.02.19 0
1655 단편 태평요술서1 먼지비 2010.02.20 0
1654 단편 나이팅게일 니그라토 2010.02.21 0
1653 단편 망각의 숲 sFan 2010.02.21 0
1652 단편 상처입고 상처를 잊어버린 남자는 고통을 이겨내 상처를 치료한다. 김진영 2010.02.22 0
1651 단편 군대갈래? 애낳을래?4 볼트 2010.02.24 0
1650 중편 [뱀파이어는 완벽하지 않다] 2.외출(1) 하늘깊은곳 2010.02.24 0
1649 단편 공원여행: 공원 옆 아파트 꼬마. (수정) 김진영 2010.02.26 0
1648 중편 [뱀파이어는 완벽하지 않다] 2.외출(2) 하늘깊은곳 2010.03.01 0
1647 단편 성형외과가 사라졌다. 하늘깊은곳 2010.03.02 0
1646 중편 [뱀파이어는 완벽하지 않다] 2.외출(3) 하늘깊은곳 2010.03.06 0
1645 중편 LAST SCENE <상> 소풍 2010.03.09 0
1644 단편 Antifreeze1 빈군 2010.03.12 0
1643 중편 [뱀파이어는 완벽하지 않다] 2. 외출(4) 하늘깊은곳 2010.03.12 0
1642 단편 어떤 결핍. 하엘 2010.03.13 0
1641 단편 기계씨앗 살인두부 2010.03.14 0
1640 단편 내 아내의 남편은 누구인가?1 미노구이 2010.03.15 0
1639 단편 밤꽃나비-변태 orion 2010.03.15 0
1638 단편 [엽편]거래 먼지비 2010.03.15 0
Prev 1 ... 60 61 62 63 64 65 66 67 68 69 ... 147 Next